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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으로 자라가고 있는가?

LNCK 2024. 6. 20. 10:12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 영적성장  

영적으로 자라가고 있는가? | 엡 4:11-15  23.6.11 - YouTube

영적으로 자라가고 있는가?        엡4:11-15      설교문 스크랩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조직체나 단체가 아닌 생명을 가진 유기체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종교 단체, 종교 집단이 아닙니다.

단체, 조직들은 숫자의 크기나 외형적인 것을 강조합니다.

사람이 몇 명이나 모이는가? 어떤 교회가 가장 큰 교회인가? 등은 세속적인 질문입니다.

예수님이 의도하셨던 교회와 거리가 먼 이야기들입니다.

 

교회가 자란다는 말은 성도들의 영혼이 온전해져 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각 사람의 영혼이 점점 변화되어 가고, 속사람이 변화되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온전함’은 에베소서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완전한, 장성한, 성숙한 과 같은 말

 

지난 주일 살펴보았던 것처럼 성도들이 온전해져 가는 일을 위해서 세우신 직분이

목사와 교사입니다. 본문 엡4;12절에, 목사와 교사를 세우신 목적이 나옵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일봉사의 일은 동일선상에 놓여있는 것이 아닙니다.

봉사의 일을 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은

성도를 온전하게 함으로 인한 결과입니다.

핵심은 봉사보다 온전함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11-12절의 말씀과 디모데후서 3:16-17절을 대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목사를 세우신 목적과 성경을 주신 목적이 동일합니다.

두 본문에서 주목할 것은 순서입니다. 온전하게 됨이 먼저 나옵니다. :17

 

우리가 마음대로 순서를 바꾸면 안 됩니다.

온전하게 되는 것보다 봉사가 앞서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온전하게 되는 일에 먼저 힘을 써야 합니다.

아무리 할 일이 많아도 초신자를 봉사자로 세우면 안 됩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라도 초신자라면 먼저 온전함을 위해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봉사를 열심히 할 때는 좋은데 그다음이 문제입니다.

일한 만큼 인정받고 싶고, 공로를 드러내고 싶고, 직분으로 보상받고 싶어 합니다.

 

어느 순간 나만 희생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열심히 봉사하고 난 다음 은근히 교만한 마음이 들거나 남들이 알아주지 않을 때

억울한 마음이 들 수도 있습니다.

아직 내가 일을 할 만한 영적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릇이 작으면 금방 넘쳐버립니다.

 

한때는 봉사를 열심히 했다가 어느 순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른 봉사는 후유증을 낳습니다.

 

목회자의 역할은 성도들이 충분히 자라도록 돕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언제 실수합니까? 성도를 목회의 도구화할 때입니다.

 

성도는 목회자의 소모품이 아닙니다.

오히려 목사가 성도들이 온전한 사람으로 세워지는 일에 소모되어야 합니다.

 

목사를 위해 성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를 위해 목사가 존재합니다.

일꾼을 세울 때마다 이분이 성숙을 위해 좀 더 시간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는 분인지

아닌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아직 때가 아니라면 그분이 충분히 자라갈 수 있도록 기다려야 합니다.

성급하게 일을 시작하면 자랄 기회를 놓쳐 버립니다.

 

영적 성숙의 과정을 충분히 거치지 않고, 봉사하는 일에 에너지를 쏟다가,

직분자가 되고 나면 다시 영적으로 성숙에 이르는 길로 돌아가기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목사와 교회론이 중요합니다. 목사는 건물을 세우고 프로그램 운영이나

조직 관리를 하는 것보다,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일에 전부를 걸어야 합니다.

 

목회자의 목회 철학이 중요합니다. 봉사보다 성숙에 집중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열심히 활동하는 것은 눈에 띄지만 성숙을 위한 노력은 금방 눈에 띄지 않습니다.

목회자나 성도 모두 쉬운 길을 가고 싶어 합니다.

결국 사역에 몰두하게 되고, 나중에는 목회자도 바쁘고 성도들도 바쁩니다.

