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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절망은 함께 간다

LNCK 2024. 6. 13. 11:52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고난의 신학       ▣믿음론 


믿음과 절망은 함께 간다 | 창 18:11-19 | 24.6.7 - YouTube
믿음과 절망은 함께 간다            창18:11-19             

여러분 예수를 믿으면, 형편이 좀 나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 
혹시 옛날보다 형편이 더 어려워진 분들은 없었나요? 

믿음을 가지고 사는데도, 내가 꿈꾸던 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될 때가 많거든요. 
물론 믿음의 삶을 살면, 기도 응답도 받고, 기적도 체험하고, 능력도 체험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길로만 인도하시는 게 아니에요. 

이전에 우리의 삶과 다른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렇게 인도해 주셨으면 좋겠다' 하는 내 꿈과,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인도의 길은 다른 거거든요. 

그래서 믿음의 길을 걸어갈 때, 우리가 원하는 만큼 순탄하지 않다 라는 거예요. 
믿음의 길을 걸으면, 쫙 대로가 열리고, 막 그냥 포장된 고속도로가 열리고 
그냥 모든 하는 일마다 잘 되고 그러면 얼마나 좋겠어요? 

◑본문 설명  (점프 가능)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죠. 자손을 줄 거라는 거죠. 
근데 그걸 굳게 믿었는데, 현실은 달랐다는 겁니다. 

창12장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던 그의 삶속에 
하나님의 약속들이 빨리 이루어지지 않아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계속 흔들리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초조해 지고, 현실과 약속이 자꾸 거리가 멀어지는 거죠. 
자손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는데, 나이는 더 들어가고... 
하나님의 약속과 현실이 점점 더 멀어진다는 겁니다.

조금이라도 상황이 더 나아지면 좋겠는데, 갈수록 더 악화되는 거요. 
그래서 우리가 아브라함의 믿음의 과정을 잘 살펴봐야 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나의 계획대로, 내가 바라는 대로 환경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거죠. 
오히려 훨씬 더 빗나가 버리는 거죠. 결국 아브라함이 그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대안을 찾습니다. 

그게 창15장에서는, 종 엘리에셀을 자기 상속자로 삼고자 했습니다. 
'하나님, 이제 아들은... 안 될 것 같습니다. 
이제 내 종이 있는데, 이 종을 그냥 상속자로 삼으려고요' 아들에 대한 기대를 포기해요. 

 

창16장에서는, 또 다른 해결책을 생각하죠. 
'아들을 낳는다면, 혹시 내 아내의 몸종인 하갈을 통해서 아들을 낳으면 되지 않을까?' 

결국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을 낳죠. 
이것은 믿음의 길이 아니고. 다른 길을 선택한 겁니다. 

믿음의 길이 어려우니까, 도중 하차를 한 거예요. 
옆의 다른 기차로 옮겨 탄 겁니다. 
믿음의 길을 계속 가야 되는데, 우회로를 찾는 겁니다. 
너무 힘드니까, 내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으니까... 

여러분, 믿음의 길을 걸어 갈려고 하면, 효율성이 많이 떨어질 때도 있어요. 
믿음과 현실의 거리가 너무 멀다는 거죠. 

믿음의 방식이 아니라, 결국 나의 방식을 선택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원점으로 되돌아가 버리는 거죠. 

믿음이라는 건 하나님을 의지하는 건데, 
하나님을 의지하는데도, 내가 원하는 대로 일이 안 돌아가니까, 
이제 내 힘이 들어가는 거잖아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지금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을 낳은 이 사건은 
자기의 힘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우리가 늘 쉽게 빠지는 실수예요. 
눈에 보이는 힘을 의지하는 것! 

그러니까 엘리에셀 이나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자기 능력을 드러낸 것입니다. 
'내 힘으로 해결하지 뭐...' 

근데 우리가 나의 인간적인 능력으로 하면, 무엇인가 해결이 되는 듯 보여요. 
'아 이렇게 하면 해결하게 되겠네...' 

