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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 교회가 세워지다

LNCK 2024. 5. 30. 17:05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 부흥

2023 04 02 / 사도행전 강해 (62) / 데살로니가 교회가 세워지다 (youtube.com)

 

데살로니가 교회가 세워지다              행17:1~9

본문은 데살로니가 교회 이야기입니다. 
앞서 바울의 일행(바울, 실라, 디모데, 누가)은 빌립보에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내용이 앞에 행16장의 내용이었죠. 

이제 바울의 일행(바울, 실라, 디모데)은 빌립보를 떠나, 유럽의 두 번째 선교지 데살로니가에 도착합니다.
이때 누가가 빌립보에 남겨져 교회를 돌보았습니다.

여러분 신약성경에 데살로니가전후서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바울이 보낸 편지입니다. 
그 데살로니가 교회가 처음 세워진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세워진 그때의 현장으로 함께 가보겠습니다. 

◑17:1절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그들이'
여기엔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가 빠졌다는 얘기죠.

빌립보에서는 주어가 '우리'로 시작되었습니다. 
16:16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빌립보에서는 누가가 포함되었기 때문에
(누가는 드로아에서 빌립보로 건너오는 과정에서 조인했다고 봅니다. 16:11)

그런데 데살로니가로 넘어올 때는, 주어가 '우리'가 아니라 '그들'로 바뀝니다. 17:1
누가가 빌립보에 남았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1절의 '그들'은, 바울, 실라, 디모데를 가리킵니다.

누가는 빌립보에 머물러서 교회를 오래도록 돌보다가
누가가 다시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곳은, 행20:6절입니다.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바울이 3차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 다시 바울 일행과 조인하는데,
그 기간은 3~4년으로 추정합니다.
이 기간 동안 누가는 빌립보 교회에 남아서 교회를 돌보았던 거죠.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지도를 보면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로 가는데, 거리가 160KM 정도입니다. 
서울에서 대전 거리죠. 이때는 차가 없으니까 걸어서 갔겠죠. 

그래서 가는 길에,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라는 도시를 들렸던 것 같습니다. 
이 두 군데를 들러서, 음식도 먹고 잠을 잤던 것 같습니다. 

물론 여기서도 바울은 복음을 잠깐이라도 전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이 아볼로니아 라는 지역이 오늘날에도 있는데요. 
아볼로니아에 가면 '바울의 강단'이라 불리는 곳이 실제로 존재합니다.  ↙ 
거기 동판에 행17:1절이 적혀 있습니다.



▲이렇게 바울의 일행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이릅니다. 
그러면 데살로니가는 어떤 도시였는가요? 

당시 데살로니가는요 마게도냐 주 provincia 의 수도였습니다. 
마게도냐의 도시 중에서 가장 크고 번성한 도시였습니다. 

더구나 데살로니가는 유명한 항구도시였습니다. 
그 당시 고린도와 쌍벽을 이루는 항구도시였죠.

항구도시니까 많은 물자가 유통되었겠죠. 
교통이 좋고 돈과 물자가 막 흐르니까, 사람들이 물밀듯이 모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의 인구가 당시 20만 명이었습니다. 
1901년에 우리나라 서울의 인구가 20만 명이었거든요. 
1800년 전에 데살로니가의 인구가 20만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누가 많았느냐? 유대인들이 많았습니다. 
성경주석가 윌리엄 바클리에 의하면, 당시 데살로니가 인구가 20만 명일 때 
그 중에 유대인의 인구가 10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절반이 유대인이었다는 거죠. 

▲그래서 17:1b절에 보면 '데살로니가 지역에 유대인의 회당이 있다'고 말합니다. 
유대인의 회당을, 바울이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겠죠. 
늘 하던 관례대로 바울은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갑니다. 

1절에, 거기서 바울은 세 안식일을 보냈습니다. 
즉 3주간에 걸쳐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그때마다 바울은 설교를 했는데, 
이 바울의 설교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3가지 포인트가 있습니다. :2

◑17:2절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바울은 성경을 가지고 강론, 설교했습니다. 

여러분 제가 밤에 자기 전에, 유튜브로 설교를 들어면서 잘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설교를 듣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중간에 일어나서 설교를 끌 때가 있습니다. 

