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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LNCK 2024. 5. 31.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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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4 /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 YouTube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행11:1~18 

◑베드로의 설명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들의 구원 받음을 인정하다 

행11:1~4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우리는 지금 사도행전을 통해 복음이 예루살렘, 온 유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고 있는 
과정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행10장의 고넬료의 회심은, "이방인의 오순절"이라고도 부르는데,    주1)
그 사건은, 예수님의 약속(1:8)이 신실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의 증명이기도 하고, 
'예수님은 이방인들의 하나님이기도 하다, 이방인들도 사랑하신다'라는 것을 
증명하는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 땅에서 5병2어를 가지고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찢겨진 살을 상징하는 떡을 나눠 주셨고  

후에는 이방 땅에서 7병2어를 가지고 이방인들에게             
자신의 찢겨진 살을 의미하는 그 떡을 또 나눠 주셨습니다. 

그랬듯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성령을 베풀어 주셨고, 
이제 예수님은 이방 땅(가이사랴)에 있는 이방인에게도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인해서
'복음은 열방용이며, 복음은 모든 민족의 것이다. 그리고 이방인을 주님께서 사랑하신다'
라는 것을 증명하셨습니다.       주1) '이방인의 오순절'

그리고 또 하나, 고넬료의 회심과 함께 
성령이 이곳에 임하신 이 이방인의 오순절은 
이제 복음이 본격적으로 땅끝을 향해 나갈 준비를 마쳤다.. 라는 것의 신호이기도 했습니다. 

'복음은 열방용이다. 주님은 이방인도 받으셨다. 그들도 사랑하신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복음이 땅끝으로 흘러가기 위한 모든 준비가 마쳐졌다 라는 것이 
사실 이 고넬료 사건이 보여주는 것 중에 하나였습니다. 

▲사울의 회심을 통해서, 주님은 땅끝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일꾼을 마련하는 것을 다 마치셨어요. 
그래서 사울의 회심을 통해서 우리는 '일꾼이 준비되었다' 라는 것을 보았어요. 

그리고 고넬료의 회심과 함께, 베드로와 유대인들의 회심(깨우침)을 통하여 
이제 이방인들을 받아야 될, 이방인들을 인정해야 될 예루살렘 교회도, 유대인들도 
준비를 마쳤다.. 라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되죠. 

하나님은 이방선교를 위한 일꾼만 준비시킨 것이 아니고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받을 수 있도록 
예루살렘 교회까지도 모든 준비가 이제 마쳐졌다... 
땅끝으로 복음이 흘러갈 준비가 마쳐졌다... 라는 신호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11:17~18절을 보면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그들(예루살렘 교회)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청년 사울의 회심을 통해서, 이방 선교를 위한 일꾼이 준비되었어요. 
그런데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맞을 준비가 안 돼 있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행11장에서, 베드로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가이사랴에서 있었던 일을 쭈욱 설명합니다.

그러자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도, 수긍하고 현실을 받아들입니다.
'그들(예루살렘 교회)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17:18

이제 이방인 선교를 위한 완전한 준비가 마쳐진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의 설립에 대한 준비도 마쳐진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까지도, 이제 마음을 열고, 이방인을 받을 준비가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적용

이제 '이방인의 오순절 = 고넬료의 회심 사건'을 마무리하면서 
복음이 땅끝까지 이르는 역사 전체를 바라보면서 
우리가 실제적으로 좀 마음에 새기고 넘어가야 될 부분(적용)들을 
세 가지로 나눠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1.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는 이 상황 속에서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될 것 첫 번째는 바로 
<하나님은 한 사람을 사용하시더라> 라는 거예요. 

지금 복음이 계속해서 땅끝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복음이 온 땅을 점령하고 있어요. 
근데 이런 역사를 보면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예수님은 천사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천사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결코 복음을 천사에게 맡기지 않으세요. 
하나님은 천사가 아니라, 사람을 사용하신다 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 하나, 하나님은 강한 다수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한 사람을 지금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예루살렘부터 여기까지 (행1~11장까지) 계속해서 살펴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은 처음부터 한 사람이 중요성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어요.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죠. '나 같은 거 하나가 뭐 하겠어?'
'저 연약한 사람 하나가 뭐 하겠어?' 이렇게 생각하지만, 

성경은 사실 처음(창세기)부터, 그리고 성경 전체가 
'한 사람에 대한 중요성'을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어요.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서 뭐가 들어왔습니까? 죄가 세상에 들어왔어요. 
아담 한 사람 때문이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아니에요. 

