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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행10:23~33 2005.09.04.
동병상련이라는 말을 아실 겁니다.
어색한 두 사람이 만났지만, 서로 낯선 사람이지만
뭔가 통하는 게 있어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하는... 그런 관계가 될 때가 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도 보면, 두 어색한 사람의 만남입니다.
아니 어쩌면 서로 함께 만나서는 안 될 사람들입니다.
아니 일생 동안 한 번도 만나지 않았으면.. 하는 그런 두 사람이 함께 만났습니다.
고넬료라고 하는 사람 로마군인입니다. 로마군인이 이 유대 땅에 와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점령군 장교입니다. 장교요 백부장입니다.
이 이방인 점령군 장교를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저 안 만났으면 좋았을 사람입니다.
또 베드로라고 하는 사람은 피점령지의 초라한 어부입니다.
평민입니다. 뭐 사회적 지위로 말한다면 고넬료와 베드로, 이건 얘기가 안됩니다.
만날 이유도 없고, 어쩌면 한평생 안 만났으면 좋겠다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두 사람은 만나게 됩니다.
유대 사람들은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는 처지가 참 어려웠지만
그러나 종교적으로는 이방 사람을 멸시합니다.
‘비록 우리는 이렇게 어려운 고난의 길을 가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다.
너희 같은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런 종교적 우월감이 있습니다.
▲자 이 두 어색한 사람들이 만나게 됩니다. 문제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통적으로 느끼는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 첫째는 두 사람이 다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베드로는 물론 하나님을 경외하고
특별히 로마사람인 고넬료도, 정치적으로는 이 땅을 지배하고 있지만
종교는 유대종교가 옳다고 생각했어요. 참 대단한 사람이죠.
그 정치적 우월감, 교만을 다 버리고, 피점령 국가의 종교와 그 하나님을 섬긴 사람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10:2
자 보세요. 아주 전형적인, 가장 경건한 유대 사람의 신앙생활 양식을 따라서 사는 사람이예요.
그러니까 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예요. 그것이 공통적이예요.
2) 또 하나는 이 두 사람이 다 기도하는 사람이예요.
고넬료도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베드로도 비록 여행 중에 있지만 시간을 정해서 지붕 위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사람이예요.
기도하는 사람... 여러분 기도하는 사람끼리는 만나는 거예요.
기도하는 사람끼리는 영으로 통하는 거예요. 기도속에서 만나는 거예요.
아니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주십니다.
여러분의 영성이 어디까지 왔는지는 몰라도 정말로 깊이 기도하다 보면
정말로 기도하는 사람끼리는 만나요. 영으로 통하는 것이예요.
그래서 말입니다. 이 두 사람이 다 천사를 만났습니다.
하나님이 보낸 천사를 만나서 지시를 받습니다.
또한 이 두 사람이 다 기도응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시는 말씀에 응답을 받은 그런 특별한 체험을 한 사람이예요.
기도응답 속에서 둘이 만나는 거예요.
그리고 또 한가지는, 기도응답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어요.
자기 생각으론 순종할 마음이 없었어요. 그래도 순종했어요.
▲저는 이스라엘에 한번 갔을 때, 정말 2천년 전에 베드로가 그집 지붕에 올라가서
기도했다고하는 허름한 집이 있어요. 욥바에 있는 그 집을 가봤습니다.
들어가지 못하게 해서 못 들어가 봤습니다마는, 뭐 조그마한 집인데
거기다가 누가 바랑 벽에다가 ‘베드로가 기도하던 집’ 이라고 새겨놨더만요.
어쨌든 그 집은 지금도 2천 년 동안 바닷가에 그렇게 서 있습니다.
자 생각해보세요. 그는 로마사람의 집에 들어가면 안 됩니다.
더구나 로마군인 집에 들어가서 숙식하고... 안 됩니다.
이거는 자기 생활풍습과 전통에 따라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시니까... ‘속되다 하지 마라. 잔소리 하지 마라.
