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II, 교인 숫자의 새로운 계수법_태승철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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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요약 : 숫자는 참 매력적인 것입니다만, '몇 명 모이는가'에 대한 숫자 보다는,
그 중에 진정 거듭나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참된 제자의 수,
십자가 지고 따르는 성도의 숫자만 계수해야 되며, 목회가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바람직하다는 거죠.
그런 제자의 전체 숫자(아래 설교에 '공교회'로 표현됨)를 주목하며 사역함으로,
내 교회, 네 교회의 울타리가 점점 사라지고, '공교회'를 추구하는 사역자가 됩시다.. 라는 주제.
그렇지 못한 그저 숫자 모음은... 그야말로 허수를 모음이요, 실제 숫자는 극소수일 수도 있다는 거죠.
◑도입
제가 영락교회의 부목사로 있을 때, 언제나 마음에 부담이 있었습니다.
제가 맡은 교구의 교인숫자의 증감 때문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교인명부에 유령명단이 많았습니다.
교회에 나오지 않은지가 오래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따로 교적을 옮기지 않는 한 남겨두게 됩니다.
또한 등록교인 외에도 세례교인 숫자가 따로 있었고,
다른 출석 계수법으로서 교회 주일예배의 출석인원을 체크합니다.
예전에는 교인들이 주보를 다 가져갔기 때문에
주보의 발행 부수와 남은 주보 수를 계산하면 출석교인의 수가 나오는데
주보를 놔두고 가기 때문에 전도사님들이 교인수를 체크하게 됩니다.
어떤 전도사님은 교인들이 보고 있는데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수를 세시다가
주의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숫자의 매력에서 풀려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요새는 촛불집회나 친박단체들이 집회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경찰추산으로는 1만5천 명인데, 주최 측 추산으로는 1백만 명이 된다고 하는
큰 격차가 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편 목사님들끼리 만나면 교인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어볼 때에,
아무도 등록교인인지 세례교인인지 출석교인인지를 묻지 않습니다.
십중팔구는 등록교인을 이야기합니다.
한 4천 명쯤 된다고 하면, 실제로 교회에 나오는 출석인원은 1천명쯤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숫자에 대한 마음가짐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교회개혁은 요원합니다.
더 정확히는 이런 식의 숫자 계수법이 유지되는 한
교회 개혁은 강 건너 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그동안 교회성장이 대한민국 교회를 휩쓸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때에 새마을 운동의 “잘 살아보세”라는 말과 더불어
교회에서는 교회 부흥의 문제가 화두였습니다.
그러나 뚜껑을 열고 결과를 보니 교인 수도 줄고, 교회 수도 줄고 개척교회 수도 줄었습니다.
반면에 문 닫는 교회 수는 늘고 경매에 나오는 대형교회의 숫자가 늘었으며
한국교회 전체의 은행대출 액수가 늘었습니다.
한동안 부흥을 추구하던 한국 교회는 올라가는가 싶더니, 꺾여서 계속해서 내려가고 있습니다.
또 이러한 상황에 대해 수적인 부흥대신에 영적인 성장을 통해
건강한 교회를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많이 생겼습니다.
그런 분들은 수적인 부흥을 꾀하려는 이들을 비판하는데 일리가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수적인 부흥과 영적인 성장이 함께 가야만 한다고 이야기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수적인 부흥을 강조한다고 해서 수적인 부흥이 되는 것도 아니고,
영적인 부흥을 강조한다고 해서 영적 성장이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둘 다 주장한다고 해서 밸런스가 맞춰지는 것도 아닌데
우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싸우고 있는 것일까요?
영적 성장을 이야기해 봤자, 실제로 대한민국의 영적 성장이 얼마나 이루어졌습니까?
괜히 말로만 그러지 말고 관심을 가지고 교인을 세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전과 같은 계수법이 아닙니다. 종전의 계수법이라면 전혀 달라질 것도 없거니와
세면 셀수록 교인은 자꾸만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교인 계수법이 바뀌어야만 합니다.
◑본론 : “공교인 숫자 세기”
오늘 본문에서 오병이어 기적의 현장이 나오며
그 은혜를 입은 사람들을 남자만 5천 명이라고 센 것은 이스라엘의 계수법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을 큰 무리로 표현한 것도 수적인 개념입니다.
오병이어(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라는 말도 숫자입니다.
2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와도 부족할 것이라고 했을 때에도 숫자가 나오고,
주님께서 5천 명을 앉히라고 하셨을 때에도 숫자가 나옵니다.
또한 다 먹고 남은 나머지를 모으라고 하실 때에도 12광주리를 모았다고 하며
숫자가 특별히 많이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사람 계수법이 어린아이와 여자를 제외하고
남자만을 세어 오천 명이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도 수적 부흥에 대한 관심을 무조건 죽이거나 빠져나오려 하는 것이 아니라
계수법을 달리해서 세어보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등록교인 세기, 세례교인 세기, 출석교인 세기가 아니라
교인수를 세는 어떤 방식이 있는 것일까요?
