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마음은 사람에게 있다 | 2024년 06월 09일 - YouTube
◈예수님의 마음은 사람에게 있다 행11:19~26
교회가 다 똑같은 교회가 아니고,
또 예수 믿는 성도라고 다 똑같은 성도가 아닌 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에 차이가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가장 중심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였죠.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인하여 세워진 교회니까요. *행2장
그런데 사도행전 11장에 오면, 초대교회의 중심 교회가 바뀝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디옥 교회로 바뀝니다. 그런데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이, 두 교회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의 결정적인 차이는
예수님의 마음을 따라가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었어요.
예수님의 마음은 전적으로 사람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은,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다 십자가의 복음을 알고,
구원받는데 이르기를 원하세요. 그게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진다'는 것은
그때 당시 표현으로 말하면,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한동안 정체가 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되는 일에 대해서
전혀 아무런 노력을 행하지도 않고,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잘못된 일인 것처럼 걱정을 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이방인에게, 처음에는 전해지는데 굉장한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게 예루살렘 교회의 문제였어요. *유대인의 문화와 전통 때문이었죠.
빌립이 스데반의 순교로 인한 어려움 때문에 사마리아로 가게 되고,
거기서 복음을 전했는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겁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는, 기쁘기보다는,
사마리아 성에는 기쁨이 넘쳤는데, 예루살렘 교회에는 걱정이 됐다는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을 빨리 사마리아 성으로 보냅니다.
'큰일 났다. 무슨 일인지 좀 알아보라'고.
그리고 행10장에서, 베드로가 이방인 로마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가서
그 가족들에게 말씀을 전하자, 그곳에 성령이 임하고
그들이 예수 믿고 세례받는 역사가 일어나는데,
성경에 그 과정이 굉장히 길게 나옵니다. 사도행전 10장을 읽어보면요.
하나님이 베드로를 설득하는 과정이 굉장히 길어요.
베드로조차도 이방인들이 예수 믿고 성령 받는 것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불편한) 일이었던 거예요.
그리고 오늘 본문 행11장 전반부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에서,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갔던 것 때문에 난리가 났습니다.
'아니 베드로 사도여, 어떻게 할례 받지 않은 그 사람들에게 가서
그 이방인들과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자리를 했단 말입니까?' 11:2~3
그래서 베드로가 다시 한번, 자기가 욥바에서 경험했던 내용부터
자세하고 길게 설명해요.
행11장에 아주 긴 부분이 다시 반복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말은 무슨 뜻이냐면, 예루살렘 교회는 예수님의 마음과 전혀 달랐던 거예요.
예수님이 예루살렘 교회 안에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예루살렘 교인들의 마음 속에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순종하는 것이 한동안 안 되었던 거예요.
그래서 그들이 어디에 나가서 전도를 해도, 꼭 유대인들에게만 전도를 했습니다.
안디옥에도 그랬었습니다. 처음에는 유대인들에게만 전도를 했어요. 11:19
그런데 헬라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 믿는 역사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11:20~21
이 안디옥의 소식이, 다시 예루살렘 교회에 전해졌는데, 또 난리가 났어요.
'세상에, 이 무슨 걱정스러운 일이란 말인가!'
그래서 바나바를 보냅니다.
'빨리 가서 도대체 이거 혹시 잘못된 게 아닌지 한번 알아보라..' 하고 보낼 정도였어요.
그게 바로 예루살렘 교회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22
그래서 사실 사도행전의 중심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에서부터 안디옥 교회로
촛대가 옮겨지게 된 거예요.
▲예전에 어떤 중국 목회자가, 제게 그렇게 묻더라고요.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예수님은 우리 안에 오시는데,
왜 굳이 예수동행 일기를 써야 되고, 예수 동행 훈련을 해야 됩니까?
이미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셨다면, 우리가 예수님과 동행하는 거죠.
그걸 뭘 또 다시 훈련을 받아야 되나요?' 그런 질문을 하셨어요. 충분히 이해할 만하죠.
예수님은 이미 우리 안에 계세요.
그렇지만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셨다고, 저절로 예수님과 동행이 되는 건 아닌 거예요.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동행이지,
예수님이 우리를 좇아오셔야 되는 것은 전혀 동행이 아닌 겁니다.
