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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오순절, 두번째 회심

LNCK 2024. 6. 5.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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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오순절, 두 번째 회심 - YouTube

두번째 오순절, 두번째 회심          행10:1~16      

◑도입

엘빈 토플러 라는 유명한 학자가 있죠. 
그는 <부의 미래 Revolutionary Wealth>라는 책에서 
'속도의 충돌' 이라는 장을 쓴 적이 있습니다. 
대단히 충격을 주었던 언급이었습니다. 

미국 기준으로, 기업이 시속 100 마일로 가면, 
시민단체는 90 마일로 
가정은 60 마일로 변화해 간다.
 
노동조합은 시속 30 마일로, (이렇게 속도가 낮은 것은 옛날 소리 하고있다는 거죠.) 
정부 관료조직, 규제기관은 시속 25 마일, 
교육은 시속 10 마일, 그 잘난 대학들도 시속 10 마일로 간다는 거죠. 
정치 시스템은 시속 3마일
법률 체계는 시속 1마일의 속도로, 더디게 더디게 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시속 10 마일로 가는 학교가 인재 라고 양성해서, 기업에 보내면 
신입 직원이 기업에서, 역할 제대로 잘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이죠. 

여러분 미국 대선이 다가오고 있는데, 
사실 외국인의 입장에서 미국 대통령 선거를 보면, 굉장히 복잡합니다. 
주 별로 선거를 해가지고, 주 별로 이렇게 몰아주기도 하고요. 

근데 이게 왜 이렇게 복잡하게 하냐면, 옛날에 마차 타고 다니면서 
전국 다니면서 선거 하던 그 시절의 풍습이, 오늘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 거예요. 

이걸 사실은 손 보고 싶어도, 뭐 이렇게 바꾸기가 사실 힘듭니다. 
정치는 이권이 걸려 있기 때문에... 

한국도 마찬가지죠. 한국 국회의원 소선거제, 뭐 비례대표제가 문제 많다고 그러지만 
대통령 5년 단임제, 뿐만 아니라 뭐 지방선거, 국회 의원, 대통령 선거가 다 엇박자여서
굉장히 국력의 낭비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못 바꿉니다. 옛날 거 그대로 갖고 있는 거죠. 

기업의 현실은 시속 100 마일의 속도로 진보해 나가는데 
정치 시스템은 시속 3 마일이고, 법률 체계는 시속 1 마일이다...

예를 들면, 여러분 온라인 사업을 하다 보면, 예전에 없었던 식의 분쟁들이 많이 생깁니다. 
이걸 해결해 달라 그러면 법이 없어요. 법적 근거가 없어요. 
그래서 연구 검토하고, 조사하고, 공청회 하고, 새 법을 만들기까지 몇 년 걸립니다. 
그래서 새 법을 만들어 놓으면, 그게 이미 옛날 문제가 되어있다는 거죠. 

그래서 '이런 법을 만들어서 지원해줘야 된다' 하는 그 기업이, 이미 망하고 없어요. 

<부의 미래> 책은, 한국이 아니라 미국 얘기지만 
2007년에 나온 책이지만, 한국은 미국보다 훨씬 빠르게 변하는 면이 많고, 
지금 2024년은 그때보다 더 변화의 속도가 빠르지만, 
여전히 도전이 되는, 새겨들을 만한 관찰입니다. 

학생들은 저만치 앞서가고 있는데, 학교는 저 뒤에 머물러 있지 않은지... 
기업은 미래를 대비하고 쭉쭉 뻗어 나가야 되는데, 정부는 과거에 고집스럽게 머물러서 
발목이나 잡는 상황은 아닌지... 

이렇게 따로 노는 거를 일컬어 '비동시화 De-synchronization' 라고 합니다.
함께 가야 되는데 따로 논다는 거죠. 

여러분, 지금 세계 전체가 동시에 변하는 시기입니다. 
국가 경제가, 세계 경제에 실시간 반영 되잖아요. 뭐 주가든, 금리든 뭐든 다 그렇잖아요. 

 

여러분, 저는 책에 관심이 많은데요. 
옛날에는 미국에서 중요한 책들이 나오면, 한국 번역이 나오는데, 10~20년 걸렸습니다. 

그래서 영어를 못 하면, 공부하기가 힘들었어요. 
근데 요즘에는 진짜 중요한 책들은, 뭐 1년 6개월이 안 걸려서 번역되어 나옵니다.

