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5:6/‘獅子(사자)와 어린양’ - YouTube
◈사자獅子 와 어린양 계5:6
▲도입/ 지난 주일 부터 "오늘을 위한 미래"라는 큰 주제 아래
요한계시록을 '하나님의 선교' 차원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항상 강조하는 거지만, 선교는 하나님이 주체가 되십니다.
선교는 교회 프로그램도 아니고, 교회 부흥 전략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직 선교는, 넓은 의미에서는,
먼저 내 삶의 현장에서 내가 '존재론적인 선교사'로 서야 됩니다.
*존재론적인 선교사 : 그가 거기에 존재함으로써 (인격적 감화로) 선교가 되어지는 것
그래서 우리 지난주에 살펴본 것을 리마인드 해보면
'이제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1:4
이것을 구약성경에서는 '스스로 존재 하시는 분, 스스로 계신 자' 라고 하죠.
그러니까 선교의 주체, 그 출처 와 근거는
교회의 프로그램이 아니고,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면 선교가 뭔가요?
이 죄악 가득한 세상에, 죄가 들어와서 병들어 버린 세상에,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확대시키는 일을
땅 끝까지 해 나가는 것... 이것이 선교입니다.
그리고 모든 선교의 출처는,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어린 양에서부터 출발 됩니다.
알파와 오메가 라는 것은, 역사의 시작도 그분에게서 시작됐고,
역사의 완성과 마무리도, 그분으로 완성이 됩니다. 믿습니까?
당시 세상의 중심은 어디였습니까? 로마 였죠.
또 로마의 중심은 황제의 보좌 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힘은 거기서부터 시작되고, 통치가 시작되고, 심판이 이루어지고,
모든 땅 끝의 영광은 황제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당시 로마의 질서 였어요.
그런데 우리 성도에게 그 '보좌 throne' 라는 개념은
'그러나 로마의 황제의 보좌가 진정한 중심이 될 수 없습니다. 더 높은 보좌를 보십시오.
궁극의 보좌, 최종적 보좌가 아직 우리에게 남겨져 있습니다. 하늘 보좌입니다.'
여기까지가 지난 주 설교의 요약입니다.
◑이어서 오늘은 <사자 lion 와 어린 양>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사자는 우리에게 어떤 이미지를 줍니까?
사자는.. 굉장히 강력하고, 힘이 있고, 정복자의 이미지입니다. 동물의 왕이죠.
반면에 양은 어떤 이미지를 줍니까?
굉장히 유약하고, 지렁이 한 마리도 못 잡을 것 같은...
그래서 가만히 보면, 대학교들 로고(문장)들을 조사를 해보면
'호랑이' 로고를 갖는 대학교가 있어요.
학생들은 자기들 스스로를 '안암골 호랑이'라고 여깁니다.
그 대학과 쌍벽을 이루는 신촌의 어느 대학교가 있는데, 그 로고는 독수리입니다.
독수리는 새 들의 왕입니다.
그래서 고대 다니는 학생들에게 '연고전' 그러면 바로 즉시 고칩니다. '고연전'이라고요.
그리고 우리 나라에 '(웃는) 사자'로고를 한 대학교도 있습니다. *경희대
외국에도 보면 이런 짐승의 강력한 이미지를 이용해서
학교 로고나 마크를 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사자, 호랑이, 독수리의 공통점이 뭡니까?
그 학교 학생들에게 어떤 웅장한 이미지나 메시지를 심어주고 싶은 거죠.
'너희는 여기에서 잘 연마해 가지고 배출이 되면,
이 세상을 호령하고, 이 세상을 지배하고, 이 세상의 탑클라스에 들어가서
영향력있는 리더가 되어라'
그런데 대학교 로고 중에 '어린 양' 뭐 이런 이미지를 봤어요?
저는 못 본 것 같아요.
'어린양'하면, 왠지 잡아먹힐 것 같고, 늘 당할 것 같고, 유약해 보이잖아요.
그래서 그런 약한 짐승을 로고로 삼는 대학교는 없는 걸로 제가 알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사자와 어린양'입니다.
