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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전도 1

LNCK 2024. 6. 13. 21:17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말씀, 설교

 

20240529  마가는 그들에게서 떠나 돌아가고 행13:13절 ~ 31 / (youtube 정리)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전도 1     행13:13~31            

성령과 안디옥 교회의 보내심을 받은 바울과 바나바의 첫 번째 선교 여행의 여정들을 
지금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 일행이 구브로 섬을 떠나, 배를 타고 소아시아로 가는 여정입니다.

◑본문의 개요

본문은 크게 2가지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마가가 자기 집으로 돌아간 사건과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의 첫 번째 설교

13:13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바울 일행은, 지금 구브로 섬의 바보에서, 밤빌리아 州의 버가까지 온 거예요. 
그 거리가 뱃길로 280KM 정도 됩니다. 그러니까 엄청난 거리를 지금 옮겨온 것입니다. 

(*그런데 거리도 거리지만, 이 뱃길이 풍랑이 심하기로 유명하고, 
그래서 종종 파선이 일어나는 지역이랍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자기가 세 번 파선했다고 했습니다. 고후11:25
학자들은, 사도행전에는 자세한 언급이 없지만
'아마 바보에서 버가로 가는 뱃길에, 파선하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왜냐면 육지에 상륙한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가가 집으로 돌아가버리거든요.

그리고 이후에 비시디아 안디옥 즉 갈라디아에 가서도, 몸이 아팠다고 했는데, 갈4:13

이것은 구브로 에서 버가로 가는 뱃길에, 심한 충격, 즉 파선이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곳이 그 정도로 파선이 잦은 지역이었으니까요.
배가 깨져서, 널판지 등에 의지해서 바다를 헤매는 바울 일행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충격으로, 마가는 구사일생 육지에 상륙한 후에, 자기 집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앗달리아 항구(14:25)에서 내려서 버가까지 가려면, 19KM를 걸어가야 되고,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갑니다. :14   *수리아 안디옥과 구분 요

버가에서 비시디아州  안디옥까지는 직선거리로만 160KM 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에는 13절과 14절에 한 줄로 간단히 언급하고 있지만,
실제로 바울 일행은 엄청난 거리를 지금 이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서, 
이제 회심한 사도바울의 첫 번째 설교가 공식적으로 나옵니다. 13:16~41

◑마가가 도중에 집으로 돌아간 이유

:13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요한은, 마가요한을 일컫죠.
그가 예루살렘으로 간 이유는, 거기에 자기 집이 있었기 때문이죠.
마가요한의 다락방! 

지금 마가가 떠난 사건을 그냥 간단하게 한 줄로 기록하고 있지만, 
마가가 떠난 사건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마가가 그냥 돌아간 것은, 그냥 자기 볼 일을 보러 간 것이 아니었던 거 같아요. 

왜냐면 그 이후에 행15장에 보면, 2차선교여행을 시작하려고 했을 때,
마가의 동행 문제로, 바울과 바나바가 크게 다투어 서로 헤어지게 됩니다.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2차선교여행에)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15:38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15:39~40

그럼 마가는, 버가에서 왜 집으로 돌아간 것일까요?
성경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합리적인 추론은 몇 가지 해 볼 수 있습니다. 

1) 어떤 사람들은 마가가 좀 부요하게 살아서, 선교지의 척박한 환경을 버티지 못해서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라고 추론합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최후의 만찬을 하셨던 장소가, 마가의 다락방이었고, 
오순절에 성령이 오셨던 자리, 120문도가 성령 받은 자리도 마가의 다락방이었죠.
그 정도로 넓은 집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부유했던 집안의 아들이었던 것 같아요.
 
그랬던 그가 선교여행 중의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 자기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고 추정합니다.
앞서 설명했듯이, 바보에서 앗달리아로 오는 항해 길에, 큰 풍랑을 만나면서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되자, 마가가 견디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추론'합니다.

2) 또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끊임없이 자꾸 이방인에게로만 가려고 하는, 
그리고 너무 직선으로 부딪히려고 하는... 바울의 강경한 선교 방향에 동의할 수 없어서, 
도중 하차했다고 봅니다.

