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메섹 도상에서 일어난 일 행:9:1~15 -
◑도입
자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귀중한 경험은 무엇이겠습니까?
많이 있겠지만, 가장 귀중한 경험은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입니다.
일대일로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이에요. 그것을 우리는 회심이라고 그럽니다.
Conversion 이라고 하죠. 이 회심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반드시 있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의 회심은 굉장히 유명합니다.
황홀한 경험을 하면서, 너무 황홀하니까 움직일 수가 없어요.
완전히 압도 당한 채, 약 두 시간 동안 그냥 그대로 서 있는 거예요.
움직일 수도 없어요. 하나님이 그에게 찾아오신 거죠.
기독교의 역사에 굉장히 유명한 족적을 남긴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 과정도 또 특이합니다.
'톨레 레게', 라틴어로 '집어들어 읽으라'는 말을 들은 것입니다.
보니까 근처 아이들의 노래 소리를 통해서 '톨레 레게' 라는 음성을 들어요.
그래서 갑자기 집에 들어가서 성경책을 들고 딱 폈는데
로마서 13장 끝부분이에요.
그 말씀에 자기가 그대로 꽂혀 버린 거예요. 자기에게 주신 말씀인 거죠.
그러면서 회심을 했습니다.
그 전에 굉장히 방탕한 삶을 살았는데,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 거죠.
우리가 잘하는 C S 루이스는 좀 다릅니다. 그는 의심과 싸우면서 긴 시간을 보냅니다.
굉장히 지성인이잖아요.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어느 날 나는 굴복 했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그 날 밤, 나는 기독교 계의 가장 낙담한 개종자 였다' 그랬습니다.
'내가 그토록 만나지 않으려는 분의, 지칠 줄 모르는 다가오심'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그렇게 안 만나고 싶은데, 하나님이 지칠 줄 모르고 그에게 다가 오셨다는 거죠.
C S 루이스의 경우는, 감정적인 경험은 없어요. 뭐 뜨겁거나 황홀한 경험, 이런 건 없지만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 안으로 조용히 들어간 것이죠.
위의 예에서 보듯이
회심의 과정이나 체험은 개개인이 모두 각자 다르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유명한 바울의 회심 장면입니다. 매우 극적이고 신비로운 경험입니다.
모두가 바울과 같은 경험을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양하게 우리를 부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압도적인 환희를 경험할 수도 있고, 어떤 영적인 황홀경 같은 것을 경험할 수도 있고,
아니면 굉장히 차분하게 하나님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꼭 기적적인 방식이 아니라, 평범하게 불러주시는 경우가 사실은 훨씬 더 많습니다.
자 오늘 본문은 중요한 사건인데, 이 바울의 회심 사건은
사도행전 9장과 22장과 26장에 모두 세 번 나옵니다.
이 바울의 회심은 기독교 역사에 괄목할 만한 사건이죠.
왜냐면 일반 역사가들은 바울을 그렇게 다루지 않지만
우리가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바울을 들여다 보면
그의 족적은 이스라엘의 역사 뿐만 아니라, 세계사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쓴 서신, 그리고 바울에 관련된 논문, 그리고 그를 대상으로 연구한 책들이 있는데,
너무 너무 방대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또 다른 인류의 역사 인물 중에
이렇게 많은 관련된 책을 쓴 인물은, 존재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어마어마한 그런 공헌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약성경의 분량으로 1/3을 기록한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의 회심은 독특한 게, 기독교의 박해자였는데, 예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가장 안 믿을 것 같아 보였던 사람이, 이제 예수를 믿게 되고,
이제는 그 예수를 증거하는 일을 위해서, 핍박을 받는 자가 된 것이죠.
교회 확장을 막으려고 앞장을 섰던 그가, 교회 확장에 지대한 공을 세우는 인물로 변화 되었습니다.
그래서 행9장의 바울의 핵심은, 기독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올라갔던 이 다메섹(다마스커스)은
이제 기독교에서 '전환점'의 상징처럼 되었습니다.