영화로 보면, 과거에는 미국에서 개봉했다가, 한참 있다가 
몇 개월~ 일 이년 지나서 한국에 들어왔거든요. 
한국에 들어와도 서울의 한 극장에서만 상영했어요. 

여러분 아십니까? 옛날에 <벤허>가 들어왔을 때요. 서울에 대한극장에서만 상영했습니다. 
큰 극장이었는데 미어터졌어요. 인기가 너무 좋으니까요. 

이게 한 두 달 지나면, 지방으로 내려와야 되는데 (필름을 운송해 와야 되는데)
서울에서 너무 인기가 좋으니까, 안 내려오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 포항의 교회 어른들이 '기차 타고 서울에 영화 보러 가자'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 나온 말이 뭔가 하면 '전국 극장 동시 개봉' 이게 큰 뉴스 거리였어요. 
그런데 지금은 세계가 동시에 개봉 하잖아요. 

헐리우드 영화가, 한국이 미국보다 먼저 개봉하는 예도 굉장히 많습니다. 
한국이 개봉하는 날에, 헐리우드 스타들이 와가지고, 여기서 홍보하는 예도 굉장히 많죠. 
그만큼 지금 세계 전체가 싱크로나이즈드-동시화 되고 있는 때라고 하는 거죠. 
미국 경제가 기침만 해도 한국은 앓아 눕는다는데, 사실 그거는 다 알아요. 

어려움도 동시화 되지만, 누구도 피해갈 수 없지만, 
더 중요한 것은, 기회도 동시화 되고 있다는 겁니다. 

미국에서 열린 기회가, 여기서 같이 열리는 거예요. 
그래서 회사들을 보면, 젊은 사원들은 저만치 앞서 가는데, 
간부들은 뒤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벤처 기업이라는 말이 나오는 거예요. 
벤처 기업은, 어떤 특별한 품목, 뭐 IT 이런 분야의 사업을 지칭하는 게 아니고요. 

실무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의견이, 빨리 빨리 전체 회사의 방향에 결정되는 구조, 
이걸 '벤처 기업'이라 그럽니다.

구조보다 더 중요한 거는 문화예요. 
아무리 구조를 잘 만들어 놔도, 
'말해라' 그래도, (젊은이들이) 말 안 하는 문화이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그런 경직된 기업 문화에서는, 사람이 창조적이고 역동적이기 힘듭니다. 
그래서 실무진의 의견이, 회사 전체 의견으로, 
혹은 중요한 정보들이 기업 전체에 잘 퍼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요즘 Synchoronization-동기화 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옛날에는 우리가 컴퓨터를 사람이 한 대만 쓸 때는, 
'파일을 만들어서 저장 한다, 세이브 한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웬만한 사람들은, 컴퓨터도 쓰고, 태블릿도 쓰고, 
뭐 어디 클라우드에도 올라가 있고, 핸드폰에도 연결돼 있기 때문에, 
한 군데 저장을 하면, 같이 '동기화' 되는 거죠. '싱크로 synchro' 된다 그러잖아요. 

여러분 사람들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업에서, 한 팀에서 정보가 혼자 잘 저장해 놓는 걸로 별 소용이 없습니다. 
중요한 정보는 함께 나누어 져야 되는 거죠.
실시간으로 업데이트 되고, 싱크로가 잘 돼야, 그래야 기업이 살아남는 거예요. 

현장에서는 이미 상황이 많이 바뀌었는데 
저 위에서는 옛날 생각하고, 엉뚱한 지시만 내리면 되겠습니까? 

교회는 어떨까요? 사도행전의 하나님은 저만큼 앞서 나가시는데 
사람들은 저 뒤에서 그냥 눌러 앉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런 이야기입니다. 

◑본문 설명

본문 말씀에는, 사도 베드로가 고집스럽게 하나님을 막아 서고 있습니다. 

10:14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 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였나이다 한대'

버팅기는 모습이죠. 맥락은 이렇습니다.
베드로가 욥바에 있는 무두장이(갖바치) 시몬의 집에 머무는데 
기도 시간이 되어서 옥상에 올라갔습니다. 배가 고플 때 였습니다. 

