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26장 13-18절) - YouTube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행26:13~18 2015.12.25.
◑예수를 믿지 않으면, 사람의 과거는, 평생은... '헛된 과거, 헛된 일평생'이 됩니다
오늘은 올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인 송년주일입니다.
이제 며칠만 지나면, 올 한 해도 다시는 오지 못할 과거로 영영 사라지게 됩니다.
"하루는 생각보다 길고, 한 달은 생각보다 짧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노라면 하루는 확실히 생각보다 깁니다.
생각보다 긴 하루가, 서른 날이나 쌓인 한 달이라면
그 한 달도, 생각보다 길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하지만 살다 보면.. 한 달은 생각보다 짧습니다.
그리고 오늘처럼 한 해가 다 지나가버린 송년주일이 되면 이렇게 말합니다.
"하루는 생각보다 길고, 한 달은 생각보다 짧고, 한 해는 생각보다 훨씬 짧다"
만약 누군가에게 오늘이 인생 최후 마지막 날이라면
그 사람은 한마디를 더 덧붙일 것입니다.
"하루는 생각보다 길고, 한 달은 생각보다 짧고,
한 해는 생각보다 훨씬 짧고, 일생은 그보다 더 짧다."
▲표준 벽돌의 높이는 5.7CM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수롭지 않은 높이입니다.
하지만 그 벽돌을 계속 쌓아 올리면, 마치 하늘을 찌르는 바벨탑처럼 높아집니다.
성을 쌓는 돌의 폭도 그리 높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돌을 계속 이어가면 만리장성만큼 길어집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모으거나, 쌓거나, 이으면
그 양과 길이와 높이가 확대 혹은 확장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시간만은 예외입니다.
하루의 시간 길이는 24시간, 그것은 불변이지만
동일한 길이의 시간인 그 하루를 계속 쌓으면 쌓을수록
총체적인 시간의 길이는 도리어 점점 더 짧아집니다.
그래서 '하루는 생각보다 길고, 한 달은 생각보다 짧고,
1년은 생각보다 훨씬 짧고, 일생은 그보다 더 짧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면, 인생 최후의 날을 맞이한 사람들이
'자기 인생이 만리장성만큼이나 길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 인생이 순식간에 끝나버렸다'고 한탄하는 것으로
입증되고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인생 무상을 탄식합니다.
매일 하루하루를 싸우면 싸울수록, 길이가 길어지기는 커녕 점점 짧아지다가
급기야 어느 날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무의미하게 사라져 버리는 인생이라면
얼마나 덫 없고 허무합니까?
그런 인생이라면 굳이 애쓰고 힘쓸 까닭이 있겠습니까? 어떻습니까?
정말 인생은 덫 없고 허무합니까?
그렇습니다.
지난 세월을 '무의미하게 흘러버린, 사라져버린 과거'로만 인식하는 사람에게는
그의 인생은 필연적으로 덫 없고 허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현재도, 미래도, 순식간에 무의미한 과거로
증발되어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와 단절된 현재가 없고, 현재와 무관한 미래가 있을 수 없습니다.
현재는 과거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연장선상에서
현재를, 새로운 미래를 일구기 위한 발판으로 삼는 사람에게는
지난 세월 역시, 그 현재와 미래를 거치면서, 새로운 의미로 되살아나게 됩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각각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의 일상 속에서 한데 어우러져
그 모든 시간들이,
인생 경륜으로, 삶의 지혜로, 뿌리 깊은 영성으로 되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인생은, 결코 짧지도, 덫없거나 허무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사람의 과거는 사라지지 않고
언제나 현재와 미래 속에서 새로운 의미로 계속 되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구약의 사건도 의미가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으면, 믿기 이전의 인생도 어떤 의미가 있게 됩니다)
오늘은 송년주일 임과 동시에,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하는 성탄주일 이기도 합니다.