바울의 성격이 좀 강하잖아요. 
그러니까 바울은 시속 2백킬로로 달리려고 하는데, 
마가는 그 열정과 속도에, 제대로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마가는 마음이 상해서 돌아갔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3) 이것은 1)과 비슷한 이유인데요.
마가가 집으로 돌아간 이 지점이, 바보에서 배를 280KM 타고 앗달리아에 내려서

19KM 걸어서 버가에 이르렀는데, 

버가에서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가려는데, 돌아가 버렸거든요. 

바보에서 앗달리아까지가 뱃길로 험한 길이었다면,
지금 버가에서 비시디아 안디옥까지는 육로로 아주 험산준령 이었습니다.

거리도 직선으로 하면 160KM 정도 됩니다. 
거기에 타우루스 산맥이 가로막고 있어요. 
그러니까 버가에서 가려고 하면, 높은 산악지형을 지나야 되는 거예요. 

이 타우루스 산맥 자체가 워낙 험했고,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 타우루스 산맥에 도적과 강도들이 참 많았어요. 
그래서 그 곳을 지나다가, 다치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위험한 곳이었죠. 

그러니까 어쩌면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굳이 하나님께서 비시디아 안디옥에 가라고 콕 집어서 말씀하신 것도 아닌데 
'왜 굳이 그런 어려운 곳을, 가다가 죽을지도 모르는 그러한 곳을 가야 할까?' 
그런 생각이 어쩌면 마가한테는 들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갈4: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위 구절에 의하면, 바울이 갈라디아(=비시디아 안디옥 포함한 광범위한 지역)에 있을 때,

몸이 아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시디아 안디옥은, 또 휴양지로 당시에 유명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때 또 바울은 몸이 아팠던 거 같아요.
아마 구브로에서 배로 건너오는 중에 파선을 당해서 몸을 상했던것 같아요.

바울은, 버가에서 제대로 전도를 안 하고, 막바로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향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거기서 쉬면서, 자기 몸을 추스렸다는 거죠.
물론 거기서도 복음을 전했지만요) 

이래 저래, 마가는, '160KM나 되는 그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가다가 
죽을지도 모르는 이러한 여정을 왜 가야 되는가?' 
어쩌면 마가는 그런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던 것이죠. 
그런데 강행하는 바울에, 마가는 동의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추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마가가 집으로 돌아가는지, 확실히는 모르겠어요. 
그 중에 하나일 수도 있고, 위 세 가지가 다 작용했을 수도 있겠죠. 

근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무엇이죠? 마가가 잘한 행동은 아니었다는 거죠.
마가는 지금 자기 육신을 따랐다 라는 거예요. 

'복음을 전해야 된다' 라는 그 사명을 귀히 여기고,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가야 되는데,
성경은 '마가가 우리를 떠났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15:38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근데 마가는 이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습니다. 
막14장에 보면,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막14:51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52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많은 신학자들은, 마가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했다 라는데 동의해요. 
'한 청년(마가)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아마 마가는 밤에 자다가, 일어나서 거리로 나왔나봐요.
베 홑이불을 둘렀다고 했기에, 그렇게 봅니다. 

그런데 그가 무리에게 잡혔어요. 무리들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알아본 모양입니다.
그러자 그는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가 버렸어요.

마가는 앞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도, 육신에게 져서 육신을 따라서 도망가 버렸어요. 
떠나버렸단 말이에요. 

근데 지금, 1차선교여행의 사명 앞에서도, 또다시 
'내가 가다가 죽으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을 하다가, 
자기 육신을 따라서 사명지에서 떠나버렸다.. 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싸움을 하는 자이기도 하지만, 
나 자신과 싸우는 사람입니다. 
내 안에는 육신과도 싸우는 자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하잖아요. 
'기분이 태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해요. 내 기분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거죠.

마찬가지로 우리는 '육신이 내 삶이 되어서는 안 돼요.' 
육신이 나를 지배해서는 안 된다 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 내 안의 역사하시는 성령과 
내 안에 여전히 살아 역사하고 있는 육신과의 싸움이 있어요. 