계5: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 scroll 하나가 들려져 있습니다.
그 두루마리에는 하나님의 세상 경영에 대한 시간표, 스케줄, 계획표,
경영의 내용이 담아진 두루마리이고, 그게 하나님의 손에 들려져 있어요.
근데 문제는, 안밖으로(양면으로) 뭔가 가득 써 있는데, 일곱 인으로 봉해져 있습니다.
'봉해졌다'는 말은, 아무나 볼 수 있도록 열어 놓지 않았다는 얘기예요.
'일곱 인'이라는 것은, 완전히 봉해진 것을 얘기합니다.
5:2 '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나'
천사가 답답해서 소리지르는 거예요.
이거 좀 인봉을 떼서 내용을 알아야 되겠는데,
*인, 인봉 : 촛물을 부어서 아무나 못 열게 함, 그 위에 인을 침.
이 내용을 알기는커녕, 그 봉인을 뗄 사람이 피조 세계에는 없어요.
그래서 답답하니까 '누가 이걸 좀 뗄 수 있나요? 뗄 사람 없나요?'
이렇게 소리 지르는 거예요.
5:3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더라'
예 정말 세상에 답답한 거죠.
어쩌면 우리가 처해 있는 이 현실과 너무 비슷해요.
뭔가 좀 열쇠가 있고, 길이 보이고, 답이 보여야 되는데
길도 안 보이고, 답도 없어요.
'이걸 누가 좀 해결할 사람 없냐?' 이렇게 천사가 소리지르는 거예요.
5:4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내가 크게 울었더니'
사도요한이 대성통곡을 헀다는 거예요. 너무 답답해서.
이 통곡은, 사실 이 세상이 안고 있는 큰 울음 입니다.
해결해야 될 큰 슬픔이고, 큰 고통이고, 큰 울음이에요.
저마다 가슴 한 가득, 이렇게 퍼렇게 멍이 들 정도로
큰 슬픔과, 고통과, 울음을 갖고 있는데... 이걸 해결할 사람이 없는 거예요.
어디 가서 울 곳조차 없는 게 세상 아닙니까.
「'울 곳'이라는 시가 있어요.
할머니 어디 가?
예배당 간다
근데 왜 울면서 가?
울려고 간다
왜 예배당 가서 울어?
울 곳이 없다」
이런 짤막한 시가 있어요.
세상엔 이 울음조차 터뜨릴 마땅한 곳이 없습니다.
5:5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여기 5절부터 여러분이 꼼꼼히 좀 들으셔야 됩니다.
사도요한도 대성 통곡을 하고 있어요. 답답하니까.
그때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요한이 엉엉 울고 있으니까, 천상의 장로가 요한에게 말을 한 거예요.
그가 말을 했으면, 요한이 지금 눈으로 본 겁니까, 귀로 들은 겁니까?
이건 귀로 들은 거예요. 5절은 요한이 들은 내용이에요. (6절은 본 내용)
이거 중요합니다. 들었어요. '울지 말라'
그 슬픔을 중단시키고, 희망을 가져올 어떤 조짐이 보여요. '울지 말라'
누군가 내 지독한 환난을 해결해 주지 못하더라도,
누가 내 곁에 와서 슬그머니 '울지 마' 말해 주면, 그것도 위로가 좀 되거든요.
그런데 천상적 존재인 장로 하나가, 사도요한에게 '울지 말라' 그래요.
이 말을 사실은 누가 하셨는지 압니까?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하셨어요.
과부에게 독자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아들이 죽죠.
그래서 온 마을 사람들이, 마을 인근 공동묘지로 가서 장례를 치르러 나가는데
그 행렬 맞은 편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무리가 마을로 들어오고 있어요.
죽음의 장례 행렬은 마을 밖으로 나가고 있다가, 길 한복판에서 생명의 주와 마주치죠.
예수님이 관에 손을 대시면서 과부에게 '울지 말라' 이게 첫 마디였어요.
예수님만이 근본적으로 인류의 슬픔을 끝내주실 유일한 분입니다.