C S 루이스의 표현대로
'성자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신 사건'이, 예수님의 성탄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으로 인류의 기원이 주전 BC 과 주후 AD 로 나뉘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이전의 과거가
이 땅에 강림하신 예수님 안에서
그 의미가 새로워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이전의 구약 성경이, 신약 성경의 예수님 안에서
그 의미가 새로워진 것과 같습니다.
누가복음 4장에 의하면, 이 땅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나신 나살에서의 회당에서 구약 성경 이사야 61장을 읽으심으로
당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친히 밝히셨습니다.
눅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영육 간에 핍절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복음에 대한 정보 혹은 지식의 전달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복음 전파는, 죄와 악의 포로된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고
세상에 보이는 것에만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인간으로 하여금
보이는 것 너머의, 보이지 않는 영혼을 보게 하시고
자기 욕망의 억압 속에 갇혀 있는 인간에게, 해방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께서 구약 성경 레위기 25장을 통해 약속하신
희년의 해방을 실행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일평생토록 죄와 악의 쇠사슬에 묶여서, 목전의 것만 바라보는 근시안으로
자기 욕망의 억압 속에 갇혀 살아가는 인생이라면
설령 새해를 100번을 새로 맞이한다 할지라도
그 모든 시간은 순식간에 무의미한 과거로 증발해 버릴 것이요,
그보다 더 덧없고 허무한 인생은 없을 것입니다.
그 인생을 아무리 미화한다 한들, 이스라엘 백성들을 400년 동안 예속했던
이집트 노예살이와 조금 더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자신을 억압하고 있는 유무형의 모든 억압 속에서
예수님의 은혜로 출애굽하여, 보이는 광야 너머의 보이지 않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지향하면서 살게 된다면
그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현재와 미래 속에서
지나간 이집트 노예살이 과거의 시간까지도
새로운 시간으로 되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살아있는 복음을 우리에게 전해주시고
우리의 것으로 삼아주시기 위해서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오늘 성탄주일과 송년주일을 동시에 맞는 우리를 위해
2천 년 전부터 예비해 두신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바울,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만나기 이전 과거의 삶도 의미가 있게 되다.
바울은 지금 아그립바 왕의 요청으로, 베스도 총독이 개최한 청문회장에서
자기 변증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에게 자기 변증은 주님을 증언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지금 예수님을 부정하면서 교회를 짓밟던 자기에게
예수님께서 어떻게 임해 주셨는지를, 청문회장에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213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다메섹의 그리스도인들까지 색출하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향하던 청년 바울에게
예수님께서 정오의 태양보다 더 밝은 빛으로 임하셨습니다.
그 빛으로 인해서, 바울과 그의 일행은 모두 땅바닥에 고꾸라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유독 청년 바울을 지목하시어
당시 그의 이름인 '사울'로 그를 부르시면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6:14절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예수님께서 청년 바울에게 히브리어로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14
청년 바울은 로마인이거나 인도인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로마 시민권 소유자였을 뿐, 청년 바울은 엄연히 유대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유대인으로 오셨습니다.
따라서 유대인이셨던 예수님께서 유대인 청년 바울에게 유대인의 상용어인
히브리어로 말씀하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뿐, 조금도 새삼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본문은 예수님께서 청년 바울에게 히브리어로 말씀하셨음을 굳이 밝히고 있습니다.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닌데도, 마치 대단한 일인 것처럼 특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당신을 짓밟던 청년 폭도 바울에게
당신을 맞추어 주셨음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신을 만나기 위해서는, 끝도 모를 순례의 길을 헤매야 한다'고 오해하던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 인간이 하나님께 먼저 자신을 맞추어 하나님을 찾아가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셨으면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는 인간 가운데 어느 인간이
자신을 하나님께 맞추어, 하나님을 찾아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불가능하기에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을 맞추어 주시기 위해
인간의 역사 속으로 침투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짐승의 외양간 구유에서 태어나신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짐승의 구유는 짐승의 밥그릇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더러운 짐승의 밥통(구유)을 갓태어난
자기 자식의 침대로 삼지는 않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성자 하나님이셨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지체가 높은 사람도
당시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로마 제국의 황제마저도
성자 하나님께는 그 발치에도 미칠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가장 비천하고 가난한 지체보다
더 낮은 지체로 이 땅에 오셨고
이 땅에서 가장 높은 지체보다 더 높은 분이셨기에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을 맞추어 주실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도, 부유한 사람에게도
비천한 사람에게도, 지체가 높은 사람에게도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도, 학식이 뛰어난 사람에게도
죄와 악의 사슬에 얽매인 사람에게도
자기 근시안과 자기 욕망의 억압 속에 갇혀 있는 사람에게도
예수님께서는 온전히 당신을 맞추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부정하던 청년 폭도 바울에게도 당신을 맞추어서
히브리어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청년 바울이 한국인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한국인 청년 바울에게
당신을 맞추어 한국어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을 맞추어 주시는 것은
낮고 낮은 인간의 수준에 머물러 정착하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당신을 맞추어 먼저 인간에게 찾아가셔서
당신의 짧지 않은 손으로 인간을 붙잡아
당신과 동행하는 새로운 존재로 일으켜 세워주시기 위함입니다.