바로 공교회 교인의 수를 세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내 이름의 지교회 목회가 아니라, 공교회 목회의식으로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개교회 목회는 반드시 비즈니스로 전락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공교회 목회는 내가 만나는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십자가 너머
하나님께로 보내드리는 것입니다. 십자가 너머에 마음이 머물고 있는 사람들의
이 세상에서의 모임이 공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1만 명이 출석하는 교회가 있다고 칩니다.
그러나 이 중에서 삶의 현장에서 자기 마음을 십자가 너머로 보내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마음이 하늘로 간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면
그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곳은 그저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모인 사이비 종교집단일 뿐입니다.
그러나 1만 명 중에 한 사람도 공교회 교인이 없을지라도,
공교회 목회의식을 가진 목사님이 부임하시게 되면
그 교회는 잠재적인 공교회 교인들의 모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공교회 교인들로서의 가능성을 가진 집합이 되는 의미에서는 존립가치가 있지만
현재 상태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고백 위에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 교회는 아닙니다.
▲본문에서는 공교회 교인을 세는 법을 가르쳐주시고 계십니다.
공교회에 대한 개념은 교회개혁의 주제가 되는 말로, 다시 개념에 대한 정의를 내려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베드로의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 안에서 교회는 세워지는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라는 고백에는 지금 예수님과 하나님이 아버지와 아들로서
관계를 맺고 계시는데, 우리의 마음을 그곳으로 데려가셔서 그 관계에 참여시킨다는 의미에서
구원자이시고 그리스도이십니다.
구원은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의 관계에 우리 마음이 참여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시고
예수님은 “내 사랑하는 아버지시요 내 기뻐하는 분이십니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인해 기뻐하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시는 관계 안에
우리가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직분을 행하시므로
우리 마음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서 이 관계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곧 죄 사함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죄 사함은 이러한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에 참여하기 위하여 필요한
절대불가결의 전제 조건일 뿐 죄 사함 자체가 구원은 아닙니다.
영화로우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주홍 같은 우리의 마음이 눈과 같이 희어지는 역사가 있어야만
하나님과의 관계에 참여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의 뜻은 지금 이 자리에서 그 관계에 참여되어서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적 부흥이냐 영적 성장이냐를 논의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를 하는 것입니다. 숫자를 세고 싶으면 세어보세요.
다만 마음을 주님의 동선을 따라서 하나님과 예수님이 관계를 맺고 계시는 그 관계에
참여하는 자들이 공교회 교인인데, 이 숫자를 세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공교인의 숫자를 세게 될 때, *진정 회개하고, 회심한 알곡 신자
이전에 관심을 가졌던 등록 교인 수나 출석 교인 수에 대한 관심은 없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교인 수를 어떻게 셀 수 있을까요?
본문에 예수님께서 아이의 한 끼 식사를 통해서 남자만 오천 명이고 전체로는
약 만 이천 명의 무리를 먹이시고 남은 열두 광주리를 거두게 하셨는데
그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기절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아이 손에서 받은 오병이어를 드시고 축사하시는 것을 다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고 또한 그것을 사람들이 다 나누게 된 것을
보고 기절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때에 사람들의 반응이 모세 시절의 신명기를 떠올립니다.
먼 훗날에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올 것이라는 메시아 예언이 있는데
그 선지자가 예수님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식민지하에 있던 나라를 독립시키고 자신들을 태평성대를 누리게 할 수 있는 임금으로 여겨서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자리에서 만 이천 명을 추종자로 결집시키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임금 삼으려는 마음을 아시고 혼자 산으로 떠나가셨는데
왜 그러셨을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제자들까지 포함해서 예수님의 추종자 계수법에 단 한 사람도 해당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를 눅14:25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라고 합니다.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의 기적을 통해서 감화 받고 좇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수많은 무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26절에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고 하시는데, 따르지 말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좇는 이유도 부모나 처자나 형제자매나 자기 목숨을
이 세상에서 잘되기 위해서 좇는 것인데, 그것을 미워해야 한다면 왜 예수님을 좇습니까?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십자가는 우리가 말하는 십자가가 아니라,
이들은 인류역사상 가장 참혹한 십자가 형벌이 진행되는 과정을 눈앞에서 보았던 사람들인데
거기다 대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들을 향해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은 반어법적으로
지금 따르는 자들은 사실 한 명도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추종자 계수법은 완전히 달랐던 것입니다.
이 두 사건에서 예수님의 계수법에 포함된 자들이 없었다는 것을 볼 때,
예수님의 계수법이 어떠한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중에 오병이어의 현장을 떠나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 중에는 육지를 걸어간 자들도 있고, 배를 타고 간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어떻게 오셨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고 하시는데
이것이 예수님의 계수법입니다.
