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V, 개혁의 마지막은 화폐개혁_태승철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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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 ‘북한의 화폐 개혁’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종교개혁은 대문자 R을 써서 Reformation이라 하고,
화폐개혁은 Currency reform이라고 합니다. 이 화폐개혁이 2009년에 북한에서 있었습니다.
국가가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포기하고 국민들의 경제문제에 대해서 손을 놓게 되자,
북한의 주민들이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장마당을 활성화하였고
북한의 경제를 시장경제가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장마당에서는 달러나 위안화가 상용되고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 배경에는 이 화폐개혁이 자리 잡고 있는데 북한은 기습적으로 화폐개혁을 하여
기존의 100원을 신권 1원으로 발행하였습니다.
화폐의 단위를 낮추는 것을 Denomination이라고 하는데, *'교단'과 영어가 같네요.
교환할 수 있는 상한액수를 10만원으로 정했습니다.
즉 내가 지금 돈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신권으로 10만원만 교환할 수 있고,
바꿀 수 없는 나머지 돈은 휴지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공산당의 고위층들은 이 화폐개혁을 미리 알았기에 가지고 있던 돈을 전부
달러나 위안화로 환전을 하고, 주민들에게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화폐개혁을 선포해버렸습니다.
장마당에 떠돌던 주민들의 모든 돈을 강탈해 버린 것과 마찬가지 짓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화폐개혁이 끝나자 북한 주민들은 화폐개혁을 두려워하여 북한 돈을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힘들게 일해서 얼마나 많이 모았든지 다 휴지가 되어버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론
신년 사경회로 “이제는 부흥이 아닌 개혁이다”라는 큰 주제로
개혁에 관한 여러 측면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신앙개혁의 마지막 단계는 북한식의 말도 안 되는 화폐개혁이라는 것입니다.
이 화폐개혁이 개인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이 온전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어제 교회일치를 위해서 의도적으로 기관과 교단들이 서로의 차이점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그 이유는 각자가 올바른 믿음을 갖게 되면
그 안에 있는 일치의 유전자로 인해서 저절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온전한 믿음을 일상생활에서 유지한다면 화폐개혁과 같은 일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알짜 부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소박해보여도 빚이 하나도 없고
가용할 수 있는 재물로 가득 찬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알짜 부자가 아닌 알몸 부자가 되는 자들입니다.
욥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탄과 논쟁을 벌이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욥의 믿음을 칭찬하시자
사탄은 하나님께서 욥에게 자녀와 재산의 축복을 해주셨기 때문이라고 반박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욥의 믿음을 증명하시기 위해서 주셨던 복을 모두 가져가십니다.
그 때에 욥이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라는 말을 하는데 알몸입니다. 욥1:21 *과거에 적신 赤身
그리고 창세기 3장의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뒤에 숨었을 때에도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하는데 알몸이 나옵니다.
그러면 알몸 부자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선악과를 따먹고 두려워 한 이유는
세상의 가치들인 돈 권세 관직 등을 좋아함에 눈을 뜨게 되었는데
돈도 없고 관직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범죄하기 전에는 알몸인데 속이 하나님으로 꽉 찬 알몸 부자로 살았습니다.
내 인격성을 주체적으로 부인하여 선악을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들이면,
인격체이신 하나님과의 연합이 이루어지고 마음은 하나님으로 부자가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몸은 아무것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돈이 좋거나 나쁘다는 판단이 없기 때문에
돈을 가지려고 하지 않고 마음에서 돈을 끌어당기지도 않습니다.
아담은 창조될 때에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운 알몸 부자였으나
타락함으로 인해 에덴 바깥에서 알몸이 아니기를 바랐고,
마음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서 흡인력을 작동시켰던 것입니다.
반대로 욥은 갖고 있던 재물을 다 잃어서 알몸이 되었으나
마지막에 가서는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라는 고백을 하는 알몸 부자가 되었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졌음을 뜻합니다.
반대로 마음으로 재물을 보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된 뒤에 하나님께서는 알몸되기 전에 있었던 재물의 두 배와 자식들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무일푼으로도 알몸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알몸 부자가 되어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데,
돈이 아무런 소용이 없고 아무 가치가 없고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이것이 화폐개혁입니다.
