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이방인을 받아들인 예루살렘 교회 행11:1~18 2024.06.09.
본문은 가이사랴 고넬료 집에서 베드로를 통한 '이방인의 오순절'이 있은 후에, *행10장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가이사랴에 있었던 일을 보고하는 내용입니다.
다행히 예루살렘 교회는, 가이사랴 고넬료의 집에서 이방인들이
주께로 돌아온 일을... 인정했습니다.
11:1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느리게 느리게 이방인을 받아들인 예루살렘 교회
사도행전은 하나님이 앞서 나가시고, 사람들이 뒤따라가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때로 지체하기도 하고, 허겁지겁 겨우 따라가기도 하고,
'못 가겠습니다' 하고 버티기도 하는 이야기 입니다.
동시화 Synchronization, 하나님과 보조를 맞추어가는 베드로 이야기가
사도행전 10장에서 나왔습니다.
이방 선교의 문을 활짝 열어가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그 길로 부르시는데 베드로는 버텼죠.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오고 '먹으라' 그랬는데 거부했습니다.
이 일이 일어난 곳이 욥바입니다. 욥바가 본래 예루살렘의 항구였고요.
그 당시는 가이사랴 라는 큰 항구가, 욥바 위에 새로 생겼습니다. *40킬로 북쪽에
로마군이 여기에 주둔했죠. 가이사랴는 '가이사의 도시'라는 말입니다.
욥바는 전통적인 항구도시인데, 구약 성경의 아주 중요한 대목에서 나오죠.
욘1: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에 내려갔더니'
하나님은 요나에게 '앗수르의 니느웨에 가서 전도해라.
그곳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을 증거해라' 라고 명했는데
요나는 '그곳에 못 가겠습니다' 하고 도망갔던 요나의 기억이 간직되어 있는 도시가 욥바입니다.
눅15장 '탕자의 비유' 결론을 보면, 그 다음에 결말이 어떻게 되었는지.. 안 나옵니다.
눅15:32절로 이렇게 끝나버리고 맙니다.
눅15: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이렇게 끝나버립니다.
그 다음에 형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성경에 안 나옵니다. 그래서 무척 궁금합니다.
요나서의 마지막 결론도 마찬가지입니다.
햇볕이 무척 뜨거운 날, 하나님이 요나의 머리 위에 박넝굴을 만들어 주십니다.
'야 시원하다. 좋다' 그랬는데, 벌레가 와서 박넝쿨을 다 먹어버리고
마침 뜨거운 바람이 불어오고, 박넝쿨도 없어져서 요나는 햇볕 때문에 죽을 지경입니다.
'내가 못 살아, 하나님 때문에 못 살아, 하나님 어쩜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항의하는 요나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죠.
욘4:10~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이렇게 요나서가 끝을 맺습니다.
그 다음에 요나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성경에 안 나옵니다.
탕자의 비유와 너무 비슷하죠.
탕자의 비유도, 요나의 이야기도, 결론 없이 열린 채로 끝이 나버립니다.
그 핵심은 '이방인을 마음을 열고 받아들여라' 라는 하나님의 권유예요.
(탕자는 죄인이라는 의미에서의 '이방인')
그렇게 결론 없이 끝나버린 그 다음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가서는 나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행전은 굉장히 중요한 성경이죠.
성경 66권을 한 권으로 볼 때, 요나서, 탕자 이야기에서 안 나오는 결론이
사도행전, 특히 본문에서 나옵니다. 결국 '이방인을 받아들였다'는 거죠.
'계시의 점진성'이란 말이 있는데,
구약에서, 신약의 복음서에서
안 받아들이던 이방인을
사도행전에 와서야, 결국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계시가, 하나님의 나라가 점진적으로 발전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본문은 가이사랴 고넬료 집에서 베드로를 통한 '이방인의 오순절'이 있은 후, *행10장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에 돌아와서, 가이사랴에 있었던 일을 보고하는 내용입니다.
다행히 예루살렘 교회는, 가이사랴 고넬료의 집에서 이방인들이
주께로 돌아온 일을... 인정했습니다.
11:1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마지 못해 인정했는지,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어서 인정했는지,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들도 예수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 공인(공식적으로 이방인 입교 인정)이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안디옥 교회가 출발할 수 있었던 거죠.