내가 가라면 가고, 내가 만나라면 만나라...’ 그러십니다.
모든 규례와 모든 법도와 모든 생활습관 제도를 다 초월해서
주님이 주신 말씀대로 응답합니다. 순종하게 됩니다.
자 또 고넬료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던 중에 지시를 받습니다.
‘욥바의 피장이 시몬의 집에 있는 시몬이란 사람을 청하라.’
예 무작정 가서 청합니다. 말씀에 순종합니다.
두 사람이 다...
이거 보세요. 두 사람 다 하나님을 믿고 다 기도하는 사람이고,
두 사람 다 같이 기도응답을 받는 사람이고, 응답 받은 대로 순종하고 보니
생전에 만날 일도 없고, 만나선 안 될 사람들도 만나더라고요.
(*오늘날에도 동역자가 필요한 분들은,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 뜻 안에서 만나게 되고, 마음을 열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러 유형의 사람이 있습니다.
1) 여러분,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자기 고집이 있고, 자기만이 옳고 남의 말 안 듣는 사람있어요.
마치 남의 말을 안 듣는 것이, 자기 존재가 사는 것으로 생각해요.
애들까지도 그렇더라구요. 뭐 하라 하면 ‘네’ 하는 놈은 별로 없어요.
‘아뇨’ 그래요. 왜? 그래야 자기 자아가 살아나니까...
어느 목사님이 기막힌 상담을 내게 해왔어요.
아주 이름있는 목사님인데, 내게 큰 고민을 말해요.
의과대학 다니는 자기 아들이 담배를 피운대요. 그래서 피우지 말라 그랬대요.
‘야, 목사가 그 설교해서 월급받은 건데, 너 그 돈 가지고 담배사서 피우면 되겠냐?’
그랬더니 그 아들이 하는 말이 ‘이건 내가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입니다.
그건 아버지 돈 아닙니다.’
아버지 : ‘그래도 목사 아들이 담배 피우면 안 되잖아?’
아들 : ‘목사 아들이니까 피우지 마라? 그러니 담배를 피워야 내가 살아요...’
아들의 논리는, 담배 피우지 못하게 하는 것도 스트레스인데,
‘목사 아들이라서 피면 안 된다’ .. 이건 자기에게 더 스트레스 라는 거죠.
그러면 스트레스가 두 배로 겹쳐서 와서, 갑갑해서 죽겠다는 거예요.
그럴수록 자기가 살려면, (스트레스를 이기려면) 담배를 피워야 된다는 논리였습니다.
물론 반항이 자기 존재를 세우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현대인의 문제라고요.
그래서 ‘네’ 하면 내가 죽고,
‘아니요’ 하면 자기가 사는 줄로 아는 이 청개구리 체질이 문제라고요.
그래서 어느 누구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2) 그런데 두 번째 사람은 반대로 또 타인 종속적이고 타인 지향적이예요.
이건 또 항상 예스맨이예요. 무조건 그저 남의 의견에 따라가요. 자기는 없어요.
그저 ‘그렇습니다’ 하는데
이걸 가리켜서 요새 말로 ‘눈칫밥 먹고 자란 사람이다’ 그러잖아요.
어디 가서든지 자기 주장은 한 번도 하는 일이 없어...
자기 주장하면 자긴 죽는 줄 알아요...
그래서는 무조건 순종하는 거예요. 무조건 ‘네’예요.
비굴해지고 아주 기회주의적이고, 허약한 인간이 되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또 하나는 실리주의적 인간이 있어요.
이득계산이 먼저... 손익계산이 빨라요. 뭘 하던지...
심지어는 교회 나오는것까지 손익계산을 해요. 내게 얼마나 이로울까?
교회 나와서 딱 보고 교인들 많으면 ‘야 이분들 상대로 장사하면 괜찮겠다...’
