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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기도와 구제가 상달되어

LNCK 2024. 6. 5. 19:11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 구제 

 

네 기도와 구제가 상달되어 (10장 1-8절) - YouTube
네 기도와 구제가 상달되어                행10:1~8

◑상달되지 못하는 기도도 있다

시102편에는 다음과 같은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고난 당한 자가 마음이 상하여 그의 근심을 여호와 앞에 토로하는 기도" 

인내의 한계를 초월하는 고난과 고통을 당하면서, 
마음이 찢어질 대로 찢어진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괴로움을 토해내는 내용의 시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시인의 시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시102:1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하게 하소서'

시인의 기도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기를 간구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옛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항상 높은 곳에 계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인도, 위에 계신 하나님께 자신의 기도가 다달아서 
하나님께서 자기 기도에 응답해 주시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상달'이라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come unto thee (도달)

그런데 이 시인이,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기를 가장 먼저 간구했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기도 가운데는,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는 기도도 있음을 
이 시인이 잘 알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잠1:27~28 '너희의 두려움이 광풍 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 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하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간절히 기도해도, 상달되지 않는 기도도 있다는 거죠.

미가서3:4절 역시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 때에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을지라도 응답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행위가 악했던 만큼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시리라'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자신의 기도가 한 마디도 빠짐없이 고스란히 하나님께 상달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도 있고, 하나님께 전혀 상달되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시고 외면해 버리는 기도도 있음을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소리 높여 목이 터져라고 하나님 앞에서 울부짖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지도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얼굴을 가리시고, 그 기도를 외면해 버리신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그보다 더 비참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상달되는 기도

그렇다면 대체 어떤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 되겠습니까?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우리는 오늘의 본문 속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헤롯 대왕이 로마제국의 황제(가이사)를 위해서 건설한 도시 가이사랴에 
로마 백부장 고넬료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방인 이었지만, 유대인들의 영향을 받아서 
온 식구들과 더불어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항상 기도하는 경건한 신앙인이었습니다. 

10:3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어느 날 고넬료가 환상을 보았습니다.  
환상 속에 나타난 천사를 통해서, 고넬료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때의 시간이 제 구시, 요즘 시간으로 오후 3시 였습니다. 
그 시간은, 유대인이 매일 상번제 드릴 때, 저녁 번제 드리는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 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4절입니다. 

10:4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해 고넬료에게 
'고넬료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상달 : come up, ascended 올라감.

우리 말 '기억하신바'로 번역된 헬라어 '므네모수논'은
기억도 되지만, 또한 기념물, 기념비라는 의미입니다. 

고넬료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기념비로 세워지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대체 고넬료의 기도가 어떠했기에, 
그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기념비(또는 기념물)로 세워질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너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상달된 것은, 고넬료의 기도만이 아니라, 구제와 병행된 기도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고넬료의 삶 속에, 기도에 상응하는 구제가 수반 됨이 없이 
그가 단지 입으로 기도만 하는 사람이었다면 
그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말 '구제'로 번역된 헬라어 '엘레에모시네'는 
구제 행위 그 자체를 의미하는 단어라기보다는, 
사람을 구제하려는 자비로운 마음을 일컫는 단어입니다. mercy, pity
그 마음이 결과적으로 구제로 나타는 거죠.

다시 말씀드리면, 사람을 긍휼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을 일컫는 단어로서 
그 특성은, 단지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자 하는 생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에 상응하는 긍휼의 행위를 반드시 수반하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행하는 모든 구제의 행위가, 다 중요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인간에 대한 긍휼한 마음 없이,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행하는 구제 행위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땅 위에서 인간들이 행하는 구제 행위 거의 대부분은, 
자기를 과시하기 위한 행동인지도 모릅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겠습니까? 
마6:2~4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향해 나팔을 불면서, 자신의 구제 행위를 과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과는 전혀 무관한, 자기 과시, 자기 홍보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오늘 본문이 지니고 있는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고넬료 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하고, 기념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기도 했기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기도 하되,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또한 긍휼의 행위가 반드시 수반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긍휼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 
사랑을 긍휼히 여기고, 긍휼의 행위가 수반되는 사람의 기도가 
남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단지 자신의 욕망 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기도일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의 기도라면, 자기 자신을 뛰어넘어,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기 위한, 이타적인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단지 입으로 공기만 진동시키다가 끝나버리는 기도가 아니라 
반드시 기도에 상응하는 행동을 수반하는 실천적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그 기도에 상응하는 구제 행위를 한 뒤에, 
나팔을 불며 그 행위를 자기 과시, 자기 홍보 수단으로 삼으려 하겠습니까? No 