그러나 여러분, 인간의 능력은, 곧 한계를 드러내게 됩니다.
겉으로는 문제가 풀리는 듯 하는데, 얼마 못 가서 위기에 봉착합니다.  

우리는 자꾸 착각하는 거죠. '내가 뭔가 조금 나서면, 내가 내 삶을 통제할 수 있다. 
컨트롤을 할 수 있다. 내가 내 인생을 뭔가 디자인하고, 컨트롤을 하고, 바꿔 갈 수 있다'
고 믿어요. 

◑내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는 삶의 현실

여러분, 우리가 절망적인 상황에 부딪힐 때... 
아브라함이나 사라나 점점 나이가 들어가는 거예요. 
현실적으로 아이를 낳는 가능성이 점점 멀어지는 거예요. 

근데 하나님의 계획은, 그런 과정을 통하여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는 거죠. 
그 과정을 통하여, 현실과 약속 사이의 거리가 멀어질 때, 
최악의 상황이 되어져 가는 그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어요. 
그게 뭐냐면, 아브라함의 믿음을 자라게 하는 거예요.

근데 여러분,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내 힘으로 감당해 버리고 나면 
믿음의 성장은 실패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실패는 결국 어떻게 돼요? 
더 큰 절망적인 상태로 나를 내몰게 되는 겁니다.            

내 능력과 지혜가 코너에 몰릴 때, 최악의 상황이 나에게 몰아 닥칠 때 
그걸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 최악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나의 약함을 인정하는 것, 내가 내 힘으로 할 수 없음을.. 그때 고백하는 겁니다. 

내 힘으로 뭔가를 해 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 
'하나님, 나는 전혀 할 수 없습니다.' 
그 자기 약함을 철저히 인정할 때, (그때부터) 하나님이 일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위험하고 절박하고 최악의 상황, 
그런 상황 가운데로 하나님이 우리를 내 모신다는 거죠.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거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문제는, 우리가 문제를 푸는 게 아니라, 문제를 더 꼬이게 하는 거라는 거죠.
우리에게 은사가 있는데 '꼬이기 하는 은사'가 있어요.   
푸는 게 아니라 더 엉키게 만들어 버려요. 

여러분들의 삶을 한번 자세히 반추해 보면, 내가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어요. 
아브라함이 자기 힘으로 낳은 이스마엘은, 결국은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어 버리죠. 
결국 그 집안에 갈등과 혼란을 가져오게 돼요. 아브라함의 생에 깊은 고통을 안겨 줘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그래요. 
우리의 힘으로 낳은 '이스마엘'이 각자에게 있어요. 

하나님을 좀 더 의지하고, 하나님을 더 기다리고, 
최악의 상황에서 하나님께 더 매달려야 되는데... 
내 한계를 인정하고 엎드려야 되는데... 

내 힘으로 뭔가 해보려고 해서, 만들어진 게 '이스마엘'이라는 거죠. 
그래서 오늘 우리의 삶 속에 '이스마엘' 들이 있어요. 
이스마엘이 한 둘이 아니에요. 그게 고통의 씨앗 이라는 거죠. 

하나님은 우리의 힘으로 문제를 푸는 걸 원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요구했어요. 

-하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라는 거예요.  
-두 번째는, 하나님의 때가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능력은 분명한데, 그게 언제 이루어질거냐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때가 있다는 겁니다. 믿음은, 그 하나님의 때에 복종하는 겁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걸 기다리지 못하니까, 계속 흔들리는 거죠. 
근데 여러분, 믿음이 흔들리는 것도 나쁜 건 아니에요. 
우리의 믿음은 계속 흔들리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그냥 견고하게, 우리의 믿음이 막 흔들리지 않고 자라는 일은 없어요. 
믿음의 조상도 끊임없이 흔들리며 자란 거예요. 

그래서 지금도 여러분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으면,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세요.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의 믿음을 흔드세요. 
우리의 믿음을 키우시기 위해서! 

