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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 교회가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다

LNCK 2024. 6. 11. 11:06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 교회론


안디옥 교회가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다          행11:27~30

◑본문 해석


이방인 지역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가 안디옥 교회였죠. 
본문에서 누가는, 이 안디옥 교회 이야기를 우리에게 더 들려주고 있습니다. 

▲11:27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오늘 본문에 보면, 안디옥 교회를 찾아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디옥 교회까지 찾아왔는데요. 

여러분 이들이 누구이죠? 본문에 '선지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구약에 보면 선지자들이 나옵니다. 
그 구약의 선지자 직분을 그대로 이어받은 직분이 본문의 선지자들입니다. 

당시에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사도들이나 선지자들을 통해 교회에 전달되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교회에 전달했던 자(메신저)들입니다.

(정경이 완성되기 전이라서, 이런 선지자 사역은 당시에 더 활발했을 것입니다.)

엡4:11절에 교회의 5직임이 나옵니다.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 (목사와 교사를 한 직임으로 보기도 합니다)

엡2:20절에,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했습니다.

목사 중에도 '사도 같은 목사', '선지자 같은 목사', '복음 전하는 자'같은 목사,
'목사와 교사 같은 목사'가 있었고, 그들은 협력 목회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모든 직임이 '목사' 하나로 통합되어 내려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교회 안에, 반드시 '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자, 목사, 교사'를 세우신다
말도 있습니다. 그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는' 거죠. 엡4:12

초대교회는, 5직임이 나눠져 있었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음악목사, 교육목사, 행정목사 식으로 나눠져 있었다는 거죠.
그 중에 하나가 '선지자'였습니다 .

28절에 그 선지자들 중의 한 사람 이름이 나오는데 '아가보'입니다. 
아가보의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거짓 선지자가 아니라, 참 선지자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한 교회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순회사역자였는데요. 
교회들을 돌아다니면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이들은 한 지역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있다가 안디옥 교회로 넘어옵니다. 

▲11:28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누가는 이들 중에서 한 사람에게 집중합니다. 바로 아가보 인데요. 
아가보는 신약의 대표적인 선지자입니다. 

아가보는 본문에만 나오는 게 아닙니다. 
행21장에도 또 등장합니다. 

21:10~11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아가보의 예언을 듣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려는 바울을, 사람들이 말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본문에, 아가보가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합니다. 그 예언의 내용이 무엇이죠? 
글라우디오 황제 때, 천하에 큰 흉년이 든다는 것입니다. 

글라우디오(클라우디우스)는 AD 41~54년까지 로마 제국을 통치한 황제입니다. 주1)

AD 45년에 로마에서 유대인들을 강제추방하는 반유대주의정책을 실시하여 
약 2만 5천 명의 유대인들이 그리스의 고린도로 이주한 적이 있습니다.  18:1~2

아가보는 글라우디오 때 천하를 강타할 큰 흉년을 예언합니다. 
실제로 이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에 부조를 보내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실제로 그 당시 문서들을 보면, 글라우디오 황제 때 큰 흉년이 있었다는 역사 기록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록들을 보면, 흉년이 한 번만 일어난 게 아닙니다. 
연속적으로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연속적으로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기근이 한 지역이 아니라 로마 제국 전체로 확산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글라우디오 통치 첫 해에는 유대뿐 아니라 애굽에 기근이 있었다.
통치 8~9년에는 그리스에 기근이 있었고,
통치 9~11년에는 로마까지 기근이 강타했다'고 역사책은 전합니다. 

단순히 굶주린 정도가 아니라, 굶주림이 전국적으로 퍼져서 
어딜 가도 먹을 게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죽게 된 사람을 잡아먹을 정도로, 큰 흉년이 전국을 강타했습니다. 
굉장히 무시무시한 일이었던 거죠. 

특별히 어느 지역이 가장 피해가 컸냐면, 예루살렘 지역이 가장 피해가 컸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당시 역사가였던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 기근은 특히 예루살렘의 치명적인 고통과 빈곤을 야기했다'고 말합니다. 
본문의 아가보의 예언이 역사 가운데 그대로 성취가 되었던 거죠. 

