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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그리스도인

LNCK 2024. 6. 2.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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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6 / 비로소 그리스도인 / - YouTube
비로소 그리스도인          행11:19~30        

오늘 본문은 <최초의 이방인 교회인 안디옥 교회>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은 예루살렘에서 약 5백 킬로가 떨어진 안디옥에 교회를 탄생시키셨어요. 

(*앞서 하나님은 안디옥 교회가 탄생되기 위한 준비를 모두 갖추게 하셨습니다.
9장에, 사울의 회심이 있게 하셨고요,
10장에, 가이사랴 고넬료의 집에서 '이방인의 오순절'이 있게 하셨고요,
11장에, 예루살렘 본부에서 이방인들이 성령받고, 성도가 된 것을 인정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11:18
이와 같은 사전 정지 작업을 거쳐서, 드디어 안디옥에서, 안디옥 교회가 탄생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앞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아니라,
이 안디옥 교회, 이방인들의 의하여 세워진 이 안디옥 이방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세계 선교를 진행해 나가십니다. 

하나님의 열심을 여기 안디옥에 교회를 탄생시켰습니다. 
근데 또 하나 하나님의 열심이, 여기에 새로운 단어를 하나 만들어 내셨습니다.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26b

이곳에 교회가 탄생했고요. 이곳에 신조어가 하나 만들어졌는데 
지금 우리에게는 너무 익숙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란 말이 그때 처음 만들어졌습니다.

이 칭호는,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신자들을 박해하던 유대인들이 불렀던 칭호가 아닙니다. 
또한 예수를 사랑하고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 스스로가 만들었던 칭호도 아닙니다. 

이 칭호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는 제자들을 바라보던 
안디옥의 세상 사람들이 지어준 명칭이었어요. '그리스도인들 Christians'

그래서 우리는 이 시간,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좀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자주 말하는 '그리스도인(크리스천)'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오늘 4가지 정도로 나눠서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1. 첫 번째,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고난, 그리스도의 고통으로 탄생한 사람> 입니다. 

사도행전은 복음이 어떻게 땅끝까지 전파되고 있는가,
그것을 보여주면서 전개되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냥 막 쓰는 게 아니고 
복음이 어떻게 땅 끝까지 전파되고 있는가, 여기까지 왔는가 
이걸 지금 보여주는 방식으로 사도행전이 계속 진행되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여기 이 시점에, 안디옥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신조어 만나게 되는 
이 시점까지 어떻게 왔는가 간략하게 살펴보면,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그가 남기신 약속에서부터 시작돼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는 약속을 먼저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를 잡아 죽였던 그곳 예루살렘에, 오순절에 성령을 부어주시고 
그로 인해 예루살렘에서 부흥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예루살렘에 교회를 탄생시키십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그 사랑스러운 교회가 있는 그 예루살렘에 환난과 핍박을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스데반의 순교와 함께 일어난 그 핍박 때문에 
복음이 사마리아로 넘어가게 되고, 사마리아 사람들이 부흥을 경험하게 되죠. 

그런데 이제 이 사마리아에서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려고 하는 이 시점에서 
주님은 잠시 멈추시고, 사울의 회심 사건을 통해서,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할 사람을 일꾼을 준비시키십니다. 

동시에 고넬료의 회심 사건을 통해서, 이방인들을 형제로 받아들여야 될 
베드로와 유대인 예루살렘 교회도, 하나님께서 준비를 시키고 있는 거예요. 

그냥 주님께서 그냥 막무가내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일꾼도 준비시키고, 예루살렘 교회와 유대인들과 베드로와 사도들을 전부 
다 준비시키고 난 이후에 
베니게, 구브로, 안디옥으로 차츰 복음이 전파되었고,

 

그러다가 어떤 사람들이 안디옥의 헬라인들에게 말씀을 전했고, 그 결과 안디옥 교회가 생겼다, 
최초의 이방인 교회가 생겼다...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 이방인 교회가 무엇과 함께 등장을 하는가요? 
그때에 이 안디옥 교회가 세워지는 그 지점에 
우리는 그냥 '교회가 생겼는가 보다' 이렇게 생각할지 몰라도 
'그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11:19

그러니까 이 안디옥 교회는, 고통과 함께, 고난과 함께, 혼란과 함께 세워진 것입니다.

