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yWhdD3INhfo
◈시내로 들어가라 행9:1-9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해 뽑히는 나무들
국토가 섬과 반도로 이루어져 있는 우리나라는, 매해 태풍으로 인한 피해를 입곤 합니다.
불과 2주 전만 해도 태풍 '나리'로 인해서 *2007년
제주지역이 사상 유례 없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건물, 교량, 도로, 항만 등 시설물을 포함해서
농작물 피해도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단 몇 시간의 태풍으로 인해서 그처럼 엄청난 피해가 초래된다면
태풍의 무서움을 새삼스럽게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태풍의 피해가 반도나 섬에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대륙은 대륙대로, 대륙성 기후로 인한 태풍으로 몸살을 앓곤 합니다.
제가 3년 동안 스위스 제네바에서 체류하는 동안
서부 유럽 대륙도 태풍으로 시달리곤 했습니다.
특별히 1999년 연말에 불어 닥쳤던 태풍은, 온 서부 유럽 대륙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시속 250KM가 넘는 태풍이 부는 동안, 단 몇 시간 만에
서부 유럽 대륙에서 무려 100여 명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서부 유럽 대륙 전체가 입은 재산적 피해액은
추산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라고 발표했습니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전국 96개 주 가운데, 60개 주를 자연재해지역으로 선포할 정도로
살인 태풍이었습니다.
이처럼 태풍의 위력과 무서움 그리고 피해 결과는
우리나라나 서부유럽 대륙이나 대동소이합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태풍이 왔을 경우에,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는 광경을 접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태풍의 위력을 이기지 못한 나무가 꺾여지는 경우는 있지만,
뿌리채 뽑혀 쓰러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반대로 서부 유럽 대륙에서는, 태풍의 위력 앞에서 꺾여지는 나무는 거의 없고
뿌리채 뽑혀 쓰러지는 나무들이 허다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곳의 태풍 위력이, 우리나라보다 강하기 때문인 것은 아닙니다.
태풍의 위력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웬만한 강풍 속에서도
뿌리채 뽑혀 나자빠지는 나무들이 서부유럽에 많이 있습니다.
작고 연약한 나무가 아니라, 20M가 넘는 거목들이
맥도 추지 못하고 그냥 쓰러져 넘어지고 뿌리가 뽑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나라와는 다른 기후 조건으로 인함입니다.
우리나라는 1년 12달 가운데, 비가 오는 우기가 세 달이 채 되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비가 오지 않는 건기가, 비가 오는 우기보다 3배 이상 긴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나무들은, 그 길고긴 우기 동안 살아남기 위해서
뿌리가 수맥을 찾아서, 땅속 깊이, 깊이 파고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뿌리 깊은 우리나라 나무들은, 웬만한 태풍 앞에서도
꺾어질지언정 뿌리채 뽑혀 쓰러지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혹한이 없는 서부 유럽 대륙에서는, 1년 내내 알맞게 비가 옵니다.
겨울에 잔디가 파릇파릇 살아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이처럼 사시사철 온 사방이 습한 땅이다 보니,
그곳에 있는 나무들은, 뿌리가 구태여 애를 써서 수고하며
땅 속 깊이 파고 들어가야 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저 편하게 옆으로 퍼지기만 해도, 온 사방이 물이기에
나무가 생존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얕은 뿌리로 살아가기에, 어느 날 태풍이 불면
나무는 속절없이 뿌리채 뽑혀 처참하게 쓰러지고 마는 것입니다.
제가 그곳에서 사는 동안, 태풍이 불거나 강풍이 지나간 다음에 산책을 나갑니다.
제가 산책하던 강변길을 따라서, 여기저기 뿌리채 뽑혀 나자빠진 나무들을 보게 됩니다.
그런 나무들의 공통점은, 높이는 20M가 넘는데도 불구하고,
뿌리의 깊이가 고작 50CM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얕은 뿌리로 살아가니, 느닷없이 불어오는 강풍 앞에서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을 리가 만무합니다.
동시에 그때마다 중요한 사실을 확인하곤 했습니다.
