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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다니에 머무신 주님 마21:12~17
종려주일에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그 한 주간 낮에는 예루살렘 성안에서 활동하셨습니다.
성전 청결을 결행하시고,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비유를 말씀하시고,
서기관,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벌이셨습니다.
그럼 밤에는 어디에 머무셨을까요?
목요일 밤에는 잘 아는 대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다가 체포당하셨고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무덤에 머무셨습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일부터 수요일까지는 어디에서 밤을 보내셨을까요?
베다니에 머무셨습니다.
17절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입성하신 당일만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고
주일, 월, 화, 수 모두 그렇게 하셨습니다.
눅21:37절에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라고 되어 있는데 감람원은 베다니 부근입니다.
이 기록을 가지고 예수님이 노숙을 하시지 않으셨겠느냐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나사로와 그 누이인 마리아․마르다의 집에 머무셨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베다니라는 이름의 뜻은 그렇게 좋지 않습니다
"가난한 자들의 집" "병든 자들의 집" "괴로움의 집", 이렇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2.6Km 떨어진 마을인데
이 마을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남아 있는데 현재의 이름은 엘 아지리예입니다.
"성 나사로의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약 20여 호가 살고 있고 나사로의 무덤을 비롯해서 여러 유적들이 있다고 합니다.
베다니를 생각할 때 우리는 세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베다니에서 보내신 것과 같은 시간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낮에는 예루살렘에서 여러 활동을 하시고 베다니로 돌아오셔서
밤에는 무엇을 하셨을까요?
성경에는 여기에 대한 기록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베다니에서 기도하시고, 준비하시고,
그 다음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시곤 했으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다니로 돌아오셔서 밤에 예수님은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목요일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면 목요일 밤에만 기도하셨을까요? 아닙니다.
고난주간의 매일 밤, 베다니에 머물면서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이번 주간은 예수님에게 있어서 하루 하루가 결전의 날이었는데
그렇게 중요한 하루 하루를 앞에 두고 저녁에 왜 기도하지 않으셨겠습니까?
우리는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을 때 반드시 기도해야합니다.
그리고 기도하고 그 하루를 끝내면 그 하루가 의미 있는 하루가 되고
새벽에 기도하고 하루를 시작하면, 그 날이 중요한 날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예수님은 베다니에 머무실 때
또 그 다음날 말씀하실 것, 가르치실 것, 한 마디로 해서
말씀을 구상하시고 준비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주간 성전에서 가르치신 것들은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대단히 중요한 내용들입니다. 특히 말세에 대한 집중적인 말씀은 *마24~25장
기독교 교리의 중요한 분야가 되고 있습니다.
이 같은 것들을 즉흥적으로 말씀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치밀하게 준비하셨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나오리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기에,
만일 여기에서 그들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들의 공격을 어떻게 물리칠 것인가 고심하며 준비하셨을 것입니다.
베다니에서 예수님은 때때로 흔들리셨을 것입니다.
"내가 과연 이 십자가를 져야 하는가? 지금이라도 피해 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알 수 잇는 것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하는 기도입니다. 밤에는 특히 사람들이 약해지는 일이 많지요.
그러나 기도와 묵상과 말씀 준비로 그런 내적인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낮에 사람들 앞에 서실 때 대단한 위엄과 권위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나사렛 시골의 목수답지 않은 권위를 사람들에게 인정받았습니다.
예수님이 포도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다른 나라에 갔는데
열매를 받으려고 종을 농부들에게 보냈더니 농부들이 그 종을 죽이고 돌로 때렸다,
계속해서 그렇게 했다, 아들을 보내면 존대하리라고 생각하고 아들을 보냈더니
농부들은 '이 아들은 상속자이니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죽여 버렸다" 마21:33~46
이런 내용입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이 비유를 듣고
여기 나오는 악한 농부가 자기들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는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선지자로 알기 때문에 무서워서 잡지 못했습니다. 그럴 정도로 권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밤에 베다니에 홀로 계실 때, 또는 가까운 몇몇 사람들과 있을 때도
변함없이 품위 있는 모습을 지니고 메시아다운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사람들 앞에 있을 때와 홀로 있을 때가 다르지 않았습니다. 낮과 밤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성전 안에 있을 때와 성전 밖에 있을 때가 다르지 않았습니다.
맹자는 군자기독신(君子其獨愼)이라고 했습니다.
"군자는 혼자 있을 때 삼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온전하게 이루셨습니다.