환상중에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와요.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12~13

베드로는 '안 됩니다. 먹을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런거 안 먹습니다. 내 신앙이 그렇지 않습니다' 하고 고집을 피웁니다.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다시 권합니다.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15~16

이렇게 하늘에서 소리가 세 번 들렸지만, 베드로는 끝까지 거부합니다. 
그리고 보자기는 하늘로 올라가 버립니다. 

그 후에 베드로가 혼자서 '야 이게 무슨 뜻이지? 내가 잘못했나?' 고민합니다. 
그때 밑에서 현관에서 자신을 찾는 소리가 들립니다. 누군가 찾아왔습니다. 

가이사랴에서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입니다. 
성령이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20

'의심하지 말고'
이 말에 긴장이 있는 거예요. 의심이 든다는 거죠.
근데 '가라' 그러시니, 결국 가이사랴로 가기로 합니다.

가이사랴에서 온 사람들이, 고넬료에 대해서 설명을 하자
베드로는 비로소 '내가 방금 지붕에서 본 환상과 연관이 있겠다...' 차츰 깨닫습니다.

먼 길을 걸어오느라 피곤하기도 하니, 일단 그 날 욥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서 유숙하고
다음날 욥바를 떠나 가이사랴로 갔습니다.
욥바에서 여섯 명이 따라가요. 베드로까지 일곱 명이죠.  11:12

◑베드로의 아이러니 
(굉장히 어려운 것은 쉽게 깨닫고, 아주 쉬운 것은 못 깨닫는 베드로)

10:24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25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26 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25
이 말은, 그냥 존경의 표시 정도가 아니라, 신에게 경배할 때 하는 동작이죠. 

베드로가 '나도 사람입니다' 라고 말하는 맥락을 봐도, 
충분히 그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넬료가 베드로를 신으로 경배하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의 겸손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베드로가 신격화 근처 자리까지 가 있던 이런 상황에 대한 배경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방인 고넬료의 종교적 세계 안에서 
고넬료는 유대인의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지만, 기본을 아직 배우지는 못했죠. 

십계명에는 처음부터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하고 나오기 때문에 
어떤 인간을 신격화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넬료는 그걸 몰랐습니다. 
유대인의 하나님을 믿고 싶었지만, 배우지 못했습니다. 

두 번째, 사도행전의 네러티브(서술) 안에서도 이런 느낌이 있어요. 
바로 앞 9장에서 베드로가 죽은 사람을 살렸어요. 

그리고 예루살렘에 베드로가 지나가는데 '고쳐 주세요. 안수기도 해주세요' 하면서
사람들이 미어 터지게 달려듭니다. 너무 막 그냥 사람이 많아서 줄을 서도 안 되니까 
'야 우리가 베드로의 그림자라도 닿으면 낫지 않을까?'  5:15
이 이야기만 보면, 베드로가 신처럼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베드로의 통찰력 입니다. 
여러분, 아나니아 와 삽비라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그들이 헌금을 들고 왔을 때, '이게 전부냐?' 하고 물어보는 거예요. 

베드로는 다 아는 거예요. 통찰, 꿰뚫어 본다는 거죠.
마치 자기 자리에 앉아서 천리를 내다보듯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까지 꿰뚫어 보는 
굉장한 통찰력과 지혜를 가진 베드로 였습니다. 
(그러니 소문을 들은 고넬료가, 베드로를 신격화 하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니었다는 거죠)

그런 꿰뚫어보는 신비한 통찰력을 가진 베드로가,
그런데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오고, 하나님이 '잡아 먹으라' 말씀하셔도, 
'하나님이 이미 깨끗하게 하셨다' 라고 말씀 해도... 그 의미를 모르고 버텼다는 것입니다. 

이게 굉장히 의아한 대목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대단한 통찰력을 가진... 하늘과 땅의 비밀을 다 알 것 같은 그 사람이 
하나님이 환상을 세 번이나 보여주셨는데도... 그 의미를 선뜻 깨닫지 못하는 거예요.

▲롬3장에 보면,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3:10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 그랬습니다. 

'의인은 없다' 우리 모두가 죄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고백에 익숙합니다. 

'깨닫는 자도 없고'
이 말씀은, 우리 모두가 죄인 일 뿐만 아니라, 모두가 어리석다는 말이에요. 
우리 모두가 바보라는 말이에요. 

