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04 23 아덴에서의 바울의 전도(1) - YouTube
◈아덴에서의 바울의 전도 행17:16~21
※전반부는 이론적인데, 후반부 ◑적용은 훌륭합니다.
아덴에 앞서 바울은 베뢰아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베뢰아를 급히 떠나와야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좇아와서 소동을 피웠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할 수 없이 베뢰아를 급히 떠나서, 도착한 곳은 그리스 남부 아덴이라는 도시입니다.
우리나라의 강원도, 경상도 처럼, 로마제국은 '주 Provincia'가 있습니다.
그리스 지역엔 (발칸 반도) 2개의 주가 있었는데, 마게도냐 와 아가야 였습니다.
북부 마게도냐 주에는,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도시들이 속해 있었고
남부 아가야 주에는, 아덴, 고린도 등의 도시들이 속해 있었죠.
그래서 바울이 베뢰아를 떠나 아덴에 온 것은,
마게도냐 지역에서, 배를 타고, 아가야 지역으로 내려온 겁니다.
아덴은 오늘날 그리스의 아테네를 말합니다.
그리스의 아테네는 당시에 로마 제국의 지배 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정신을 지배한 것은, 그리스 아테네의 사상과 문화였습니다.
아시다시피 당시 헬라의 문학과 예술과 철학의 중심지가 아덴(아테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아덴은 로마제국 아래에서도 영향력이 있던 도시였습니다.
로마 제국의 뇌를 이제 지배하고 있던 곳이었죠.
로마제국의 정신과 사상을 지배할만큼, 막강하고 중요한 도시가 아덴(아테네)였습니다.
특별히 아덴은, 철학이 유명했죠.
우리가 이름만 되면 아는 철학자 세 사람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이 세 사람이 모두 아테네가 배출한 인물입니다. *BC 4~5세기
그만큼 철학과 지식의 도시가 아덴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로마제국에서, 지성인들이 가장 방문하고 싶은 도시가 아덴이었습니다.
실제로 2000년 전에 로마제국 아래에서, 내로라는 사람들 치고,
아덴을 방문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갔다 와서는, 아덴에 대한 글을 남겼습니다...
▲뿐만 아니라이 아덴은, 중요한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아덴은 종교성이 강한 도시였습니다.
17:22절에 바울은, 아덴의 사람들을 가리켜 '범사에 종교성이 많은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아덴은 여러 다양한 신들을 섬기는 종교성 강한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아덴은, 신전으로 가득 찬 곳이었습니다.
신상이 가득하고, 신전이 가득했던 곳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아덴에 있는 우상의 수가 3만 개가 넘었다고 합니다.
3만 개면 그 당시 아덴의 인구의 수보다 많은 숫자였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숫자보다, 우상의 숫자가 더 많았던 도시가 아덴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사람들 사이에 소문이 나기를
'아덴에서는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우상을 만나는게 더 쉬웠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중에 크세노폰 이라는 사상가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테네는 그 자체가 하나의 큰 제단이다.'
그러니까 아테네는, 그 자체가 신에게 바쳐지는 제단과 같다는 말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아테네는 도시 자체가 신에게 바쳐지는 제물이다' 라고도 했습니다.
그만큼 온 도시가 우상으로 덮여진 곳이 아덴 이었습니다.
사실 아테네 라는 도시 이름 자체도, 그들이 섬기는 여신(아테나)에서 유래된 이름입니다.
그들이 섬기는 신 중에 전쟁의 여신인 '아테나' 라는 여신이 있었습니다.
그 아테나라는 여신에서 유래된 이름이 아테네(아덴)였습니다.
'전쟁의 여신 아테나를 수호신으로 삼는 도시'라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이 아테나 여신을 그 섬기는 신전이, 오늘날 아테네에 유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의 아테네 도시를 가 보면, 서울의 남산 같은 산 위에 '아크로 폴리스'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아크로'는 '높은'이라는 뜻이고요. '폴리스'는 '도시'라는 뜻이죠.
높은 언덕에 도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를 보시면 전부 다 신전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리스의 여러 도시들마다 '아크로 폴리스'가 있습니다)
아덴의 아크로 폴리스 중에 가장 크고 중안인 곳에 파르테논 신전이 있습니다.
파르테논 신전이 바로 아테나 여신을 섬기는 신전입니다.
이게 아테나 여신, 전쟁의 신입니다.
이 전쟁의 신인 아테나를 수호신으로 삼는 도시라는 의미로
아테네 라는 도시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아테네라는 도시 이름 자체가 신의 이름입니다.
