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보는 눈이 거듭나야 한다 2024.06.02. - YouTube
◈사람보는 눈이 거듭나야 한다 행10:9~16
여러분들이 진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면,
우리 안에 뚜렷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 중에 하나가,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지는 겁니다.
사람 보는 눈이 달라지면, 내 삶 전체가 바뀌어지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대단히 유명한 본문입니다.
복음이 유대인에게서부터 이방인에게로 전해지는, 아주 중요한 분기점 역할을 하는 지점입니다.
행10장에서 백부장 고넬료의 온 가족들, 집안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그래서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도 전해지는 터닝 포인트가 되는,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장벽은, 도저히 극복이 안 되는 인간관계를 대표하는
그런 장벽이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지금까지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또 아랍 간의 전쟁 이야기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잖아요.
결코 하나 될 수 없는 둘을 상징하는 것인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 안에서, 그 장벽이 무너진 사건이 오늘 본문입니다.
사실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지게 된다'는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주신 예언입니다.
행1:8절에 보면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끝까지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지게 될 것이다' 라고 주님이 그렇게 예언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주님의 예언이 한동안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성령이 임하시고 난 다음에도!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그들의 마음 속에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해질 것이라고 솔직히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조차도 그랬습니다.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임하고,
또 예수님의 복음을 그들이 받아들이고, 그들도 다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베드로조차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들 속에 있었던 이 편견,
사람을 볼 때, 주님의 눈으로 보지 않고,
자기가 자라난 배경, 알고 있는 생각과 감정에 묶여있는 이 편견 때문에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없는 상황이 한동안 벌어졌던 겁니다.
▲실제로 세계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일에 어려움이 되는 장벽은
어떤 핍박도, 또는 그 복음 전하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
또는 그 일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이 적은 것도 아니고
이미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는 우리들 안에 있는 편견,
사람에 대해서 보는 눈이 제대로 열리지 않은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역사를 못 하시는 것이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의 편견이 실제로 우리가 가정 안에, 우리의 교회 안에,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안에
우리 주님이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고 싶어 하시는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는 문제를 가지고 오게 됩니다.
제가 어릴 때 저는 부산에서 자랐습니다.
우리나라가 선교 초창기 때, 그때 대부분 예배당은 마루 바닥이었습니다.
의자에 앉아서 예배드리는 사람 없었어요.
다 마루 바닥에 앉아서 예배를 드렸죠.
그러다가 당시에 서울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부터
예배당 안에 의자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의자에 앉아서 예배 드리기 시작한 거죠.
그때 어떤 목사님이 '의자에 앉아서 예배드리는 것은 불경하다.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예배가 아니다.' 그렇게 막 주장하는 일들도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면 정말 코미디 같은 일이죠. 그런데 그런 시대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생각이 굳어진 것, 즉 편견이
하나님의 영광과 주의 뜻을 가리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요.
사실 지금도 그 점에 대해서 우리가 자유롭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근대 선교의 문을 열었던 윌리엄 캐리,
그는 1700년대 말에서 ~ 1800년대 초까지 살았던 사람입니다.
개신교의 근대 선교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
1793년 윌리엄 캐리의 인도 선교를 위한, 선교회를 조직할 때부터 라고 말할 수 있죠.
그런데 그 당시에 영국에 있는 많은 성직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왜 복음을 전하러 다른 나라로 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윌리엄 캐리가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한 인도나 여러 민족들에게
우리가 가서 복음을 전해 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했을 때
어느 목사님이 윌리엄 캐리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보게 젊은이, 그만 열 내고 자리에 앉게나.
만약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개종시키려고 한다면,
자네나 우리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하나님이 직접 하실 수 있을 걸세'
당시는 사람들이 그런 생각(편견)에 사로잡혀 있어서
1700년 말까지도 선교사를 보낼 생각들을 하지 못했었다는 거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려면, 주님이 정말 하시고 싶은 일이
우리 자신과 가정과 교회와 우리 사회에 일어나려면
가장 먼저 우리 안에 사람을 보는 눈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베드로 안에 이방인들에 대한 마음이 거듭나는 과정을 우리가 봅니다.
