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6월 16일] 하나님 됨을 알라(출 14:10~14) - YouTube
◈하나님 됨을 알라 출14:10~14
※홍해 앞에 놓이는 절박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섭리에 초점과 내 시각을 맞추면,
불평 원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초점과 시각'을 항상 올바르게 맞추는 연습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내가 '홍해'를 만나도, 그 현상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주님의 섭리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초점 연습
유진 피터슨 이라는 유명한 신학자요,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가 쓰신 책 가운데 <현실, 하나님의 세계>라는 책 속에서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면, 반드시 그 비결이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초점 연습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Focusing Practice
여러분 함께 깊이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초점 연습!
우리 생각이 너무 흩어져 있습니다. 너무 산만 합니다.
이거 저거 다 제거하고, 하나님께로 초점을 맞춰야 됩니다.
초점을 맞추는 훈련을 해야 됩니다.
대단히 중요한 착안이요, 또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초점을 바라보며 바로 서게 되면, 그외 다른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초점만 바라보면, 다른 것은 다 잊을 수 있습니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 여러분, 초점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탕자가 집이 돌아옵니다. 집을 나갔던 탕자가 집에 돌아와서 아버지의 환영을 받게 되죠.
또 형님의 질투도 받고 그러죠. 눅15장
여기서 초점을 아버지에게 맞추면, 그 본문은 하나님의 사랑이 주제입니다.
큰 사랑,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죄인을 환영해 주시는 큰 사랑이 거기에 있어요.
그런가 하면 초점을 탕자에 맞추면, 이 탕자가 영웅이 됩니다.
'그 사람 집을 나갔다가 아주 제 시간에 맞추어서 돌아온 사람이군!
그 돌아오는 용기가 대단합니다. 아 훌륭합니다!' 이렇게 보게 된다는 말이에요.
▲초점에 따라서 보는 게 얼마나 달라지냐면... 순교를 볼 때도 그래요.
우리가 '순교' 이야기를 대할 때, 가장 많이 헷갈리는게 그거예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한평생 고생을 하다가,
마지막에 순교 한다... 그걸 어떻게 봐야 됩니까?
사도 바울을 보세요. 사도 바울이 일평생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합니까?
얼마나 넓은 곳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고, 그 과정에서
여러 번 감옥에 갇히고, 여러 번 매를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고...
아 이런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순교 합니다.
여러분, 그의 인생은 성공입니까, 실패입니까?
어떻게 판단하면 좋겠습니까?
그렇게 그리스도를 위해서 일평생 수고를 많이 한 사람이라면
마지막에 그래도 영광을 누리고, 평안한 노후 시간을 살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나 아시는 대로, 바울은 물론이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전부 다 순교했습니다.
그들의 삶은 성공입니까, 실패 입니까?
우리가 이걸 알아야 합니다.
영생에다 초점을 맞추면 성공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면 백 프로 성공입니다.
그러나 만일 세상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한다면... 비참한 삶인 거죠.
세상에 그런 실패가 어디에 있습니까?
복음을 위해서 자기 일생을 다 바치고 마지막에 죽어요. 그것도 십자가에 죽어요.
이거 성공 입니까, 실패 입니까?
그것은 초점, 관점에 따라 판단이 달라지게 됩니다. 우리가 깊히 생각해야 합니다.
▲작은 일이나 큰 일에, 우리는 이러한 판단을 해야 할 시간이 있습니다.
초점을 제대로 바로 맞추세요. 성경적인 초점, 영생의 관점을 가지고 판단해야 됩니다.
순교는 그리스도 인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영광입니다. 최고의 성공입니다.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순교는 참으로 잘못 됐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고 복음을 위해서 감옥에서 고생하고 수고하다가
마지막에는 순교? 어찌 이렇게 비참 할 수가 있습니까?
맨 마지막이라도 좀 어떻게, 좀 편안하고 복된 시간이 있어야지요...
그의 인생의 마지막 시간이 순교로 끝난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삶을 어떻게 판단해야 옳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인으로서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샤머니즘이나, 세속적 가치관으로 판단합니다.)