아담 한 사람 때문에 죄가 세상에 돌아왔어요. 
그리고 아담 한 사람 때문에, 모두가 다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담이신 예수 한 사람을 통해서, 생명이 우리 가운데 임하였고, 
구원과 회복이 우리 가운데 임하였다는 것을 보게 돼요. 롬5:17~19

그러니 '한 사람의 중요성'은 성경이 시작부터 전체로 계속 내려가며 말해 주지만, 
특별히 사도행전에서 복음이 전파되고 있는 이 상황을 보면서, 
우리는 더더욱 명확하게 봅니다.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1) 베드로 한 사람 때문에 예루살렘에 부흥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예루살렘에 활활 타오르는 부흥의 불길이, 베드로 한 사람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라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되고요. 

2) 스데반 한 사람 때문에 예루살렘에 있었던 불꽃들이 
전부 다 온 사방으로 다 흩어지는 일을 봅니다. 
스데반 한 사람으로 인해서 박해가 시작되었고, 

육안으로 보면, 스데반 한 사람으로 인해서, 스데반 한 사람이 거기서 순교하는 바람에 
고통이 왔다.. 핍박이 왔다.. 이렇게 생각하겠지만,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예루살렘 안에 있었던 불꽃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전체로 다 퍼지게 되는 그러한 일들이 
스데반 한 사람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을 보게 돼요. 

3) 그리고 스데반과 함께 안수 받았던 빌립 한 사람 때문에 
사마리아에 복음이 편만해졌다.. 복음의 은혜가 넘쳐나게 되었다..라는 것을 보게 되고 

4) 또 사도 바울 한 사람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복음의 방향이 바뀝니다. 원래는 복음이 아시아 쪽으로 진행되어 갔어요. 
근데 사도 바울이 복음의 방향을 바꿉니다. 동양에서 유럽 쪽으로 바꿔 버립니다. 
한 사람의 영향력입니다.

그리고 로마 전체를 복음화 시키는, 물론 몇백년의 시간이 흐르지만, 
그러나 그 일의 시작점이 사도 바울 한 사람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5) 고넬료 한 사람이, 가이사랴에 성령 세례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고넬료 한 사람 때문에 복음을 듣게 되었고 
성령을 받게 되었던 것을 보게 되죠. 

6) 그리고 오늘 본문 행11장에도, 베드로 한 사람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18절을 보시면, 베드로가 한 사람의 설득으로
예루살렘 교회 전체에 거대한 방향 전환을 가지고 왔어요. 

예수께로 돌아섰던 그들이, 이방인에게로 돌아서지 않고 있었거든요. 
아니 예수께로 돌아섰으면, 예수가 사랑하시는 이방인에게도 돌아서야 되는데 
그들은 이방인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한 사람에 의해서, 유대인들이 거대한 방향 전환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을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18 

그러므로 '하나님은 한 사람을 사용하신다'
이것을 오늘 복음이 흘러가고 있고, 
이제 본격적으로 복음이 열방으로 흩어지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한한 희망을 가져다 줍니다. 왜요?
'아~ 나 한 사람이 변화되면, 우리 가정이 변화될 수 있겠구나...'  행16:31참조.
'아~ 나 한 사람이 변화되면, 우리 교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겠구나' 
'아~ 나 한 사람이 도시 전체에, 민족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구나' 라는 
무한한 희망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시에 무한한 책임도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거예요.
'나 한 사람으로 인해서 민족이 바뀔 수 있고, 나라가 바뀔 수 있고, 
가정이 바뀔 수 있고, 교회가 바뀔 수 있다'... 이 말은 
'나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않으면 반대로도 갈 수 있다'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이 
우리에게는 희망이기도 하지만, 무거운 무게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오늘도 한 사람을 사용하신다..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이 복음이 땅 끝까지 흘러가고 있는 이 지점, 
이제 본격적인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선포, 그리고 그 흐름, 그것을 시작하기 전에 

▲2. 또 한편으로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하나님은 온 세상의 복음 전파를 위해서, 
<흠 있는 그 사람을 사용하시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사용하신다'고 하니까 
'그 한 사람은 한 민족보다 큰 사람이겠지... 
그 한 사람은 아무런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사람이겠지... 정말 위대한 사람이겠지... 
모든 인류를 다 끌어모아 놓아도, 그 보다 나은 사람이겠지...' 

