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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라 2

LNCK 2024. 6. 4. 10:43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 선지자론

 

2024년06월02일/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라 (2)’ (youtube.com)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라 2 

지난 주에, 요나서를 중심으로 첫 시간을 살펴보았는데, 키워드가 뭐였습니까? 
요나서 도입 부분에서 "노룩 패스" 기억나세요? 

"노룩 패스"란, 축구할 때 시선은 이쪽을 보면셔, 공은 엉뚱한 저쪽으로 패스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수비를 흐트러뜨리는 거죠.

요나서를 읽다 보면, 정확하게 그런 뒤집히는 장면이 몇 군데 소개됩니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라' 해서, 우리는 니느웨가 타켓인 줄 알았어요. 
당연히 그 니느웨도 타켓이 되겠지만, 
그보다 하나님의 1차적인 타켓은, 니느웨 있지 않고, 
바로 이스라엘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요나에게 있었습니다 *이게 노룩패스 같은

니느웨 성에 악독이 가득했던 것처럼, 
이스라엘과 요나는 하나님 앞에 불순종이 가득한 모습을, 지난 주 우리는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내 안에 무너지고 부서져야 될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 부서진 '제로 베이스'라는 터 위에, 
우리의 신앙을 어떻게 새롭게 쌓아가야 되는가? 
이것이 요나서가 갖고 있는, 계속 반복이고 역설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 요나서 두 번째 시간, 욘1:4~10절까지 살펴보겠습니다. 

◑욘1:4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큰 성읍으로 가라'는 명령을 피하니까    :2
하나님께서 큰 바람을 일으키셨습니다.   :4

그러자 그 큰 바람은 큰 폭풍을 몰고 왔습니다. 
어차피 이 길은, 도망갈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손가락 방향은 니느웨 성이었는데 
요나는 전혀 다른 반대쪽의 스페인 방향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값을 지불하고서 어깃장을 놓기 위해서 탑니다. 

요나가 탄 배 위의 장면을,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본격적으로 만나는 겁니다. 

◑욘1:5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여러분 폭풍우를 만난 배를 타 본 적이 있나요? 
폭풍우를 만난 배를 타보지 않으면 말을 하지 마세요. 저는 겪어봤기 때문에 알아요. 

오래 전에, 어느 원로 목사님이 갑자기 제게 전화를 하셔서 
'송목사 한 3일 시간 좀 내지' 

'네, 알겠습니다' 
제가 워낙 존경하던 어르신이었기 때문에 
그분이 오라는 대로 갔더니 거기가 전라남도 토마리라는 곳입니다. *전남 강진군 작천면 

토마리라는 조그마한 항구가 있는데, 거기에 내려가니까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또 제가 그날 따라 하얀 바바리 코트를 입고 갔어요. 

그런데 배를 타래요. 한 서너 사람 타는 작은 배였어요.
그런데 바다가 참 요물입디다. 

처음에 출발할 때는 햇빛도 쨍하고, 바다도 평온해서 출발을 했는데 
갑자기 살랑살랑 바람이 불더니, 구름이 막 몰려오고 비가 때리는데, 
바람이 부니까 파도가 쳐요. 

그런데 조금도 과장 없이 파도가 치니까, 파도가 높이 치면,
그럼 작은 배가 파도를 거슬러 가야 하니까, 배가 거의 80도~90도 수직으로 서는 거예요. 

이런 배 타봤어요.? 타볼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아 이렇게 죽는구나' 싶을 정도로 위기가 왔어요. 

우리가 탄 배도 작고, 더구나 저는 수영도 못하고, 물을 또 너무 싫어해요. 
어릴 적에 '허리케인'이라는 영화를 잘못 봐가지고 
그 물의 위력에 대해서 너무너무 끔찍한 장면이 뇌리에 각인이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요나서 본문의 이 사공들은, 배에 익숙한 사람들이고, 
바다의 생리에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두려움을 가질 정도로 큰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사공들이 두려워해서, 각자 자기 신의 이름을 불렀어요. :5

아마 그 배에 다양한 민족과 인종이 타고 있었나 봅니다. 
원래 그 지역이, 여러 민족이 섞여서 사는 지역이잖아요.