아주 자세하게 그 과정을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우리 안에 사람에 대한 편견이 바꾸어지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방인에 대한 베드로의 편견이 너무나 강했기 때문에, 그가 한순간에 바뀐 게 아니었던 거예요.
베드로가 욥바에 다비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와서, 다비다를 다시 살려냅니다.
그 다음에 욥바의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기거하고 있었어요.
하루는 베드로가 하나님께 기도하려고 그 집 옥상에 올라가서
기도를 하고 있는 중에 시장한 가운데 환상을 보게 됩니다.
하늘에서 큰 보자기 같은 것이 내려오는데, 온갖 동물들이 그 속에 담겨 있는 거예요.
그 동물들은, 율법에 의하면, 먹을 수가 없는 동물들이었습니다.
그때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려오는 겁니다. '베드로야 그 짐승들을 잡아먹으라!'
베드로는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것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여'라고 부른 걸 보면, 하나님의 음성인 줄 베드로가 알았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잡아먹으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그만큼 강했던 거예요.
하나님도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베드로는 자기 생각이 굉장히 강했고
그게 조금도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생각이 굉장히 무섭습니다.
하나님도 마음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 생각과 마음을 하나 바꾸는 일이 어려워요.
'두 번째 소리가 들려오는데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그런 주님의 음성을 들려주셨는데, 이 음성을 세 번 들려주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잡아먹어라.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
그 음성을 세 번이나 들려주신 거예요.
그때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서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를 모셔가려고 그 집에 도착했습니다.
만약에 베드로가 너무나도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듣지 않았다면,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가지 않았을 겁니다.
고넬료가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고, 선행도 많이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알았어도... 그는 안 갔을 거예요.
워낙 강력하게 하나님이 (3번이나) 말씀하셨기 때문에... 머뭇거리며 가게 됩니다.
베드로는 죽었던 다비다를 살려냈던 사람이에요. 바로 그 다음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굉장한 대조죠.
죽은 다비다도 살려냈던 베드로, 그런 참 주님의 능력으로 사역했던 베드로였지만
이방인들에 대한 생각만큼은 돌덩이처럼 굳어져 있었습니다.
그 베드로를 고넬료의 집에 보내서,
고넬료의 집에 성령이 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얼마나 고심하셨을까요?
베드로의 생각을 바꾸려고, 하나님이 얼마나 섬세하게
먹지 못하는 짐승들을 환상 중에 보여주면서 '먹으라'고 한다든지,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속마음을 바꾸시려고 얼마나 섬세하고, 또 오랜 시간을 들여서
베드로를 설득하시는지를... 우리가 오늘 성경에서 보게 됩니다.
사람에 대한 생각을 바꾸려고, 하나님은 우리들에게도 똑같은 일을, 하고 계시다는 겁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가서 깜짝 놀랐어요.
하나님의 강권하심 때문에 가긴 갔는데,
진짜 고넬료의 집에 모인 그 집안 사람들에게
(행2장과 똑같은)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가 너무너무 놀랐어요.
그리고 자기가 이방인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10:34 '하나님은 참으로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자기가 얼마나 편견에 사로잡혔는지를 그제야 고백을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사람을 보는 우리 눈이 거듭나는 일은,
사람마다 다 다르긴 합니다만, 굉장히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꼭 기도해야 될 것은 하나님
'하나님, 제가 속히 눈이 바뀌어지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 안에서 제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도록,
빨리 주님이 원하시는 그 마음, 주님이 보시는 그 눈을 제가 가지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를 바꾸기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음을 우리가 성경에서 보잖아요.
▲그에 비해서 사도 바울은, 이방인 선교를 위해서 자기 모든 것을 다 버립니다.
베드로는 이후에도, 이방인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 계속 주춤주춤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갈2:12
우리가 나중에 보게 되겠습니다만, 결국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죠?