그 시간이 너무나 아까운 겁니다. 왜냐면 본문을 읽어놓고, 본문을 설교하지 않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알고 싶어서 들었는데, 무슨 예화나 일화가 그렇게 많은지요. 
성경을 가지고 설교하지 않는 거죠. 

유명하신 분이신데, 본문의 설명이나 해석이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본문 2절의 표현 '성경을 가지고'가 없습니다. 

'성경을 가지고'가 아니라 
예화를 가지고, 또 일상의 일화를 가지고, 또 간증을 가지고 설교합니다. 

물론 예화나 간증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본문을 이해하기 위한 적절한 예화나 간증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게 주 main가 되면 안 되겠죠. 
그런데 오늘날은 주객이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성경을 가지고'가 아니라, 예화나 간증을 가지고 설교합니다. 
그러니까 설교를 듣고 나서도, 그 본문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분명히 그 본문으로 설교를 들었는데, 집에 가서 그 본문을, 혼자 해석하지 못합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고, 수없이 설교를 들었지만, 성경을 보는 눈이 제대로 열리지 않습니다. 
여러분 너무나 속상하지 않으십니까? 
이렇게 성경을 모르고도, 교회를 오래 다닌다는 게.. 안타깝습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이고, 성경의 종교인데, 
신앙의 부유함이 성경에서 나오는데, 성경을 모릅니다. 
본문 2절에 '성경을 가지고'가 사라져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게 또 목회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수요가 있으니까 공급이 있는 거죠. 
듣는 성도들도 2절의 '성경을 가지고'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보다는, 다른 얘기를 가지고 들려주기를 원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러면 교회는 쇠락할 것입니다. 

여러분 왜 유럽의 그 많은 교회들이 문을 닫았습니까? 
2절의 '성경을 가지고'가 강단에서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소그룹 모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모이는 소그룹에서도 
제일 먼저 '성경을 가지고'가 있어야 합니다. 
소그룹으로 모였는데, 세상 돌아가는 정보를 공유하고,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하면, 
여러분 우리 안에는 진짜 변화가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친해지고 가까워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영혼의 변화는 우리 안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점점 쇠락해 갑니다. 

여러분이 모였을 때, 여러분의 화제와 주된 관심을, '성경을 가지고'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듣고, 읽고, 사랑했던 한 주간의 말씀의 나눔이 주 main가 되어질 때 
여러분과 저의 삶, 우리 교회의 공동체에 영적인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교회와 소그룹 모임에서도 회복되어야 할 너무나 중요한 첫걸음은 
'성경을 가지고' 입니다. 

여러분 이건 여러분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간혹 어떤 분들은 성경을 좀 아는 것처럼 생각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여러분 제가 그래도, 물론 부족하지만, 여러분들보다 시간적으로나 환경적으로 
성경을 많이 접하는 사람 아닙니까? 나름 연구도 하고, 성경을 공부합니다. 

그런데 볼 때마다. 새로운 게 성경입니다. 
'내가 성경을 참 속속들이 몰랐구나' 

성경을 열 때마다, 말씀은 다르고, 바르게 배워야 할 진리들이 끝이 없습니다. 
성경을 읽지 않는 것이, 오늘날 한국 교회의 제일 큰 문제인데, 그러면 안 됩니다. 
성경은 열 때마다 새롭습니다.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에 
성경을 열 때마다 여러분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17:3절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뜻을 풀어'
'풀어'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디아노이고 라는 단어입니다. '완전히 열다'는 뜻입니다. 
open thoroughly (what had been closed)

여러분 성경말씀이, 언제 여러분에게 비로소 열립니까? 
본문의 뜻을 풀어줄 때, 성경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해석해 줄 때, 여러분에게 그 본문이 비로소 열립니다. 
풀어주지 않으면요, 본문의 의미가 열리지 않습니다. *에티오피아 간다게 처럼요.

그래서 반드시 읽은 말씀을 해석해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앞에 있는 목회자의 역할이 여기에 있는 거죠. 

여러분들이 알기 어려운 부분들을, 열어서 풀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그때 2천년 전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지금 여러분을 찾아오시는 그분의 말씀이 되도록 하는 과정이 
본문 3절의 '뜻을 풀어'내는 과정입니다. 

