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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신의 전달자, 두기고와 오네시모 (골21강)

LNCK 2024. 5. 17. 10:27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 ▣ 헌신, 봉사

 

내일교회 2022-10-02 서신의 전달자 - 두기고와 오네시모 - YouTube

◈서신의 전달자, 두기고와 오네시모 (골21강)       골4:7~9       

골4:7~9절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니 
그는 사랑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니라
8 내가 그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내는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9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그들이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

골로새서의 마지막 부분인데, 오늘 다룰 4:7~9절까지는
골로새서라는 편지를 바울에게서 받아가지고, 
골로새 성도들에게 전달하는 책임을 맡은 두 사람, 두기고와 오네시모를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 편지를 전달해주는 두 사람 두기고와 오네시모를 먼저 이야기를 하고.  
다음 주에 다루게 될 4:10~14절까지의 말씀은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 바울이 혼자 있었던 게 아니고, 선교팀이 같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동력자들이 같이 있었는데, 이 편지를 쓰면서 
바울뿐만 아니라, 함께 있는 동력자들도  골로새 성도들에게 문안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동역자들 중에 어떤 분이 있었나 하는 것은 다음 주에 살피고 4:10~14 
마지막 4:15~18절까지 말씀은, 골로새서 편지를 그들에게 보내면서 바울이 당부를 합니다. 
'너희만 읽지 말고,  이 편지를 라오디게아  또 히에라볼리에 있는 성도들에게도 
이 편지를 나누어 읽어라' 이렇게  당부를 합니다. 

그래서  골로새와 인근 도시에 있는 성도들에게 안부를 전할 것을 부탁을 하고  
마지막 축도로 이 서신을 이렇게 마무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틀 가운데에서  오늘은 편지를 전달해 줄 책임을 맡은 두 사람  
두기고와 오네시모를 사도 바울이 이렇게 설명하는 내용이  7절이죠.

◑골4:7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니 
그는 사랑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니라'

두기고.. 생소한 이름이죠.
*두기고 Tychicus :영어발음 티키커스, 영어설교 들을 때 누군지 모를 수 있음.

먼저 '고대 사회에 편지 전달자들은 어떤 역할을 했는가?' 
하는 것을 먼저 좀 생각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 같으면 제가 편지 쓰면, 
골로새교회 성도들에게, 만약에 제가 바울이 되어서 편지를 쓴다 그러면, 
이메일을 보내면 되겠죠. 아니면 카카오톡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통해서 편지를 보냅니다. 

그런데 고대 사회는 이런 우편제도, 통신제도가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편지는, 사람을 통해 인편으로만 전달이 가능합니다.   *계2~3장에 나오는 '사자 messenger' 

그런데 이 편지를 만약에  두기고가 사도 바울에게 받아서    
이 편지를 골로새 성도들에게 전달해줬다 그러면,  이런 어떤 일들이 생기겠죠. 
 
'갖고 온 이 편지가 바울의 편지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편지에 언급된 두기고가 편지를 가져갈 거다' 
이렇게 바울이 편지를 언급해야, 두기고가 편지를 가져갔을 때 
'정말 이 사람이 가져온 편지가 바울의 편지구나' 하는 것을 그 사람들이 확신할 수 있겠죠.

(그래서 본문에 두기고에 대한 서술이 나오는 거죠)

    

▲여러분 골로새서는 사도바울께서 로마 감옥에서 보낸 편지입니다. 
그래서 편지를 쭉 읽어줍니다. 
그러면 이 편지를 들었던 성도들이 질문을 하겠죠. 
'아니 지금 사도 바울께서 편지에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이런 글을 적으셨는데.. 
이게 정확하게 무슨 뜻입니까?'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바울사도가 이런 글을 썼습니까?' 라고 질문을 당연히 하겠죠. 
지금 바울의 형편,  바울의 생각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편지의 전달자들이니까요. 

이 사람한테 편지의 내용, 그 글을 썼을 때 바울의 의도, 
이런 것들을 질문하게 되면 
이 편지를 전달해 주는 사람(여기서는 두기고)은, 그 질문에 대해서 다 답변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골로새서 편지를, 두기고한테 맡길 때는 어떤 뜻을 담고 있느냐? 
바울이 가장 신뢰를 하고,  바울의 생각, 바울의 뜻과 계획을 가장 잘 알고 있어서
바울이 이 편지를 보냈을 때, 
이 편지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에게, 바울의 의도를 가장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에게 이 편지 전달의 의무를 맡기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두기고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그 당시 제도를 통해서 본다면, 바울의 사정, 바울의 생각, 바울의 마음, 바울의 계획 
이것을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에게, 이 편지를 전달할 책임을 맡기는 거죠. 
두기고는 바로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두기고가 성경에 몇 번 기록이 되어 있는데, 
처음 등장은 행20:4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드로비모라'  

바울의 3차 전도여행 중에, 가장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던 곳이 에베소입니다. *행19장
에베소는 당시 소아시아 지방의 수도였습니다. 
이 에베소에서 사도 바울은 무려 3년을 체류하면서, (전도여행 방문지 중 가장 긴 체류)
어쩌면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부흥과 맞먹을 수 있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그 도시 가운데 펼쳐지게 됩니다. 