그만큼 어느 도시보다 우상으로 가득 찬 도시가 아테네였습니다.
▲한편으로 아테네는 그만큼 웅장하고 화려한 도시였습니다.
보시다시피 신전들은, 하나같이 웅대하고 예술적인 건축물들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파르테논 신전은, 유네스코 제1호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었고요.
유네스코의 엠블럼이 파르테논 신전을 모델로 디자인 되었습니다.
파르테논 신전뿐만 아니라, 아테네에 있는 모든 신전들이 예외 없이
다 아름다운 예술품들이었습니다.
한 기록에 의하면, 아테나 여신상이 들고 있는 창이 있잖아요.
이 창 끝에 번쩍이는 빛이, 그 당시 실제로 64KM나 떨어져 있는 곳에서도 보일 정도였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이 아덴에 도착하면,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도시가 너무나 화려하고 아름답고 웅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압도되는 기분이 드는 거죠.
◑자 그러나 오늘 본문에 바울을 보십시오 아덴에 도착한 바울은,
아덴을 보고 동경하지 않습니다. 그 굉장한 건축과 문화유산에 흠모하지 않습니다.
어마어마한 지식과, 철학과, 예술과, 문화의 한 획을 그은 그 도시에서
바울이 느낀 첫 번째 반응이 무엇이죠.
16절에 보면 '마음에 격분했다'고 말합니다.
17:16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격분은 '격렬한 분노'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어마어마한 신전의 건축물들과, 예술과, 문화의 화려함을 보고
마음의 감동을 받은게 아니었습니다.
일반 여행가들처럼, 아덴의 칭송하거나 높이지 않았습니다.
아덴을 둘러본 바울의 첫 번째 반응은 "격렬한 분노"였습니다.
바울의 눈으로 보기에는, 아덴의 신들이, 한낱 어리석은 우상에 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7: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알지도 못하는 신을 왜 섬겼을까요.
혹시나 그 신들이, 자기를 섬기지 않았다.고 진노하면 안 되니까요.
'어, 감히 나를 무시해? 감히 나를 빼먹어?'
그 신이 보복하면 안 되니까요. 그 두려움에 '알지 못하는 신'까지 섬겼습니다.
제가 한번 그 아덴에서 섬기는 신들을 몇 개 뽑아 봤습니다.
이 신들 가운데는, 우리가 이름을 들어본 신들도 있을 겁니다.
번개의 신 제우스, 결혼의 여신 헤라, (화장품 브랜드)
바다의 신 포세이돈, 곡식과 대지의 신 데메테르
슬음악과 예술의 신 아폴론, 미와 사랑의 여신 앞으로 아프로디테 (비너스)
술과 광란의 신 디오니소스, 사랑의 신 에로스,
태양이신 헬리오스, 승리의 여신 니케아 (오늘날의 나이키)
풍요의 신 레아, 그 밖에도 많은 신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신들을 다 섬겨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제우스를 섬기다가 헤라가 삐지면, 헤라한테 혼나고요.
포세이돈을 섬기다가 데메테르가 삐지면, 데메테르한테 혼나고요.
그래서 모든 신들을 잘 섬겨야 했습니다.
자 그런데 그 외에도 '자기들이 알지 못하는 신'이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신을 빼먹을 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그 신이 얼마나 화가 나겠어요?
그래서 '알지 못하는 신'이라는 이름으로, 그 신들까지도 섬겼던 것입니다. :23
그걸 보고 바울이 격렬한 분노를 느낀 겁니다.
▲죄로 눈이 멀어서,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을 섬기는 그들을 보며,
바울은 격렬한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가만 있지를 못합니다. 거기서도 바울은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어디서 복음을 전했을까요? 17절에 보면 두 곳이 나옵니다.
1) 먼저는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회당 안에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신앙이 경건하다는 뜻이 아니라)
이방인이지만 유대교의 하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바울은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그 동안의 선교 패턴이었죠.
17: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2) 그런데 바울은 또 다른 곳에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로 장터에 나가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장터에 나간 바울은,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을 했습니다.
여기서 '장터'는 단순히 시장이 아니라, 헬라어로 '아고라' 인데요. '광장'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기 때문에, 시장도 형성되어 있지만,
그 광장 한 켠에서는, 학자들이 모여서 대화도 하고 회의도 하는 곳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도 이 도시의 장터(아고라)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바울도 여기서 이제 사람들을 만나 변론을 했습니다.
18절에 보면, '바울은 예수와 부활을 전했다'고 말합니다.
'예수와 부활'은 바울이 전했던 복음의 핵심 메시지였습니다.