베드로는 이 부분쯤에서부터 세계 선교의 커튼 뒤로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사도바울이 대신 차지하게 돼요.
사도바울이 사도행전의 주역이 됩니다.
베드로와 사도바울의 차이가 뭘까요?
이방인에 대한 마음의 자세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은 베드로를 설득하기가 많이 힘드셨어요.
물론 베드로는 결국은 마음의 문을 열기는 열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너무 답답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에 비하여 사도바울은, 어떤 어려움, 어떤 수모를 겪고도,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배설물 같이 버릴지라도,
그는 이방인 선교를 위해서 모든 것을 겁니다.
하나님이 사도바울을 보시기에 얼마나 기뻤을까 하는 걸 알 수 있는 거죠.
베드로에게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내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
이 말씀을 세 번이나 하셨다고 했는데, 오늘날 우리에게도 주시는 말씀이에요.
'하나님이 받으시는 사람을, 네가 거부하지 말아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네가 미워하지 말아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를, 네가 무시하지 말아라'
우리의 가정사 안에, 교회 안에, 또 우리의 사회생활 안에
사람을 대할 때, 정말 주님의 마음을 구해야 합니다.
'주님은 그를 어떻게 보실까?'가 중요한 거예요.
'나에게 그가 어떤 사람인가?' 보다는...
▲한 번은 제가 너무 같은 죄에 계속 넘어지고 넘어지는 것 때문에
한 순간에 마음에 낙심이 왔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더는 용서하지 않으실 거야'
저도 정말 양심이 있으니까, 더 이상은 용서해달라고 기도도 못하겠더라고요.
'이제는 하나님도 (그 문제에 있어서는 나를) 포기하셨을 거야'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여전히 저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너무너무 감동하고 울었습니다.
그러면서 제 마음에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하나님이 왜 이렇게 계속해서 용서하고, 또 용서하고, 용서하시나?'
그때 주님이 제게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너도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제가 끊임없이 죄에 무너지는 존재인 것을,
저로 알게 하시고, 그로 인한 애통함과 좌절감을 겪게 하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용납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신 이유가
저도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하라는 거예요.
죄인을 볼 때, 잘못하는 사람을 볼 때, 계속 무너지는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이 제게 하신 것처럼, 너도 그를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계획인 것입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사람에 대한 저의 태도가 엄청 바뀌었습니다.
▲한 목사님이 선교 세미나 때문에 케냐를 가시게 됐는데
중간 기착지에서 케냐 항공으로 비행기를 갈아타셨어요.
그런데 그때부터 굉장히 힘드셨대요.
비행기가 한 시간 지나서 늦게 출발한 것도 그렇지만,
우선 비행기 안이 너무 더럽고, 기내 화장실에는 물도 제대로 나오지도 않고,
냄새도 너무나 많이 나고... 그 비행기 안에 타고 있는 케냐 사람들은 너무 시끄럽고
하여튼 모든 것이 다 불편하더래요.
케냐에 도착을 했는데, 너무너무 공기도 (매연으로) 탁하고,
그리고 도로도 너무 많이 막히고, 그리고 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 쓰레기를 창밖에다 마구 버리는 것도 보면서,
도무지 케냐 사람들에 대해서 정이 안 가고...
이런 마음 가지고 자기가 케냐의 목회자들에게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이건 아니라고 생각이 들더래요. 그래서 하나님께
'하나님, 이 케냐 사람들에 대한 제 마음이 이래가지고는, 제가 무슨 말씀을 전하겠습니까?'
그때 불현듯 생각이 나기를, '1백년 전에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하러 선교사님들이 오셨을 때,
그때 선교사님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래요.
그때 당시에 한국에 왔던 선교사님들은, 다 미국과 유럽 분들입니다.
그분들이 그때 당시에 한국 조선에 왔을 때, 그때 그들은 그랬어요.
어떤 역한 냄새들, 또 정말 먹기 힘든 음식들, (선진화되지 못한) 생활 문화,
아마 대단히 고통스러웠을 거라는 거예요.