그런데  또 핍박과 저항도 강력해져서, 결국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게 됩니다. 
에베소를 떠나서 더 큰 핍박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사도 바울은 가게 됩니다. 

그래서 에베소를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바울의 그 여정에 함께했던 
7명의 사람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동력자들이죠.  행20:4

그리스 베뢰아 지역에선 1명, 소바더  
그리스 데살로니가에선 2명, 아리스다고, 세군도.. 즉 헬라 사람이 도합 3명이고, 

터키의 더베 출신은 가이오와 및 루스드라의 디모데 
터키의 아시아(에베소)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 아시아 사람은 도합 4명입니다. 

이들이, 지금 죽음과 핍박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같이 가고 있는 동력자 일곱 사람입니다. 

두기고와 드로비모를 '아시아 사람'이라고 명기한 것은   행20:4
이 두 사람은 아마 에베소 출신이었을 거고, 
사도 바울이 3년 동안 에베소 사역을 할 때 그때 회심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 가운데 두 명이  에루살렘으로 가는 바울과 함께 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바로, 골로새서의 편지 전달자가 된 두기고입니다. 

두기고는, 사도 바울이 순교할 때까지도 
바울 사역의 동역자로서 변함없이 사역했습니다. 
딤후4:12절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2차투옥 때 쓴 서신으로, 가장 마지막 서신이 됩니다.
즉 두기고가 끝까지 바울 곁을 지켰다는 얘기죠.

디모데후서를 마무리하면서, 바울은 '나는 지금 혼자 있다.' 
지금 내 곁에는 누가만 있고, 그래서 좋은 뜻에서 나를 떠난 사람들, 
나쁜 뜻에서 나를 떠난 사람들을 쭈욱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좋은 뜻으로 결국 바울을 떠나 있는 사람들을 언급하면서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냈다'라고  바울이 이야기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봤을 때, 바울이 순교할 때까지도  
두기고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역에 충성했던 인물임을 알 수 있죠. 

▲그런데 두기고는, 골로새서만 전달한 게 아니라 
엡6:21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리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리리라'

위 구절은, 오늘 본문 골4:7절과 거의 똑같은 구절이죠.
'나의 사정,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에게 알리려고 하는데 
사랑받는 형제, 신실한 일꾼 두기고가 알려줄 것이다.' 

그래서 두기고는 골로새서만 전달한 사람이 아니라, 에베소서도 전달해 주었죠.
(학자들은 바울이 에베소서를 쓰는 김에, 골로새서도 같이 써서 두기고 편에 같이 보냈다고 봅니다.
같은 시기에 쓰여졌고, 동시에 전달되어졌다는 거죠)

▲그러면 이 두기고를,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3가지로 소개합니다.   

골4:7절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니 
그는 사랑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니라'

'사랑 받은 형제'
누구로부터 사랑을 받는 거겠습니까? 
지금 이 편지를 써서 보내는 바울에게 사랑을 받고, 
또 하나 담겨져 있는 것은 함께 있는 동료들에게도 사랑받는 형제다... 
즉 '지도자와 형제들에게 사랑받는 형제였다' 이렇게 바울은 두기고를 소개합니다. 

'신실한 일꾼'
이 '일꾼'은 종과 같은 뜻인데,   *디아코노스 minister 
자기에게 맡겨진 사역과 관계에서는 그는 참 신실한 일꾼이었다... 

여러분 '신실하다 faithful'는 것은 결국 무엇이겠습니까?    *피스토스
그 임무를 수행할 때, 많은 어려움과 핍박들이 있다 할지라도 
기꺼이 그것을 극복하고, 맡겨진 사역을 잘 감당하는 것, 이것이 신실함이겠죠. 

그렇지만 또 한 가지 기억해야 될 것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임무를 잘 수행하더라도, 
자기 방법으로, 자기 방식으로 처리하는 사람은... 신실하지 못합니다. 

