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일4:7~11, 벧전2:21
※맨 아래 '◑존재론적 선교' 일화는, 대단히 기억에 오래 남습니다
본문의 전체 주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주제죠.
◑'선교적 교회 Missional Church' 라는 것은, 죄송하지만 교회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그리고 담임목사의 개인적인 의견이나, 소견이나, 목회철학은 더더욱 아닙니다.
'선교적 교회'라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내용이에요.
교회는 당연히 선교적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교회는 왜 선교적 교회 Missional Church 를 자꾸 지향하지?'
'왜 자꾸 선교적 교회 라는 말을 하지? 요즘 이 프로그램이 세계적으로 유행을 하나?'
아닙니다. 이거는 개 교회의 프로그램도 아니고,
또 교회 목회 철학도 아니고, 전략도 아닙니다.
이것은 성경 자체가 말하는바, 이 땅에 존재하는 교회는
어느 교회 든지 지향해야 될 가치와 목표를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선교적 교회'를 얘기하다가,
제가 삼위 하나님에 대해서 설명을 했던 기억이 있어요.
◑ '하나님은 세 분이 계십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이 계시는데,
위가 각각 다르세요. 근데 위격은 같으십니다.
이 세 분이 갖는 첫 번째 본질, 첫 번째 속성이 뭐냐 하면
오늘 이 본문에서 등장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그래서 이 세 분은, 먼저 너무 서로를 존중하시고,
이 삼위 하나님의 관계는, 서로 사랑하시고 배려하시는 관계예요.
그래서 이 삼위 하나님의 가장 첫 번째 핵심적 본질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으로 밖에는 해석도, 설명도 안 됩니다.
모든 신론 神論의 기초와 정점은 사랑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모든 신학의 출발지가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래서 이 삼위 하나님은 서로를 너무 존중 하시고, 위하시고, 배려하시고,
특별히 사랑하시는 관계예요.
▲그러던 중에 하나님은 이 땅에, 자신과 닮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를 만드셨어요.
우리를 왜 창조하셨을까요?
태엽감아 가지고 조정하려고 우리를 만드셨을까요?
계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거는 식탁의 교제를 말하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첫 번째 목적은, 교제하기 위해서예요.
이건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우리를 로보트 조작하듯이, 자기 마음대로 무슨 놀이를 하려고
우리를 만들어 놓으신 게 아니에요.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서, 교제를 하시려고 만들어 놨어요.
그런데 그만 그 인간이, 사탄의 꼬임에 넘어가서 타락을 하고
하나님과 끊어지는 죽음이 찾아왔어요.
그래서 '아이 안 되겠다. 다시 만들어야지...' 그러지 않았단 말이에요.
'이걸 어떡하나?' 해서 삼위 하나님 중에 계획을 가지고
누군가는 또 어떤 방법으로도, 이 죽음의 능선에 던져져 있는 저 영혼을 구원해야 되겠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다가
삼위 하나님 중에 성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기로 작정 하셨어요.
그리고 그 아드님은 기꺼이 아버지의 계획에 순종하셔서
그 천하고 누추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겁니다.
그리고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그 몸을 일으키셔서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남은 구원의 역사를 만들어(완성시켜) 가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세 분은 항상 계획도 같이 가지시고,
그 실천도 함께 하시는 분이세요. 이것이 삼위 하나님의 본질입니다.
근데 이 핵심의 모든 하나님의 활동의 출처, 근거는 어디서부터 시작된다고요?
사랑의 행위로 부터 시작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관념에 갇혀 있거나 생각에 머물러 있는 사랑이 아니라
동사입니다. 늘 역사를 만들어 내세요.
이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그 말씀의 의미를
더욱 실감나게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말씀이 단번에 이해가 안 되더라도, 꾸준히 듣다 보면
성령께서 그 의문투성이었던 말씀을, 성도들을 향해서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목사는 논리도 엉성하고 말 주변도 없어서 설명을 어설프게 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성령이 역사하니까, 그 말씀이 천천히 영혼을 파고 들어가서
눈을 열어 주시는 겁니다.
▲어느 목사님이 목이 너무 아파가지고, 거의 소리가 안 나올 지경이 되었대요.
그래서 '이거 오늘 설교를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을 하다가
그래도 허락된 시간이고, 맡겨진 회중이니까 설교를 해야 되겠다... 해서
뭐 거의 소리가 나왔다 들어갔다, 끊어졌다 이어졌다... 이러고 설교를 했으니
뭐 죽을 쑨 정도가 아니라, 망한 거죠...