여기서부터 우리가 신앙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현세, 현실만 생각하면, 거기에만 포커스를 맞추면... 그의 삶은 실패입니다.
그러나 초점을 하나님 나라에게 두고 보면, 그는 (순교자는) 성공 중의 성공입니다.
영광 중의 영광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기독교 입니다.
우리는 똑똑히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여러분 아이들이 공부하잖아요. 공부의 승패가 어디에 있습니까?
집중력 이에요. 공부 많이 한다고 좋은 성적이 나오는 게 아니에요.
뭐 좋은 가정 교사 둔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문제는 집중력 입니다.
공부하는 그 시간, 얼마나 공부에 집중하느냐에 달려있죠.
그래서 학생은, 모름지기 집중하는 훈련이 되어있어야 돼요.
죄송하지만 제가 옛날에 대학다닐 때 비교적 공부를 잘 했어요.
성적을 아주 잘 받았어요. 그래서 학기마다 강당 위에 올라가서
총장으로부터 제가 장학금을 받았어요.
그런데 저는 미안하지만, 공부를 많이 안 했어요.
왜요? 강의 시간에 강의를 열심히 들었죠. 강의 시간에 집중적으로 들었죠.
그러니까 시험장에 나가서 시험보려고 하면, 환하게 생각이 납니다...
그렇지 못하고 강의 시간에는 꾸벅꾸벅 졸고, 노트에다가 그림이나 그리고(딴 생각 하고)
그 다음에 시험공부 한다고 뭐 밤새워 가면서 공부해본들... 그게 되나요?
관건은 집중력입니다. 공부는 집중력에 달려 있습니다. 시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집중력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부에 비유했지만,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중력에 달려있고, 포커스를 어디에 두느냐에 달려 있는 거예요.
하나님 말고, 영생 말고, 다른 것에 집중하고, 초점 맞추고 있으면... 뭐 실패인 거죠.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 생각하면, 자 우리가 얼마든지 불평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집중, 역사의 핵심이 어디 있는가? 그거를 알고 나면,
우리는 항상 감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초점을 맞추지 못해서, 홍해 앞에서 불평 원망한 이스라엘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4백년 동안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모세를 통해서 그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자유다. 자유를 얻었다!' 했는데
웬 걸요, 가는 길 앞에 홍해가 딱 가로막고 있습니다.
출애굽해서 나오는 길이 영 형통하지 않습니다.
애굽에서 나와서 제일 처음 만난 것이 홍해입니다. 딱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쩌자고 모세가 이리로 인도한 겁니까?
앞에 홍해가 있는 것을 몰랐던 가요? 알았을 거예요.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홍해 광야 길로 인도 했다'
이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고의적으로 그 길로 인도하신 거예요.
쉽게 말해서, 막다른 골목으로 하나님이 인도하신 겁니다.
그 뿐입니까? 뒤에는 애굽 군대가 맹추격해 옵니다.
바로 왕이 마음이 강퍅해져서, '나가라!' 해 놓고도,
조금 지나서 마음이 강퍅해 진 겁니다.
그럼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 자가 누굽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바로가, 훈련된 군사들을 총 출동시켜서 따라옵니다. 자 어디로 가면 좋겠습니까?
앞에는 홍해가 있고, 뒤에는 애굽 군대가 있습니다. 옆은 절벽입니다.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 신세입니다.
그러니까 이 현실 속에서 '아이고 이제는 다 죽었다.' 그리고 원망을 합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나와서, 여기서 우리를 죽이려느냐?'
하고 모세를 원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이렇게 쉽게 원망 했을까요?
저는 그런 생각을 또 해봐요.
4백 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다가 이제 구원 받았으니,
자유인으로 여기까지 왔거든요. 그럼 크게 감사한 일이죠.
또 하나님이 능력이 함께 하는 걸 확실히 보았거든요. 열가지 재앙을 통해서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저 멀리 보이는 가나안 땅을 너희들에게 주마' 약속해 주셨잖아요.