 

돌보아야 할 성도는 줄어들지 않고 늘어납니다. 건강한 교회 구조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나 성도들 모두 영적 성숙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영적 성숙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일의 성과보다 우리 자신이 목표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얼마나 많이 하느냐보다

그 일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얼마나 드러낼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교회에서는 열심히 봉사하고 인정받지만 가정은 깨어져 있거나

직장에서는 사람들에게 비난받고 있다면 정상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입니다. 준비된 만큼 쓰십니다.

영적으로 준비된 사람은 일하는 것이 다릅니다.

성숙에 이르지 못한 사람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더 어렵게 만듭니다.

 

내가 온전해야 하는 일도 온전해집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으로 준비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사람은 많은데 온전함에 이른 일꾼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사람을 세우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일꾼으로 세워지는 데 40년이 걸렸습니다.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 역시 40년 만에 준비되어 나온 일꾼입니다.

 

모세가 준비되지 않고 무엇인가 해보려고 하다가 살인자가 되어 도망을 쳤습니다.

자기완성이 안 된 사람이 무엇을 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우리는 쉽게 일꾼을 만들려고 하는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성숙은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한국교회 목회자 가운데서도 일의 전문가는 많은데, 말씀의 전문가는 많지 않습니다.

외형적으로 기울어진 경향이 많습니다.

 

영적인 길에서 조급증은 금물입니다. 상품은 찍어내면 되지만 작품은 다릅니다.

장인의 손으로 빚어진 작품은 오랜 시간을 통하여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방법과 기술에 따른 대량화, 물량화보다 도제식 방식으로 가야 가능한 일입니다.

사람을 금방 바꾸려고 하면 실패합니다.

 

지도자는 일 자체보다 성도의 영적 변화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칭의는 강조되었지만 성화가 약합니다.

 

그동안 한국교회 안에는 예수 믿고 천국 간다는 등식이 너무 강했습니다.

과정은 없고 결과만 붙들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 믿고 난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할 말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칭의 교리에만 너무 집중하고 주로 구원의 확신이 있느냐만 강조했습니다.

 

예수를 믿고 난 이후의 삶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이 한국교회의 현상입니다.

문제는 성화를 놓친 것입니다.

거룩함으로 성숙에 이르는 성화는 칭의와 떨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 태어났다면 자라 가야 합니다.

 

◑온전한 사람으로 자라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문 엡4:13-14절을 보면, 에베소 교회 안에는 자라지 못한 영적 어린아이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두 가지를 강조합니다.


▲1. 첫 번째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에서 바울은 실제로 2-3년간 목회를 했습니다.

그는 목사와 교사로서 매일 두란노 서원에서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어떤 사본을 보면 하루에 다섯 시간씩 가르쳤다고 합니다.

목사는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성도들이 말씀의 무지에 빠지지 않도록 말씀을 먹이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또 성도들은 말씀을 배우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평생에 걸쳐서 배워야 합니다.

말씀 공부는 끝이 없습니다. 공부하면 할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성경을 배우면 배울수록 감탄합니다.

우리에게 주는 기쁨 중의 큰 기쁨은, 진리에 눈을 뜨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영적 무지의 구름이 벗겨질 때 탄성이 나옵니다.

조금이라도 일찍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일어납니다.

 

성경을 바로 알고, 바로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보다 더 고상한 것은 없습니다. 최고의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빠지면 다른 지식은 공허합니다.

 

오늘날 지식과 정보는 넘쳐 나지만, 사람들의 내면은 더 공허하고 정신적 질환을 앓고 있습니다.

지식이 늘어나는데 왜 고민은 더 늘어납니까? 온전한 지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식의 최고봉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게 합니다.

 

믿음이 없는 지식도, 지식이 없는 믿음도 안 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어야 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핵심도, 본질도, 중심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성경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알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말씀의 무지는 우상숭배를 몰고 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4:6)

하나님에 대한 무지는 어린아이 상태에 머물러 있게 합니다. 자라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얻으려면 평생 학습자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통합될 때 영적 성숙의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 신앙의 진짜 열심은 진리에 대한 열심이어야 합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이 일치를 이룰 때 신앙의 위력이 나타납니다.

 

▲2. 둘째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는 것입니다.

누구나 어린아이로 시작합니다. 어른으로 태어나는 경우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태어남입니다. 생명의 법칙입니다. 영적으로도 거듭나야 합니다.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는 그 시대 최고의 지성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의 의미를 알아듣지 못합니다.

