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절 식사 눅22:7~23
우리는 지금 열 번에 걸쳐서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께서 식사하신 이야기"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주1)
사실 오늘 이후로 두 번의 식사 사건이 더 기록되어 있는데요.
엠마오에서의 식사 눅24:13~35
제자들과 함께 한 식사 입니다. 24:36~53
오늘은 <유월절 식사>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지금 유월절 식사를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유월절 식사를 우리가 '최후의 만찬'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지금 우리가 거행하고 있는 성찬식이 바로 이 식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식사를 굉장히 하시기를 원하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죠. 눅22:15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정말 예수님께서 유월절 식사를 간절히 원하고 계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유월절 식사에서 놀라운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유월절 식사를 내가 원했다'라는 말씀이, 15절에 나오지만
8절, 11절, 13절, 15절에
정말 예수님께서는 그 유월절 식사를 원하셨던 분위기가 계속 나옵니다.
예수님의 유월절 식사(만찬)는, 당시에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지켰던
바로 그 유월절 식사의 순서에 따른 식사였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또 다른 유월절 식사의 패턴, 유월절 식사의 전통이 생겼는데
그것이 우리가 지금 지키고 있는 성찬 예식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거행하셨던,
전통적으로 내려왔던 '세데르' 라고 불리는
전통적인 유월절 식사에 대해서 살펴볼 것입니다.
전통적인 유월절 식사는,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리고, 굉장히 많은 순서가 있습니다.
그러나 간략하게 제일 중요한 순서만 우리가 좀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열한 (11) 순서 정도를 살펴볼 것입니다.
▲1. 첫 번째 순서는 <자리 배치>입니다.
이 유월절 식사에 참석한 사람들이, 어디에 누가 앉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상석에, 제일 높은 사람이 앉습니다.
가족들이 모였을 때는, 제일 나이가 많은 사람이 상석에 앉습니다.
그 주위에 조금 덜 중요한 사람, 나이가 조금 어린 사람... 이렇게 둘러 앉게 됩니다.
서열대로 앉게 되는 거예요.
이것은 나중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메시지를 살펴볼 때 필요한 내용이니
잘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서열대로 앉는 자리 배치가 먼저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도로 시작하는데요.
▲2. 두 번째 단계는 <첫 번째 잔>을 일입니다.
총 4번의 잔을 나눔 중에, 먼저 첫 번째 잔을 마십니다.
포도주 잔을 나누는데
유월절 식사 내내 잔을 모두 4번 나누게 됩니다.
모두 4번 잔을 마시게 되는데요.
각 잔마다. 특징이 있고, 각 잔마다 의미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의미는 출6:6~7절 사이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신 그 이야기에 따라서
거기에서 네 가지를 뽑아서, 유월절 식사 가운데 잔을 네 번 나눕니다.
첫 번째 잔은 '축복의 잔'입니다. 블레싱입니다.
서로 함께 서로를 축복하는... 축복의 잔을 나눕니다.
▲3. 그 다음 나누는 것이 <쓴나물>이었습니다.
파슬리나 샐러리 등 쓴나물을,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서 먹었어요.
쓴나물을 식초나 소금에 찍어서 먹게 되는데
쓴나물은 유월절 세데르 식사 가운데 굉장히 중요한 한 순서였습니다.
'쓴나물을 먹었다'는 것은, 굉장히 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왜 쓴나물을 먹었을까요?
우리의 인생이 쓰다는 것을 경험하고, 우리의 인생이 쓰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는 거죠.
즉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시절이, 아주 힘들고 쓴 고통이었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이 시대의 크리스찬 문화, 기독교 문화가 왜곡된 문화로 흘러가는데,
번영의 복음, 성공주의 등
즉 '예수를 믿기만 하면, 우리들의 삶에 어떤 어려움도 겪지 않는다'는 번영신학이
기독교계를 아주 강력하게 덮은 때가 과거에 한 때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믿고 크리스찬이 되고 그리고 믿음이 크면
우리의 삶에는 전혀 어려운 일들이 생기지 않는다는 그런 믿음이지요.
