솔로몬의 잠언 해석의 열쇠_(잠언 10:1~32) - Daum 카페
◈솔로몬의 잠언 해석의 열쇠 잠언10:1~32
◑잠언 10장~22장까지는 무려 375개의 경구(警句)들이 쏟아져 내리듯 기록되어 있습니다.
매절마다 지혜와 어리석음이 삶에 적용되는 구체적 양상을 대칭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 경구들 각각에는 눈에 띄는 연관성이나 맥락이 없기 때문에,
산발적으로 기록된 375개의 경구들을 기억하여 실천하기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해보입니다.
그러나 희한한 점은 이렇게 연관성과 맥락이 결여되고
산발적으로 던져지듯이 제시된 경구들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단어가 존재합니다.
바로 ‘의인’이라는 단어가 해석의 열쇠가 됩니다.
1장부터 9장까지는 지혜를 의인화하여 그 중요성을 강조해왔습니다.
오늘 10장부터 22장까지는 매 구절이 대칭구조를 이루면서
의인과 악인, 지혜와 어리석음의 양상을 비교합니다.
1장부터 9장까지가 하나님 경외를 바탕으로 하는 지혜의 본질성이나 지혜를 구해야하는
필연성이나 당위성을 길게 서술하였습니다.
한편 10장부터 22장까지는 의인과 악인의 대조를 통해서
지혜와 어리석음이 삶의 구체적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악인의 어리석음과 의인의 지혜가 적용되는 양상이 쌍을 이루며 375개나 나타납니다.
우리가 오늘의 번제 시간에 375개의 경구들을 모두 살펴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차제에 분명히 해둘 것은 있습니다.
▲오늘 설교의 목적은 성경강해설교나 성경공부에 있지 않습니다. 십자가가 목적입니다.
매일 아침 십자가를 지금 나의 사건으로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기록된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오늘 나의 사건으로 재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말했고,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했던 생각과 확신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근거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처럼
신구약 성경이 말하는 모든 구절은 그 의미가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하는 것은 해당되는 구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어지는 길을 찾아내는 것이 됩니다.
성경의 어떤 구절이든지 십자가로 귀결되는 의미의 길 안에서
역사적으로 2000년 전에 일어났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지금 나의 사건으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또한 기독교의 선포이고,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설교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오늘의 번제에서 375개의 경구를 모두 살펴볼 수는 없지만,
모든 경구를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열쇠를 제시할 수는 있습니다.
375개의 경구들 중에는 상식적으로 쉽게 이해가 되는 구절도 있고,
해석이 어려운 구절도 많습니다. 그러나 쉬워 보이는 구절도
그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앞뒤의 맥락을 살펴보아야 하는데
경구들 사이에는 특정한 맥락이나 논리적 일관성이 없이
각 구절들의 주제가 럭비공 튀듯이 산발적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하물며 이러한 375개의 경구들을 실천적으로 다 기억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경구들의 이면에는 기가 막힐 정도로 일관되게 흐르는
단 하나의 주제가 있는데 바로 ‘지혜를 생활화하는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더 자세히 표현하자면 ‘지혜를 생활화하는 의인과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악인’입니다.
의인과 악인의 대칭구조도 의인의 모습을 부각시키기 위한 기법입니다.
‘의인’이라는 주제가 산발적으로 흩어져있는 듯한 375개의 옥구슬 같은 구절들을 꿰뚫으며
하나의 아름다운 목걸이를 만들고 있습니다.
◑오늘은 솔로몬의 잠언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되는
‘의인’이라는 개념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또한 ‘의인’이라는 개념에 입각한 해석의 예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예를 통해 나머지 구절들도 해석해보시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해석의 지침이 없다면, 잠언을 해석함에 있어서
큰 오류가 생겨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10:15~16에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요, 가난한 자의 궁핍은 그의 멸망이니라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고, 악인의 소득은 죄에 이르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주석서들도 이 구절을 해석함에 있어서 우리의 상식선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심지어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요’라는 말씀을
‘단순히 많은 재물은 삶의 난관에서 나를 지키는 성이 될 수 있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서
‘부지런하게 재물을 모으기에 힘쓰라’는 식으로 해석을 했습니다. 문자대로 옮긴 것입니다.
주석을 읽어보면 ‘로맨틱하게 낭만적인 마음가짐을 가지고
재물이 없어도 된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라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주석가가 마6:24절의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라는 말씀에 대해서는 재물을 섬기는 마음가짐에 대해서 신랄한 비판을 합니다.
같은 주제에 대해서 일관되지 못한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절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솔로몬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는 의인의 개념을 전제해야만 합니다.
