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질수록 빛이 난다 | 24.5.31 (youtube.com)
◈깨어질수록 빛이 난다 고후4:7~11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본문입니다. 질그릇의 얘기가 나와요.
질그릇 요즘은 질그릇을 보기가 힘들죠. 질그릇은 없습니다.
흙으로 만든 도자기 같은 것들, 유약을 바르지 않아서 표면이 거칠죠.
고대사회에는 그릇이 대부분 질그릇이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질그릇의 비유가 몇 곳 나옵니다.
이사야 45:9절을 보면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이와 더불어 다툴 진대
화 있을 진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또는 내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까 인간을 질그릇으로, 하나님을 토기장이로 비유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에덴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흙으로 지으셨죠.
그러니까 아담의 본래 성분은 흙이에요.
'아담'이라는 말 안에도 '흙, 먼지, 티끌'이라는 의미도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흙으로 빚어 만들고, 다시 흙으로 돌아갑니다.
사람이 죽고 나서 묻으면 흙이 돼버려요.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를 질그릇으로 비유한 거죠.
그런데 여러분 질그릇은 뭐죠? 우리가 잘 알 수 있는 것처럼 약합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그릇이기 때문에, 쉽게 깨어진다는 것이죠. 쉽게 깨어져요.
쉽게 금이 가버리고, 그리고 깨어지면 원상 회복이 쉽지 않아요.
사실 우리의 인생이 굉장히 약한 존재라는 거죠. 한 순간에 탁 깨어져요.
우리의 감정도 잘 깨어져요. 그죠? 누가 한마디만 해도.. 악플 하나에 자살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 정도로 약한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의 감정도 잘 깨지고, 우리의 의지도 잘 깨져요.
주먹을 쥐고 이래도... 그 의지가 오래 안갑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질그릇 같고, 잘 깨어집니다.
▲여러분이 여행을 다니면 여행가방을 가지고 다니잖아요.
여행가방에 깨지는 게 들어 있으면, 가방에다 "Fragile" 이란 스티커를 붙입니다.
깨지는 물품이 가방 속에 들어있으니, 함부로 다루지 말아 주십시오... 라는 표시죠.
우리도 사실 어깨에다 그런 거 하나씩 붙이고 다녀야 돼요. "깨지기 쉬움" 또는 "취급 주의"
그리고 이 질그릇은 보잘 것이 없습니다. 허드레 용으로 쓰는 겁니다.
흙은 어디나 있잖아요. 아무나 흙을 모아서 만들면 되는 거예요.
보잘것이 없기 때문에 전시용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막쓰는 그릇이에요.
흙은 흔한 재료죠. 금과 은과는 다르잖아요. 금그릇, 은그릇은 귀하죠.
그런데 흙, 이 질그릇은 어디나 구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질그릇이 되고 싶지 않아, 난 금그릇이 되고 싶어! 멋지고 화려한 그릇이 되고 싶다!'
이목을 집중시키고 싶어 하죠.
요즘 '달항아리'라는 게 있거든요. 작가들이 만든 달항아리는 값이 어마어마해요.
그런 거 보면 자태나 용모가 대단해요.
최근에도 한 달 전인가 가서, 유명한 작가가 만든 달항아리를 감상을 했는데 어메이징이에요.
그 무늬와 그 빛깔, 거기서 나오는 자태가 멋있어요.
또 금이나 은으로 만드는 그런 그릇이 되고 싶은 거죠. 멋지고 화려한 그릇이 되고 싶은 거죠.
이목을 집중시키고 싶은 거죠.
질그릇은 뭐 그릇 자체가 자랑할 게 아무것도 없는 거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이 질그릇이라는 말은, 이 그릇 자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만든 게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이 질그릇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 .. 하는 거죠.
여러분, 그릇의 용도는 내용물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그릇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뭘 담고 있느냐 ... 이게 더 중요하다는 거죠.
여러분, 중요한 것은, 질그릇에 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이제 컵이 하나 있습니다. 이 안에 물이 들어있어요.
그래서 이걸 물컵이라고 그러죠.
이게 사기로 된 것 같은데, '사기컵' 이렇게 부르지 않아요. '물컵'이라고 불러요.
커피가 담겼으면 '커피잔'이라고 그러죠.
술이 들어있으면 '술잔'이고요.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 그 내용물에 따라서 다르게 불려진다는 거예요.
자 만약에 여러분, 그릇 자체로 승부를 건다면
그 모양의 모든 것, 또 재질에 모든 걸 걸어야 돼요. 그죠?