아마 아가보가 이 예언을 했을 때는, AD 44년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후에 실제로 이 흉년이 예언대로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물론 학자들마다 연도는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확실한 건 이 예언이 그대로 성취가 되었다는 거죠.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예루살렘 교회에 아가보의 예언대로 큰 기근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 기근을 해결하는 하나님의 방법을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11:29~30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아가보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에 큰 기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타격을 크게 입었겠죠. 

그 소식을 들은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도와줍니다. 
안디옥 지역은, 기근이 심하지 않았나 봅니다.

본문에 보시면 '부조를 보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부조'는, 헬라어 '디아코니아'인데, 본래 '봉사 service, 사역 ministry'의 뜻입니다. 
그러니 '봉사단'을 보냈다...는 의미입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봉사단으로 파견된 거죠. 

오래된 가뭄으로 인하여서 교회 재정도 바닥이 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조(봉사)의 핵심은, 돈을 보냈을 겁니다. 

본문 30절을 보십시오. 안디옥교회에서 부조를 보내는데
'바나바와 바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냈다'고 말합니다.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헌금을 모아서 보냈다는 것은 아주 의미심장 합니다.

'어느 교회가 어느 교회를 돕는 교회가 되었다'는 말은, 중심축이 바뀌었다는 거예요.

안디옥 교회가 이제는 세계 선교회 중심 축이 되면서

하나님께서 안디옥 교회의 여러 가지로 역사 하시고 힘을 주시고 복을 주셨다는 뜻이죠.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기근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 때문에요. 

하나님은 지금 예루살렘 교회의 기근을 어떻게 해결하고 계십니까? 
안디옥 교회를 통해서 해결하고 계십니다. 

그런 이게 일회성으로 그친 게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당시 기근은 연속적으로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한 번에 기근이 해결된 게 아닙니다. 
계속해서 예루살렘 교회는 타격을 입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 교회를 기근으로부터 건져내십니다. 
어떻게 도우시죠? 다른 이방 교회들을 통해서 건져내 주십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 예루살렘을 위해 헌금한 교회는 
이 시기의 안디옥 교회뿐만 아니라 
이후에 갈라디아 교회(갈 2:10), 
고린도 교회(고전 16:1~2),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고후8:1~2, 롬15:26)로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같은 사실, 즉 이방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헌금을 했다는 사실은 
이방 교회와 유대 교회와의 매우 우호적 관계를 시사해 주는 것입니다.

이제는 유대교회와 이방인교회라는 배타적 분리주의도 없어졌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유대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행전을 읽을 때, 서신서를 걸쳐서 같이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히 신약이 이해가 되거든요. 

◑적용

오늘 본문은, 아가보의 예언대로 큰 흉년이 임했는데,
특히 예루살렘 교회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흉년은 한 번만 일어난 게 아니라, (본문에는 한 번이지만) 
그 뒤로도 연속적으로 흉년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만성적으로 가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루살렘 교회의 기근을 어떻게 해결하고 계십니까?

이방 교회의 도움(구제헌금, 선교헌금)을 받는 방식으로 해결하고 계십니다.

-본문 행11장에는 '안디옥 교회'가
-이후에 갈라디아 교회(갈 2:10), 
-고린도 교회(고전 16:1~2), 
-마게도냐 교회(고후8:1~2)가 예루살렘 교회를 도았습니다.     주2)

마게도냐와 아가야 교인들이(롬15:26) 도운 적도 있는데,
고린도 교회가 아가야 교회와 겹치는 것으로 봅니다. 아가야 지방에 있는 고린도 교회이므로. 

▲본문의 주제이자 교훈은, <교회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에도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안디옥에도, 그 후에 마게도냐에도, 고린도에도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따로 노는 교회들을 세우신 게 아닙니다. 
주님은 하나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한 성령의 세례를 받고, 한 믿음을 고백하는 하나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한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는 하나의 가족을 만드신 것입니다. 
주님이 보시기에 모든 교회는, 하나의 교회, 하나의 가족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오늘 본문에, 우리가 익숙하다고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되는, 
주목해야 할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형제들'이라는 표현입니다. '유대에 사는 형제들'이라고 말합니다. :29

여러분 지금 안디옥 교회는, 첫 이방인 교회예요. 이방인들이 모인 교회입니다. 
반면에 유대에 있는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인 교회입니다. 유대인들이 모인 교회이죠. 