솔로몬의 생각을 의인이라는 개념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전제를 가질 때에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요’라는 말씀도
바르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솔로몬이 생각하는 지혜와 연관성 안에서의 의인의 모습이란 어떤 것일까요?
이런 의인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명확한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솔로몬은 20세에 왕이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습니다.
여기서 지혜는 하나님의 판단을 듣기 원하는 마음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의 판단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을 갖기를 바랐기에
일천 번제를 드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솔로몬이 생각하는 의인의 모습입니다.
솔로몬이 생각하는 의인은 하나님의 판단을 듣는 마음을 얻기 위해서
일천 번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선민의 번제의 특징은 번제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일천 번제를 드렸다’라는 것은 번제단에서 죽어간
1천 마리의 황소와 자신을 동일시한 것입니다.
일천 번 자신을 죽이면서 간구한 것이 ‘하나님의 판단’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죽이지 않으면, 하나님의 판단을 들을 수 없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원죄의 습성은 스스로 판단합니다.
솔로몬은 그렇게 스스로 판단하려는 습성을 일천 번 죽였습니다.
이것이 솔로몬이 생각하는 지혜와 연관된 의인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을 듣기 위해
일천 번 자신을 죽이는 자를 의인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셔야만 한다는 경외심을 일천 번제를 통해 드러냈습니다.
▲솔로몬은 단지 하나님의 판단을 구했을 뿐인데
하나님이 마음을 채우시며 생명을 주셨습니다.
‘생명을 얻었다’라는 것은 곧 마음이 하나님으로 배부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솔로몬이 구하지도 않았던 세상의 부귀영화까지도 약속해주셨습니다.
솔로몬은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백성들에게 의인의 모습을 가르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전제를 가지고 살펴보자면 앞서 보았던 잠1장~9장의 주제도
단순히 지혜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혜의 붓으로 그려낸 의인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의인’이라는 것이 곧 잠언의 주제가 됩니다.
단순히 교리나 훈계 속에서 이상으로 삼는 의인의 모습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드러나야만 하는 의인의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 의인은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판단을 듣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을 듣기 위해서는, 일천 번제를 통해 나의 판단을 죽이는 자입니다.
잠언서 전체의 주제는 ‘의인의 삶은 지혜로울 수밖에 없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혜를 호소하는 궁극적 의미는 바로 의인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2장까지 계속되는 375개의 경구들은
삶에서 만나는 경우들에 지혜가 적용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의인이 실천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솔로몬이 생각한 의인의 개념을 전제로 삼지 않는다면
이 375개의 경구들을 결코 정확하게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전제를 가지고 15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살펴봅니다.
잠10:15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요 가난한 자의 궁핍은 그의 멸망이니라’
문자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시편에서 하나님을 ‘산성이나 요새’로 표현한 말씀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렇게 보자면 하나님이 아닌 재물을 견고한 성으로 일컫는 이 구절은 부당하게 느껴집니다.
따라서 주석서들처럼 이 구절을 문자대로 해석하면 곤란합니다.
주님께서도 마6:24절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시며
하나님과 재물을 대비하여 말씀하신바 있습니다.
또한 마19:24절에서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재물을 붙잡고 있는 한,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에 들어오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도 계3:17절에서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재물을 경계했습니다.
실제 라오디게아 교회는 재물로는 부자였으나 하나님을 갖지 못하여 마음이 가난했던 것입니다.
‘가난한 자의 궁핍은 그의 멸망이니라’라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거지 나사로는 멸망당해야 마땅한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고 부자는 재물이 견고한 성이 되기는커녕
지옥에 떨어져서 물 한 방울을 갈구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요 가난한 자의 궁핍은 그의 멸망이니라’라는 말씀에는
의인이라는 개념이 전제되어 있음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잠언의 1장부터 9장까지는 지혜를 은금 진주 보화보다 귀한 것으로 소개하였습니다.
은금 진주 보화는 사람들이 재물 중에서도 가장 값지게 여기는 것들입니다.
이것들보다 지혜가 귀함을 말하면서 재물을 소유하는 것과 같은 개념에서
지혜를 소유하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혜와 재물의 비교함을 통해서
소유할 수 있는 가치로서 지혜가 탁월한 재산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므로 10:15절이 말하고자 하는 ‘부자의 재물’은
단순히 은금 진주 보화 같은 세속적 가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지혜를 재화의 가치를 넘어서는 가치가 있는 재물로 표현하였던 솔로몬의 입장에서
부자는 곧 지혜를 많이 가진 의인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부자를
재벌의 개념으로 받아들인다면 정말로 큰 오해를 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375개의 경구들은 하나도 예외 없이 이러한 전제에 기반합니다.