▲그래서 '배'는 결국 오늘 우리에게 뭘 시사해 주는가 하면, 세상의 축소판입니다. 
당시에는 군함이 따로 있고, 상선이 따로 있던 시대가 아니에요. 
여객선이 더더군다나 따로 있던 시대가 아니에요. 

전쟁이 나면, 정부에서 차출을 하면, 그때부터 그 배는 군함이 되는 겁니다. 
그런 정도의 고대 시대이기 때문에, 그 배에는 많은 물건들이 실려 있었어요. 

돈을 벌어서 집에 돌아가려는 꿈을 가지고, 상품과 짐들을 실었을 겁니다. 
전 세계에서 몰려든 다양한 사람들이 탔을 거예요. 
그러니까 각각 자기들의 신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이게 정상 아니겠어요? 
이게 진리는 아닐지라도, 사람이 살아가다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만났을 때 
뭐라도 하나 붙잡으려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에요. 

그러니까 각각 자기 민족들이, 또는 자기 국가가 숭상하는 우상을 향해서 
자기 목숨을 구하고, 생명을 구하는 부르짖음이 일어났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몰라도, 사람들은 세상에서 이렇게 
그냥 나름의 방식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갑니다. 
근데 문제는 거기 해결책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5절을 다시 보시면 이렇게 돼 있어요.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5

심지어 그들은 어떤 결단까지 과감하게 내렸는가 하면, 
자기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돈을 벌려고 쌓아놓았던 모든 상품들, 물건들을 
아깝지만 바다에 내던지는 결단을 합니다. 

그들은 물질적 손해를 각오하고라도, 자기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신들을 부르는 정도를 넘어서서, 발버둥을 쳐요. 

그런데 다시 언급하지만, 여기엔 답이 없다는 거예요. 
이 세상이 살아가는 방식과 똑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의 사고방식으로.. 급하면 무당 불러서 굿도 하고 
점집도 찾아가 보고, 사주풀이도 해보고...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자기 목숨만 살 수 있다면, 천금을 들여서라도 
대가를 지불하는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거기에 답이 있든/ 없든 잘 모르니까요. 

▲그런데 여기 놀라운 아이러니가 감춰져 있어요. 
5b절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정작 요나는, 어떤 의미에서 이 세상의 축소판인 이 배를, 
위기에서 구원해 내야 될 책임을 가진 사람인데, 이 사람은 지금 뭐하고 있어요?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요. 이게 문제예요. 아무것도 안 하고 잠만 자고 있어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죄       주1)

지금 요나는 어떤 의미에서 굉장히 믿음이 좋은 것 같아 보입니다. 
지금 배는 뒤집어질 듯 난리가 났는데, 
배 밑창으로 내려가서 편하게 쿨쿨 자고 있으니까요...

그는 지금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믿음으로 
풍랑이 치는 바다 속에서, 편히 잠을 자고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피하여 멀리 멀리 도망가고 있습니다. 
욥바로 내려가고,  1:3 
배를 탔는데, 배 밑층으로 내려갔습니다. 1:5

그의 인생의 행로는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계속 내려갔어요.
한 술 더 떠서, 배 밑층에서 잠이 들었어요.

잠은, 영적으로, 무능과 무기력을 상징합니다. 
물론 평안해서 잘 수도 있지만, 지금 여기서 요나는
영적으로 둔감해져서 무기력증 가운데서 잠을 자고 있는 거예요. 