근데 여기 지금 요한이 본 천상의 환상 속에
한 장로가 '울지 말라' 라는 음성을 들려줍니다. 뭔가 희망이 보이기 시작해요.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5
'유대 지파'와 '유다 지파'는 같은 말입니다.
계시록에 '유다'도 나오고 '유대'도 나오지만, 같은 뜻입니다. 7:5절엔 '유다'라고 했죠.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습니다.' :5
여기서 '유대 지파의 사자' 라는 표현을 했어요. 그 사자가 곧 다윗의 뿌리 입니다.
이런 설명과 표현이 어디에서 근거한 걸까요?
창49:8~10절에 근거한 것입니다.
야곱이 소천하기 전에 아들 유다를 축복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 유다지파는 굉장히 강력한 힘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라고 예언합니다.
49:9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유다가 사자새끼로 표현되었습니다.
정복하는 존재로 설명 되고 있습니다.
사자의 욕망과, 정복과, 강한 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49:10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유다 지파가, 짐승으로 사자로 묘사되었어요.
그 사자가 울부짓고, 찢고, 올라가고, 정복하는 그림으로 예언했습니다.
근데 이 설명에 담 아진 핵심 내용이 뭐냐 하면,
오실 메시아가 그 역할을 할 거다... 그 말이에요.
여기에서 그만 유대인들 속에는, 오실 메시아에 대한 그림이 오해되어져 버린 겁니다.
그들은, 오실 메시아를 어떤 존재로 내내 기다려 졌을까요?
강력한 존재로, 철장 iron club 의 권세를 가지고 오셔서
로마의 허리를 부러뜨리고, 적들의 목을 잡아서 굴복시키고...
이런 사자같은 강력한 모습의 메시아를 기다리는 오해가
이 야곱의 예언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 의해서 시작이 됐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강력한 메시아를 기다렸어요. 사자로서의 메시아죠.
근데 예수님은 그런 기다림에 부합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근데 그것은, 유대인들이 성경을 반쪽만 이해했기 때문에 벌어진 오해입니다.
여러분 이사야서에는 예수님을 어떻게 묘사 했어요?
'그는 순한 양 같다. 도살장으로 끌려 가도, 그 입을 열지 아니 하였다.
이새의 줄기에서 나온 연약한 싹'
이런 식으로 또 한 축의 메시아를 설명했어요.
본문에도 사자와 양의 두 이미지가 함께 등장합니다.
5:5절은 '사자', 5:6절은 '어린양'이에요. 양 면을 다 봐야 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요구하는 것처럼 슈퍼맨 같은 메시아만 기다리는 오해의 근거가
창49장의 이런 기록들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기록이 잘못됐다는 게 아니에요.
이 기록에 대한 해석이 잘못된 겁니다.
▲자 그러면 성경은 전체 차원에서
이것이 어떻게 재해석 돼야 되는가요?
5: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여기 큰 차이가 뭐냐 하면, 5절은 사도요한이 귀로 들은 내용입니다.
그런데 6절은 눈으로 보는 내용입니다. 이 큰 구분을 잘 이해하셔야 돼요.
5절은 들은 내용이고, 6절은 보는 내용입니다.
자 그러면 5절을 듣고 나서, '내가 또 보니'
'또' 라는 말은. 지금부터 펼쳐질 그림 이미지, 볼 내용이
앞에 설명과 유관하다는 얘기예요. 별개의 내용이 아니라 연관성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럼 어떻게 연관성이 있을까요?
앞에 사자의 이미지를 들려주고, 장차 그런 최종적 승리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임할 것이라는 걸 들려주고,
내가 또 '보니' 그 내용을
이제는 그림 언어로 재해석 해주는 거예요.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사자가 아니라 어린 양이 서 있어요.
5절에는 예수님이 '사자'의 이미지로 소개되었으나
6절에는 같은 분이 '어린 양'의 이미지로 소개되고 있으니까.. 대 실망 이죠.
이것이 기독교를 오해한 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커다란 실수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서 왜 이렇게 무능력 하세요?'
이것이 십자가 사건을 놓고 벌어진 인류의 오해였습니다.