사회에서는 성공한 사람이라도 영적 세계로 들어오면 어린아이로 시작합니다.

갓 태어난 상태입니다. 아직은 성장을 이야기하기 어렵습니다.

 

처음은 누구나 그렇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전과 달라야 합니다.

자라지 않는다면 출생을 의심해야 합니다. 성장의 속도는 다를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반드시 자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특징은 변덕스럽습니다. 감정이 수시로 오락가락하고, 금방 토라집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온갖 풍조에 밀리고 쉽게 요동칩니다.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는, 성경적 원리와 기준을 따라 살지 않고 자기감정에 따라 춤을 춥니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입니다.

쓸데없는 고집을 피우고 자기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거기에 매달립니다.

어떤 충동이 일어나면 억제하지 못합니다.

 

영적 어린아이의 상태에 있으면 위험합니다. 악한 자들이 어린 신자를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어린 신자는 상대가 자기를 미혹하는 자인지 분별하지 못합니다.

 

오늘날 세상의 문화가 얼마나 무서운지 영적 어린아이로 있으면 분별할 수 없습니다.

좋은 교회를 다녀야 하고, 좋은 믿음의 선배를 만나야 합니다.

신앙을 바른길로 이끌어 줄 사람이 곁에 있어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 바로 서 있지 못하는데 누구를 도울 수 있겠습니까? 성숙함은 다릅니다.

성숙함이란 자기 통제를 할 줄 알고 감정의 절제력이 있는 것입니다.

충동이나 느낌보다, 말씀을 따라가려는 의지적 노력이 훈련되어 있습니다.

 

마음에 안 든다고 그만두지 않습니다. 성숙하면 안정감이 있어서 믿고 맡길 수 있습니다.

분별력이 있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하나님 말씀의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요동치지 않습니다. 계속 어린아이로 남아있다면 그것은 최악입니다. 자라야 합니다.

이전의 삶을 버리지 않고 즐기고 있다면 아직 자라지 않은 단계에 있는 것입니다.

 

◑왜 어린아이 신자들이 생겨나는 것입니까?

단단한 말씀을 못 먹기 때문입니다.

 

“1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3:1-2)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영적 성장은 말씀과의 관계가 결정적입니다.

안 먹고 자랄 수는 없습니다. 먹어도 무엇을 먹느냐입니다.

 

젖이나 먹고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면 어린아이로 머물게 됩니다.

먹기는 하는데 소화를 못 하면 영양공급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도 부드러운 것이 있고 딱딱한 것이 있습니다.

축복의 메시지는 부드럽습니다. 권면까지는 약간 부드럽지만 헌신, 희생은 딱딱합니다.

또 책망이나 경고, 회개의 촉구는 딱딱한 음식입니다.

 

말씀은 밥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약이기도 합니다.

약은 쓰지만 먹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책망이 섞인 메시지를 들으면 그대로 아멘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내가 기대하는 말씀이 아니면 대충 듣고 끝납니다.

 

성장하는 신자의 특징은 말씀을 듣는 일에 열심입니다. 말씀에 대한 기대감이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영적으로 자라지 않습니다.

어떤 말씀이든 소화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단단한 말씀을 소화해 내야 온전함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단련 받아야 합니다. 영혼의 깊은 곳까지 말씀이 스며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던져질 때 내 욕망과 생각의 충동이 일어납니다.

그럴 때 거부하느냐, 말씀을 그대로 붙들고 말씀 앞에 내 생각과

욕망을 꺾고 복종하느냐의 싸움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고집대로 살아가려는 죄성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꺾여지는 훈련이 반복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디론가 치우쳐져 있습니다. 우리의 몸도 마음도 기울어져 있습니다.

신앙도 기울어져 있습니다.

 

온전함은 우리가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뼈가 골절되어 있듯이 신앙도 어긋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우리가 좌로나 우로 치우쳐져 있는 것을

말씀으로 바르게 교정하는 작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들은 말씀을 따라 순종하고자 하는 노력을 해야 조금씩 온전해져 가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영적인 어린아이들이 많습니다.

계속 자라가지 않는 신자들로 가득한 교회 안에는 유치한 일이 벌어집니다.