그런데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이,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뭐라고 부르죠? 
'형제들'이라고 부릅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는데 '한 형제'라고 부릅니다. 

너무나도 다른, 너무나도 이질적인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한 믿음 안에 있는 형제로 보았습니다. 

여러분 세상은 앞서 이들(안디옥 교회)을 뭐라고 불렀었죠?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었죠. 
그러나 교회는 서로를 향해 뭐라고 부릅니까? 형제라고 서로 부릅니다. 
형제이기 때문에, 자기들의 소유를, 힘이 닿는 대로 나누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안디옥 교회는 너무나 잘 성장하고 있습니다.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큰 무리가 계속해서 모이고 있습니다. 

자기 교회는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루살렘 교회를 간과하지 않습니다. 
자기 교회만 잘 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귀한 물질을 보냅니다. 
그것도 '힘이 닿는 대로' 헌금을 해서 보냅니다. :29 '자기 능력대로'

자기 교회도 지금 막 부흥해서 섬겨할 사람(교역자)이 너무나 많이 필요한데 
지도자급인 바나바와 사울을 예루살렘에 보냅니다.  :30
그러니까 자기 교회만 이기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거죠. 예루살렘 교회와 한 몸, 한 교회로 생각한 겁니다.

당시 안디옥 교회는 5명의 지도자가 있었죠. 13:1
그 중에 두 명을 보낸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는, 말로만이 아니라, 진짜 형제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도자도 보내고, 헌금도 힘껏 보낸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예루살렘 교회가 보여준 본이었습니다.

앞서 예루살렘 교회도 안디옥 교회에 바나바를 보냈습니다.  11:22

 

여러분 바나바가 얼마나 좋은 일꾼입니까? 
누구보다도 예루살렘 교회에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너무나 성품도 좋고, 교회에 있으면, 누구에게나 너무나 본이 되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붙여지지 않았던 '착한 사람'이라는 단어가 붙여진 유일한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 
행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그런 바나바를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 교회에 아낌없이 파송합니다. 
여러분 이런 바나바는 좀 아껴두고, 다른 사람을 안디옥 교회에 보내도 되지 않습니까? 

바나바는 없어서는 안 되는, 너무나도 중요한 핵심적인 교회의 리더 아닙니까? 
그런데도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아낌없이 보내줍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가장 필요할 수 있는 일꾼인 바나바를 
안디옥 교회에, 그것도 이질적이라 느껴질 수 있는 그 교회에 파송해 줍니다. 

여러분 네 교회, 내 교회가 없는 거죠. 하나의 교회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와 다른 교회라는 구분이 없습니다. 정말 하나의 교회라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이든 안디옥 교회이든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데 쓰임을 받는다면 
누가 어느 교회에 있든지 동일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정말 교회를 하나라고 믿는 거죠. 그리고 정말 한 형제라고 믿는 거죠. 
'우리'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맥락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모두 한 형제입니다. 
단순히 우리 교회 안에서만 한 형제가 아니라, 
우리 교회 밖에서도 모든 성도가 한 형제입니다. 

'내'가 아니라 '우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입니다. 

주기도문을 떠올려 보십시오. 거기 보면 '나'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전부 다 '우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전부 다 '우리'입니다. 

한글 성경으로 세어보면 '우리'라는 말이 6번 등장하는데요.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9번이 등장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주3)

'내가' 라는 단어가 낄 틈이 없는 거죠. 
기독교 신앙은 내가 아니라 '우리'로 (공동체로) 부름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만을 위한 하나님'을 찾고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너무나도 익숙해 있지 않습니까? 

내 자녀가 대학을 가야 하고, 내 교회가 부흥해야 하고, 
내 남편이 승진을 해야 하고, 내 가게가 잘 돼야 하고... 
이렇게 나만을 위한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기도에는 '우리를 위한 기도'가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나만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위한 기도가 응답되었을 때는, 누군가는 피눈물을 흘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기도는 잘 응답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짐 캐리가 주연한 '브루스 올마이티'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짐 캐리가 방송사에서 잘나가는 앵커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인생이 이리저리 꼬여서 풀리지가 않는 거죠. 속된 말로 뜨지를 못하는 거죠. 