만약 이 과정이 없었다면, 안디옥 교회는 시작조차 못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공인이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사도바울의 1차, 2차, 3차에 걸친 이방인 선교가 시작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요나서에 잘 나타나 있듯이
유대인들이 이방인과 더불어 같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물과 기름처럼 섞이기 힘든 전통과 문화와 현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치 '계시의 점진성' 처럼,
사도행전에 와서야, 비로소 유대인과 이방인이
같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섞이게 되는 쾌거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방인과 유대인의 형제로 뭉쳐짐)이 얼마나 어려운지,
비유를 들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요나도, 만약 그때 타임지가 있었다면 '니느웨의 빌리 그레함'
이 정도 헤드라인의 기사가 떴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나가 고국 이스라엘에 돌아옵니다. 어떻게 됐을까요?
'좋은 일을 하셨습니다. 국위를 선양했습니다' 하면서
환영하고, 카프레이드 했을까요?
아뇨, 그 반대로 요나는, 귀국 즉시 체포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적국 앗수르 니느웨를 이롭게 한 죄, '이적죄'로, 보안법 위반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요나에게 돌을 던진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전에, 박항서 감독이 베트남에서 영웅이라 그러잖아요.
만약에 박항서 감독이 지휘하는 베트남 축구팀이
월드컵 진출권을 놓고 한국과 다투는 과정에서
한국 대표팀을 역전승해서 이겼다. 그래서 한국 축구팀이 탈락했다...
그러면 한국의 극성팬들 중에서는 '박항서 가만히 안 둔다' 그랬을 것입니다.
막 악플 달고요. 어쩌면 살해협박도 나올 수 있겠습니다.
21세기 한국 같으면, 이 정도 극렬 팬들은 소수이겠지만,
주전 8세기 요나 때는, 대다수 였을 것입니다.
요나 자신이 그런 국수주의자 였죠. 그런 국민 정서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예를 들었지만, 주후 1세기의 예루살렘도 비슷했습니다.
이방인을 대하는 태도에서 '나는 죽어도 그런 음식 못 먹습니다'
즉 '나는 이방인들과 어울리지 않겠습니다' 하는 베드로!
우리는 베드로를 흉보기 쉽지만,
베드로는 지금, 위의 예에서 요나나 박항서 감독처럼,
가이사랴에서 '이방인의 오순절'의 주역이 되는 사명을 감당하고 나서도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보고할 때는 '찝찝하게' 보고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정서, 유대인 기독교인들의 정서를 감안하면,
베드로가 마구 떠벌리듯이, 자랑스럽게 예루살렘 교회에 보고할 수는 없었다는 거죠.
◑ 듣고 잠잠하여 :18
11:1~3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여러분, 고넬료의 집에 복음이 증거되고, 그 집이 성령충만하게 되고,
예수 믿고 세례받는 기쁨이 막 넘쳐났어요. 막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그런데 예루살렘 교인들은, '베드로여, 그 집에 왜 갔지? 너 같이 밥 먹었냐?'
라고 베드로를 비판합니다. 삿대질합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일이 얼마든지 벌어집니다.
교회에서 젊은이들이 찬양 집회합니다. 은혜가 넘쳐요.
결심과 결단이 막 이어집니다.
그런데 어떤 교회 어른들은 시험에 듭니다.
'교회에서 복장이 그게 뭐야? 어떻게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찬양인도 할 수 있어?
당회에 이야기에서, 앞으로 그런 집회 하지 못하게 할 거야!'
오늘날에 많은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베드로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갔다고? 그것도 로마 군인의 집에?
음식까지 같이 먹었다고? 어휴, 그건 안 돼지, 선을 넘은 거야...'
여러분, 이방인들을 똑같은 자격으로 환영한다는 것은
선민 이스라엘의 특권을 스스로 박탈하거나 흐리게 만드는 일이다..
라고 여긴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뭐라고 그러셨습니까?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렇지만 유대교 신자들은 '세리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그건 견딜 수 없어!' 하는 거예요.
강력한 항의가 일어나고, 교회 분위기가 험악해집니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서, 미적거리다가 겨우 하나님과 보조를 맞추니까,
이제는 베드로와 다른 성도들 사이에 거리가 생겨버렸습니다. 주1)
▲그래서 베드로가 그들에게, 그 일을 차례로 설명하는 내용이 본문 행11장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아한 점은, 본문 11장을 읽어보시면, 10장과 워딩이 거의 똑같아요.
복사해서 그대로 갖다 붙인 것같습니다. Ctrl C 해서 Ctrl V로 붙인 것 같아요.
성경에 이런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냥 10장에 일어난 사건들을, 요약하고 압축해서 간단히 설명해 버리면 될 것을,
미련하고도 무식하게,
11장에서 모든 일을 자세하게 다시 한 번 더 반복해서 성경에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런 예는 성경에서 대단히 드문 일입니다.
특히 옛날에는 책을 쓰는 비용이 대단히 비쌌습니다.
