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한 나의 그릇 행9:10~19 설교 세 편 조합
◑9:10~11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본문에서 회심한 사울은, 사명을 받습니다. 회심한 사울에게 주님은 사명을 주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직접 사울에게 사명을 주시지 않습니다.
누구를 통해서 사명을 주시죠? 아나니아 라는 사람을 통해서 사명을 주십니다.
이 아나니아 라는 이름이 앞에 나온 적이 있습니다.
행5장에 '아나니아 와 삽비라' 라는 부부로 나온 적이 있습니다. 동명이인 입니다.
그러면 이 아나니아는 누구인가요? 본문에는 특별한 소개가 없습니다.
그런데 행22장에 보면, 그에 대한 소개가 있습니다.
22:12~13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아나니아는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하나, 그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이 아나니아를 예수님이 환상 중에 부르셔서, 사울에게 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찾아가는 길을, 마치 네비 찍듯이 이렇게 세세하게 알려주시는데요.
11절에 보면, 먼저 직가라는 거리로 가라고 하십니다.
직가는 '곧게 뻗은 길'이라는 뜻입니다. straight street 죠.
이 직가는, 다메섹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약 1.5킬로미터 되는 길입니다.
요즘도 거기 말로 '직가'라고 부르죠.
◑9: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여기 보면, 순서가 참 의미가 있는데, 사울의 사역의 세 가지 대상이 나옵니다.
사울이 사역해야 할 대상이 누구죠?
1) 먼저는 '이방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유대인의 사도, 사울은 이방인의 사도'
하나님은 사울을 부르실 때, 이미 이방인 사역을 염두에 두셨습니다.
실제로 사도행전 뒷부분에 보면, 이방인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사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2) 이어서 두 번째 사역의 대상은 ... '임금들'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행25장에 보면, 사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벨릭스, 베스도 총독과 함께요.
그리고 나중에 로마 황제가 있는 로마에 가서도 예수님을 전합니다.
이 순서대로 그대로 사도행전에 사울의 사역이 펼쳐지고 있는 거죠.
3) 이어서 세 번째 사역의 대상은 누구죠? '이스라엘 자손들'이라고 말합니다. :15
'이스라엘 자손'은, 유대인을 말하는 거죠.
사울의 첫 번째 사역의 대상은 이방인이었습니다. 주된 사역의 타겟이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유대인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게 금지된 게 아닙니다.
사울은 유대인에게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실제로 사도행전 뒷부분에 보면,
사울이 복음을 전하는데, 어디서 전하냐면, 유대인의 회당에서 전합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거죠.
이처럼 사울의 사역이, 이 15절의 순서대로 그대로 사도행전 안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울의 사역은 삼중사역이었던 거죠. 이방인, 임금들, 유대인들.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을 사울에게 주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단순히 사명만 주신 게 아닙니다. 사명과 함께 고난도 주십니다.
그 부분이 16절 말씀인데요.
◑9: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주님께서 사울에게 부여하신 의미는 '고난의 그릇'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말 '고난받다'로 번역된 헬라어 파스코는
헬라어 원문에 수동태가 아니라 능동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후에 사울은 불가항력적인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이
피동적으로 박해를 당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사울이 스스로 자발적으로 주님을 위하여 고난 받는 삶을 살게 될 것임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근본적인 두 가지 질문을 제기하게 됩니다.
▲1. 첫째, 왜 주님께서 사울을 당신을 위한 고난의 그릇으로 선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정말 살아 계신다면, 주님께서 정말 사랑의 주님 이시라면,
당신을 위해, 당신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사울 같은 사람을,
어떤 경우에도 지키시고, 보호해 주시고, 또 영화롭게 해 주심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왜 사울로 하여금, '당신을 위한 고난의 그릇으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까? :16
어쩔 수 없이 한 두 번 고난 당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왜 일평생토록 주님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고난의 길을 걷도록 하시는 것입니까?
