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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진실 요일4:7-12
길어서 전략 주1)
◑사랑에 관한 세 번째의 진실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가족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
가족을 제대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고
하나님을 참되게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사랑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자신의 사랑의 능력에 절망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요일4:7-8)
참된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안다’라고 할 때의 ‘앎’은 지식적인 앎이 아닙니다. 체험해서 아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그 사랑을 체험해야만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고,
보이지 않는 분의 사랑을, 내가 어떻게 체험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오늘 말씀은 이 질문에 대해 대답을 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드러났으니,
곧 하나님이 자기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로 말미암아 살게 해주신 것입니다.’ (9절)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고 만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면, 예수님의 십자가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 사랑 앞에서 항복하고 그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분을 사랑하는 만큼 우리 속에 사랑은 커지고,
그 사랑의 분량만큼 우리는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랑에 관한 첫 번째 진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병든 마음이 치료 받아야만 제대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수양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결심한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중에, 사랑하는 가족에게 아픔을 주고는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결심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또 다시 상처를 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내면이 속속들이 죄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치료할 수 있는 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밖에는 없습니다.
앞에서 우리는 ‘우리가 사랑을 믿지 못한다’는 진실을 확인했습니다. 주1)
그래서 떠나보내지도 못하고, 떠나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십자가를 통해 참된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깊이 취하면,
우리는 비로소 사랑을 믿을 수 있습니다.
사랑을 믿고 떠나보낼 수 있고, 또한 떠날 수 있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아기 모세를 바구니에 넣어서 나일 강에 흘러보내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자녀들을 멀리 보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 단락 펀 글)
-군대에 입대하는 아들,
-출가하는 딸,
-해외 유학을 떠나는 자녀,
그럴 때 여러분 믿음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자녀가 취직이 되어 출근할 때 기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자녀가 직장에서 겪을 일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조금 무거워집니다.
직장생활에 힘든 일, 비인간적인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믿음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하신 뜻이 있어서 이 세상에 보낸 내 자녀,
하나님께서 특별한 뜻이 있어서 내게 맡긴 내 자녀, 하나님께서 보호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것이다' 이런 믿음 속에서 보내시기 바랍니다.
모세의 부모가 하나님이 인도하실 것을 믿고 모세를 나일 강으로 보낸 것처럼
믿음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어느 집안의 아들이, 공부를 하느라고 늦게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건강에 약한 부분이 있는 아들이었습니다.
그 아들이 입대한 날 저녁에 제가 그의 동생을 우연히 만났습니다.
"오늘, 형이 입대할 때 어머니 많이 우셨지?"
"아네요. 형을 한 번 꼭 안아주시고 '잘 다녀와라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것으로
믿는다'하고 기도하고 담담하게 보내셨어요, 나 우리 어머니 다시 봤어요!"
여러분, 이 어머니처럼 믿고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진 모세의 부모를 하나님은 어떻게 축복하셨습니까?
우선 바로의 딸에게 연민의 마음을 주셨습니다.
출2:6절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
그리고 바로의 공주는 모세를 아들로 삼아 키웁니다.
모세라는 이름도 바로의 공주가 지어준 것입니다. "건져 냄"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다" 그래서 이런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자녀를 그 모든 위험에서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사랑보다 더 앞서야 할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다가오셔서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 21:15)고 물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내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아내를 제대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자식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자식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원리입니다.
저는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던 초기에 본회퍼(Bonhoeffer)의 <나를 따르라>(Following Jesus)
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 때 제게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이
마10:34절 이하의 말씀에 대한 해석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 중 가장 이해하기 힘 든 말씀입니다.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 나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와 맞서게 하고,
딸이 자기 어머니와 맞서게 하고, 며느리가 자기 시어머니와 맞서게 하려고 왔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 것이다.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34-37절)
본회퍼의 해석에 의하면, 인간의 사랑은 너무나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인간 사회가 유지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사랑으로, 인간의 사랑을 대치하는 것이 진정한 해결책입니다.
모든 인간관계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끼어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가 맺은 모든 관계를 끊으시고
그 사이에 오셔서 다시 관계를 맺어 주셔야만 희망이 있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 해석을 읽고는 ‘바로 이거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맺은 혹은 맺을 모든 사랑이 영원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가장 앞세워야 한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새겼습니다.
부모님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 부모님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고,
아내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 아내를 제대로 사랑할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자녀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 자녀들을 올바로 사랑할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젊은 시절이었지만, 제게는 그 믿음이 매우 강했습니다.
얼마나 그 믿음이 강했던지, 제가 아내에게 청혼을 할 때,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평생토록 당신을 사랑하도록 힘쓰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당신을 더 사랑할 거라고 기대하지는 마십시오.