예수님을 분명히 마음에 영접을 해서, 구원 받은 것은 분명한데
또 예수님 때문에 교회가 세워진 것도 맞는데,
예수님의 마음과는 전혀 맞지 않는 성도도 있고, 교회도 있는 거예요.
예루살렘 교회가 그런 교회였던 겁니다.
<제자도, 죽어야 다시 사는 길> 이란 책을 쓴 그렉 로리 목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두 가지 경우라는 겁니다.
-주변에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이 없거나,
-주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있기는 한데, 그 사람들을 너무 잘 알거나...
두 가지 경우래요.
참 마음 아픈 이야기죠. 예수 믿는 사람이 주위에 전혀 없어서 전도해 주지 않으니까,
예수 믿지 않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자기 주위의 예수 믿는 사람들을 또 너무 잘 알아요.
그러니까 예수 믿을 마음도 안 생기는 경우가 있다는 거죠.
이게 정말 안타까운 일인 거예요.
▲신혼여행을 북아프리카 알제리로 다녀온 여전도사님이 계세요.
알제리 선교사님이 한국에 오셔서 아기를 출산했는데
알제리로 다시 가셔야 되잖아요.
그런데 큰 아이도 있고, 이제 막 출산한 아기도 있고,
둘 다 데리고 알제리로 가기가 형편이 너무 어렵죠.
그 전도사님이 마침 결혼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그 전도사님이 '그러면 우리가 신혼여행을 알제리로 가자'
그 남편도 참 귀해요. '그러자' 그래가지고
그 아기 데리고 그 선교사님과 함께 알제리로 갔던 거예요. 참 정말 귀한 전도사님이죠.
근데 그 전도사님이 알제리를 갔다가 돌아와서 제게 편지를 보내주었는데
참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알제리로 갔더니 거의 대부분이 회교도들이에요.
근데 왜 이렇게 회교도들이 되었나 하면,
알제리를 130년 동안 식민지배했던 나라가 프랑스입니다.
프랑스는 거의 기독교 국가죠. 그런데 그 130년 동안 얼마나 프랑스가
알제리에게 못되게 했는지, 독립하던 그때 *1954~1962 알제리 독립전쟁
프랑스 사람들이 세웠던 모든 예배당을, 다 회교도 회당으로 다 만들어버렸습니다.
예전에 믿어오던 회교로 곧장 되돌아가 버린 것이죠.
그 이야기를 알제리에 갔다 와서, 쭉 하시더라고요.
예수를 안 믿는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또 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은 아니라는 거예요.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와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어요.
우선 이방인들에게 마음이 열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이방인들이 많았고요.
바나바가 안디옥에 와서 보니까, 교회 안에 이방인들이 참 많은 겁니다.
그런데 바나바가 크게 기뻐했다고 그랬어요.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11:23
바나바는 그걸 보고 크게 기뻐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 나왔지만
바나바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있었던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그걸 보고 너무 기뻤어요. '야~ 헬라 사람들도 예수를 믿는구나'
이미 사실은 예수님이 벌써 예언하셨고, 1:8
지금 이 시대는, 사실 전 세계의 모든 교회가
그때 당시 개념으로 보면 '다 이방인 교회'예요. 우리도 이방인 교회입니다.
그때 예루살렘 교회의 기준으로 보면!
이런 시대가 올 것을 예수님은 다 알고 계셨고, 그렇게 기독교 역사를 이끄셨어요.
그랬으니, 2천년 전 그때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들을 보시는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우리가 생각하면 정말 이건 말이 안 될 일인데,
안디옥 교회는, 또 바나바는, 예수님의 마음을 그대로 품고 있었던 거죠.
▲11:24절에 보면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 더라'
바나바를 소개하기를 '성령충만했던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그 말은, '성령충만한 사람은 예수님과 마음이 같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을 성령 충만하다고 말해야 하는 거죠?
방언을 하거나, 또는 여러 은사가 나타나는 일도
'아~ 이 사람이 정말 성령에 충만한 사람이구나' 분별하는 기준이기도 하지만,
진짜 중요한 핵심은 '예수님의 마음이 그 사람의 마음인가?' 하는 거예요.
이런 사람을 볼 때 '성령충만하다' 할 수 있는데, 바나바가 그랬다는 거예요.
예루살렘 교인들은 전혀 그런 마음이 아니었는데
바나바는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는 걸 보고 너무 기뻤다는 거예요.