11:19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그러다가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20 ... 결국 안디옥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이죠.

그래서 환난과 함께 안디옥 교회가 생겨난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그리스도 인은, 자신의 몸된 교회를 통해 고통 받으신 그리스도의 고통으로 부터 
사실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잖아요.
그래서 사울이 그리스인들을 박해 했을 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하느냐?' 하지 않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이렇게 말씀했어요. 

그러니 교회의 고통은 결국, 몸된 교회를 통해 고통 받으시는 그리스도의 고통이었죠.
그리스도 인은, 자신의 몸된 교회를 통해 고통 받으신 그리스도의 고통으로 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는, 
그리스도께서 몸된 교회를 통해서 받으시는 고통가운데 탄생났고 
또한 성도의 핍박 가운데 나타났고, *스데반의 일로 인하여 일어난 핍박으로 흩어짐

그런데 여기서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수난과 부활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는 
예수께서 성육신 하셔서 몸을 입고 받으신 고통을 통해서 
'그리스도인' 이라는 단어가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몸된 교회를 통해 받으시는 고통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라는 것을 기억해야 돼요.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 
자신이 몸을 입고 받으셨던 고통, 그리고 자기의 몸된 교회를 통해 받으시는 고통, 
그것을 통해서 탄생한 사람이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일을 기념할 때에, 생일은 내가 생명을 얻은 날이에요. 
그러나 그것만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게 생일을 기념하기 하시는 이유는 
내가 이렇게 생명을 얻기 위하여, 누군가는 어둠을 봤어요. 
누군가는 죽음을 경험했고, 누군가는 고통을 경험했어요. 
우리의 어머니가, 나의 생명을 이 땅 가운데 탄생시키기 위하여 
고통을 당했던 날이라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는 성도는, 
나 라는 존재가 여기 있기 전에, 그리스도가 몸을 입고 고통을 받으셨고, 
그리스도가 몸된 교회를 통하여 고통을 받으셔서,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여기 있다 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2. 두 번째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자라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고통 가운데 태어난 사람인 그리스도인은 
또한 동시에 그리스도의 은혜로 자라는 사람입니다. 

이 짧은 본문에, 그리스도 인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하나 나타나는데 
'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면 나타나야 될 표지가 뭐냐면 <변화>입니다. 

11: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주께 돌아오더라'  
회심했다. 예수 믿게 됐다.. 이 말이죠. 

그런데 몇 절 아래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요? 
:25~26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러니까 '주께로 돌아오더라' 해놓고,
몇 절 내려가지 않아서 '그리스도 인이라 일컬음을 받았다'
이 말은, '그들이 완전히 다른 상태가 되었다, 변화되었다'... 라고 뜻이죠.

'그리스도인 이라 일컬음을 받았다'는 말은, 
보니까 사람들이 뭔가 달라졌다는 거죠.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전과는 완전 다른 상태가 되었다' 라는 뜻이죠.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큰 표지 중 하나는 '변화'인 것입니다. 

근데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바뀌게 했습니까? 
이 짧은 시간에, 이 큰 변화를, 무엇을 통해서 얻었다는 말입니까? 

사도바울은 명확하게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고전15:9~10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예수를 박해하고, 예수를 믿는 자들을 박해하던 사울이 
어떻게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는가요?  은혜 때문이라고 고백했죠.

마찬가지로, 안디옥 교인들이 
옛 사람이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변화되고 거룩하게 성화되어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들'로 불리게 된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오늘 본문도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것도 참 대단한 일이에요. 교회에 다니게 된 것도 대단한 일이죠. 
그런데 그들이 완전히 다른 사람, 다른 상태가 되었어요.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은혜, 환난 중에 복음을 주신 은혜, 그것 때문이죠. 

:19~20절에 보면, '그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하아 흩어진 자들이'
안디옥 교회를 세웠는데, 그렇게 보면, 환난과 박해도... 뒤돌아보면 다 은혜인 거죠.
은혜로 허락하시는 것들입니다.

여러분, 부모가 자녀를 바라볼 때 가장 힘든 순간이 언제입니까? 
두 가지 정도가 가장 힘들 텐데... 

-하나는 자녀가 죄를 짓는 현장을 바라볼 때.. 부모가 가장 힘들어요. 
'내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자녀를 키워 보려고 했는데, 
내가 정말 이 아이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데, 
이 자식이 계속해서 죄를 짓는 거... 그거 보기 힘듭니다. 