한 3년이 지나서, 그때 그 일들을 다 잊어버린 시점이었습니다.
어느 신학교에 강의를 하러 갔는데, 어느 학생이 찾아왔어요.
교수님이 언제 어디서 목이 너무 아파서, 너무 너무 힘들게 설교하셨던 거 기억나죠?
그래서 깜짝 놀라가지고 '그래 기억하지... 그런데 왜?'
'교수님 그때 그 강당에 제가 맨 앞자리에 앉아서, 그때 그 설교를 듣고 제가 깨졌어요.'
그러더래요.
그래서 자기가 더 놀랐다는 거예요. '아~ 말씀을 깨닫는다는 것은 목사의 언변이나
목사의 말 재주가 아니구나' 누가 깨닫게 하시는 거예요? 성령님이 깨닫게 하시는 거죠.
말씀을 열어 주시는 거는, 목사의 언변이 아니고, 성령님이세요.
그러니까 말씀을 듣다가, 오늘 저녁에 뭔 말인지 이해가 안 된다 그럴지라도
또 그냥 덮고 지나 가세요. 그럼 내일 새벽에 또 나와서 듣다 보면
이렇게 저렇게 말씀이 역사하고, 말씀은 움직인단 말이에요.
여기 턱 걸리게 만들고, 이쪽으로 와서 턱 걸리게 만들어 가지고
뜻밖의 길목에서 서로 마주치게 만들어서, 뻥 뚫어지는 은혜가 있습니다.
꾸준히 치열하게 일단 들어 둬요. 들어 두면, 이 안에서 말씀이 역사하십니다. 믿습니까?
뭐 속에 채운 게 있어야 역사를 하지.. 속에 (말씀을) 채운 게 없으면.. 뻥 뚫리지 않죠.
◑세 단계에 걸쳐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사랑의 본질이 뭐냐
두 번째는 사랑의 실제
세 번째는 사랑의 실례
요일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여기 보시면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이건 사랑의 본질을 얘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랑은 신적 기원을 갖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 참 사랑이에요.
이건 그냥 공식이니까 외웁시다. '사랑은 신적 기원을 갖는다' 요일4:7
그런데 이 땅의 사랑은, 죄가 들어와서 전부 병 들고, 이지러지고, 탐욕적으로 바뀌었죠.
요일4:7b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이게 어마어마한 얘기예요.
마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 두 그룹이 나옵니다.
임금이 '너희들은 내가 갇혔을 때, 벗었을 때, 주릴 때 등 난처한 상황에 빠졌을 때
나를 돌봐주었다' 우편에 앉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의 반응이 '우리가 언제 그랬습니까?'
그걸 인식하고 있지 못했어요.
그들은 왜 인식하지 못했을까요?
자기 본성으로 했기 때문에... 기억을 못하고 있었던 거죠.
'우리가 언제 그랬나요?' 이 말은
자기들이 그것을 한지도 모르고 있었다는 거예요.
이것은, 무의식적으로 했다는 얘기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본성적으로 사랑을 표현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의 수고의 행위는, 하나님께 뿌리 내린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이 자기도 모르게 나온 거예요.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묶여 있는 자의 자동적인 반응입니다.
그런데 나머지 왼편(염소편)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너희는 내가 갇혔을 때 돌아보지 않았고, 내가 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우리가 언제 그런 일을 안 했습니까?'
이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이거를 해야 되는지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나타난 열매가 중요한 게 아니라, 행위적 표현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본성이 누구에게 뿌리박고 있었는 가가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마7장에 보면 '그 나무는 그 열매로 안다'고 그랬어요.
집이 멀쩡히 서 있었어요. 근데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부니까
한 집은 끄떡 없이 서 있었는데, 한 집은 휙 다 날아갔어요.
그때 그 집의 기초가 어디에 세워져 있는지,
기초가 어디인지를 알았다고요.
그러면 그것이 집 짓는 싸움 보다는, 기초 싸움 이었다는 걸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근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사는 신앙 생활의 전체가 똑같습니다.
결국 하나님께 뿌리 내려져 있고, 하나님께 인생이 기초되어 있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그 "사랑의 반응"을 할 수 밖에 없어요.
요일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러니까 그 열매가 있는 사람의 행동을 봐서
'아 이 분은 하나님의 백성인게 틀림 없구나'
이거는, 그 열매와 행위를 해야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예를 들면, 사랑을 하게 되면, 장미꽃 백 송이를 들고
사랑하는 연인 집 앞에서 밤을 셀 수가 있어요.