언제나 우리 인간의 뜻은, 하나님의 생각에 비해서 모자랍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인됨 뿐만 아니라, 어리석음, 우둔함을 끊임없이 고백해야 됩니다. 

우리는 그래도 많이 들어서 '죄인 됨을 고백하는' 데는 익숙해요. 
찬송가에도 있잖아요.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불러주소서'   *인애하신 구세주여

근데 우리가 제대로 알면, 이런 찬송가도 있어야 돼요. 
'바보 오라 하실 때에 불러주소서' 

우리가 다 의리석습니다. 여러분 가장 심각한 죄인이 누굽니까? 
성경에 의하면, 큰 죄를 저지른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의롭다 하는 사람이에요. 
자기가 죄인인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가장 심각한 바보가 누구예요? 스스로 똑똑하다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자기가 바보인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로마서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롬1:22

여러분, 이 말이 성경에만 나오는 말이 아니죠. 소크라테스가 뭐라 그랬습니까? 
인류 모두가 스승으로 받드는 소크라테스의 가장 중요한 말이 '너 자신을 알라!'
그 말 뜻은, 자신의 무지를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요즘 여러분 아이들 공부시키는 사람들, 조금 앞서가는 사람들은 
'자기 주도 학습' 이런 말을 많이 하잖아요. 

지금 당장 문제 한 두 개 더 풀고, 영어 단어 몇 개 더 잘 외운다고 공부 잘 하는 게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게 '메타인지' 인데, 뭡니까? 
'내가 뭘 알고, 뭘 모르는지를 아는 지혜' 그게 가장 중요한 지혜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소크라테스나 로마서나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의 죄와 어리석음은 엉겨붙어 있습니다. 분리 하기가 힘들어요. 

분리해서 떼어낼 수 없습니다. 죄인이 바로 바보예요. 
이 둘을 아교와 같이 중간에 막 엉켜붙게 만드는 물질이 뭔가 하면... 교만입니다. 

베드로의 교만, 베드로의 한계...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 개인의 한계, 개인적 고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는 개인적으로 대단히 지혜롭고, 통찰력 있고, 겸손하기도 한 사람이었지만, 
그 시대의 한계, 그 민족의 한계, 전통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 개인이 어떻게 했다' 라기 보다는 
이 전체 민족을 향한, 이 세계 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도전 앞에 서 있는 한 대표 (베드로) 라고 보아야 됩니다. 

한 경건한 유대인 베드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고,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했고 
성령 충만까지 경험했지만, 대단한 통찰력을 가졌지만 
그가 넘어서지 못했던 한계가 있었다는 거죠.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같은 책이에요. 1부는 누가복음, 2부는 사도행전 이라고 봐야 됩니다. 

누가복음에 예수님의 말씀이 많이 나오는데, 그 중에서 중요한 말씀이 '탕자의 비유' 입니다. 
이 비유는, 구원이 뭔지를 설명하는 거예요.

이 비유에서 둘째 아들의 죄는 교만입니다.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버지의 지도 아래 시시콜콜 간섭받는 것보다
훨씬 잘 살 수 있어' 라고 하는 교만, 그 교만이 결국 깨어지죠. 

첫째 아들의 교만은, 다른 종류의 교만이죠. 
아버지의 말을 잘 듣는 것 같아요. 그런데 더 교만해요. 

'나처럼 착한 아들, 나처럼 성실한 아들, 완벽한 아들이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라고 하는 교만이죠. 그래서 뭐라 그럽니까?

눅15:29~30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형은 '이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동생(형제)' 라고도 안 부릅니다. 

'염소 새끼도 주지 않았다' 여러분, 이 말은 우리 집에서도 종종 듣는 소리입니다.
십대 자녀들이 뭐 갖고 싶은 것이 있는데, 부모가 안 사 주면, 뭐라 그럽니까? 
'아버지가 나한테 해준 게 뭐 있어요?' 

설마 아버지가 해 준 게 아무 것도 없겠습니까? 
먹여주고, 재워주고, 학비 대 주고... 다 부모 덕인데,
뭐 하나가 마음에 안 들면, 자기 뜻대로 안 되면
'아버지가 나한테 해준 게 뭐 있나?' 하는 아들! 

이 아들에게 아버지가 말씀하십니다. 
눅15:31~32 '아버지가 이르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시작하는 말이 '얘' 입니다. 
영어로는 my son 입니다.