우리는 어쩌면 이렇게 생각할지도 몰라요. 
그러나 그 세계복음화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사람은  
진짜 연약한 사람이고, 특별히 흠 있는 사람이었다... 라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사도행전에서 두 주인공은, 크게 나누어 보면,
이방인을 위한 사도 바울과, 유대인을 위한 사도 베드로.. 입니다.
근데 그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진짜 흠이 많은 사람들이었어요. 

사도바울은, 예수를 박해했고, 예수를 믿는 사람을 실제로 박해했고,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섰던 자예요. 

그러니까 바울이 가는 곳곳마다, 과거의 바울 때문에 자기 가족을 잃었던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바울 때문에 영구 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만나게 되고, 
트라우마에 시달리면서 평생을 고생해야 되는 사람들을 만났던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는 평생 마음에 짐을 지고 있었어요. 흠이 있었어요. 

'내가 교회를 잔멸하려고 했다는 것,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적이었다' 라는 것... 

근데 회심하고 난 이후에는 흠이 없었습니까? 
마가라는 사람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는 거예요. 
1차선교여행에서, 도중에 집으로 돌아가버린 마가를 용납하지 못한 것입니다.

근데 그것 때문에, 성령이 충만하고, 착하고,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는 자기 멘토요, 
사실은 예루살렘 교회에 자기를 소개시켜 주었던 자기 은인이 바나바 입니다. 
근데 바나바 하고 싸워가지고 그냥 갈라 서 버려요. 
그만큼 바울은 흠이 있는 사람이요, 연약한 사람입니다. 

근데 유대인의 사도인 베드로는 다릅니까?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그도 세 번이나 예수님을 거부하고 부인했습니다. 

근데 지금도 보세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이게 베드로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잡아먹으라'고, 세 번이나 반복해서 환상을 보여주실 정도로,
그를 다독이고, 설득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바울에게 항의도 듣죠. 
'네가 왜 외식하느냐? 왜 유대인들이 왔다고 이방인들과 교제하다가
갑자기 슬그머니 빠져나갔느냐?'
뭐 그런 책망도 받아야 했던 베드로인 것입니다.  갈2:11

그리고 그가, (성경엔 안 나오지만 전승에 의하면) 로마 시에 네로의 핍박이 시작되었을 때,
그냥 로마 시를 떠나가잖아요. 그냥 가버리잖아요. 
그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 가지고... 결국 그는 다시 로마 시로 되돌아와서
결국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서 죽습니다. *쿼바디스
  
그만큼 그에게는 흠도 있었고, 연약함도 있었다 라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한 사람을 사용하신다고 할 때
흠 있는 사람, 연약한 사람... 그 사람을 사용하시더라는 거죠.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실까요?
겸손하게 일하라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겁니다. 
사도 바울을 통하여, 베드로를 통하여 어떤 역사가 일어나도 
그들은 겸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데, 나를 이렇게 사용해 주셨는가?'
그것을 잊어버릴 수가 없는 것이죠. 자기 의를 결코 드러낼 수 없습니다. 

'내가 어떤 자였는데.. 내가 지금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랑을 하겠으며, 
내가 어찌 나를 높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겸손하게 일하게 하시려고, 
그래서 저 밑바닥 저 밑에까지 최악을 찍어 보았던 사람들이라도, 
이런 흠 있는 사람들을 주님께서 사용하셔서 
하나님은 그렇게 그들로하여금 겸손하게 일하게 하신다.. 는 거예요. 

그리고 왜 이런 사람을 사용하실까요? 
그들이 계속 연약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사랑으로 그들을 품고 용납해서 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이/우리가 복음을 전하다 보면, 그리고 신앙생활 하다 보면
'이전에 내가 주님 앞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람들이 항상 있어요.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한번 보십시오. 
그가 회심하자마자 만나는 사람들은 누구냐 하면... 바로 자기 자신이에요. 