사울은 본래 주님을 대적하는 폭도였지 않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그 사울을 구원 하신 뒤에,
그의 전력에 대한 징벌적 의미로,
'앞으로는 고난의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하셨겠습니까? No
이것을 사울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사울은 본문 이후에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수동적으로 고난의 그릇이 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주님을 위한 고난의 그릇으로 일평생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누군가가 자발적으로 고난을 감수한다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그 사람은 자발적으로 그 고난을 피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피할 수도 있는 고난을 자발적으로 받는다면,
자신이 고난을 당하면서 까지도 지켜야 할, 그 소중한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차 철길 옆에서 일을 하던 아낙네가
철길 위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는 자기의 어린아이를 향하여
갑자기 기차가 달려오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때 그 여인이 만사를 제쳐놓고 기차 앞으로 뛰어들어갈 수도 있고,
혹은 발을 동동구르고, 소리를 지르면서,
곧 벌어질 그 처참한 광경을 제 자리에서 목격하기만 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그 선택은 그 여인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 여인이, 철길 위에서 위급함 속에 빠진 어린아이의 친엄마라면,
그 친엄마는, 자신이 죽을지언정, 앞뒤 가리지 않고 기차 앞으로 뛰어들어
자기 자식을 먼저 밀쳐낼 것입니다.
엄마에게는, 자기 생명보다, 자기 자식의 생명이 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사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울이 주님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고난의 길을 걷는다고 하는 것은
뒤집어 설명하면 사울은, 얼마든지 자발적으로 그 고난을 피해가면서 살 수도 있었습니다.
사울은 절대로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사울은 유대교 최고의 석학 가말리엘의 제자로서
당시 유대인 젊은이들 가운데 가장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습니다.
만약 사울이 주님을 위한 고난의 그릇으로 살아가는 것이
자기의 삶에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가 깨달았다면,
그는 절대로 그 삶을 추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똑똑한 사울은, 주님을 위한 고난의 그릇으로 자기 삶을 바쳤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당하는 온갖 고난마저도 스스로 감내한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보다도,
자기가 고난을 당하기까지 지켜야 할 그 무엇,
다시 말해서 주님의 사랑과 생명이 더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자신 같은 죄인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 주신 주님의 사랑,
자기 같은 흉측한 죄인에게 부어주신 주님의 영원한 생명,
그 사랑과 생명을 생각하면, 그 사랑과 생명을 지키고 전하기 위하여
자기의 육체가 받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그의 인생 말엽에, 예루살렘을 거쳐서 로마 제국의 심장인
로마에 이르는 것이, 자신이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할 마지막 사명 임을 깨달은 뒤에
생전에 다시는 보지 못할 에베소의 장로들을 밀레도로 불러서
그들에게 고별 설교를 하는 가운데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행20:22~24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울이 주님을 위한 고난의 그릇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자기 육체의 죽음 마저도 불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육체는 멀지 않아 묘지에서 흙으로 사라져 버릴 유한한 생명인데 반해서
주님께서 자신에게 부어주신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그 영원한 생명을 지키고 전하기 위해서
자기 죽음마저 불사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후11:24~27절에서도, 사울이 당했던 극심한 고난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사울을 만난 사람들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사울이 얼마든지 자기 자리에 편안히 앉아서
자기의 일신의 안일만을 꾀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온갖 고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생명을 온 마음을 다해 증언 할 때
주님의 그 생명과 사랑이, 듣는 사람들의 심령속으로 스며들지 않았겠습니까?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고난까지도 감수해 가면서
오직 주님의 그 사랑과 생명의 증인이 될 때,
사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성령님의 역사 속에서
듣는 이들의 심령 속에서 살아 움직이지 않았겠습니까?
△그렇다면 주님께서 왜 사울을, 당신을 위한 고난의 그릇으로 사용하셨는지,
우리는 그 진정한 이유를 알게 됩니다.
그것은 결코 주님을 대적했던 사울에 대한 징벌적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단지 심술궂으셔서, 까닭 없이 사울로 하여금 고난 당하게 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울에 대한 주님의 깊고도 깊은 사랑과 신뢰로 인함이었습니다.
일단 자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철저하고 헌신적인 사울을
주님께서 얼마나 사랑하고 신뢰하셨으면,
주님께서 이 세상 사람들에게 주시기 원하시는 당신의 사랑과 생명은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것임을,
사울의 삶을, 당신의 그릇으로 삼으셔서, 이 세상에 보여 주셨겠습니까!
사울 개인으로서는, 그보다 더 큰 영광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2. 여기서 두 번째 질문이 다시 제기됩니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주님께서 사울이라고 하는 한 인간을
그의 일평생을, 당신을 위한 고난의 그릇으로만 사용하신다면,
그 당사자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울을 평생토록 권한 속에 내버려 두신다는 것은
당신을 위해 사는 사람들을 지키고 영화롭게 해주어야 할 주님께서
당신의 직무를 유기하시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 말 '고난받다'로 번역된 헬라어 '파스코'는
'고난 받다'는 의미와 함께 '영향 받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주1)
그러므로 주님께서 사울을 가리켜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받을 것인지를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는 말씀은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나로부터) 영향 받을 것인지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는 의미도 됩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주님의 사랑과 생명을 지키고 전하기 위해서
고난마저 스스로 기꺼이 감수한다면,
그 사람에게 주님의 영향이 얼마나 크게 미치겠습니까!