히브리어로 바울을 부르신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히브리어로 명령하셨습니다.
26:16~18절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땅바닥에 거꾸러져 있던 청년 바울에게
예수님께서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다시 일어나서 교회를 짓밟던 옛 삶을 계속하라'는 말씀은 당연히 아니었습니다.
'그릇된 옛 삶에서 벗어나서
죄와 욕망과 어둠과 죽음의 억압에 갇혀있는 세상 사람들을 구해내는
예수님의 증인으로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부정하던 청년 바울, 그 폭도가
대체 어떻게 그렇게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살라고 명령하시기만 하면, 그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까?
청년 폭도 바울을, 죽음과 죄악의 그릇된 삶에서 일으켜 세워주신 예수님께서
그가 당신의 증인으로 살 수 있도록,
당신의 짧지 않은 손으로 계속 붙드시고 이끌어 주실 것인즉..
지금부터 그렇게 살아가라는 명령이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부정하던 청년폭도 바울에게 당신을 맞추어
먼저 바울을 찾아가셔서 당신과 동행하는 새로운 존재로
그를 일으켜 세워주시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유대교의 엘리트였던 청년 바울은, 누구보다 투철한 사명감으로 일평생토록
예수님을 부정하면서 교회 짓밟기를 천직으로 삼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 열심으로 바울은 분명히 유대교 최고 지도자 자리를 꿰어찼을 것이요.
대제사장들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와 악의 사슬에 얽메인 길이요.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근시안의 길이요.
자기의 욕망의 억압 속에 갇힌 길이요,
결국 죽음의 형벌로 이어지는
절망과 좌절의 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어긋난 길 위의 청년 폭도 바울에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맞추어 먼저 찾아가 주시고
당신의 증인으로 살 수 있게끔, 그를 붙잡아 일으켜 세워주신 것입니다.
그 결과 주님 안에서, 바울에게 주어진 새로운 현재와 미래 속에서
무의미했던 바울의 과거의 시간마저 새로운 의미로 되살아났습니다.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예수님을 부정했던 바울이었기에
자신을 구원해 주신 예수님을 위해서,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살 수 있었고
심지어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조차 아까워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 안에서 바울의 과거 현재 미래가 단절되지 않고 한데 어우러짐으로써
바울은 성경을 통해 우리가 아는 바 대로의 위대한 사도바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의미있는 인생으로 전환된 걸인
예수님께서 청년 바울처럼, 젊고 유명한 엘리트에게만
당신을 맞추어 새로운 존재로 일으켜 세워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전 동쪽 출입문인 니카노르 문은
예루살렘 출입문 가운데에서 가장 아름다워
사람들은 그 문을 미문, Beautiful Gate라고 불렀습니다.
행3장에 의하면 그 미문 앞에는 매일 구걸로 연명하는 걸인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 선천성 하반신 마비자였던 그 걸인의 나이가 40여세였다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4:22
2천년 전 당시 평균 수명으로 40여세라면, 이미 인생 만년에 접어든 나이였습니다.