제게는 예수님이 더 중요합니다.”
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제 아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니, 맞을 겁니다.
참, 지금 생각하니, 제가 해도 너무했습니다.
청혼하는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어도 분수가 있지요.
그것도 청혼이라고 받아들인 제 아내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나중에 아내가 그럽니다. 나도 믿는 사람이니 뭐라 말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기분이 이상하더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말은 그렇게 하고, 그것이 진리라고 믿기는 했는데,
그렇게 실천하는 일에는 참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26년의 결혼 생활 중에 저는 사랑에 많이 실패를 했습니다.
아내에 대한 사랑에도 그랬고, 부모님에 대한 혹은 형제들에 대한 사랑에도 그랬으며,
자녀들에 대한 사랑에도 그랬습니다.
그렇게 실패를 거듭해 가면서 저의 한계를 깨달았고,
그래서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고 간구했습니다.
더욱 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기를 힘써 왔습니다.
그래서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부족함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가족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가족을 더 사랑하기 원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 그리스도 앞에 항복하고
그분의 사랑을 구해야 합니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자체에서 나오는 사랑은 함량부족 입니다)
진정한 사랑을 아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만난 것이며,
하나님을 진실로 만난 사람이라면, 가족을 사랑하는 일에 점점 더 자라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사랑하며 사십시다. 나에게 사랑하라고 붙여준 가족들을 보십시다.
인간으로 태어나 아무리 많은 일을 이룬다 해도,
나에게 붙여준 그 연약한 가족들조차 사랑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나에게 붙여준 가족들에게 상처를 입히면서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린 들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그렇게 가족들을 사랑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가까이 있는 가족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멀리 있는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 시대의 탁월한 기독교 저술가인 조시 맥도웰(Josh McDowell)은
한국 방문 중에 어느 기자와 대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기자가 물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조시 맥도웰은 “남자의 경우, 아내를 사랑하고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아내의 경우, 남편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기자는 또 묻습니다. “그러면 목회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조시 맥도웰이 대답합니다. “역시 아내를 사랑하고 아이들과 깊고 넓은 시간을
가지는 것입니다. 아내와 자녀들을 사랑하는 목사만이 교인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나, 저는 이 대답에 담겨 있는 뜻에 공감합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우리말에 ‘사람’이라는 말과 ‘삶’이라는 말과 ‘사랑’이라는 말이
모두 같은 어근에서 나왔다지 않습니까? 사람의 본질은 사랑에 있으며,
삶의 이유도 사랑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 사랑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우선 경험되어야 합니다.
목회의 본질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가까운 가족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회입니다.
그렇게 사랑할 때, 교인들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진실한 사랑의 속성입니다.
자기 가족조차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면서 혹은 사랑하지 않으면서
교인들을 사랑한다는 말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의 달을 시작하면서 우리 모두 회개하십시다.
그동안 사랑에 실패한 것에 대해 회개하십시다.
마음으로 뉘우치고 마는 회개가 아니라,
걷잡을 수 없이 속으로부터 터져 오르는 진정한 회개가 필요합니다.
혹, 여러분 중에는 내가 그동안 살아온 것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악의적이었는지를 자인하고 심하게 깨어져 통곡해야 할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혹, 여러분 중에는 그동안 사랑하는 일에 꽤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착각에 대해
회개할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사랑에 관한 한, 회개할 필요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회개하십시다.
그리고 십자가의 사랑을 더 깊이 알도록 기도하십시다.
다른 것에는 다 실패해도 사랑에는 성공하십시다.
예수님의 그 놀라운 사랑으로 나의 사랑이 치료받고 새로워지기를 기도하십시다.
예수님의 그 고귀한 사랑으로 내 사랑에 질서가 잡히기를 기도하십시다.
그 온전한 사랑으로써 나의 사랑이 온전해져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이 전해질 수 있기를 기도하십시다. 그것이 우리가 구할 진정한 축복입니다.
사랑의 주님,
사랑에 무능했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진실로 통회하며 회개하는 마음을 주소서.
십자가의 사랑을 저희에게 알게 하소서.
그 사랑으로 저희가 치료받고
사랑에 능하게 하소서. 아멘.
.........................................