뿌리채 뽑혀 쓰러지는 나무들도 있지만,
그러나 여전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늠름하게 버티고 서 있는 나무들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 나무들은 똑같은 날,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태풍을 만났지만
모두 그 태풍을 이긴 나무들이었습니다.
그 나무들이 태풍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뿌리채 뽑혀 나자빠진 나무들보다도, 그 나무들의 뿌리가 더 깊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강풍 속에서 뿌리채 뽑혀 쓰러진 나무들은, 그 누구도 탓할 수가 없습니다.
바람을 원망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자기 자신의 책임입니다.
수고하며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리지 않고,
그저 편하고 안이하게 옆으로만 퍼져갔던 자기의 책임입니다.
그래서 강풍이 불어오면, 뿌리채 뽑혀 쓰러져 나가는데,
일단 뿌리채 뽑혀 쓰러진 나무에게는, 더 이상 생명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은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사울, 예수 태풍을 만나 뿌리채 뽑혀 쓰러지다
예루살렘 교회를 잔멸한 사울은, 그 여세를 몰아서 다메섹 원정에까지 나섰습니다.
그곳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마저도, 예루살렘으로 연행해서
종교 재판을 거쳐서 죽여버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윽고 다메섹이 가까워지고, 사울이 다메색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일망타진할 각오를
새삼스럽게 다질 즈음이었습니다.
9:3~5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다메섹을 지척에 두고 사울이 그만 '태풍'을 만났습니다.
빛이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태풍이었습니다.
그 빛의 태풍을 만나는 순간, 사울은 땅바닥에 꼬꾸라지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그로 인해서 시력을 상실하고, 실의에 빠져 식음도 전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 이상 자기 인생은, 더 이상 먹고 마실 의미도 없는 인생이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태풍 앞에서,
이제껏 살아온 사울의 인생의 뿌리가, 송두리째 뽑혀 나자빠진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었습니다. 누구를 원망할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사울 그 자신의 책임이었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뿌리 내리지 않았던 사울 자신의 책임이었습니다.
그릇된 자기 신념과, 자기 판단에만 뿌리 박았던 사울, 자기 자신의 책임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불의와 한편이 되어 의로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해왔던 사울 그 자신의 책임이었습니다.
따라서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태풍을 만나,
그의 삶이 뿌리채 뽑혀 쓰러졌다고 하는 것은
뿌리채 뽑혀 나자빠진 나무들처럼
사울의 인생은 거기에서 그렇게 끝나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번역이 빠져 있습니다만
일부 헬라어 성경 원문에는 본문 6절이 '그러나'를 의미하는 헬라어 '알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주1)
:6 '(그러나)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NASB 성경도 But 으로 시작함.
'그러나'는 이전의 내용과 상반되는 내용이 나올 때 사용되는 접속사입니다.
6절 이전의 내용은,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의 인생이 뿌리채 뽑혀져 나자빠지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 그리스도의 태풍을 만나서
그 인생의 뿌리가 송두리째 뽑힌 사울의 인생은,
그것으로 끝장이 났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이야기가 "그러나" 라는 이 한 단어 속에서 대역전을 이루게 됩니다.
그것은 이제까지 그릇된 인생을 살아온 사울의 인생이
뿌리채 뽑혀 끝장을 맞긴 했지만,
그러나 그의 인생이 그토록 무의미하게 끝나도록 내버려 두시지만은 않겠다는
주님의 선언이었습니다.
그것이 사울의 인생의 끝장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 끝장이 사울 인생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주님의 위대한 약속이었습니다.
사울의 인생이 끝장났다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뿌리 내리고, 그릇된 삶을 살던 과거의 삶이 끝장났다는 것이요,
새로운 시작이라 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뿌리 내리고
새로운 생명의 삶을 살게 됨을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아나니아를 예비해 놓으시다
그래서 주님께서 본문 6절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6 '(그러나)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주님께서는, 이미 인생의 뿌리가 뽑힌 사울에게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말해줄 사람을
다메섹에 예비해 두고 계셨기 때문에, 다메섹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릇된 삶을 사는 사울의 인생을 송두리째 뿌리 뽑으시고
그제야 비로소 사방을 두리번거리시며 '누구를 사울에게 붙여줄까?' 하며
즉석에서 사람을 찾으신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울의 그릇된 인생을 뿌리 뽑으시기 이전에,
이미 그를 위하여 필요한 사람을, 다메섹에 예비해 두고 계셨습니다.