그가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면 당하는 만큼,
주님의 더 큰 영향력이 그와 함께 하시지 않겠습니까!
주님을 위하여 고난마저 감수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 사람이 주님의 영향력 속에 있음을 의미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의, 이 세상에 대한 영향력은 또 얼마나 커지겠습니까?
그 사람이 주님의 영향력 속에 산다는 것은
그 사람을 당신의 그릇으로 사용할 수 있는 주님의 영향력이
그를 통해 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을 보십시오. 주님을 위해 자신을 고난의 그릇으로 주님께 바쳐드렸던 사울은
끝내 참수형을 당해서 생을 마감합니다.
오직 세상적인 관점에서만 본다면, 사울은 그 어떤 가시적인 업적도 이루지 못한
실패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참수형을 당하기까지, 주님을 위해 자신의 생을 던졌다면,
그 사울에 대한 주님의 영향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아니 주님의 사울에 대한 영향이 얼마나 크게 미쳤으면,
사울이 주님을 위하여 스스로 참수형마저 감수했겠습니까.
그 결과 사울은, 인류역사상 이 세상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오직 사울을 한 사람으로 인해서, 복음이 세계 만방을 향해 펼쳐나갈 수 있었습니다.
신약 성경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교회는, 사울 한 사람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그가 쓴 글이, 무려 신약성경의 1/3을 점유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인생의 마지막을, 마치 실패자처럼 마감했지만
그러나 그는 이처럼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2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의 이 영향력은 조금도 감소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2천 년 전에 비하여 전 세계적으로 그리스도인이 월등하게 많아진 오늘 날,
사울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습니다. *'고난 비례의 법칙' : 받은 고난에 비례함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이 땅에 기독교가 존재하는 한
사울 만큼 이 세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미치고 있으며, 앞으로 미칠 사람은
사울 이외에 누가 달리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 사울을 당신을 위한 고난의 그릇으로 사용하신 것은
절대로 사울에 대한 징벌적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주님께서 사울을, 이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그리스도 인으로
세워 주시기 위한, 사울에 대한 주님의 특별한 은총이요, 배려요, 특권이었습니다.
△1997년 11월 25일은, 주기철 목사님이 이 땅에 태어난지 백 주년 되는 기념일입니다.
주목사님은 일제 강점기 때 신사 참배를 끝까지 거부하시다가 감옥에서 순교하셨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순교하실 때, 그때 조선 땅에 각 교단 마다 왜 총회장이 없었겠습니까.
조선 팔도에서 명성을 날리던 목사님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해방 이후 60여 년이 지난 오늘 날,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
우리가 도대체 누구를 알고 기억하고 있습니까?
주목사님과 동시대를 살았던 그리스도 인들 가운데
주기철 목사님 만큼 우리에게 지금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그리스도 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치 실패자처럼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습니까?
주님을 위한 고난의 그릇으로, 주님을 위해 자신의 생을 던졌기에
주님께서 그를 가장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 인으로 영원히 세워 주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울은, 지금 영광의 자리로 부름을 받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할 때 '영광을 받을 것이다'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영광의 자리가 아니라, 고난의 자리로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부분이 늘 우리에게 언제나 불편한 지점이죠.
믿음만 주시면 좋은데, 믿음과 함께 고난을 주십니다.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 살아갈 때, 영광이 아니라 고난을 받을 거다'...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성경은 믿음은 필수이고, 고난은 선택이다' 그렇게 한 번도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믿음만 딱 취하고, 고난은 버릴 수 있다' 그렇게 말씀한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음을 포기하면, 고난을 받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진실로 믿는다면, 고난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과 고난은, 구원과 고난은, 하나의 패키지와 같습니다.
실제로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살아갈 때, 분명히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은 성도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받은 고난 만큼, 영광을 받습니다!
◑9: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드디어 아나니아가 직가에 있는 유다의 집에서
사흘 동안 금식기도 하던 사울을 찾아갔습니다.
아나니아가 사울 앞에 섰지만, 그러나 사울은 아나니아를 볼 수 없었습니다.
사울은 시력을 상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나니아는 그 가여운 사울의 머리 위에 안수, 즉 자신의 손을 얹고
'형제 사울아' 하고 그를 불렀습니다.