-근데 또 하나 보기 힘든 게 있어요. 부모는 자식이 아플 때예요. 고통 당할 때에요. 
학교에 가서 누구한테 얻어 맞고 오거나 왕따를 당하고, 
친구들한테 놀림도 받고, 회사에서 자꾸 안 좋은 일이 생기고... 
계속 마음과 육체로 자녀가 고통을 당하는 것이에요. 

근데 지금 주님이 복음을 5백 키로 떨어진 안디옥까지 전할 때에, 뭘 통해서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랑하시는 자기 자녀들이 환난의 고통을 당하는 중에 
복음이 여기까지 전파 되었단 말이에요. 

예루살렘에서 편안히 있었는데, 은혜 가운데 있었는데, 
엄청난 고통이 그들에게 닥쳐서, 5백 킬로까지 피해서 올 수밖에 없었던... 
그렇게 큰 고통 중에서 하나님께서 이들(안디옥 교회)에게 복음을 전해 주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의 또 다른 자녀가 고통 받는 그 가운데서 주신 
이 복음을 주신 은혜가 
이들이 자라는 시작점이 되어집니다. 환난과 고통도 '은혜'로 허락하신다는 거죠.

그리고 21절에 보니까요.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있어요.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도록, 주께서 지금 손을 쓰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큰 고통 가운데, 주님의 수고, 주님의 역사, 주님의 일하심을 통하여 
전해진 복음의 은혜... 그것이 그들을 바꿔 가는 시작점이 됩니다. 

▲그리고 그들 안디옥 교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 
그 사람들(바나바, 바울)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또한 변화되어 되어집니다

이 안디옥 교회가 세계 선교의 중심지가 되거든요. 
이 교회가 바나바, 사도 바울을 배출합니다. 

근데 12사도 말고, 성령을 통해서, 교회를 통하여, 
또다시 사도로, 예수님께서 직접 세운 12사도는 아니지만,
안디옥 교회가 세운 사도 바울, 사도 바나바(행14:14)가 보냄을 받습니다.

13:3에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라고 했죠.
여기서 '보내니라'가 아폴류오, 
사도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의 아포스톨로스 죠.
그래서 14:14절은 '두 사도'라고 명시하는데, 안디옥 교회의 보냄을 받은 자였죠.

참고로, 성경에는 12사도 외에도, 또 사도가 나옵니다. 실라도 사도였습니다. 주1)

지금 이 단락의 주제는, 안디옥 교인들이 '그리스도인들'로 불릴 만큼 변화되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셔서 변화되었지만,
-또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바나바와 바울을 통해서 변화되었다
라는 점을 살피는 중입니다.

24~26절에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바나바는 위 본문에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듯이, 성도도 주위 사람들을 통해서 변화되는 겁니다.

바울은, 위 본문에는 자세한 설명이 안 나오지만,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뜨겁게 만난 후에, 아라비아에서 3년을 보내고,
그 후 고향 다소로 돌아가서 10년 동안 자기 자신이 성숙되고 무르익는 과정을 거칩니다.

(학자들은, 바울이 삼층천에 올라간 환상를 본 시기,
그리고 5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은 시기를
이 다소에서의 10년 기간 중이라고 봅니다.
왜냐면, 안디옥 부터 바울의 행적은, 사도행전이나 서신에 거의 다 기록되어 있는데
그때 자기가 삼층천에 올라갔다는 등의 얘기는 안 하거든요.
그러면 다소에서 지낸 10년 사이에 일어난 일일 수밖에 없다는 거죠)

그래서 사도바울도 10년 정도 하나님 앞에 연단을 받았고 훈련이 된 상태에요. 
그런 두 사람을 하나님께서 안디옥 교회에 보내주신 거예요. 

안디옥 교회에 가장 필요한 사람들을 고르고 뽑으셔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준비하고 성숙시켜 가셨던 두 사람,
바나바와 바울이 있었기에, 
안디옥 교인들이 놀랍게 변화되어서,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칭함을 받게 되었던 거죠.

안디옥 교회가 좋은 지도자를 만난 것이 '은혜'라는 것이죠.
그 은혜로 인해서 안디옥 교인들이 변화 되어지고, 자라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일 년간' 가르쳤는데,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았다'
여러분, 혹시 너무 '짧다, 단기 속성인가?' 이런 생각 안 드세요?