여러분들도 다 잘 알다시피 켄드릭 선교사 묘비에
'나에게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고 해도, 그 모두를 한국을 위해 바치리라'
그렇게 쓰여져 있죠.
아펜젤러 선교사님이 복음을 전하러 가다가 목포 앞바다에서 순교하셨는데
그 따님 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 선교사의 묘비에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 그렇게 새겨져 있어요.
케냐에 오신 그 목사님은, 그 생각이 떠오르면서, 너무 부끄럽더래요.
'우리 한국이 그래서 복음을 받았는데, 나는 왜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그랬던 고백을 하신 것을, 참 저도 마음에 깊이 새겨 들었습니다.
▲사람을 보는 눈이 항상 똑같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객관적이지 않아요.
주님이 보시는 눈으로 보지 않으면,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가 없는 거죠.
혹시 여러분 중에, 여러분 주위에 짐스러운 사람이 있습니까?
또 여러분을 고통스럽게 하는 가시 같은 사람도 있습니까?
도무지 함께하기 싫은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그 복음이 너무 필요한 것입니다.
내 감정, 내 생각으로 사람을 보지 않고, 오직 주님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되는 것,
그때부터 우리를 통하여 주님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해요.
주님이 주의 일을 하기 시작하시는 겁니다. 이건 우리의 중요한 기도 제목이어야 합니다.
인도에서 사역하시다가, 지금 네팔에 계신 조동O 선교사님이라고 계신데
그 선교사님의 기도 편지가 늘 제게는 참 잊혀지지 않습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 좀 많이 해주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모든 사람을 더욱 깊이 사랑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아직도 철이 덜 든 것 같습니다.
제가 사역하는 이곳에는, 어려운 일, 힘겨운 상황이 많이 생깁니다.
그런 일들 뒤에는, 덫에 걸려 나무에 매달린 짐승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하며
나무 밑을 어슬렁거리는 큰 짐승처럼, 저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는 정도의 믿음은 얻었습니다. 감사하죠.
제게는 저들을 미워할 시간도 없을 뿐더러, 그럴 마음이 생기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저들을 긍휼히 여기고, 격려하고자 하는 마음이 앞섭니다.
그러나 더 너그럽게, 더 다정하게, 더 부드럽게 저들을 품어주고 격려해 주지 못하는
저를 발견하게 됩니다.
저를 더욱 안타깝게 하는 것은,
저들의 나를 향한 이유 없이 미워하는 마음에 감동을 안겨
저들이 미움의 줄을 스스로 풀어놓을 정도로
나의 사랑이 큰 위력을 가지지 못하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정말 큰 사랑, 아무나, 아무것이나 녹여내릴 수 있는 농 익은 사랑을 가질 수 있도록
저를 위해 기도 부탁드립니다. 제가 참 마음이 괴롭습니다."
그 선교사님의 초창기 때 보내준 그 편지가
그 이후에 사실 제 기도 제목이기도 했어요.
오늘 함께 예배하는 여러분 모두의 기도 제목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나를 미워하고 죽이려고 하는 사람까지도 마음을 바꿔낼 수 있는 그 사랑,
그건 정말 예수님의 눈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계속 주목하고 바라보자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겁니다.
'주님이 나를 통하여, 그 사람을 만날 수 있게... 그렇게 될 수는 없을까?'
▲제가 부산에서 목회할 때, 하루는 교회 로비에서 굉장히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어요.
무슨 일인가 하고 나와봤더니, 술 취한 행려자가 교회 사무실에서
돈을 달라고 요구하다가, 사무실에 찾아오는 사람에게 한 500원씩 이렇게 드렸는데,
그 돈이 적다고 막 행패를 부린 거예요.
할 수 없이 직원이 경찰에 연락을 해서, 경찰관이 와서 끌고 나간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끌려 나가면서 '교회가 이래도 되냐? 도와달라고 왔는데 교회가 이래도 되냐?'
