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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를 받을 때

LNCK 2024. 6. 6. 11:37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 핍박 

 

20240527 새벽 / 박해를 받을 때(youtube.com)  -정리-

박해를 받을 때            행12:1~24                        

우리는 지금 복음이 땅끝까지 흘러가고 있는 과정, 
특별히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고 있는 은혜의 현장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예수를 나무에 달아 죽였던 예루살렘이,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유대인과 1천 년 가까운 시간을 반목하고 있었던 사마리아도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옥에 가두고 핍박을 하며,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가장 앞장섰던 사울이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로마의 황제에게 생명을 걸고 그의 전부를 걸었던,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가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늘 자기의 뜻과 맞지 않거나, 자기의 고집이나 전통에 매어가지고 
'그럴 수 없습니다. 주여 그럴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던 베드로와, 
유대, 예루살렘 사도들까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까지 다시 회심하여 주께로 마음을 돌이켰습니다. 

그리고 안디옥에 예루살렘으로부터 480KM 떨어져 있는 그 안디옥에 
안디옥 교회를 하나님께서 설립하셨고, 거기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어지는 오늘 본문 행12장은, 그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와 함께 가고 있는 
또 다른 단어,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 답게 산다면 결코 피할 수 없는 한 단어를 
우리에게 보여주는데, 그것은 바로 '환란, 박해'라는 단어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이 안디옥 교회라는 무대에서 
자연스럽게 예루살렘으로 다시 그 무대로 옮기고 있는데 

행11:29~30절을 보면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여기 '부조'라고 번역된 말은 '봉사, 섬김'을 뜻하는 디아코니아 입니다. 
불쌍한 사람 도와준다고 하면 받는 사람이 기분나쁘니까, 
겸손하게 '우리의 섬김과 봉사입니다' 하는 의미죠.
 
지금 안디옥 교회에 일어나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부조 보냄)을 보여주고 있어요. 
그래서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예루살렘으로 보내요. 

(*나중에 바울의 3차 선교여행 막바지에 마게도냐 교회가 또 예루살렘 교회에 부조를 보내죠.
롬15:25~26, 행20:16참조. 이 사건과 구분이 필요합니다.)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전달자인 바나바와 사울을 강조하여 안디옥 교회의 대표성을 바나바와 사울에 두고 있습니. 
이는 이방 안디옥 교회의 대표로서 바나바와 사울을 예루살렘 교회가 받아들인다면 
곧 이방 교회가 실제적인 기독교 공동체로 공인됨을 시사하기도 하죠.

그래서 무대는 안디옥 교회에서, 자연스럽게 예루살렘 교회로 다시 옮겨지게 되고, 
본문 12:1~3절까지 보면, 그때에 거기 예루살렘에 환난, 박해가 있었습니다.

 

본문 시작

12:1~3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안디옥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그렇게 아름답게 자라고 있는 중에, 
누가는 사도행전의 무대를 예루살렘 교회로 옮겼는데, 거기에 보니까 
'그리스도인' 이라는 단어와 뗄 수 없는 한 단어 '환란, 박해, 핍박'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인답게 산다면 
피할 수 없는 이 박해, 환란, 어려움 가운데서 
본문의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살펴보면서 
박해를 받을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 나아가야 되는가... 를 살펴보겠습니다.

◑1.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가운데서 박해를 받을 때, 우리는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주고 있는데, 예루살렘에 심각한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헤롯(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해 박해가 일어났고 
그 박해와 환란 가운데서 그리스도인들이 했던 행동이 이렇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12: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박해가 올 때 우리는 무엇부터 해야 되는가요? 
하나님은 그들에게 기도하게 하셨고, 
성도들은 기도 가운데서 은혜를 구했다 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박해, 환난이 우리 가운데 찾아올 때에 
기도 가운데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해야 되는데, 
5절을 다시 보시면, 기도할 때 그들은 어떻게 기도했는가요? 
'간절하게 기도했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간절'이라는 헬라어 '에크테네스'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 에서 기도하셨을 때의 모습, 
그때의 그 모습과 고스란히 똑같은 단어를 쓰고 있어요. 
그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땀이 피가 되기까지 간절히 기도하셨잖아요. 

눅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간절히 (에크테네스테론) 어근은 에크테네스, 같은 말

그러니까 우리가 환란이 우리에게 찾아왔을 때 
우리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앞에서 드렸던 그 기도처럼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 이 간절함에는, 기도의 내용도 간절해야 되는 거예요. 
간절하게 기도한다는 것은, 이 박해를 피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거죠. 