주님의 마음과 바나바가 하나였다는 거죠.
▲26절에 보면, 안디옥 교회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우리는 지금 다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 부르지만
그 호칭을 처음 들은 데가 안디옥 교회였어요.
안디옥 교회 당시에 이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은,
지금 불려지는 것과는 조금 의미가 다릅니다.
약간 빈정거리는 모욕적인 별명이기도 해요.
즉 '예수에게 미친 사람, 맨날 예수 이야기만 하고, 맨날 예수님만 바라본다 그러고,
늘 주님이 함께 계신다 그러고... 저 사람들은 예수에게 미친 사람이야!'
라고 하는 조롱 섞인 의미가 더 강했어요.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안디옥교의 교인들은
늘 '예수님, 예수님' 하고 살았던 거죠.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셨어요.
지금 우리가 매일 일기를 쓰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과 친밀히 동행하자고 예수동행 운동을 이렇게 할 때
조금 그런 비슷한 느낌을 받아요.
'저 사람들은 조금 이상한 사람이야'
저 자신도 '너무 지나치다'는 표현을 주위에서 종종 듣습니다.
사실 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던 안디옥 교회 교인들이
그런 느낌이었던 거예요.
그런데 성경을 가만히 읽어보면, 안디옥 교인들이
그냥 말로만 '예수님, 예수님' 했던 게 아니었어요.
21절에 보면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놀랍잖아요? 그 안디옥 교회는 주님의 손이 함께 하심이 분명했던 교회였어요.
교인들이 예수님을 볼 수는 없었지만
'주님의 손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분명히 느꼈어요.
주님이 진짜 그 공동체 속에 계셨어요.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그랬어요.
'교회로 오더라'가 아니에요.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교회로 오더라'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는데,
본문에 어떻게 기록했죠? '주께로 오더라' 보다 신앙적인 표현인 거죠.
23절에 보면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그러니까 안디옥 교회는, 기본적으로 예수님이 눈으로는 보이지 않으시지만,
예수님께서 정말 그들과 함께 계셨음이 생생했던 교회였어요.
이것 때문에 예수동행 운동을 하고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지금도 똑같으니까요.
주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세요.
우리가 그 주님을 알든/ 모르든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실제로 품고 있든/ 그렇지 못하든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세요.
그 주님은, 우리가 주의 마음을 품지 못하면 답답해하시고, 근심하시고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품으면, 기뻐하시는... 그 차이가 있을 뿐이에요.
▲27절에 보면, 안디옥 교회가 흉년을 만난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헌금을 모아서 보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아주 의미심장하죠.
어느 교회가 어느 교회를 돕는 교회가 되었다는 말은
중심축이 바뀌었다는 거예요.
안디옥 교회가, 이제는 세계 선교의 중심축이 되면서
하나님께서 안디옥 교회에 여러 가지로 역사하시고, 힘을 주시고, 복을 주셨다는 뜻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의 마음을 그냥 가지고 있는 게 아니고,
그 마음을 품고 순종하는 일이 너무너무 중요한 거예요.
이 교회가 아직은 정말 교회가 세워지는 초창기 교회입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처럼, 어떻든지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께 순종하는 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교회를 함께 시작한 여러분들이
여러분 자신도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사역에 힘쓰시기를 축복합니다. 그게 잘 되는 길이에요.
지금 우리 시대에도,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성도,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교회가 있습니다.
제가 2009년에 인도네시아에 선교사 수련회를 인도하러 갔었어요.
그때 인도네시아 각지에서 선교사님들이 수련회에 참가하러 오셨는데
선교사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깜짝 놀랐어요.
어느 여선교사님은 싱글 선교사님이신데
자카르타에서 1시간 반 비행기를 타고 가서
거기서 또 배를 타고 14시간 들어가는, 그런 섬 지역에 가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이었어요.
그 선교사 수련회 때문에, 그 길을 따라 오신 거죠.
'참 어떻게 이런 분이 있을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WEC 소속 젊은 선교사 부부는, 99.9 % 강성 이슬람들이 사는
그 마을에 들어가서 사역하는데, 선교사 신분이 드러나면
그냥 밤중에 아무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는 그런 지역에 가서 사역을 하세요.
어느 선교사님은, 회교 무슬림 신학생이, 밤에 강도로 위장을 하고 들어와서
자기를 폭행한 그런 일을 경험한 이야기도 하시더라고요.
