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blog.naver.com/karamos/222138896865
◈성소안의 등대 출25:31~40 2015년 설교
서론
성막은 지성소와 성소로 구성되어 있고, 지성소는 성막의 1/3이고, 나머지 2/3가 성소입니다.
지성소 안에는 언약궤가 들어 있으며, 성소 안에는 세 가지 기구가 있습니다.
성소의 문을 통과하면 오른쪽으로 떡상, 정면으로 분향단, 왼쪽으로 순금등대가 있습니다.
성소의 문은 동편으로 열려 있기 때문에 북쪽으로 떡상, 서쪽으로 분향단,
남쪽으로 순금등대가 있는 것입니다.
순금등대에 관한 가장 탁월한 연구는 20세기 침례교 목회자였던 아더 핑크(Arthur Pink)가 쓴
『출애굽기의 이삭줍기』(Gleanings in Exodus)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더 핑크는 이 책 이외에도 양서들을 많이 저술하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님의 주권』은 아주 독보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도라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려면 제대로 믿어야 하는데,
이 책을 아직 읽어보지 못하셨다면 서점에도 비치되어 있으니 꼭 구매해서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아더 핑크는 순금등대에 관한 매우 탁월한 연구를 했습니다.
물론 그가 약 15년 정도 세대주의 종말론에 빠져 있었지만,
뉘우치고 탁월한 개혁주의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출의 이삭줍기』에도 세대주의 종말론에 영향을 받은 기록들이 남아 있지만,
이를 제하면 순금등대에 관한한 핑크의 아티클은 최고의 연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준비하며 이 책의 내용을 참조하였습니다.
‘등대’는 바닷가에 서 있는 ‘등대’(Lighthouse)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내에 불을 켜는 ‘등대’(Lampstand)를 가리킵니다.
히브리어로 ‘메노라’(Menorah)라고 합니다.
어떤 번역에는 이를 ‘촛대’(Candlestick)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옳은 번역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소에 있는 등대는 초를 태우는 방식이 아니라,
기름을 태워 빛을 내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순금등대’가 바른 번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촛대로 번역된 성경들이 있는지 궁금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로마 가톨릭의 잔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주교인들은 예배나 기도할 때 촛불을 많이 사용합니다.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해부터는 부활절 새벽에 촛불예배를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성경에도 예배나 기도 시에 초를 사용하라는 구절이 전혀 없습니다.
아더 핑크 목사 역시 등대를 촛대로 번역한 것은 로마 가톨릭의 영향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성소에는 창문이 없습니다. 빛이 완전히 차단되어 햇빛, 달빛, 별빛과 같은
외부의 빛이 전혀 들어올 수 없는 구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금등대의 빛 이외에는 내부를 밝혀줄 빛이 없습니다.
순금등대의 빛이 성소 내부를 밝게 비춰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성소는 빛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Shekinah)이 있기 때문입니다.
◑1. 순금등대의 재료와 구조는 어떠한가?
31절에 “너는 정금으로 등대를 쳐서 만들되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을 한 덩이로 연하게 하고”
순금등대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밑판과 줄기와 여섯 가지입니다.
그리고 등대를 만들 때는 다른 성소의 기구처럼 싯딤나무(아카시아 나무)가 사용되지 않고,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정금을 사용합니다.
39절에 “등대와 이 모든 기구를 정금 한 달란트로 만들되”
순금등대에 사용되는 금의 양은 한 달란트입니다. 한 달란트는 34kg인데,
이것은 금 1kg를 5천만원으로 환산하면 약 17억 원에 해당하는 엄청나게 비싼 것입니다.
등대를 만드는 데 필요한 수공비까지 따져보면 수십억의 가치를 갖는 엄청난 기구가 되는 것입니다.
성소의 기구를 만드는데 사용된 재료 가운데 나무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하고,
금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순금등대는 나무가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신성만 강조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출 25장 31절을 다시 보면 아주 중요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는 정금으로 등대를 ‘쳐서 만들되’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을 한 덩이로 연하게 하고.”
하나님은 반드시 등대를 만들 때 “쳐서 만들라”(Hammer out)고 말씀하셨습니다.
금 덩어리를 망치와 같은 도구로 때려서 등대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나사로 조여서 만들거나 금을 녹여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습니까? 흙으로 조각품을 만들기도 어려운 일인데,
금덩어리를 때려서 순금등대를 만드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사실은 우상을 만들 때는 때려서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출 32:4절에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사이 백성들의 성화에 못 이겨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백성들로부터 금 귀걸이와 각종 귀금속을 거둬 흙으로 만든 주형틀에 부어 금송아지를 만든 것입니다.
우상은 소위 주형틀에 부어 주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순금등대는 주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금을 때리고 쳐서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신성을 지니신 그리스도가
매를 맞으실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고난당하실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만을 예표하는 것은 아닙니다.
순금등대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표하기도 합니다.
순금등대의 가운데 줄기 옆에는 세 개씩 가지가 나와 있습니다.