사실 보면 세상은 이 그릇 싸움이에요.
자기 자신을 과시하고, 드러내고, 증명하고, 표현하고, 자랑하는... 그런 문화예요.
어디를 가나 경쟁을 합니다. 실력 경쟁을 합니다. '누가 더 뛰어난가?'
오늘 세상은 경쟁의 세상입니다. 외모를 가지고도 경쟁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막 성형수술도 하잖아요.
학력 경쟁을 하고, 능력 평가를 하고, 성적을 내고...
그래서 우리는 세상 속에서 금그릇이 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이기기 위해서 전력질주를 합니다.
세상이 싸움판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거죠.
그릇 싸움이라는 거죠. 어떤 그릇이냐는 거죠.
금이냐, 다이아몬드냐, 크리스탈이냐... 이 그릇에 모든 걸 거는 거죠.
그런데 여러분 성경은 그릇 싸움이 아니에요.
성경의 싸움은, 내가 어떤 그릇으로 포장하고, 만들고, 드러낼 것인가의 싸움이 아니고
성경 오늘 본문의 얘기는 내용의 싸움이에요.
내가 어떤 조건과, 어떤 실력과, 능력을 갖추고 있느냐의 싸움이 아니고
내 안에 뭘 담고 있느냐의 싸움이에요.
아무리 그릇이 대단해도, 무엇을 담고 있느냐로 결정된다는 거예요.
이렇게 오늘도 여기 물겁이, 사기 재질이지만
이 사기에 관한 재질을 따지는 게 아니고,
이 안에 뭘 담고 있느냐가 중요하죠.
그 담고 있는 것에 의해서 이 컵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거예요.
이건 물을 담는 물컵이죠.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은 우리가 질그릇이라고 말합니다.
그릇 자체는 볼품 없고, 잘 깨지는데,
문제는 '보배를 담은 질그릇'이라는 거예요.
이게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질그릇과 보배는 서로 안 어울려요. 안 어울리는 조합이에요.
질그릇은 천하잖아요. 흔한 거잖아요.
보배는 뭐예요? 그야말로 보배예요.
그런데 천한 질그릇인데, 보배를 담고 있다는 거예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지금 일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질그릇이고 보배를 담았다는 거예요.
그 보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거죠.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4:7
그러니까 '내가 질그릇이냐/ 아니냐' 이게 중요하지 않고
'우리 안에 뭘 담고 있느냐'의 문제라는 거죠.
'심히 큰 능력이 하나님에게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조건과 상황이 중요한 게 아니고, 우리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
그래서 보배를 담은 질그릇이라고, 질그릇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에요.
당장 질그릇이 금으로 변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질그릇은 질그릇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은 뭘 의미합니까?
보배를 담았다고, 당장 내가 질그릇이기를 거부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질그릇이어야 된다는 거죠.
중요한 것은, 그 질그릇에 보배를 담았기 때문에
질그릇의 목적이 뭐냐? 그 담고 있는 보배를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란 거죠.
자 그러면 '내 안에 있는 보배가 어떻게 밖으로 드러나느냐?'
그 질그릇의 특징이 뭐예요? 깨어진다는 거예요.
잘 깨어지기 때문에, 그 깨어진 틈 사이로 보배가 드러나는 거예요.
안 깨어지면... 완벽하게 아주 그냥 단단한 금으로 되어진 그런 그릇이라면,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알 길이 없어요.
깨어지면서...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가가 보이기 시작한다는 거예요.
이게 질그릇의 쓰임새라는 거예요. 깨어진 틈 사이로 보배가 보인다는 거예요.
깨어진 틈새로, 보배의 광채가 스며나오는 거예요.
여러분 질그릇은,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뽐낼 수가 없습니다.
근데 깨어지는 순간, 그 깨어진 틈 사이로 보배가 드러나는 거예요. 빛이 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안에 보배를 담고 있기 때문에, 깨어지는 것을 질그릇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다르게 표현하면... 깨어질수록 좋아요.
그릇이 깨어지지 않는 금속이라면, 안에 있는 보배는 결코 볼 수가 없어요.
그릇은 무엇을 담느냐로 결정된다고 했어요.
바울은, 질그릇과 같은 우리 자신이, 보배 되신 그리스도를 담고 있다고 말해요.
여러분, 깨어진 질그릇이기에, 보배가 빛이 나는 거예요. 역설이에요.
▲근데 여러분 우리는 어때요? 깨어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그렇지 않아요. 우리는 실패하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 길을 걸어가다 보면, 실패하게 되고, 넘어지게 되고, 또 과오를 범하게 되죠.