'나는 박해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박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때에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간절한 기도... 그것이 필요해요. 

그렇지만 만약에 하나님께서 박해를 허락하신다면, 
그걸 피할 수 없다면 또 어떻게 해야 될까요? 
견딜 수 있게 해달라고 하는 기도, 그것이 간절한 기도입니다. 

'주여, 박해가 내게 다가오고 있고 나는 그것을 보고 있습니다. 
주님 나는 박해를 견딜 힘도 없고 두렵습니다. 
그러니 이 박해를 내게서 피하게 해 주십시오' 라고 우리는 간절히 기도해야 되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해가 우리에게 온다면 
우리는 그때 '이 박해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놓치지 않게 해주시고 
견딜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그렇게 기도했었죠. 하나님 앞에 그렇게 기도하고 담대히 말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환란이 찾아왔어요. 

왕이 세운 우상 앞에 모두 엎드리라고 말할 때, 그들이 엎드리지 않았어요. 
그래서 '너희들을 죽이겠다. 풀무불에 태우겠다'고 말했을 때, 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단3:17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18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피하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하셨던 기도 아닙니까? 

눅22: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예수님도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옮겨주십시오, 하나님 피하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만약에 그것을 피하지 않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면 
내가 그것을 견딜 수 있게 해주십시오!' 라고 그렇게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박해가 우리에게 찾아올 때, 우리는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해야 돼요.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기도해야 된다는 거예요. 

▲헤롯이 교회의 머리를 쳐야 된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래서 지도자 급에 있었던 야고보, 그리고 베드로를 칩니다. 

두 지도자가 잡혀갔는데, 그러니까 교회는 두 사람 다를 위해서 기도했을 것 아닙니까? 

2절을 보면, 요한의 형제 야고보 사도는 순교를 했어요. 칼로 죽임을 당했어요. 

그러자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서   :3
이제 베드로도 잡아와요. 

교회는 둘 다를 위해서 똑같이 간절하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떻습니까? 한 사람은 순교했고, 한 사람은 풀려났어요. 
왜 그런 겁니까? 

야고보를 위한 기도가 약했기 때문입니까? No
베드로를 하나님께서 더 사랑하셨기 때문입니까? No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그 신비한 섭리에 대해서 다 알 수 없습니다. 
왜 야고보는 데리고 가셨고, 베드로는 더 남겨두셨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어요. 

그렇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통해서 
야고보가 끝까지, 자기 목을 내놓을 때까지, 순교할 수 있을 때까지 
그의 신앙과 믿음을 지켜주셨어요. 그가 순교할 수 있도록 지켜주셨어요. 

그리고 베드로는, 남아있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끄집어내는 방식으로 지켜주셨어요. 
주님이 어떻게 행하실지는 우리는 다 알지 못해요. 

그렇지만 주님이 어떤 주권으로, 그분이 어떤 뜻대로 행할지 다 알 수 없지만 
그러나 그 주권을 인정하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해요. 

야고보를 순교로 데리고 가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려야 하고, 
베드로를 남겨두신 그 하나님의 뜻에 우리는 합당하게 감사하면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란이 찾아올 때, 먼저 피하기도 해야 됩니다.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박해가 오고, 또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서거든 
너희는 산으로 피해라 ... 이렇게 얘기했어요. 

박해가 있을 때 무조건 당당하게 나가는 게 아니고 
박해가 있으면 '이 동네에서 저 동네에서 피하라'고 말씀해요. 


◑2.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한 가지 더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싶은 것이 있어요.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을 때, <공의를 구하라> 는 것입니다. 

본문 행12장의 이 박해 스토리가, '박해가 있었는데, 은혜를 구했다. 
그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셔서 베드로는 탈출했다' 이걸로 끝나지 않고, 
그 박해자의 종말, 박해자가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를 짓고 있어요. 

 

이 12장 마지막은 박해자의 결국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단 말입니다. 
12:23 '(야고보를 죽인)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이 사건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12:20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니 
그들의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먹는 까닭에 한마음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설득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
21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

두로와 시돈에서 온 사절단이, 헤롯을 방문한 것입니다.
'평화 조약 체결'을 발표하는 날이었던 듯합니다. 