9:22절에 보면, 사울은 회심하자마자 증인이 됩니다. 
그래서 힘을 더 얻어 가지고 예수를 그리스도 라고 증언했어요. 

그러자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이 크게 당황했죠.
'대제사장의 공문까지 받아 온 사람이 왜 저러냐?' 

9:23절을 보면, '여러 날이 지났는데.. 자기가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이려고 했던 것처럼, 
자기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을 만나게 돼요.' 
그들을 바라볼 때 '아, 과거에 내가 예수 앞에서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보여주는 사람들이죠. 

28절을 보면,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출입했어요. 
거기서도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을 하니까' 
이제 예루살렘에서도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애를 쓰고 있어요. 

그러니까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마다, 예수 믿기 전에 자신을 만나는 거예요.
예수 앞에서 전에 내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과거의) '나'를 만나는 거예요.

근데 그들을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저랬는데 주님이 나를 사랑해 주셨잖아요. 
내가 저랬는데 아나니아를 통해서 안수받고, 다메섹 형제들이 자기를 받아줬잖아요. 
내가 저랬는데 바나바를 만나게 하셨고, 
내가 저랬는데... 자기와 똑같은 유대인 핍박자들을 바라보면서, 
바울은 어떻게 그들을 손가락질 할 수 있었겠냐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도 한번 보십시오. 
본문 11:1~2절을 보면,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지금 사도 베드로가 얼마나 큰일을 했어요? 
'와 이방인들이 기독교로 집단 개종을 했단다. 예수께로 돌아왔단다.' 

그러면 큰 박수를 쳐줘도 시원찮을 판에,
이 말을 듣고, 2절을 보시면,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할례자들이 베드로를 막 비난하는 거예요. 

'저들의 모습은 누구의 모습입니까?' 
얼마 전까지 베드로의 자기 모습이에요. 

욥바에 내려가서, 지붕 위에서 환상을 보았는데, 
베드로는 '이방인을 용납하고 받아들이라'는 그 메시지를... 주님 앞에서 거부했죠.
너무 거부하니까, 주님이 똑같은 환상을 세 번이나 보여주어야 하셨습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모든 일을 다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이방인들이 주님께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하자, 
할례자들이 베드로 자신을 비난하고, 이방인들이 성도가 된 것을 비난하자... 11:2
그 할례자(유대교 성도)들을, 베드로는 비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얼마전 까지만 해도, 자기도 그랬으니까요.

베드로가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너희들은 그 수준 밖에 안 되냐?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 성령 주시고, 구원해 주셨는데 
거기에다 대고 너희가 비난하는 것이 옳으냐? 그렇게 보는 눈이 없냐?' 
그렇게 맞받아 비난할 수 있었을까요? 
아뇨. 비난 못 해요. 왜냐면 자기도 눈이 가려져서 잘 몰랐으니까요. 

(그만큼 베드로도 흠이 있는 사람이라는 거죠. 하나님은 흠이 있는 사람을 쓰시는 것은
겸손한 사람, 남을 비난하지 못하는 사람을 쓰시는 것입니다)

예전에 나도 그렇게 했기 때문인 거죠...
주님이 그런 나를 사랑해 주셔서, 나를 바꿔 주신 거잖아요. 

그러니 그런 연약한 사람들을 보면서 어떻게 해요? 
미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용납하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사역할 수 있는 사람인 거예요.
그래서 주님은 이 흠 있는 사람을 통해서, 겸손과 사랑으로 일하게 하시죠. 

△근데 또 한편으로, 왜 하나님은 이렇게 흠 있는 사람을 사용하실까요? 
끝까지 소망으로 일하게 하시려고! 

목회자들이 그런 말들을 하잖아요. '교회 성도들은 목회자를 닮는다.
목회자 네 수준이 어떠냐에 따라서, 성도들의 수준이 결정된다...' 
틀린 말은 아닌 거 같아요. 

여러분들도 한번 보십시오. 여러분들의 자녀가 누구를 닮았어요?
바로 내 모습이잖아요. 그때 어떤 생각이 드세요? 