오늘날 우리는 보통 1주일에 1~2번씩 모이잖아요. 
근데 그때 보통 초대 교회들은 은혜 받으면 매일 모였을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의 두란노에서도 매일 가르쳤죠. 19:9)

과거에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죠. 처음에 은혜 받았을 때 
주일만 모이는 게 너무 아쉬워서 어떻게 했습니까? 
주일 저녁, 매일 새벽, 수요 저녁, 금요 철야... 이러면서 계속 모였어요. 

그러니까 저들이 '1년간' 모인 것은, 지금 우리의 1년 시간과는 비교되지 않을 겁니다. 
1년이면 진짜 365일 매일 모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에 중국선교 가서도 보십시오.
사람들이 하루 1시간 모이지 않습니다. 하루 종일 모여서 사경회하고, 예배했습니다.
초대교회 안디옥교회도, 아마 형편이 닿는 대로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시는 가운데, (가르쳤으니까 :26)
말씀이 그들을 자라게 하시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들이 일 년도 채 안 되었는데 말입니다. 

시중에 사람들이 보니까 '저 사람은 그리스인이다' 라고 칭할 만큼
변화되어졌다.. 라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근데 우리가 참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은혜인지 모를 때가 많아요... 

안디옥 교회는 그 은혜를 알았을까요? 
안디옥 교회가 어떻게 생기게 됐는지..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인지.. 
정말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신 사람인데, 안디옥 교회에서 그들을 만나게 됐는지...
그들이 말씀을 배우게 된 것이, 그저 그냥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까요? 
Nobody knows!

우리도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얼마나 클까요? 
하나님은 내가 자라지 않은 이유가, 으혜를 주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은혜를 내가 깨닫지 못하고, 그래서 그 은혜에 합당치 않게 반응하기 때문은 혹시 아닐까요?
우린 그렇게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되지 않을까요? 

◑3. 세 번째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구별된 자>예요. 
그리스도께 구별된 사람이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안디옥에 교회를 탄생시켰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열심이 거기서 '그리스도 인'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내셨는데 
이 단어는 사실 신조어 였죠. 그 도시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26
처음 듣는 아주 생소한 단어입니다. 

크리스티아노이(주격 복수), 크리스티아누스(목적격 복수)
그런데 이 단어는, 처음 만들어진 신조어 이기는 하지만 
그 당시 그 사람들이 잘 쓰던 어떤 단어들과 대비 되어서 나온 단어였어요. 

'그리스도인들'이라는 단어는, 그 당시에 되게 유명했던 어떤 또한 칭호를 
대비해서 이게 나온 거예요. 

그때 유명했던, 원래 사람들이 잘 쓰던 단어가 있었는데 
'가이사랴노이' 라는 단어가 있었어요. 
'가이사랴노이'라는 사람들은, '가이사의 사람들, 황제의 사람들'이란 뜻이에요. 

가이사의 최측근을 포함해서, 가이사 황제를 적극 지지하고 따르는 사람들이란 뜻이죠.
당연히 가이사의 혜택과 풍족함과 보호를 받는 사람들이었죠.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로마 황제에게 충성하는 자들이었어요. 
황제를 가장 앞서 따르는 자들이었어요. 

그들과 대비해서 '그리스도인들' 이라는 단어가 생겨나게 된 겁니다. 
즉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 되었으며,
그 분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이지만, 무엇보다 그리스도께 충성하는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이렇게 구별 되었던 것입니다. 

또 그 당시에 또 '헤로디노이'도 있었어요. 
'헤롯의 사람들' 그 사람들은 헤롯에게 목숨 거는 사람이에요. 