사진을 보면 가지 중간에 장식물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전부 살구나무 꽃 모양입니다. 꽃받침과 꽃, 그리고 열매 모양의 장식이 있습니다.
가지 한 개 당 이런 장식이 세 개씩 있습니다.
이 장식은 불을 내는 용도가 아니라 순전히 아름다움을 위한 것입니다.
이 장식은 모두 살구나무입니다. ‘살구나무’는 영어로 ‘Almond Tree’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살구나무의 꽃받침과 꽃과 열매 모양으로 한 가지 당 세 개씩 장식이 되어 있으니
총 18개이고, 줄기에는 4개가 있어서 도합 22개가 됩니다.
그리고 줄기와 가지 끝에 일곱 개의 잔이 있습니다.
잔도 역시 꽃받침과 꽃과 열매 모양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순금등대에는 살구나무 모양의 장식품이 29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순금등대에 왜 이렇게 살구나무 열매와 꽃 모양의 장식물이 많이 있는 것일까요?
민수기 17장을 보면 모세와 아론의 지도력에 대해 고라, 다단, 아비람, 온의 자손들이
반역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12지파의 족장들이 가지고 있는 지팡이를 하나씩 가지고 와서
성소 안에 넣어두면 택한 지파 족장의 지팡이에 움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론의 지팡이에만 살구나무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게 되었습니다.
움이 돋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순서였습니다. 순금등대에 있는 29개의 장식물은
모두 움의 모양, 꽃의 모양, 열매의 모양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입니다.
죽은 나무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꽃이 피고 열매가 열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시는 ‘부활’을 예표합니다.
그리고 살구나무는 봄이 되면 제일 먼저 움이 돋고 꽃이 핍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나중에 모두 부활의 영광에 참예하게 될 것을 이 살구나무가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순금등대는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나타내고,
신성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가 수난을 당하실 것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실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예표합니다.
그래서 순금등대를 하나님이 모세에게 보여주신 식양 그대로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금 덩어리를 쳐서 정확한 균형과 섬세한 아름다움을 갖춘 등대로 만드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직 성령의 지혜와 능력을 받은 사람이라야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출36:1절에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여호와께서
지혜와 총명을 부으사 성소에 쓸 모든 일을 할 줄 알게 하심을 입은 자들은
여호와의 무릇 명하신 대로 할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지혜와 권능을 부어주셔서 성막의 모든 기구들을 만들 수 있게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특별한 지혜와 권능을 주셨기 때문에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등대는 언제 어떻게 빛을 발하는가?
순금등대가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예표하는 것이라면 이 등대는 무슨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일까요?
바로 빛을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순금등대가 빛을 내는 것일까요? 이것은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레위기 24장 1~3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감람을 찧어 낸 순결한 기름을 켜기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말고
등잔불을 켤지며 아론은 회막 안 증거궤 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불을 정리할지니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
2절에 보면 “끊이지 말고 등잔불을 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출 30장 7~8절의 내용은 조금 다릅니다.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정리할 때에 사를지며
또 저녁때 등불을 켤 때에 사를지니 이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끊지 못할지며.”
저녁에는 불을 켜고, 아침에는 불을 꺼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출 30장의 구절들은 레위기 24장의 내용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선적으로 성소의 상황을 고려해야 합니다.
등불은 어두운 밤을 환하게 밝히는 기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소는 밝은 대낮이라고 해도 외부의 빛이 전혀 들어올 수 없습니다.
창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소에는 낮이라도 등불을 켜 놓아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문제에 관해 의문을 가지고 여러 가지 자료를 살펴보는 중에
18세기 침례교 위대한 성경주석가 존 길(John Gill)목사님이
1세기 유대 역사가였던 요셉푸스의 기록을 인용해 주석해 놓은 내용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제사장은 밤이 되면 성소에 들어가서 일곱 개의 등을 다 켠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일곱 개 중 바깥쪽 네 개의 등불은 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침에는 양쪽 끝의 네 개의 등불은 끄고,
가운데 세 개의 등불만 켜 놓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상충되는 듯한 두 구절의 내용을 납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 이외의 다른 해석의 여지는 없는 듯 보입니다.
일곱 등잔에 순수한 올리브기름을 채우고 심지를 꽂아서 거기에 불을 붙여 빛을 내도록 하였는데,
이 불도 아무 불이나 사용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번제단에 내려주신
불만 사용해야 합니다. 성냥불이나 라이터와 같은 화기로 불을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계시록 4장 5절에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일곱 등잔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곱 영은 하나님의 영이 일곱 개나 된다는 것이 아니라 완전 수 일곱이기에
‘성령’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일곱 등불 켠 것은 성령의 사역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또한 일곱 등잔에 채우는 기름 역시 감람나무 열매를 짠 순수한 올리브기름을 사용해야 하는데,
이 기름 역시 성령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등잔에서 빛이 발한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등대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예표하고,
등잔의 불과 기름은 성령의 역사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순금등대의 크기와 높이에 대한 계시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단지 정금 한 달란트로 만들라고 하셨기 때문에
크기나 높이는 그 한도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순금등대와 일곱 등잔에서 빛을 비추는 것은 어떤 영적인 의미가 있는가?