'내 인생에 다메섹이 있는가?'하는 말은 '내 삶에 전환점이 있는가?'하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9:1 '사울이 주의 제자들의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살기가 등등하여'
바울은 종교적 광기에 사로 잡혀 있었다는 겁니다.
이 말의 의미는, 어떤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씩씩거리고 있는 그런 모습이에요.
굉장히 숨을 거칠게 몰아 쉬면서,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그런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러니까 살기가 그 몸 안에서 막 발산되고 있는 상황이에요.
그는 유대교를 지켜내려는 의지가 아주 강했습니다.
그리고 유대교 내부적으로 보면, 그는 굉장히 모범적이고, 열성적인 유대교인이었어요.
문제는 그의 종교적 강한 확신이, 그의 눈을 감겨 버렸다는 거죠.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폭력 적일 수 있는가요?
스데반을 죽이고, 또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가두고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섰던 그의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그렇게 폭력적일 수 있는가?' 의문을 품을 수 있지만,
종교적 신념이 너무 강하면.. 폭력도 불사하게 됩니다.
광신적 신자들은 폭력성을 띄게 되죠. *이게 종교적 신념의 특징입니다. 목숨을 걸죠.
오늘날에도 여러분 중동 안에서, 그런 일들이 얼마든지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죽이면서도, '폭력, 살인'이라고 그들은 생각하지 않아요.
그것을 신에 대한 충성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렇게 그릇된 종교적 확신이 폭력적으로 돌변할 때가 많아요.
▲중요한 것은 복음입니다. 복음이 없는 상태의 종교, 복음이 없는 신념,
복음이 빠져버린 사상... 다 위험한 거예요.
종교의 반대에 무엇이 있습니까? 복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과 종교는 전혀 다른 거예요. 잘 구분해야 합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복음 보다 종교쪽으로 흐르기 쉬워요.
그래서 우리가 교회를 다니지만 늘 조심해야 합니다.
복음을 계속 붙들고, 확인하지 않으면,
우리도 모르게 종교 쪽으로 흘러버려요. 종교는 생명이 없는 겁니다.
그건 인간이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복음은 사라져 버리고,
사람이 만든 시스템과 제도로 존재하고, 서로 판단하고, 쓸데없는 일에 에너지를
소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사울의 지금 모습이에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의 그의 모습은, 철저한 광기어린 종교인의 모습이요,
그런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잡아죽이는 일에, 살기등등해 있었던 거죠.
◑9: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가두려고, 지금 다메섹으로 가는 거예요.
교회를 박멸해 버리려는 거예요.
이미 그는 앞서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을 썼습니다.
그가 신봉하는 신앙과, 그의 성격이 맞물려 매우 공격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확신한 것에 목숨을 거는 스타일 이었습니다.
여러분 여기 문제가 뭐죠? 열심은 열심인데, 잘못된 열심인 거죠.
확신은 넘치는데, 문제는 무지하다는 거예요.
무지한 열정은 악한 것입니다.
다메섹으로 올라가던 중에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9: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이것은 좀 어려운 말로는 현현(하나님의 나타나심) 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나타나셨습니까? 빛으로 나타나셨어요.
사울이 다메섹으로 올라가는 그때에, 이미 주님은 다메섹 도상에 먼저 와 계셔서
그를 기다리고 계셨던 거죠.
그러면서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췄는데,
그 빛이 홀연히 그 인생에 찾아왔어요. 여러분, 이 빛은 상징성을 갖고 있습니다.
'빛이 둘러 비췄다'는 그 말의 의미는 뭘까요?
사울은 그동안 어두움 속에 갇혀있었다는 거예요. 영적 무지 가운데 살았습니다.
영적으로 눈이 감긴 상태에요.
살기등등 하여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러 가는 그의 모습에서, 영적 어둠을 보는 것입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드디어 그의 인생에 빛이 찾아왔습니다.
어둠에서 벗어나게 해 줄 빛, 그 빛은 강렬한 빛이었습니다.
'이 빛이 정오의 빛보다 더 강했다'는 겁니다. 26:13
여러분, 팔레스타인의 태양은, 우리나라보다 더 뜨겁습니다.