▲창18:11절에 보면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절망적인 상태, 최악의 상태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100세, 사라는 90세가 가까워졌어요.
인간적으로 출산이 불가능한 나이죠. 
여러분 이렇게 바로 우리 현실 속에, 벼랑 끝으로 내 몰릴 때가 있다는 거죠. 
완전한 실패! 누가 보아도 아닌 거예요. 해결될 기미가 안 보이는 겁니다. 

오늘도 여러분 중에 그런 문제를 가지고 있어서, 이 철야기도에 나오신 분들이 계실 거예요. 
아무 해결할 길이 없고, 절망의 벽에 갇혀 있는 거예요. 
도무지 헤어나올 수 없는 절망의 상태! 

여러분, 믿음의 길에서 우리는 자주 절망을 경험합니다. 
눈에 띄게 현실이 나빠지는 거잖아요. 환경이 좋아지는 것 같지가 않아요. 

좀 약간이라도 변화가 일어나야 되는데...
전세에 살다가 자택으로 가고, 20평에 살다가 30평에 가고 막 이래야 되는데 
오히려 막 내몰리는 거예요. 

여러분 믿음의 길을 걸을 때, 우리가 당면하는 현실입니다. 
때로는 갈수록 더 어려워진다는 겁니다.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거예요. 
지금 아브라함과 사라는 소망이 없어요.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항상 우리의 편이 아닙니다. 
현실은 언제나 모든 것이 뒤죽박죽 뒤엉켜 있습니다. 

믿음이 자라면, 상황도 조금씩 나아져가야 되는데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믿음 생활 할만 하잖아요. 

믿음이 한 20% 자랐으면, 삶의 환경도 20% 좋아지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오히려 아니란 말이죠. 더 나빠지는 사람도 많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욥기서의 메세지 아닙니까? 욥의 친구들이 맹공을 퍼붓습니다. 
'네가 제대로 하나님을 믿었다면, 어떻게 그렇게 망가질 수 있느냐? 
너의 믿음에 문제가 있다...' 그런 거죠.  

친구들이 보는 거예요. '네가 믿음으로 살았다면, 네 인생이 왜 그렇게 꼬였나?
왜 안 풀리느냐? 왜 더 나빠지느냐?'는 거예요.

▲이게 믿음과 현실의 괴리입니다. 이게 기도를 해도 변화가 없다는 거죠. 
우리가 믿음 생활을 그런대로 신실하게 하고, 나도 최선을 다하고, 
믿음 생활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내 삶의 환경 속에 소위 '축복'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안 보일 때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박국 서에도, 그렇게 탄식하는 거잖아요.
오히려 안 믿는 사람이, 삶이 더 잘 풀리고, 더 나아 보입니다.
나는 철야기도 와서 기도하는데도, 내 형편은 쉽게 안 풀려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런 시편도 어떤 때는 좀 불편한 거예요. 

여러분이 방금 '하하하하' 하고, 갑자기 크게 웃었는데,
공감의 웃음인 것 같아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왜 하나님이 계신데, 나는 성실히 믿는데, 왜 내 현실은 거꾸로 가느냐?'는 거죠. 

'혹시 내가 뭔가 속고 있는 거 아니냐?'는 거예요. 
하나님이 진짜 계시느냐 는 거죠. 

하나님은 기도 하라고 하셨잖아요. 기도하면 응답하신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기도했어요. 근데 현실은, 기도한 것과 정반대로 돌아가는 거예요. 
하나님이 안 보이는 거예요. 이때 우리는 절망에 빠지죠. 절망! 

여러분 많은 경우에, 이게 우리의 믿음 생활에서 경험하는 현실이에요. 
우리 믿음의 현 주소예요. 

그래서 필립 얀시가 그런 책도 썼잖아요.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
여러분, 믿음의 길은 일사천리로 결론에 도달해 가는, 그런 게임이 아니에요. 