저를 좀 힘들게 하는 사람이 우리 교회에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일반적인 얘기예요.
저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나, 제 마음을 상하게 하는 사람을 만날 때면 
가만히 생각해보면, 과거에 예수 앞에 제 모습이예요. 
저를 벗어난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어요. '나도 과거엔 저랬지...' 

근데 어떤 생각이 드냐면, 베드로 입장에서도, 바울 입장에서도, 
그랬던 나를 주님이 바꾸셔서, 이제 나는 그러지 않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바울, 베드로 입장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바꾸셨는데, 저들도 바꾸시지 않겠나?' 소망을 가지는 거죠. 
'아니, 나도 이렇게 변했는데, 하나님이 저 사람들도 바꿀 수 없겠나?' 소망이 생기는 거죠. 
'나도 저랬는데... 죄인 중에 괴수였고, 
나도 주님 음성을 못 알아듣고... 
나도 기도 안 했고, 나도 주님을  거부했고, 나도 거역했는데...'  

근데 지금 내가 주님을 섬기고 있으니, 
하나님이 나를 붙들어 주셨던 것처럼, 저 사람들을 붙들어 주실 것이라는 
그런 소망이 생긴단 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이러한 흠 있는 자들을 사용하셔서 
그 한 사람을 사용하시더라' 라는 것을 보게 되고, 
이것은 또한 우리에게 엄청난 희망을 가져다 줍니다. 

△저와 여러분 또한 흠이 많잖아요. 
저는 사실 좀 이렇게 과거를 별로 생각 안 하고 싶어요. 

초등학교 때도 주님 앞에 부끄러운 모습이었고, 
중학교 때도 생각해보면 그렇고.. 
고등학교 때는 더더욱 그랬고... 
대학교 때, 그리고 군대 시절, 청년 시절... 
심지어 목사 되고 난 이후에도... 다 부끄러워요. 

그래서 그것이 오히려 더 하나님께 매어 달리게 만들고, 
소망으로 사역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데 이런 흠 있는 사람을 불러 가지고 사용하시더라 라는 것이죠.
복음이 여기(11장)까지 온 지점에서, 
이제 본격적으로 열방을 향해 흘러가려고 하는 이 지점에서 
이것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살펴보면,
하나님은 흠 있는 사람을 사용하시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을 인격적으로 사용하신다> 라는 거예요. 

행1장에서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주셨던 약속과 함께 
2장부터 지금 11장까지 그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었는가요? 
예루살렘, 온 유대, 사마리아, 땅끝까지 전파되는 이 과정 속에서 
우리가 확실하게 보는 것은 뭐죠? 주도적으로 주님이 하셨다는 거예요. 

-오순절 날 성령을 예루살렘에 보내셨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박해가 있었기 때문에 사마리아로 복음이 넘어갔던 것, 
-주님께서 주도적으로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빛을 비추시고, 
그런 초자연적인 역사를 일으키셔서 그를 구원하셨던 것 

-고넬료에게 천사를 보내시고, 이방인들을 최초로 구원받게 하셨고 
-사도 베드로에게는 환상을 보이시고, 주의 음성을 듣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보면서, 우리는 '주도적으로 하나님이 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게 돼요. 
그렇지만 주님이 우리를, 마치 꼭두각시처럼, 이렇게 끈을 매어놓고 
주님이 뜻하시는 대로 하려고 기계적으로 우리를 꼭두각시로 우리를 다루지 않으시고,

주님께서 자기의 뜻대로 하고 계시지만, 
그러나 인격적으로 우리를 대하고 계시다.. 하는 것을 보게 돼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우리의 반응을 따라서 지금 일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고넬료 사건만 봐도, 성경에 써야 될 일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 11:4~17절을 보면, 그냥 앞에 10장에 있었던 일을
고스란히 다시 옮겨 적어놓은 거 같아요. 복사해서 붙여 놓은 거 같아요. 