아버지는 입을 열면서 '야 이 나쁜 놈아, 야 이 무정한 자식아!' 이렇게 안 하셨어요. 
혼내는 분위기가 아니라, 얘 my son, 그래도 정이 듬뿍 담긴 표현으로 타이르십니다. 

그 말을 듣고 첫째 아들이 어떻게 반응 했을까요?
여기서 성경이 끝납니다. 성경에 더 설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혹시 이런 (큰 아들) 식의 고집을, 베드로에게서 발견되지는 않습니까?
'먹어라!' 
'안 먹어요!' 

'그러지 말고 먹어라!' 
'저는 절대로 안 먹습니다!' 

'아니, 괜찮다니까.. 제발 좀 먹어라!' 
'주님, 나를 어떻게 보십니까?' 
적어도 이 시점까지는, 베드로는 버팅겼습니다.

그러다가 고넬료의 집에 들어갔을 때,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10:28~29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

'유대인으로서 위법이다
고넬료의 집에 문을 열고 들어가서, 그 문 지방을 넘는 것이, 그만큼 힘들었다는 말입니다. 이 높은 문지방, 

여러분, 탕자의 비유에서 첫째 아들이, 이제 돌아온 동생과 한 집에 살아야 되잖아요. 
살면서 동생 방에 들어 갔을까요? 어땠을 것 같아요? 
한 집에 살면서도 '내 동생 아니다' 했으면, 과연 행복했을까요?

▲이런 책이 있습니다. <아이가 방문을 닫기 시작했어요>
사춘기 자녀들을 둔 부모들을 위한 책입니다. 책 제목을 잘 지었죠. 

닫혀 있는 아이의 방문... 말 문도 닫히고, 마음 문도 닫아버린 사춘기의 아이들, 
부모들은 좌절 하죠. 
이렇게 아이 방문 앞에 서서, 고민하는 부모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부 사이에도, 넘기 힘든 문지방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냉랭한... 서로 얼굴 보지 않으려는... 
꼭 봐야 되는 시간이라면, 겨우 견디는 부부들이 있을 것입니다. 

직장에서의 삶은 어떻습니까? 결제 서류 들고 상사의 방에 들어가야 되는데, 
그 방문 앞에서 한참 망설여지는...
퇴근하고 집에 와서도, 이 직장에서의 스트레스가 사라지지 않는 이들도 많습니다. 

'문'이라는 것은, 원래 왔다 갔다 하라고 만들었는데, 오히려 벽이 되어 버린 상황... 
남과 북의 상황이 그렇죠. 그 적대감! 

그래서 '복음 들고 산을 넘는 자의 발이 복 되다' 라는 말을 
우리는 '복음 들고 문 지방을 넘는 자'로 바꿀 수도 있습니다. 
'험산준령보다 훨씬 더 넘기 힘든 문지방이 세상에 많구나' 하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는, 누가복음 안에서는 결말이 없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이, 누가복음 전체의 딱 중간인데, 

눅15장에 비유가 세 개 있죠.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잃은 아들... 비슷한 비유인데 
잃은 양과 잃은 드라크마는, 잔치하는 해피 엔딩으로 끝나요. 

그렇지만 세 번째 탕자의 비유는, 해피 엔딩이 아니에요. 
불만에 가득한 첫째 아들의 얼굴, 그 다음에 아버지가 간곡하게 부탁하는데, 
어떻게 됐다는 결론이 없어요. 누가는 왜 결론을 안 썼을까요? 

그 결론이, 사도행전에 와서 비로소 해결이 되는 거예요. 
'음식을 먹지 않겠다'는 이 베드로의 고집에서 
우리는 첫째 아들의 완강한 태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마침내 베드로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10: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3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베드로는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그 깨달음의 내용이 '하나님은' 이라고 하면서, 주어가 하나님이에요. 
이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했다가, '이제야 깨달았도다' 라고 할 때에 
이 사이에 뭐가 있었는가 하면, 하나님에 대한 인식 전환이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을 더 알게 된 겁니다. 

우리가 사람의 마음이 조금 넓어지는 경우가, 여러 가지 도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보니까, '고넬료 그 사람 프로파일을 보니까, 로마 사람도 괜찮네?' 
그럴 수 있잖아요. 