'도대체 이런 상황에서 계속 선교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런 생각이 드는데,
선교사 수련회 끝나고 다 또 자기 임지로 돌아가시더라고요.
인도네시아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주님,
그곳 선교사님들은, 그 마음을 똑같이 품고 그렇게 선교를 하시던 거예요.
본문의 안디옥 교회만 아니고 지금도 똑같다는 거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사람의 영혼을 귀중하게 여기는 주님의 마음'을 품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선교에 대한 마음이 간절한 교회가 있고,
그렇지 못한 교회로 갈라지는 거죠.
성도들도 마찬가지고요.
선교는, 전적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가 똑같이 품을 때
우리 안에 일어나는,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이에요.
사람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그냥 일반적인 정서가 아닙니다.
제가 해외에 나가면, 이따금 통역을 통해서 말씀을 전해요.
그런데 통역하시는 분을 옆에 세워서 말씀을 전해보면
통역하시는 분이, 제가 전하는 말씀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리고 마음의 감정까지도 같이 느끼면서, 말씀을 전할 때 너무 고맙더라고요.
그러니까 듣는 사람들은, 제 말을 듣는 게 아니고, 통역의 말을 듣는 거거든요.
제가 전하는 말씀을, 이분이 충분히 이해하고 마음의 감정까지도 같이 느끼면,
세상 없는 정말 좋은 통역자이죠.
근데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설교를 그동안 해 오면서, 주님이 어떤 마음이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도 지금 사실 통역하는 그 사람과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이 제게 말씀을 주시고, 주님의 마음을 제게 느끼게 하시고,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주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거거든요.
그런데 제가 (주님의 통역자, 대언자로서)
진짜 주님의 마음을 그대로 품고 말씀을 전하면, 주님이 기쁘시겠죠.
그런데 제가 그냥 졸리게만 말씀을 전하면, 주님이 속 터지시겠죠.
그때 제가 통역을 세워서 말씀을 전하다가,
'내가 그동안에 얼마나 주님의 마음을 진짜 품고
주님의 감정까지도 같이 느끼면서 제가 말씀을 전했었나?'
말씀 전하는 제 자신을 정말 깊이 돌아봤어요.
▲전도 열심히 하시는 어느 목사님이, 저희 교회에 오셔서 간증하실 때,
이런 얘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루는 집 앞에 있는 술주정뱅이, 알코올 중독자 집에
전도대원들과 같이 전도하러 갔는데, 솔직히 너무 싫더래요.
전도를 열심히 하시는 분이에요.
그런데 알코올 중독자에게 한번 붙잡혀서 말이 트여지면,
적어도 한 3시간 이상은, 했던 말 또 듣고, 했던 말 또 듣고 들어야 되는...
알코올 중독자니까요.
그러니까 전도를 나가긴 했지만 '오늘은 죽었다...' 이런 생각이 갖고 나간 거예요.
그날따라 심방 일정이 너무 많아서 몸도 너무 피곤했어요.
그런데 그 사람 집에 가보니, 마침 그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날 전도대원들은 너무 안타까워하는데, 목사님은 마음이 너무 좋더래요.
전도하러 나가서 전도 대상자가 없는 게 너무 좋아서, 그날 일찍 집에 가서 쉬셨는데
그 다음날 새벽 기도 때 주님의 책망을 들은 겁니다.
어제 전도 나갔던 그때의 이야기를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어떻게 목사의 마음으로 전도하냐? 내 마음으로 해야지!'
그 간증을 하시면서, 그 목사님은 우시더라고요.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고요.
저도 그 목사님의 간증을 들으면서
'아~ 내가 목회를, 목사의 마음으로 하는 것도, 이것도 잘못이구나'
목사의 마음으로 목회하는 것도, 주님이 기쁘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예수님의 마음으로 해야죠)
▲빌2:5절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이미 우리 안에 예수님의 마음이 있어요.
문제는 '그걸 내가 품느냐/ 아니냐?' 하는 차이가 있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의 삶에, 주님의 역사가 갈라지는 거예요.
(누구에게는 역사하시고/안 하시고.. 로 갈라집니다)
여러분이 목사나 설교자가 아니더라도
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품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와 계시니까요. 그러면 우리가 만나는 사람이 달라 보여요.
예수님의 마음을 품었을 때 나타나는 가장 놀라운 현상은,
사람이 달라 보이는 거예요.