▲이 세상에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많은 부류의 사람들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돈의 목숨 거는 '돈의 사람'이 있습니다. 
명예에 목숨 거는 사람 '명예의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음식에 목숨 거는 사람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쾌락에 목숨을 건 사람이 있어요. 
그 외에도 게임에 목숨을 건 사람, 도박에 목숨을 건 사람, 
자기 취미에 목숨을 건 사람, 자기 자신의 꿈에 목숨을 건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보면, 여러분들도 이제 보이지 않습니까? 
한 1년 이상 같이 보면 '저 분은 뭘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가?'가 표시가 나요.
우리는 '크리스티아노이'로 표시가 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붙들고, 그리스도를 가장 존귀하게 생각하며,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그리스도께 구별 된, 세상에서 완전히 구별된
그런 '그리스도인들'로 불리는 사람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4. '그리스도인'이란, 바로 <그리스도께 자신을 드리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짧은 본문 가운데, 그리스도인들 이라는 단어가 나타났고,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이 또 한 가지 드러나는데, 
무엇이냐면 '자기의 것을 내어 놓는다' 라는 거예요. 
안디옥 교회에서 가장 소중한 자산이었던,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내보냅니다.

:21~22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앞서 예루살렘 교회가,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보냅니다. 내어놓은 거죠.
예루살렘 교회의 핵심 멤버였던 바나바를, 
5백 킬로나 떨어진 저 먼 곳으로, 아낌없이 보낸 것입니다.

:24절에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예루살렘 교회도, 그 사실을 잘 알았겠죠.
바나바가 떠나가면, 교회에 큰 손실이 생긴다는 것도 충분히 예상되었지만,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타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을 비워서, 다른 사람들, 다른 교회를 돕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주의 말씀을 전하던 선지자들이 있었어요. 
근데 :27~28절에 보면, 그때 선지자들이 또 예루살렘에서 안디옥 까지 왔어요. 

:27~28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지금 예루살렘에 있는 선지자들이 주의 성령으로 말미암아서 
조금 있으면 흉년이 든다. 큰 어려움이 닥칠 것이다... 라는 예언을 들었어요. 

근데 그때 어떤 마음이 생겼을까요? 
'저기 안디옥 교회 어떡하나? 이렇게 큰 흉년 들면 어떡하지? 
그들이 준비할 수 있도록 해줘야지' 하면서 
예루살렘 교회의 선지자들을 또 거기까지 보내서 
그들이 대비할 수 있도록... 그렇게 선지자들을 내어 놓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5킬로 떨어졌다는 것을, 지금 우리들 거리로 계산하면 안 됩니다.
그때는 육로로 거의 걸어다녔어요. 강도도 있고, 물이 부족하면 가다가 죽습니다. 
한 번 거기로 갔다가, 다시 못 돌아올 가능성도 높았어요. 

거기에 바나바를 보내고, 그게 모자라서 또 선지자들을 보냈다, 내어놓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안디옥 교회가 또 어떻게 하는가 보니까 
:29~30절에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안디옥 교회의 제자들이 그 예언을 듣고 나서 
'와 이제 큰일 났다. 이제 흉년 오나보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먹을 거 좀 대비해 놓고, 
좀 많이 쌓아 놓고 지내야 되겠네' 이렇게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아마 시간이 좀 지났겠죠. 정말 흉년이 글라우디오 때 들었습니다. :28)

안디옥 교회는, 오히려 예루살렘 교회를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부조를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예루살렘 교회로 보냅니다.
정말 '형님 먼저, 아우 먼저'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돌보고 있습니다.
(당시에 안디옥이 대도시라서, 예루살렘보다는 형편이 좀 더 나았으리라 봅니다)

'제자들이 각각 그 힘 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29
더 놀라운 것은, 지금 안디옥 교회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인 
바나바와 사울의 손에, 그 부조를 보내는 거예요.  :30
물질만 내어주는 게 아니라, 제일 중요한 사람까지 내어줍니다.

자기를 챙기는 모습을 도무지 볼 수 없습니다.

이렇게 두 교회가 서로 내어놓으면서 
이것은 지금 '그들이 하나다' 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롬15장에 보면, 바울이 이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하는 걸 
엄청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둘이 하나다' 라는 것을 증거하는 증명이라는 거예요. 

이방인들이 유대인에게,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 헌금을 받음으로써 
'둘이 한 형제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었어요. 

롬15:27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예루살렘 교회는 영적인 것, 전도와 말씀을 나눠줬어요. 
그런데 이방인 교회는, 이제 형제에게 은혜의 물질을 나눠주면서 
'우리가 하나다, 한 형제다' 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가 바로 이들의 나눔이였단 말입니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아주 이타적인 나눔이었죠.