일천 번제를 드리는 의인의 개념이 작동되고 활성화되고 있기 때문에,
산발적으로 던져진 것 같은 경구들에 하나의 주제가 관통하고 있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이것을 뚜렷하게 부각시키기 위해서, 악인의 모습을 대칭적으로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봅니다.
10:5절에 ‘여름에 거두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나
추수 때에 자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상식적으로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크게 교훈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낯설지 않습니다. 우리는 가을에 추수를 하지만
고대 근동지방에서는 보리와 밀은 여름에 추수하는 작물이었습니다.
따라서 ‘여름’과 ‘추수 때’는 같은 시기를 의미합니다.
결국 추수 때에 거두는 자는 지혜롭다고 한 것인데,
우리도 늘 그렇게 살아왔기에 이것이 특별한 의미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추수 때에 자는 자는 부끄럽다’라고 했는데
농경사회였던 우리에게 있어서는 특히 추수 때에 잔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애들까지 다 동원해서 이삭을 줍고 단이라도 옮겨놔야 할 때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굳이 지혜라고까지 해야 하겠습니까마는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도 의인의 개념을 바탕에 놓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판단만을 구하며 사는 의인에게 추수 때의 곡식을 거두는 모습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정하신 의도를 수행해 가시는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곡식이 익어 거둘 때가 되었다’라는 것은 의인들이 하나님의 때에 맞춰
결실을 이룬다는 것을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을 구하며 상번제를 통해 날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판단을 따라 살다가, 하나님의 때가 되면 결실을 맺습니다.
반면에 ‘추수 때에 잠자는 자’로 비유된 악인의 모습은 이와 반대됩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결실조차도 거둬들이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애초에 하나님의 판단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판단의 연속선상에서 이루어진 결실의 때에도 참여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악인의 생애에는 마음과 삶에 어떠한 풍요도 주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악인의 삶은 돈은 벌더라도 마음은 항상 굶주려있습니다.
창세기 1:2절에서 하나님의 창조가 이루어지기 전에 세상에 대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판단이 미치지 않는 악인의 삶은, 결실이 없는 흑암과 공허가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본문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의인의 개념이 바탕에 있어야만 합니다.
의인의 개념을 빼놓고 해석하면, 어떠한 지혜의 말씀도 하나마나한 소리가 됩니다.
추수 때에 추수하는 것은 농경사회에서 살아가는 자로서
너무나 당연한 소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다른 부분을 예로 들어봅니다.
사무엘하 11장에 보면 밧세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늘 추수에 대한 비유를 염두에 두고 이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1절을 보면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여기서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었다’라는 것은 단순히 전쟁하기에 적합한
연중의 특정한 시기를 일컫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승리의 결실을 준비하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쟁의 승리라는 열매가 익어서 추수할 때가 되었는데,
마음에서 하나님을 잃었던 다윗이 그 추수에 임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2절을 보면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저녁 때가 되어서야 침상에서 일어났다’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추수 때에 잠자는 아들’이 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의 연속성으로부터 이탈하고 나니,
세상의 가치가 눈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결국 마음먹은 대로 밧세바를 범함으로써 자신은 물론이요
이스라엘에 막대한 부끄러움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잠언의 주요 저자인 솔로몬은, 이렇듯 ‘추수 때의 잠을 자는’ 것과 같은
악인의 행위로 인해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악인의 행동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강렬한 경계를 가지고 살았던 자가
솔로몬이었습니다.
의인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결실을,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추수하는 자들입니다.
반면 솔로몬은 아버지의 죄로 인해 태어난 아들로서
누구보다도 강렬한 죄의식을 가지고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죄인에 대한 의식이 강렬한 만큼 의인에 대한 열망 또한 강렬했습니다.
그랬기에 20세에 왕이 되었을 때에 일천 번제를 통해 자신의 판단을 죽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다윗이 자랑스럽게 여기던 맏아들인 압살롬이 왕이 되고자
아버지를 죽이려 했던 것과 대비되는 모습입니다.
솔로몬은 정통성을 가지고 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의 재판도 판단할 능력이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또한 의인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일천 번제를 드림으로써 자기 자신을 죽였습니다.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깨달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단 한 순간도 하나님의 판단을 듣지 않으면, 아버지가 실수한 것처럼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판단을 일천 번이나 죽이면서 하나님의 판단을 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번제단에서 자신을 죽이며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판단을 구하며 살아가는 자가 의인임을 잠언 전체를 통해서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그림의 가장 큰 특징은 지혜입니다.
의인의 삶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지혜는 바로 나의 판단을 죽이고
하나님의 판단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도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솔로몬이 375개의 경구들을 통해서 그려내고자 했던
의인의 모습에 날마다 가까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솔로몬의 일천 번제를 날마다 드림으로써,
솔로몬이 간절히 그려내고자 했던 의인의 모습을 기필코 실현하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