쉽게 말하면 돈 많이 벌고 사업 잘하고 싶은 것과 같은 이 세상의 가치를 획득하고자 하는 마음,
부모나 처자나 형제나 자매나 자기 목숨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고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자들을 추종자로 세지 않으셨습니다. (숫자에 넣지 않으심)
그러면서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추구하라’고 하십니다.
공교회 교인 계수법의 가장 명확한 기준은 영생의 양식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는 단지 성경책을 많이 읽거나 죽어서 하늘나라 간다는 믿음을 갖고 사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지금 현재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 배부름의 이유를 하늘로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하늘의 떡이신 예수님으로 지금 만족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하늘의 떡으로 배 부르려고 하는 자가 예수님의 추종자로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무엇으로 배 부르려 하느냐는 곧 무엇으로 마음이 만족하려 하느냐는 것입니다.
육체가 먹을 것, 입을 것, 쓸 것이 풍족해짐으로 만족하려고 한다면 교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공교회인 계수법의 특징은
지금 이 땅에서 하늘로 만족하려고 추구하는 자들을 세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계수법에 들지 않는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돈이 없어서 힘들고 사업에 위기가 닥칠 때에 돈 잘 벌게 해달라고 기도하는데,
예수님의 교인 계수법에 포함된 자들은 오히려
‘돈이 없어서 걱정도 되고 불평도 생깁니다만, 내 마음의 만족은 돈으로 하지 않겠습니다.
비록 돈은 없지만 이 자리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이 맺고 계신 관계에 참여함으로서,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로 누리시는 만족과 기쁨을 내 것으로 삼게 해 주세요’라고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또한 구원을 얻은 자들입니다.
그러한 교인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목사님이 공교회 의식을 갖고 있다면
지금 당장 교인과 상담하면서 이 사람이 무엇으로 만족하고 기뻐하려 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겉으로 발린 말로 하나님 때문에 기쁘다고 말해도 소용없습니다.
당장 그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기면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돈으로 만족하려는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공교회 교인을 헤아릴 수 있는 길은 결국 목회자가 직접 한 사람씩 목회현장에서 시간이
경과하는 동안에 만나서 얘기하면서 알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교인수를 세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할 수 있는 것은 꾸준히 매일같이 십자가를 전하는 것뿐입니다.
어느 날 십년 동안 맹탕으로 두었다가 십일 년 첫 째 주일 날 또 십자가를 설교하는데
십자가가 살아있는 나의 사건으로 다가오면서 십자가를 붙잡고 살아야 되겠다는 마음을 가지면,
공교인 한 사람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영생하는 양식을 추구하는 공교인의 의식을
갖게 되었을 때에, 누리는 기쁨과 만족은 이전에 등록교인수와 출석교인수가 많아졌을 때의
기쁨과는 비교가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숫자의 마력을 뛰어 넘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공교인 숫자를 헤아리세요. 공교인 숫자는 등록 숫자만 세는 게 아니고
출석하는 교인의 머리수를 세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먼저 공교인 되는 길에 십자가 생활화를 설교하고
생활 속에서 영생하는 떡을 통해 만족하려는 추구의 삶이 확인될 때에 공교인 수가 늘어납니다.
이렇게 공교인 숫자의 계수법을 통해서 목회를 하고 신앙생활을 해 나갈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교회가 개혁이 됩니다.
주님이 처음부터 교회가 끊임없이 개혁되고
교회가 실질적으로 공교인의 수가 늘어나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임금 삼으려는 자들은 떡과 고기를 먹고 배불러서 예수님을 좇아가면
배부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만 이천 명 중에 교인은 한 명도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계수했다면 예수님이 베드로의 고백위에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신 공교회가
견고하게 세워져 나가고 확장되었을 것입니다.
▲공교회의 교인이 되려면 십자가 생활화를 해야 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영생하는 떡으로 배 부르려고 추구하는 삶이
십자가 생활화 외에 다른 방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삶의 현장에서 돈을 벌어서 만족하려하고 승진해서 만족하려하고
명품차로 만족하려하고 자식 출세를 통해서 만족하려 합니다.
그러나 부모, 처자, 형제,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하는데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기뻐하고 계신 것처럼
나도 십자가에서 죽고 오직 하나님으로 인하여 만족하고 기뻐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추구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공교회의 교인이고
이 교인 수를 세는 것입니다.
그러면 개혁이라는 노래를 부르지 않아도 교회는 개혁되어 갈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개혁을 위하여 대단한 일을 하자고 외쳐 봐도
실제로 필요성을 느끼는 것에 대한 고백이 될 수 있을 뿐,
우리에게 그런 일을 행할 실천력도 결실을 볼만큼 추진할 능력도 없습니다.
그저 공교회의 교인이 영생의 떡을 추구하는 자들임을 알고
하늘의 떡을 추구하는 공교인의 수를 헤아림으로써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에 의하여 기울어져 가는
주님의 교회가 개혁되어 소생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