경상도에 있는 교회들의 아주 큰 아픔이, 여러분 참 넘기 힘든 게 지역 감정입니다. 
아니라 그래도, 여러분 지역감정이 우리 문화 속에 얼마나 심한지요... 
어떻게 극복 되겠습니까? 

'아휴, 전라도 사람들 중에도 좋은 사람들이 있네' 이런 열린 생각은 조금 도움이 됩니다. 
근데 여러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깊이 만나야 되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면,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경험하면, 지역감정을 넘어설 수 있는 거예요.

우리 교회에서 이번 주말부터 <사춘기 부모 학교>를 엽니다. 
우리가 모여서 사춘기 학생들의 심리도 배우고, 대화법도 배우고, 그들의 문화도 배우고, 
부모로서 마음 관리법도 배울 겁니다. 다 필요합니다. 

세세하게 잘 가르칠 텐데, 여러분 잘 배우시고요,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복음 안에서 해결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알아야, 내가 우리 가정의 주인이시고, 
우리 자녀의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알아야, 
여러분 사춘기 자녀의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하는 거예요. 

아십니까? 대부분 사춘기 자녀 문제의 가장 큰 걸림돌은, 부모의 불안이에요. 
주님께 맡기시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베드로가 말했어요. '하나님이 다 받아 주셨음 이제야 깨달았다'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이게 여러분, 토플러의 용어를 빌리자면 하나님과 디싱크로나이즈드(비동시화) 되어 있는...
 
하나님은 앞서 가시는데, 나는 이렇게 뒤에 쳐져있는... 
이게 하나님과 이제 싱크로나이즈드(동시화, 동기화)가 되는 거예요.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예수님은 '소녀야, 일어나라' 그랬고,  *야이로의 딸
베드로는 '다비다야 일어나라' 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싱크로 했다는 거죠.

스데반이 죽을 때도 그랬잖아요. 
예수님은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했는데,
스데반도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7:60
스데반이 예수님을 싱크로 했다는 거죠.

본문에 베드로는, 이방인을 용납하시고 받으시는 주님의 뜻에
조금 더디게, 고넬료의 집에 와서, 그 집에 성령이 내리시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싱크로 되었다는 거죠. 조금 더디긴 하지만요...

베드로는 예전에는 구경꾼이었는데, 이제는 작은 예수가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죽으셨는데, 왜 죽으셨습니까? 
우리의 죄 때문이죠. 맞습니다. 

◑두번째 오순절, 두번째 회심          

우리의 죄 중에 가장 심각한 죄가 뭔가하면요, 
하나님을 거부함도 있지만, 형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 냉담한 마음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신 거예요. 

엡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6
즉 적대감 enmity 를 십자가로 소멸하셨습니다.

여러분 베드로는, 그 십자가를 알고도, 부활을 경험하고도 
심지어는 성령강림 이후에도 오랫동안 그 옛날 자리, 전통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구경꾼이에요. 

여러분, 구경꾼을 영어로 스펙테이터 라고 그러죠. 
스펙데이터는, 스펙터클을 찾습니다. 화려한 볼거리(스펙터클)! 

근데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정말 영웅은, 다메섹의 제자들, 그들이 뭐했습니까? 
뭐 스펙터클한 뭐 대단한 일을 한 거 없어요. 그런데 바울을 맞아들였잖아요. 

바울은 원수잖아요. 뭐 용서는 했다 쳐요. 그래도 위험하잖아요. 
그리고 꼴 보기 싫잖아요. 사람들 죽이러 다녔잖아요. 
그 사울 때문에 그들이 얼마나 고생했나요. 얼마나 마음 졸였나요?

'용서는 할 테니까 네 갈 길 알아서 가라. 우리한테 제발 눈 앞에는 보이지 마라' 
그러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사울을 형제로 받아들인데서, 선교의 위대한 출발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미셔널 처치, 선교적 교회 라고 말하는데 
큰 프로젝트, 뭐 대단히 큰 스펙터클한 일을 하자는 얘기가 아니에요. 

물론 필요하면 해야 되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정말 중요한 선교는, 
예수님의 마음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 
스펙터클한 거 막 이루고, 자랑하고, 구경하고, 박수 치고... 하는 그 기쁨과,

작은 일이지만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일하고 계신다' 하는 그 기쁨은 
비교할 수 없을 줄 믿습니다. 