그런데 육신이 내 삶이 되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육신이 나를 붙잡아 이끌어 가서는 안 된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우리에게 열매를 맺게 하시는 거예요. 
성령의 열매를 이렇게 나눌 수 있습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은... 하나님을 향해서 맺혀져야 될 열매,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기뻐하고, 하나님과 화평하는 것입니다.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은... 이웃을 향한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웃에게 대하여 오래 참아주고, 이웃에 대하여 자비를 베풀고, 
이웃에게 선한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충성과, 온유와, 절제는...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맺혀져야 되는 열매인 거예요. 
나를 사명지 보내셨으면, 내가 끝까지 충성해야 되는 거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내가 기꺼이 수용(온유)해야 되고 
절제하면서 나아가야 된다 라는 것이죠.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마가가 돌아간 사건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전쟁을 하는 자임과 동시에 
우리 안에 있는 육신과도 싸우는 자다.. 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마가와 달리, 사도바울처럼,
자기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존경스런 분들도 많이 계시죠.         주1)

◑바울의 첫 번째 공식적인 설교

버가에서 마가는 예루살렘 집으로 돌아갔고,
이제 바울과 바나바만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서 비시디아 안디옥에 도착합니다.

그곳 회당에서, 본문에, 바울의 첫 번째 공식적인 설교가 소개됩니다. 13:16~41

바울이 수리아 안디옥에서, 길을 빙 둘러서 여기 비시디아 안디옥까지 와서,
(중간에 파선도 당하고) 또 목숨을 걸고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서
비시디아 안디옥까지 와서, 결국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여기까지 왔지만, 몸도 성하지 않은 상황이었어요. 갈4:13
(중간에 난파를 당해서, 몸이 부상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서, 그 악조건을 뚫고서
그들에게 말하려는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건 딱 한 가지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은 공식적 데뷔 첫 번째 설교를 시작하면서 
출애굽 시대를 먼저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광야시대를 이야기해요. 
그리고 정복시대를 이야기하고, 그리고 사사 시대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왕정시대를 이야기하면서  
사울을 40년간 두셨다가 패하시고, 다윗이 왕위에 올랐다 라고 말하면서 
다윗까지 이렇게 7세대를 이야기합니다.  (출애굽~다윗시대)

그리고 난 이후에 22절을 보니까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하시면서 다윗에 대해 이야기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다윗의 후손에서 예수가 태어났다' 
이런 이야기를 설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바울은, 그의 설교를 전하는데, 내용이 뭔가 하면 
'모든 구약이 예수를 향해 왔고, 다윗도 예수를 가리켰다' 라고 하면서
그는 예수를 선포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 뭐라고 얘기합니까? 
13:23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 
구주 Saviour 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어요. 

13:24 '그가 오시기에 앞서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이렇게 바울의 설교는, 예수님께 초점이 맞춰져 있고, 예수님만 전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 즉 구주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역사도, 결국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한 것이라는 거죠.

13:41절까지 이어지는 구절들도 똑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어, 설교하고,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해 다시 살아나신 부활을 설교하고 있습니다.
딱 정확하게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 보면, 간증이 나쁜 것은 아닌데,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말하기보다는 
'나 자신이 예전에 예수 만나기 전에 어땠는가? 
그리고 예수님이 나에게 어떤 은혜를 주셔서, 내가 어떻게 변했는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경향들이 많잖아요. 

예수님을 전하기보다는, 자기 이야기를 할 때가 많아요. 올바른 간증이 아닙니다.
바울도 어쩌면 그럴 수 있었지 않겠습니까? 

바울의 화려했던 과거,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느냐?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했고, 나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다'
뭐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다른 곳에서 잠시 언급했을 수도 있지만,
그의 메시지의 초점은, 자신(의 간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였습니다.

거기에다가 바울이 얼마나 스펙타클 하게 예수를 만났습니까? 
그 사이에 얼마나 간증이 많았겠습니까?
'내가 하늘의 음성도 들었다. 내 눈이 감겼다가 다시 떠져서 보게 되었다'
이런 이야기들을 하면, 듣는 사람들이 얼마나 집중했겠냐 말이에요. 