그런데 앞에는(10장), 전체적인 누가의 입장에서, 
그래서 고넬료가 환상받았던 것이 먼저잖아요. 
그러니까 고넬료의 사건부터 나오지만, 

지금 이 이야기는, 이제 베드로의 입장에서 
똑같은 말을 지금 반복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고넬료 환상보다, 베드로는 자기가 기도할 때 봤던 것을 먼저 설명을 하는데, 
:5~7 ' 내가 욥바 시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에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어 내 앞에까지 드리워지거늘 
이것을 주목하여 보니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이더라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이렇게 환상이 한 번 보였을 때, 베드로가 척 깨달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주님이 더 깊이 있게, 더 자세하게 말씀하셨겠죠.

그런데 베드로가 전혀 못 깨닫고, 도통 안 바뀌니까 
이게 세 번이나 연속해서 반복돼요. 

주님이 '너는 도무지 못 깨닫는구나!' 이렇게 책망하시지도 않고, 
'이 답답한 인간아! 내 복장 터지겠다' 하고 야단치시지 않고, 포기하지도 않으셨어요.
주님은 끝까지 베드로를 <인격적으로 대해주십니다.>

결국 환상을 세 번 보고도, 여전히 베드로는 못 깨달았던 것 같아요.

그러던 와중에 집 바깥에, 고넬료가 보낸 세 사람이 도착했어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성령이 또 말씀하세요.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11:12

그랬는데 그때에 만약 베드로가 안 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일이 유보됐겠죠. 

'아니, 저는 못 가겠습니다. 내가 어떻게 이방인하고 같이 갑니까? 그들이 누구라고...' 
그런데 주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그러니까 지금 주님이, 베드로를 인격적으로 
그의 반응을 따라서 지금 일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15절을 보시면 '베드로가 말을 시작할 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셔요.' 

지금 성령님이 얼마나 급하시겠어요?
복음이 빨리 땅끝까지 전파되어야 하는 그 상황 속에서, 
지금 베드로 때문에, 이 일이 계속 유보되고 있으니 얼마나 지금 애가 탑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베드로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을 보내셨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반응과 함께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다는 거예요. 
그런데 베드로를 다그치거나, 윽박지르거나, 푸시하지 않으십니다.
그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십니다. 성령님이 계속 그를 기다려 주시는 거죠.
(사실, 우리는 그렇지 못할 때가 많잖아요. 얼마나 많이 윽박지르고, 다그치며 일합니까!)

그래서 17절을 보면,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이제 베드로가 '이를 통해서 주님이 이방인들도 받으시더라.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성령이 강림하셨던 것처럼 
유대인에게도 오순절이 임했다' 라고 말했을 때 

만약에 예루살렘 유대인 성도들이 이 얘기를 듣고 
'그래도 이방인은 아니지!' 만약에 이렇게 말했다면,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는 일이 조금 유보되었거나,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입니다.

근데 주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그들을 스스로 인정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18절에 보니까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예루살렘 성도들이 가만히 그들이 생각해 봅니다. 
'야 이거 성령이 이방인에게도 내렸다는 것은 
그러면 이방인들도 생명 얻는 회개를 받을 수 있다는 거네!'
라는 것을 인정하고 난 이후에 
복음이 본격적으로 이방인 세계로 전파됩니다.
그래서 안디옥교회 이야기가 그때부터 시작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은, 일에 매몰되어서 
자신의 뜻대로 우리를 꼭두각시처럼 막 이끌어 가시는 분이 아니고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시면서, 우리의 반응을 따라서 일하시고, 

우리가 한 걸음 내딛으면, 한 걸음 같이 가시고, 
우리가 달리면, 같이 달려가시는... 

그렇게 우리의 반응을 따라서, 우리가 함께 일하시는 (인격적인) 분이시다.. 
라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답답해도 참으시고, 끝까지 그들을 붙잡고, 그들을 통해 일을 해나가십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이었다면 (죄송한 표현이지만)
'진짜 답답해서 안 되겠다. 야 천사 가멜리엘아, 너 내려가서 선수 교체해! 싹 다 바꿔!
안 되면 네가 직접 해 버려!'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그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시고 
결국 그들이 주님을 닮아가는 자리까지 가게 하시더라 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도행전의 이 놀라운 역사의 이야기가, 오늘날 지금도 
우리의 삶 속에 이어지고 있고, 
주님은 그 때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사용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나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나 한 사람의 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내 순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고서 
끊임없이 인격적으로 우리를 대해주시는 주님 앞에서
우리가 적극적으로 순종으로 반응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주1) 이방인의 오순절 (고넬료의 회심 사건)

 

행10:44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가 설교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설교가 도중에 끊깁니다. 
설교를 듣고 있는 가운데, 성령이 내려오셨기 때문입니다. 10:44

누구에게요?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요. 
여기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은, 이방인 모두를 말합니다. 