예수님이 보시는 눈으로 사람을 보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지 아십니까?
내 마음으로 보는 것과,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는 게 완전히 달라요.
▲안디옥 교회에서 일어난 엄청나게 중요한 일 하나가 있는데
사도 바울이 안디옥 교회에 영적 지도자가 된 거예요.
그런데 사울이 회심한 후에 예루살렘 교회에 갔을 때,
사울은 아주 환영받지 못한 손님 대접을 받았습니다. 9:26
예루살렘 교회의 입장에서는, 사울의 회심이 영 마음이 떨떠름했어요.
그래서 사울은 거의 쫓겨가다시피 고향 다소로 내려갑니다.
예루살렘의 분위기도 안 좋고 그러니까, 예루살렘 교우들이
'사울이여, 고향으로 내려가세요' 그래서 거의 쫓겨가다시피 고향 다소로 내려가요.
바울은 그때의 심정을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1:18~19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사울은 거의 예루살렘 교회에서 환영받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가, 그런 사울을 교회에 소개해 줘서, 그나마 야고보 장로를 만난 거예요. 9:27
사울이 고향 다소로 내려온지 약 10년 정도 지난 시점이었어요.
그 사이에 안디옥 교회가 세워지고, 막 부흥하던 때였어요.
그래서 안디옥 교회에 사역자가 필요하던 시점이었죠.
그때 바나바가, 자기 고향 다소에 내려가 있는 사울을 찾아가서,
그를 데리고 안디옥 교회로 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게 하고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로 세운 거예요.
그러니까 무명의 사울이, 사도바울이 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안디옥 교회입니다.
사울이 사도바울로서의 사역을 하게 된 첫 걸음을 뗀 곳이 안디옥 교회예요.
11:25~26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바나바가 예수님의 마음을 진짜 품고 있었기 때문에, 사울을 보는 눈이 열린 거예요.
'아, 이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구나!'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면, 사람들은 다 아니라고 해도
그 사람의 눈에는, 그 사람이 보여요.
'아, 예수님이 이 사람을 쓰시겠구나'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워지는 거죠.
▲예수님의 마음은 언제나 사람에게 있습니다. *설교제목
그래서 예수님의 마음에는 유대인, 이방인의 구분이 없었어요.
예루살렘 교인들은 계속 그 문제가 힘든 거예요.
'저 사람 이방인인데... 저 사람 죄인인데...'
그러니 우리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예수님의 눈에는, 핍박자 사울도 위대한 전도자로 보였어요.
주님이 앞으로 그렇게 쓰실 거니까요!
그 주님의 마음을 알아주는 바나바가, 너무나 우리 주님을 기쁘시게 했을 거예요.
우리 눈에, 때때로는 도무지 용서가 안 되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사랑이 안 되는 사람!
그런데 주님의 눈으로, 주님의 마음을 품고 보면, 전혀 달라집니다.
그래서 '일곱 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하라' 그렇게 마음을 주신 거예요.
여러분 일흔번씩 일곱번씩이나 용서해 줘야될 사람이 누굴까요?
직장 동료? 한 세 번도 용서 안 해요.
벌써 자기가 직장 나왔든지, 그 사람이 나가든지... 둘 중에 하나죠.
김일성? 우리는 별로 그 사람에 대해서 생각도 안 해요.
도대체 일곱 번씩 일흔번씩이나 용서할 사람이 누가 있죠? 그들은 가족이에요.
우리와 가장 가깝게 늘 함께 사는 사람, 또 같은 우리 교인,
그들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셔야 돼요.
도무지 그 사람하고는 내가 함께 하기가 너무 힘들어요.
그러나 주님의 마음을 품고 보면, 주님은 그 사람도 사랑하시는 것을 알게 돼요.
어쩌면 그 사람이, 자기 자신일 수도 있어요.
자기가 자기를 미워하는 것이 굉장히 심각합니다.
여러분, 거울을 보고서는, 거기에 보이는 그 사람을 사랑해야 돼요. 왜요?
주님이 그 사람을 사랑하시니까! 그러니까 나도 그 사람을 사랑해야 되는 거예요.
▲2014년에 제가, 안식년을 이스라엘에서 한 달간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때 갈릴리 호수 언덕 위에 팔복교회 가 있는데
그 교회에 가서, 언덕 아래 갈릴리 호수까지 이어지는 길을 따라 쭉 걸어 내려왔었어요.