그래서 분량 아끼려고 띄어쓰기도 안 했어요. 다 붙여쓰기 했어요.
양피지 책이나 성경은, 재료비가 대단히 비쌌고, 제작 과정도 무척 힘들었어요.
그런데도 11장에서, 10장의 사건을 한 번 더 그대로 자세히 기술했다는 것은,
그 내용이 대단히 중요하고, 아주 특별한 사건이었다는 거죠.
결국 10장의 '이방인의 오순절' 사건도 대단히 중요하고,
11장의 '교회의 이방인 수용 결정' 사건도 대단히 중요한 결정이었다는 겁니다.
여러분, 사도행전은 하나님이 앞서 나가시고 사람들이 뒤따라가는 이야기라 그랬는데
앞서 나가시는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만큼이나,
교인들이 다함께 가는 것도 중요해요.
그래서 11장에 이게 아주 자세히 나오는 겁니다.
베드로가 혼자서 독자적으로 치고 나가지 않고,
길고 자세하게 설명해서, 예루살렘 교회를 설득시키는 거예요.
그 설득은 성공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 입교를 받아들인 거예요.
:1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본래 여러분, 교회는 의사결정 과정이 아주 느립니다.
반면에 선교단체의 이점이, '의사결정 과정이 아주 신속하고 빠르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중국 선교할 사람 모여라' 그러면 금방 모여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일이 착수됩니다.
환경운동단체도, '환경운동 할 사람 모여라'
그러면 아주 역동적으로 빨리 사업이 진척됩니다. 그게 환경운동단체예요.
그런데 교회는 그런 일을 다 하지만, 교회가 하는 일은 대체로 느리고 답답합니다.
교회는 한 발 내딛는 게 그렇게 힘들어요.
그래서 비즈니스 하시는 분들이 교회 와서 참여해 보면,
답답해서 부아가 나는 분들이 많습니다.
참 이렇쿵 저렇쿵 정말 조그만 거 가지고도 얼마나 말이 많은지...
일반 학교나 회사에서 두 달만에 처리할 일을,
교회는 2년이 걸려도 못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다함께 가기 위해서는, 느린 것도 때로는 참고 감수해야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 행10장에 나온 내용이, 11장에 그대로 고스란히 다시 나오는 겁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욥바와 가이사랴에서 경험한 일을 소상하게 말합니다...
▲그래서 현장에 가봐야, 딴 소리 안 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가이사랴에 가기 전까지는,
고넬로 집에 가기 전까지는,
베드로의 마인드도, 예루살렘 교인들하고 별로 다를 바가 없었어요.
베드로가 만약 가이사랴 현장에 가지 않았더라면,
대신에 다른 누가 와서 '가이사랴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하고 보고했다면,
아마 베드로도 '안 된다'하고 반대했을 것입니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을 이유는,
하나님이 환상을 세 번이나 보여줬어도, 베드로는 '그럴 수 없습니다'하고 버텼잖아요.
근데 여러분, 고넬로 집에서의 직접 경험 이후에, 베드로는 완전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거기 가서, 하나님이 직접 역사하시고, 그곳에서 성령이 내리시는 것을 봤을 때,
그는 '고넬료 집의 제2의 오순절' 이전과는 같은 사람일 수 없어요.
그 이후에는 완전 다른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게 현장인 겁니다. 현장의 경험이 그만큼 소중한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할 수만 있으면 현장에 가보는 게 좋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 직접 경험해 보는 게 좋아요.
그래서 단기선교에 가는 겁니다.
지난 4월에 우리 교회 '담너머' 전도했잖아요.
여러분 전도가 뭡니까? 머리로는 다 알아요.
근데 여러분, '담넘어 전도' 가 본 사람과, 안 가본 사람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그 시골 마을에 가서 직접 전도 해본 사람과, 그 공기를 느껴본 사람과,
시골에 정말 어려운 교회에 찾아가서 함께 예배하고, 기쁨에 넘치는 성도들을 만난 경험,
그 시골에서 어른들 찾아가면서 복음을 전하느라고 땀 흘렸던 그 경험을 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은... 전도에 대한 이해가 기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할 수만 있으면 현장에 가는 게 좋아요.
전도 잘 못해도 좋아요. 준비 안 되셔도 좋아요.
전도대원들을 지원하는 일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전도대들원들의 간증을 들어보면요.
여러분 전도의 현장에서 느끼는 '하나님 (임재) 경험'은,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 집에 자라는 청소년들, 청년들, 아이들도
가급적 선교 현장에 보내는 게 좋습니다. 꼭 해외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주위에 얼마나 전도하고 봉사할 데가 많은지요.