우리도 낮과 밤이 달라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 앞에 있을 때와
혼자 있을 때가 달라서는 안 됩니다.
성전 안에 있을 때와, 성전 밖에 있을 때가 달라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베다니에서 쉬시기도 하셨습니다.
수요일에는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하루 온종일을 베다니에서 쉬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3년 가운데 유일하게 하루를 온전하게 쉬신 날이
이번 주간의 수요일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여러분, 이 주간에는 세상의 분주한 일들을 좀 멈추시면서
영적인 일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이번 주간 기도에 힘쓰면서, 묵상하면서, 말씀에 집중하면서,
세상의 일을 좀 쉬면서 영적인 일에 집중하는 한 주간이 되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둘째, 우리는 예수님에게 베다니와 같은 존재가 되어야합니다.
예수님이 베다니에서 쉬셨다고 할 때,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주님이
우리 몸을 성전 삼아, 쉬시는 공간이 되어드려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번 주간에 왜 예루살렘 성안에 머무시지 않고
성밖 좀 떨어진 곳에 있는 베다니까지 가셔서 쉬셨을까 하는 이유는 잘 알 수 없습니다.
이 때는 유월절 무렵인데 유월절이 되면 많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을 찾아왔다고 합니다.
보통 50만 명쯤이 찾아왔기 때문에, 성안에 머물 곳이 없어서
순례자들이 성밖에 머무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었다고 하기는 합니다.
그래도 예수님의 경우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라도
성안에 머무시는 것이 좋았을 텐데... 성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오시곤 했습니다.
우선 성안에는, 초청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오신 예수님에게는 호기심을 가지고 들으러 오는 사람, 구경하러 오는 사람,
따지러 오는 사람, 그리고 허점을 잡으려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많았어도
"예수님, 오늘 저녁은 우리 집에서 묵으시지요" 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저녁이 되면 예수님은 홀로 남았습니다. 이럴 때 사람은 한없이 쓸쓸해집니다.
목사님들이 교회를 개척할 때 제일 쓸쓸한 때가 개척 예배 드린 날 저녁입니다.
개척 예배를 드릴 때는 손님들이 와서 꼭 찹니다.
그런데 저녁 예배를 드리려고 하는데 사모님과 자기 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저녁마다 이런 비애를 느끼셨을 것입니다.
▲미국에 죠지 워싱턴 카바라는 농학박사가 있었습니다.
땅콩을 가지고 수백 가지를 만들었기 때문에 ‘땅콩 박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분입니다.
원래는 아이오와 대학의 교수로 있다가 흑인 동족들을 위해 타스키키 라는 농촌의
농민학원 교사로 부임해서 평생을 보낸 분입니다.
이 분은 시간만 나면 마차에 자기가 개량한 농사 기구들을 싣고
흑인들이 사는 가난한 마을들을 찾아다니며 그 기구들을 보여주며
농사개량에 대한 강연을 했습니다. 대단히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강연을 끝내고 전시했던 기구들을 주섬주섬 마차에 챙겨 실을 때
어느 마을이건 빠짐없이 한 두 흑인이 마차 옆에 와서
"박사님, 감사합니다. 누추하지만 오늘밤은 저희 집에 가서 묵으시지요"
이렇게 은근한 목소리로 초청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힘을 얻고 다음 마을로 떠날 수가 있었다고 그의 전기에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그렇게 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20)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베다니는 예수님에게 있어서 또 하나의 마굿간이 되는 셈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 대해 손님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구경 마치고 돌아가는 구경꾼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베다니 마을처럼,
예수님을 초청하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모시어 들이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베다니는 예수님에게 있어서 가고 싶은 곳이었고
베다니의 사람들은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는 가정이 있었습니다.
임인수(林仁洙)라는 시인이 있었습니다(1919~1967). 한국신학대학을 나온 분인데
이 분이 쓴 "베다니 서정"이라는 시는 한국 기독교 시 가운데 명시의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베다니 서정
베다니의 뜰
베다니의 집
고웁다 베다니의 동구 밖에서
임은 인정스레
웃으시고
말씀 중에 넘치신
그 눈물
그 사랑
쉬어가신 사랑이며
음성이 그리워라」
이런 시입니다. 아주 정겨운 느낌을 주지요.
우리들 가정은 예수님이 찾아오고 싶어하는 가정,
나는 예수님이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님이 오셔서 칭찬하시는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오셔서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시고 대단히 분노하셨습니다.