▲근데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것은 이들이 하나님께 헌신 되었다.. 라는 증거였어요.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도,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도 
모두 주께 헌신 되었다... 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이기도 했다는 말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가장 소중한 바나바를 내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안디옥 교회는, 흉년이 들 건데, 우리도 힘들 텐데, 
은혜의 물질을 그들에게 내어 놓았다 라는 거예요. 

자 그런데 사도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또 물질 
이것이 그냥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고, 저 사람이 필요한 것을 내어놓았다 라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나를 내어 놓았다' 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구약 시대에 예배를 드릴 때마다, 제사를 드릴 때마다 뭘 가지고 갑니까? 
제물을 가지고 가요. 

그래서 제물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의 일부를 드린 것이 아니라 
그 제물은 나와 동일시 되는 거예요. 
그걸 드림으로써, 나를 드리는 거예요. 

그래서 번제로 드리는 것은, 그것을 전부 태워 하나님께 올려드릴 때, 
'나를 완전히 하나님께 드린다' 라는 의미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뭘 드릴 때, 여러분들이 시간을 드리든, 헌금을 하시든, 
아니면 봉사를 하시든지 간에, 그 모든 것들은 
구약시대의 성도들이 제물을 드릴 때, 그 제물에 자기를 담아서 드렸듯이
나의 일부러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전부를 담아서 드리는 것이라는 의미를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바나바는 여기 안디옥교회에, 자기 자신을 아예 전부 드려버려요. 
그러니까 그리스도인 이란 결국 무엇인가? 
그리스도인 이란, 세상에서 그리스도께 구별 되어져서 
이제 나의 소중한 것 일부를 그리스도께 내어 놓을 줄 아는 자 정도가 아니라 
나 자신의 전부를 그리스도께 드리는 자,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인이다... 라고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실 때, 거기에 내가 담겨서 드려지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실 때, 나를 거기에 나를 다 담아 드리는 거예요. 
그래서 그리스도 인은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자다' 라는 것을 

오늘 이 처음 이 단어(그리스도인)가 생겨진 이곳에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어요. 

오늘날은, 이 단어가 너무 흔해 져서 
이제 뭐 아무나 보고 '그리스도인이다' 이렇게 말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원래 이 단어가 처음 생겼던 그 순간에는,
'그리스도인이란 바로 이런 사람이야' 라고 뜻을 우리가 공부해 보았습니다.
그런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 까지 와서 교회를 탄생시키셨고 
거기서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칭호를 받게 하셨습니다. 

근데 그 하나님의 열심이, 2천년을 지나서 여기까지 와서 
우리 교회를 여기에 하나님께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은, 그 분의 열심으로,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그리스도인'이라 칭함 받기를 바라고 계시고, 그것을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 됨'을 위하여 우리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열심이 여기에 교회를 세우고, 
주님의 열심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소리를 듣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함께 동역하여서, 그 일(그리스도인 됨)을 해야 돼요.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고난 때문에 여기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내가 그냥 여기서 어쩌다가 그리스도인이 된 게 아니고 
그분이 몸을 입고 받으셨던 고난과 
그리고 그 분이 자기의 몸된 교회를 통해서 받으셨던 그 고통 가운데서 
내가 여기 그리스도인으로 서 있다... 라는 사실을, 우리가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 분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했으면 좋겠어요. 
같이 비가 내리는 곳에서, 같이 걸어가도 
어떤 사람은 그 비를 듬뿍 맞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하나님은 은혜를 적게 주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걸 헛되이 받기 때문에, 
효력이 없는 건 아닌가요?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이 되지 않도록 
은혜 가운데 자라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서로를 보면서 이상한 기준으로 자꾸 구별하려고 하지 마세요. 
이상한 율법 적인 것으로 자꾸 구별하려고 하지 말고 
저 사람의 삶을 보면서,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보면서, 그의 경건을 보면서 
'야 저 사람은 뭔가 다르다.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인 됨으로 구별하고, 

나 자신이 주께 드려지는 그러한 그리스도 인으로서
정말 안디옥에서 처음에 '그리스도인들'로 불려졌던 그 호칭에 합당한
그리스도인 답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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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성경에는 12사도 외에도, 또 사도가 나옵니다.
같은 의미에서 실라도 사도였죠.

살전2:7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여기서 '우리'는, 바울, 실라, 디모데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여기서 바울 자신과 실라, 두 사람을 '사도'로 지칭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