얼마나 많이 깨어지고 또 깨어집니까? 그야말로 우리는 질그릇과 같은 인생이에요.
우리는 실력을 쌓고, 또 성공적인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우리는 완벽한 삶을 살고 싶어해요.
여러분, 완벽주의자들이 있죠.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사람들.
그들은 무엇을 하든지 최선을 다 해요.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고,
뭐 그냥 조금의 오차도 없이, 결함이 없이... 그렇게 살기를 원해요.
여러분, 완벽주의자가 아니라도, 우리는 실수를 잘 용납하지 않아요.
실패를 두려워 해요. 과거의 실패를 부끄러워하고 감추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멋지게 포장하고 싶어하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 소그룹에서 나눌 때, 옛날 과거의 약한 모습을 구태여 꺼내고 싶지 않는 분들이 많죠.
근사한 얘기만 하고 싶어합니다. 멋진 그릇에 멋진 보배를 담고 싶어 하는 거예요.
여러분, 크리스탈 그릇에 다이아몬드를 담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게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아요?
우리는 생각하기를 '나도 좋고, 하나님도 좋으면, 최상이지 않을까?'
사람앞에서는 물론 하나님 앞에서도 우리는 폼나고 싶어 하는 거예요.
여러분 어디를 가나 이력서가 그렇게 중요하잖아요. 그렇죠?
스펙이 너무너무 중요한 거예요. 멋진 스펙을 만들고 싶어해요.
우리는 내가 질그릇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다이아몬드로 된 그릇이나, 하다 못해 본 차이나 정도를 원해요!'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내가 어느 정도의 수준이 되어야 된다고 우리는 생각해요.
▲근데 여러분 성경을 보면, 절대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 모세를 하나님이 언제 부르셨습니까?
모세가 왕실에서 귀족으로,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있을 때는, 그야말로 그는 금수저예요.
근데 하나님이 그때는 모세를 안 부르세요. 그때야말로 다이아몬드죠.
근데 여러분 40년 광야를 지내고 나니까, 그는 완전히 깨어진 그릇이에요.
볼품이 완전히 없어요. 40년 동안 완전히 처가살이하면서
광야에 묻혀서 양들을 치는데, 멋진 모습은 하나도 없어요. 자랑할 거는 하나도 안 보여요.
하나님 만나니까, 하나님이 불꽃 가운데 나타나시니까
'나는 혀가 둔해서 말도 못합니다' 이래요. 버벅거리고 그래요.
자신감이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까 40년 광야를 지나다보니까, 완전히 흙수저가 됐어요.
그 기세 등등하던 바로의 공주의 아들의 그 기세가 없어요. 완전히 깨어져 있는 거죠.
그래서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자연인 그대로예요.
요즘 TV에 보면, 산속에 사는 자연인 할아버지 나오죠?
완전 그 모습이에요. 깨어진 그릇이에요.
여러분 하나님은 질그릇을 쓰기 원하신다는 거예요. 아니 질그릇이어야 돼요.
근데 우린 착각하는 거죠. 내가 질그릇이기를 거부하는 거죠.
여러분 세상을 보세요. 흙수저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할 수 없어 흙수저지... 할 수만 있다면 금수저이고 싶잖아요.
우리는 특별하고 싶어요. 어떻게 해서든 좀 더 화려한 삶을 살고 싶은 거죠.
그런데 여러분, 성경적 관점에 우리는 눈을 떠야 돼요.
우리는 그릇이 보배냐/ 아니냐를 따지는 거예요.
그러나 무슨 그릇이냐는 중요한 주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릇에 집중하는 것 자체가 핵심에서 벗어났다는 거예요.
그릇이 아니라 그 그릇 속에 담는 것이 핵심이에요.
우리는 질그릇과 같고, 우리는 연약한 인생입니다.
아무리 세상적인 것들로 치장을 해놓아도, 질그릇이라는 거예요.
뭐 세상적으로 보기에는 대단해 보여도, 질그릇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공을 해도 질그릇이라는 거죠.
재질 자체가 흙이고, 쉽게 깨어진다는 것입니다.
고난이 한번 닥치면, 여러분 다 깨져버려요. 질병이 찾아오면 다 깨져버려요.
그 대단한 위용을 가지고, 대단한 자존심을 가지고 있다는데요.
질병이 찾아오고, 노화가 오면... 그냥 막 (질그릇처럼) 깨져버려요.
예기치 않는 사건이 한번 밀어닥치면, 와장창 깨져요.