이것은 사울에게는 대단히 감격적인 호칭이었습니다.
2천 년 전 초대교회 교인들은 서로 서로 '형제, 자매' 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형식적인 호칭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사회적으로 엄연히 계급이 존재하던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적 신문이나 직책을 초월해서
서로 서로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 자신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특별 하고도 새로운 관계를 맺고 있음을 의미 했습니다.
따라서 아나니아가 사울을 향해 '형제 사울아' 하고 부른 것은,
아나니아가 사울을, 믿음의 형제로, 신앙 공동체의 일원으로
그리고 교회의 동역자로 받아들임을 의미 했습니다.
본래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교회를 잔멸하고,
그리스도 인을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만 따진다면, 사울은 절대로 아나니아의 믿음의 형제, 믿음의 동역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나니아가 사울을 찾아가서, 그를 믿음의 형제로 받아들이게 된 이유를
아나니아가 이렇게 직접 밝혔습니다.
9: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모든 그리스도 인들의 대적이었던 사울을, 아나니아가 찾아가서 형제로 받아들였던 것은
주님께서 아나니아에게 '사울을 찾아가서 그렇게 하라'고 명령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울이 얼마나 반그리스도적인 인간인지 익히 알고 있던 아나니아는
애당초 주님께서 사울을 찾아가라고 말씀하셨을 때, 주님께 이의을 제기했었습니다.
'사울이 다메섹에서도 반드시 그리스도 인들에게 해를 끼치리라'고
아나니아는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나니아의 이의 제기와 기우를 한 마디로 일축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나니아에게 사울을 가리켜
'사울은 당신의 이름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주님의 그릇'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그를 찾아가라고 명령 하셨습니다.
주님의 그 명령 앞에서, 아나니아는
사울에 대해서 갖고 있던 자신의 편견과, 판단과, 생각을
모두 거두어들이고, 사울을 찾아가서, 그를 믿음의 형제로, 교회의 동역자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는 때로 이렇게 질문하곤 합니다.
'왜 내가 꺼려하는 그 사람을 또 다시 만나야 하는가?'
'왜 내가 그 사람과 함께 일해야 하는가?'
'왜 내가 그 사람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가?'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왜 하필이면 지금 그 사람이 내 곁에 있어야만 하는가?'
이런 질문들은 때로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거나,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우리 속에 분명히 질문은 있는데,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은 우리 속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오직 주님으로 부터만 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그 사람을 내 곁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절대적이고도 선하신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았기에 아나니아는 두 말하지 않고 사울을 찾아가서
그를 믿음의 형제로, 동역자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을 가리켜서 '형제' 라고 부를 때 사용된 헬라어 '아델포스'는
여자의 자궁을 의미하는 델피스 에서 파생되었습니다.
같은 자궁에서 태어난 사람끼리만 친형제, 자매가 될 수 있습니다.
즉 아나니아는 사울을, 진정으로 자신의 친형제처럼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울을 가리켜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니 아나니아 자신이나 사울이나, 모두 한 자궁에서 태어난 사이였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긍휼의 자궁이었습니다.
히브리어로 여자의 자궁을 가리키는 '라함'은
자궁 이라는 뜻과 동시에, 긍휼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히브리 말로는 여자의 자궁과 긍휼이 구별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긍휼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라함'은
반드시 임신한 여자의 자궁입니다.
다시 말해서 현재진행형으로 태아를 품고 있는 자궁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여자의 자궁이기는 하지만,
현재진행형으로 태아를 품고 있지 않는 자궁은, 레햄 이라고 해서
라함과 구별해서 사용합니다.
히브리 말로 태아를 품고 있는 '자궁'과 '긍휼'이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 합니다.
태아를 품고 있는 여인의 자궁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비록 피덩이일 망정, 여자의 자궁은 새로운 생명을 자기 속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자궁은 그 생명과 더불어 살아갑니다.
자궁 자신과 태아의 생명을 분리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태아의 생명을 자신의 일부로 간주하고 함께 살아갑니다.
그 태아를 감싸고,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 자궁은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습니다.
태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탯줄을 통해서 조금도 아낌없이 공급합니다.
자기 속에 품고있는 태아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한 자궁의 이 모든 동작이나 역할을
단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긍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말로 여자의 자궁과 긍휼은 구별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이렇게 고백하고 계십니다.
사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여인의 자궁은, 열 달 동안 자기 자궁 속에 품기운 태아를 위해서 모든 긍휼을 베풉니다.