근데 바울은 자기 자신의 과거나, 자기 자신의 놀라운 경험,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지 않고, 그렇게 생명 걸고 여기까지 와서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고 있다 라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저는 설교자라서, 누군가의 설교가 나오면 주목하게 됩니다.
'이 분은 설교를 어떻게 했지?' 
그래서 베드로의 설교도 주목해 봅니다. 
'와 도대체 어떻게 설교를 했길래, 3천명이나 하루에 돌아오나?' 

본문의 사도바울의 설교도 유심히 살펴보게 됩니다.
보니까 사도바울의 설교는, 너무 단순하다 싶을 정도로, 
담백하게 설교했더라고요.

서론은 그냥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한 구약시대를 쭈욱 언급했어요. 
그리고 다윗을 통해서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사람의 지혜나 수사학을 쓰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해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도록 
그렇게 설교를 하고 있는 거예요. 

고전2: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에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많은 사람들이 '저는 말을 잘 못해요. 뭘 잘 몰라요.' 
사도 바울은 많이 알아도, 사람의 지혜와 설득력 있는 말... 이런 것들로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대로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했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구주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 이시다. 
그분이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리고 3일 만에 부활하셔서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 
그를 믿으면 구원받는다.' 이거는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말인 것이죠. 

근데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했던 이유는 
지혜가 없었기 때문도 아니고, 자기 자신을 비하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도록, 성령께서 내 말을 사용하시도록 그렇게 했다는 거죠.
즉 사도 바울은, 복음만, 하나님을 의지해서 전하는 사람이었다.. 
라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렇게 
복음을,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서 전하는 자다...
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적용

▲설교는 성경의 뜻을 풀어주는 것, 즉 해석해 주는 것!

행17: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뜻을 풀어'
'풀어'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디아노이고 라는 단어입니다. '완전히 열다'는 뜻입니다. 
open thoroughly (what had been closed)

여러분 성경말씀이, 언제 여러분에게 비로소 열립니까? 
본문의 뜻을 풀어줄 때, 성경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해석해 줄 때, 여러분에게 그 본문이 비로소 열립니다. 
풀어주지 않으면요, 본문의 의미가 열리지 않습니다. *에티오피아 간다게 처럼요.

그래서 반드시 읽은 말씀을 해석해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앞에 있는 목회자의 역할이 여기에 있는 거죠. (해석이 없는 설교가 많습니다)

회중들이 알기 어려운 부분들을, 열어서 풀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그때 2천년 전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지금 여러분을 찾아오시는 그분의 말씀이 되도록 하는 과정이 
위 3절의 '뜻을 풀어'내는 과정입니다. 

성경이 해석되어 풀려나올 때,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열리는 복됨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소그룹에서 이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소그룹에서 사랑하는 지체들과 함께 모였을 때 
그저 여러분의 삶만 나누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한 주만에 소그룹에서 만나면 얼마나 반갑습니까? 그렇죠. 
얼마나 나누고 싶은 얘기가 많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의 삶을 나누시되, 말씀에 근거해서 나누어야 합니다. 
특별히 주일날 들었던 말씀의 해석의 근거해서 나누셔야 합니다. 

'말씀이 이러한 뜻인데, 그 말씀이 각자의 삶에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가'를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이 소그룹에서 해야 되는 핵심입니다. 
그럴 때 해석된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것으로 경험되는 부요가 있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 공동체 안에 참된 영혼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17:3

성경의 뜻을 푸는데, 뜻을 풀어 데리고 가는 지점이 있습니다. 
여러분 바울이 성경을 풀어서 데리고 가는 지점이 어디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경이 우리를 데리고 가는 지점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그분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고, 또 해석하고, 적용할 때, 제일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여러분들이 얼마나 성경을 잘 알고, 잘 해석하고 있는가는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께 초점이 딱 맞춰지면서, 그분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닮아가면... 
여러분들은 성경을 정말 바르게 알고, 바르게 해석하고, 바르게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성경의 핵심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마다, 예수가 보여야 진짜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닮아야, 그게 진짜 성경을 읽는 겁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좀 안다... 그런데 예수님께 관심이 없다 그러면, 그건 큰일입니다. 