이것도 다 고객으로 보는 거예요. 손익계산이 빨라요.
자 이렇게 사는 것 또한 이게 문제라고요. 나는 없고 물질만이 있어요.
▲그러면 신앙적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신앙적 인격은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이예요.
고넬료가 그런 사람이에요.
‘이제 우리는 ...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10:33
하나님 임재의식으로 사는 것... 하나님을 보고, 사람을 봐요.
하나님께 듣고, 사람에게 들어요.
기도응답을 받고 비로소 오늘을 사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같이 서로 사랑하라.’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주님을 사랑을 생각하고
그 사랑에 감격해서 사랑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그리스도인이예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그래서 주께하듯하라. 주인에게도 하고 주께하듯, 아내에게도 주께하듯,
남편에게도 주께하듯... 주님을 대하듯이 이웃을 대하라.
항상 주님을 생각하고 주앞에서 말하고 행동하고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 나타난 고넬료라는 사람은
이방인으로서 경건의 극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온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구제하고 시간을 따라 하나님앞에 기도하고... 참으로 경건의 대표자입니다.
그는 자기 신분, 로마 군인이라고 하는 자기신분, 또 우월감 다 극복해 버렸습니다.
여러분은 신분이 어떻습니까? 재산은 어떻습니까? 지식은 있습니까?
상관하지 마십시오. 툭툭 털어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아주 깨끗한 마음으로 경건을 찾아갑니다.
또 한 베드로를 만나게 됩니다. 베드로는 초라한 어부입니다.
여러분 상상을 해보십시오. 로마군인 그 화려한 훈장을 달고
그런 그 로마백부장이 여기있고 초라한 갈릴리 어부한사람
그 남루한 옷을 입고 어정어정 걸어들어오는 베드로의 모습... 한심하겠죠?
인간의 눈으로 볼때는 상대가 안됩니다. 도대체가...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고넬료는 베드로는 만나는 순간에
하나님을 대하듯이 대하고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 만납니다.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10:25
그래서 성경에 보니까 발 앞에 엎드려 절을 했어요.
발 앞에 엎드린다는 말은 이건 신에게 드리는 경배입니다.
사람앞에 드리는 게 아네요.
그래서 성경에 ‘경배했다 worship’ 라고 했어요. 주1) 경배한 이유
베드로가 너무 너무 황급해서 ‘나도 사람이요 일어나세요’ 할 정도로
지극정성으로 발 앞에 엎드려 절을 했더란 말입니다.
▲자 보세요. 지금 고넬료가 누굴 보고 절하는겁니까?
그의 마음이 지금 어디로 가고있습니까?
베드로가 눈앞에 있지만 베드로를 본 게 아네요.
그 뒤에 계신 하나님을 봤거든요.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이렇게 엎드렸더란 말이죠.
기도의 응답으로 보내주신 분...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시기 위하여 내게 보내주신 분... 이렇게 정성껏 맞이했어요.
그리고 지금 말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앞에 있습니다.
우리가... 일가친척까지 다 모아놓고... 우리가 다 하나님앞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입니다. 아 그리고 당신에게 주신 말씀을 듣고저 합니다.
저는 이 자리에 설 때마다 고넬료 생각을 해요.
‘우리 교인들이 다 이 시간에 고넬료처럼 마음먹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10:33
‘말씀하세요. 제가 듣고자 합니다.’ 이런 자세죠.
그런데 요즘 일부 교인들은 떡 팔장을 끼고 ‘들어보자...’
들을 말 있으면 듣겠다는 거죠.
여러분 이걸 아셔야 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그는 베드로를 통해서 하나님을 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분을 앞에 놓고... 이제 말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무슨 말씀이던지 하세요.’
▲그래서 이제 베드로가 설교를 시작합니다.
별로 긴 설교 같지 않습니다. 사실은요 말도 잘 안통하거든요.
베드로는 아람 말을 하고, 이 사람은 라틴말을 합니다.