주1) 길어서 전략된 부분
가정에 대해 설교할 때면 늘 소외감을 느끼는 분들이 계십니다. 자녀에 대해 말할 때, 자녀를 두지 않은 분들이 소외감을 느낍니다. 부부에 대해 말할 때면 홀로 사시는 분들이 소외감을 느낍니다. 부모에 대해 말할 때는 부모를 모두 여읜 분들이 소외감을 느낍니다. 가정에 대한 설교를 준비하면서 항상 느끼는 고충입니다. 이번에도 그 같은 소외감을 느낄 분이 생기지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하지만 오늘 드릴 말씀의 초점은 누구에게나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는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그 초점을 잃지 않으면 함께 은혜에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에 살면서 모순되는 현상들을 여러 가지 보게 됩니다. 미국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와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이 일치하지 않는 모순, 말입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가정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미국인들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꼽으라면 ‘가정’을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미국 영화에서 가정은 가장 자주 다루어지는 주제입니다.
그런데 가정의 현실은 그 같은 가치관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다들 가정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홈 없는 가정을 찾기 어렵고, 그 과정에서 가족들은 깊은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미국인들 가운데 두 번 혹은 세 번 이혼과 재혼을 반복한 사람을 만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자라면서 두 세 사람의 양아버지(step father) 혹은 양어머니(step mother)를 거친 아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 같은 현상은 한인 이민자들에게도 점점 심해지고 있고, 한국의 경우에도 가정 파괴 현상을 점점 빨라지고 또한 깊어지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든 한국에서든 가정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 자신도 가정을 제일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의 경험과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관찰하고 그것을 성경 말씀에 비추어 해답을 구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처럼 가정을 ‘천국의 모형’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몇 가지 사랑의 진실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오늘 그것을 여러분과 나누며 은혜를 나누려 합니다.
◑1. 사랑에 관한 첫 번째 진실은 우리가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 모두는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심리적으로 깊은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내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도 함께 행복해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면서 나 혼자만 행복해지는 것은 병적인 쾌락입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 안에는 다른 사람을 괴롭게 함으로써 쾌감을 느끼는 악한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이나 핑계가 주어지면 우리 안에 숨겨져 있던 그 악마가 튀어 나옵니다. 남성들은 군대에 가서 그런 경험을 합니다. 특히 전쟁터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을 죽인다는 것에 공포심을 느낍니다. 피를 보고는 구토를 합니다. 하지만 점점 내면의 악마가 강해지면, 상대방을 괴롭히고 고문하고 학살하는 것에서 쾌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학대하여 쾌감을 느끼는 악마성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진실입니다. 저에게도 있고, 여러분에게도 있습니다.
그 악마성은 아주 사소한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아내나 남편에 대한 학대로 나타나기도 하고, 부하 직원들에 대한 억압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자녀들에 대한 학대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만일 여러분 중에 ‘나에게는 그런 경향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시다면, 스스로를 잘 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에게는 예외 없이 그 같은 악마성이 있습니다.
나 혼자만의 행복을 추구할 때, 그 악마성은 아주 은밀하게 활동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릅니다. 그렇게 나빠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비뚤어진 자기 사랑의 참담한 결과를 보고 나서야 깨닫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불행하게 하는 대가로 얻는 행복은 자신을 진실로 행복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해지려면 나와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행복해져야 합니다. 나와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행복해지려면, 내가 희생할 몫이 있습니다. 타락한 우리의 본성은 그것을 불행이라고 속입니다. 그 속임수에 넘어가면 우리는 가족들을 눈물짓게 만들고 그 대가로 병적인 즐거움을 즐깁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2. 사랑에 대한 두 번째의 진실은 가정의 바탕은 부부관계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가정의 바탕이지, 어떻게 부부 관계가 가정의 바탕인가?’라고 의문을 가질 분이 계실 것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첫 번째 가정이 탄생하는 이야기를 기록한 창세기 2장을 읽어 보십시오. 출산이 먼저 왔습니까? 아닙니다. 부부가 먼저 왔습니다. 촌수로 따지면 부모와 자식은 일촌입니다. 반면, 부부는 무촌입니다. ‘무촌’은 ‘아무 관계도 아니다’라는 뜻도 되지만, ‘일심동체’라는 뜻도 됩니다. 요즈음 ‘영순위’라는 말이 자주 사용됩니다. 1순위보다 더 먼저라는 뜻입니다. 부부는 갈라지면 남남이 되니 ‘무촌’이지만, 일심동체가 되도록 의도된 것이므로 ‘영촌’입니다. 부부 관계가 더 우선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질서입니다.