성전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자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휘두르셨습니다. 에수님의 생애에서 채찍을 든 유일한 사건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승리의 입성"이라고 부르고
성전에서 이와 같이 분노하신 것을 "의로운 분노" 또는 "거룩한 분노"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저희 교회에 오신다면 어떻게 하실까요?
우선 제가 떨려서 설교를 제대로 못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의연하게 설교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설교자의 본분입니다.
우리 교회는 오늘 예수님이 들어오셔서 함께 예배 드리시고, 교제를 나누시고
우리를 칭찬해 주시는 있는 베다니와 같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 우리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베다니와 같은 존재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포근함을 주는 존재들이 되어야합니다.
사람들이 와서 쉬고 힘을 얻을 수 있는 존재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변을 평화롭게 만드는 Peace Maker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지금은 정황이 많이 바뀌었습니다만 저희가 전원교회를 강조했었는데
전원교회의 의미는 그런데 있습니다.
▲영락교회의 처음 이름이 베다니 전도교회였습니다.
북한에서 피난 온 27명의 신도들이 교회를 일본 종교인 천리교(天理敎) 서울본부 자리를
접수해서 교회를 세우고 베다니 전도교회라고 했습니다.
뜻을 같이하는 장로교 목사님들이 모여 한국교회를 위해 할 일을 생각하는데
한경직 목사님은 여자신학교를 세우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여자들 가운데 대표적인 존재인 마리아와 마르다를 생각하고
그들이 살던 곳의 이름을 따서 ‘베다니 전도교회’로 이름을 정했다가
일 년 뒤에 지명을 따서 영락교회로 바꿨다고 합니다.
그곳의 일제시대 당시 이름이 영락정(永樂町)이었습니다.
영락교회는 이북에서 피난 온 성도들에게 정말 포근한 안식의 장소였습니다.
이북에서 피난 온 분들의 생활이 얼마나 고달팠습니까?
그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정말 베다니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주일이면 모여서 안부를 묻고 서로 격려하고 위로했습니다.
이것이 영락교회를 빨리 부흥시킨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목양교회는 모든 사람들, 여러 세대, 여러 계층, 여러 지방 출신들 모두에게
베다니와 같이 포근하고 따뜻하고 새 힘을 주는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제가 졸업한 고등학교 동창들이 취미 따라서, 직업에 따라서, 사는 지역에 따라서
소그룹을 만들어 자주 모입니다. 예수 믿는 동창들이 모여 베다니 모임이란 것을 만들었는데
이 모임이 아주 잘 됩니다.
예수 안 믿는 친구들도 슬금슬금 참석합니다.
이 모임이 이런 식으로 영향력을 넓혀 나가더니
드디어 졸업한 고등학교 안에 교회를 세우기에 이르렀습니다.
기독교 학교들도 고등하교의 경우는
학교 안에 교회가 있는 경우가 드문데, 비기독교 학교에서 이런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동창들 중에 어려운 일을 만나거나 특히 초상이 났을 때는
그가 믿는 사람이건 아니건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도
베다니 모임으로 연락이 제일 먼저 옵니다.
"기도해 다오" "와서 예배 드려다오!" 이것이 사람의 본성입니다.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위로 받고 싶어하고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그런 마음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존재들이 되어야합니다.
▲베다니는 은총의 장소입니다. 예수님은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려 주셨습니다..
마26:6절에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집에서 한 여자가 향유 한 옥합을 예수의 머리에 부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은 베다니에서 시몬의 집에도 잠시 머무셨거나
식사 초대를 받아서 간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병환자 시몬"은 별명입니다. 정말 나병환자라면 마을 안에 들어와 살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나병환자였다가 예수님에게 치유함을 얻어 베다니에서 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베다니는 예수님 때문에 다시 살아난 사람,
예수님 때문에 고침을 받은 사람이 사는 은총의 마을입니다.
예수님은 나중에 승천하실 때도 베다니에서 제자들을 축복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눅24:50절 이하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우리들의 가정이, 우리들이 사는 곳이, 우리들의 교회가 이런 은총의 장소가 되기 바랍니다.
사실 예수님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 예수님 때문에
마음의 질병에서 치유를 받은 우리는 베다니의 주민들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다니의 의미를 잘 생각하면서 기도, 묵상에 힘쓰고 말씀에 집중하며
예수님을 모시어 들이는 존재들이 되고
이웃들에게 포근한 안식처가 되기 위해 힘쓰는 이 주간이 되기를
베다니에 머무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