'저희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먹는 까달에' :20 
두로와 시돈은 솔로몬 시대 이후(왕상5:9, 스 3:7) 
식량을 유대지역으로부터 수입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헤롯은 어떤 사건이 있었고, 그 보복 조처로 시돈과 두로 지방에 대해 
아마 식량 공급을 중단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래서 두로와 시돈의 사절단이 와서, 헤롯을 방문한 것입니다.
그 날 백성들 앞에서 연설하던 중에, 이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박해하던 자가 하나님께 심판받았다... 이 이야기로 박해의 스토리를 마무리됩니다. 
그런데 교회를 박해했던, 야고보에게 손을 대고 베드로를 체포했던 이 헤롯이 
심판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23 

12:21절부터 다시 보면,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여기에 대해서 요세푸스라는 역사학자가 이렇게 기록을 남겼어요. 

우리가 연예인들이 꾸미지 않고 그냥 우리처럼 있으면 그냥 뭐 비슷하잖아요. 
그런데 무대에 올라갈 때, 화려하게 꾸미고, 거기에 무대 조명을 비추면
뭔가 달라 보이거든요. 

그런데 옛날에 '헤롯이 왕복을 입었는데 은색 은빛이었다'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은으로 치장한 옷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단상에 앉았는데, 그날 햇볕이 쫙 비쳤는데 
햇볕이 헤롯에서부터 반사되어서 비춰가지고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는 거예요. 
옷에서 반짝반짝 빛이 엄청나고 신비하게 반사되었나봐요.

그러니까 백성들이 보니까 '와 신이다. 그의 연설은 신의 소리다' 이렇게 또 아부도 좀 했겠죠. 
두로와 시돈의 사신들은, 자기들이 그 왕국에 있는 곡물을 먹으니까. 
그리고 헤롯이 자기들을 미워하니까, 마음을 좀 풀어주려고 했던 것도 있었겠죠. 

그때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자기가 마치 신인 것처럼 그렇게 행동했다는 거죠.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23 
헤롯이 군중들이 자신을 추켜 세우는 함성을 듣고 매우 만족해 했다는 거죠. 
이는 루스드라에서 그 주민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추대할 때 
바울과 바나바가 옷을 찢으며 그들을 만류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을 전했던 것과 매우 대조적입니다.  14:8~18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베드로를 구출하기 위해 나타난 것과 같은 `주의 사자'였습니다. 
헤롯을 '쳤다'는 것으로 
7절에서 잠들어 있는 베드로를 '쳤을' 때와 같은 말입니다. 
주님은 이 모든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가만히 지켜보시다가, 필요한 때는 꼭 필요한 조처를 하시는 것입니다.

요세푸스는 헤롯의 죽음에 대해 상세하게 서술하기를 
헤롯이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인해 5일 후에 죽게 됐는데 
몸이 썩어 벌레가 생겨났다고 합니다.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헤롯이 어떻게 벌레에게 먹히게 된 것인지 전혀 알 길이 없죠. 
다만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교회를 박해했던 헤롯의 비참한 최후를 강조하는 것이죠.
누가는 이같은 묘사를 통해 
교회를 박해하는 자가 맞게 되는 최후가 얼마나 비참한가를 보여줌으로써 
독재자들이 기타 교권주의자들이 박해를 못하도록 경고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헤롯을 죽게 한 것이 주의 사자였다는 것은 
박해자를 하나님이 그냥 두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손을 대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손을 대는 것은 
단순히 사람이 사람을 괴롭히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께 반역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이 땅을 통치하고 계시니, '하나님 공의를 실행해 주십시오'
성도는 그렇게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94:1~3에 '여호와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빛을 비추어 주소서
세계를 심판하시는 주여 일어나사 교만한 자들에게 마땅한 벌을 주소서
여호와여 악인이 언제까지, 악인이 언제까지 개가를 부르리이까'

이건 사적인 개인의 복수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거예요. 공의를 실행하시는 분이시다는 거예요.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요. '세계를 심판하시는 주여. 일어나사 
교만한 자들에게 마땅한 벌을 주소서' :2

그러니까 '마땅하게 공의로서 정의로서 이 땅을 심판해 주십시오' 
이렇게 성도는, 하나님께 공의를 구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고,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믿으므로, 언제나 환난과 핍박을 당하지만.. 평안한 것입니다.

시94:5~7 '여호와여 그들이 주의 백성을 짓밟으며 주의 소유를 곤고하게 하며
과부와 나그네를 죽이며 고아들을 살해하며
말하기를 여호와가 보지 못하며 야곱의 하나님이 알아차리지 못하리라 하나이다'

'지금 그들이 단순히 사람이 사람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 아니고, 악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통치자이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공의로 이 세상을 다스리지 않습니까? 
정의로 다스리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정의가 실행되도록 공의가 실행되도록 해주십시오!' 