말도 통역없이 통할 수 없는 사이예요. 그런데 말을 합니다. (통역이 없었다고 볼 때)
44절에 보면 그런 말이 있어요. ‘이 말을 할때 성령이 임하니라’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44
방언이 터져서 베드로의 말을 모두가 알아듣게 되요. 다 알아듣게 되요.
통역없이 알아듣게 되요. (행2장에도 다 알아들었잖아요.
어떤 신학자는 ‘통역의 은사’가 임했다고 주장합니다. 일리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0장을 ‘이방인의 오순절’이라고 말합니다.
행2장과 똑같은 오순절 역사가 나타난 거예요.
여러분 설교를 잘한다 못한다가 아네요.
무슨말을 했느냐가 중요하지 않아요.
영으로 통해서 성령이 통역을 해줘요.
성령이 알아듣고 감당하게 기억나게 말씀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래서 고넬료의 가정에 큰 구원이 임하고 이 사람 다시 로마로 돌아갈 때
로마에 가서 교회를 세우게 됐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걸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신앙을 너무 추상화해버려요.
그래서 항상 만족하지 못해요.
왜? 추상적이라서...
무지개처럼 끝까지 어디로 가는지 몰라요. 그러나 이걸 아셔야 됩니다.
고넬료는 구체화됐어요. 베드로를 영접하는 것이 주님을 영접하는 거예요.
베드로의 말씀을 듣는 것이 주님 말씀을 듣는 거예요.
베드로에게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예요.
구체적이예요. 이런 신앙입니다.
내가 지금 뭘해야 됩니까? 오늘 내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할 일이예요.
구체적이고 아주 현실적인 히어 앤 나우, here and now
방금 이 자리에서 내가 할일이 있어요. 그러한 신앙...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바른 자세입니까?
구체적으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모든 사건이 주의 손이 있고 모든 역사가 주의 섭리속에 있고
내가 만나는 일, 내가 듣는일, 전부가 기도응답 속에 있단 말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바로 그 믿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
주1) 고넬료가 베드로를 절하며 신격화 한 이유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25
이 말은, 그냥 존경의 표시 정도가 아니라, 신에게 경배할 때 하는 동작이죠.
베드로가 '나도 사람입니다' 라고 말하는 맥락을 봐도,
충분히 그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넬료가 베드로를 신으로 경배하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의 겸손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베드로가 신격화 근처 자리까지 가 있던 이런 상황에 대한 배경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방인 고넬료의 종교적 세계 안에서
고넬료는 유대인의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지만, 기본을 아직 배우지는 못했죠.
십계명에는 처음부터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하고 나오기 때문에
어떤 인간을 신격화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넬료는 그걸 몰랐습니다.
유대인의 하나님을 믿고 싶었지만, 배우지 못했습니다.
두 번째, 사도행전의 네러티브(서술) 안에서도 이런 느낌이 있어요.
바로 앞 행9장에서 베드로가 죽은 사람 (애니아) 을 살렸어요.
그리고 예루살렘에 베드로가 지나가는데 '고쳐 주세요. 안수기도 해주세요' 하면서
사람들이 미어 터지게 달려듭니다. 너무 막 그냥 사람이 많아서 줄을 서도 안 되니까
'야 우리가 베드로의 그림자라도 닿으면 낫지 않을까?' 5:15
이 이야기만 보면, 베드로가 신처럼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베드로의 통찰력 입니다.
여러분, 아나니아 와 삽비라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그들이 헌금을 들고 왔을 때, '이게 전부냐?' 하고 물어보는 거예요.
베드로는 다 아는 거예요. 통찰, 꿰뚫어 본다는 거죠.
마치 자기 자리에 앉아서 천리를 내다보듯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까지 꿰뚫어 보는
굉장한 통찰력과 지혜를 가진 베드로 였습니다.
그러니 소문을 들은 고넬료가, 베드로를 신격화 하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니었다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