나의 믿음대로, 다 그냥 스텝을 따라 내 예상대로 착착착 돌아간다면 
여러분 그러면 믿음생활 할 만하죠. 누가 못 하겠어요? 

▲이런 절망적인 상태에, 세 사람이 아브라함에게 찾아온 거예요. 
아브라함은 지극 정성으로 그들 나그네들을 대접 해요. 

그리고 세 사람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찾습니다. '네 아내가 어디 있느냐?'는 거죠. 
아브라함이 '장막 안에 있다'고 그랬더니, 그들은 아브라함에게 놀라운 소식을 전합니다. 

창18:9~10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지금 아브라함과 손님들은 나무 아래서 식사하고 있고,  :8
사라는 장막 안에 있는 상황입니다.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모든 희망이 다 사라졌는데, 사라는 벌써 결론을 내고 있는 거예요. 
'이제 안 된다' 사라는 기다리다가 지쳤던 거예요. 

여러분 이 아브라함의 생애에 굉장히 중요한 것은, 
중요한 시점마다, 믿음이 흔들릴 때마다... 하나님이 그를 찾아오신다는 거요. 

약속을 (그냥 쉽게) 이루어 주시면 되는데, 약속은 이루지 않고, 
그를 찾아와 주신다는 거예요.  (*결론적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더해가는 과정입니다)
그가 절망하는 순간에 찾아와 주십니다.

완전히 절망해서 무너지기 일보직전에 찾아오시는 하나님!
그 절망적인 상황을 우리는 해결해 주시기를 원하는데, 
그 절망적인 상황이 빨리 해결되는 게 아니에요. 
그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은 찾아와 주세요. (우리의 믿음을 더해 주시는 방식으로 해결해 주십니다)

무작정 찾아온 게 아니고, 아브라함과 살아가 흔들릴 때마다 찾아왔어요. 
그 약속이 희미해질 때마다 찾아오셔서, 그것을 재확인시켜 주신다는 거요. 

근데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 '찾아오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거죠. 
그냥 지나가는 나그네로만 알았던 거예요. 손님으로 알고 열심히 대접했던 거예요. 

그리고 '네 아내가 어디 있느냐?' 
아내는 장막 안에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게 다가오시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절망적인 상황에 있을 때, 갑작스럽게 우리를 찾아오시는데 
아브라함과 사라는 전혀 얼떨결에 손님을 대접하고 보낸 거예요. 
변장을 하고 찾아오신 하나님 이시죠. 

18:20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아들에 대한 이 약속은, 하나님이 이미 그들에게 주신 약속이에요. 
이 말씀을 처음 들을 때는, 비합리 적이에요. 왜요? 현실과 너무 거리가 머니까. 
임신할 가능성이 사라에게는 전혀 없어요. 

그래서 '내년 이맘 때? 한 살 더 늘어나는데? 
금년에 임신했다 해도 믿기가 어려운데, 내년은 더 힘들지...' 

요즘으로 치면,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카톡으로 '크크크' 뭐 이렇게 보냈겠죠. 
아니면 '헐!' 
사라는, 어이가 없는 거죠. 속으로 웃는 거예요. 실소한 거죠.

재밌는 것은, 하나님은 사라가 웃는 것을 아셨어요. 
18: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8:15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여러분 오늘도 우리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을 비웃는 일이 많아요. 
겉으로 말은 안 해도, 속으로 비웃는 거죠. 
'크크크, 하나님 뻥치시네...' 

여러분 속으로 비웃어도, 하나님은 그걸 아세요. 

나중에 뒤에 보면
21:6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7 또 이르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아브라함의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래서 이삭의 이름 뜻이 '웃음'이에요. 
사라는 이삭(웃음)을 볼 때마다, 그 하나님과의 코믹한 대화를 잊지 않았을 겁니다. 