그래서 시94:23절은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그들의 죄악을 그들에게로 되돌리시며 그들의 악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끊으시리니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 그들을 끊으시리로다'
 
그러니 그리스도 인들이 박해를 받을 때,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은혜를 구해야 돼요. 
그러나 이 세상과 그들을 향해서, 공의를 구해야 됩니다. 
이게 같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을 때 
자기를 위해서 은혜를 구하기보다는, 비판하고 불평합니다. 

그리고 저들을 향해서 공의를 실행해달라고 하나님께 구해야 되는데 
사적인 복수를 하거나, 미워하면서... 자기가 병드는 경우들이 많단 말이에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와, 박해라는 단어는 서로 떼놓을 수 없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너희에게는 은혜를 구하고, 저들에게는 공의를 구해라' 
라고 본문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저는 이 사도행전을 쭉 보면서 
'사도행전 11장에서, 12장을 건너뛰고, 바로 13장으로 넘어갔으면 얼마나 좋을까?' 
늘 이런 생각을 합니다. 

11장에, 안디옥에 교회가 생기고 
거기서 그리스도 인이라는 그러한 칭호를 받는 그 아름다운 역사, 

그리고 13장에 이제 드디어 그 교회가 바나바와 바울을 파송해가지고 
복음이 세계 끝까지 막 흘러가는 이 역동력 있는 이런 역사, 

이렇게 그냥 행11장에서 13장으로 확 넘어갔으면 좋겠는데, 
근데 사도행전은 그 중간에, 11장과 13장 사이에, '박해'라는 12장을 거기에 뒀어요. 

우리의 인생도 사도행전과 같을 것입니다. 
기쁨에서 기쁨으로, 평안에서 평안으로... 그렇게 넘어가지 않고, 
그 가운데 행12장이 있는 것처럼, 
우리 삶 속에도 우리가 진짜 그리스도 인이라면 
정말 그리스도 인답게 살고 있다면, 
'박해'라는 단어는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박해를 받거나 핍박을 받을 때, 이상히 여기지 마십시오. 벧전4:12
오히려 내 삶에 갈등도 없고, 뭔가 핍박도 없고, 부딪힘도 없는 것을 
이상히 여기셔야 됩니다. 

벧전4: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본문 행12장의 처음과 끝이 어떻게 다른가도 우리는 봐야 해요. 
12장의 처음이 어떻게 시작됩니까? 

야고보가 순교하고, 베드로가 투옥되고, 교회는 침체되고 있어요. 
그런데 이 12장의 마무리는 어떻게 됩니까? 

베드로는 탈옥하여 풀려나고, 즉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구원을 얻고 
그리고 헤롯은 심판을 받고... 

그러니 우리도 우리 삶 가운데 분명히 어려움이 찾아올 것이지만 
이 12장이 어려움에서 기쁨으로 변화되었던 것처럼 
하나님은 반드시 은혜 가운데서 우리를 돌이키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12장이 뒤집어진 것처럼, 우리의 삶 속에도 뒤집기의 은혜를 주실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박해를 지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론은 바로 24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흥황하여 더하더라' 
언제나 주와 하나님의 나라 승리한다는 거예요. 말씀이 승리한다는 거예요. 
말씀 편에 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형식의 문장은 6:7과 19:20에서도 나오는데 
기독교의 거침없는 성장을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교회가 흥황하여 더하더라'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은 흥황하여 더하더라'고 한 것은, 
당시 초대교회의 부흥과 확장의 가장 근본 동력은 '말씀'이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본문 행12장은 '교회가 받은 핍박 중에 그 승리'가 주제요, 주된 스토리입니다.
그렇지만 그게 사도행전의 주제 main theme 가 아니고, 
주제는 '그 핍박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복음이 더욱 왕성하게 퍼져나갔다'는 것입니다.

굳이 예를 들면, 누가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자동차 펑크도 나고, 멀미도 하고 해서 구토도 하고, 길을 잃어 도중에 헤메기도 했다...
그 얘기의 전체 주제는 뭡니까? '(어려움 가운데서) 서울로 올라갔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죠.
'도중에 어려움이 많았다' .. 그게 전체 주제, 큰 그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6: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19:2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이것을 기억하면서 박해를 받을 때에 우리도 동일하게 은혜를 구하며 
또한 공의를 구하며, 이 결론을 기억하면서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