그리고 정오의 태양은, 그 빛이 가장 강렬한 때입니다.
그런데 그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비춰진 거죠.
그러니까 사울이 본 빛은, 태양 빛이 아닙니다.
강렬한 하늘의 빛이 임했고, 그 빛이 임하자 그는 한 순간에 고꾸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눈이 가려워져서 삼일 동안 보지 못합니다.
◑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울에게 찾아오신 겁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일대일의 만남이에요. 나와 너의 만남이 일어난 겁니다.
사울은 '내가 언제 박해 했습니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박해한 그것이, 곧 나를 박해 한 것이다'
이 대화는 행26장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나와요.
자 여기에서 예수님은 사울의 이름을 부르시고, 그를 만나 주시고,
그에게 음성을 들려주시고, 그가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깨닫게 하시고,
그의 인생에 반전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인이 되려면, 우리는 회심의 사건이 있어야 됩니다.
교회를 다니는 것만으로 부족해요. '회심했는가?' 이게 중요해요.
회심의 경험이 중요합니다.
오늘도 우리 교회는 이렇게 많은 성도들이 오셨잖아요.
아마 하나님은 좀 다르게 보실 거예요.
'많이 왔구나' 이걸 보시지 않아요. 하나님이 뭘 보시겠어요?
회심한 그리스도 인이에요. 본 어겐한 그리스도 인입니다.
실수 real number 죠. 실제적으로 구원 받은 사람의 수.
'교인 수가 몇 명이다' 그건 우리끼리 얘기고,
하나님의 편에서는 '회심한 그리스도 인의 숫자'
하나님을 진짜 만난 그리스도 인의 숫자를 중요하게 보시는 거예요.
'나는 회심을 경험했는가?' 이건 굉장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물론 자기도 모르게 회심하는 분도 있습니다)
'교회를 몇 년 다녔느냐?' 그건 중요하지 않고
'내 직분이 뭐냐?" 그것도 중요하지 않아요.
'나는 회심을 했느냐? Conversion이 있었었냐?'
가룟유다는 예수의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회심하지 않은 제자예요.
그러니까 제자는 될 수 있어요. 근데 하나님의 자녀는 아직 아니에요.
왜요? 회심이 없었기 때문에!
거의 그리스도 인이 될 뻔한 사람이었지만,
회심이 없었던 사람들을 가르켜 우리는 뭐라고 얘기하느냐 하면
'유사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비슷하지만 아님, pseudo Christian
이 회심의 여부는 우리의 육안으로는 분별할 수 없어요.
회심을 경험했다고... 회심이 전부는 아니죠. 시작이에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회심의 있어야 성장이 있다는 거예요.
회심이 없으면 성장이 안 일어나요.
왜요? 여러분 나무에 뿌리가 없으면, 안 자라요.
물을 아무리 줘도 안 돼요. 시작이 안 됐기 때문에.
자 이 회심은 뭘까요? 하나님에게로 돌이키는 거죠.
우리의 죄를 버리고,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온전히 영접하는 순간입니다.
이것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죠.
어떤 사람은 현격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회심의 순간에,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에, 하나님이 찾아 오셨다는 게 느껴지고
그 경험이 너무 분명합니다. Turn이 분명한 거죠.
이 회심을 분명하게 현격하게 경험한 사람들은
이 모든 천지 만물이 다르게 보여요. 그런 분들이 많으실 거예요.
세계관이 바뀌어요. 가치관이 바뀌어요. 습관이 바뀌어요. 얼굴 표정도 바뀌어요.
다 바뀌어 버려요. *radical conversion
그러니까 현격한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은 물론 주변의 사람도 다 알아요.
'와 너 어떻게 그렇게 바뀌었어?'
속도의 차이도 있습니다. 또 강도의 차이도 있어요.
어떤 사람은 서서히 회심이 일어납니다.
모태 신앙인의 경우, 주로 그런 사람들이 많아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회심을 하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변화가 전혀 없다? 그러면 스스로 의심해 봐야 합니다.