그런데 이걸 거꾸로 알아들으면 안 되죠.
'장미꽃 백 송이를 들고 사랑하는 이의 대문 앞에 서 있어야 사랑하는 거다'
이게 아니란 말이에요.
(믿음의 증거로 행위가 따라오는 거지, 행위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라는 뜻)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여러분 그만큼 성도들에게 이 '사랑의 행위'는, 사실 신앙 생활의 본질이에요.
요일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말로만 사랑하신 분이 아니고, 그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 사랑이 무엇으로 드러났어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는 실증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도 똑같은 패턴이 나타나야 돼요.
우리 안에 예수의 영이 있고, 하나님의 사랑이 심기운 바 된 영혼은,
자연히 낮고 가난하고 천한 주변의 사람들, 상황들을 만나면
자기도 모르게 본성적으로 '사랑의 수고'가 나와야 돼요.
그 수고가 있는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의 생명이 있는 교회란 말이에요.
그래서 십자가 사건은, 실체적 사랑입니다. 사랑의 실체적 사건입니다.
요일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말은
잘 들으셔야 됩니다. 사랑의 주도권은 하나님으부터 시작된다는 얘기예요.
여기서 우리는 사랑의 범주를 다시 생각해야 됩니다.
내가 뭔가를 사랑할 수가 없어요.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고, 누구를 사랑하는 것도,
그 근거와, 기원과, 출처가, 하나님이 나를 사랑 하셨기 때문에
그 새생명을 새롭게 입은 반응으로써, 우리가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사랑의 기원도 하나님이지만,
사랑의 주도권도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이렇게 인위적으로, 자의적이고, 의도적으로 자기가 사랑을 애쓰는 경우가 있어요.
그건 일시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거죠. 내가 확고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 사랑의 은혜가 내 안에 확고하게 있으면
나도 모르게 그 받은 사랑에서, 용서와,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이 나가게 돼어 있어요.
그 주도권이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에 그렇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사랑의 생명을 심어 주시고,
그 생명을 받은 자마다, 자기도 모르게 수많은 약한 환경에 대해서
그렇게 생물학적인(본성적인) 반응을 할 수 밖에 없는 거예요.
자기도 모르게 본성적으로 연약하고 가난한 이웃들을 향해서
베푸는 삶이 나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요일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 제가 대학 다닐 때 읽었던 아주 오래된 책인데
조금 그 책 내용이 너무 극적으로 쓰여져 있어요.
근데 이것은 굉장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데, 여러분도 많이들 읽었을 거예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라는 책이 있어요.
찰스 쉘던 이라는 분이 쓴 책이에요. 그 앞에 내용을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목회자는 제일 긴장되고 압박이 몰려오는 시간이 금, 토, 주일 입니다.
그러니까 그 때는 모든 신경이 주일 준비에 집중돼 있죠.
근데 금요일 아침에 현관 문을 누가 두드려요.
나가 보니까 허름한 부랑아 같은 노숙인이 현관 앞에 서 있는 겁니다.
뭐 그런 일이 워낙 비일비재 했으니까, 목사님은 빨리 응대를 끝내고
서재로 가서 설교 준비를 계속하기 위해서
그냥 동전 몇 푼을 그의 손에 쥐어주고, 자기도 모르게 그를 보냈대요.
그리고 토요일을 지내고 주일 날이 왔어요.
그날 설교본문이 벧전2:21절이었죠.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금요일부터 설교 준비를 열심히 많이 한 목사님이, 그 날 아주 감동적인 설교를 하셨죠.
수려한 언어와 잘 정리된 논리를 따라서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자취를 따라가야 되는가?' 하고요.
그런데 2층 구석에 앉아 있던 어떤 분이, 아래 층으로 내려와서
강대상 앞까지 걸어 나오셨어요.
가만히 보니까 남루한 옷차림 인데, 이틀 전 금요일 아침에, 사택을 찾아왔던
바로 그 노숙인 입니다. 그리곤 그가 이렇게 얘기를 해요.
'설교를 하신 목사님과, 이 설교를 은혜 가운데 감동하여 공감하며 들은 성도 여러분,
과연 그 분의 자취를 따라간다는 게 무슨 의미로 들렸나요?'
그의 말은, 목사님에게도, 성도들에게도 너무너무 큰 혼란과 충격을 줬습니다.