'우리가 기대하던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 아니잖아?'
'우리가 기대하던 기독교는, 이런 기독교이면 안 되잖아?'
'왜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면서, 이런 악당들을 길이길이 살려 두시는 걸까?'
이 단순한 대비로도, 얼마나 많은 질문들이 생깁니까?
분명히 들은 건 사자의 이미지로 들었어요. :5
근데 지금 보니까 한 어린 양이 서 있어요. :6
근데 이 어린 양의 모습을 좀 보십시다.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여러분, 이 대목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낼 때
표현했던 것과 동일한 설명입니다.
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자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여러분 이 대목은, 소아시아에 흩어져 있는 대표적 일곱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썼던
유일한 공통 수사어 입니다. '어린양의 피' 희생을 전제하죠.
교회는, 성도는... 어린양의 피의 공로가 전제되지 않는 교회, 성도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게 가장 기본적인 기초입니다.
근데 오늘 본문 5:6절을 보니까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피 흘린 양입니다. 속죄 제물로 드려진 양을 얘기하는 거예요.
5:7 '그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
그 어린 양이두루 마리를 취해요.
5:8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여러분, 그 두루마리의 인봉을 결국 아무도 뗄 자가 없는 걸 요한이 보고
대성 통곡을 라고 우는데
하늘의 한 장로가 '울지 말라' 말하고 나서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 그 오른손에 두루마리를 취합니다.
5:9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여러분, 놀랍게도 혈통적 유다지파를 넘어서서
피 흘린 어린양의 구속의 영역이 이제 어디로 확대되고 있나요?
열방으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9
그렇죠. 각 족속 모든 나라 백성에게로
혈통적 구원에서, 즉 지역적 한계에서
어린 양의 죽음은 어디로 넘어가고 있습니까?
열방으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이 존재하는 그 삶의 자리에서, 모든 선교의 기초는
어린 양의 죽음에서부터 출발하는데
그 죽음의 효력과 범주는, 혈통과 민족과 계급과 사상을 넘어갑니다! 믿습니까? 아멘!
이것이 계시록에 나타난 놀라운 선교의 질서이고, 명령입니다.
5:10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자, 사자의 역할이 이루어집니까/ 안 이루어집니까?
놀랍게도 결국에는 사자가 호령하여 세상을 지배하고 세상을 통치하고 왕 같은 존재가 되지만,
놀랍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2천 년 전 갈보리 언덕에서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서
피흘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의 2천 년 전 모습을 볼 때는
'아이고 이렇게 무기력하게 이 양반이 돌아가셔서 무슨 역사가 일어나겠나?'
그 시대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2천 년의 역사를 넘어서 지금 보면,
하나님의 통치와, 영광의 확장과, 그분의 역사가
서서히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려서 하나님의 통치가 지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사자가 세상을 호령하고 정복하는 모습으로 이루어지지만,
더 중요한 게 뭐냐 하면, 그 과정과 방식은
어린 양의 죽음의... 그런 연약한 방식으로, 그 일이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설교의 주제
▲우리는 오늘날의 일부 교회에서도, 하나님의 역사와 일을, 하나님의 선교를
그런 재정과 규모와 숫자와 크기로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슈퍼맨식 메시아관' 입니다. ↔어린양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신 적이 없어요.
하나님은 언제나 어린양의 죽음의 방식으로만 일하세요.
교회는 그걸 닮아야, 세상이 교회로 끌려오게 돼 있습니다.
교회끼리 '교단의 벽을 넘어서 우리가 하나가 되자' 하는 이 원칙에는
제가 2백 프로 동의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구호를 유심히 들여다볼 대목이 하나 있어요.
만약에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우리가 하나가 돼야 되지 않겠느냐?' 라는
명분에는 2백 프로 동의가 되지만,
만약 '하나가 돼서 우리의 힘을 과시하자. 기독교의 위력을 보여주자!'
이런 차원의 하나라면... 저는 연합을 반대합니다.
어떤 역사의 현장에서도, 교회가 규모를 늘리고, 세력을 규합해서
하나님이 일을 만들어 낸 적이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이 뭐하러 2천 년 전 갈보리 언덕에서
그렇게 무기력하게 죽으셔야 했습니까?