이방인 고넬료와 그가 초청한 이방인 무리들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은 거죠. 

이걸 우리는 신학적으로 '성령 세례'라고 부릅니다. Baptism of the Holy Spirit
성령 세례라는 건 예수를 믿을 때 받는 성령을 말합니다. 

이 성령 세례가, 고넬료의 집에 모인 사람들에게, 즉 이방인들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을 때, 그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로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걸 우리는 '이방인의 오순절'라고 부릅니다.

행2장의 오순절과 똑같은 일이 일어났으니까요! 

 

우리가 사도행전하면, 성령행전이다.. 그렇게 이해하지 않습니까? 
성령을 받는 장면이 굉장히 많이 나올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딱 4번밖에 안 나옵니다. 4번밖에 나오질 않습니다. 굉장히 의외이죠. 
오늘 본문을 포함해서 네 번이 전부입니다. 

1) 첫 번째 성령받는 장면은 2:4절인데요.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오순절에 모였던 120명의 제자들, 이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들 유대인들이 오순절에 성령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셨던 성령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에게, 오순절 날에 임했습니다. 

이걸 우리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이게 성령을 받는 첫 번째 장면이고요. 

2) 두 번째 장면은 8:17절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여기 그들은 사마리아 인들을 말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혼혈인이었죠. 
이방인과 유대인이 섞인 혼혈인이었습니다. 이들이 성령을 받습니다. 

3) 세 번째 장면은 오늘 본문입니다. 
10:44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 성령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의 말씀을 듣고 있던 이방인 모두가 성령을 받습니다.   

 

4) 네 번째는 행19:1~7절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성령을 받는 장면은 딱 3번만 나왔습니다. 
-첫 번째는 유대인들 
-두 번째는 사마리아인들 
-세 번째는 이방인 고넬료와 그의 무리들, 이 순서대로 성령을 받습니다. 

물론 이 사람들 말고도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은 
모두 다 사도행전 안에서 성령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은 지금 10장까지, 딱 세 번만 성령 받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령받은 장소를 눈여겨 보십시오.
첫번째는 유대, 두번째는 사마리아, 세 번째는 땅끝
행1:8절이 떠오릅니다. 1:8절의 순서대로 복음이 확장되고, 그 순서대로 성령을 받습니다.

처음에는 유대인들이, 그 다음에는 사마리아 인들이, 그 다음에는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예수를 믿은 확실한 증거가 무엇이냐? 
바로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성령 강림이 대표적 상징적으로 2장에 나오는 거고요. 
유대인들이 오순절에 성령을 받았던 거죠. 

두 번째 성령 강림이 대표적 상징적으로 8장에 나옵니다. 
8장에서는 사마리아 인들이 상징적으로 성령을 받습니다. 

세 번째 성령 강림이 대표적 상징적으로 10장에 나옵니다. 
이방인들이 성령을 대표적으로 받습니다. 

이걸 연이으면, 행1:8절의 퍼즐이 맞춰지는 거죠.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

행1:8절의 순서대로 구원의 문이 열립니다. 
그 증거로, 성령을 받은 사건이 상징적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이 되었다는 샘플로 
2장의 오순절 성령 강림이 나옵니다. 

이어서 사마리아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에 편입되었다는 샘플로 
8장에 성령 강림이 나옵니다. 

이어서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에 편입되었다는 샘플로 
이방인의 첫 회심자인 고넬료가 대표로, 상징적으로 성령을 받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와 사마리아와 이방인들로 복음이 넘어가는 딱 그 지점마다
성령을 받는 장면을 기록해 놓음으로써 
행1:8절의 성취를, 누가는 우리에게 친절하게 마치 이정표처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지금 고넬료가 성령을 받았다는 기록이 상징적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제는 이방인들도 구원을 받는 일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성령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성령이죠? 
마가의 다락방에서 유대인들에게 임했던 오순절 성령을 
이방인들도 똑같이 받습니다. 