바울은, 우상으로 가득 차고, 또 철학의 도시, 지성의 도시였던 아덴에서도
예수와 부활을 전했습니다.
▲그때 바울은 장터에서, 아덴에 퍼져 있던 철학자들을 만납니다. 그들이 누구이죠?
17:18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바울이 만난 철학자들은,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입니다.
쾌락주의와 금욕주의죠.
이 두 학파는 헬라 문화를 대표하는 철학자들이었습니다. 주1)
에피쿠로스 학파는, 기본적으로 무신론을 가르쳤고요.
스토아 학파는, 신이 있다고 할지라도, 비인격적인 신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합니다. 무신론이 아닌 거죠.
그 하나님은 인격적인 신이라고 말합니다. 비인격적인 신이 아닌 거죠.
그뿐 아니라 두 학파 모두, 죽음 이후에 심판과 내세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 이후에 심판과 영원한 내세가 있다고 말합니다.
자 바울은,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예수와 부활을 전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가르침이, 이들이 듣기에 얼마나 이상했겠습니까?
듣지도 못했던 얘기니까요. 자기들이 믿는 것과 전혀 다르니까요.
실제로 18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전한 예수와 부활을 들은 이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먼저 바울을 보고 '말쟁이'라고 표현합니다. *babbler, 스페르몰로고스
여기서 '말쟁이'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 말쟁이라는 단어는 '곡식을 쪼아먹는 새'라는 뜻입니다.
새가 이쪽에서 조금 곡식을 쪼아 먹고, 저쪽에서 조금 낱알을 쪼아 먹는 것처럼
바울은 이쪽에서 조금 주워 듣고, 저쪽에서 조금 주워 들은 이야기를
모아서 말하는 말쟁이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걸 가지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리스의 철학자들처럼, 자기가 연구하고 공부해서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어디서 좀 주워들은 얘기들을 모아서 떠드는 '말쟁이'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
굉장히 바울을 얕잡아 보는 거죠.
또 다른 사람들은 바울을 보고 '이방 신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18
외국의 신을 전하는 사람이라는 거죠.
'예수'라는 신은, 그들이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바울을 그냥 보내지 않습니다.
19절에 보면, 바울을 붙들어 아레오바고 로 데려갑니다.
아레오바고 는, 전쟁의 신 아레스의 언덕이라는 뜻입니다.
17:19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그러니까 아레오바고 라는 이름조차도
그들이 섬기던 신의 이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만큼 우상으로 온통 덮여진 도시가 아테네였다는 사실입니다.
'아레오바고'는 그 당시에 그리스의 법정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부당한 판결을 받고, 사형에 처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소크라테스를 판결한 곳이 바로 아레오바고 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판결을 받으려고 아레오바고로 가는게 아닙니다.
아리오바고는, 법정뿐만 아니라,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강단이 있었습니다.
이 강단에서는 자기가 배우고 연구한 것들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도 이 아레오바고 강단에서 연설을 했는데요.
그러니까 지금 아덴의 철학자들이 바울을 아레오바고 로 데려가는 이유는
재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바울의 가르침, 바울의 말을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19절의 바울의 가르침이, 그들의 듣기에는 이상하기도 했지만
너무나 새로웠기 때문입니다.
17:21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특별히 21절을 한번 보십시오, 자 이들에 대한 재미있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그들은 시간이 널널한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철학적인 도시라서 그런지 몰라도, 새로운 철학이 나왔다 하면
그걸 듣는데 시간을 다 쓴다고 말합니다.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돈을 언제 버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일은 안 하고
새로운 철학이 나오면, 그거 듣느라 시간을 다 허비합니다.
그래서 바울에게서도 뭔가 새로운 것을 듣고자 했습니다.
바울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이 기회를 빌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아레오바고 에서 어떤 설교를 했을까요?
그 당시에 내로라 하는 최고의 지성인들 앞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그들 앞에서
바울은 어떻게 복음을 전했을까요?
그 부분은 다음 주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다시금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바울은, 아덴에서 사역을 하려고 했던게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아덴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바울은 지금 혼자 아덴에 와 있기 때문입니다.
베레아에서 급히 도망치는 바람에 바울만 아데네에 혼자 오게 되었습니다.
자 그래서 바울은 아덴에서 실라와 디모데가 오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항상 팀으로 사역을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혼자 사역한 적이 없습니다. 항상 팀을 이루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게 예수님의 가르침이었죠.
그래서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자 그 기다리던 장소가, 본문의 아덴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아덴에서 갑자기 복음을 전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아직 동역자들이 오지도 않았는데, 혼자 사역을 시작했던 이유가 16절에 나오는데요.