회심이 있었는가를 의심해야 돼요.
이 바울의 의심은 좀 특이하죠. 급진적 radical 이에요.
그리스도를 대적하던 자가,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무릎을 꿇은 거죠.
바울 사도 만큼 확실한 변신을 보기는 어려워요.
회심은 단순한 개인적 차원으로 끝나는 게 아니죠.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살게 됩니다. 대 전환을 이룬다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 히브리어로 회심을 '슈브' 라는 단어를 써요.
'돌아서다. 돌이키다. 회복하다' 그런 의미가 있어요.
구약성경에는 슈브가 1천 번 이상 나옵니다.
회심이라는 단어를 헬라어 단어로 표현하면 방향전환이라는 겁니다.
가던 길로 가는 게 아니고, 돌이키는 거예요.
그래서 구약과 신약 둘 다, 이 회심의 개념은 뭘 의미하느냐?
주인이 바뀌어지는 겁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바뀌어진 거예요.
▲여러분 예수를 믿는 순간, 내 안에 그리스도가 찾아오셔서, 내 삶의 주인이 되시는 거예요.
여러분, 주인이 바뀌면 다 바뀌는 거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찾아오신 거예요.
내가 그 안에, 그가 내 안에 거하시는 겁니다. 이게 이제 회심인 거죠.
그러니까 회심을 경험했다면 변화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터닝이 일어나는 거예요.
모세도, 이사야도, 성경에 나오는 신약의 인물들도 터닝이 분명했어죠.
사울은 확실한 전환을 합니다.
그야말로 전 인격적으로 사로잡힘을 받게 되죠.
이전에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임한 강렬한 빛과 소리들이 그를 압도했습니다.
항거할 수 없는 순간, 완전한 항복!
이것을 우리는 '불가항력적 은혜'라는 표현을 씁니다.
내가 저항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그냥 그를 덮어 버렸으니까요.
하나님이 밀고 들어오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비상 개입, 강권적인 부르심, 사울은 놀란 거죠.
자기가 그렇게 핍박을 했는데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하고 그분이 나타나셨을 때
바울이 얼마나 놀랍겠어요?
그 분과 마주치게 됐을 때, 그는 꼼짝하지 못하고 그분에게 사로잡힙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는 거죠.
여러분이 중요한 순간입니다.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잘못됐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는 겁니다.
이게 은혜예요. 인생이 얼마나 오해와 착각 속에 살고 있는지요...
엉뚱한 길을 가면서도, 자신은 바로 가고 있다고 확신하는 그 그릇된 확신!
그 어둠 속에 있는 자에게 빛이 강하게 임하심으로
사울은 자기가 가고 있에서 완전히 돌이키게 됩니다. 이게 회심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회심하기 전에, 얼마나 무지몽매하게 살아왔는지요...
무지몽매함 속에 살면서도, 그걸 모르고 있으니
거기서 벗어날 길도 없는 삶을 살았던 거죠.
여러분 빛이 비추기 전에는 어둠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빛이 비추어져야 죄가 보이는 거죠.
빛이 비추어지니까 자신의 어리석음이 보이는 거죠.
사울은 그동안 빛이 없이 살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용감하게 살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말도 안 되는 일을 하면서도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가를 과시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고는, 온전한 길을 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소망이 없습니다.
고집을 피우다가 그대로 가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갈수록 빛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어둠 속에 살 때는 자기는 의로웠어요.
자기가 잘 하는 줄 알았어요. 그러나 빛 안에 드러난 자신의 실체를 보니
나중에 무슨 고백을 합니까?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 라는 거예요.
'나는 만삭 되지 못하여 난 자와 같다. 나는 가장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다.'
무엇을 의미하는 거죠? 이런 고백은, 자기가 무지에서 벗어났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소망이 없는 자라는 자기 발견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사울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9:8~9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완전 포로가 됐어요. 생포된 겁니다.
사흘 동안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일시적 실명을 당한 겁니다.
그리고 식음을 사흘 동안 전폐하고, 마치 죽은 자와 같았던 거죠. 거의 죽음을 맛본 거죠.
