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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바 권사님 행11:23
행11:22~24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집사들은 사도행전 6장에 기록된 스데반, 빌립, 브로고노,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니골라, 일곱 집사이고
최초의 여집사님은 로마서 15장에 기록된 뵈뵈일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장로가 누구일까 궁금하게 여기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교회의 장로 제도는 성경이 기록된 이후에 확립되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장로라는 말은 교회의 직분으로서 장로라기보다, 지도자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개신 교회의 여러 교파 가운데 침례교가 있는데
침례교는 신약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를 준수하는 것을 특징으로 내세웁니다.
세례도 신약에 기록된대로 물속에 푹 들어갔다가 나오는 침례(浸禮)방식을 실시합니다.
이 교파에서는 신약 시대에는 장로 제도가 없었다고, 교회에 장로를 두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장로 제도가 없는 것이 현실적으로는 제약이 많아
침례 교회 가운데 큰 교회들은 장로 제도를 두고 있는 교회들이 여럿이고
총회 때마다 우리도 장로 제도를 두자는 건의가 끊이지 않는 것을 봅니다.
예전에는 침례교에도 감로(監老)라고 해서 장로와 비슷한 직분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권사는 누구일까?
성경에는 권사라는 직분의 이름이 아예 등장하지 않습니다.
요한 웨슬리가 1700년대 중반에 감리교를 창설하고 Exhorter라고 해서 권사 제도를 두었습니다.
Exhorter는 "간곡하게 권면하는 사람", 이런 뜻이죠.
감리교가 미국에 전파된 뒤 이 권사 제도는 미국 감리교에서 더 발달했는데
미국 감리 교회는 1939년에는 권사 제도를 없애 버렸습니다.
한국에 감리교가 들어 왔을 때는 권사를 견습(見習)이라고 했습니다.
권사를 왜 견습이라고 불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초기 교회에서 권사들이 한 일들을 살펴보면 아마도 "견습 지도자"라는 뜻으로
그렇게 부른 것 같습니다.
그 다음에는 권도사(勸道師) - 도를 권하는 선생님이라고 부르다가
권사라는 이름으로 확정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권사를 한자로는 권할 勸, 스승 師를 씁니다 '권하는 선생'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 ‘권사’라는 직분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지만
성경에서 권사의 일을 한 인물을 찿으라면 바나바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나라는 이름의 뜻이 권위자(勸慰子)라고 되어 있습니다.
한글로만 보면 "권위 있는 사람", 이렇게 생각하기 쉬운데
그런 뜻이 아니고 "권면하고 위로하는 아들"(권위자의 '자'는 놈者가 아니고, 아들 子)입니다.
새로 번역된 한글 성경들은 이 부분을 "위로의 아들"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들 가운데는 이 부분을 "격려의 아들"이라고 번역한 성경도 있습니다.
별명의 뜻도 그렇고 그가 한 일도 그렇고,
바나바는 오늘날 권사가 하는 일들을 잘 감당한 사람이었습니다.
몇 해 전에 저희 교회가 권사회를 만들 때
고 배상길 목사님께서 그 이름을 "바나바 봉사회"라고 지었지요.
배 목사님은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권사가 바나바라고 생각하고
권사 모임에 바나바 봉사회라는 이름을 붙인 것 같습니다.
◑오늘 바람직한 권사의 모습을 바나바에게서 찿으며 오늘 취임하는 권사님들,
그리고 우리 모두 3가지 교훈을 얻으려고 합니다.
▲1. 우리 모두 권위의 일, 즉 권면하고 위로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권면하는 일, 위로하는 일, 그리고 격려하는 일,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분들은 권사님들 뿐만 아니고
모두가 이웃 사람들을 권면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존재들이 되어야합니다.
권사님들만 권사가 아니라, 교인 모두 권사가 되어야 합니다.
군인이 되면 포병이건 통신병이건 공병이건, 공군이건, 해군이건
소총은 누구나 쏠줄 알아야 합니다.
목사이든지 장로님이든지 집사님이든지 아직 직분을 받지 않은 분이든지
모두 이웃을 권면하고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크리스천의 기본적인 일입니다.