성경이 해석되어 풀려나올 때,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열리는 복됨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소그룹에서 이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소그룹에서 사랑하는 지체들과 함께 모였을 때 
그저 여러분의 삶만 나누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한 주만에 소그룹에서 만나면 얼마나 반갑습니까? 그렇죠. 
얼마나 나누고 싶은 얘기가 많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의 삶을 나누시되, 말씀에 근거해서 나누어야 합니다. 
특별히 주일날 들었던 말씀의 해석의 근거해서 나누셔야 합니다. 

'말씀이 이러한 뜻인데, 그 말씀이 각자의 삶에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가'를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이 소그룹에서 해야 되는 핵심입니다. 
그럴 때 해석된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것으로 경험되는 부요가 있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 공동체 안에 참된 영혼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3

성경의 뜻을 푸는데, 뜻을 풀어 데리고 가는 지점이 있습니다. 
여러분 바울이 성경을 풀어서 데리고 가는 지점이 어디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경이 우리를 데리고 가는 지점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그분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고, 또 해석하고, 적용할 때, 제일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여러분들이 얼마나 성경을 잘 알고, 잘 해석하고 있는가는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께 초점이 딱 맞춰지면서, 그분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닮아가면... 
여러분들은 성경을 정말 바르게 알고, 바르게 해석하고, 바르게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성경의 핵심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마다, 예수가 보여야 진짜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닮아야, 그게 진짜 성경을 읽는 겁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좀 안다... 그런데 예수님께 관심이 없다 그러면, 그건 큰일입니다. 

기독교의 영광은 예수를 아는 데 있습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예수를 믿는 데 있습니다. 
예수를 제대로 알면 세상이 정말 바르게 보입니다. 
세상의 헛됨과 어리석음이 보입니다. 

예수 믿는데 자꾸 세상의 부귀와 영광이 눈에 들어온다면, 여러분 큰일입니다. 
세상과 다른 눈으로 봐야 하는데, 세상사람들 수준으로 똑같이 보는 거죠. 

오늘 바울의 설교를 보십시오 성경을 풀어 예수를 전합니다. :3
성경을 풀어서...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를 전했습니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4절을 보겠습니다. 

◑17:4절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바울이 성경을 가지고, 뜻을 풀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먼저는,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가 믿었다'고 말합니다. :4
이들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방인인데 유대교의 하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큰 무리가 예수를 믿고, 개종을 한 것이죠. 

이들 뿐만 아니라 데살로니가의 귀부인들도 예수를 믿었습니다. 
이 귀부인들은, 고위층의 아내들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상류층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된 거죠. 

그러나 반대로 또 바울을 핍박하는 무리들도 있었습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유대인들이라고 말합니다. :6

여기 유대인들은 '회당의 지도자들'을 말합니다. 
회당의 지도자들은 기뻐할 수가 없는 거죠. 

왜냐하면 지금 예수를 믿게 된 경건한 헬라인들이, 
회당에 나오던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유대교인 이었는데, 바울의 복음을 듣고 개종을 한 거죠. 

그것도 '큰 무리가 바울과 실라를 따랐습니다.'  :4
그만큼 회당의 지도자들은 손실을 입었습니다. 헌금한 사람들도 줄어들었겁니다.

여기에 분개한 유대인들은 바울을 시기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어떻게 하느냐? 5절을 보겠습니다.

◑17:5절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저자'는 시장을 가리킵니다.
당시 시장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광장의 역할도 겸했습니다. 

그러니까 회당의 지도자들이, 시장의 불량배들, 빈둥거리는 불량배들을 동원해서
소동을 일으킨 겁니다. 

소동을 일으켰다는 말은, 다른 유대인들을 선동했다는 뜻입니다. 
아마 바울과 실라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을 냈었겠죠. 
'우리 유대교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자들이다' .. 하고 선동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이 선동된 유대인들과 불량배들은, 회당 옆 야손의 집에 쳐들어갑니다. 
'야손'은 롬16:21절에 나오는 인물입니다. 

이 야손은 아마 데살로니가에서 제일 먼저 바울의 복음을 듣고, 
개종한 사람 가운데 하나였을 것입니다. 

이 야손의 집에, 바울과 실라가 묶었던 것 같습니다. 
그걸 알고 불량배들이 바울과 실라를 잡으러 야손의 집에 쳐들어간 거죠. 