돈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런데 내가 알몸 부자가 되고 보니 그 가치와 쓸모를 알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 맞춤형 사이즈’로 만들어졌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움으로서 부자가 된 사람이 알몸 부자이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자신을 위하는 돈의 가치란 제로와 다름없습니다.
참된 개혁의 마지막 단계는 이렇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주님이 베드로의 신앙고백위에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신
공교회의 처음 단계의 모습인 초대교회에서는 유무상통이 일어났습니다.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함을 통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간 사람들에 의해서,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과 승천 사건이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의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된 자들의 모임이 교회인 것입니다.
마음이 꽉 찬 부자가 된 이들이 만족하게 된 이유를 살펴보니
이 세상의 돈 자식 건강 승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가득 찬 알몸 부자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내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나를 위해서 쓰지 않게 됩니다.
이미 알몸 부자가 되었으므로 나에 대한 요구가 없는 것이고
유무상통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전에는 살아가는 삶의 기본 방향이 나를 위해 흡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알몸 부자가 되고나자 나를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없기 때문에
주어진 것을 방출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흡입력이 방출력으로 바뀌는 것인데, 이게 개혁의 마지막 단계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돈이 귀중하고 소중해서 그것으로 만족하고 싶다는 소원이 살아있다면
개혁은 일어나지 않은 것이고, 돈의 지점까지 뿌리를 캐내는 믿음의 확산도 일어나지 않고
돈이라는 강철 같은 장벽에 막힐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모든 면에서는 믿음의 사람인 것 같습니다.
감사하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교회생활도 잘하고 충성합니다.
그러나 유독 돈 문제에 있어서는 막혀있는 집사님이나 장로님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막혀있는 지점으로부터 잘돼 보였던 모든 믿음의 영역 전체가 썩어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이 지점이 해결되고 유무상통의 단계가 내 마음에 주어지지 않는 한
모든 믿음은 다 썩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개혁의 마지막 단계로 향할 수 없다면 교회도 우리의 믿음도 조금도 나아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라이벌로서 재물을 언급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라이벌인 이 재물을
마음에서 떨쳐내고 하나님으로 온전한 만족을 가지는 알몸 부자가 되는 것이
개혁의 마지막 단계이자 완성단계가 됩니다.
이 점을 놓치면 아무리 잘 믿는 것 같아도 자기를 속이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방출체질로 돈을 대하지 못하고 흡입체질로 돈을 대하고 있다면
아직 온전한 믿음의 단계도 아니고 개혁을 일상화하지 못하는 단계인 것입니다.
개혁의 일상화란 날마다 개혁을 이루는 것인데 날마다 죽는 것입니다.
이 개혁은 조직이나 단체나 사회계층 간의 균열에 의해 나타날 필요가 없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처럼 되어야만 개혁인 것이 아닙니다.
당시에는 교황의 지배체재 아래에서 자기의 통치영역을 넓히고 싶었던
선거후 들이나 세속 영주들이
정치적 야욕을 가지고 루터의 종교개혁에 합세하였습니다.
또한 영주들에게 착취를 당해오던 농민들이 루터의 저항에서 힌트를 얻어
농민봉기를 일으킴으로서 유럽사회가 흔들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개혁은
이전과 같은 계층 간의 균열로 인한 파장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종교의 자유가 있고 억압당하지 않기 때문에
개혁은 개인적으로 일어나야만 합니다.
이 개인적인 개혁의 마지막 단계가 바로 돈에 대한 것입니다.
돈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알몸 부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한 상태는 개혁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믿음도 아니고 공교회의 교인도 아닌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하십니다.
‘네 보물 있는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는 말씀에서 보물과 마음은 언제나 붙어 다닙니다.
마음의 흡입력 때문이고 마음은 보물을 흡착하기를 원합니다.
저희 할머니께서 살아계셨을 때에는 저를 ‘우리 보물’이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할머니의 마음을 채워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음은 공백이 있기 때문에
진공상태가 형성되어서 흡입력이 있습니다.