특히 걸인이고 40여세라면, 죽음을 앞둔 노인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선천성 하반신 마비자로 태어나서, 인생 만년에 접어들기까지 구걸로 연명해서
살아가야 하는 걸인이라면
그 걸인은 가장 가난하고 비천하고 불쌍한 인간 표상이었습니다.
그 선천성 하반신 마비자 걸인이
매일 '아름다운 미문 앞에서' 구걸을 했기에
아름다운 미문과 대조된 그의 몰골은 더 비참하고 더 불쌍해 보였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요한과 함께 성전에서 기도하기 위해서 그 미문을 들어가려 하다가
자기에게 적선을 요청하는 그 걸인을 응시했습니다.
베드로가 그 걸인에게, 자기를 주목할 것을 요청했고
걸인은 베드로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고, 베드로에게 자기의 온 시선을 집중시켰습니다.
선 채로 선천성 하반신 마비자를 내려다보는 베드로의 시선과
땅바닥에 앉아 베드로를 올려다보는 선천성 하반신 마비자의 시선이 맞부딪혔습니다.
베드로가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말을 했습니다.
'형제여, 나에게 그대가 요구하는 금과 은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귀한 것을 드리겠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십시오!' 3:6
그리고 베드로는, 그 선천성 하반신 마비자 걸인의 오른손을 붙잡아 일으켰습니다.
겉으로는 분명히 베드로가 그 걸인의 손을 붙잡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태어난 이래 단 한 번도 자기 발로 일어서 본 적이 없는
그 비천하고 불쌍한 선천성 하반신 마비자 걸인을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통해 먼저 찾아가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걸인에게 당신을 맞추어, 당신의 짧지 않은 손으로
그 걸인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사울에게 히브리어로 맞춰 주신 것처럼
그 순간 걸인의 발목과 발에 힘이 들어가, 그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일어났습니다!
인생 만년에 접어들어서야, 자기 발로 난생 처음 일어서 본 것입니다.
그가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일평생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었던 미문을 통과해서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선천성 하반신 마비자로 미문 앞에서 구걸로 연명해야 했던
그 걸인의 지난 과거 40여 년의 세월은
절망과 좌절과 자포자기에 갇힌 형극의 세월이었습니다.
그가 보잘것없는 자신에게
당신을 맞추어 주신 예수님에 의해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게 된 것은
그동안 그를 짓눌러왔던 절망과 좌절과 자포자기의 억압 속에서
해방된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얻게 된 새로운 현재와 미래 속에서
40년 동안 무의미하게 흘려보내었던 것과 같았던
지난 과거의 시간이 새로운 의미로 되살아나게 되었습니다.
40년 동안이나 선천성 하반신 마비자로 살아왔던 만큼
자기를 일으켜 세워주신 예수님을 위해
누구보다도 온 마음을 다해, 자신의 삶을 드리며 예수님과 동행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는 말
그 예수님께서 성탄주일과 송년주일을 동시에 맞은 우리 가운데에 지금 임해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 각자의 수준에 맞게 당신을 우리에게 맞추시며
우리를 붙잡아 일으켜 세워주시기 위해
당신의 짧지 않은 손을 우리에게 내밀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죄와 죽음의 사슬에서 일어서십시다.
근시안과 자기 욕망의 억압에서부터 일어서십시다.
절망과 지지 좌절과 자포자기의 나락으로부터 일어서십시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손을 꼭 붙잡고, 새로운 미래, 새로운 현재가 활짝 펼쳐져 있는
새해의 '미문'안으로 들어가십시다.
우리가 무의미하게 흘려보내었던 과거의 시간들마저도
주님께서 주신 새로운 현재와 미래 속에서
새로운 의미로 되살아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동행하는 우리의 인생은, 결코 덫없지도 허무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과거 현재 미래가 한데 어우러져서
매일 새로운 의미로 되살아나는 우리의 인생은
날마다 새날, 새해로 엮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예수님의 성탄으로부터 비로소 가능해졌기에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 예수님의 성탄을 찬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