그런데 문을 열고 아무리 뒤져봐도, 바울과 실라가 없는 겁니다. 
아마 바울과 실라는, 분위기를 알아채고 먼저 피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 대신에, 야손과 형제들을 성도들을 붙잡아서, 읍장들 앞에 끌고 갑니다. :6

◑17:6절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읍장들'
그저 시골 읍의 마을 지도자 정도가 아닙니다. 
로마 정부가 파송한 치안 판사이자, 자치 단체장을 말합니다. 굉장히 큰 권력이죠. 
로마를 대신해서 데살로니가를 로마의 속국으로 다스렸던 자들입니다. 

이 읍장들 앞에, 바울 대신, 야손과 성도들을 끌고 갔습니다. 
그런데 결국에는 9절에 가면, 이들이 보석금을 내고 풀려나게 됩니다. 

풀려난 그들은, 밤에 바울과 신라를 찾아가서,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냅니다. 
위험하니까요. 
그래서 바울과 실라는, 그날로 데살로니가를 떠납니다. 

그러면 이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가요? 
바울과 실라는, 다시 데살로니가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여러 번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 부분이 살전2:17~18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오늘 본문에서, 데살로니가의 폭도들에게 쫓겨난 것을 얘기하는 것이죠.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쫓겨난 바울은, 다시 데살로니가로 몇 번이나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그때마다 우리를 막아서 갈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대신에 바울은, 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누구를 보내냐면, 디모데를 보냈습니다. 
디모데를 보내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돌보게 한 거죠. 

그리고 다시 (아덴이나 고린도로) 돌아온 디모데가 
데살로니가의 상황을 바울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 부분이 살전3:6~7절인데요.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살전3:6

디모데를 보냈고요. 데살로니가 교회를 돌아보고 (일정기간 체류해서 돌보다가)
돌아온 디모데가 
데살로니가 교회의 상황을 바울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아직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그때의 믿음과 사랑을 잘 지키고 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바울이 위로를 받았겠죠. 그 부분이 3:7절인데요.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살전3:7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에 위로를 받은 거죠. 
'내가 떠났어도 믿음을 잘 지키고 있구나' 
이렇게 해서 우리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세워진 이야기를 살펴봤습니다. 

◑17:7절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마지막으로 우리가 살펴볼 게 있는데요. 
여러분 오늘 데살로니가에서 폭동을 일으킨 불량배들이 
야손과 성도들을 잡아다가 읍장들 앞에 끌고 갑니다. 
거기서 바울의 일행을 고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두 가지 죄목으로 고소를 했는데요. 
1)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다'  :6b
KJV는 세상을 upside down, 즉 '세상을 뒤집어 엎는'으로 번역했습니다.

2) '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7

이 두 가지 고소는 다 거짓된 고소입니다. 
'천하를 어지럽히던 자들'은 바울의 일행이 아니라,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시장의 불량배들을 동원해서, 떼를 지어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소요를 일으킨 것이죠. 그리고 야손의 집에 침입을 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누가 더 데살로니가 도시를 어지럽히고 있습니까? 
바울이 아니라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고소, 바울의 일행은 로마황제 가이사의 명을 거역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를 가이사의 왕권에 도전하는 정치적인 왕으로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저 구약의 성취자로 그리스도를 말했을 뿐입니다. 

'구약에 예언된 죽으시고 부활하신 메시야가 예수가 맞다'
이렇게 구약의 성취자로 예수를 전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에 대한 두 가지 고소는, 전부 다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이들의 고소는 거짓된 고소이지만, 
역설적으로 참된 성도의 모습을 나타내는 정확한 표현입니다. 

여러분 참된 성도는 '세상을 어지럽히는' 자입니다. 
여기 '어지럽힌다'는 말은, 원어로 보면 뒤집어 놓는다 upside down 는 뜻도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참된 성도는, 세상을 어지럽히고, 뒤집어 놓는 자들이 맞습니다. 
왜입니까? 성도는 이 세상과는 다른 질서를 가지고 사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방식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입장에서는 '믿는 자들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자들이다' 그렇게 여길 수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 교회와 복음은, 참된 평화를 도모합니다. 
여러분 이 땅의 성도들보다 참된 평화를 소망하는 자들은 없습니다. 
한 번도 참된 교회는, 자기를 핍박하는 자들을, 똑같은 방법으로 핍박한 적이 없습니다. 