다른 사람들은 잘 풀리는데, 자기는 풀리지 않아서 자기 인생을 원망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짐 캐리 앞에 나타나십니다. 
그리고서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역할을 주십니다. (영화니까요) 
쉽게 말해 짐 캐리가 하나님이 되는 거죠. 

그가 하나님이 되고 나니까, 환청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고 보니까 
땅에 있는 수많은 성도들이 기도하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짐 캐리가 기도를 몇 개 들어주는데, 
그 기도 응답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피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잘못된 응답을 준 거죠)

또 짐 캐리가 어떻게 하냐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하늘에 있는 달을 당겨가지고 
자기 연인 앞에 가져다 줍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일본에 엄청난 쓰나미가 몰려와서 일본을 쓸어버립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여기저기서 기도소리가 올라와서 너무나 귀찮은 겁니다. 
그래서 짐 캐리가 '아~ 귀찮아' 하고 모든 기도에 대해 '예스'로 다 응답해 줍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 땅이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복권 당첨자를 40만 명이나 내는 바람에, 1등 당첨금이 고작 17$밖에 되질 않았습니다. 

1등 당첨된 사람이 '이제 내 인생은 뒤집어졌다' 하는데 
상금을 받아보니까 고작 17달러가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폭동이 일어나서 시내가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제가 이 예화를 드는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 나의 기도가 응답되어질 때는, 내 기도 응답 때문에
누군가는 심각한 삶의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좌고우면 하시기에, 우리의 모든 소원을 다 들어주실 수 없는 거죠)

▲여러분, 지금 교회들이 사실 다 침체기에 있다고 말합니다. 
선배 목사님들의 말로는, 1970년대에는 장로교 간판만 내걸어도 
몇 백 명이 쉽게 모였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도 장로교이거든요. 
장로교 간판을 저렇게 밖에 걸어도, 이제는 모이질 않습니다. 

더군다나 코로나로 인해서 많은 교회들이 사실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물론 큰 교회들은 사실 그렇게 힘들지 않고 계속해서 모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날 교회만큼, 사실 부익부, 빈익빈이 많이 나타나는 곳이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님들만큼 부익부, 빈익빈이 나타나는 집단이 많이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 교회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 교회에 많은 사람들을 보내주시옵소서. 
사람이 가득 차서 넘치도록 보내주시옵소서. 
이 동네에 있는 많은 영혼들 싹 다 우리 교회에 보내주시옵소서' 

여러분, 이런 기도를 정죄하는 건 아닙니다. 
누구보다 교회를 사랑하고 안타까워하기 때문에, 이런 기도를 하는 거죠. 

그런데 여러분, 조금 더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기도가 만약에 응답이 되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인 모두는 '이게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좋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기도가 응답이 되었을 때 
우리 동네에 여러 조그만 교회들은, 피눈물은 아닐지라도, 여러모로 힘들어 할 수 있습니다. 
그 교회의 목사님은, 날마다 골방에서, 자신을 자책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 우리 교회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를 통해 많은 영혼들이 구원 받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만이 아니라, 다른 교회도 함께 자라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를 위한 기도만이 아니겠죠. 
여러분이 내 자녀를 위해, 내 사업장을 위해, 내 남편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 기도들이 나쁘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기도의 제목들은, 그 기도가 응답이 되었을 때 
누군가는, 또 다른 형제자매는 피눈물을 흘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아버지'라는 이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한 형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우리의 기도마저도
경쟁에서 이기는 도구로 사용되면 안 됩니다. 
누군가를 이기기 위한 도구로, 내 기도가 사용되면 절대로 안 됩니다. 

우리의 기도가, 나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주안에서는 내가 아니라 한 형제로, '우리'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예수님이 알려주신 대로 '우리'가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정말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믿는다면,
예전에는 마음껏 울부짖던 기도도, 이제는 형제자매의 처지와 형편들을 생각하며 
그 기도를 주춤하게 될 것입니다. 