마치 의사가 환자의 환부를, 메스로 일단 도려놓고 보는 것이 아니라
수술하기 전에 필요한 기구와 약, 그리고 필요한 모든 조처를 완벽하게 준비한 뒤에야
집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죄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의 인생을 뿌리채 뽑으시기만 하는
공의의 손만 가지신 주님이시라면
그날 다메섹 도상에서 인생의 뿌리가 뽑힌 사울의 삶은
그것으로 끝나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만약 주님께서, 죄 가운데에 살고 있는 죄인의 허물을
무조건 덮어주기만 하시는 사랑의 손만 지니고 계셨다면,
주님께서는 죽음을 향해 치닫고 있는 사울을, 그냥 내버려 두셨을 것입니다.
그 어느 쪽이든 사울의 인생은 영원히 파멸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릇된 인생을 사는 사울의 삶을 뿌리 뽑아주시는 공의의 손을 지니신 동시에,
그로 하여금 당신 안에 뿌리 내리게 하시는 사랑의 손을 함께 지니고 계신 분이시기에
주님의 그 공의와 사랑의 두 손 속에서, 사울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9:8~9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사울은 다메섹으로 들어가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하지만 시력을 상실한 사울은,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서야 다메섹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사울이, 인생의 뿌리가 뽑히기 이전에, 본문 3절의 사울은
자기 스스로, 자기 발로 걸어서 다메섹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태풍 속에서 인생의 뿌리가 뽑힌 뒤에, 8절의 사울은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아니 그 배후에 계시는 주님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예전의 사울은, 자기 신념을 좇아, 자기도 모르게 진리를 짓밟기 위해
다메섹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사울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기 삶을 전적으로 맡기기 위해 다메섹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예전의 사울은, 자기 자신에게 뿌리 내리고, 자기 자신도 모르게 죽음의 씨와 열매를
뿌리고 거두기 위해 다메섹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리고
전혀 새로운 생명의 삶을 살기 위해 다메섹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예전의 사울은 교만하게 두 눈을 치켜세우고 다메섹을 향했지만
지금 사울은 두 눈을 감고, 입을 굳게 닫은 채
낮고 낮은 경손한 마음으로 다메섹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3절의 사울도 다메섹을 향해 갔고, 8절의 사울도 역시 다메섹을 향해 나아가지만
그러나 그 행보의 동기와, 의미와, 목적은 이처럼 달랐습니다.
2절과 8절의 대비를 눈여겨 보십시오.
9: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여기서 주목할 표현이 있는데, '잡아오려 함이라' 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러' 갔습니다.
*아고, to lead, to condust, to bring
그런데 잡힌 자가 누구죠?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8절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에이스 아고
여기서 누가의 재미있는 워드 플레이가 나오는 거죠. *아고 - 아고
여기 보면 막상 끌려간 자가 누구예요? 사울 자신입니다.
사울은 그리스도인을 잡으러 갔지만,
오히려 예수님의 손에 붙잡힌 자가 되었습니다. 본문에는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8
자 이때부터 사울은 십자가의 원수에서 → 십자가의 종이 되었습니다.
복음을 훼방하는 자에서 → 복음의 일꾼이 되었고요.
예수님을 핍박하는 자에서 → 예수님을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 때부터 사울의 삶은 180도로 변합니다.
이때부터 사울은 이방인에게, 예수님을 증거 하는 하나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왜 사흘 동안 눈이 감겨져 있었나?
한국인의 식탁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김치는
잘 아시다시피 독특한 냄새를 지니고 있습니다.
행여 실수로 김치가 옷에 떨어지게 되면, 옷에 베인 김치 냄새는 쉬 가셔지지 않습니다.