그리고 오늘 현재 여기서 자유를 누리고 있잖아요.
저는 그런 생각을 해요. '죽어도 좋다. 이제는 노예가 아니고 자유 인으로 죽으니까!'
그러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었을까요?
그러나 그들은 그렇지 못하세요. 현재에 집착했어요. 현실만 생각했어요.
(지금 초점 Focusing 이 잘못되었다는 주제로 설교가 진행되고 있음)
자 애굽 군대가 뒤따라 왔죠.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죠. 피할 데가 없잖아요.
결국 원망하게 됩니다.
이 절박한 현실속에서 절박성에 집착하면 안 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어떤 절박함이든지, 그 절박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되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어야 되고,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깨달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죠.
절박한 현실.. 여기에다 초점을 맞추니까 원망 밖에 없어요.
▲며칠 전에 황해도에서 피난 나온 목사님들과 함께 모여서 점심을 같이 먹었는데
어떤 목사님이 다가 오더니 '이제 저 김정은이 어떻게 될까요?
도대체 이 나라가 어떻게 될까요?'
그래서 내가 '조용하여 하나님 됨을 알라' 그랬어요.
조용하세요. 지금처럼 이렇게 마음이 들끓어서는 안 돼요.
생각의 초점을 어디 두느냐예요.
과거에 두느냐, 미래에 두느냐, 아니면 현재에 두느냐? 이걸 생각해야 합니다.
원망의 이유는 충분히 있습니다.
오늘 당한 사건, 그것만 생각하면 원망할만 합니다.
그 말이 맞아요. '우리를 왜 애굽에서 인도했느냐, 왜 이 광야에서 죽게 만드느냐?'
그 말은 맞는 말이에요.
'애굽에 공동묘지가 없더냐, 왜 우리를 데리고 나와서 여기서 죽이려느냐?'
맞는 얘기예요. 합리적인 얘기죠.
다시 말하면 출애굽 사건의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큰 기적을 잊어버렸어요.
하나님의 은총을 잊어버렸어요.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구속하신, 하나님의 큰 구속의 역사를, 그 과거의 은총을
잊어버리는 순간... 원망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가 하면 오늘의 절박성입니다.
앞에 홍해가 있잖아요. 홍해를 건널 수는 없잖아요.
60만 대중을 데리고 홍해를 건너야 되는데, 배가 한 척도 없잖아요.
뒤에는 애굽 군데가 따라오고 있고... 이제 원망할 수밖에 없죠.
하나님의 약속을 까맣게 잊어 버렸어요. 이제는 절박합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원망했다고요?
첫째,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한 자가 누굽니까?
바로의 마음을 굴복시켜야 되는데,
열 가지 재앙을 통해서도 바로의 마음이 숙여지지 않았습니다.
장자가 죽고, 열 가지 재앙을 내리는 그 큰 사건 속에서도
바로 왕은 더 강퍅해 졌습니다. 점점 더 완악해 졌습니다.
이스라엘 육십만 대중을 내보낸 다음에, 그가 통분해 합니다.
'아니 내가 저 60만 노예를 내보내? 있을 수가 없지' 그리고 잡으러 따라오는 거예요.
자 성경을 말합니다.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 자가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이걸 알아야 돼요. 그 바로의 마음을 그렇게 깜깜하게 만든 자가 하나님이세요.
오늘 우리 주변에도 정치적으로 복잡은 문제가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사건들이 많습니다.
저 사람들을 저렇게 강퍅하게 만든 자가 하나님이시란 말이에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홍해 광야 길로 인도한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나와가지고, 북쪽으로 올라갔다가 동쪽으로 가야 됩니다.
※애굽에서 가난으로 가는 일반적인 경로
1) 지중해변을 따라가는 해변길, 가장 빠른 길입니다.
2) 고센에서 수에즈만의 북단을 거쳐, 시나이 반도의 중앙부를 통과하여
아카바만으로 직행하는 길. (아래 노랑색 선)
위 두 길은 모두, 홍해나 아카바 만을 건널 필요가 없고, 육로임.