그가 탄 배는 지금 풍랑을 만나서, 물건들을 다 바다에 내다버리고,
선원들이 각자 신의 이름을 부르며 난리를 치고, 야단법썩일 때
요나는 '계속 내려가서, 이제 곤히 잠자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에게 던지는 개인적, 시대적 메시지가 있어요. 
교회는 이 세상을 위해서, 지금 뭘 하고 있습니까? 

제가 말씀드리는 교회라는 것은, 저희 삼일교회만 얘기하는 게 아니라, 
지금 죽겠다고 아우성치고, 절규하고, 배가 뒤집힐 것처럼 
곳곳에 전쟁과, 기근과, 가난과, 불균형과, 아비규환 속의 이 세상을 향해서 
교회는/나는 지금 정작 뭘 하고 있는가요? 

오늘 이 메시지 속 요나의 깊이 잠든 상태는, 
우리를 흔들어 깨우는 중요한 도전입니다. 교회는 과연 뭘 하고 있는가요? 

우리 교회가 창립 70주년을 맞이하면서, 
하나님이 우리 교회 비전의 확장과 일환으로, 참 귀한 공간을 지역사회에 주셨습니다. 

이제는 단순한 공간의 의미를 넘어서 
우리는 이 서울 도심 한복판에, 우리 교회를 향한 분명한 시대적 메시지가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걸 이번 특새기간 동안에, 전부 일어나 깨어나서, 
개인적인 깨우침, 교회 공동체적인 역사의 숙제 ... 등을 발견할 수 있어야 돼요. 

깊이 잠든 상태, 
이것이 첫째는 한국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아주 엄중한 질타입니다

◑욘1:6 '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

지금 누가 누구를 깨우고 있어요? 선장은 믿는 사람입니까/ 안 믿는 사람입니까? 
그는 요나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도 사실은 몰라요. 

그런데 지금 '배'라는 공동체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져 있으니까 
밑바닥에서 잠들어 있는 요나 선지자를 깨웁니다. 
'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6
 
이게 왜 역설이냐 하면, 교회가 잠들어 있으면 
그 교회를 깨우기 위해서,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을 이용하세요. 
세상의 상황을 활용하세요. 이게 성도의 큰 아픔입니다.              

교회가 정신 못 차리고, 시대의 빌런 역할을 하고, 
잠들어 있는 것 같은 영적인 무기력증에 빠져 있으면, 
그 세상의 소용돌이를 통해서, 교회를 깨우치게 만듭니다. 참 슬픈 역설이죠. 

그래서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고통, 눈물, 아픔은 
우리와 무관한 게 하나도 없어요. 
하나님이 교회와 성도들을 깨우시는, 고난의 확성기입니다. 
'교회여 일어나라! 성도여 일어나라!' 소리 지르시는 것과 같아요. 

이 장면만 보면, 누가 하나님을 더 잘 믿는지 모르겠어요. 
'자는 자여 어찜이냐?' 선장의 이 말은, '지금 잠이 오냐?' 그 말이에요. 
이 난리통에 '너는 잠이 오냐? 너는 일어나야 된다! 뭐라도 해야 된다!'

이번 주 특새에 여러분들이, 단단한 껍질 안에서 
'평안히 평안하다' 하는 거짓 평안에 속지 말고 
조금 더 영적인 더듬이를 민감하게 조정해서 
이 세상에 가득 메워져 있는 슬픔과, 고난과 고통의 소리에 귀를 열어서 
'내가 깨어 일어나야 될 영역이 어디일까?' 
여기에 눈이 열려지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우리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6
선장이 참 놀라운 이야기를 합니다. 
선지자 요나가 해야 될 말을, 선장이 대신 하고 있습니다.

    이런 우푼 이야기가 있어요.    *우습지만 슬픈 이야기
    어느 상가 건물에 교회가 있었고, 교회 옆에 술집이 있었어요. 
    그래서 목사님이 기도할 때마다 교인들과 함께 
    '저 술집 불이 나게 하든지 없어지든지...' 그렇게 과격하게 기도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 기도에 응답하셨는지, 정말 술집에 불이 났어요. 
    그런데 그 다음에 놀라운 것은, 술집 사장님이 교회 목사님을 고발을 했어요. 
    교회와 목사님이 기도해서 불이 났다는 거죠.