어떤 어려움도 생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삶에는 모든 것이 다 형통하고
사업이 잘 되고, 큰 집을 소유할 수 있다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는 것,
이것이 번영신학, 성공주의 인데요.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좋으면 형통하게 되고 부자가 된다고 생각하면,
반면에 우리들의 삶에 문제가 있다든지, 어려움이 있다든지, 병이 찾아온다든지 하면
'너는 믿음이 없어서 그래' 하고 간주하는 거죠.
성경에는 신앙생활을 잘 하면, 삶에는 어떤 어려움도 없을 것이다... 라고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 성도들의 삶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라고 계속해서 말씀하고 있고,
크리스찬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고, 환란을 당할 것이다..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쓴 나무를 먹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이 쓴 인생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유월절 식사 자리에서 그들은 쓴 나물을 먹었어요.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기 전에, 그들은 어떤 상태였습니까?
400년 동안 애굽의 노예 상태로 있었습니다.
그 삶은 쓴 삶이었고, 그 삶은 괴로운 삶이었어요. 아픈 삶이었습니다. 힘든 삶이었어요.
그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도록 쓴 나물을 먹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우리들의 삶에 일어나는 그 괴로운 일들, 그 힘든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들의 삶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식사의) 메인 코스가 아니에요.
그것은 에피타이즈, 그것은 식전에 맛보는 그런 순서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메인 코스가 우리에게 오고 있다는 사실,
이제 정말 중요한 기적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오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계속해서 이 쓴나물을 먹기를 바랍니다.
계속해서 이 쓴나물을 수용하기를 바랍니다.
계속해서 이 쓴나물을 먹고 또 먹으면서, 우리들의 슬픔과 우리들의 아픔을 경험하면서
우리 주님을 바라보면서,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그 놀라운 메인 코스,
그 코스를 향해서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이 쓴나물을 먹었습니다.
쓴 인생을 기억하면서,
그러나 그 쓴 인생이 우리들의 인생의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이제 더 큰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를 바라보면서
에피타이저로 쓴 나물을 먹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4. 네 번째 순서는, <질문>입니다. 참석자 중에 누구 하나가,
제일 나이가 어리든지, 제일 마지막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이 질문합니다.
'오늘 이 밤은, 왜 다른 밤과 다르죠?'
'오늘 이 밤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을 합니다.
그 사람들은 몰라서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의식적으로 유월절 식사를 나누면서, 이제 순서에 따라서 그 질문을 합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제일 연장자가 합니다.
본문의 유월절 식사에서는, 예수님께서 하셨을 거예요.
▲5. <대답>
그 대답도 다 정해져 있어요.
이들은 어릴 때부터 그 대답을 들어왔습니다.
그 대답은 '아브라함 부터 모세까지 이야기를 해주는 것' 그것이 전통이에요.
그 이야기의 하이라이트는,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던 그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로부터 출애굽 시키기를 원하셨고
바로에게 '내 백성을 내보내라'고 말씀하셨지만, 바로는 그 말을 듣지 않았어요.
바로에게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는데,
아홉 가지 재앙을 내렸지만, 바로는 여전히 듣지 않았어요.
하나님께서는 '그가 듣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애굽이 거의 초토화가 될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재앙을 내렸지만, 바로는 듣지 않았어요.
이제 마지막 재앙이 무엇이었습니까? 죽음의 재앙이었어요.
그 죽음의 재앙을, 이제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리실 것을 작정하시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죽음의 재앙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 죽음의 재앙으로부터 면제되는 식사를 하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누룩 없는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룩 없는 떡(무교병) 그건 굉장히 중요한데요.
왜 누룩 없는 떡을 먹으라고 하셨을까요?
시간이 별로 없었어요. 급히 출애굽 해서 떠나야 하기 때문에,
누룩이 퍼질 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어요.
그러니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빨리 구워서 먹으라는 거죠.
그리고 굉장히 중요한 건데, 어린 양을 잡으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그 어린 양을 잡아서 먹기 전에, 그 어린 양의 피를 문 인방과 설주에 발라라고 하셨습니다.
한국말로는 문설주와 인방이라고 되어있는데,
문설주는 세로기둥 2개이고, 인방은 문의 가로기둥 입니다.
여러분, 지금 오른손을 드셔서, 문설주와 인방에 피를 발라 보십시다.