바울은 아덴의 가득한 우상을 보고 격분했기 때문입니다.
17:16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여기에 '격분했다'는 말은, 헬라어로 '파록시노' 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에서 파생한 영어 단어가 '패록시즘 paroxysm'이라는 단어입니다.
'돌발적인 격렬한 감정'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자극이 있어서, 그 자극으로 인해 갑자기 격렬한 분노가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바울에게, 이토록 격렬한 분노를 일으킨 그 자극이 무엇입니까?
바로 아덴 사람들이 섬기던 우상이었습니다.
그 우상들을 보고, 바울에게는 돌발적으로 격렬한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더군다나 여기 '격분'이라는 단어의 시제를 보면, 미완료 시제입니다.
한번 분노하고 그쳤다는게 아닙니다. 계속해서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아덴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이라는 자극 때문이었죠.
그런데 이 '격분 (파록시노)'이라는 단어가, 바울만의 언어가 아닙니다.
이 단어는 사실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그 예가 사65:2~3절에 나오는데요.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곧 동산에서 제사하며 벽돌 위에서 분향하여 내 앞에서 항상 내 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
이 구절은, 하나님이 우상숭배를 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신 말씀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종일 손을 펴서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의 품 안으로 돌아오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우상숭배에서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동산에서 그들은 여전히 다른 신들에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그런 모습이, 하나님의 노를 일으켰다고 하십니다.
이때 '노'가 오늘 본문에, 격분(파록시노) 라는 단어입니다. 사65:3
*LXX에서 '파록시노'로 번역
그러니까 성경에서 이 단어는 어떠한 단어이죠?
우상숭배와 관련된 하나님의 분노를 표현하는 특정적인 단어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바울의 격분은, 하나님의 격분이었습니다.
우상숭배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격분이, 바울의 마음 안에 동일하게 일어난 것입니다.
◑적용
그 하나님의 격분을, 우리는 성자 예수님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도,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 앞에서, 이런 영적인 분노를 느끼셨습니다.
그 예로, 복음서에 나오는 성전청결 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루는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때 제사장들은, 돈을 우상으로 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전락시켰습니다.
그 안에서 돈바꾸고, 짐승을 파는 장사를 한 것이죠.
그 모습을 본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돈을 우상으로 섬기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용서해 주시고 다 품어주셨습니까? 아니었죠.
예수님은 격노하셨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쫓아내셨을뿐만 아니라,
그것도 모자라서 심지어는 그들의 좌판과 의자를 뒤집어 엎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을 향해 언제나 격노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에서 어떠한 우상이든 우상을 섬길 때
격노하셨습니다. 그 단어가 바로 본문에 헬라어 '파록시노' 라는 단어입니다.
이 하나님의 격분이 오늘 바울의 마음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격분은, 인간적이거나 육체적인 격분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격분은, 영적인 격분이었고, 거룩한 분노였습니다.
하나님이 느끼시는 거룩한 분노가, 바울의 마음에서 불일듯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을 보십시오.
누구도 우상의 도시 아덴을 보고, 거룩한 분노로 격분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세상의 사람들은 아덴을 보고 동경을 했습니다.
아덴에 온 사람들은, 화려하고 웅장하게 세우진 그 신전들, 그 건축물들에
그들의 눈과 마음을 빼앗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눈에는, 그 인류의 문화유산에 해당되는
어마어마한 유산들이 눈에 들어왔다기 보다는
여전히 우상을 섬기고 있는,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아픔을 가지고, 마음에 분노가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은, 참 세상 사람들과 다른 눈을 가지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아덴은, 관광지가 아니라, 우상이 자기 마음을 자극해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도시였습니다. 바울의 마음에는 복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바울 되게 한 것은, 언제나 복음이었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습니다.
복음의 그를 다스리고 있으니까, 복음과 대치되는 우상을 섬기는 그 도시의 모습이
그의 마음에 파록시노,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가 아덴으로 오기도 전에, 혼자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회당에서뿐만 아니라, 장터(아고라)에 나가서도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복음은 바로 '예수와 부활'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를 가지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확인하는게 한 가지 있습니다.
신자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가지는, 기본적인 신자의 마음은
바로 이 '격분'이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아테네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테네가 섬겼던 우상 신들을, 우리도 똑같이 섬기고 있습니다.
1) 아테네가 섬겼던 풍요의 신 레아 Rhea,
오늘날 우리도 풍요가 우상이 되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번영과 성공이 우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마저도, 나의 번영과, 나의 성공과, 나의 풍요를 위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돈이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돈을 우상으로 두고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2) 아테네가 섬겼던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
오늘도 미의 기준이라고 여기는 외모가 우상인 시대입니다.