오리를 가자 하면 심리를 가고요. 속옷을 달라 하면 겉옷까지 내어주고요. 
오른 빰을 치거든 왼 뺨을 내어주라고 가르치고, 따르는 자들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핍박을 받아서 순교까지 했던 거죠. 

그럼에도 세상은 성도를 '천하를 어지럽히는 자들이다, 세상을 뒤집어 놓는 자들이다' 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으면, 그동안 내가 믿어왔던 세계관과 인생관과 가치관이 
온통 다 뒤집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천국이 믿어집니다. 
이 땅이 전부라고 믿었던 사람이, 영원한 세계를 믿게 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우리의 목숨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영원한 세상이 있고, 영원한 천국과 지옥이 있음이 믿어집니다. 

내가 주인 되어 살았던 내 인생인데, 창조주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이 믿어집니다. 
우리 자신의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나를 만드신 하나님이 주인임을 믿게 됩니다. 

인간들이 우연과, 사고와, 죄악을 통해 만들어가는 것이, 이 땅의 역사인 줄 알았는데 
그 안에, 그리고 그 위에, 보이지 않는 창조주 하나님의 손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예수를 믿으면 이렇듯 세상이 거꾸로 보입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거꾸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니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천하를 뒤집어 놓는 자들이다. 
천하를 어지럽히는 자들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적용

 

여러분 실제로 종교개혁자들은 이렇게 불림을 받았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개혁을 시작할 때, 세상이 그들을 뭐라고 부른지 아십니까? 
'프로테스탄트'라고 불렀습니다. '저항하는 pretest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 당시에 세상이 정해놓은 길과, 세상의 가치와 기준을 거스르며 살아서 붙여진 이름이 
프로테스탄트 protestant 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으로 '세상을 어지럽히고 뒤집어 놓는 자들'이라는 뜻인 거죠. 

만약에 우리가 예수를 참되게 믿으면, 저와 여러분들도 
이런 세상의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처음에 예수를 믿게 되었을 때, 이런 말을 종종 들었습니다. 
'우리를 (친구사이를) 어지럽히는 자들이다' 이런 말을 친구들로부터 종종 들었습니다. 
예수를 믿게 된 이후에는, 제가 술을 입에 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전까지는 정말 같이 잘 놀던 제가, 한 잔도 술을 입에 대지 않으니까 
친구들이 싫어했습니다. '너만 나오면 흥이 다 깨진다. 술맛이 떨어진다' 

그러려면 저를 부르지 말던지... 꼭 저를 불러놓고 
'예수를 믿더니 술자리를 어지럽히는 자다. 안주만 축내는 자다.'하고 핍박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자연스레 '어지럽히는' 자리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삶의 방식이 다르니까요. 

시골에 가서 제사를 드려도, 제가 절을 하지 않으니까요. 
친척들이 저를 보고 그때부터 '제사를 어지럽히는 자이다. 우리 가문을 어지럽히는 자이다'
하며 저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주일에 친척들이 모여도, 저 때문에 판이 깨집니다. 
저희 아버지 형제들이 우애가 참 깊어서요. 
1년에 한 번씩 형제들이, 형제들 집을 돌아다니면서 
1박 2일, 또 길게는 2박 3일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친척들 중에 저만 교회를 다니니까요. 그때는 꼭 이제 주일이 끼잖아요. 
저는 주일에 교회를 가야 했습니다. 

그러니 저 때문에, 주일날 사촌 동생들과 형들과의 모임이 제대로 안 됩니다. 
'모임을 어지럽히는 자이다'하며 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오늘 바울의 일행을 고소했던 것처럼 
'천하를 어지럽히는 자들이다' 즉 뒤집어엎는 자들이다... 
이 고소가 거짓된 고소이지만, 참된 성도를 정확하게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여러분 바라기는 우리 교회가, 정말 이렇게 세상으로부터 한번 불려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이 잠실 땅을 어지럽히는 자들이다. 뒤집어 놓는 자들이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고, 따르는 것들에 저항해서 '잠실을 어지럽히는 자들이다' 
저와 여러분이 이런 소리를 정말 듣기를 바랍니다. 
이게 정말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들어야 할 소리이죠. 여러분 진짜 이게 전도이죠. 