◑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절망 가운데 찾아오시는 하나님> 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맞이하는 현실은, 우리에게 유리하게 돌아갈 때도 있고 
불리하게 돌아갈 때도 있습니다. 
상황이 좋아질 수도 있고, 더 나빠질 수도 있어요. 

중요한 것은, 그 상황을 겪고 있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찾아와 주신다는 거예요. 
하나님 우리를 만나 주신다는 거예요. 
우리의 일상에 한 가운데 찾아와 주시고, 만나 주시는 겁니다. 

우리는 상황이 바뀌어 지기를 바래요.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절망적인 상황에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희망은, 좀 더 나아진 상황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희망하는 세상은, 오지 않아요. 
우리가 바라는 대로 되는 것이, 소원 성취가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상황의 호전을 바랍니다. 좀 더 나아진 환경을 바래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기다립니다. 

막연한 희망을 가지면 나중에 더 힘들어져요. 
희망이 강할수록 절망이 더 깊다는 거예요. 

여러분 일평생 우리가 겪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 삶의 형편은 나아졌다/ 나빠졌다를 반복하는 그 삶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어려운 현실에만 초점을 맞추고 벗어나려고 하면, 
더 악화되는 순간을 맞게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되는 것은 하나님 입니다. 
고통과 절망의 한 가운데 찾아오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라는 거예요. 

상황(환경)의 반전이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시선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겁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반드시 찾아오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내게 찾아오시는 게 복이죠. 그래서 삶의 어려움은 복입니다. 그때 찾아오시니까요!
그래서 오늘 내 일상 속에 찾아오시는 하나님, 
어떤 때는 나그네의 모습으로 찾아오실 수도 있는 거예요. 대단한 행차가 아닙니다. 

대개의 경우, 하나님의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오시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는 너무 평범해서... 지나쳐 버리기 쉬워요. 
나에게 찾아오신 그 하나님... 그걸 모르는 거예요. 너무 평범해서....

▲십자가 사건 후에 엠마오로 두 제자가 걸어가고 있을 때 
절망 가운데 걸어가고 있었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어요. 

근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다가 오셨습니다. 그들에게 말을 거셨습니다. 
근데 그들과 함께 동행하고 있는데도,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우리 역시, 내게 다가 오시는 하나님을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많아요. 
하나님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찾아 오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거죠. 

여러분, 예배당 안에서만 찾아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예측을 벗어난 모습으로 찾아 오십니다. 

어떤 때는, 산 위에서 신비한 경험을 할 수도 있지만, 
산 아래에서 일상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우리는 너무 신비롭게만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어느 날 우연한 만남처럼 가장하고 우리에게 찾아 오세요.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세요. 
우연한 만남 인데, 그 사람을 통하여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철야기도도 그런 거 아니에요? 
여러분 이 철야도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 주시는 하나의 통로 예요. 

여기 금요일마다 얼마나 놀라운 거예요?
매주 금요일마다 이 공간과 시간 속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고통 중에 있는 백성들을 만나 주시겠다고, 이런 시간을 만드신 거죠. 
사실은 얼마나 많은 분들이 금요철야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용기를 얻는지요?
하나님은 우리를 즐겨 만나 주시는 하나님 이세요. 

우리가 위기를 만날 때, 우리가 절망 가운데 있을 때, 아무 소망이 보이지 않을 때,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를 만나 주세요.

때로는 어떤 자연 현상을 통해서도, 내게 말씀하세요. 
예수님도 그러셨잖아요. '이 들의 백합화를 봐라. 
이 백합화, 들풀도 내가 먹이고 입히는데,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거든요. 깨닫게 하시는 거거든요. 

내가 지쳐 있는데, 내가 절망 가운데 있는데, 
하나님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에게 소망을 일으켜 주시고, 
우리를 만나 주시는 거란 말이죠. 

여러분 노아 홍수 후에, 무지개와 같은 상징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당신의 언약을, '물로는 다시 심판하지 않겠다'는 언약을 
자연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거죠. 하나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신다는 거죠. 