신실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임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잘 감당하는 사람, 그 사람이  신실한 일꾼이 되겠죠.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사람'
두기고는 종이 된 사람이다... 누구의 종이겠습니까? 
바로 주님의 종이 된 사람이다... 이렇게 바울은 두기고를  설명합니다. 

이런 사람이었기 때문에, 바울은 편지를 전달하는 이 중차대한 사명을
두기고한테 맡겼다는 거죠. 

우리 각자도, 두기고 같은 사람이 되기를 기도하며 바래야 하겠습니다.
'사랑받는 형제, 신실한 일꾼, 주 안에서 종이 된 사람!' 

▲그런데 이 세 가지 표현은, 바울이 에바브라를 소개할 때도 비슷하게 말했습니다.
에바브라는 골로새 교회를 세우고 섬겼던 지도자죠. (골로새교회를 바울이 세운 게 아닙니다. 물론 바울이 도왔죠)
에바브라를 소개할 때도 등장합니다. 

1:7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에바브라에겐 '우리와 함께 된 종',  '사랑하는(받는)에바브라', 
'신실한 일꾼'으로 칭했는데, 두기고와 매우 유사합니다.
두기고에게 적용했던 이 3가지 표현을, 바울은 에바브라에게도 그대로 적용합니다. 

그렇다면 이 3가지는, 바울 입장에서는 
그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을 충성되게 섬기는 사람들을 표현할 때 
그가  적용했던 하나의 표준적인 표현이었죠.

저는 설교를 준비하는 한 주간 동안, 이 세 가지 표현을 많이 묵상했습니다. 
-나는 과연 성도님들에게 '사랑받는' 사람인가?   
-성도님들이 볼 때, 나는 '신실한 일꾼'인가?
-성도들이 볼 때 '나는 주님의 종인가?'

종은.. 주인이 원하는 뜻대로 움직이는 사람이죠.
그래서 성도님들이 저를 볼 때, '우리 목사님은 자기가 원하는 방법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살려고, 행동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과연 이런 평가를 나는 받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제가 스스로 하게 되었습니다.    

성도님들도 제가 생각을 하면서 
과연 성도님들은 가정에서나, 아니면 일터에서나, 때로는 교회에서 
-'참 사랑받는 사람'으로  
-'주 안에서 신실한 일꾼'으로  
-'주님 앞에 충성된 종'으로 과연 살아가는 사람들인가? 

'참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성도들이 되셨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의 바람을 갖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사랑받는 beloved' 이라는 말이 특별히 제 마음에 많이 와닿았습니다.
그러면서 제 마음에 어떤 생각을 했느냐? 
저도 지난 세월, 이 교회에서 사역하면서 보냈던 시간들을 쭉 생각하면서 
나한테 '사랑을 받은'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아가페토스 <아가파오< 아가페

'내가 이렇게 사역로서 참 사랑했던 사람들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그분들은 어떤 특징을 좀 가졌을까?' 
이렇게 그냥 제 혼자서 한번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한 5가지 정도가 생각이 났습니다. 

1) 첫 번째는 사랑하는 사람이죠. 
여러분 제가 보기만 해도 사랑스러웠던 분들은 누구겠습니까? 
정말 예수님처럼 우리가 부족하지만, 자기 자신을 좀 내려놓고 
그런 이타적인, 헌신적인, 희생적인 참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결국 사랑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제 주위에서 '(교우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참 사랑스럽죠. 

2) 우리가 사랑을 하더라도, 그걸 떠벌리고 과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겸손한 사람
저는 갈수록 이게 점점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 같아요. 하나님과 사람 앞에 겸손한 사람!
뭔가 과시하고 자신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정말 사랑스러운 분이시죠. 

3) 또 한 가지 제 기억에 남는 것은 '일상적인 삶 가운데, 한 번씩은, 
큰 게 아니라 작은 일에 배려해 주는 사람' 

여러분 큰 것을 선물하고 대접하는 것은, 죄송하지만, 오히려 쉬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도 이렇게 쭈욱 지내면서, 참 큰 거는 아니지만 
제가 꼭 필요한 그 순간에, 꼭 필요한 방식으로 저를 이렇게 섬겨주셨던 분들이 있었어요. 
그러면 참 그것은 쉽게 잊을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작은 배려와 섬김은, 오랫동안 깊은 관심을 가진 분이 아니면,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가정에서도 우리가 사랑받는 경우는 언제냐? 
이렇게 작은 배려들을 가족들에게, 주위 사람들에게 나타내 줄 때 
참 그분은 사랑스럽죠. 

4) 또 하나는 '기쁨의 사람'이었어요. 
제가 사랑했던 그런 분들을 보면, '기쁨의 사람' 이었어요. 