막 소리를 지르면서 끌려나가는 거예요.
제가 교회 사무실에 계시는 우리 전도사님, 또 사무원, 집사님의 고충을 충분히 알지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정말 그분들을 대하기가 곤혹스러운 일인데,
이렇게 술이 취해서 오시는 분들은 대책이 없어요.
행패를 부리기 시작하면, 정말 위협을 느낄 정도입니다.
그 직원들의 마음은 충분히 제가 이해하지만,
그러나 그 행려자가 끌려 나가면서 '교회가 이래도 되냐?'고 소리 지르는 것도
계속해서 제 귀에 쟁쟁하더라고요.
'교회가 예수님의 몸인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경찰 불러다가 끌어냈을까?' 그건 아니었을 것 같아요.
그래서 고민하고 고민하면서 '주님, 어떻게 해야 됩니까?
어떻게 해야 저희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럴 때 제 마음에 '배고파서 오는 사람에게는 밥을 주고,
몸이 아파서 오는 사람에게는 약을 주어야 되지 않냐?'
돈을 주면 그 돈으로 술을 사서 드시니까 돈을 줄 수는 없지만
밥은 드리고 약은 드려야 되지 않겠나?
그래서 교회에서 의논을 해서, 그때부터 행려자들에게 밥을 해주기 시작했어요.
몸이 아프다 하시는 분에게 약국에 가서 약을 사다 드리고...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점점점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져요. 밥 해드리는 것 때문에...
1998년 초에 IMF가 터지고 하루에 2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아침에 밥을 드시러 오시는 겁니다.
그때 당시에 부산제일교회 주일예배 출석이 한 300여 명 정도쯤 될 때입니다.
그런데 매일 200명 식사를 해내야 돼요. 이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죠.
그런데다 동네 사람들이 너무너무 싫어하는 거예요.
그냥 노숙인들 행려자들이 한 200명씩 매일 교회에 왔다 가니까
동네 분위기가 안 좋아진다는 거죠.
그런 말을 들으면서도 '교회는 교회다워야 하니까' 그래서 아침 급식을 매일 했었어요.
그런데 그때 아주 큰 사건이 하나 생겼습니다. 교회에 도둑이 든 거예요.
제가 그 전날 밤에 꿈을 꿨는데, 도둑 둘이 들어오는 꿈을 꿨습니다.
그리고 새벽기도 나가 보니까, 교회 사무실 문짝이 뜯기고, 서랍들이 다 열리고
난리가 났었습니다. 도둑이 들었던 겁니다.
그때 제 마음속에 참 이상하죠? '이거 노숙인들이 한 거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아무런 근거도 없었어요. 왜냐하면 하도 그런 말을 많이 들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교인들 중에서도 '목사님, 교회에서 이런 사람들이 자꾸 교회에 자꾸 오면,
교회에 흉한 일이 생길 겁니다.' 하면서 은근히 반대하시는 의견이었어요.
그런데 '그 교인들이 하는 말 그대로 이런 일이 생긴 거구나'
그런 생각이 들면서 엄청 섭섭하더라고요.
'우리가 그렇게 잘 섬기고 대접해 드리려고 했는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악하게 대우하시나?'
새벽기도회를 인도하고 그리고 기도하는데.. 제 마음이 너무 불편해요.
'앞으로 급식도 하지 말고, 교회 단속이나 잘 해야 되겠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꿈에 도둑이 둘이 들어왔던 생각이 드는 거예요.
'한 도둑은 사무실에 어젯밤에 와서 그렇게 다 뒤져갔고,
아직 도둑이 하나 더 남았구나'
그때 그 도둑이 바로 제 마음속에 '사람에 대한 믿음을 뺏어가려고 하는 도둑이다'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실제로 생각해 보니까, 감사할 게 너무 많은 일이에요.
문짝을 뜯어낼 정도까지 그렇게 대단하게 사무실을 뒤지고 갔는데도
교회 안에 주무시는 권사님들이 계셨어요.