그 자리에 성령이 함께 하시는 거예요. 
베드로가 고넬료 가정에서 말씀을 전할 때에 성령이 임합니다. 

10:44~47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47
이 말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고넬료의 집에 똑같이 일어났음을 말합니다. 

많은 사도행전 연구자들이, 고넬료의 집의 성령강림은,
'그냥 한 집이 예수 믿었다'가 아니라 

행2장 오순절 때 성령이 임해서 역사가 완전히 바뀐 것처럼, 
이제 그 역사가 이방인 에게도 활짝 열린, 새로운 시대를 여는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그래서 '두 번째 오순절' 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번째 회심도 발견합니다. 
첫 번째 회심은 탕자가 돌아와 아버지 품에 안기는 것이고, 
두 번째 회심은,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이 함께 포옹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가야, 진짜 구원이 이루어진 거예요. 
여러분 탕자의 비유는, 불만이 가득찬 형의 얼굴, 
그리고 아버지의 간절한 당부로 끝납니다. 
'아들아, 내가 어떻게 해야 네가 동생을 받아들이겠니?'

냉담한 큰 아들은, 그래도 닫힌 마음을 열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노력을 다 하십니다. 그것이 십자가 입니다. 

십자가로 원수 된 것을 폐하셨다 그랬잖아요. 화해를 이루셨습니다. 
이 화해는, 모든 인류가 간절히 바라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입니다. 

창33:10 '야곱이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이 장면이 야곱의 인생의 하이라이트 입니다. 
창세기의 중요한 하이라이트 입니다.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이 형님이 누굽니까? 
'칼 들고 와서 나를 죽일 거야, 형이 죽던지 내가 죽든지 해야지, 함께 살 수는 없어' 
라고 하던 형이에요. 

근데 만나 보니까 달라요. 화해가 가능해요. 
뿐만 아니라 그 형의 얼굴에서, 원수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거예요. 할렐루야! 
이 안에, 인간의 모든 문제가 담겨 있습니다. 
형제 간의 갈등의 문제, 여러분 가인과 아벨에서부터 시작한 거죠.

뿐만 아니라 부자 간의 문제, 가정의 문제가 있잖아요. 자녀와의 문제, 
여러분 이 가정이,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 그리고 에서와 야곱 
이 네 명의 관계가 얼마나 골치 아프고 복잡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창세기가 쓰여질 때는, 이미 야곱과 에서는 민족을 이루고 난 다음입니다. 
민족 간, 종족 간의 갈등의 문제가 이 안에 포함돼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야곱과 에서의 화해를 읽으면서 
남한과 북한의 화해와 평화 통일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거예요. 

이 세상에 아직도 존재하는 이 전쟁, 미움, 그 역사,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해결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원수를 형제로 받아들이는... 바로 회복되는 이 자리가... 
본래 형제였잖아요. 그 자리가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자리인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나서, 야곱은 인생의 목적이 바뀝니다. 
지금까지 목적이 뭐였어요? 형을 이기는 거였어요. 

(태어날 때) '한 발 늦어가지고, 평생 내가 뒤 따라간다... 
그럴 수 없다. 나는 받아들일 수 없다.' 

그래서 야곱은 열심히 일합니다. 돈 법니다. 막 밤새 일합니다. 
정말 노력해서 살아갑니다. 필요하면 거짓말도 하고 사기도 칩니다. 아버지도 속입니다. 

그렇게 해서 경쟁에서 이기고 싶은 삶에서 바뀌었어요. 
근데 이제는요, 형과 나란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삶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이거를 뭐라고 그러냐면, 세상에서는 윈윈 한다 그래요. 
'너도 이기고 나도 이기고'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니 죽고 내 살자!' 
그것도 안 되면 '너 죽고 나 죽자' 그러잖아요. 

아닙니다. '너도 살고, 나도 살아야' 되는 거예요. 
너도 살고 나도 살아야, 그게 유일하게 잘 사는 길인 줄 믿습니다. 

그 길을 발견하는 게 복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 대로만 살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복이 될 수 있어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모든 사람을 다 받아주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 
악한 자의 밭에나, 선한 자의 밭에나 비를 내려주시고 햇빛을 비쳐 주시는 하나님, 
그 분이 우리 아버지이신 줄 믿습니다. 

이 하나님을 닮아가는.. 이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일하시는 
복된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또한 선교적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