이런 의미로 학자들은 본문 행10:44~48절을 <이방인의 오순절>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독립된 본문이 아닙니다. 
행2장에 나오는 오순절 성령 강립 사건과 그대로 겹칩니다.  

그 증거가, 오늘 본문 45절에 있는데요. 

행10:45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여러분, 이 한 절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세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1)첫째는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신자들이 놀라는 장면입니다. 
이들은 욥바에서 온 유대인들이겠죠. 유대인 신자들이 깜짝 놀랍니다. 
놀라는 이유가 무엇이죠? 
성령이 부어지는 대상이, 유대인들이 아니라, 이방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구원의 대상으로 전혀 보지 않았었죠. 
'이방인들은 지옥의 뗄감이다. 이방인은 구원 받을 수 없다' 라고 여겼는데, 
그런데 그런 이방인들이 자기들의 눈앞에서 성령을 받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보고 놀라는 거죠. 

2) 두 번째 주목해야 할 장면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성경에는 '성령을 부어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원문에 보면 '성령의 선물을 부어주셨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아니라 '성령의 선물'이 더 맞는 표현이죠.  *gift of the Holy Spirit

그런데 이 표현이, 행2:38절에 오순절 성령 강림 때 그대로 나온 적이 있습니다. 
2:38절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  *gift of the Holy Spirit

 

여기 보면 '성령'이 아니라,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고 했죠.
유대인들은 오순절에 '성령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성령의 선물'을 동일하게 이방인 고넬료 가정이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누가의 의도가 있는 거죠. 

오늘 이방인들이 받은 성령은 
오순절에 유대인들이 받았던 성령과 동일한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세 번째 주목해야 할 장면이 있습니다. 
성령을 주시는데 어떻게 주신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죠? 
부어주신다 pour 고 말합니다. 

이 말은 '엑케오'라는 헬라어 단어입니다. 여러분 이 단어도
오순절 성령 강립 때 나온 적이 있습니다. 
행2:33절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무슨 얘기죠? 오늘 이방인들이 받은 성령은 
오순절에 유대인들이 받은 성령과 하나도 차이나지 않는, 똑같은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본문 46절을 한번 보세요.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고 나서 방언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높입니다. 
여러분 이 장면도 본 적이 있으시죠? 
오순절 성령 강림 때 우리가 보았던 장면입니다. 

행2:8절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오순절날 유대인들이 성령을 받았고요. 성령을 받고 나서 방언을 말합니다. 

행2:11절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오순절날 유대인들이 성령을 받습니다. 성령을 받고 나서 방언을 말합니다.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이 일이 똑같이 일어납니다.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습니다. 그리고 방언을 받고요. 방언으로 하나님을 높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히 두 장면이 지금 겹치고 있는 거죠. 
행2장이 <오순절 성령 강림>과 
오늘 본문 행10장, <고넬료 집에서의 성령강림>이 겹칩니다.
 
유대인들이 오순절에 성령을 받았던 장면과, 
오늘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는 장면이 사실 그대로 오버랩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에는, 누가의 의도가 다분히 있는 거죠. 어떤 의도예요? 
오늘 고넬료의 집에서 이방인들이 받은 성령은, 다른 성령이 아니라 
오순절에 유대인들이 받았던 그 성령과 똑같은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학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순절의 경험에 이방인 신자들이 참여하는 것이다." 

이제는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에 편입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서요? 똑같은 성령 받음을 통해서요. 

본문, 행10장에 고넬료의 집에서 이방인들이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건의 원래 목적은, 가장 중대한 목적은
'유대인에게 부어졌던 성령이, 이방인에게도 똑같이 차별없이 부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독자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성경 본문에 기록되었다는 것이죠. 이게 핵심 포인트입니다.

행10:44~48절 넬료의 집에 성령 강림 본문에서 
성경이, 그리고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 포인트는
'유대인에게 부어졌던 성령이, 이방인에게도 똑같이 차별없이 부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이 모습을 나중에 바울은요. 한 구절로 정리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전12:13절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이제는 차별 없이 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이냐? 그들도 다 '한 성령'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임했던 오순절 성령을, 이방인들도 똑같이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편입이 되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이 하나님의 백성 한 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