그렇게 (힘들게) 살면서도, 그 마음에 항상 눌려있고 억울하고 불만이 가득 찬 삶이 아니라 
늘 기뻐하는 사람들, 기쁨의 사람들, 그 길을 기쁘게 걸어가는 사람들! 

5) 또 한 가지 마지막으로 이야기한다면 '순전한 사람' 
그가 정말 이웃들을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결국 끝에 가보니까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거였다.. 라고 느껴지게 되면, 그때는 배신감이 들게 되죠. 

제가 이렇게 사랑했던 사람들을 쭉 기억해 보면 
이런 5가지 정도가 생각이 났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저와 비슷할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성도님들이, 여기 나오는 두기고 와 에바브라처럼 
주님의 종이 되어서, 정말 주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주님께 배우고, 
거기에 참 신실하여서 여러분이 이제 두 사람처럼 사랑받는, 신실한 일꾼들,
함께 된 종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4:8절 '내가 그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내는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로  사정을 알게 하고'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과 그 선교팀 동역자들의 사정을 
골로새 성도들한테 알게 해주는 겁니다.  

그리고 강조점은 어디에 있느냐?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지금 편지를 보내고,  또 두기고를 보낸 이유는 무엇이냐? 
골로새 성도들의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여기서 골2:2절을 같이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2:1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얼마나 힘쓰는지를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2:2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2:1절 말씀은, 바울과 골로새 성도들은 아직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얼굴도 본 적이 없는 너희들을 위해서 
'내가 너희를 위해서 얼마나 힘쓰는지 알아주면 좋겠다' 라고 이야기하면서 

2절에서, 골로새 성도들이 그걸 알면, '그들로 마음에 위안(위로)을 받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본문 4:8절에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가
앞서 2:2절에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 같은 목적이죠.
위로, 위안 ... 똑같이 '파라칼레오' 입니다.   *파라+칼레오, 파라클레토스와 비슷

바울이 지금 골로새 성도들을 위해서 이렇게 애쓰는 목적이 무엇이냐? 
'골로새 성도들의 마음에 위로가 되게 하기 위해서' 
'골로새 성도들이 마음에 위로를 받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애를 쓰고,  편지를 써서 두기고를 통해서 보내가지고 
그들 마음을 위로하기를 바울은 원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마음 속에, 정말 그가 골로새 성도들을 위해서 해주고 싶었던 최고의 것은 뭔가 하면, 
가르침과 함께, 그들 마음을 위로해 주고 싶다...는 거죠. 

초대교회 성도들도,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무엇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냐? 
여러분, 위로를 참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골로새 성도들은 거짓 교사들한테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많은 핍박과 박해 가운데 시달리고 있었죠. 
그들에게 바울은 말씀의 가르침과 함께, 무엇을 주기를 원하느냐? 
하나님의 위로를 그들에게 전해주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저와 같은 사역자들, 순장님들, 교회 지도자들이 해야 될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성도들의 마음을 위로하셔야 된다는 거죠.  
성도들 중에 누구도, 정말 위로 없이 혼자 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는  청년들을 오랫동안 섬기면서, '저런 애는 세상에 걱정 없이 살아갈 거다' 
라고 생각했던 아이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런데 막상 만나서 이야기해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느냐? 
'세상에 이 애만큼 불쌍한 애가 없구나...' 

여러분 겉으로 봐서는 '부족한 것 하나 없다'라고 생각을 했는데 
막상 이야기해 보면 '세상에 정말 이 애만큼 불쌍한 애가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람들은 다 무거운 짐을 지면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들한테 지도자들이 줘야 될 가장 큰 선물, 꼭 줘야 될 선물은 무엇입니까? 
그들 마음에 위로를 받게 해야 된다는 거죠.  4:8

그런데 바울은 그 편지와 함께 두기고를 보낼 때, 다시 한번 보시죠. 
8절에 이런 말씀을 합니다. 위로를 주기 위해서 무엇을 알게 하나요?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8

여러분 바울이 처한 사정, 골로새 성도들을 위해서 얼마나 애쓰는지 알게 되면 
'그들이 위로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질문을 던진다면 
'과연 여러분 성도님들이 저의 사정을 알게 되면, 마음에 위로를 받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시험에 들겠습니까?' 

빌 하이벨스가 사람의 인격을 정의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격은 무엇이냐?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게 당신의 인격입니다.' 

아무도 보는 이가 없을 때에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도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그게 바로 바른 인격이고 
그렇게 살 때 어떻게 되느냐? 
사역자의 사정을 알게 되면, 성도들이 큰 위로를 받게 된다는 거죠. 