    그래서 재판정에서, 술집 사장은 
    '저 목사와 교인들이 하나님한테 불이 나도록 기도해서, 우리 가게에 불이 났습니다.'
    하면서 손해배상을 청구한 거예요. 

    그러자 목사님이 변론 할 차례인데 뭐라고 대답을 했는가 하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술집 사장과 목사님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하나님을 잘 믿은 거예요? 

    만든 얘기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메시지가 있죠.
    그런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지금 요나가 탄 배 안의 환경과 비슷해요.
선장은 요나에게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라도 좀 해봐라. 왜 잠들어 있냐?' 
오히려 세상 사람들의 그 절규가, 하나님의 선지자를 깨워버려요. 아이러니죠. 

◑욘1:7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아 보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뽑힌지라'

제비는, 고대 세계에서는 문제 해결의 보편적인 방식으로 
어느 민족이건 사용되던 고대의 방식입니다. 
꼭 이스라엘만 제비뽑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세상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어떤 방도라도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어요. 왜요? 
하나님은 자유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그런데 하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제비를 뽑았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든/ 세상의 방법이든 그건 큰 의미가 없어요. 

어쨌든 누가 뽑혔어요? 요나가 뽑혔어요. 요나가 지목이 됐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서 이해를 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그런 방식으로, 세상 사람들의 방식을 통해서 드러내신 겁니다. 
여러분 그럴 때 많아요. 

하나님은 진리를, 꼭 믿는 사람들을 통해서만 드러내질 않고, 
세상에 벌어지는 일,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그분의 진의를 드러내실 때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이 악해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구나' 라는 것을 봅니다.

마찬가지예요. 얼마나 세상이 다 패악스러워집니까? 
인간은 서로를 위한다고 하지만 
고슴도치마냥 가까이 다가가서 껴안을수록, 서로를 찔러대는 것이 인간의 한계예요. 

그래서 '영적인 사회적 거리'라는 것도 때로는 가끔 필요하더라고요. 
너무 문제가 벌어지면,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왔다갔다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게 아니고,
굳이 그럴 필요 없어요. 그때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턱 그 문제를 던지고, 
그분의 시간에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도록 기다리는... 믿음의 싸움이 필요한 겁니다. 

우리가 수선 떨고 분주하게 다니면서 일해 봐야 
또 분탕질만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7절을 다시 보시면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뽑힌지라' 
하나님의 찝어내시는 방식은, 정확하게 찝어내십니다. 

◑욘1:8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하니'

취조하듯 요나를 다그칩니다. 
민족, 출신, 직업를 묻는 질문을 합니다. 

 

개인의 문제가 어디로 확대되고 있어요? 
개인의 문제가 놀랍게도 국가 문제로 확대되고 있어요. 

우리도 말 습관 가운데, 무슨 얘기를 하다가, '고향이 어디야?' 
'경상도다. 왜?' 
'어쩐지... 네가 그럴 줄 알았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표현을 쓰면 안 됩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서, 왜 요나로 하여금, 그렇게 국가적인 문제로까지 이 질문이 확대되냐 하면, 
사실 요나의 문제는, 그게 누구의 문제이기 때문입니까? 
이스라엘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방 사람들의 방식을 통해서, 이 메시지의 본질을, 하나님은 계속 드러냅니다. 
사실은 이 문제가, 요나 개인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개인의 형편에 관한 문제를 뛰어넘기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님이 드러내시고 고발하고자 하는 데 초점이 있는 거예요

이번 특새도 우리가, 이중적 차원에서 말씀을 들어야 됩니다. 
-첫째는 내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개인적)
-두 번째는 그래서 이것이 우리 교회에 어떤 메시지를 주는가?
 또 이 시대 앞에 무슨 과제를 던지는가? (공동체적)

반드시 이중적인 메시지로 우리는 이해할 수 있어야 됩니다. 