우리 당회도 정기적으로 다녀봐야 됩니다.
전도 현장도 가보고, 선교 현장도 가보고,
다른 교회들 방문하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 현장 경험 없이 회의만 하면... 엉뚱한 것에 집중하기 쉽습니다.
한 달 전에 우리 목사님과 장로님들 몇 분이
경기도 서울까지 가서 예배드리고 그렇게 왔습니다.
'우리 교회를 어떻게 좀 잘 디자인해야 되나?'
여러분 가본 분들과, 가지 않은 분들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의 사역은, 현장에서 하나님 일하시는 것을 증언하고
그 경험을 나누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본문에 베드로가 하는 말을 같이 한번 들어보십시다.
17절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18절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18
예루살렘 교회가 바뀌고, 역사가 바뀌는 순간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기독교 공동체가, 이방인을 형제로 받아들이는 순간입니다.
이 결정이 있었기 때문에,
그 후에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질 수 있었고,
사도바울이 1~3차 전도여행이 가능했고,
그래서 교회가 쭉쭉 뻗어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런 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가 그 가이사랴의 현장, 제2의 오순절의 현장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장에 없었던 사람들은, 베드로를 막 비난합니다.
11:2~3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2절에 아주 시끄러워요. 막 삿대질해요. 언성이 높아요. 막 자기 주장을 강조해요.
그러다가 18절에 듣고 잠잠해졌어요.
의견과 의견이 충돌하다가, 찬성과 반대 토론이 막 난무하다가
어느 순간에 잠잠해져 버리는 거예요.
그 차이는, 현장에 없었던 사람과, 현장에 있었던 사람의 차이입니다.
다행히 교회는, 현장에 있었던 사람인 베드로의 증언을 듣고,
그를 따르기로 결정합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교회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열린 자세
그 바로 다음에 19절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요?
11:19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보세요. 예루살렘 모교회가, 이방인들을 받아들이기로 결정을 하고 나자마자 :18
예루살렘과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복음이 흩어져서 전파됩니다. :19
아니, 이미 예루살렘 교회가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번져나가는 현실이 있었던 겁니다.
비록 예루살렘 교회가 살짝 늦은 결정이었긴 하지만, 훌륭한 결정을 내렸어요.
만약 한참 뒤쳐지는 결정을 내렸다면, 아주 역사에 '걸림돌'이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결국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제치고
이방 선교의 본부가 된 이후 역사를 보면, 사실 촛대가 옮겨진 것이지요.
만약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 선교에 아주 적극적으로 대시했더라면,
촛대가 안디옥 교회로 옮겨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혹자는,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로 구제헌금을 보낸 사건을 두고서, 11:29~30
이미 교회의 촛대가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옮겨졌다고 봅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에요. :21
고넬로 집뿐 아니라 하나님은 이미 저만치 앞서 나가고 계십니다.
온 세계가 이방인 선교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겁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얼마나 답답한 교회입니까? 느리고 더디게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18절의 이 결정을 예루살렘 교회가 안 했으면,
그 교회에 대단히 큰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 교회와, 예루살렘 유대인 교회 사이에 큰 분열이 있을 뻔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한 가지 묵상할 내용은,
'내 생각에는 저 사람들 예수 믿을 것 같지 않아, 저 사람들은 틀렸어, 저러면 안 돼!'
하는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예수 잘 믿고, 전도도 잘 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겸손한 마음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예루살렘 교회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득권 층에 눌러앉아 버린 거예요.
지금 막 일어나는 신생 안디옥 교회를 봤을 때 '저들이 뭐 하겠어?' 했을 것입니다.
'제대로 믿기나 하겠나?' 이런 생각에 안주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눈깜짝할 사이에,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추월해 버립니다.
하나님이 촛대를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옮겼다고 말해도 될 정도로,
무시 받던 안디옥 교회가, 세계 선교와 하나님 나라의 주역으로 등장합니다.
(나중에 안디옥 교회에서, 또 하나님 나라의 센터가 에베소 교회로 이동됩니다)
이것은, 세대 간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른들은 '젊은 세대가 뭘 하겠어?' 하겠지요.
그러나 어른 세대와 젊은이들 세대에 '예루살렘 - 안디옥 교회 구도'가
그대로 적용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내가 복음을 먼저 받았다고, 내가 복음의 역사가 길다고... 거기에 안주하지 말고,
새로운 세대, 새로운 지역, 새로운 교회를... 열린 마음과 열린 눈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여러분,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저만치 앞서간다고, 지난 주에 말씀드렸잖아요.
'세상은 100마일로 가는데, 학교는 10마일로 간다'
교회는 다릅니까? 교회도 아주 느리게, 더디게, (예루살렘 교회처럼) 가기 쉽습니다.