▲우리가 삶이 힘들고 절망적인 상황에 있을 때, 우리에게 찾아오는 게 뭐냐면 
'하나님은 내게서 너무 멀리 계신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멀리 계시는 분으로 보이는 거예요. 하나님은 왠지 냉담한 분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 분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절망 속에 있을 때, 내 인생이 바닥을 칠 때 
하나님은 나와 상관없는 분처럼, 하나님은 그냥 팔짱을 끼고 계시는 분처럼 
하나님은 저 멀리 지구 바깥에 계시는 분처럼... 내가 그렇게 여기는 거예요. 

아니에요. 오늘날 내가 마음만 열면, 내가 영적으로 조금만 깨어 있으면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 우리를 만나주시는 하나님을 알게 돼요. 
얼마나 가까이 다가오시는 분인지 몰라요. 

'거친 풍랑이 몰려와도 주와 함께 날아 오르리...' 
여러분 언제 우리가 하나님을 생생하게 만납니까, 언제예요? 
우리 인생의 바닥을 칠 때에요. 절망적인 때요. 고통 할 때요. 실패할 때에요.

그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이유가 뭘까요? 
우리의 믿음을 북돋아 주시는 거예요. 

여러분,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일으켜 주시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의 환경이 변화되고, 상황이 호전되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우리의 믿음이 자라나는 것, 믿음이 일어나는 것, 그것이 중요해요. 
내 믿음이 일어나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99세까지 상황이 악화된 거예요.

(그 일에 있어서 가장 좋은 길이, 내가 고난 당할 때, 하나님을 만나면서 
내 믿음이 성장, 성숙하는 겁니다. 그래서 잘 믿는데, 상황은 더 악화되기 쉬운 거죠.
하나님이 내 믿음을 일으키는 작업을 하시는 겁니다. 욥처럼!)

▲여러분 상황이 호전 돼도, 또 다른 상황에 부딪혀요. 
파도를 넘어갔는데, 또 다른 파도가 몰려와요. 
산을 넘었는데, 또 다른 산이 나타나요. 우리에게 뭐가 필요한 거예요?

여러분, 주님은 우리의 믿음이 강해지기 원하는 거예요. 
단단한 믿음이 생겨지기를 원한다는 거예요. 

믿음이 흔들리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관심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점점 자라가기를 원하시는 거죠.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 약속하고, 그 다음날 바로 그 약속을 이루어주시고 끝내버리면 되죠. 
여러분 그런 방식으로는 하나님이 행하시지 않는다는 거예요. 

오히려 우리를 최악의 상황으로 몰고 가는 거예요. 
구십구 세까지 몰고가시는 거죠.  최악의 상황으로 가는 거예요. 
소망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인간적인 관점으로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 
그 상황까지 몰아가시는 거예요. 더 이상 갈 곳이 없을 만큼 막다른 곳으로 몰아가시는 거에요. 

그 가운데 여러분, 하나님이 하신 건 뭐예요? 
아브라함의 믿음을 단단하게 만드시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은 흔들리지 않는 분이세요. 하나님은 견고하신 분이세요. 
하나님의 진리도 단단해요. 하나님의 진리는 변함이 없어요. 

세상이 아무리 요란해도, 그 진리를 붙들면 이깁니다. 
내가 이기는 게 아니에요. 그 진리가 이기게 하는 거거든요. 

문제는 그 단단한 진리, 그 약속을 붙잡고 있는 우리의 믿음이, 자꾸 약해지는 거예요. 
믿음이 흔들린다는 거예요. 진리가 흔들리는 게 아니에요. 
믿음이 흔들리는 게 문제예요. 

하나님의 사랑이 흔들리는 게 아니에요. 
내 믿음이 흔들리니까, 하나님의 사랑도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흔들려요?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은 흔들리지 않아요. 
내 믿음이 흔들리니까 약속이 왔다 갔다 하는 거죠. 