특별히 올해 대학 입시에서 뜻을 이루지 못한 수험생들을, 부모님들과 성도 여러분들,
잘 위로하시고 격려하셔서 용기를 가지고 재도전에 임할 수 있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 <위로>
△나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한 마디 던진 비난의 말이 상대방에게는
엄청난 상처가 되는 일이 있습니다. 교도소에 수감되어 장기 복역중인 어떤 깡패 두목이
교도소 선교를 하는 목사님에게 마음 문을 열게 되자 이런 말을 털어놓았다고 합니다.
"목사님, 제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저도 어렸을 때는 주일 학교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좀 못되게 굴었습니다. 제가 성격이 못되어서 못되게 굴기도 했지만
교회에서는 못되게 굴어도 심하게 야단치지 않는 것이 재미 있어서 더 못되게 굴었습니다.
학교에서 그렇게 하면 당장 벌 받고 우리 집이 매우 엄해서 집에서도 그렇게 할 수 없었는데
교회에서는 좀 못되게 굴어도 그렇게 하지 않기에 재미가 있어서
일부러 더 못되게 굴었습니다.
그런데 주일 학교 선생님이 견디다 견디다 못해 하루는 저를 보고
'너 같은 것은 교회 안 나와도 좋으니 다음 주일부터는 나오지 말아!' 한마디 했습니다.
그 소리가 상처가 되어 그 다음 주일부터 교회에 나오지 않았고
악의 수렁에 깊이 빠져 결국 이렇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된 것은 전적으로 제 책임입니다만
주일학교 선생님의 '너 같은 것은 교회 안 나와도 좋으니 다음 주일부터는 나오지 말아!'
그 한 마디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 마디 상처되는 말의 영향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여기 교회 학교 선생님들,
잘 새겨들으시기 바랍니다.
△반대로 나는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한 마디 격려한 것이
상대방에게는 큰 힘이 되는 일을 자주 체험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습관적으로 권면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의 교육법에 대한 책을 보면 유대인의 학교에서는
100까지 세어야 할 학년의 학생이 100까지 세지 못하면, 성적표에 이렇게 적는다고 합니다.
"이 아이는 열까지 잘 셀 수 있음. 조금만 더 잘 지도하면 백 까지도 셀 수 있을 것임“
이렇게 격려 속에서 자란 아이들이 성장해서 노벨상을 많이 받게 되는 것 아닙니까?
△여기 권면이라는 말 속에는 상담이라는 뜻도 있고 지도라는 뜻도 있습니다.
교회는 성도들을 위로하는 공동체입니다. 여러분 이 시간에 위로 충만하게 받으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또 이 세상을 권면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기관입니다.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을 잘 감당하는 교회가 성장합니다.
1800년대 말에 우리나라에 들어 온 기독교가 크게 성장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그 때 일본의 침략에 시달리면서 소망 둘 곳을 찿지 못하고 있던 이 민족을
교회가 위로하고 격려하며 소망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6․25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가 되어야합니다.
경제적인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을 향해 교회는
이 어려움의 원인이 우리의 과소비와 무절제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면서
동시에 이 나라를 위로하고 소망을 주어야 합니다.
경제적인 문제로 명예 퇴직, 정리 해고, 부도의 위험 앞에서 불안에 떨고 있는 분들을
잘 권면하고 위로하고 새힘을 가지고 일어설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이사야서 중간 부분의 시작인 40장은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라는 말로 열리는데
이 시대의 교회는 이 말씀을 새롭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바나바 권사님은 권면하고 위로하는 일을 잘 감당했습니다.
얼마나 잘 감당했는지 본명보다 별명이 더 유명해졌습니다.
바나바가 본명인지 알고 있는 분들이 많은데, 바나바는 사실은 별명입니다.
본명은 무엇입니까? 요셉입니다.
본명은 요셉인데 권면하고 위로하는 일을 너무 잘 하니까
사도들이 "아, 저 사람은 위로의 아들 - 바나바다" 이렇게 말했고
그것이 본명보다 더 유명해져서, 성경에도 아예 바나바라는 별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나바 권사님을 본받아서 권면하고 위로하고 격려 잘 하는 교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오늘 새로 취임하는 권사님들 그렇게 되시기 바랍니다.
▲2. 둘째, 사람들이 잘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개하고 바울이 되었습니다. 박해자가 변하여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서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귀려고 했는데 제자들이 믿어 주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이 사람이 또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일까?' 했을 것입니다.
이 때 제자들에게 사울을 소개해 준 것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행9:27
성경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바울이 회심한 다음에
그 처지가 안팎으로 어려웠을 것입니다.