 

우리는 말씀을 적극적으로 배우고 은혜받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양육과 훈련을 받고 깨달은 말씀을 삶 속에 끊임없이 적용하며 살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신앙의 초기부터 기본기를 익히고 건강한 신자, 균형 잡힌 신자로 세워지는 일에

매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도의 온전함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엡4:15절,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3b절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목표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높은 기준입니다.

엄청난 것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라” 가슴 뛰는 목표입니다.

목표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다릅니다. 선명한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소망이 없던 우리를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도록 새로운 목표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우리 신앙의 목표가 단순히 주일 예배에 빠지지 않는 것, 올해 십일조를 하는 것,

죄짓지 않고 사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우리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른 것이 기준이 되면 안 됩니다.

 

봉사하는 것 자체가 목표가 아닙니다. 봉사를 통하여 훈련받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하여 우리가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다가 누군가 실수하면 손가락질하고 비난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용서하고, 품고, 나와 같지 않은 사람들과 하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이 나를 빚어가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을 때 세상의 사람들이 우리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100% 완전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숙함에 이를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자라가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목표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1)

 

세월이 흐른다고 결코 저절로 성숙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기대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 기대치를 낮추면 안 됩니다. 때로는 실패하고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성령이 친히 도와주십니다.

 

변화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노력할 때 성령이 우리를 도우셔서 변화된 사람으로,

거룩한 사람으로 이끌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교회는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머리 되신 그리스도가 영광스러운 것 같이 우리도 동일하게 영광스러운 몸으로 자라 가야 합니다.

몸의 모든 파트가 그리스도를 닮아 갈 때 이상적인 교회가 됩니다.

 

성도 각 사람이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지시를 받으며 살 때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몸이 우리를 통하여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머리 되신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붙어 있어야 자라게 됩니다.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온전함에 이를 때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가 됩니다.

 

일평생 한가지 소원이 있다면 “예수 닮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처럼 살기 원합니다”라는 것입니다.

주를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은 많은데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목표는 단 한 가지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 일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는 변화된 삶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속 사람이 변화되고 온전해져 간다면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우리가 하는 일도 온전하게 될 줄 믿습니다.

 

................................................

 

주1) 우리 각자의 신앙 인격은 ‘영혼의 지문’과 같습니다.

지문의 특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은, 내가 지금은 신앙인격이 미숙하지만,

나중에 죽고 나면 ‘그리스도와 같이 변화되겠지...’ 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그 근거는 요일3:2절, 딱 한 구절 때문인데, (다른 근거는 글쎄요, 아직 못 찾았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재림 때, 우리가 예수님과 같아진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인격이 예수님의 인격을 본받아 완전해진다.. 라는 뜻보다는,

우리 썩을 육신이, 예수님처럼 썩지 아니할 육체를 입는다는 뜻입니다.

 

만약 내가 죽은 후에, 내 신앙인격이 예수님처럼 변해버린다면

천국에서 내 아이덴티티가 없어져버리는 것입니다.

내 영혼의 지문이 없어져 버린다니까요...

 

천국에 자기 아이덴티티가 없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천사들이죠.

아주 획일적 존재들입니다. 그럼 우리를 천사로 만드시려고 구원하신 걸까요? No

 

정확한 칭의가 일어났다면, 자동적으로 성화(성숙, 온전, 장성)의 과정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국에 갈 때 ‘내 영혼의 지문, 내 아이덴티티’를 갖고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 동안에, 끊임없이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져 가야되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천국이란 곳에 갔는데, 내 영혼이 하나도 성숙, 변화되지 않아서

거기서도, 세상에서와 똑같이, 내가 거짓말하고, 속이고, 유혹하고, 남의 것을 빼앗고,

시기 질투하고, 당을 짓고, 남을 욕하고, 헐뜯고... 그러면 거기가 천국이 될까요?

자꾸 아수라장이 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주님은, 그런 미숙한 자들을, 천국에 못 들여보내시는 거죠.

그들이 만약 들어오면, 천국은 난리 야단법석이 일어날 테니까요.

 

칭의로 구원 얻은 성도들은, 그 다음 부터는 일평생 성화를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최대 관심도 그것입니다. 나를 흰옷 입은 신부로 만드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