붙들고 자랑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여러분 욥을 보세요. 욥기 1장을 보면, 그는 진짜 다이아몬드 같아요. 멋있어요.
의로운 자고,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에요.
근데 여러분, 고난이 한 번 밀어닥치니까 어때요? 망가질 대로 망가집니다.
다 망가지죠. 완전히 망가지잖아요. 자랑할 게 하나도 없어요.
친구들이 막 흔들어대고.. 그냥 뭐 고난 속에 있는데,
친구들이 그냥 비난까지 하니까, 뭉개지고 깨어지고 막 나중에 너덜너덜해져요.
욥은 혼란 속에 빠집니다. 어둠 속에 갇혀버려요.
그 깊은 고통을 통과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요.
실패로 인해 깨어진 그릇이 되는 거죠.
근데 그 고통 속에서 '내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하나님?'
욥은 영혼의 어두운 밤 시간을 지나게 돼요. 근데 나중에 놀라운 고백을 하죠.
'전에는 내가 귀로만 들었지만, 이제는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하나님이 선명하게 보이는 거죠.
옛날에 내가 중요했어요. 욥이 자신의 인생을 너무 자랑스럽게 생각했겠죠.
내가 왜 이런 고난을 당하냐는 거죠.
그런데 고난을 통하여, 그의 모든 자랑들이 다 날아가 버리죠.
그리고 그 인생이. 깨어진 그 틈 사이로, 하나님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깜깜한데.. 그 어둠과 침묵 속에서, 하나님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결국 뭐에요? 욥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깨달아요.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드러나고, 하나님이 아니면, 욥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그는 흙으로 돌아갈 존재예요.
그래서 욥1: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흙으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간다는 얘기를 한 거잖아요.
하나님은 고통 속에서 우리를 낮추세요.
여러분, 우리는 스스로 낮추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이 무슨 재미로 살아요?
다 올라가는 재미로 살아요.
▲세상은 사다리 타기잖아요. 전부 다 사다리를 타고 어디론가 올라가는 거예요.
그야말로 이게 뭐예요? '고지론'이라는 겁니다.
고지론이 뭐예요? 기독교인이 정상을 정복하자는 거예요.
우리 기독교 안에서도 승리주의자들이 있어요. '정상에서 만나자, 고지를 정복하자'
이게 기독교 안에 있는 승리주의자들의 구호예요.
그래서 여러분 성경의 인물을 빌어서 '무슨 학습법, 다니엘 학습법'
다 그게 고지론에서 나온 거예요. 모두 정상을 차지하려고 목숨을 거는 거죠.
'하나님을 잘 섬기려면 힘을 가져야 된다'는 논리죠. 이게 전부 다 뭐예요?
질그릇이기를 거부하는 거죠.
내가 백자인가, 청자인가? 그릇 싸움인 거죠.
그래서 비교하고 경쟁하고, 그 경쟁에서 실패하면 절망감에 빠지고, 열등감에 사로잡히고
이기면 그 우울감에 빠져서 살아가죠.
여러분 우리는 질그릇이에요. 질그릇이 자랑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만약 자랑한다면 딱 하나밖에 없어요. 잘 깨어지는 질그릇!
그래서 질그릇은 무엇을 담아야 합니까? 담으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비워야 돼요. 무엇인가로 꽉 차 있으면 담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우리의 자아로 가득찬 곳에는, 그리스도를 모실 수가 없는 거죠.
여러분 교만한 사람은, 잘 안 깨어지려고 해요.
왜요? 우리 안에 있는 자존심이에요.
여러분 죽을 때까지 자존심이 안 깨져요.
여러분 인간에게 이 교만은, 치유되지 않는 고질병이에요. 안 고쳐져요.
아마 죽을 때까지 이건 극복이 안 돼요. 이 교만이라는 것!
▲여러분, 본능적으로 겸손한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워요.
굉장한 고난을 통하여 시련을 통과하면서..
어마어마하게 그 교만 때문에, 하나님이 고통을 통하여 그를 갈고 갈고 닦아서
겨우 겸손해지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겸손 안 해요.
그냥 제자 훈련해가지고는 겸손이 안 돼요.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결코 인정하지 않아요.
틈을 보이질 않고, 작은 실수에도 그냥 괴로워하고...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연약한 존재들이에요. 고통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삶의 고통은, 우리의 자랑을 다 흔들어 놓죠. 바닥을 치게 해요.
여러분, 평소에 우리는 바닥을 잘 안 봅니다. 위만 쳐다보고 다니는 거죠.