아니 죽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 사는 겁니다.
주님은 사울이라는 존재 자체를 흔들어 놓으셨어요.
그가 붙들고 있던 사상, 철학, 신념을 다 허물어 버리셨어요.
인간적으로 이 순간은 추락 입니다. 망한거죠.
그동안 그가 쌓아왔던 모든 명예와, 자기가 유대교 안에서 몸부림쳐 왔던
그 모든 수고와 열심이 다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회심의 (처음) 순간은, 언제나 기쁨으로 가득한 황홀한 시간은 아니에요.
전혀 반대일 수 있습니다. 사울은 지금 두려움과 쇼크 상태에 있는 거죠.
그러다가 (나중에) 환희를 맛보는 거죠.
지금 사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기세 등등하여서 다메섹으로 올라가던 그가
이제는 완전히 앞도 못 보고, 사람들에게 끌려서 지금 다메섹으로 들어가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한 순간 인간을 그렇게 무너뜨리셨어요.
이때는 할 일이 없어요. 그냥 끌려가는 거죠.
여러분 하나님이 가끔 우리의 인생을 흔들어 놓으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를 흔들어 놓고,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방해해 버리시고,
우리가 가는 길을 전혀 다른 길로 돌이켜버리게 하시는 일을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고집을 피우면 안 되죠. 주님께 모두 다 맡겨야 합니다.
자 하나님은 사울을 회복시키시죠.
하나님이 아나니아 라는 사람을 붙여 주십니다.
◑9:10~11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아나니아가 펄쩍 뜁니다.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3
그러나 순종하여 사울을 찾아가고, 그에게 안 수하고 그의 눈을 뜨게 하면서
그를 인도해 주는 놀라운 역할을 하죠.
9:18~19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여러분, 회심하기 전에, 우리의 눈에 비늘이 있었어요. 제대로 못 보는 거죠.
이 비늘을 벗겨 주시면, 다시 보게 되는 거죠.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며 강건하여 지니라'
하나님이 아나니아를 붙여 주시고 그를 회복시켜 주시고
육신적인 눈도 밝아지고, 영적으로 소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배척하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습니다.
그가 그동안 비정상적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자
영적으로 회복이 일어나다. 회복과 동시에 무슨 일이 나죠?
20절에 보니까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와~ 바울의 성격이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복음이 너무도 명확했기 때문에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복음이 그의 가슴에 불을 질러 버리니까
그냥 막바로 회심한 그 직후에, 예수를 전파하는,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돼요.
◑9: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갈1: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러니까 이 다메섹 사건은 우연히 아니라는 거에요.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 속에, 예정 속에 일어난 일이라는 거죠.
하나님의 정확한 뜻과 목적이 있어서, 그를 불러주신 거죠.
예수를 핍박하던 그를, 이제는 예수를 증거하는 사람으로 변화시키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거예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고,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리고 그분께 내 전 영역이, 내 전 인격이 그 분 앞에 항복을 하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온전하게 회복되는 역사가, 여러분은 일어났습니까?
이 확실한 변화(회심)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아요.
사울이 어떤 사람이 되었나요?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9:21
회심하고 그리스도 인이 된 시울을 의심하는 사람들까지 있었어요.
'어떻게 저 사람이 갑자기 이렇게 변했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사람, 잡아가던 사람이
어떻게 지금 복음을 전하지? 말도 안 돼!
저러다가 우리를 다시 붙잡으려고 하는 거 아니냐?' 그랬어요.
그런 오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22
▲자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니까 어때요?
그렇게 유대교 수호를 위해서 앞장 서던 사람이
갑자기 홱 돌아서서 복음을 전하니까, 예수 편에 서 있으니까,
유대교인들이 야단이 났어요.
:23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그들은 사울을 죽이기로 결론 내립니다.
사울이 갑자기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사울의 회심은 유대교 사람들에게 충격을 줬습니다.
그가 예수를 지나자, 유대인들이 경악을 하고, 그를 죽이려고 작정한 것이죠.