문설주에 바르고 인방에 바르고, 설주에 바르고 인방에 바르고,
이 동작을 계속하면 무슨 모습이 됩니까?
십자가의 모습이 그 가운데 그려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문인방과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발랐을 때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고전5:7절에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문설주와 문인방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르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날 것이고
그것은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 양이 되신다고,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문설주와 문인방에 발라짐으로써, 즉 십자가를 보고서
죽음의 사자가 지나가는 거예요. 죽음의 사자가 그것을 보고 '유월합니다.'
'유월'은 '넘어갔다'라는 뜻입니다. 영어로 pass over,
어떤 사람은 6월달인 줄 아는데, 그게 아니에요.
죽음의 사자가 유월해서 넘어간 것입니다. *逾越, 넘을 유, 넘을 월 (추월, 월담)
이것은 결국 유월절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 받는다는 사실, 그 놀라운 사실을
유월절 식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6. <찬송>
그 대답이 있은 다음에, 여섯 번째는 <찬송>을 부릅니다.
그 찬송은 시편 113편에서 114편을 노래합니다.
시113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또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시114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며 야곱의 집안이 언어가 다른 민족에게서 나올 때에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
바다가 보고 도망하며 요단은 물러갔으니
산들은 숫양들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은 어린 양들 같이 뛰었도다
바다야 네가 도망함은 어찌함이며 요단아 네가 물러감은 어찌함인가
너희 산들아 숫양들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아 어린 양들 같이 뛰놂은 어찌함인가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7. 그리고 <두 번째 잔>을 마십니다.
두 번째 잔은 출6:6~7절에 나타나 있는 두 번째 의미를 부여하면서,
두 번째 잔은 해방의 잔입니다.
출6:6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7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애굽으로부터 자유로움을 얻었다' 하는 해방의 잔이에요.
이 말은, 신약의 우리들에게 있어서
'죄의 종으로 살아가던 우리들의 삶에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이 두 번째 잔을 마신 후에, 이제 유월절 어린 양의 구운 고기를 먹습니다.
그리고 누룩 없는 떡을 먹습니다.
▲8. <누룩 없는 떡>을 제일 연장자가 들고,
그리고 이 떡을 쪼개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게 됩니다.
지금 여덟 번째까지 살펴봤는데
물론 중간에 굉장히 상세한 순서들이 더 있을 거예요.
지금도 계속해서 유대인들이 거행하고 있는 세데르(유월절 식사),
2천년 당시에도 모든 유대인들, 제자들을 포함해서
어릴 때부터 이런 유월절 의식을 행했을 것입니다.
똑같아요. 이제 예수님께서 이 떡을 나눠주시면서...
여기까지는 지금까지 했던 모든 사람들이 했던,
제자들도 지난 30년 동안 해왔던 그 변함없는 떡을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세상이 다 뒤집어질 만한, 그동안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놀랍고도 어마어마한 메시지를 지금 이 제자들에게 주고 계십니다.
떡을 나누어 준 후에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을 하셨습니까?
눅22:19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지난 수백 년 동안, 1천4백년 동안 이 유월절 예식을 거행했지만
이렇게 말씀하신 분은 전혀 없었고,
이제 예수님께서 이 유월절의 의미를 완전히 바꾸시는,
유월절의 의미를 완전히 다른 길로 바꾸시는
놀라운 선언과 선포를 예수님께서 하시는 거예요.
'지금 너희가 1,400년 동안 먹어왔던 유월절 누룩없는 그 떡은, 바로 내 몸이야!
너희들은 내 몸을 지금 먹고 있는 것이야!'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셨어요.
어마어마한 선포였습니다.
모든 인류의 역사가 바뀌는, 그런 놀라운 메시지였어요.
'그건 내 몸이야,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야.
이제 십자가에서 실제로 내가 내 몸을 너희들에게 다 내줄 거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셨어요.
그 기억은 2천 년이 지난 오늘 이 시간까지
우리들이 그 말씀을 온전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9. <세 번째 잔>을 또 마십니다.
양의 고기를 먹고, 그리고 떡을 떼시면서
'이 떡은 내 몸이야' 예수님이 말씀하신 후에 세 번째 잔을 마십니다.