이 흡입력은 보물을 흡착하여 마음과 보물이 붙게 합니다.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는 말씀은 땅에 쌓아 둘 수 있는 것을 보물로 삼지 말라는 얘깁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의 흡인력 자체를 나무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비어있게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다만 마음이 흡입할 때에 땅에 있는 것들을 보물로 삼지 말고,
하늘의 존재를 보물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땅의 것인 돈을 보물로 삼고 돈을 많이 벌면 기쁩니다.
이 기쁨은 채워짐의 기쁨이 아니라 성취의 기쁨입니다.
이루고 싶었고 갖고 싶었기 때문에 이루고 가졌다는 성취의 기쁨입니다.
그런데 이 성취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일류대학을 들어갔어도 기쁨의 색깔이 그대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성취의 기쁨이 오래가지 못하는 이유는 여전히 마음이 비어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하나님의 맞춤형 사이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성취의 기쁨이 잠깐 있을 수는 있으나 이 기쁨은 마음의 공백에 의해서 잠식되어 버리고
매몰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또 다른 기쁨거리를 찾게 됩니다.
▲그러므로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는 말은 알몸 부자가 되어서
마음이 채워지지 않는 한 세상을 향한 흡입력이 작동할 수밖에 없는데
마음의 공백으로부터 비롯되는 흡입력을 하늘로 향하라는 것입니다.
그 흡입력의 흡입구 방향을 바꾸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세상에 대해서 죽으셨습니다.
‘죽으셨다’는 말은 우리가 마음을 주님께 드려서 구주로 믿으면,
그 마음의 흡입구가 주님의 죽음과 연합해서 부활하고 승천하시는 주님을 따라서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늘에 앉힌바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계속 흡입을 해야 하는데 누구를 흡입합니까? 주님 안에서 흡입하려고 할 때에
주님 앞에는 하나님 아버지만이 계십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흡입하게 되는데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버지 앞으로 끌어가시고 성령님이 아버지 하나님을
우리 마음으로 들어오게 하십니다. 우리 마음에 들어와 계신 하나님이 성령이십니다.
이렇게 해서 알몸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라’는 말씀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가 보물임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이 땅에서 선한 행위를 해서 나중에 상급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아닙니다.
이 땅에서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장갑 삼으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라”고 고백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장갑 삼으시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으로 만족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소원하고 말씀을 들었느냐는 것이고,
얼마나 알몸 부자 되기 위해서 애를 썼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돈 걱정이 생기면 이렇게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는 돈에 대해서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하늘에 앉혀주시고
주님이 하나님을 보듯이 내 마음도 하나님을 흡입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할 때에
성령님이 임하십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또 성령 충만함이 사그라질 때가 있기에 또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해서 하나님으로 만족한 나날들을 보내는 것인데
이것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이고 알몸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알몸 부자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알몸 부자로서 빚더미에 앉아 있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지금 돈 걱정에 짓눌려 있는 사람이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싸움하듯 기도를 합니다.
기도가 되지 않으면 말씀을 듣습니다.
그럴 때에 말씀이 내 속에 있는 돈 걱정을 쳐내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면 돈 걱정이 밀려나가고 다시 기도로 하나님을 흡입하므로 알몸 부자가 됩니다.
그럴 때에 돈이 문제가 되는 내 마음은 이 세상 바깥으로 나가게 되고
하나님으로 만족한 상태가 된 뒤에 다시금 바라보는 세상은 변한 것이 없음에도
이제 내 마음에서는 그 빚이 문제가 되질 않습니다. 무게감이 없어져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마음이 하늘로 만족했기 때문에 내게 주어져 있는 모든 것들은 다 잉여물이 됩니다.
이 세상의 것들을 끌어 모으려는 체질이 멈춰지고 방출의 체질이 나타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몸 하나라면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얻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이 몸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위해 십자가 기도를 하게 되는데 흡입체질이 끝나는 것입니다.
이 흡입체질이 끝나고 방출체질이 되는 것이 십자가 생활화의 결론입니다.
주님께서도 한 서기관이 따르려고 하자 마8:20절에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라고 하셨는데
알몸 부자이셨습니다. 그리고 알몸을 사용하셔서 인류를 구원하셨는데
몸조차도 잉여물이 된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서 쓰실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알몸 부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알몸 부자가 되면 내 주머니에 있는 만원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쓰려고 하면
오병이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이미 하나님으로 만족하기 때문에 돈으로 만족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저 일용할 양식 주어져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하루 세끼 먹으면 감사한 것입니다.