예배를 서둘러 마치고, 허겁지겁 목사님은 그 노숙인을 사택으로 모시고 가서
다시 정중하게 응대를 하고, 그 사택에서 며칠을 쉬다가
그 노숙인은 거기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래요.
그 후에 그 교회가 겪은 변화는 엄청난 변화였습니다.
'우리가 이때까지 신앙 생활을 혀와 말로만 사랑 했구나
몸으로 사랑함이 없었고,
하나님의 사랑이시라는 본질처럼, 우리가 행동으로까지 이어진 순종의 삶이 없었구나'」
그래서 그 일은 엄청난 변화를 긍정적인 의미에서 경험했습니다.
유명한 책이죠. 몇 십 쇄가 팔릴 정도로 엄청난 반향을 미국 사회에 일으켰던 책입니다.
그 책을 제가 대학 다닐 때 읽으면서, 저도 많은 충격을 경험했어요.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롬14: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이 말을 축약하면, 우리는 엮여진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어요.
혼자 태어나서, 혼자 죽어가는 사람은, 인류 역사에 없습니다.
어머니를 통해서 태어나고, 태어나면 형제를 만나게 되고, 이웃을 만나게 되고,
그 인간이 사는 삶의 본질은, 철저하게 관계 속에서 형성이 되는데
자 '이웃 사랑'이라는 것은 도 닦는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 이웃을 사랑 함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걸 증명하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서, 인간이 지닌 가치의 근거,
그 사람이 정말 인간이라는 가치의 근거가 뭘까요?
◑ 존 스토트는 성공회 신부인데, 이런 얘기를 해요.
'그 사람이 인간으로서, 또 상대방이 인간으로서
서로 가치를 인정하는 근거는 존중이다'
여러분 사랑도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어요.
그냥 알 러뷰 이것도 사랑이지만, 꼭 그것만이 사랑 일까요?
그 사랑에 가장 베이직, 기초 단계가 뭔지 아십니까? 존중입니다.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입니다.
저는 그 존 스토트의 글을 읽으면서 '사랑은 존중이 기초 돼야 된다'는 말은 처음 들어봤어요.
사랑에 대해서 많은 정의도 얘기하고 생각도 해봤지만
'존중'이라는 표현은 처음 들어봤어요. 근데 맞더라고요.
이 존중은 두 가지의 근거를 갖고 있어요.
1)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에요.
이것이 내가 존중 받아야 될 이유고, 나도 너를 존중해야 될 이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란 말이에요.
송목사도 여러분들을 존중해야 되고, 여러분도 저를 존중해야 돼요.
그 사람의 행위의 여부를 떠나서, 그 존중이 신적 기원에 근거한 사랑의 시작점 이라는 거죠.
어마어마한 얘기예요.
그래서 그 사람이 인격적으로, 신앙적으로 성숙했느냐/ 안 했느냐를 헤아려보는
몇 가지 테스트가 있는데, 사람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아무리 허름하고 낮고 천한 분이라도, 우리가 저 분도 하나님을 알든 모르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분이라는 기초 위에서
그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을 무시할 수 없어요. 무시해서 안 되죠.
이것이 이웃 사랑의 시작 지점이에요.
2) 두 번째로 존중의 근거는,
즉 왜 우리는 이웃에게 존중 받아야 되고, 왜 우리는 이웃을 존중해야 되는가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여기에는 창조에 못지 않은 어마어마한 담론이 기초 되어 있어요.
그 사람을 위에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아들을 값으로 지불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감히 누구를 무시해요?
그래서 사랑의 기초, 존중의 기초는
첫 번째는 창조(하나님의 형상),
두 번째는 구속이에요. 그를 위해 십자가를 지실 만큼, 그는 소중한 사람이에요.
믿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존중 받아야 되고, 존중해야 될 근거, 원초적 기본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잊지 마세요.
◑존재론적 선교
어제 우리교회 집사님으로부터 이런 감동적인 간증을 들었어요.
정말 자기와 친한 친군데 독실한 크리스천이에요.
근데 이분이 한국에서 좋은 대학을 나와서, 좋은 직장에서 일하다가
자녀들 때문에 다 정리해 가지고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근데 여러분, 미국 이민 생활이라는 게,
겉은 화려해 보이고 대단해 보이지만, 정말 맨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됩니다.
한국에서 뭐 영어 난다 긴다 해봐야, 미국 가면 하나도 안 통해요.