이 세 번째 잔은 '구원의 잔'입니다.
첫 번째 잔은 축복의 잔이었고, 두 번째 잔은 해방의 잔이요.
그리고 세 번째는 '구원의 잔'입니다.
이 구원의 잔을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어요.
눅20: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또 어마어마한 메시지를 주고 계십니다.
'이 포도주는, 1400년 전 처음 유월절에 잡은 어린양의 피가 아니라,
바로 나야, 내 피야,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그것을 마시게 합니다.
1400년 전에 어린 양의 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얻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1400년 후에, 그 잔은,
'1400년 전에 잡은 그 어린 양의 피가 아니라
하나님의 어린 양인 내 피다.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이제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이고,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들은 보게 될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세례요한이 예수님 걸어가시는 것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렇게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어린 양, 그 하나님의 어린 양의 피,
유월절 잔은, 하나님의 어린 양의 그 보혈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잔'이예요.
이것이 유월절 식사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예수님께서 하신 행동이 중요한데,
예수님께서는 지금 계속 진행되는 이 세데르 의식,
이 유월절 식사, 이 유월절 만찬의 순서를 이제 스톱시키십니다.
▲10. <네 번째 잔>, 이것은 '완성의 잔'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상한 말씀을 하세요.
'자 이제 내가 세 번째 잔까지 마시고, 네 번째 잔은 마시지 않을 것이다'
22:1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지금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은 네 번째 잔까지 마신 후에, 다섯 번째 잔까지 마십니다.
'엘리야의 잔'이라며 마시지만,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 잔을 마신 후에 '내가 네 번째 잔은 마시지 않겠다'라고 말씀을 하세요.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신 잔은, 네 번째 잔이고,
네 번째 잔은 완성의 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 잔, 구원의 잔을 마신 후에
네 번째 잔, 완성의 잔은 '나중에 마실 거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안 마시고 있다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그때 마실 거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그 순간,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는 그 순간,
천국 잔치,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있는 바로 그 시간, 그 시간이 완성의 시간이에요.
예수님께서는 그 완성의 시간, 우리가 다시 네 번째 잔을 마실 때까지는
내가 세 번째 잔을 끝으로 마시지 않겠다.. 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우리는 어떤 시대에 살고 있습니까?
세 번째 잔과, 네 번째 잔 사이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세 번째 잔은 구원의 잔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어요. 그러나 아직 완성이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already not yet
우리는 완성을 향해서 살아가고 있어요.
우리는 완성을 바라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날을 소망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들의 삶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굉장히 큰 힘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을 깨닫지 못할 때, 우리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어요.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으면 우리들의 삶에 모든 것이 다 성취되어야 되지 않느냐?
우리들의 삶에 어려움이 더 이상 없어야 되지 않느냐?
우리들의 삶이 희망적이어야 하지 않느냐?'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세요.
'구원은 받았지만 아직 그 완성의 날, 그 날은 아직 이르지 않았고, not yet
그리고 그 완성의 날을 향해 우리가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미래가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세상의 많은 미래학자들과 전문가들은, 미래를 부정적으로 보고, 미래를 절망스럽게 보고,
'미래에 지구는 이렇게 망할 것이다' 라고 생각하며, 미래를 굉장히 어둡게 봅니다.
그러나 세 번째 잔과 네 번째 잔 사이를 살아가는 우리는, 미래는 밝습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우리들의 삶의 미래가 밝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들이 이 땅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는다 할지라도
이 어려움이 끝이 아니고, 이 어려움이 마지막이 아니고
이제 우리에게는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오고 있으므로, 미래가 밝은 것입니다.
물론 세상은 더 죄악이 관영하고, 여러 위기와 어려움이 더해 지겠지만,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고, 더 큰 그림으로,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성도들의 미래는 매우 희망적입니다.
그 사실을 믿고서, 오늘 이 시대를 힘있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그 유월절 잔치는, 규모가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구원 받는 사람들이, 세월이 흐를수록 더 많아지고 있으니까요.
2천년 전에, 유월절 식사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의 숫자보다,
지금은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유월절 식사 (성찬식) 자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완성의 잔>을 마시는 날까지, 우리의 미래는 더 희망적입니다.
