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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륜과 한국 최초의 소래교회, 1883년경

LNCK 2024. 6. 20. 13:39

서상륜과 한국 최초의 소래교회, 1883년경               기사 스크랩

 

◈한국교회사의 인물들

서상륜은 사업을 하다가 장티푸스에 걸려서, 선교사와 만나게 되다.

1800년대 후반, 중국어에 능통하고 수완이 좋은 30세의 조선 청년 서상륜은

중국과 조선을 오가면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인기좋은 고려인삼을 내다팔고,

다시 중국 물건을 사다가 조선에 파는 중계무역으로,

수입도 제법 좋은 편이었다.

 

한창 장사에 재미를 붙이던 젊은이는, 그만 뜻하지 않는 큰 난관에 봉착하고 만다.

낯설고 물 설은 중국 땅에서 그만 장티푸스에 걸린 것이다.

 

요즘은 장티푸스가 큰 병이 아니지만, 그 당시에는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병이었다.

소식을 듣고 고향 의주에서 달려온 친구들이 백방으로 용한 의사를 찾던 중

서상륜은, 중국에 의료선교사로 파송된 헌터 선교사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

 

▲병을 고침 받고, 복음전파자로 변신하다.

극심한 병마의 고통 속에서 치료를 받던 그에게

스코틀랜드 출신 존 로스 선교사와 존 메킨타이어 선교사의

끈질긴 전도가 이어졌다.

 

병이 나으면 예수를 믿겠다고 약속한 청년은,

여러 달에 걸친 치료 끝에 병이 완쾌된다.

병상에 누워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드렸던 간절한 기도가 응답된 것이다.

 

병에서 회복된 그는 즉시 인삼장수를 그만두고, 동생과 함께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 뛰어들었다.

그가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당인 소래교회를 설립한 서상륜이다.

 

▲중국어 성경을, 한글 성경으로 번역하는데 크게 일조하다.

1866년 토마스 선교사가 대동강에서 순교한 이래

예수 믿는 일은, 당시에 나라에서 엄격히 금하는 일이었다.

 

조선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파송된 로스 선교사는

조선으로 입국하지 못하자, 조선어 성경번역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로스선교사의 전도로 세례를 받은 의주 출신 이응찬, 백홍준, 이성하, 김진 등

4명의 청년과 서상륜은, 로스 선교사를 도와 조선어 성경번역에 열중하였다.

 

특히 한문에 조예가 깊었던 서상륜은,

중국어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데 크게 일조하였다.

 

1879년 중국 심양에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출판된 것을 필두로

1883년 사도행전, 1886년 서신서가

‘로스역譯’ 이라는 이름의 한글 신약성경으로 완역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서상륜, 소래마을로 가서 성경을 나눠주며 전도하다.

예수님을 통해 육체의 질병 뿐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직접 체험한 서상륜은

조선어성경 번역이 끝나자,

고국의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열정이 가득했다.

 

마침내 1883년 100권의 성경책을 몰래 숨긴 채 압록강을 건너다가,

그만 관헌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다행히 성경 10권을 품에 지니고 탈출하여 친척이 살고 있던

황해도 송천마을로 피신하였다.

 

소래마을은,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松泉 마을의 다른 이름이다.

관헌의 눈을 피해 숨어든 서상륜이지만, 복음을 전하겠다는 일념에

친척을 비롯해 인근 주민들에게 성경을 읽어주면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풍부한 학식을 바탕으로 재미있게 성경을 읽어주고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자, 마을사람들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

너도나도 성경책을 받아가니, 10권의 성경책은 금방 바닥이 나고 말았다.

 

은밀히 로스 선교사에게 연락하여 6천권의 (쪽)성경을 전달받고,

전도 대상지를 점점 넓혀 인근 마을까지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은밀하면서 끈질긴 서상륜의 전도로, 교인들의 숫자가 많아지자,

함께 모여 기도할 예배당이 필요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예배당, 소래교회당의 탄생

소래마을의 첫 예배당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예배당은

마을에서도 외진 곳에 있는 작은 초가집이었다.

 

제대로 신학을 공부한 사역자도 없었고,

관헌의 눈을 피해 몰래 예배당에 모이는 것도 위태로웠으나

교인들은 서상륜을 중심으로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서 모임을 지속하였다.