그런데 출애굽의 길은, 위와는 전혀 다른,
수에즈만과 아카바만과 평행하여 간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굳이 건널 필요가 없는 홍해를 건넌 것입니다.
홍해 위에 요즘엔 스에즈 운하가 있죠. 옛날엔 그냥 육지 길이에요.
그 길로 가면 됩니다. 위 1)
그런데 왜 홍해 광야 길로, 홍해가 가로막고 있는 그 길로
굳이 육십만 대군을 인도해서 갑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셔서, 그 길로 간 거예요.
출14:2~3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돌이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멀리 떠나 광야에 갇힌 바 되었다 하리라'
이게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곳으로 인도환 자가 하나님이시라는 걸 잊지 말아야 돼요.
모세가 아니에요. 하나님이 홍해 광야 길로 인도 했어요. 출14:2
◑하나님의 섭리에, 내 눈의 초점 focus 을 맞춰야 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근 능력을 보게 하려는' 겁니다.
홍해를 건너가는 기쁨을 누리고,
뿐만 아니라 애굽 군대가 홍해에서 몰살되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셨습니다.
(그걸 깨달았으면, 이스라엘이 불평 원망하지 않았을 거란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다시는 애굽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생각이라도 '애굽으로 돌아가자' 이런 망상을 가지지 못하게 하시려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뜻이었어요.
다시 말합니다. 바로 왕을 강퍅케 만든 것도 하나님이요.
또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홍해까지 오게 한,
이 절박한 데까지 인도한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말이에요.
전부가 하나님의 손에 있고,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던 것이에요.
(그걸 못 보면, 원망 불평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하나님의 큰 구원을 보고,
애굽 군대가 거기서 몰살 되는 걸 보고,
다시는 애굽 생각을 못하게...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는 생각을
꿈에도 못하게 딱 막아놓으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근 구원을 본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절대로 뒤로 돌아가면 안 됩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제 친구 중에 한 사람인데, 황덕윤 목사란 분이 있어요.
아주 드라마틱한 경험을 한 사람이에요.
625 전쟁 때, 북한에서 남한으로 피난민 중에 섞여가지고 도망오다가
인민군들에게 붙들렸어요. 꼼짝 못하게 체포되어서,
이 포로들을 데리고 다닐 수도 없으니까 아예 죽여 버릴 생각이에요.
그래서 구덩이를 파게하고, 포로 된 사람들을 거기다 쭉 세워놓고
총을 쏘려고 하는 순간에, 그 인민군 중에 한 사람이
마지막으로 죽는 시간이니까 '마지막 소원 하나 들어줄게요. 뭐 하고 싶은 말씀 하라오!'그랬어요.
그러니까 황덕윤 청년은 (그때는 아직 목사가 아닙니다)
'내가 장로 아들인데, 내가 여기서 죽는구나!'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동무, 내가 죽기 전에 노래 하나 부르고 죽을라 그럽니다'
'그러라고'
그래서 그 구덩이 파 놓은데 앞에 서 가지고
'하늘 가는 밝은 길이' 그 찬송가를 부른 거예요.
큰 소리로 그 찬송가를 불렀어요.
찬송이 다 끝날 때쯤 되니까, 따따땅 하고 총소리가 났어요.
'아이쿠 난 죽었구나' 넘어져서 가만히 생각하니까 총 맞은 데가 없어요.
그래서 일어났어요. 그런데 보니까 자기가 일어난 게 아니라
자기가 어떤 사람의 등에 업히고 있어요. 그래가지고 남쪽으로 내려옵니다.
그 인민군 중에 한 사람이 장로님 아들이에요.
그런데 황덕윤 청년이 찬송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을 때 감동이 돼가지고
그 옆에 서 있던 인민군을 쏴 버린 거예요.
그리고 그 분을 자기 등에 업고, 같이 남쪽으로 내려왔어요.
제가 그 설교를 열 번도 더 들었어요.