하나님의 성품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를 향한 당신의 계획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변함이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갈대처럼 흔들리고 흔들리니까... 
여러분 무엇이 흔들리는가 보십시오 

여러분 세상이 흔들려 흔들리지 않아요. 
내 믿음이 흔들리니까, 세상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하나님이 흔들리십니까? 아니에요, 내가 흔들리니까
하나님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거예요. 
여러분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면, 결정적인 순간마다.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너 지금 너무 흔들리지 마, 상황을 믿지 마, 나를 믿어! 
내가 누군지 알아?' 

그래서 14절에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던지는 질문이에요. 

'내가 누구냐, 내 능력이 미달된다고 생각하느냐? 
나는 전능한 하나님 (엘샤다이) 이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는 거죠.

렘32:17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 
여러분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간극이 있습니다. 너무 커요. 

그 능력은 제한이 없어요. 한계가 없어요. 
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든 상황을 통제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거요.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믿음의 출발지 입니다. 
우리 믿음의 출발은 '전능하신 하나님' 이세요.

'내게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이 질문에 과연 내가 어떤 답을 하느냐는 거죠.

하나님이 지금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믿음을 심어주고자 하는 거죠. 
믿음이 흔들리고 무너질 때마다, 그들에게 '계속 믿음을 붙잡으라고' 응원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축구나 운동경기에 선수가 뛰는 거지, 코치가 뛰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대신해서 뛰어주실 수는 없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나타나셔서, 코치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고, 응원해 주시는 거죠.
뛰는 거는, 아브라함이나 사라가 직접 뛰어야 합니다.

종종 우리는, '나는 벤치에서 쉬고, 하나님이 대신 나가서 선수로 뛰어주시길' 원해요.
물론 하나님이 뛰어주시죠. 그러나 언제까지나 '나를 통해서' 뛰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코치가 되시고, 나는 선수라는 사실을 혼동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다 처리해 주시는 게 아니라, 응원해 주시는 거죠.
혹시 믿음이 약해져서 주저 앉거나, 탈락할까봐... 나타나면서까지 응원해 주시는 거죠!) 

▲여러분 우리는 그동안에 이 번영신학, 성공주의, 고지론 등의 영향으로
하나님을 믿으면 무조건 뭐 내 생각과 뜻대로 돌아가는 것처럼 오해한 적이 많았어요.

그러나 여러분, 믿음의 출발지는 절망이에요. 
믿음과 절망이 함께 가는 거예요. 

제대로 믿음 생활을 하면, 여러분 어때요? 더 어려워지는 겁니다. 
여러분 회사에서도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대로 믿음 생활 하면요,
어떤 때는 이제 내가 거짓말도 못해요. 손해 봐도 내가 받아들여야 돼요. 

여러 가지 관계를 맺는 일에,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걸 오픈하고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하면, 주일을 지키고 모든 걸 다 정직하게 행하면, 
어떤 때는 이익이 안 나오는 거예요. 망하게 되는 거예요. 
어떤 때는 더 좋아져 가는 게 아니라, 더 나빠져 가는 거예요. 

그럴 때, 안 믿는 사람처럼 또 야박하게 회사를 운영해 보세요.
'신앙은 신앙이고, 사업은 사업이다' 이렇게 나가면,
또 직원들이 다 뒤돌아서서 손가락질 하는 거죠. '믿는 사람들이 더 야박하다' 비난해요.

그러나 욕 먹어가면서, 손해 봐 가면서, 묵묵히 신앙인의 정도를 걸어가는 거죠.
그러면서 내가 변하는 거예요.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던 내 가치관이 변해가고,
출세와 성공을 최고의 인생 잣대로 여기던 내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바뀌고...

그러면서 하나님이 사업의 성공을 주시면, 더 하나님께 충성되게 헌신하고
만약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내 삶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만족하며 사는 거죠.

꼭 내가 성공하고 잘 돼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게 아니라
나는 살든지/죽든지, 성공하든지/실패하든지... 어떤 형편이라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고... 그걸 바라봄으로 내가 만족하며, 내 영광으로 여기며 살죠.