그러나 여러분, 인생이 바닥을 칠 때, 그 낮은 곳에서 자신이 붙들게 없다는 걸 발견하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깨어질 때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고통 속에서 자신이 자랑하던 것들을 내던지게 되는 거예요. '아 이거 쓸데없는 거구나...'
그때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중요하다는 걸 절감하는 거죠.
내가 스스로 깨어지는 사람은 없어요.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 우리를 깨뜨리시는 것.. 그 깨어짐이 축복이에요.
그 깨어짐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돼요.
그래서 우리의 입술에서 나오는 고백이 뭡니까? '하나님 없이는 내가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난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이거는 그냥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고, 진심어린 고백이어야 돼요.
우리는 우리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드러나야 되고, 내가 이겨야 되고, 내가 잘 돼야 되고... 아니에요.
하나님이 드러나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연약한 그릇'이란 말은 뭘까요?
우리는 쉽게 죄를 짓는 사람들이라는 거죠. 우리는 매 순간 넘어져요. 매 순간 실수예요.
우리는 의로울 수가 없어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때가 없습니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아요. 한순간 유혹에 넘어가고요.
그토록 대단해 보이지만, 한순간에 무너지고, 한순간에 죄 짓고,
멋진 그릇으로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면 허약한 거예요.
여러분 다윗 왕을 보십시오. 왕이 된 다윗은 겉으로는 완벽하죠. 금그릇이에요. 화려하잖아요.
여러분 여러분 성경에 다윗 만큼 멋지게 숭상할 만한 사람이 없어요.
근데 무슨 사건이 일어납니까? 밧세바 사건이 일어났죠.
여러분 다윗은 선왕입니다. 이스라엘의 절대적 기준입니다.
어떤 왕들과 비교불가 예요.
그는 어린 시절부터 감(수)성이 탁월했고요. 그래서 시를 많이 지었죠.
골리앗 앞에 나갔던 그 어린 소년의 그 모습, 그 믿음, 그 담대함...
사울이 자기를 그렇게 미워하고 죽이려고 해도, 정말 사울을 상해, 가해하지 않는
그런 성숙한 믿음을 지켜내요. 멋있어요. 여러분 다윗은 정말 금그릇과 같아요.
근데 여러분 밧세바 사건이 터지잖아요. 그도 질그릇이에요.
질그릇이라서 한순간에 무너지잖아요. 그 여인의 목욕하는 장면에 한순간에 무너지는 겁니다.
그렇게 승승장구 하고, 이스라엘에 존경받는 왕이었어요.
하나님과의 친밀함이라면, 다윗을 넘어갈 사람이 없었어요. 근데 한순간에 깨져버려요.
박살이 난 거예요.
나중에 여러분 어떻게 해요?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회복을 구하잖아요.
사람은 죄의 유혹 앞에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어요.
여러분, 죄를 짓는 순간 우리는 깨져요. 우리의 마음이 깨져버려요.
여러분 누군가를 미워해보세요. 내 마음이 깨진 (질그릇) 상태예요.
분노해보세요. 내가 깨진 (질그릇) 상태예요.
어떤 탐욕을 가지잖아요. 그게 이미 내 정신과 마음이 다 깨진 상태예요. 줄줄줄줄 새는 거예요.
모든 게 다 새 버리는 거예요.
몸과 마음이 무너지고요. 그 죄로 인하여 다윗은 나단 선지자가 찾아올 때까지
1년의 기간 동안에 그는 끙끙 앓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죽하면 여러분, 나단이 찾아왔을 때, 나단 칼로 베어버리면 돼요.
왜요? 그는 전쟁에 나가서 수없이 사람을 죽였어요.
나단 한 명 죽이면 끝나는 거거든요.
근데 그 앞에 무릎을 꿇잖아요. 내가 죄인이라고...
그 죄가 자기를 얼마나 짓눌렀는지요.
삶이 다 엉켜버렸잖아요. 기쁨이 없어버려요. 그러니까 헤매는 거잖아요.
왕이면 뭐합니까? 왕이면 뭐해요? '본차이나'면 뭐해요?
사람은 그냥 질그릇이라는 거죠. 형편없는 모습으로 깨어집니다.
우리에게는 의로움이 없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아무리 죄를 덮으려고 해도 안 돼요.
하나님 앞에 숨길 수도 없어요.
▲그래서 여러분, 사람들이 하는 게 뭘까요? 깨어진 것을 거부하는 거예요.
깨어진 것을 인정 안 하는 거예요. 나의 약함을 부정하는 거예요.
그래서 뭐가 나오죠? 위선이 나오는 거예요. 고상하게 자기를 자꾸 포장하는 거예요.