다메섹의 유대인들은 바울을 배신자로 규정하고
그를 죽이기로 결의하고 성문을 지킵니다.
바울은 밤에 광주리를 타고 다메섹 성에서 탈출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사귀려고 하는데, 제자들은 받아 주지 않습니다.
한쪽에서는 죽이려고 하고, 한쪽에서는 받아주지 않고, 진퇴양난의 소외감 속에서
갈등을 겪고 있는 바울을 격려하고 길을 열어준 것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틀림 없이 "내가 이 사람을 보증합니다.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보증도 섰을 것입니다. 요즘 보증 서기들 얼마나 싫어합니까?
나중에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 담임 목사가 되었을 때
바울은 고향인 다소에 은거하고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바울을 청해 동사 목사(同事牧師)로 같이 일하게 했습니다.
동사 목사란 같이 일하는 목사라는 뜻으로 예전에는 한국에도 동사 목사 제도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사도로, 또 선교사로서 출발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준 사람이 비로 바나바였습니다.
바나바가 빠진 바울은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어려운 처지에 있던 사람들, 길이 열리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
갈등 가운데 있던 사람들, 또는 평범한 사람들이 주변에 따뜻하게 살펴주고 격려해주고
보증을 서 주는 사람이 있어 큰 일을 하게 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저희 교회 원로 목사님이신 김찬국(金燦國) 목사님이 여러 가지 일을 하셨지만
그 가운데 큰 일이 후배와 제자들을 여기 저기 소개하고 길을 열어 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40대, 50대로서 연세 대학교 신과대학을 졸업하고 감리교에서 일하고 있는 목사님들 가운데
많은 분들이 김찬국 목사님의 소개와 도움으로 목회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잘 활동할 수 있도록 소개하고 돕는 일에도 힘써야 합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서 훌륭한 사람들을 많이 얻을 수 있습니다.
▲3. 셋째, 조용하고 겸손하고 안분지족(安分知足),
자기에게 주어진 분수에 만족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바나바는 수수께끼의 인물입니다.
그렇게 많이 활동하다가 사도행전 16장 이후에는 바나바의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바나바가 워낙 비중이 큰 인물이기 때문에
히브리서의 저자가 바바바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교부도 있고
외경 가운데 「바나바 복음서」, 「바나바 서신」, 「바나바 행전」,
이렇게 바나바와 관계있는 문서들이 여럿입니다만
성경의 행16장 이후에서 바나바는 그야말로 안개 속으로 사라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6장 이전에 바나바와 바울의 이름이 나올 때는
언제나 바바바의 이름이 바울보다 먼저 나왔습니다.
아까 제가 비바바와 바울이 안디옥 교회의 동사 목사였다고 했는데
사실은 바나바가 담임목사, 바울이 부목사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루스드라라는 곳에서 앉은뱅이를 고쳐 주었습니다.
그 곳 주민들이 크게 놀라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다고 하면서
바나바는 쓰스 Zeus , 바울은 허메 Hermes 라고 불렀습니다.
쓰스는 그리스의 여러 신들 가운데서 우두머리인 제우스 신입니다.
허메는 제우스의 아들로서 신들의 전령 노릇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루스드라 사람들은 바나바가 우두머리 신이고,
바울은 공보 비서관쯤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바울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되자 조용히 자취를 감춥니다.
갈라지는 과정은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일차 전도 여행 중에 자기를 떠난 마가를
2차전도여행에 데리고 가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심하게 다투고 갈라졌습니다.
바울이 전도에 성공하고 초대 교회의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여기 저기에 교회를 세울 때 바나바가 좇아다니면서
'이 사람은 내가 소개한 사람이오. 내가 다리를 놔준 사람이오.
내가 없으면 이 사람은 이런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이오' 할만도 한데,
그랬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바나바는 조용하고 겸손하고 안분지족의 삶을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분수에 만족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가 바울과 헤어진 다음에 어디서 어떤 일을 했고 어떤 생활을 했는지
성경에는 기록이 없습니다만
자기의 소개로 교회 지도자의 반열에 오른 바울이
비록 자기와는 다투고 헤어지기는 했지만
큰 일을 하는 것 소식을 들으면서 흐뭇해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을 보면 바울이 베드로를 면책한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뒤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충돌이나 갈등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권사님들도 그래야합니다. 권사님들 가운데 '내가 아무개 장로보다 성경도 더 많이 알고
기도도 더 많이 하고 교회 봉사도 많이 하는데 나는 왜 권사고 그 사람은 장로야?'