3) 아테네가 섬겼던 술과 광란의 신인 디오니소스,
오늘날도 쾌락이 우상인 시대입니다.
4) 사랑의 신 에로스,
오늘날도 성이 우상인 시대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중심에는 '자기'라는 우상이 있습니다.
아테네의 신전 안에 있던 그 우상들이
이 시대에는 다 바깥으로 꺼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바울처럼, 세상을 돌아보면
우리 안에 만연한 우상을 보게 됩니다.
지금도 세상은, 하나님이 아니라, 헛된 우상을 의지하고
그것들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우상을 섬기고 있는 세상의 모습이,
여러분에게는 자극이 되고 있습니까?
그래서 바울처럼, 타록시노, 하나님의 격분을 느끼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세상이 섬기는 우상들 앞에, 어떠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돈이라는 우상, 권력이라는 우상, 쾌락이라는 우상,
성공이라는 우상, 성이라는 우상, 자기라는 우상...
그 우상들을 섬기는 세상을 보면서,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만일 우상을 섬기는 불신자의 모습이,
우리의 마음에 아무런 자극을 주지 못한다면,
우리의 믿음을 돌아봐야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보면서도
그게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지기 보다는, 정상적으로 여겨지고 있다면,
그래서 우리도 그 길을 부단히 좇아가고 있다면,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상을 섬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영적 격분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도 그들과 똑같은, 혹은 비슷한 우상숭배자일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삶의 모습과 가치관이
불신자들의 삶의 모습과 가치관과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다면
우리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절대로, 우리는 복음을 드러내는 증인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만일 온갖 우상으로 만연한 이 세상에 대해
하나님의 격분을 느끼며 살아간다면,
그 영혼은, 하나님 안에서 복음을 가진 자로서, 바로 서 있는 자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만일 온갖 우상을 좇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탄식하며,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게 살아간다면
그의 영혼은 하나님 앞에서 싱싱하게 살아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 우상숭배에 대해, 영적 격분을 느낄 줄 아는 사람만이
눈에 보이는 아테네를 넘어, 보이지 않는 영원을 쫓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만이 진정으로 예수와 부활을 전하며, 이 땅을 다르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새롭게 시작되는 한 주간도
우리가 살아갈 세상은, 2000년 전의 아테네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도 세상은 온갖 우상이 판을 치고 있는, 현대판 아테네와 같습니다.
어떤 시대보다 우상을 섬기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격분, 파록시노를 가지고 살아가는
바울과 같은 참된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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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에피쿠로스 학파는, 에피쿠로스의 후학들이 세운 학파입니다.
이 학파는, 인생의 최고의 목적이 쾌락이라고 말합니다.
이때 쾌락은 단순히 육체적인 쾌락만 말하는게 아닙니다.
신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염려가 없는 상태까지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신을 믿지 않았습니다.
신이 세상을 만들고 섭리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창조와 섭리를 부정한 거죠.
신이 없으니까, 사후의 심판과 내세 또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설령 신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인간의 삶에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에 이신론과 같은 거죠. 신은 인간과 동떨어진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신들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신들을 두려워하거나, 신들에게 순종할 필요가 없습니다.
동떨어지고 간섭하지 않는 신이니까요.
그러니 이 땅에서의 최상의 삶은, 그저 이 땅에서 쾌락을 누리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들의 일부는, '죽은 다음에 아무것도 없으니까 먹고 마시자' 와 같은
향락주의로 전락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에피쿠로스 학파에 가르침이, 그리스 신화에도 반영이 되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사람의 쾌락과 관련된 신이 많이 나옵니다.
사랑에 관한 신, 음악에 관한 신, 술에 관한 신, 광란의 신...
이게 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영향이었습니다.
이 땅에서의 최고의 행복은, 쾌락을 누리는 삶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죠.
반대로 스토아 학자는, 금욕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들 역시도, 사후의 심판과 내세를 믿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이들은, 신의 존재는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 스토아 학파가 말하는 신은, 성경이 말하는 인격적인 신이 아니라
비인격적인 존재였습니다.
비인격적인 신으로 만물 속에 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이걸 범신론이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불교의 사상이, 이 범신론과 굉장히 비슷합니다.
쉽게 말해이 세상 모든 것에 다 신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산도 신이 되고, 바다도 신이 되고, 바위도 신이 됩니다.
그러니 이 두 학파는, 성경의 가르침과 배치되는 거죠.
기독교의 신관과 다른 신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