기본적인 대화부터 안 통하는 경우가 많아요. 발음이나 액센트가 틀리니까요.
이제 허드레 일부터 시작해야 되는데, 그것도 외진 시골에
허름한 수퍼마켓 하나를 꾸렸어요.
그 동네가 이제 멕시칸도 살고 흑인들도 있다 보니까
주인이 뻔히 쳐다보고 있는데도, 들어와서 물건을 집어 간대요.
근데 그걸 또 강력하게 맞대응하면, 자칫 잘못하면 사고가 나죠.
이 분이 신앙인이다 보니까, 뭐라도 해야 되겠다 싶어서,
동네 수퍼 그 가게에, 하루 종일 CCM (복음성가) 을 틀어 놨대요.
'그 CCM 이 무슨 영향력을 끼치기나 할까?' 처음에 그렇게 생각을 했겠죠.
근데 일부 주민들이 계속 도둑질을 해가는 겁니다.
그런데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면, 내가 그 가게 주인이라면, 미치는 일입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늘 사고 위험을 안고 사니까 아슬아슬 하죠.
일부 동네 사람들이 와서 돈도 안 되고 막 물건을 집어 가고...
그렇지만 절대 그 사람들과 안 싸웠대요.
그리고 계속 CCM 만 틀어놨대요.
그의 속은 몇 년 동안 얼마나 많이 무너졌는지요...
그런데 차츰 차츰 마을에 이상한 기운이 도는 거예요.
이 동네 사람들이 아프면, 찾아와가지고 기도 좀 해달라고 그러고,
그래서 장사하다가 잠시 기도도 해주고...
자기가 한 번도 예수 믿으라고 전도지 한 장 준 적이 없는데...
그런데 동네 사람들이 다 아는 거예요.
자기들도 이게 나쁜 짓이며 '저 사람 참 대단하다' 그거 다 알아요.
그가 딱 하나 한 거는, CCM 틀어 놓은 거 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들과 다투지 않았다는 것!
이제 동네 사람들이 점점 그 마켓에 와서 자기들 속을 풀어놓는 거예요.
또 그 마켓에 와서 기도도 받고 가고... 기도해 달라고 기도도 요청하고...
그래서 점점점 그 마을이, 이 조그만 마켓 때문에 변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소위 '존재론적 선교'입니다.
자기가 그 위치에서, 어떤 존재로 이웃에 대해서 서 있느냐?
세상과 싸우려고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세상을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영접하게 만들고
그러려면 내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되는가?
그걸 명확히 알고 있는 분이니까, 손해가 나도.. 사고 위험이 있어도... 안 싸우는 거예요.
그리고 계속 알아 듣던, 못 알아 듣던
그 은혜스러운 CCM을 꾸준히 틀어놓는 가운데
그 음악이 마을 사람들 귀에 계속 쌓이고 남았겠죠.
그러고 그 마을이 변해 버렸어요.
이것이 우리가 꾸준히 그동안 주창해 왔던 '선교적 교회'의 샘플 입니다.
여러분 또 한 주간도, 뭐 대단하 거 하려고 하지 마세요.
'어떻게 사랑을 할까, 내 옷을 벗어 줄까?' 그러지 마세요.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오늘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로써 승부를 거는 한 주 간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
▲오늘 오전에 어떤 타교회 자매님이 어렵게 저를 찾아왔어요.
지금 자기 진로에 대해서, 아주 곤혹스러운 갈등과 갈림길에 서 있다면서,
제게 조언을 요청했습니다.
'제가 내년에 신학대학원을 가야 되느냐?
아니면 그냥 지금 다니는 직장, 이것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소명이라면, 계속 다녀야 되느냐?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옛날 같으면 '신대원에 가지 마세요.
그냥 일상에서 건강하게 자기 소명을 살아내는 것도 큰 사명 감당이니까,
함부로 신학교에 가지 마세요' 그랬을 거예요.
그런데 세월이 가고 시간이 흐를수록,
요즘은 제가 점점 신학교에 많이 가라고 그래요.
이 세상에서 영원한 건 세 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영원하시고, 그 분의 말씀이 영원하시고, 그 분의 나라가 영원합니다.
꽃은 시들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세세에 무궁토록 있으리로다.
그러므로 신대원 가서 고생하고... 미래가 불확실 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이 확실하면,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길이
영원과 영생의 관점에서 보면, 그게 지혜로운 선택이요, 믿음의 길이라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