◑욘1:9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그가 대답하되'
이 구절은 요나가, 요나서에서 처음으로 입을 여는 대목입니다. 
1:9절에서 요나가 처음으로 입을 열어요. 

1)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보통 구약에서도 '히브리 사람'이라는 표현을 흔하게 쓰지 않습니다. 
보통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표현을 흔하게 쓰죠. 

그런데 오늘 요나서의 표현처럼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라고 할 때는 
공식이 있어요. 

이방인과는 다른,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리들, 민족과는 다른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할 때 
'나는 히브리 사람이다' 라는 표현을 써요. 

사도마을도 그 표현을 썼죠. '나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그럴 때 쓰는 겁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과 차별화를 통해 
자기의 정체성을 선명하게 말하고자 할 때, '히브리인이요' 라는 표현을 쓰죠.

지금 요나가 '나는 히브리 사람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이방 사람들에 대비해서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고 싶었던 겁니다. 

2) 그런데 두 번째 자기소개를 어떻게 하느냐? 9절을 보면 이렇게 하고 있어요.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9

두 번째는 창조주 하나님을 강조하면서, 
자기는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소개를 했어요. 

경외한다는 것은, 히브리인들의 개념 속에는 어떤 의미인가 하면 
'나는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온전히 순종한다'는 자기 고백이고, 자기 선언이에요. 

이 또한 얼마나 역설입니까? 
지금 이 배 안의 상황과, 배가 다시스로 가다가 
요나 자기 때문에 큰 풍랑을 겪고, 모두가 지금 죽기 직전에 있어요. 

그런데 그 한복판에 배 밑에서 쿨쿨 잠에 빠져있던 요나가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하늘과 땅과 바다를 만드신 
그 창조주 하나님을 나는 경애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말해버린 거예요. 

이것은 역설입니다!
우리도 세상에 속해 살면서, 입술로는 멋지게 명분적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이런 고백을 해요. '나는 어느 교회의 누굽니다' 떳떳이 자기 직분을 밝히기도 해요. 

그런데 우리가 윗사람한테는 다 잘하잖아요. 지문이 닳도록 잘하는데, 
우리가 아랫사람들한테는 빌런이 되어가지고 
아랫사람들이 모이면 '부장님은 어느 교회에 다니신다는데...'

이렇게 직장에서 조롱거리가 되어버리는...

입술의 고백과 삶의 자리가 전혀 다른 모습을, 요나 스스로가 드러내고 있어요. 
우리 각자도 비슷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떠나서, 잠에 빠져 있을 때!

본문은 지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1:10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선지자가, 세상 사람들에게 야단을 맞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을 무시하고, 
하나님이 가라 하신 방향과는 어깃장을 내고 정반대로 도망가는 배에 올라 있어요. 

그런데 그 하나님을, 선장과 뱃사람들은 두려워하고 있어요. 
선지자는 전혀 무시하고 있는데... 그래서 환난 가운데서도 잠을 자고 있는데...
이것이 오늘 우리 개인과, 이 시대의 교회의 역할에 대해서 고발하는 메시지입니다. 

여러분, 이번 52차 특새를 통해서 
우리 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단단한 껍질을 부서뜨리고 일어나는 
6월이 되고, 특새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그 일어남을 통해서, 우리가 가던 방향을 멈추고 돌아서서 
하나님이 우리 개인과, 남은 삶에 주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프로젝트 앞에 동참되는 
순종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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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죄'

나치에 저항했던 마르틴 니묄러(1892~1984) 목사는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라는 시(詩)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그 다음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기에.
  
그 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에.

그 다음에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니묄러를 위해 말해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강제수용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