종교적인 열심으로 포장하는 거예요. 가면을 쓰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가면이 자꾸 늘어요.
자신이 질그릇 임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거예요.
'나는 깨어진 자입니다' 라고 고백해야 되는 거예요. 자꾸 땜질하지 말라는 거예요.
깨어진 걸 땜질하지 말라는 거예요.
깨어진 것을 고백하고,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거죠.
깨어진 것 때문에 우리가 망하지 않아요.
깨어진 것을 깨어졌다고 인정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게 되죠.
여러분 우리의 죄가 드러날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더 부각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실패로 하나님의 사랑이 더 빛이 나잖아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전혀 쓸모없는 질그릇이 되고 말아요.
그래서 우리가 넘어지고, 깨어지고, 망할 수밖에 없지만
우리가 망하지 않는 것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망하지 않는 것은
내 안에 계신 보배 되신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붙들어야 될 것은, 그분을 붙들는 것이죠.
우리의 의로움이나, 우리의 어떤 자랑이나, 우리가 만들어낸 어떤 업적이 아니라는 거죠.
우리 안에 계신 분이 누구냐?
우리가 넘어지고 실패할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붙들어주시길 원하시고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죠.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하나같이 질그릇들이에요.
실수투성이고요. 주제 파악을 못하잖아요.
제자로 막 부름을 받고, 오병이어 사건이 일어나고 이럴 때는
자기들이 막 금그릇이 된 줄 알아요.
'이제 예수님을 따라다니니까 수지 맞는구나'
막 기적을 행하고 따라다니니까 얼마나 신났겠어요?
오병이어의 사건때 보십시오. 벳세대 들판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떡을 나눠주게 했어요.
제자들이 막 떡을 떼는데, 떡이 계속 나오니까 얼마나 신이 났겠어요? 막 흥분되는 거예요.
'이제 고생 끝났다. 이제 이스라엘은 접수한다.' 이렇게 했겠죠.
여러분, 제자들끼리 왜 키재기를 해요? 왜 경쟁을 해요?
자기들이 금그릇이 된 줄로 안 거죠.
얼마나 연약한 질그릇임을 인정하지 않았던 거죠.
결국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다 도망가 버리고 말았어요.
깨질 대로 깨지고, 질그릇 중에 질그릇임을 다시 확인한 거죠.
▲그런데 그 질그릇과 같이 깨어진 그들을, 주님이 다시 디베랴 바닷가에서 찾아와 주시죠.
깨어진 그릇을 그대로 버리지 않으시고, 상처를 싸매어 주시고,
그 제자들의 실수를 통하여, 주님의 사랑이 더 빛이 나죠.
그래서 디베라 바닷가에서의 그 아름다운 장면,
주님이 다시 찾아오셔서 베드로를 다시 일으키시는 그 장면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영롱하게 빛이 나는지 몰라요.
우리가 실패할수록, 하나님의 성품은 더 두드러지는 거죠.
여러분 구원은 누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까? 전적인 무난함을 인정해야 돼요.
'나는 죄에 관한한 무기력한 존재다.'
그래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거예요.
우리의 노력이나 우리의 열심으로는 불가능해요.
여러분 신앙생활 열심히 하는 거 좋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할수록, 내가 더 높아지고, 더 의로워지면 안 돼요.
신앙생활 하면 할수록 자랑이 많아지면... 안 돼요.
신앙생활 하면 할수록 더 절실히... 주님이 필요해야 돼요.
신앙생활 초기보다, 신앙생활을 오래 할수록... 십자가가 더 절실해야 돼요.
십자가는 예수 믿기 시작한 초신자들이나 필요한 것으로 생각하면 안 돼요.
여러분, 신앙의 초기에는 아직 복음의 내용을 모르고, 내가 얼마나 죄인인가도 몰라요.
그래서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하기에는 아직도 초입이에요.
그러나 복음에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내가 누구인가가 더 부각돼요.
얼마나 질그릇 같은 존재인지...
내가 나를 믿을 수가 없어요.
한순간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존재할 수 없는 나!
내 힘으로 설 수 없다 라는 것을 진실하게 인정할 때, 십자가의 은혜가 있는 거예요.
여러분 매일 십자가를 묵상하셔야 돼요. 우리는 매일 십자가가 필요해요.
여러분, 깨어질수록 더 좋습니다. 아니 우리는 날마다 깨어져야 돼요.
우리가 우리 인생을 책임질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거죠.
여러분, 누가 자신의 연약함을 기꺼이 드러낼 수 있습니까?