기독교의 영광은 예수를 아는 데 있습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예수를 믿는 데 있습니다. 
예수를 제대로 알면 세상이 정말 바르게 보입니다. 
세상의 헛됨과 어리석음이 보입니다. 

예수 믿는데 자꾸 세상의 부귀와 영광이 눈에 들어온다면, 여러분 큰일입니다. 
세상과 다른 눈으로 봐야 하는데, 세상사람들 수준으로 똑같이 보는 거죠. 

오늘 바울의 설교를 보십시오 성경을 풀어 예수를 전합니다. :3
성경을 풀어서...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를 전했습니다. 

▲요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설교는 성경을 가르치는 것인데, 
성경 66권이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하는 책이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설교의 중심에 있어야 되는데, 
이는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가 그 중심에 있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창1장에서부터 모든 장과 문단에서 
십자가를 발견해내는 것, 이게 성경의 해석이고, 바른 설교입니다. 

왜 성경의 모든 장에서 십자가를 발견합니까?
혹시 모든 장에서 십자가를 발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방향으로 지향해 나가야 합니다.
 
구절이나, 문단이나, 장에서 십자가를 발견함으로써, 
그 발견된 십자가를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과 실제적인 연합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 
우리가 성경을 읽고, 말씀을 해석하고, 설교하는, 그리고 설교를 듣는 목적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지금 이 시대에 얼마나 설교영상이 많습니까?  정말 셀 수가 없죠. 
그럼 그 설교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인가/ 아닌가를 어떻게 구분해요? 
성경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면, 다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아니라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아버지와 연합하고, 
땅에 남아있는 내 몸은, 성령님과 연합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하는 이야기가, 어떤 본문에서든지 나오지 않으면 
그것은 올바로 성경해석이 된 게 아니고, 성경적인 설교가 아닌 겁니다. 

제가 가끔 여러 설교를 서핑해서 들어봐요. 
물론 다들 설교를 잘 하시죠. 표현력도 좋고, 설득력도 좋고, 호소력도 좋습니다. 
설교말씀을 잘 전해요. 잘 전하는 설교인데, 그리스도가 빠지고,
그저 도덕적 교훈이거나, 삶의 요령을 가르쳐주려는 (자기계발적) 설교가 많아요. 

그리스도 복음의 전체 과정 (탄생-생애-십자가-부활-승천) 의 예수님이 빠져있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내가 연합하는 이야기가 빠져있다면, 
또한 성경 본문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설교의 초점이 만약 다르다면,
그것은 올바른 성경 해석한 게 아니고, 설교가 아닙니다. 

성경이라는 책을 그냥 자기 나름대로 해석한 것이지, 
성경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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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어느 목사님이 2009년도에 인도네시아 선교사 수련회를 인도하러 가셨어요. 
그때 인도네시아 각지에서 선교사님들이 모이셨는데, 깜짝 놀랐대요. 

어느 여성 싱글 선교사님은, 자카르타에서 1시간 반 비행기를 타고 가서 
거기서 배를 타고 또 14시간 들어가는 그런 섬 지역에 가서 사역하신대요.
인도네시아 동쪽 끝에는, 웨스트 파푸아(뉴기니)가 있죠.

또 WEC 소속 젊은 선교사 부부는, 99% 강성 이슬람들이 사는 그 마을에 들어가서 
사역을 하는데, 선교사 신분이 드러나면 그냥 밤 중에 
누구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는 그런 지역에 가서 사역을 하세요. 

어느 선교사님은 무슬림 신학생이 밤에 강도로 위장을 하고 들어와서 
폭행을 하는.. 그런 일을 경험한 이야기도 하시더라고요. 

'도대체 이런 상황에서 계속 선교하시는 것이 가능한가?' 그런 생각이 드는데, 
선교사 수련회가 끝나자 다들 또 자기 임지로 돌아가시더라고요. 

인도네시아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품고서 
그렇게 선교를 하시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