지난주에 이런 기사가 감동적인 기사가 나왔었습니다.
어른이 잃어버린 신용카드를, 여중생 둘이서 찾아준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이 얼마나 앞서 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주2)
▲11장 초반에 예루살렘 교회는,
'아니, 지금 교회가 잘 돌아가고 있는데, 그냥 아무 문제 없는데,
왜 베드로 당신이 고넬료 집에 가가지고 평지풍파를 일으키느냐?' 그랬어요.
여러분 아닙니다. 11장 전체를 보세요. 큰일 날 뻔 했어요.
지금 로마제국 안에서, 이방인들이 막 예수님께로 돌아오고,
여기 저기서 교회가 일어나고 있는데,
예루살렘 교회는, 자기 울타리 안에서만 갇혀가지고,
'우물 안 개구리' 신세로 살고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을 몰랐던 거예요.
계속 그렇게 국수주의로 나갔다면,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로, 교회가 완전히 둘로 나눠져서
공중 분해될 뻔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10장에서 경험한 그 '이방인의 오순절' 경험을
11장에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자세하게 반복해서 기록하면서)
예루살렘 교회가 다행히 '열린 자세'로, 자세를 고친 것입니다.
베드로의 보고를 받고요.
근데 만약 이 결정 없이,
바울이 이방 세계에 전도하고 돌아다녔다면,
아마 바울은 박살 났을 것입니다. 어디서 '듣보잡'이 나대느냐고.. 혼쭐 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안디옥 이방인 교회가,
예루살렘 유대인 교회보다... 더 잘 믿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항상 경계해야 됩니다.
내가 어른이고, 우리가 모교회이고, 우리가 본부고, 우리가 주류 기독교다... 하는 사이에
저 무시하던, 아장아장 걷던 이들이, 우리를 추월해 버리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다소 늦은 감이 있긴 했지만, '열린 마음, 열린 결정'을 내린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입니다.
그러다 보다 적극적이지 못했던 것이, 안주했던 것이,
오히려 지교회, 브랜치교회에게 추월당해 버리는... 묘한 결과를 낳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사도행전은, 복음의 승리의 역사이면서
예루살렘 교회의 실패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안디옥 교회를 통해서
세계선교의 역사, 행1:8절을 이루시는 역사를 계속해 나가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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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예를 들면 이런 상황입니다.
학교에서 어떤 중요한 일이 있을 때에 선생님이 학생들을 설득합니다.
학생들은 반대합니다. 반장이 맨 앞에 서서 반대합니다.
그러다가 선생님이 계속 설득하니까,
반장이 그 말을 알아듣고 '예, 맞습니다. 선생님을 따릅니다. 지지합니다'
그러자 급우들이 이제 반장도 거부하는 거예요.
'야 너 혼자 배신 때리는 거야? 너 혼자 선생님에게 잘 보이려고 그러는 거야?'
그 반장이 베드로입니다.
주2) 어떤 어른이 잃어버린 신용카드를, 여중생 둘이 찾아준 이야기
제주도에 있는 60대 남자분이에요.
그날 저녁에 문자를 보니까 300원 결제가 되었다는 문자가 떴습니다.
'소액이니까 뭐 스스로 빠져나갔나 보다' 하고 신경 안 썼어요.
다음 날 지갑을 열어보니 크레딧 카드가 없는 거예요.
어디서 떨어뜨렸나 봐요.
그래서 '누가 혹시 그 카드를 주워서, 쓰지나 않았을까?' 염려해서,
핸드폰에 뜨는 결재 내역을 자세히 들여다 봤습니다.
보니까 동네 편의점에서 누가 3백원을 결제한 문자가 보였습니다.
그래서 물어볼 겸, 동네 편의점에 가니까,
그 전날에 여중생 두 명이 이 크레딧 카드를 주워가지고 이 편의점에 와가지고
300원짜리 막대사탕 두 개를 사가지고, 주운 카드로 결재한 거예요.
그리고 '아마 내일쯤 되면 이 카드 주인이 찾아올 거니까 돌려주세요'
하고 카드를 비닐봉투에 넣고, 300원 막대사탕까지 넣어가지고, 거기 두고 간 거예요.
여중생들이 놀랍지 않습니까?
여러분 많은 어른들은, 남의 크레딧 카드를 주으면 그냥 버립니다.
그런데 여중생들은, 어떻게 하면 신용카드를
주인에게 돌려줄 줄을 아는 거예요.
요즘 학생들이 그만큼 똑똑하고, 어른들보다 앞서 나간다는 얘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