 

쇄국정책을 고수하면서 외래 문물을 거부하던 은둔의 땅 조선에도

하나님의 사랑의 빗은 비취기 시작하였다.

 

서양인들의 입국이 늘고, 그들이 펼치는 의료사업, 교육사업 등을 통한

긍정적 영향력과 또한 일제의 침략 의도를 경계하던 고종은

(이런 저런 이유로) 1884년, 조선에서의 기독교 선교를 윤허한 것이다.

 

서양의 힘을 통해 일제의 야욕을 막아보려는 고종의 결심에는

조선을 향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개입한 결과였다.

 

마침내 1884년 4월5일, 제물포를 통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입국하면서

조선 땅에도 본격적인 선교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두 선교사 입국 당시 이미 소래교회는 마을 총 58가구 중

예수 믿는 가구가 50가구에 교인 수 80여명의 교회로 성장해 있었다.

 

교인 수도 많아지고, 나라에서 기독교를 허용하자

비좁은 예배당 신축이 당면한 과제로 떠올랐다.

 

교인들이 주축이 된 마을 주민들은, 건축위원회를 조직했고

선산의 소나무를 재목감으로 내놓는 마을유지가 있는가하면

교인들은 자발적으로 헌금을 내놓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언더우드 선교사가, 건축자금을 지원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서상륜을 비롯한 마을 주민들은

 

“우리가 우리 교회당을 세우는데 외국인의 원조를 받는 일은 본의에 어긋나며,

후세에 전하는데도 떳떳하지 못하다” 하여 거절하였다.

 

직접적인 건축헌금 지원을 하지 못한 언더우드는,

미국에서 서양등洋燈 5개를 구입하여

제공하는데 만족하였다고 전해진다.

 

1895년 7월 8일 드디어 소래교회는 8칸 기와집으로 완공되었고,

1년 뒤 다시 16칸(약32평)으로 증축되어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게 되었다.

 

소래교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예배당 건물로, 매우 의미 있고 유서 깊은 곳이다.

그러나 더 값지고 소중한 것은,

우리 백성들이 외국의 도움 없이 스스로 전도하여 세운 최초의 교회라는데 있다.

 

사도 바울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에 복음을 전파한 이래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스스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전도하여 교회를 세운

자랑스러운 선교의 장이 우리나라에서 펼쳐진 것이다. 6666

 

▲한국기독교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소래교회 건물이 재건되다.

우리나라의 복음화에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비롯한 수많은 외국 선교사와

외국 선교단체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소래교회를 세운 서상륜과 소래교회 교인들이

외국인 선교사들로부터 세례를 받은 후에야

공식적인 그리스도인이 된 것도 역사적인 진실이다.

 

그렇지만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스스로 싹을 틔운 곳이

바로 소래교회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해방 이후 북한지역의 교회는, 공산당의 핍박 속에서 사라져갔고,

6.25를 정점으로 예수를 믿는 것은 공식적으로 금지되고 말았다.

 

수많은 성도들이 핍박을 받으면서 지하로 숨어들거나 순교를 당한 북녘땅에서

소래교회는 지금, 그 흔적조차도 찾을 길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나라 교회사의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는

소래교회의 소중한 역사가

그대로 묻혀 버리게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

 

‘한국기독교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1988년 총신대학교 양지캠퍼스에 32평 기와집 모습 그대로,

소래교회를 복원하게 된 것이다.

 

비록 예배당 복원 외에 공식 조직이나 성도도 없어,

교회로서의 기능이 없는 건물뿐이지만,

소래교회 예배당은 고결한 품격으로 자리를 지키면서,

북녘땅 제자리로 돌아갈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산새 소리만 간간이 들려오는 아늑한 숲에 둘러싸인 소래교회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면

격자무늬 창으로 들어온 빛이 마루바닥에 은은히 반사된다.

 

무릎을 꿇고 눈을 감으면, 이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이 간구했을 그 기도,

아니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의 간절한 염원을 담은 그 기도가 저절로 나온다.

 

“북녘 땅에 다시 복음이 전파되고, 소래교회가 제자리로 돌아갈 그날을

속히 허락해 주옵소서...”

 

<지구촌비전誌, 2009년 09월호에서 스크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