그 외의 것들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되어지기를 원하는 방출체질이 되는 것입니다.
돈의 가치가 나의 만족을 위한 목적에서는 제로가 됩니다.
북한의 화폐개혁과 같은 개혁이 일어나는 것인데 이것이 개혁의 마지막 단계입니다.
그러나 이 개혁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나의 믿음이 온전치 못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면
그래도 그 사람은 믿는 사람입니다. 믿음은 내가 체감하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롬1: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고 했습니다.
종착역의 믿음이 있고 출발점의 믿음이 있습니다.
아직 돈에 대한 체감적인 화폐개혁이 일어나지 않았고 여전히 돈에 대한 흡입력이 작용하고 있다면
알몸 부자가 되지 못했다는 것만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눈과 몸의 관계를 마치 눈이 몸이라는 방안에 불을 밝히는 등불인 것처럼
비유를 하십니다. ‘눈이 어두우면 어두움이 더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마음의 공백상태는 근본적으로 열망하는데, 내 마음을 채울 수 있는 확실한 대상을 찾습니다.
그러다가 빛을 봅니다. ‘빛을 본다’는 것은 마음의 공백을 채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과 확신이 드는 대상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 다음에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만약에 재물에서 빛을 본다면 마음의 공백을 돈으로 채울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돈을 어두움이라고 하십니다. 마음이 비어있어서 어두운데
그 어두운 공백을 채우기 위해서 재물을 택하면 어두움이 더해질 수밖에 없고 혼란은 가중된다는 것입니다.
돈이 마음을 채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돈을 벌었는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채워지지 않고 만족이 없습니다. 돈을 벌었다는 성취감이 잠깐 있을 수 있습니다.
만족이 없으므로 돈을 함부로 씁니다.
행7장의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를 들어보면 아브라함에게 영광의 하나님이 보여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났다고 합니다.
‘영광의 하나님’은 어두운 마음의 공백을 무엇으로 채울까 찾고 있는데 빛이 들어와서
그 빛을 보았더니 하나님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울 수 있을 것이라 믿고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알몸 부자 되기를 작정했던 것입니다. 떠날 때에 마음에서 아내도 버렸습니다.
떠나려면 아내조차도 버릴 각오를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삭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짐으로 자신이 이 땅에 내려왔던 존재의미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삭을 번제로 죽이려고 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빛만을 좇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빛으로 여기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내 마음만을 채우실 수 있다고 생각으로 믿는 것입니다.
아직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체감은 못하더라도 생각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건강 때문에 자녀 때문에 돈 때문에 걱정이 생긴다 해도
그것이 거짓말 걱정임을 알게 됩니다. 걱정이 생기는 이유는
하나님으로 알몸 부자가 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나는 세상이 알아주지 않고
아무것도 없더라도 하나님으로 알몸부자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알몸 부자의 믿음을 가지고 나에게서 흡입력이 작용하는지 방출력이 작용하는지
끊임없이 관측해야 할 것입니다. 알몸 부자가 되었다면 지금 가진 모든 것이 잉여물이 되어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쓰임을 받습니다.
세상의 알짜 부자는 빈곤한 자이며 어둠이 더한 자가 될 뿐입니다.
알몸 부자가 되어서 재물과 돈을 나를 위해서는 더 이상 써야 될 가치가
일용할 양식 외에는 가치가 없는 물건으로 보이기 시작하면
당신이 진정한 종교개혁자입니다. 개혁은 그 지점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쓰고 싶은 마음밖에는 없는데, 그렇게 쓰면 쓸수록
하나님께서는 자꾸만 채워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루고 싶으신 뜻이 많기 때문에,
그 뜻대로 돈을 쓸 수 있는 방출 체질이 된 나에게 자꾸만 부어주십니다.
욥이 귀로 듣던 하나님을 마음으로 보게 되자 하나님께서 두 배의 재산을 주십니다.
자식들도 전에 못지않게 주십니다.
그러나 욥은 이전과는 다르게 다 방출하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알몸 부자와 방출체질은 화폐개혁이 일어난 증거입니다.
우리에게도 유무상통을 할 수 있을 만큼의 화폐개혁이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