사람을 긍휼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을 쏟아 부어 주신 하나님의 영광과, 
자신이 긍휼히 여겨야 할 대상의 인격을 지켜주기 위해서 
도리어 은밀하게 구제하며, 자신의 행위를 사람들 앞에서 감추면서 
하나님만 드러나게 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그렇지 않았던들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기념비로 세워졌을 리가 만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중요한 두 가지의 교훈을 얻게 됩니다.> 

▲1. 첫째 교훈은,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도의 결과로 드러나는 삶입니다.
우리가 어떤 기도를 평소에 드리느냐 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삶으로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리스도 인들 가운데에는, 절박한 사정이 있을 때에 
하나님께 금식 하며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절박한 심정이 
금식 기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금식 기도를 그만큼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금식 기도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58:4~7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사58:8~9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달리, 인간이 그토록 중요시하는 금식 기도를 
그렇게 중요하게 간주하기 않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여러 날 동안 금식한다 할지라도 
그 금식 기도가 긍휼히 여겨야 할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서 그 금식 기도는, 무의미한 공기의 진동으로 끝나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설령 단 한 끼의 금식 기도도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사랑해야 될 사람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겨야 될 자를 긍휼히 여기는 삶을 산다면 
그 사람의 삶 자체는, 금식 기도 보다도 훨씬 더 귀한 (삶의) 기도입니다. 

그 사람이 그런 삶을 산다는 것 자체가 
그가 평소에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엘레에모시네의 마음으로 기도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보다, 기도의 결과로 드러나는 삶이 더 중요하다'는 것은, 
'기도보다 기도하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사람을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엘레에모시네 의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에게만 
결과적으로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는 삶이 수반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기념비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즉 응답되는 것입니다.

▲2. 본문 속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두 번째 교훈 역시 
구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구제하는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증언 합니다. 
고전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누군가를 구제하고, 
또 그 사람을 위해서 내 몸을 불 사르기까지, 내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 준다면 
그것은 얼마나 위대한 구제입니까? 

그러나 아무리 위대한 구제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그 속에 사랑과, 사람에 대한 배려와, 긍휼이 결여되어 있으며 
그것은, 그것을 행한 나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사람에 대한 사랑과, 배려와, 긍휼 없이 행하는 구제란 
자기 과시, 자기 홍보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경우에는, 구제를 하면 하는 만큼, 구제가 커지면 커지는 만큼, 
자기 과시 자기 홍보가 정비례해서 커지게 됩니다. 
그 사람은 자기 구제 행위에 대하여, 자기 스스로가 자기를 포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전혀 무관한 그 구제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에게 무슨 유익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엘레에모시네 의 마음을 지닌 사람만 
자기에게 그 마음을 심어 주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또한 자기 긍휼의 대상인 사람의 인격을 지켜주기 위해서          주1) 
자기 자신을 가리게 되고, 하나님만 드러내게 됩니다. 

▲주섬주섬 프로젝트 (펀 글)
젊은이 교회에서 재정 팀장을 맡았던 청년이, 하루는 이런 마음을 나눴어요. 
요즘에 경제적으로 풍족한 시기라, 식사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한 끼의 식사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은 청년들, 혼자 사는 청년들이 많고
그러니 정말 그들을 도울 방법을 교회가 찾아보면 좋겠다... 그런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리고 주변을 살펴보니까, 여러 곳에서 취업준비 때문에 자취하며 홀로 사는 청년들이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이를 놓고 기획위원들이 함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몇몇 사람들이 하나님 주신 마음을 붙잡고 <주섬주섬 프로젝트>라는 것을 시작하게 됐어요.

주섬주섬이란, '주님을 섬기고 주위를 섬기자'는 의미죠.
'참 이름을 잘 정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섬주섬 프로젝트 톡방'을 개설하고, 기획위원 중에 한 명이 운영자가 됐습니다.
그리고 요청되어지는 그 톡(문자)을 볼 수 있는 것은, 운영자만 알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나중에 기획위원들이 점검(감사)하는 시스템으로 했죠.