우리는 이 식탁이 점점점 더 많은 사람으로 채워진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수억~ 수십 억의 사람들이, 마지막 날 이 잔치 때에,
네 번째 (완성의) 잔을 들면서 우리 주님을 찬양하고, 우리 주님을 환호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미래요, 이것이 우리가 바라보는 우리의 미래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곳에서 만날 사람들이라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그곳에서 아브라함을 볼 것을 분명히 믿습니다.
그곳에서 모세를 볼 것을 분명히 믿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저의 아버지, 어머니를 볼 것을 분명히 믿습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죠.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마음에 말씀하십니다.
'너는 힘들지? 그러나 지금 이 힘든 것이 끝이 아니란다.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완성의 날, 완성의 잔을 나(예수님)와 함께 마시게 될 거야!
그러니 힘을 내라, 힘을 내서 오늘 이 쓴나물을 먹는 것 같은 이 힘든 상황, 이 힘든 삶을
힘차게 앞으로 나와 같이 나아가자' 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기 바랍니다.
▲11. <폐회 찬송>
유월절 만찬에서 폐회 찬송으로는, 시편 115편~ 118편을 읽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유월절 식사를 보면, 다 마친 후에
'찬미하면서 감람산으로 가니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죠. 막14:26
유월절 식사 후에 폐회 찬송을 불렀다는 뜻입니다.
감람산으로 가면서, 그때 불렀던 찬송이 뭐라고요?
시편 115편~ 118편을 노래하면서, 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감람산에서 겟세마네 동산에 들어가셨을 때,
예수님은 아마 이런 노래를 하셨을 것이라고 상상됩니다.
시116:3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그렇습니다. 시편이 기록될 때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경험하실 그 일들 그 일들을,
(신기하게도 미리) 노래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요. 다시 한번 이 유월절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였어요.
1400년 전부터 거행되어 왔던 유월절 세데르 만찬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유대인들은 그걸 아직도 모른채 유월절을 지키고 있죠)
예수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당한 그 아픔과 그 슬픔과 괴로움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118:17절 말씀인데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리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부활하시는 거예요.
'다시 살아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선포하시리로다!'
이것도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되고 있는 것 우리가 발견합니다.
118:22~23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이런 노래를 불렀어요.
예수님께서 이제, (결론으로 말씀을 드리겠지만)
새로운 건물을 세우시고, 새로운 기초를 세우시고, 새로운 세상을 여시는,
새로운 시스템을 만드시는 예수 그리스도!
'건축자가 버린 돌'이지만,
모퉁이의 머릿돌(기초석)이 되신다'...
즉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여시고, 완성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벽돌을 가지고 집을 짓는 건축자들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벽돌 가지고 집을 짓는데, 그 벽돌은 다 똑같이 생겼어요.
그런데 벽돌들 중에, 한 벽돌이 이상하게 생겼고, 한 벽돌이 좀 특별하게 생겼으면,
그러면 그 벽돌로는 건축자가 집을 지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 벽돌은 버리는 거예요.
그들 건축자들이 원하는 세상, 그들이 바라는 그 구조, 그들이 바라는 그 집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맞지 않았어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버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돌(벽돌)이
집의 모퉁이 돌, 가장 중심의 돌이 되어서
그 위에 새로운 건물이 올라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118:22~23
116:13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구원의 잔'은 유월절 식사에서 세 번째 잔이었습니다.
이 '구원의 잔'은 어떻게 생겨진 잔이었습니까?
어린 양이 죽었어요. 그리고 어린 양의 피가 문인방과 설주에 발려졌습니다.
문설주와 임방에 발린 그 구원의 놀라운 역사, 그것은 십자가였어요.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그 구원의 잔,
그 구원의 잔을 예수님께서 드시고,
이제 '완성의 잔'까지, '그때가 올 때까지 내가 마시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신
그 구원의 잔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로 집약됩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기독교의 심벌입니다.
아주 오래된 5세기에 세워진 예배당에도 십자가가 새겨져 있어요.
왜 십자가가 그리스도인의 심벌이 되었을까요? 교회의 상징물이 되었을까요?