그처럼 독특한 냄새를 지닌 김치를 오랫도록 보관하던 김치 독을
어느 날 쌀독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김치 독 속의 김치를 다 비워낸 뒤에, 독 안을 깨끗하게 씻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아무리 김치를 비워내고 물로 씻어도
독 속에 스며있는 냄새가 제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상태에서 쌀을 넣는다면, 독 속에 스며있는 김치 냄새가 쌀에게 베어들게 되어서
쌀을 망치게 됩니다.
김치독을 쌀독으로 쓰기 위해서는, 김치를 비워내고 물로 씻을 뿐만 아니라
상당 시간 동안 스며 있는 김치 냄새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를테면 김치독은 마지막 김치 냄새까지 다 토해내고서야
비로소 쌀독으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울을 위해 다메섹에 아나니아를 예비해 두셨습니다.
땅바닥에 꼬꾸라져 있던 사울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앞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메섹으로 들어가라는 주님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조금 전까지 건장하기만 했던 한 청년이, 순식간에 시력을 상실하고
남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면,
그것은 그 당사자에게는 충격과 근심의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사울은, 크게 걱정하거나 근심할 일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왜냐면 주님께서 사울에게 '네가 다메섹으로 들어가면
사울 너를 도울 사람을 이미 예비해 두셨다' 라고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6
주님의 말씀에 사울이 즉시 순종했다면
사울이 다메섹에 들어가는 즉시, 주님께서 밝히신 그 사람이 즉각 나타나
사울을 영접해 주어야만 합니다. 상실한 사울의 시력을 그가 회복시켜 주어야 합니다.
9:9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10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하지만 사울이 다메섹에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약속하신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도 그 사람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시력을 상실했을망정, 길 위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희망에 차서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건만, 아무런 조짐이 보이지 않을 때
사울이 얼마나 절망했겠습니까?
더 이상 주님의 음성도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그 절망적인 시간과 날이, 무려 사흘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여러분, 미래가 전혀 보장되지 않은 가운데.. 절망적인 상태의 사울에게
그 사흘은.. 마치 3년처럼 길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사흘 후에 눈을 뜬다는 보장이 없었으니까요.
우리는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사울에게 다메섹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하셨고
그러면 앞으로 사울이 행할 것을 그에게 일러줄 사람을
주님께서 예비해 두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6
그런데 왜 그 사람이 즉각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까?
왜 사울을 흑암 속에 사흘씩이나 내버려 두십니까?
김치 독에 김치를 비워내고 그 속을 물로 씻어낸다고 해서,
당장 쌀독으로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김치독이 자기 속에 배어있는 김치 냄새까지도 다 털어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정 시간이 필요합니다.
만약에 이때 사울이,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에 들어가는 순간에
아나니아가 즉각 나와서 두 손으로 사울을 환영하고
그의 안수기도로 사울의 잃어버린 시력이 회복되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사울은 주님의 은혜에 감읍하면서
자기에게 베푸신 주님의 사랑을 온중심으로 소리쳐 찬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감동적인 순간이 지난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더 이상 유대교인이 아니라
주님을 좇는 그리스도인으로 분명히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평소와는 달리 결정적인 순간만 되면, 사울은 옛 삶으로 회귀하곤 했을 것입니다.
그에게 아직까지도 털어버리지 못한 옛 잔재가 남아있어서
결정적인 순간이 닥칠 때마다, 사울의 발목을 끌어당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께서 사울을, 보지 못하는 상태 가운데 사흘 동안 내버려 두신 이유였습니다.
그가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던 것은 :9
주님께서 그의 식욕을 앗아 가셨기 때문에 식음을 전폐한 것이 아니라
그가 자발적으로 금식을 행한 것이었습니다.
사흘 동안의 바로 그 어둠 속에서, 그 처절한 고독 속에서,
그 금식 속에서, 사울은 자신의 옛 삶을 되돌아보며
뿌리 뽑힌 자기 자신에게 남아있는 옛 삶의 잔재를 다 털어낼 수 있었습니다.
사울이 온전히 죽어지는 그 사흘로 인해
사울은 비로소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사울을 앞을 보지 못하는 암흑 속에 사흘 동안 내버려 두셨던 것은
절대로 사울을 외면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흘 동안이야말로, 주님께서는 사울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사울을 돕고 계셨습니다.