그래서 저는 성도님들과 만남이 참 중요하지만, 
저는 성도님들은 대부분 일주일에 한 번 뵙잖아요. 

반면에 제가 우리 교역자들, 직원들은 거의 매일 보죠. 
매일 한 10시간씩 이렇게 시간을 같이 보냅니다.

그럼 제가 오늘 설교를 이렇게 쭈욱 하면, 우리 교역자와 직원들이 뒤에 앉아 있다가 
'아이고 목사님이 오늘 별소리 다 하시네. 말은 잘 하는데 
정말 생활할 때 우리를 대하는 거 보면, 저 설교와 정 반대로 살아가지' 

이렇게 되면, 성도들이 위안을 받겠습니까?  No

또 저하고 생활을 같이 하는 가족들이, 제가 설교하는 것을 듣다가, 가족들이 깜짝 놀랍니다. 
'아니 남편이/ 아버지가 저런 생각을 하고 계셨나? 
그런데 집에서는 왜 그 모양이었지?' 
만약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고, 그게 성도들한테 알려진다면, 
성도들 마음에 위로가 되겠습니까? 아니면 시험을 받게 되겠습니까? 

오늘날  한국 교회는... 저는 오랫동안 이 질문을 많이 가졌어요.  
사랑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바로 함께 얼굴과 얼굴을 맞댄 곳에서, 정말 서로 사랑하고, 선을 베풀고 좋은 말 하는 것,
이거 정말 중요.하죠. 보일 때도 사랑해야 됩니다. 

근데 또 하나. 우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사랑하고 있는가요?
언젠가 사람들이, 내 생활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이야기했을 때, 
그 이야기가 바로 저를 사랑하고 섬겼던 분들에게 위로가 될 것인가? 
아니면 걸림돌이나 시험거리가 될 것인가? 

여러분 우리들의 삶을, 우리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언젠가 듣고 알게 되었을 때 
그분들에게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고, 자랑이 되도록 우리가 살아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요즘 한 3주 정도 당이 조금 높게 나와가지고 
요즘 제 평생에 수도승처럼  먹고 이렇게 생활을 합니다. 

제가  당뇨가 조금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를 보고 요즘 환영해 주는 분들, 저를 보고 환하게 웃어주시는 분들이 계세요. 
누군가 하면 당뇨병 환자들입니다. 
'신입생 환영합니다!' 꼭 이런 기분 같아요. 

요즘 첫 번째 저한테 들었던 생각이 뭐냐? '이제 라면과 이별할 때가 됐나?' 
저는 먹는 먹거리 중에 라면이 저한테 가장 오래된 친구였어요. 

그래서 제가 아마 8살 때인가 우리 할머님이 처음 라면을 끓여주셨는데 
'야~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게 있나?' 그때 그 감격!   

중학교 고등학교 때부터는, 제가 학교에서 혼자 야간 보충수업 공부를 늦게까지 했기 때문에 
매일 저녁마다 정말 식당에 가서 라면 하나 시켜서, 밥과 같이 먹는 거 

그게 저한테 최고의 기쁨이었어요. 
그래서 6년을 거의 매일 한 끼씩 라면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대학교 가서는 자취를 했습니다. 
자취하면서도 하루에 한 끼씩 라면을 넣어서 먹었어요. 
하루는 오뎅 넣고, 하루는 된장 넣고, 하루는 뭐 하여간 종류대로 다 넣으면서 
저는  라면을 그렇게 맛있게 먹었어요. 

제가 결혼할 때까지도 하루 한 끼는 꼭 라면을 먹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혼한 후에는 온갖 핍박과 탄압을 제가 견디면서
그래도 라면을 열심히 먹었어요. 

근데 '아 이걸  끊어야 한다니..' 라고 생각을 하니까, 담배 끊는 분들이 생각났어요. 
'야 담배는 이것보다 더 어렵겠구나' 

어느 성도님이 한번 담배 끊으실 때... 평생 담배와 친구였잖아요. 
그런데 예수 믿고 '이거 내려놓아야 돼' 그러니까 
그 분이 순장님하고 같이 산에 올라가셔서, 마침 송구영신예배 드리고 난 직후였어요.

순장님이 이야기했습니다. '이 친구(담배)한테  작별을 고하시죠?'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이분이 깊이 한 모금을 들이마시고 내뱉고 나서 
그 다음에 남은 담배를 땅에 파묻으면서 눈물을 머금고 작별 인사를 했어요. 