유아 세례를 준비하는 부모들에게 제가 잊지 않고 전해 주는 말이 있습니다. “두 분이 이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두 분 사이의 사랑입니다.”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이 점을 오해하는지 모릅니다. 자식을 열심히 사랑하기만 하면 되는 줄 압니다. 부부가 서로 다투고 살면서 서로 경쟁적으로 아이를 사랑합니다. 그 사랑이면 아이에게 부족함이 없을 줄로 압니다. 하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는 부모가 서로 사랑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부모의 든든한 사랑 안에서 자라는 것이 아이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서로 사랑하지 않는 부모로부터 경쟁적인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은 나중에 대인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부모가 서로 깊이 사랑하는 관계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결혼 생활에서도 실패할 확률이 큽니다. 또한, 좀처럼 치유할 수 없는 불안감을 마음에 품고 살게 됩니다. 그것이 결혼 생활에 자신 없게 만들고, 잘 하려고 마음먹어도 그렇게 할 능력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참으로 두려운 사실은 부모가 자식의 행복을 상당 부분 결정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어릴 적에 두 번 젖을 뗐습니다. 첫 번째는 실제로 엄마 젖을 뗀 것이고, 두 번째는 정신적으로 젖을 뗀 것입니다. 첫 번째의 이유(weaning)는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저의 무의식에는 그것이 상처로 남았을지 모릅니다만, 제 의식에는 기억되어 있지 않습니다. 두 번째의 이유 과정은 적지 않은 상처가 되었습니다. 몇 살 때인지 기억이 정확하지 않습니다만, 어느 날, 당시 시골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그 빛깔도 황홀한 찹쌀떡 몇 개를 어머니께서 들고 오셨습니다. 저는 당연히 어머니께서 저에게 그것을 먼저 주실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한 개를 집어 들려고 손을 뻗었는데, 어머니께서 제 손을 탁 치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안 돼! 아버지 먼저 드려야 돼! 기다려!”
그 때, 제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아십니까? 당시, 아버지께서 어머니의 신앙 생활을 반대하고 핍박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로 인해 어머니가 어려워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머니께서 아버지보다 저를 더 사랑하실 줄 알았습니다. 자식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시는 분이셨기 때문에 좋은 것이 있으면 당연히 자식에게 먼저 주실 줄 알았습니다. 아, 그런데 알고 보니, 제 어머니에게 저는 ‘넘버 투’였습니다. 넘버 원은 아버님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두 번째 젖을 뗐습니다. 다행히 어릭 적에 사랑의 질서를 배운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자녀를 결혼시킨 부모는 자녀 부부가 서로 사랑하도록 도와 주어야 할 책임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자녀를 결혼시키고 나서 여전히 부모를 넘버 원으로 여기기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기대한다고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그것이 좋은 일이 아닙니다.
자녀들을 결혼시킨 분들이 자주 그런 말씀을 합니다. ‘자식 키워 보아야 아무 소용없다.“ 특히 아들에 대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자주 듣습니다. 마치, 노후 대책으로 자식을 키운 것처럼 들립니다. 그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부모에게 은덕을 입어 이렇게 되었으니, 그 은혜를 자식에게 물려주고, 그 자식은 그 자식에게 물려주어 행복한 삶이 이어지도록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내리사랑‘이라는 말이 나온 것 아닙니까?
그런데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결혼한 자녀들에게 지속적으로 구애를 하는지요? 때로는 자녀가 배우자보다는 자신을 더 사랑해 주기를 기대합니다. 자녀 부부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려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특히 어릴 때부터 자녀에게 집착한 부모들이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떼어 보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힘들어 하는 자녀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건강한 결혼의 첫 번째 조건은 부모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창세기 2장 24절에 나오는 결혼의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다’는 말은 단순히 거처를 옮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격적인 독립을 말합니다. 물리적으로 함께 살아도 정신적으로 떠날 수 있습니다. 반면, 결혼하여 미국에 와 사는 부부라도 한국에 있는 부모로부터 정신적으로 떠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모의 책임은 떠나보내는 것이고, 자녀의 과제는 떠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떠나 배우자와 결합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결합하다’라는 말은 가까이 있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많은 영어 성경이 이 단어를 cleave라고 번역합니다. 이것이 건강한 가정의 기본 조건입니다.
어떤 분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당신이 애를 떠나보내지 않아서 그런 말을 하지. 한 번 당해 봐!’ 그럴지도 모릅니다. 저도 나중에 탄식을 하며 ‘자식 키워 보아야 소용없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 믿는 구석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의 속성입니다. 사랑은 어느 한쪽과 진실하게 통하면, 그것이 다른 사람과도 통한다는 사실을 저는 믿습니다. 만일 제 아이가 배우자와 진실하게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저에게도 통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너무 순진한 바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사랑에는, 진정한 사랑에는 그런 힘이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는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이름 붙이고 있지만, 실은 사랑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구속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학대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집착합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실한 사랑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 사랑은 우리를 배반하지 않습니다. 설사 그 사랑이 나를 향하지 않더라도 진실한 사랑이 오고가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감동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사랑에 대한 결정적인 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