언제나 기독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그 방식을 따를 때만
세상이 볼 때, 매력이 생기는 겁니다. 믿습니까?
▲근데 그것은 교육 공동체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 개개인의 입장에서도, 같은 원리가 적용될 수밖에 없어요.
내가 그 사람을 이겨 먹어 가지고, 그 사람이 내게 설득되던 적이 있던가요?
절대 인간은 그렇게 설득, 전도되지 않습니다. *사자 방식
내가 양보하고, 손해 보고, 희생하고, 겸비해서 죽어 질 때만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 질 때만 열매를 맺듯
그 십자가 방법 외에는 이길 방법이 없어요. *어린양 방식
우리의 교회가, 세상의 방식으로
'너희가 열 가지고 나오면, 그러면 우리는 열 둘을 준비할게!'
이런 힘의 방식으로는 세상을 설득할 수가 없단 말이에요.
선교가 되어지려면
우리가 그렇게 겸비하고, 낮아지고, 희생하는 방식을 통해서 살고,
어린 양의 죽음의 방식을 닮는 방법 외에는 도리가 없습니다.
그 결과는 사자로서의 승리입니다. 과정은 어린양이고, 결과는 사자이죠.
그러니까 결국 '사자'의 그림은, 곧 '어린 양의 죽음'이라는 것과 동의어 입니다.
이건 각각 다른 존재가 아니에요.
우리에게 사자로서 그 정복의 순간, 최종적 승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셨지만,
그 과정과 방법은, 어린 양이 죽음의 방식으로 살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계시록 19장을 보겠습니다.
이제 마지막 날, 백마를 탄 분이 등장하십니다.
19: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이 백마를 타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2 '그 눈은 불꽃 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전쟁을 막 하려고 그러는데,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어요.
바로 이 분이 일찍이 죽임을 당한 어린 양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는 순간, 그 분은 최종적 승리를 완성하시고
이루어 놓으신 분이기 때문에, (과정은 어린양, 결과는 사자의 승리)
이 전쟁은 이제 '잔당 소탕 작전'을 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어린 양이 최종적 승리를 이루어 놓으셨기 때문에
사실은 그 분의 말씀만 쫓아가면, 이미 승리는 얻어 놓은 거예요.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칭하더라' :13
: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15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검'은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유비합니다.
그런데 보통 검은 손에 들려지는데, 이 검은 입에서 나옵니다.
즉 '검과 같은 말씀'을 얘기하는 거예요.
교회나 성도들이 세상을 설득하고, 세상에 교회에 끌려오도록 매력을 가지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먼저 죽기까지 순종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어요.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결국 만국을 정복 한다는 말이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사자의 모습으로서의 최종적 정복을 얘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방식은 어떤 방식이라고요?
어린 양의 죽음의 방식으로!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시죠?
: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결국 하나님의 백성들은 뭘로 왕노릇 하는 거죠?
말씀으로 왕노릇 하는 거예요.
이거는 세상의 어떤 경영 전략이나 세상의 비법이 따라올 수 없는 원리입니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원리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말씀대로 살아 낸다는 것은 그런 겁니다.
'내가 어디까지 어린 양의 희생의 아름다움을 닮아 가야 되는가?'
그 성경적 십자가의 삶 속에,
여러분들의 인생 걸음 걸음이 더욱 견고해지는 복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기도/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사자의 결론을 주시고
어린양의 방식을 가르쳐주심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슈퍼맨 같은 메시아를 기대 하지만,
하나님은 온 세상에 어린 양의 죽음을 통해서, 낮아짐과 섬김을 통해서만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음을 가르쳐 주심도 감사합니다.
이런 선교적 삶을 통해서 더 겸비하고 낮아져서
하나님의 자비와 지혜와 긍휼을 구하는 주의 백성들의 걸음이 되게 하소서.
최종적 승리로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에 이루어 놓으신 구원을 바라보며
또 한 주간을 견고히 걸어갈 수 있도록 동행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