기독교를 박해하던 사람이, 교회를 위에 앞장 서서 전도하니까
결국 유대교 사람들에게 이제 죽음의 위협을 받는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자기에게 임한 그 빛이
자기에게만 비추어 질 빛이 아니라
'모든 열방, 모든 민족, 모든 이방인들에게 이 빛이 비추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거죠.
바울은 기독교가 탄생하는 일에, 귀하게 쓰임 받은 인물입니다.
복음이 온 세계로 확장되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앞으로 우리가 계속 살펴 보겠지만, 그는 복음을 들고 종횡무진 합니다.
그의 사역은, 사도행전을 보면 그의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의 루트를 따라가 보면,
그가 다녔던 길을 학자들이 계산해 보니까 약 1만6천 킬로예요.
오늘날로 치면 1만 6천 킬로는 그렇게 멀게 안 느껴질 수도 있어요.
근데 2천 년 전에 1만 6천 킬로는 거의 도보 여행이거나, 배를 타고 옮겨다닌 거죠.
지금도 터키 성지순례 여행을 가보면, 지금도 타우러스 산악지대는 *1차전도여행
사람이 넘어가기 어려운 지역이에요.
자동차를 가지고 넘어도, 길이 험해서 넘기 쉽지 않은 지역이라고 합니다.
근데 바울 일행은 육로로 그냥 걸어서 넘었어요.
그 1만 6천 킬로를 복음을 다니며 복음전하는 것,
그리고 그냥 전한 게 아니죠. 곳곳에 생명의 위협이 있었어요.
심지어는 동족이 죽이려고 하는 위협을 받아서, 숱한 죽음의 위기를 거치고도
이방의 사도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여러분 회심 이전과 이후는 전혀 달라요.
빛을 본 사람이 다시 어둠 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요.
문맹인이 글을 깨치고 난 다음에, 다시 문맹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그건 불가능해요.
복음을 경험한 사람이, 다시 이전의 상태로, 어둠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요.
다메섹 도상에서 빛을 본 바울의 인생은, 지독한 박해자, 기독교 반대편에 섰던 자가
예수의 증인이 되어, 예수를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
이 일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바울의 위대함이 아니고, 복음의 능력이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통해서도 당신의 복음을 흩으실 거예요.
오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다메섹 도상의 사건이 있었는가요?
나는 언제 터닝을 했는가요? 빛을 보았는가요?
그 빛 때문에, 내 인생의 무지에서 벗어났는가요?
아, 이거야말로 진짜 내가 살 길이다! 라는 복음을 경험했던 적이 언제인가요?
하나님을 정말 내가 만났던 적이 있었습니까?
회심은... 삶의 대전환이에요. 그리스도를 만나면, 하나님 그 분을 만나면
내 인생에 대전환이 일어납니다. 내 존재가 변하는 거예요. 존재론적 변화!
무엇으로 이 변화된 바울을 설명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유대교에 심취한 사람입니다.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 이에요. 성경에 능통했던 사람이에요.
가말리엘 문하의 지성인이에요. 그냥 대충 믿던 사람이 아니에요.
극우파 유대교에 사로잡혀 있었던, 확신에 차 있었던 사람이고
그걸 위해서 자기 생명을 걸었던 사람이 사울이었어요.
근데 그가 하나님을 만나고, 그 인생이 회심했어요.
예수의 복음을 위해서 생명을 거는 자가 된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 오늘도 하나님의 일하시는 모습은 언제나 흥미로워요.
흥분이 됩니다. 기대가 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여전히 당신(하나님)의 역사를 써 내려가고 계십니다.
그 일에 쓰임 받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교회가 설립 49년을 맞았어요. 이제 장년기예요.
여러분 한 50년 되면, 대부분의 교회가 쇠퇴기로 들어가요.
그리고 백 년이 되면 교회가 사라져 버려요. 서구권의 교회들이 그랬어요.
그러니까 좋은 전통을 가졌는데, 그 전통이 성경 위에 올라가는 거예요.
전통이 지배하면, 그걸 '전통주의' 라고 그래요.