내 안에 보배를 담고 있는 사람이에요.
보배를 발견한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을 감추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깨어짐을 통하여, 보배 대신 그리스도가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에요.
▲신앙은 내 안에 계신 분이 누구인가를 아는 싸움이에요.
우리 인생은 내가 얼마나 똑똑한가, 얼마나 실력을 갖췄는가.. 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요.
'내가 믿는 하나님을 얼마나 더 신뢰하고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거예요.
여러분 나를 드러내고자 하는 싸움을 멈춰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담은 그릇이어야 합니다.
내가 모신 예수를 능가하는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얼마나 인정하고 살아가느냐가, 우리의 삶의 질을 결정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리스도를 붙들 때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요?
고후4:8~9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망하지 않는 것은, 내 안에 대신 그리스도 때문이다는 거예요.
나를 붙들면 안 돼요. 나를 드러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내가 나를 드러내면, 그 깨어진 그릇밖에 보일 수가 없어요.
내가 깨어짐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면 되는 거죠.
여러분 간증들을 보면, 대체적으로 자신을 드러낼 때가 많아요.
'그래서 예수님 때문에 내가 잘 됐다' ... 이런 얘기로 가면 안 돼요.
진짜 간증은 뭐냐? 진짜 간증은, 나를 깨뜨리고 예수를 드러내는 거예요.
그게 가장 안전한 간증이에요.
그런데 이게 어려워요. 바울은 예수를 발견한 이후에
자신의 모든 과거의 자랑을 완전히 버리잖아요.
여러분, 바울은 그 자랑거리들이 많아요. 많아 굉장히 많아요.
근데 예수를 발견하고 난 다음에, 그 예수 그리스도 얻었기 때문에
그 예수 그리스도의 그 영광스러움에, 내가 가지고 있는 과거의 자랑과 영광은
이건 진짜 쓰레기, 배설물과 같다는 거예요. 말하고 싶지도 않은 거예요.
보배 되신 예수를 만나면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 그리스도보다 더 드러내고 자랑하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어요.
▲여러분 오늘 이 메시지는 뭐예요?
이제 우리는 우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인생이 된 거예요.
우리만으로만 존재해 있다면, 나 혼자로만 존재한다면... 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세상적으로 왕이 됐든, 장관이 됐든, 국회의원이 됐든...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리스도를 빼고는 우리의 삶이 설명이 안 되는 거예요.
바싹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 하나로, 뭘 자랑할 게 어디 있겠어요?
그 안에 보별을 담고 있으니까.. 비로소 보배 자랑이 가능한 거죠.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거예요.
그게 바울의 논점이에요. 바울서신을 보면 철저해요,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것!
그리스도가 우리의 이야기의 핵심이에요.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의 전부예요.
그리스도가 우리의 자랑의 모든 것이에요. 그걸 하고 나면요,
누가 크냐/ 누가 작냐 ... 아무 의미가 없어요.
누가 잘났냐/ 못났냐 ... 아무 의미 없는 싸움이에요. 유치찬란한 거예요.
여러분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가 가진 무엇이 아닙니다.
내가 얻어낸, 획득해낸, 쌓아놓은 어떤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대단한 걸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삶을 결정하지 않아요.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여러분 우리가 인간적으로 잘 나갈 때는, 질그릇 속 예수가 잘 안 보여요.
우리가 인간적으로 성공하고, 잘 나가고, 막 사다리 타고 올라갈 때는, 예수님이 안 보여요.
그런데 언제 예수님이 보인 줄 아세요?
내 인생에 가장 비참한 순간에만 보이는 그리스도가 있어요.
그때 만난 예수가, 내 인생을 비춰주는 거예요. 희한해요.
깨어진 그릇인데 아름다워요.
여러분 희한하게, 그 깨어진 텀새로 예수의 광채가 새어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그 그릇이 예쁜 거예요. 어떻게 그렇게 못생기고 투박한 그릇인데,
그렇게 아름다운 빛이 새어나올까요?
인생의 가장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거예요.
고후4: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복음을 위해 살아갈 때,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정말 나는 죽음에 넘겨지지만,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요.
예수의 생명이 우리에게서 나타난다는 거예요.
질그릇은 깨어져야 진가를 발휘해요. 깨어져야 그 틈 사이로 보배가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안 깨지려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안 깨지는 완벽한 그릇이 되고 싶어해요.
멋진 그릇이 되고 싶어해요. 내 그릇의 외모가 멋져야 된다고 해요.
▲여러분, 우리의 삶이 깨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아무리 안 깨어지려고 해도...