아마 단체로 여행을 갔으면, 그 길을 못 갔을 거예요.
그런데 제 아내와 같이 갔으니까, 가이드하시는 목사님이
거기에 트래킹 코스(걷는 길)가 있다는 겁니다.
팔복교회에서 갈릴리 호수로 쭉 걸어 내려오는 길이에요.
그러면서 하시는 얘기가, 예수님 당시 때부터 있었던 길이래요.
그러니까 예수님도 그 길을 걸었을 가능성이 매우 큰 곳이죠.
'오, 갑시다. 예수님이 걸으셨던 그 길을 따라서 한번 우리도 걸어봅시다!'
그래서 그 길을 따라서 언덕 아래로 쭈욱 걸어 내려오는데 기가 막혀요.
그 언덕 위에서 갈릴리 호수를 이렇게 바라보는데,
거기 있는 산들, 들판들, 호수... 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여러분이 성지순례 가 보시면, 꼭 한번 가시기를 추천하는데
단체로 가면, 그 길을 걷기가 어려워요. 그럴만한 시간을 내기가 어려우니까요.
그런데 제 마음속에 '아~ 예수님도 이런 풍경을 보셨겠구나'
그러니까 더 감동이 되더라고요. '우리 주님이 보셨던 그 풍경이겠구나!'
그런데 그때 제 마음에 주님이 '아니다!' 그런 마음을 주셨어요. '아니야!'
'그게 무슨 뜻일까? 그냥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인가?'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어요.
주님이, 그 풍경의 아름다움에 막 감동받는 저를 보고
주님의 마음은 '그게 아니다' 라는 것 같았어요.
제가 쭈욱 내려오는데, 중간에 굴이 하나 있더라고요.
가이드 하는 목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세요.
'목사님, 여기 이 굴이, 예수님이 이 길을 내려오시다가
여기에 머무시면서 기도도 하시고, 제자들을 세우셨다고 알려진 굴입니다.'
예수님이 그 굴에서 기도하시고, 제자들을 세우셨다는 거예요.
'목사님, 이 굴 속에 들어가서 잠시 기도해 보세요.'
가이드가 그 말을 안 해도 들어가고 싶었는데
들어가라고 그러니까, 그 굴에 들어가서 앉아서
'예수님이 여기 앉으셨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기도합니다.
그래서 제가 동굴속에서 잠시 기도하는데, 진짜 갑자기 눈물이 핑 돌더라고요.
주님이 말씀하시는 게 느껴져요.
그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제가 너무 감동하는 것에 대해서
주님이 '아니다'
주님은 그 아름다운, 멋진 풍경에 대해서, 성경 어디에도 언급하지 않으셨어요.
'갈릴리가 너무 아름답다' 든지... 이런 표현은 하나도 없어요.
'이렇게 아름다운 곳인데, 왜 성경에는 기록이 전혀 없을까?'
주님은 풍경에 관심이 있지 않고, 사람에게 관심이 있으셨던 거죠.
제자 세우는 일, 거기에만 관심이 있으셨던 거예요.
'아~ 예수님의 마음에는 사람이 있는 거구나...'
'사람 세우는 데만, 주님의 눈이 있으셨구나!'
여러분 정말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꼭 사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그 차이가 작아 보여도, 주님의 마음을 품은 자를 주님이 쓰시고,
주님의 마음을 품은 교회를 주님이 사용하시는 거예요.
우리의 한평생에, 주님이 주신 뜻이 뭘까요?
남보다 더 잘 살려고? 더 많이 가지려고? 더 높아지려고?
그렇게 아등바등 싸우다가 천국에 오라고, 한 평생을 주신 걸까요?
남보다 덜 가졌다고, 못생겼다고, 무능하다고...
그런 열등감에 괴로워하다가 천국에 오라고 한 인생을 주신 걸까요?
매일 싸우다가 그렇게 한 인생을 마치도록 주신 인생일까요?
진짜 주님의 마음은 다릅니다.
어떻든지 용서하고, 사랑하고, 사람 세워주고...
그 영혼을 구원하고, 모든 사람들이 주의 복음을 알도록...
그렇게 하고 싶어 하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이 시간에 우리가 그런 주님의 마음을 품게 되도록, 함께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