여러분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런 영적인 거스름이 약해지고 있는 것 아닙니까? 

거룩해할 교회가, 구별됨이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을 (좋은 의미로) 어지럽게 해야 할 교회가, 세상에 길들여져서, 
세상의 결과 똑같은 결을 따라 살아가는 게... 가장 큰 문제가 아닙니까? 

그러나 바라기는 저희 교회부터 다르기 원합니다. 
'좋은씨앗교회는, 이 잠실 땅을 어지럽히는 자들이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자들이다'
'저 교회 성도들의 기준과 삶의 방식은, 나의 기준과 방식을 뒤집어 놓는 자들이다' 
이런 (비방의) 소리가 꼭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런 성도의 모습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바로 7절에 나오는 두 번째 고발의 내용에서 나옵니다. 

'이 사람들은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7

여러분, 이 내용 또한 거짓 고발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도의 정체성을 잘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성도가 진짜 복음으로 살아가면, 세상을 어지럽힐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세상이 섬기는 왕과 다른 왕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라는 임금, '예수'라는 새로운 왕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가이사라는 로마 황제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섬기는 왕이, 지금도 동일하게 존재합니다. 

여러분 누가 세상의 왕입니까? 
딤후3:1~4절에 보면, 그 왕들을 바울이 고발하고 있습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딤후3:1~4

첫 번째 세상 사람들이 섬기는 왕이 누구죠? 
'자기를 사랑하며' .. 바로 자기 자신이 왕입니다. 

이어서 '돈을 사랑하며' 
돈이 세상이 섬기는 왕입니다.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쾌락이, 사람들이 섬기는 왕입니다. 

딤후3:5절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세상이 섬기는 왕들로부터 돌아서라!' 

여러분 오늘날 세상의 모습과 동일하지 않습니까? 
오늘날도 이 3가지가 세상이 섬기는 왕입니다. 

-철저히 자기 자신이.. 신이 되어 살아갑니다. 
-그리고 오늘날 모든 가치의 척도가.. 돈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쾌락 만을 쫓아 살아가는 게.. 이 시대의 특징 아닙니까? 

오늘날도 자신과/ 돈과/ 쾌락이 ... 사람들이 섬기는 왕입니다.
특별히 그 가운데 최고의 왕은, 자기 자신입니다. 

▲요즘에 <나는 신이다>인가요? 
이단들에 대한 다큐 시리즈가 화제인데요. 

그런데 '나는 신이다' 이건요, 이단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실 하나님을 떠난 모든 사람들이 '나는 신이다' 라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내 인생의 왕이고,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고, 
내가 내 인생의 하나님이다, '내가 신이다' 라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물론 사이비 교주처럼 이상한 짓을 하는 건 아니더라도,
그 기저에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고, 내가 내 인생의 신이다' 라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밀어내며 사는 거죠. 

그래서 신앙의 중심도, 나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하나님마저도 나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내 마음을 불쾌하게 하면.. 내 삶을 건드리면.. 
그게 말씀이든 교리든, 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만든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갑니다. 
복음이 너무나도 왜곡되어 있는 시대죠. 

그래서 나온 책이 무엇이죠? 베스트셀러를 차지했던 책인데요. 
<잘 되는 나>라는 책이 한때 흥행된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복음의 중심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복음은, 나는 항상 그대로 있고, 
그런 내가 더 잘 살도록 예수님이 도와주시는 게 아닙니다. 

내가 꿈꾸고 내가 결정한 것을, 도와주는 게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내가 그분 안에서 그분처럼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을, 우리의 유일한 왕으로 고백하게 만듭니다. 

세상이 섬기는 왕들을 거역하고, 다른 임금 곧 예수라는 왕을 섬기게 만듭니다. 
그때 우리의 삶은, 이 세상의 질서를 거스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방식으로, 복음의 능력이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실 때, 우리의 삶에 주님께서 왕으로 좌정하실 때 
그 왕 되신 주님으로 인하여, 저절로 시작되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때 자연스레 세상은, 우리를 보고 소동하게 될 것입니다. 
'저들은 다른 왕을 섬기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번 한 주도 우리가 충성해야 할 왕은, '다른 임금 예수'라는 왕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에게는, '다른 왕이 계시다'는 것이, 세상에서 분명히 보여지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