그 사흘 동안 주님께서 사울에게 침묵하셨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침묵이야말로 사울을 사울되게 해주시기 위한 주님의 가장 확실한 응답이었습니다.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한 요나가
니느웨와는 정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요나가 탄 배가 폭풍 속에 휩쓸리게 되었고
요나는 폭풍이 몰아치는 그 바다 속에 던져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위해서 이미 큰 물고기를 바다 속에 예비해 두셨습니다.
요나가 폭풍의 바다 속에 떨어지는 즉각, 그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켰습니다.
이를테면 그 큰 물고기로 인해서, 요나는 생명을 구한 것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요나를 위하여 그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다면,
그 큰 물고기는 요나를 삼키는 즉시 가장 가까운 육지에 요나를 토해 내어 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 큰 물고기는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악취와 역겨움으로 가득 찬 그 큰 물고기의 더러운 뱃속에
사흘 동안 갇혀 있어야만 했습니다. *토사물을 상상해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짓밟은 요나를 폭풍의 바다 속에 내던져지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공의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요나를, 물고기의 뱃속에, 사흘 동안 갇혀 있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사흘 동안 물고기 배 속에 갇혀 있는 동안, 그 절망의 심연속에서
요나는 비로소 자신의 실상을 보았습니다.
그 사흘 동안 옛 삶의 모든 부정적인 잔재도 다 쓸어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흘로 인해, 요나는 전혀 새로운 요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사흘 동안 물고기 뱃속에 갇혀 있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결코 그를 외면하신 것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이야말로 하나님께서는 가장 확실하게 요나를 돕고 계셨습니다.
그 사흘 동안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무응답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흘간의 무응답이야말로, 요나를 요나로 세워주시기 위한
요나 일생에서 그가 받았던 가장 큰 복음입니다.
◑적용
우리 역시 매일매일 다메섹을 향해 걷고 있는 사람들임을 알고 계십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일을 하다가, 밤이 되면 잠자리에 드는,
그토록 똑같은 삶을 매일 반복한다는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다메섹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8절의 사울이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만약 우리가 8절의 사울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인생은 3절의 사울로 끝나버리고 말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자신있고 당당해 보였지만,
그러나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삶을 반복하다가,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의 태풍 앞에서 그 인생이 뿌리채 뽑혀 나자빠진 사울 말입니다.
우리가 한평생을 열심을 다해 살고 난 뒤에, 우리의 인생이 그렇게 끝나버린다면,
그보다도 더 허망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8절의 사울이 되어야 합니다.
여전히 다메섹을 향하고 있긴 하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가고 있는 사울 말입니다.
3절의 사울이, 8절의 사울로 일대 변화를 꾀할 수 있었던 그 한가운데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리 잡고 계셨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공의의 손으로 사울의 그릇된 삶은 뿌리 채 뽑으시고
당신의 사랑의 손으로, 그로하여금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심으로
3절의 사울은, 8절의 사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모두 8절의 사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 반드시 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본문 속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각자와 함께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무자비한 인간처럼,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두 손으로 치시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공의의 손으로는, 우리의 그릇된 삶을 뿌리째 뽑으시지만,
당신의 사랑의 손으로는, 우리로 하여금 당신 속에 새롭게 뿌리내리도록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공의는, 사랑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공의는, 사랑하게 하는 힘입니다.
주님께서는 무책임한 인간이나 부모처럼, 우리를 두 손으로 쓰다듬어 주시지 않습니다.
사랑의 한 손으로는, 우리를 쓰다듬어 주시지만,
공의의 또 다른 손으로는, 자기 자만과 자기 욕망에 빠져들어가는 우리를
언제나 흔들어 깨우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은, 공의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공의를 행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사랑을 상실한 공의, 정의는, 무자비한 폭력에 지나지 않고,
공의를 결여한 사랑은 무책임한 방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언제나 공의의 손과 사랑의 손을 함께
우리를 위해 사용하시고 역사해 주십니다.