황목사님은, 그저 가는 곳마다 "따다다당 그래서 쓰러졌는데, 보니까 안 죽었더라"
여러분, '그러면 내가 이렇게 어떤 생명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저 하나님을 위해서 일해야지... 그래서 목사가 돼가지고 한 평생 일해야지...'
그래서 황덕윤 목사님은, 남은 평생 목회자로 자신을 헌신했습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전쟁이든지, 현실의 문제든지, 다 절박하죠.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으로 보면, 다 하나님이 하시는 각본,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그 속에 감추어진게 있단 말입니다.
그런 고로 오늘 성경 말씀은 계속 가르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왜요?
'뒤에 하나님이 계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바로 왕을 강퍅하게 한 것도 하나님이시다.
홍해 길로 인도한 것도 하나님이시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여러분 우리 생각의 초점을 어디에다 맞춰야 하겠습니까?
경제 사정, 정치 문제, 세계 정세... 뭐 복잡한 거 많죠. 홍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생각의 초점을 다 하나님께 맡겨야 돼요.
하나님은 그 모든 사건, 사고 속에, 확실하게 그 속에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주님은 모세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출14:13~14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이 조용해져 있습니까? 마음이 들끓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번민하지 마세요. 어떤 사람은 신문보다 말고, 화를 내더라고요.
아닙니다. 초점을 현상에 맞추지 말고, 그 속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뜻에 맞춰보세요.
그러면 화를 낼 일이 아닙니다...
▲제가 한 평생 존경하는 목사님이 한 분 계십니다.
제가 인천에서 14년 동안 사역했는데, 그 교회를 창립하신 분입니다.
이목사님은 사무실에 앉아서 이렇게 신문을 보십니다.
신문에는, 전쟁 뉴스가 있고, 뭐 죄가 있고, 살인이 있고...
그러면 보통 사람은 '이 세상이 왜 이 모양이야? 말세가 되어서 그런가 봐'
뭐 그렇게 얘기하잖아요.
그러나 이목사님께서는 신문을 읽다가, 그 신문을 접어서 들고, 사무실 문을 나가서
교회당으로 들어가요. 본당에 들어가서, 바로 신문을 펼쳐놓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합니까?'
눈물로 기도하는 걸 제가 보았어요.
그 저는 일생 동안 이기훈 목사님, 내가 제일 존경하는 목사님 중에 한 분이에요.
왜요? 기도하는 목사님이에요.
그 문제를, 사람에게 물어선 안 되죠. 하나님께 물어야죠.
신문을 앞에 펴 놓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한 시간 동안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시46:10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Be still, and know that I am God
여러분 신문을 보십니까? 방송을 듣습니까?
'그저 말세가 됐구만' 하는 생각이 나거든, 바로 무릎을 꿇으세요.
그것이 신앙인의 모습이에요.
현상만 보지 말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아야 되니까요.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왕상19:12절에 보면, 엘리야가 아합왕과 대결해서, 갈멜산에서 승리합니다.
그런데 그 뒤에 이세벨과 아합왕이 복수하려고, 엘리야를 죽이려고...
'엘리야를 죽이기 전에는 내가 밥을 안 먹겠다' 막 그러잖아요.
그리고 맹세하고 엘리야를 쳤습니다.
엘리야가 도망했습니다. 저 광야로 도망했을 때, 그때 엘리야가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사람들은 다 죽고 나만 혼자 남았습니다.
이제 그만 살렵니다. 내 영혼을 취해 주시옵소서...'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아, 자세히 봐라.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천명을 내가 남겨 놓았다'
우리가 모르고 있습니다. 어딘가 하나님의 사람들이 칠천 명이 있습니다.
그런 고로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위로하십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어려운 일을 많이 당합니다마는
그 속에 하나님의 귀한 뜻이 있습니다.
▲제가 선교학을 전공 했거든요. 잘 연구해 보면, 놀라운 일이 있답니다.
선교 하는데 제일 어려운 게 뭐냐 하면, 민족 성입니다.