순금등대 자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부활과, 수난을 의미하고
일곱 등잔의 빛은 성령의 사역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말미암아 성령이 오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빛을 비추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보니 많은 설교자들이, 이 순금등대의 빛은 ‘예수 그리스도의 빛’
이라고 해석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더 핑크는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빛으로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성령의 빛입니다)
요9장 5절에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시긴 한데, 세상에 있는 동안이라는 한계를 정해 놓으셨습니다.
또 요12장 36절에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3장 19절에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죄인들은 빛을 싫어합니다.
자기 죄가 백주에 다 드러나게 되면 안 되기 때문에 빛을 없애 버리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아 죽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삼일 만에 살아나셨고, 이후 40일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부활의 몸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면 빛은 어디로 간 것입니까? 천국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빛이 없는 어둠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제자들도 빛이 없는 흑암의 세상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10일 만인 오순절 날에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이제 성령은 성도들 안에 거하시고 제사장된 성도들에게 밝은 빛을 비춰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로 빛 가운데 거하도록 빛을 비춰주시는 사역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혹시 성령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된다면
그것은 단 한 번도 진지하게 기도해 본 적이 없고,
단 한 번도 성경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빛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일곱 등잔의 빛은 성령의 사역을 가리킵니다.
▲순금등대의 등잔불은 세 가지를 비춥니다.
첫째는 등대 자체를 비춥니다. 등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순금등대는 줄기와 가지의 좌우 대칭이 확실하고 정금 34kg이 소요된,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기구였을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드러내고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요15장 26절에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을 증거하십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으십니까?
그 분을 어떻게 믿게 되셨습니까? 일일이 다 계산해 보고 생각해 보니
예수님이 괜찮을 것 같아서 믿으셨습니까? 아니면 가족의 부탁에 끌려 나와서 믿게 되셨습니까?
예수님을 구주로 인정하고 고백하고 믿는 것은 기적에 속하는 일입니다.
성경에는 성령이 아니고서 누구라도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빛을 비춰주셔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신성을 가진 하나님이시고
천지의 창조자요 생명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내 죄 값을 대신 갚아주시고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성령의 역사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상한 두뇌를 가지고 있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지 알지 못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러면 오늘 기도하실 때, “내 영혼에 진리의 빛을 비춰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제사장들이 분향할 수 있도록 빛을 비춰주는 것입니다.
향이 올라가도록 돕는 것입니다. 출 30장 7절에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정리할 때에 사를지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8절에 “또 저녁때 등불을 켤 때에 (향을) 사를지니
이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끊지 못할지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등불을 켜고 끌 때, 향을 사르라는 것입니다.
순금등대의 일곱 등잔에 불이 없을 때는 (어두워서) 향을 사를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제사장들이 향을 올릴 때 등대의 빛이 비췬다는 것의 의미는
성령께서 성도들의 기도를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기도는 문학을 전공한 교수가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기도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분이라 할지라도
성령의 불을 받은 분들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기도를 할 줄 아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 성령이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제사장들이 떡상의 떡을 갈아 넣고
안식일마다 떡을 먹을 수 있도록 빛을 비춰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의미를 깨닫게 하시고
성경 읽는 재미를 붙이도록 해 주시며,
이것이 먹을 만한 떡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가리킵니다.
이것을 ‘성령의 조명’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법전과 같지 않고, 소설과도 같지 않습니다.
소설은 한 번 읽으면 내용을 다 알기 때문에 또 읽기 싫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볼 때마다 새로운 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이 곤비하고 비참한 상태에 처한 성도님들이 계시거든
집에 가서 시편을 소리 내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시편의 말씀을 소리 내어 읽다가 보면 마음에 빛이 비취게 된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귀신도 떠나가고, 영혼이 밝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이 떡을 먹을 수 있도록 깨닫게 하시고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성경을 읽는 성도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해 주고,
기도하고 말씀을 읽을 때 깨닫게 하는 사역을 하십니다.
그래서 이 모든 성령의 사역은 결국 예수님의 사역이 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9절에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론
성령은 순금등대, 즉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이 기초가 되어 오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빛을 비추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령님의 1차적인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제자들이 알도록 하는 것이었고,
그들의 영적인 생활을 돕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캄캄한 세상은 누가 빛을 비춰야 할까요?
마태복음 5장 14~16절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에베소서 5장 8절에도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이제 성도가 빛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상을 향해 빛을 비춰야 할 자들은 바로 빛의 자녀들인 우리들입니다.
순금등대의 궁극적인 메시지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을 향해 빛을 비추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빛을 받은 사람인가?”
“나는 지금 빛 가운데 거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확실한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세상을 향해 빛을 비추고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사람을 오도하는 거짓된 빛을 비추고 살아가고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여러분의 영혼에 성령의 빛을 비춰주시기를, 그리고 빛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는
세상을 향해 빛을 비추는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