지금은 십자가를 다 좋아하죠. 십자가 목걸이도 걸고, 그리고 또 장식도 하고 합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십자가를 이렇게 할 수 있는 그런 대상이 아니었어요.
십자가는 가장 잔인한 형틀이었어요.
그래서 '누군가에게 십자가를 주었다' 그건 저주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십자가가 우리 기독교의 심벌이 되었는가요?
바로 이 세데르 유월절 만찬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어린 양의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건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것, 그것이 바로 내가 이제 져야할 십자가다..
라는 것을 말씀해 주셨고,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후에 그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으며,
그리고 그 십자가를 사랑하게 되었으며, 그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하게 되었어요.
하나님께서는 아마 이렇게 하신 것 같아요.
'십자가는 인류의 길을 바꾸는 것이고, 십자가는 인류를 변화시키는 너무너무 중요한 수단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있는 인류의 모든 문제들, 모든 아픔들을 다 가져와서
십자가에 던져버리라.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그 모든 것을 다시 바꿀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다시 회복시킬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다시 변하게 하실 것이다'
십자가는 이 모든 것을 다 변화시키는 그 놀라운 능력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오늘도 십자가를 사모하면서
십자가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유월절 만찬, 당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유대인들의 전통으로
그들이 행했던 세데르 이 의식은, 그 대상이 유대인들이었어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데르를, 예수님의 성천식으로 바꾸시면서
그 대상은 온 인류가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유대인이 아니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유월절 성찬식에 참여할 수 있고,
유월절 성찬식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 그 은혜를 함께 누리게 되었어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온 인류의 것이 되었고
그리고 온 인류의 핵심이 되었으며 역사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후략
♣성경을 풀이해 주는 것은 빵을 떼어 주는 것과 같다 (펀 글)
군중이 모여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저 군중이 가엽구나.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막8:2~3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소중히 여기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이 청하지도 않는데도 이미 먹이셨고,
미처 바라지도 않는데도 이미 용서하셨고, 가엷게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에게는 빵이 몇 개 있느냐?’
그러자 그들이 ‘일곱 개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5
그렇습니다. 빵은 이미 ‘우리’에게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일깨워주시고 확인시켜 주십니다.
사실, 그들에게는 빵이 이미 “일곱 개”나 있었습니다.
‘일곱’은 완전함의 숫자입니다. 곧 이미 차고 넘치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빵”이 없거나 부족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것을 모르고 있거나 인정하지 않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있는 것’을 없다고 여기는 것은 무지요,
‘있는 것’의 가치를 모르는 것은 어리석음일 것입니다.
만약, 오늘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을 보지 못하고
또한 찾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지요 어리석음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그 “빵”이 있습니다.
곧 “말씀의 빵”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은총입니다.
이 ‘있는 것’을 보는 눈이 곧 감사의 눈이요, 깊은 묵상의 눈입니다.
우리가 이 빵의 가치를 진정으로 안다면, 벅찬 감격에 까무러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빵”을 찾아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름 아닌 ‘우리에게 있는 바로 그 빵’으로 감사드리셨고,
제자들은 그 빵을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이 “빵”을 먹었습니다.
성찬의 성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먹을 뿐만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먹었습니다.
그래서 그레고리는 말씀을 듣는 것을 일컬어
“유월절의 어린 양을 먹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또 오리겐은 말합니다.
“성경 독서 중에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 에스겔처럼
‘말씀의 두루마리’를 먹었습니다. 겔3:3
그런데 만약 우리가 먹고도 먹은 줄을 모른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먹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살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말씀을 나누는 일, 복음 선포가 될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말합니다.
“성경을 풀이해 주는 것은 빵을 떼어 주는 것과 같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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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과 함께한 식사
레위의 집에서의 잔치 눅5:27~39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의 저녁 7:36~50
5천명과 함께 한 식사 9:10~17
마르다.의 집에서의 식사 10:38~42
바리새인의 집에서의 점심 식사 11:37~54
바리새인의 집에서의 안식일 식사 14:1~24
삭개오의 집에서의 식사 19:1~10
유월절 식사 22:7~38
엠마오에서의 식사 눅24:13~35
제자들과 함께 한 식사 24:36~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