제게 당이 있다 그러면
하나님이 정해주신 창조 질서에, 제가 부합되게 제 몸 관리를 안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거죠. 
그러면 제가 뭐 해야 되느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이것들을  바꾸어 가는 거죠. 
그러면서 저는 참 부족하지만, 성도님들이 작은 거 하나 고칠 때도 
'참 이렇게 고생하시는구나' 하는 것들을 요즘들어서 저는 배워가게 됩니다. 

성도님들의 삶이, 특별히 앞선 분들의 삶이 
누군가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게 될 때, 
그분들에게 시험거리가 아니라, 
그분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기쁨이 될 수 있는, 자랑거리가 될 수 있는 삶을  :8
살아가시면 좋겠습니다.  

◑4:9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그들이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는 이미 앞에서 등장한 두기고를 설명할 때 등장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하나가 빠졌어요. '종'이라는 표현이 빠졌습니다. 
대신에 무엇이 등장하나? '형제' 오네시모를 보낸다...  

그리고 바울이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다'
오네시모는 골로새 출신이라는 겁니다. 
'너희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골로새 출신이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너희가 다 알 거다.' 

'그런데 그들이(두기고 와 오네시모) 여기 일들을 다 너희에게 알려줄 거다'
지금 바울은 로마 옥중에서 이 골로새서를 쓰고 있죠. 2년 가택연금 중이었죠.
그렇지만 다리에는 족쇄 같은 것을 차고 있었나 봅니다. 엡6:20, 행28:20

저는 '신실하고 사랑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묵상하면서 참 가슴이 뭉클했어요. 
왜냐하면 오네시모는 신분이 노예였습니다. 

그의 옛 주인이었던 빌레몬은, 골로새 교회의 지도자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네시모는 사고를 쳐서, 도둑질을 했는지 사기를 쳤는지는 모르지만 
큰 손해를 입히고  도망가게 됩니다. 
그래서 오네시모는 누구냐? 도망친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도망친 종인 오네시모를 
그의 고향인 그 골로새로 보내면서 바울이 뭐라고 소개하나요? 
'그는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다' 

왜 '종'이라는 표현을 안 썼을까요? 학자들은 두 가지로 해석을 합니다. 
-한쪽 해석은, 오네시모는 소위 바울의 선교팀의 일원은 아니었다. 
두기고를 돕는 사람이지만, 정규 선교팀의 일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종'이라는 호칭이 빠졌다.. 라고 해석하는 분도 있고, 

-또 한쪽 해석은, '오네시모에 대한 배려였다'고 봅니다. 
그는 진짜 자기 신분이 '종'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종'이란 말을 쓰지 않았던 거죠.
그게 그에 대한 배려였죠. 종더러 '종'이라고 하면, 혹시 기분 나쁠 수도 있잖아요. 

'오네시모'는 노예 가운데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그 이름만 들으면 사람들은 '아 저 사람은 노예구나' 하는 거를 다 알았습니다. 

근데 그 이름 앞에 또 '종'이란 표현을 사용했을 때 
본인한테도 그렇고 
다른 사람에게도 오네시모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관을 가질 수 있잖아요. 
그래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칭할 때는 '종'이라는 호칭을 빼고 '형제'라는 호칭을 사용했죠. 
저는 이 입장(후자)에 동의합니다. 

 

바울은,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신실하고 사랑받는 형제 두기고처럼, 
골로새교회 지도자 에바브라처럼, 그를 존중히 여겨주기를 바울은 부탁을 합니다. 

▲그런데 이 오네시모에 대한 바울의 태도가 가장 잘 나타난 것이 빌레몬서입니다. 

골4:17절에 보면, '아킵보'라는 인물이 등잡합니다.
아킵보는 빌레몬의 아들입니다. 
빌레몬의 아들 아킵보에게, 바울이 당부하는 표현이 나오죠.  

그러면 오네시모는 누구였나? 
몬1:2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

자매 압비아는, 압비아는 빌레몬의 부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와 함께 병사된 아킵보' 
이것은 아마 빌레몬과 압비아의 아들이었을 것이다.  

'네 집에 있는 교회' 
그러니까 빌레몬은 골로새 교회의 지도자였죠. 
빌레몬은 이 골로새 지역 교회의 지도자였고 신실한 분이셨습니다. 

오네시모는 큰 손해를 끼치고 결국 도망가게 됩니다. 
그런데 도망갔던 오네시모가 10절을 한번 보십시오. 
로마로 도망갔다가, 정말 골로새에서 멀리 떨어진 로마로 도망갔다가 
그곳에서 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바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바울이 지금 로마의 가택연금 상태에 있다가 오네시모를 만났는데 
바울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고,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또 바울 자신이 '아들'이라 표현할만큼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몬1:10 '갇힌 중에 낳은 아들'

그런데 이 오네시모는 바울에게 정말 충성을 했죠. 
그래서 바울은 이 도망갔던 오네시모를, 옛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게 됩니다. 
그러면서 빌레몬에게 이렇게 당부를 하게 됩니다.  