주님의 공의와 사랑의 손이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기에
우리는 그분 안에서 8절의 사울처럼 살 수 있고
우리가 매일 걷는 다메섹의 의미가 날로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는다면,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 역시
주님의 공의의 손과, 사랑의 손을 지니고 살아야 됨을 알게 됩니다.
주님의 공의의 손을 지니고, 이 세상의 불의와 과감하게 맞서 싸우되
사랑의 손이 반드시 함께 수반되어야만 합니다.
그때만 우리가 외치는 공의, 정의가
사람을 죽이는 폭력이 아니라, 죽은 사람마저 살리는 생명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손을 지니고, 우리가 품어야 될 사람을 품지만,
그러나 반드시 공의의 손이 함께 해야만 합니다.
그때에만 사랑의 미명 하에, 불의한 사람과 야합하지 않을 수 있고,
그때에만 우리의 사랑이, 상대를 타락시키는 마약이 아니라, 참된 생명의 묘약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기 삶의 뿌리를 내린 그리스도인이
공의의 손과 사랑의 손을 지니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의무이자, 책임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울은 여전히 다메섹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연행하려던 예전과는 달리
지금의 사울에게 다메섹은, 그 자신이 사도행전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새롭게 뿌리 내린 그는
주님의 공의와 사랑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이 사랑과 공의의 손을 지니고 다메섹에서 나왔습니다.
그 이후부터 그의 삶 자체가 사도행전이 되었고
그 한 사람으로 인하여 인류의 역사가 새로워졌습니다.
깊이 뿌리 내리지 못해, 어느 날 느닷없이 불어닥친 태풍 앞에서
뿌리채 뽑혀 쓰러진 나무는
더 이상 생명의 기회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은 자연의 대법칙이지만
설령 그런 인간이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런 인간 역시도 새 역사의 주역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위대한 복음의 법칙입니다.
여러분 혹 인생의 폭풍을 맞고 지금 쓰러져 계십니까? 아무도 원망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의 탓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쓰러진 우리 각자의 책임입니다.
그렇다고 절대로 절망하지는 마십시오.
오히려 주님께서 사랑의 손과 공의의 손으로 지금 내게 임해 계심으로 인해
주님께 감사드리며 주님을 찬양하십시다.
우리에게 임해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삶의 뿌리를 새롭게 내리십시다.
주님의 공의의 손과 사랑의 손에, 우리의 삶을 온전히 의탁하십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과 공의의 손을, 우리 자신이 지니는 자들이 되십시다.
그 순간부터 우리의 삶 자체가 사도행전이 될 것이요,
우리로 인해 인류 역사의 한 부분이 반드시 새로워질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를 죄 가운데 방치해 두시지 않고
우리 각자로 하여금 적절한 인생 태풍을 맞게 하시고
그 인생 태풍 속에서 우리의 그릇된 삶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주신 주님,
우리를 위한 주님의 그 공의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릇된 삶을 뿌리채 뽑아버리시는 것으로 그치지 않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진리와 생명에 새로이 뿌리 내리게 하신 주님,
우리를 향한 주님의 그 사랑을 찬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치시되 두 손으로 치시지 않고
우리를 쓰다듬어 주시되 두 손으로 쓰다듬으시지 않고
언제나 공의와 사랑의 두 손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셨기에
이 시간 우리가 이런 모습으로, 주님 안에, 주님 앞에 있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현실의 삶을 회피하거나
산속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말게 도와주옵소서.
이제부터 우리 모두 오늘 본문 8절 말씀의 사울처럼 살아가게 도와주옵소서.
주님의 진리와 생명에 깊이 깊이, 날이 갈수록 더욱 깊이 뿌리 내리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안에 뿌리 내린 우리가, 주님의 공의와 사랑의 두 손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그 두 손을 지니고 우리 각자의 다메섹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게 하여 주옵소서.
그 두 손으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불의와 맞서게 하시고
살려야 할 사람을 살리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걷는 우리의 다메섹이 사도행전의 관문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모두 우리의 코끝에 호흡이 남아있는 동안
세상의 어떤 바람에도 요동치지 않는
뿌리 깊은 진리의 나무로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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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morphological GNT 에는 '알라'로 시작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