'나의 이 기도가, 누군가에게는 상처와 아픔을 안겨다 주지는 않을까?' 
하나님 앞에 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한 기도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런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제는 교회 차원에서의 적용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교회는 지역이 달라도 하나입니다. 교단이 달라도 하나입니다. 
예수에 대한 동일한 신앙을 고백하는 참된 교회라면, 교회는 모두 하나입니다. 

저는 제가 속한 교단의 신학을 사랑합니다. 
이 신학이 가장 성경을 잘 해석하는 신학이라고 믿습니다. 

그렇지만 교단 신학이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 교단이 가장 좋은 교단이라는 우월감을 절대로 가지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속한 교단의 신학을 사랑하지만, 우리밖에 없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 주님이 계시는 하나의 교회인 거죠. 

가끔 우리 교회의 성도들 가운데, 다른 교회로 가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주 가끔 있는데요. 저는 그분들을 안타깝게 보거나, 안 좋은 감정을 가지지는 않습니다. 

교회를 옮기는 거지, 주님을 떠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회를 옮길 때는, 그 분이 건강한 교회를 가셨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단순히 좀 알려진, 유명한 큰 교회가 아니라 
우리 교회보다는 성경적으로 바르고 건강한 교회를 가셨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옮겼다고 해서, 누군가를 안타까워하거나 섭섭해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교회를 옮기는 것이지, 그 분이 주님을 떠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이기 때문이죠. 

그런 면에서 저는 여러분에게 감사하는 게 있습니다. 
여러분들 그래도 참 성숙한 성도이다... 라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를 과거에 떠났던 분들이 좀 계십니다. 
그런 분들에 대해 얘기하는 걸, 가끔씩 여러분들로부터 들을 때가 있는데요. 

여러분이 그런 (떠나신) 분들에 대해 말씀을 하실 때 
조금이라도 나쁘게 생각하는 마음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어디 가서 신앙생활 잘 한다더라' 하고 쿨하게 말씀을 하십니다. 

얼마 전에는 우리 교회를 떠난 집사님이신데요. 
함께 우리 교회 차를 타고, 장례식장도 같이 다녀왔습니다. 
'우리 교회를 떠난 거지, 주님을 떠난 건 아니지 않냐' 면서 
우리 교회 집사님들이 함께 데리고 가시더라고요. 

오늘 본문에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도 동일한 마음인 줄 믿습니다. 
'교회가 하나'라고 믿고 계시는 거죠. 

여러분 우리는 아쉬울 수 있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어느 성도의 이동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것에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떠났지만, 주님 곁을 떠난 것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축복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 이런 고백이 있는 교회는, 어떠한 헌신까지 가능한 것입니까? 
예루살렘 교회가 '바나바는 우리 교회에 없어서는 안 돼' 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너무나 중요한 핵심 인물을 파송했습니다.

우리 교회에 있어서 정말 필요하고 할 일이 많은 사람인데 
우리 교회, 다른 교회 따지지 않고, 기꺼이 안디옥 교회로 파송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가 기근에 빠졌을 때,
지도자와 물질을 힘껏 보냈습니다.
정말 '형님 먼저, 아우 먼저'가 일어난 거죠.
네 교회 내 교회가 아니라, 모든 교회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올해 창립기념주일에, 처음으로 다른 교회들을 섬겼습니다. 
우리 교회를 세우신 주님의 은혜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흘려보냈습니다. 

그때 나온 헌금이 크진 않지만, 그래서 많은 교회를 도와준 건 아니지만 
그때 나온 감사헌금으로 네 교회를 섬겼는데요. 
얼마나 그 교회들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교회가 선교 바자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선교 바자회를 통해서도, 우리와 하나된 또 다른 선교지의 교회도 
섬기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다 주님의 몸된 하나의 교회임을 믿고, 
내 교회 같은 마음으로 함께 섬기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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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글라우디오 황제
아우구스투스 - 티베리우스 - 갈리굴라 - 클라우디우스 - 네로(핍박 시작)로 이어지죠. 
로마제국의 4대 황제입니다.

주2)
이후에 갈라디아 교회의 헌금과 (이 부분 애매합니다)  
고린도 교회, 마게도냐 교회가 헌금을 예루살렘에 전달한 것은
3차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전달했습니다. 

주3)
마6:11 '오늘날 우리에게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3 '다만 (우리를) 악에서 구하옵소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