몬1:11절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오네시모'의 이름 뜻이 '유익하다'는 뜻입니다. 

12절을 보시죠. 정말 놀라운 표현입니다. '그는 내 심복이라' 
'심복'의 관주를 보면 '심장'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내 심장이다' 라는 말도 됩니다. 

'그는 내 심장이다'... 나와 뗄래야 떼 놓을 수가 없는, 
나에게 가장 중요한 그런 인물이다... 라고 했죠.  

▲이어서 바울은 이렇게 당부합니다. 
몬1:16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여러분 도망갔던 종한테, 예수님 믿고 돌아온 이 오네시모를 '사랑받는 형제로 두어라'  

17절을 보시죠.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무엇입니까? 나를 영접하는 것처럼, 그를 영접해라! 
여러분 이것이 오네시모에 대한 바울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돌려보낼 때, 그의 과거를 잘 알고 있는 골로새 성도들한테 이야기하는 거죠.

'그는 사랑받고 있는, 신실한 형제다'. 이렇게 바울은 오네시모를 소개하게 됩니다.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골3: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이것은 놀라운 선언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헬라인, 유대인의 차별도 없다는 겁니다.

빌레몬과 같은 자유인에게만 예수님이 구원이 되시는 게 아니라 
종이었던 오네시모 속에도 바로 예수님이 똑같이 구원이 되신다는 거죠. 
그래서 바울은 선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종이나 자유자나 하나이니라' 갈3:28 

바울에 대해서 가장 열띤 논쟁 중에 하나는 
'바울이 로마시대에 만연했던 노예제도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었나?  
그 입장에 맞게 행동했는가?' 하는 것이 오랜 논쟁 이슈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분명하게 이야기하죠. 바울은 무슨 입장을 가졌느냐? 
'그리스도 안에서는 종이나 자유자나 하나입니다.' 
이유는, 예수님을 믿게 되면, 종이라 할지라도 그들 속에 주님의 영이 임하시고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임하시니까... 그들은 자유인과 하나다... 이렇게 표현을 했죠. 

그렇지만 바울은 로마 제국을 상대로 해서 노예 제도를 폐지하기 위해서 
정치적인 그런 투쟁을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대했습니까? 

그가 만났던 한 노예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그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가 가르쳤던 것처럼 
자기 안에 예수님이 계심을 인정하고, 자신의 심장처럼 바울은 이렇게 
종이었던 오네시모를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위로부터의 개혁'을 한 것은 아니지만, 
'안으로부터 이것을 뒤집어 버리는 개혁' 그런 삶들을 바울이 살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 가르침은,  18세기에  소위 남북전쟁이 터지죠. 
미국에서 노예 제도와 관련된 남북전쟁이 터졌을 때 
노예 제도를 폐지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신실한 성도들에게 
하나의 텍스트가 되었던 성경이 무엇이냐? 빌레몬서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저는  이 오네시모에 대해서 살피면서 근본적인 질문이 제게 있었어요. 

'여러분, 오네시모와 같은 사람, 
소위 돈 떼먹고  주인한테 사기 치고 도둑질하고 도망간 노예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가 다시금  교회 속에 돌아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선택해야 되죠. 

사기치고 도망갔던 그 노예가 예수님 믿고 돌아왔습니다. 그가 바뀌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정말 이 사람은 앞으로 계속 변화되겠습니까?' 
'이 사람과 우리는 같이 동역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이렇게 바울이 편지를 맡기는 중차대한 임무까지도 
그분들에게 맡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 귀에 들려오는 사회에서 회자되는 이야기는 
'한 번 배신한 놈은 절대 믿으면 안 돼'
'한 번 사기친 놈, 한 번 도둑질한 놈, 이런 사람들은 그 버릇이 다시금 살아날 거기 때문에 
가까이 하면 안 돼!' 

그런데 그분들이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러면 그분들은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 되겠습니까? 

여러분 제가 교회를 섬기면서 항상 긴장하는 것이 
우리 교회는, 강남에 있는 교회와 비견할 수는 없지만, 점점 중산층의 교회가 됩니다. 

그러면서 누가 점점 사라지고 있느냐? 
소위 말해서 정말 가난과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점점 교회 속에서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그분들 생각에 점점  교회는 어떤 곳이냐? 
'나 같은 사람이 함께할 수 없는 교회'인 것처럼 느껴지는 거죠. 