누구나 한 끼의 식사가 필요하고, 차 한잔의 교제가 필요한 경우에
아무 조건 없이 요청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아마 '차 한잔'이라고 하면 '그게 무슨 도움이 될까?' 하겠죠.
그런데 여러분, 청년들 중에는 다른 친구들처럼
커피 한 잔을 마음 놓고 마실 수 없는 청년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그런데 교제하다 보면, 친구들과 성도의 교제를 나누다 보면,
자기가 누군가를 커피 대접으로 섬기기도 해야 할 텐데, 그러기 어려운 청년이 많은 겁니다.

그래서 그냥 조건 없이 톡으로 요청을 하면
주섬주섬 프로젝트에선 아무 조건 달지 않고 식사나 차 한잔 할 수 있는 기프티콘을 보내줬습니다.

이를 도울 마음이 있는 청년들은, 목적 헌금을 했고, 그 기금으로 운영이 됐어요.
근데 그중에 그렇게 하다보니 이런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

때로 익명으로 하다 보니, 좀 남용이 될 수도 있고,
전혀 재정적인 필요나 도움이 필요 없는 지체도, 이걸 좀 함부로 사용할 수 있는 거 아니냐?
그런 이야기들이 나왔어요.

그런데 청년 리더십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어떤 마음으로 결론을 삼았냐?
'아무리 남용하는 사례가 혹 있더라 하더라도, 진짜 필요가 있는 급박한 청년 지체들을 도울 수만 있다면,
이거 그대로 합시다. 누가 잘했냐 못했냐 따지지 말고 하여간 도웁시다.'

그래서 계속 이 일을 해왔습니다.

아주 많은 인원이 신청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때를 따라 도움이 필요한 청년들이
아무 부담 없이 도움을 요청하고, 교회는 흘려보냈어요.

제가 매주 교회의 재정을 결제하다 보면 참 놀라운게,
아주 작은 헌금, 소액이더라도, 이 주섬주섬 프로젝트를 위한 헌금이 끊이지를 않는 겁니다.

누군가가 이름 없이 이 일에 자기 재정을 계속 흘려보내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누군가를 아무 조건 없이 도울 수 있는 그곳에, 재정이 마르지를 않는 겁니다.

너무나 감사했어요. 주님이 서로 돕고 섬기도록 지혜도 주시고
그 마음을 품고 서로 섬기게 하신 것이라 믿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행하는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 되고, 하나님 앞에 기념비로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고넬료는 그로 인해서 신묘막측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베드로에 의해, 자기 한 사람만 구원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고넬료 한 사람으로 인해서, 고넬료 온 집안 식구들은 말할 것도 없고 
고넬료의 친척들, 친구들까지 모두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고넬료의 그 아름다운 삶이, 성경 본문 말씀 속에 기록되어 
영원히 기념되고 있습니다.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기념비가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노벨상의 어떤 심사 규정 (펀 글)
‘종교적 목적으로 하는 어떤 헌신은 노벨상 대상에서 제외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선교사가 해외에 나가 봉사하지만, 노벨상은 수상 후보군에서 제외됩니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무엄하지 않는가요? 
‘하나님이 천국에서 주실 상을, 노벨상이 앞서 가로채서 딱 줘 버리면...’ 

그런 깊은 겸손함이 노벨상의 의미에 감춰져 있어서 좋습니다. 
요지는, 구제와 남을 돕는 일은 철저히 은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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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어떤 교회는, 마25장을 공부하고 난 다음에는
방배동 높은 산꼭대기에 있는 달동네 주민들을 도와주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지는 교회 '구제부'가 그 일을 주관해서 했는데,
달동네 주민들이 '구제'라는 말을 듣기 싫어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구제부'라는 말을 없애버리고, 대신에 '사회봉사부'로 바꿨습니다. 

어떤 교회는, 구제할 때, 꼭 교회를 통해서 행합니다. 
교인이 개인적으로 하지 못하도록 권면합니다.

왜냐면, 교인이 개인적으로 다른 교인을 구제하면,
그 구제가 서로 자연히 알려지게 되므로, 낯가림 현상이 발생할 수 있죠.
즉 구제 받은 사람이, 구제한 사람 앞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구제비나 구제물품을 내고, 교회 (구제부)가 그걸 나눠줬을 때는
교회가 그 구제를 한 게 되고, 
구제 받은 사람은, 익명성이 보장되므로, 한층 언행이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물론 구제한 사람도, 자연히 익명성이 되므로,
그 성도도 언행이 더 자유로울 수 있는 거죠.

☞간절히 기도하려면 rfcdrfcd.tistory.com/105046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