새벽기도 오시기 힘드니까, 밤에 교회에 오셔서 주무시면서 기도하시고
새벽기도 하시고 돌아가시는 분이신데, 그런데 이 권사님들이 소리를 못 들으신 거예요.
만약에 소리 듣고 나왔다면, 사람 다칠 일도 있었겠죠.
사무실에 있는 돈이 뭐 얼마 없으니까, 그냥 잃어버린 것도 사실 금액으로 따지면 별것도 아니고...
그렇게 감사하고, 무엇보다 그걸 급식하러 오시는 노숙인들이 했다는 근거가 없어요.
내가 괜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 수 있는 거죠.
마음을 바꿔먹고, 새벽기도 끝나고 2층 예배당에서 내려오는데
벌써 노숙인들이 교회 로비에 쫙 앉아 계신 겁니다. 아침 밥을 먹으시고.
교회에 그런 난리가 난 걸 전혀 알지 못한 채...
그런데 인사가 너무 제 마음에 반갑게 인사가 되더라고요.
그러지 않았으면, 아마 그날 제 얼굴 표정이 쉽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그분들에게 정말 반갑게 인사를 드리는데, 마침 그때 비가 왔었습니다.
노숙인 한 분이 제게 다가오셔서 '자기가 지금 신발이 다 젖었는데
양말 하나 얻을 수 없겠냐?'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갑자기 양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새벽에 신고 나온 양말인데
제가 이거라도 벗어드릴까요?' 그랬더니 얼른 벗어달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 자리에서 양말을 벗어드리고, 그러면서 제 방에 들어와서,
'아~ 정말 하나님이 첫 번째 도적은 못 막았지만, 두 번째 도적은 막게 하셨구나'
그런 마음이 들었어요.
그 일이 부산제일교회에 굉장히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급식소를 따로 마련해야 될 정도로 사람이 많이 찾아오니까
앞으로 땅을 사고 식당도 지어야 되는데,
그 어려운 때 1998 IMF 때, 땅도 사게 되고, 식당 건물도 짓게 되고...
무엇보다도 교회 분위기가, 정말 생명을 살리는 분위기,
누구도 사랑할 수 있는 그런 분위기로 완전히 바뀐 거예요.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면, 누구나 다 주님의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저는 사실 일본 사람들에 대해서, 그렇게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아닙니다.
북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렇고... 중국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렇고...
또는 제가 제 나름대로의 어떤 신앙적 경향성이 있기 때문에
무슨 진보주의자들에 대해서도 그렇고,
또 아주 어떤 극단적 은사주의자들에 대해서도 그렇고,
못마땅한 사람,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이 제 주변에도 많았어요.
그런데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의 복음을 정말 붙잡고
그리고 나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계속 바라보면서
일본 사람에 대한 제 마음이 달라졌어요.
일본을 몇 번 오고 가면서, 일본에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목회자들이 너무나 존경스럽더라고요.
이건 정말 놀랍더라고요.
북한에 대한 제 마음도, 하나님이 바꾸셨어요.
물론 못마땅한 일이 참 많지만, 결국은 우리가 복음으로 그들을 품어야 될
우리의 동족, 동포라는 것입니다.
중국 사람들에 대한 마음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중국 안에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이 얼마나 놀라운가,
중국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가를 알게 하셨어요.
제가 교회 연합운동을 어떤 형태로든지 섬기게 되면서
교단의 차이, 신학적인 차이에 대해서도, 눈이 완전히 열리게 됐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귀한 형제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사람은 바뀝니다. 특히 사람 보는 눈이 달라지게 됩니다.
이방인 선교에 대해서 문이 열리는 사도행전 10장은, 선교에만 적용되는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의 가정관계 안에, 그리고 우리의 교우관계 안에,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주님은 우리 안에 사람 보는 눈이 거듭나는 역사를 이루십니다.
꼭 그 일을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주님께서 놀라운 일을 우리 모두를 통하여 이루시게 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