△여러분 지금 한국 교회는, 이 시대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교회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들과는 상관이 없는... 그들이 낄 수 없는 공동체처럼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여러분, 세월이 지나면 교회는 점점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저는 청년 시절에 보육원 출신의 형제와 한 6개월 이상을 같이 살았습니다.  
또 자폐를 가졌던  청년과도 한 6개월 정도를 같이 살았습니다. 

난지도에서 정말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과 같이 생활들을 했습니다. 
그들과 같이 보내면서, 제 마음 속에 소망은 결국 무엇이었느냐? 

여러분 세상이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고, 
스스로도 '내 삶에는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과연 그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될 수 있는가? 
사람들에게 낙인 찍혀있는 이 사람들과, 끝까지 내가 함께 할 수 있는가? 

저는 제 삶에 정말 자폐를 겪었던 친구,  
보육원에서 나와서 정말 어두운 출생의 과거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과 같이 살면서 
정말 고생했어요. 

저보고 다시 그 사람들하고 같이 있으라고 하면, 있을 수가 없을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교회 '사랑부'를 보면 너무 감사한 거죠. 

정말  제가 6개월 그분들과 같이 있어도 그렇게 힘든데 
이분들은 평생 그런 어떤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자녀들을 평생 돌보셔야 돼요. 

오늘부터 사랑부가 내일까지 수련회를 갑니다. 여러분 한번 보시죠. 
과연 이분들이 교회에 왔을 때,  삶의 정말 고통과,  
정말 어떤 사기, 도둑질... 
우리가 함부로 가까이 할 수 없는 그런 낙인 찍혔던 인물들이 왔을 때 
과연 교회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을 기대게 해 줄 수 있을까?  
그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 

여러분 그들과 같이 있는 것은, 실로 어렵고 고된 일입니다.  
순장님들 잘 아시잖아요. 정말 삶의 조건이 나와 다른 분들이 왔을 때 
그 속에 얼마나 갈등과 긴장이 많이 생기는지...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 꼭 기억하셔야 돼요. 그분들은 누구인가요? 
우리에게 예수님 섬기는 법을 가르쳐주는 사람입니다

이거는 제 평생의 결론입니다. 제가 도저히 다룰 수 없는 그런 많은 인물들은 
나에게 어떤 가치를 가지는가? '예수님 섬기는 법을 가르쳐주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분들이 있기 때문에,
'내가 얼마나 인격적으로 부족한가?' 
'얼마나 내가 사랑이 부족한가? 얼마나 이기적인가?' 
'얼마나 내 삶 속에 두려움을 갖고 있는가?' 

여러분 그분들이 있기 때문에, 정말 훌륭하고 좋은 인격을 갖추고 
그것은 다 어떻게 보면 허상이고, 
실제 내 속에 있는 모든 더러움들, 모든 부족함들, 어두움들을 
그분들은 다 노출시켜 줍니다. 

제 사랑으로써, 저의 인격으로써 그분들을 끝까지 품어줄 수 없어요. 
여러분 그분들은 우리가 기도하고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여러분 발달장애를 가진 친구들이 변화되어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될 수 없어요. 

그렇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인가 하면, 
그분들과 같이 있어주는 겁니다. 그분들을 견뎌내는 것입니다. 

그분들이 무슨 행동을 하더라도, 우리가 견뎌내줄 때 
그때 우리들 가운데, 정말 세상이 고쳐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여러분 우리들이 참고 견디고 그들과 여전히 함께 있을 때 
우리들 가운데도 오네시모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저는 참 그런 소망이 있어요. 어떻게 하면 교회가, 가진 자들의 교회가 될 수 있지만 
그 가진 자들의 교회 속에,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도 
같이 와서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고, 신뢰하고, 믿어주고, 서로 견뎌줄 수 있는 
이런 교회가, 과연 세상 가운데 세워질 수 있을 것인가? 

여러분 잘난 사람들이 모여서 더 잘나고,  
자랑하고 교만하고 우아하고 교양이 있고... 
여러분 그러면, 그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은 어디에 갑니까? 

저는 우리 교회가운데 오네시모 같은 사람들이 많이 일어날 수 있도록, 
어두운 과거, 지울 수 없는 실패의 쓰라린 자국을 지우고 있지만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이 씻어지고, 
그들이 바로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사랑받고 신실한 형제와 자매로 세워져서 

 

이 밑바닥에서 절망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고, 빛이 될 수 있고,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세상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성도들, 그런 교회로 함께 세워가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