또 '내가 권사인데 아무개 집사는 왜 나를 존경하지 않는 거야?‘
하는 분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러지 마시고 자기의 직분에 만족하고 자기의 직분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럴 때 더 많이 봉사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더 크게 쓰십니다.
나중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도, 다시 말씀드려 세상을 떠날 때도
내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기간만큼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만큼 하고서 세상을 떠나는 것을 감사하면서
조용히 부르심에 응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의 영혼을 하나님은 더 큰 상급 가운데 영접하실 것입니다.
조용하고 겸손하고 안분지족, 자기에게 주어진 분수에 만족하는 삶을 살면서
봉사하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행11:2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에 큰 박해가 일어 났습니다.
크리스천들이 여기 저기 흩어졌습니다. 그 가운데 일부가 안디옥까지 갔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이 소식을 듣고 바나바를 파송했습니다.
바나바가 안디옥에 가서 어떤 일을 했습니까?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일을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권하는 encourage, exhort 일을 했습니다. 권사의 일을 잘했습니다.
성도 여러분도, 권사님들도, 특별히 오늘 취임하는 권사님들 모든
사람들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십시오", 잘 권하시기 바랍니다.
"환난이 있어도, 실망스러운 일이 있어도, 어려움이 있어도,
때로는 하나님의 존재와 사랑이 의심되어도 굳은 마음으로 주님께 붙어 있으십시오.
주님을 떠나지 마십시오" 권하시기 바랍니다.
모두 권사님들이 되고 권사님들은 더 좋은 권사님이 되고
오늘 취임하는 권사님들, 명예 권사님들은 특별히 좋은 권사님이 되시기 바랍니다.
바나바가 권사의 사명을 잘 감당하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행11:24b절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저희 교회가 바나바와 같이 권면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명을 잘 감당하여
큰 무리가 나날이 더 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세월이 흐를수록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존중하기
얼마 전 읽은 성자와도 같은 삶을 살았던
벨기에 보두앵(Baudouin1951-1993)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그를 만나면 자신을 아주 중요한 사람이라고 여기게 하며,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생각으로 이끌어 줍니다.”
한 마디로, '격려의 은사'가 있었던 분이지요.
“보두앵이 당신을 바라본다면
아마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된 것처럼 느낄 것입니다.”
그대로 예수님의 마음과 눈길을 지녔던 분이 분명합니다.
마치 지금 여기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전부인 것처럼
예수님의 사랑을 쏟아 부었던 벨기에의 보두앵이었습니다.
사실 신앙이 깊어지는 수준에 오르면
그들 대부분 사랑이 이러할 것입니다.
마냥 우리를 비참하고 썰렁하게 눈길이 아니라
우리를 충만한 존재, 중요한 존재로 느끼게 하는
예수님의 눈길이요, 예수님을 본 받은 온화한 인품의 제자들의 눈길입니다.
민족의 스승이라 일컬었던
도산 안창호 선생님에 대한
피천득 선생의 고백도 생각납니다.
“도산은 누굴 만나든지 정성으로 대해 주었지요.
그분은 제자도 많았는데,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선생님이 자기만 위해준다고 느낄 정도였으니까요.”
♣세월이 흐를수록..
안수 ordaining 10년이 된 어느 성직자가 이런 고백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주의 종으로 생활하는 동안 주님은 자꾸만 작아지시고 저는 더욱 커져만 갑니다.
사무실에서 제 목소리가 점점 커져갑니다.
존경하던 선배 종 님들이, 지금은 비난의 대상으로 많이 바뀌었습니다.
목회의 대상이.. 소외된 사람들에게서, 나를 알아주는 사람에게로 점점 옮겨갑니다.
초대받는 자리에 가면 으레 가장 좋은 자리에 먼저 앉습니다.
칭찬과 감사, 격려의 말보다.. 불평과 원망, 지시의 말이 많이 나옵니다.
타인의 말을 듣는 시간보다, 내가 말하는 시간이 점점 많아집니다.
강의나 설교도 쓸데없는 말로 자꾸 길어집니다.
회의 때는, 나의 판단이 옳다고 우길 때가 많습니다.
기도를 바빠서 못하는 이유가 자꾸 늘어납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용서 받을 것들이 점차 쌓여가는 나 자신을 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