그럼 복음도 그 전통에 갇혀 버려요. 그러면 그 교회는 역사 속에 사라지는 거예요.
쇠퇴기가 시작되는 거예요.
역사가 오래 되면, '종교화'된 집단이 되기가 쉬워요.
사람이 모이면 종교화가 돼요. 경직되고 변화를 말하지만, 변화를 원하는 사람은 없어요.
복음이 마음껏 일할 수 있는 교회인가요?
그리고 그 복음이 복음답게 선포되고, 그 복음 앞에 반응하고, 회심하고, 변화가 일어나고...
이런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 교회는 종교적 체계, 종교적 시스템이 더 강화 돼요.
그러면 경직되게 되어 있어요. 뭐가 제대로 안 굴러가요.
건물이 낡아지듯이 그 교회도 낡아지는 거죠.
여러분, 그동안 우리 교회는 선교 공동체로 달려왔어요.
선교 공동체는 전통적 교회의 모델과 차이가 있습니다.
선교 공동체는 체제 유지형이 아닙니다. 복음을 들고 계속 움직이는 교회에요.
사도행전적 교회에요. 모이고 흩어지는 일이 계속 신축성 있게 반복되는 거죠.
모이고 흩어지고... 모이고 흩어지고...
우리 만을 위한 성을 쌓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을 향해 다리를 놓고, 길을 만들고...
끊임없이 세상 가운데로 들어가서, 그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묻은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는 교회!
복음은 날마다 우리를 새롭게 해요.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하고,
우리를 날마다 변화하게 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가시는
이 흥미 진진함이 있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50년을 넘어 새로운 시대를 바라보는 우리 교회가
이 사도행전적 역사를 이루어 가는 일에 계속 쓰임 받게 되기를 바라고
또 여러분들 개인 개인에, 회심의 경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회심을 넘어 끊임 없이 복음 안에서 변화하고 또 변화 되어서
하나님이 쓰실 만한 도구로, 그래서 사도행전 29장을 써 내려가는 주역들이 되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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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중략된 부분
사울 그는 누구인가요? 사울은 유대교의 가정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리고 열두 지파 중에 베냐민 지파 입니다.
베냐민 지파는 굉장히 호전적인 지파예요.
그리고 이 지파의 조상이 누군가? 바로 유명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을 따서 '사울' 이라고 했을 것이라 봅니다.
실제로 행13:9절에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그랬습니다. 옛날에 우리는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됐다' 이렇게 말을 했는데,
그보다는 본래 '사울 과 바울' 이 두 가지 이름을 동시에 썼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바울은 어디에서 썼느냐? 헬라의 문명권 속에서는 바울로 썼죠.
그리고 유대인으로서의 이름은 사울로 썼죠.
그런 소아시아 길리기아의 다소 출신입니다.
다소는 터키의 남부 지역의 도시입니다.
당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이 다소에 많이 살았는데
굉장히 이 도시는 개방적인 도시였어요.
문화와, 정치와, 그리고 철학과, 헬레니즘의 영양 아래
교육의 혜택을 많이 받았는데, 바울이 그 환경 가운데 성장한 것입니다.
특별히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유학가서 랍비 가마리엘의 문하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나중에 그의 서신들을 보면, 이런 가말리엘 당대 최고의 학자에게서
지성과 논리를 영향받았던 것이, 그의 서신서에 잘 나타납니다.
그래서 바울의 서신은 굉장히 논리 정연하고 지성적입니다.
동시에 그는 성품이 굉장히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로마 제국의 시민권을 갖고 있었던 거죠.
또한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당연히 유대교의 전통을 굉장히 중요시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유대교의 전통을 전통적인 질서를 어지럽힌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을 없애야 된다고... 바울은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믿는 이 나사렛 당 사람들을 박멸하고자 하는,
즉 교회를 파괴 하고자 하는 일에 앞장을 섰습니다.
그리고 그는 종교적 야망이 있었고, 그런 야망은
그 자신의 과격한 성향과 함께 어울려서, 그가 상당히 과격하고 폭력적으로 나타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