그래서 그 태아가 세상에 태어난 뒤에도,
그 아이에게 여인은 계속해서 긍휼을 베푸는 것은, 여인의 모성적 본능입니다.
자기 자궁에 태어난 아이가 신체적으로 결함이 있어도, 지능이 모자라도, 못 생겼어도,
나중에 다 자라서 도둑질을 했어도,
그래서 세상 모든 사람들로부터 내 자식이 미움받고 외면당한다 할지라도
어머니만은 그 자식에게 계속 긍휼을 베풉니다.
그 자녀는, 자기 자궁에서 태어난 자기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인이, 자기 자궁에서 태어난 자식에게 아무리 긍휼을 베푼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긍휼에는 견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베풀어 주시는 긍휼이 얼마나 큰지,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러주시기 위한 십자가의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대신해서
성자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제물로 돌아가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도록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런 긍휼의 대역사 속에서, 아나니아 역시도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습니다.
이 사실을 아나니아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에,
그는 주님의 명령에, 두 말하지 않고 사울을 찾아가서
그를 믿음의 형제로, 교회의 동역자로 받아들였습니다.
사울 역시도, (아나니아) 자신과 같이, 하나님의 긍휼, 곧 자궁 속에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자신을 믿음의 형제로, 교회의 동력자로 받아들여주고,
자기에게 안수해준 아나니아 덕분에,
주님의 그릇으로 남은 평생을 살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인류의 역사가 새로워지게 되었습니다.
◑9: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18절에 이 모든 이유가 담겨져 있는데요.
여러분 이 장면을 먼저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울을 찾아간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를 합니다.
그때 사울에게 일어난 변화가 하나 있는데요.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집니다.
아시다시피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빛 가운데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사울은 너무나 강력한 빛 앞에 엎드러지게 되었습니다. 엎드러지고 난 후 일어났지만
사울은 볼 수가 없었습니다. 눈은 떴지만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나니아가 기도를 하자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집니다.
여기 비늘은 헬라로 '레피스' 라는 단어인데요.
고기의 비늘이나 뱀의 비늘을 말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눈에서 벗겨진 비늘은 어떤 비늘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물론 저마다의 다양한 영적인 해석들이 있습니다.
-죄의 비늘이었다.
-하나님을 몰랐던 영적인 무지의 비늘이었다.
-세상을 사랑했던 눈먼 비늘이었다. 불신앙의 비늘이었다.
-자신을 위해 살았던 이기심의 비늘이었다. 등의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비늘이 벗겨지면서 사울은 다시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다시 보게 되었다'는 말을 우리가 주목할 필요 있습니다.
'다시 보게 되었다'는 말은 단순히 눈이 떠져 보게 됐다는 말이 아닙니다.
헬라어로 '아나블레포'라는 단어인데요.
아나 ... 위를 향한다
블레포 .. 본다
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즉 단순히 보게 된 게 아니라 '위를 향해 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고 나서야 사울은 비로소
눈을 들어 위를 향해 우러러 보았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사울이 우러러 보게 된 것이 무엇이었는지, 밑에 나오는 20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9: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사울은 그가 부정했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은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성자 하나님이심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던 분이, 부활하여 살아계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면 그분은 죄없으신 분일 텐데
그런 분이 죽으셨다면, 그 죽음은 나의 죄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에서 처형된 나사렛 사람 예수가
구약에 약속된 메시야 나의 구주라는 사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주님을 알기도 전에, 주님께서 자신을 지켜보고 계시고
자신과 함께 하셨던 분임을 보았습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던 그분이 부활하여 살아계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전부터 사랑하고 계시고 자신과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이심을 보았습니다.
그 전까지는 비늘을 뒤집어 쓰고 열심을 다해 헛된 인생을 살았던 자신을
다메섹 도상에서 빛으로 꺾으시고
자신은 알지 못하던 아나니아를 보내시어 눈에서 비늘을 벗겨주시고
자신이 비로소 위를 볼 수 있게 해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 살아계신 주님이심을 보았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통해 그는 영원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땅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았던 사울이
이제는 영원을 보게 되는, 천국과 영원과 영생을 향한 믿음의 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사울이 살아가는 모든 삶의 목적과 가치관은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위에 있는 영원한 천국이 자신의 영원한 나라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죽고 나서 결국 자신이 가게 될 곳은 그곳이며
마지막 날에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완전하게 드러날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이 땅에 사는 사람이었지만
더 이상 이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안에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만난 사건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를 그리스도로 만났다면, 비늘이 벗겨진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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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마17:15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고난/영향 받아)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