일본은 우리 나라보다 앞서 기독교를 받아들였습니다. 주1)
그런데 교회가 잘 안 됩니다. 교인이 인구 1프로도 안 됩니다. 교회가 부흥되지 않습니다.
왜 일본 교회와 부흥이 안 될까요? 많은 사람들이 연구합니다.
그래서 유명한 책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Stranger in the Land: A Study of the Church in Japan... 라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거기에 결론이 이렇게 나옵니다.
'일본 사람은 기독교를 미국 종교라고 생각해요.
종교를 민족적인 문제로 생각하는 거예요.
일본 사람은 '기독교는 서양종교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미국과 더불어 싸웠다.
그리고 패전했다.' 이런 패전 의식이 있어요.
그러니까 일본 사람은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기독교는 미국 종교이고, 우리는 신도 shintoism 이다.' 라고 생각하는 거죠.
이 민족주의 때문에 일본 선교가 안 됩니다.
그러면 우리 한국은 어떻게 해서 예수를 믿었을까요?
여러분 대단히 죄송합니다만은 625 전쟁 때문이에요.
꽝 하고 전쟁이 터지고 보니까, 어느 사이에서 기독교가 민족 종교가 돼버렸어요.
우리 중에 누구도 기독교를 서양 종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뭐 때문에? 육이오 때문이에요.
육이오 라는 큰 전쟁이 있었으나, 이로 말미암아 기독교가 우리 종교가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순교가 순국이고, 순국이 순교예요. 이제 기가 막힌 겁니다.
이래서 선교의 문이 활짝 열려서, 오늘의 한국 교회가 있는 겁니다.
(이런 포커스, 초점으로 우리가 역사와 기독교를 봐야 됩니다)
생각해 보면, 전쟁이라는 것은,
우리가 모르지만, 그것을 통해서 민족적으로 국가적으로
그리고 우리 개인적으로 주시는 은혜가 너무 많습니다. 너무 놀랍습니다.
▲죄송합니다만은, 고향에서 나온 친구들이 가끔 모이거든요. 모여서 얘기를 하면
'너나 나나 수령님 덕 많이 보았다.' (농담으로)
'그 양반이 아니면 우리가 서울로 왔겠냐? 거기서 소나 몰다가 말았을 텐데...'
여러분, 제가 여기서 목회하고 있습니다만은, 제가 그 고향을 버릴 수 있나요?
그러나 전쟁이 꽝 하고 터지니까, 북한에서 나올 수 밖에요.
그리고 오늘 여러분 앞에 서 있잖아요.
전쟁은 얼마나 큰 사건입니까?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그러나 잊지 마세요. 조용히 들으세요.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조용해야 하나님의 음성과 뜻이 들립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구원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네게 가나안 땅, 약속의 땅을 주었다. 영원한 약속을 주었다.'
거기에다가 초점을 확실하게 초점을 맞추고 살면,
홍해가 가로막고 있어도, 걱정될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문제는 내가 영생에 대하여 초점을 맞췄느냐?
십자가의 확실한 믿음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고 사느냐? 거기에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왜 이렇게 홍해의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으셨냐고요?
출13:17절에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해변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애굽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이 약한 사람들이 (해변길로 갔다가) 전쟁을 만나면
'애굽으로 돌아가자' 할 거니까, 돌아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홍해 길로 오게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보는 초점을 갖자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바로의 군대를 몰살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크신 구원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숨은 뜻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큰 지혜, 하나님의 큰 사랑,
거기에다 초점을 확실하게 맞추면,
우리가 아무리 어두운 곳에 가더라도, 하나도 들어올 것이 없습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시46:10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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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일본의 기독교 전래 시기
1550년 포르투갈 자비에르 선교사가 나가사키 현 히라도를 찾으면서부터
일본에 가톨릭 신앙이 전래되었다.
개신교는 1854년 미일화친조약 체결하고,
1859년 첫 개신교 선교사 입국했다.
1872년 첫 개신교 교회를 설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