여러분, 스데반, 베드로, 사도바울... 그들의 사역과 인생의 결말이 성공이었나요? No
그들은 살든지/죽든지, 성공하든지/실패하든지... 어떤 형편이라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고... 그걸 바라봄으로 내가 만족하며, 내 영광으로 여기며 살았던 거죠.
실제로 거기에 삶의 만족, 행복, 감사, 영광이 있어요. 

▲여러분, 믿음은 절망이 없는 게 아니라, 절망을 안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망적인 상황이 닥쳐올 때 '노 땡큐' 하면 안 돼요. 
여러분 그걸 받아들여야 돼요. 우리는 빨리 피하고 싶어해요. 결코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 살면서 어렵고 힘든 순간을 얼마나 우리가 많이 경험합니까. 
믿음의 길에 들어와서도, 훨씬 힘든 삶을 살아가는 분들이 계실 거예요. 
그게 믿음의 제대로 된 코스 예요. 그러면서 자아가 깨어져 가는 거예요.

예수를 믿는 초기에는 너무 좋죠. 
여러분 그러나 믿음의 길에 점점 들어가면, 결국은 어디로 가는 거예요? 
십자가로 가는 거예요.  손해 보는 거고, 때로는 망하는 거고, 
내 생각과 내 뜻대로 돌아가지 않고, 그 약속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 거예요. 

우리가 가지는 그 소망의 그 약속은 멀어요. 아브라함의 백 세처럼 먼 거예요. 
그 과정에 모든 것들은, 나의 계획대로 돌아가지 않는 그 절망, 그 한계, 

그 와중에 우리는 강하지 않아요. 우리는 약합니다. 우리는 흔들려요. 
그러나 우리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은 
나의 약함,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 그 상황, 그 바닥의 순간에서 
우리가 뭘 경험하는 거예요?

나를 찾아와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거예요.
그때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 거예요. 
이게 평소에는 잘 안 오는데, 내가 약해지고 절망할 때... 반드시 찾아와 노크 합니다.

여러분 내가 약하지 않으면, 언제 하나님을 의지 하겠어요? 
내가 진짜 강하고, 내 생각대로 되면,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할 것 같습니까? 
약해야 의지 하는 거예요. 약해도 그냥 약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게 아니에요. 
완전히 절망의 밑바닥을 경험해야 돼요. 
그래서 우리가 간절히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그 믿음을 갖도록 하나님이 유도하시죠.
이게 99세가 된 아브라함과 사라의 절망한 모습이에요. 

여러분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찾아오신 거예요. 
'내가 이제 너에게 아들을 주겠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 묵상하면, 당장 우울해져요. 
여러분 지금 내 상황만 보면, 돌아버리는 거잖아요. 

여러분 내가 돈이 없다는 게 문제입니까? 
내 환경이 불우하다는 게 문제입니까? 아니에요. 
자꾸 마귀는 우리의 현실의 상황에 돋보기를 갖다대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를 낙담시킵니다.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내년 이맘 때'라는 말은 
하나님은 그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을, 끌어내고 세워주기를 원하신 거죠. 
하나님 그들/우리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하시는 거죠. 

하나님은 오늘 우리게 질문하세요.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18:14
아브라함이 소원한 게, 늦게 늦게까지 기다렸더니 다 응답되었다... 가 아니에요.

아브라함이 오래 인내하며 기다리는 사이에, 
그의 믿음이 성숙해 가는 거예요.

이제는 세상 사람들이 가지던 그런 세속적 소원이 아니라,  
믿음이 성숙해 지면서, 하나님의 소원을 갖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는, 아들이 없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고 했던 거잖아요.
그 정도로 성숙해졌다는 것입니다. 
자기 소원 성취가 아니라, 거룩한 소원을 갖게 되었어요!

이 믿음이 여러분들 안에 불같이 일어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