그때가 중요해요. 여러분, 어떤 의미에서 실패가 중요해요.
세상은 성공이 중요하다고 말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실패가 중요해요.
멋있게 실패하셔야 돼요. 멋있게 실패하셔야 돼요.
반쯤 실패하면 완전히 엉망이에요.
그 실패를 통해서 하나님을 붙들어야 되는 거죠.
여러분, 실패를 모르는 사람은 위험해요. 위험한 사람이에요.
여러분, 삶이 뒤엉키고 혼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비로소 손을 내밀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성공할 때 부르시지 않아요. 아니 우리를 불러도 그 음성을 못 들어요.
그래서 여러분, 베드로가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는데
하나도 잡은 것이 없지만... 라고 고백할 그 때, 그 절망, 그 실패의 순간에
주님이 딱 그를 만나러 오시잖아요.
그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 하니까... 그 말이 귀에 들어오는 거예요.
그냥 뭐 자기가 성공하고, 그냥 자기가 원하는 대로 고기를 듬뿍 잡았더라면
예수님의 그 말을 들었겠어요?
바울이 그러잖아요. '내가 약할 때 강함이라!' 패러독스를 얘기하는 거예요.
이건 세상과 전혀 다른 원리를 말하는 거예요.
여러분 여기서 매우 중요한 논리는 뭐냐?
그릇과 보배는 함께 존재한다는 거예요. 분리되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질그릇이지만, 그 질그릇과 보배가 공존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질그릇과 같은 인생이에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보배를 담고 있어요.
우리가 이 보배를 담고 있기 때문에,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내가 우겨싸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엎드려져도 망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왜요? 내 안에 보배를 안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이 보배를 놓치면 안 돼요.
내가 깨어진다... 그건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요.
그릇을 강화하기 위해서, 내가 내 자존심을 더 강화할 필요도 없어요.
여러분 오늘날 세상의 사람들이, 고통하고 절망하고 우울해하는 이유가 뭐예요?
자신에 대한 가치감, 자존감이 없는 거예요. 자존감이 너무 떨어진 거예요.
자기 존재의 가치를, 자기의 힘으로는 높일 수가 없는 거잖아요.
여러분, 이 비교하는 문화 속에서, 내가 아무리 내 존재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별짓을 다 해도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또 나타나잖아요. 그러니까 깨깽하잖아요.
여러분 오늘 우리 자신을 분명히 해야 돼요. 껍데기 싸움을 하면, 우리는 세상에 지게 돼 있어요.
내용의 싸움을 해야 돼요. 컨텐츠의 싸움, 내가 무엇을 담고 있느냐는 거예요.
정말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담고 있느냐는 거예요.
여러분 내가 보배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담고 있다면,
우리가 드러내고 싶은 것은 한 분이어야 돼요.
여기에서 이율배반적으로 하면 안 돼요.
내가 전시하고 싶은 것은, 내 자신이 아니란 말이에요.
내 안에 계신 그분이라는 거죠. 나를 자랑하면 헛자랑이에요.
금방 망가지고, 사라지고, 훅 하고 날아가버릴 그 헛자랑!
보잘것없는 나 자신, 그걸 내세우고, 그것을 강화하려다가
질그릇처럼 와장창 깨뜨려져 버리고 마는 거죠.
성도는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거예요.
그분을 모시고 살 때, 그 영광스럽고 찬란한 빛이
우리의 삶을 통하여 세상 가운데 반사되기 시작합니다.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늘 그리스도를 담아내는 삶이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보배를 담은 질그릇이어야 돼요.
우리가 질그릇임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요.
연약할수록 그리스도를 붙들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드러나지 않는 것으로 초조해 하지 마십시오 내가 드러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면 깨어진 것만 보여질 가능성이 높아요.
그리스도만 드러내는 삶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야 됩니다.
내가 질그릇이어서, 주님을 보배로 모시고 살고 있음을,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됩니다.
내가 질그릇이지만, 보배 되신 주님을 모시고 있다는 거예요.
질그릇이라 쓰임을 받는 거예요. 질그릇의 영광은 보배 때문이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내가 연약한 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보배 대신 예수를 모시고 사는가/ 아닌가가 중요한 주제라는 거죠.
내가 무기력하고 무능력함을 인정할수록,
하나님의 능력이 더 우리 안에 머물러 있음을
바울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어요.
우리는 하나님에게 쓰임을 받습니다. 무엇으로요? 질그릇으로!
날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은혜를 구하고, 주님께 엎드리고,
주님을 바라고, 주님을 의지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