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헛되다 전1:1~11 전도서강해1강 2021.09.12.녹취
◑전1: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도자의 말씀이라'
근데 본문이 소개하는 전도자는 어떤 사람인가 하면, 다윗의 아들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왕이다' ... 이렇게 소개를 합니다. 그러면 솔로몬 왕이죠.
다윗의 아들 중에 왕이 된 사람은, 솔로몬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전도자'
성경 다른 곳에서는 쓰여지지 않은 그런 말인데,
이 전도자라는 말은 전도서에 7번 등장합니다.
히브리어로 '코헬렛' 입니다.
전도자는 히브리어로 '코헬렛' 입니다.
이 단어는 기억을 하시면 좋겠습니다.
이 단어는 '카할' (모으다 to assemble, to summon)라는 동사에서 왔습니다.
-1차적인 뜻은 '모인 사람들, 회중의 연사'입니다.
회중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연사가 되어서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2차적인 뜻은 '지식과 정보를 모으는 사람' 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코헬렛을 여러 가지 말로 번역하는데,
NIV는 Teacher
KJV, NASB는 Preacher
우리 말 성경은 '전도자' 또는 '설교자'로 번역하죠.
전도서를 보면 앞으로 자주 발견하는 표현이
'내가 보니' 라는 표현이 많이 등장을 합니다.
이스라엘의 왕, 지도자로서 그가 보고, 경험하고,
또 거기에서 깊이 숙고해서 깨닫게 된 것을,
하나님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것이죠.
특별히 내용이 뭔가 하면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것이 전도서의 말씀입니다.
자 그래서 1절은. 저자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그는 전도자다. 회중 가운데서 말씀을 가르치고.
또 지혜와 지식을 잘 축적하고 숙고해서 백성들에게 알려주는 사람이다.'
이렇게 기억하시고 2절로 넘어갑니다.
◑1:2절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2절은, 전도서 전체의 주제가 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게 우리말 번역은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로 되어 있는데,
원래 히브리 원어나 대부분 영어 번역을 보면 '헛된 것들 중의 헛된 것' Vanity of vanities
즉 최상급을 표현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최고로 헛되다'
이렇게 이 전도자는 선언합니다.
NIV은 '헛되다'를 meaningless '의미 없다. 무의미하다'라고 번역하기도 하고
또 다른 영어번역들은 vanity 라고 해서 '헛되다, 텅 비었다, 허무하다'는 걸 강조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전도서를 이해하려면,
이 '헛되다'라는 단어가 담고 있는 뜻이 무엇인가를 처음부터 정리를 잘 해야,
앞으로 전도서를 잘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헛되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헤벨' 입니다.
1) 이 단어의 원래 뜻은 뭔가 하면 '호흡 breath, 수증기' 입니다.
훅 하고 사람이 숨 쉬고 호흡하는 거, 또는 입으로 훅 내불면, 수증기가 나오죠.
그것이 바로 헤벨입니다. 그러면 어떤 뜻을 담고 있겠습니까?
'일시적, 이라는 거죠. 금방 있다가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헛되다'라는 말은, 원어적으로 '일시적이다. 짧다. 금방 사라진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아담의 아들 아벨의 히브리어가 '헤벨'입니다.
2) 또 하나의 뜻은 뭔고 하면 '수수께끼 같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그래서 전도서를 계속 살피다 보면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과 같다'라는 표현이 계속 이어집니다.
여러분 '바람을 잡는다' 이거는 '헛수고다'라는 뜻도 되지만,
붙잡을 수가 없죠. 이해할 수가 없다. 이거는 수수께끼 같다 라는 뜻입니다.
3) 세 번째 의미는 '부조리하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전도서를 쭉 살피다 보면, 지금 우리도 경험하고 있는 사회속의
많은 부조리들을 앞으로 언급할 겁니다.
그러면서 '헛되고 헛되다'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전도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1~11절까지 서론입니다. *오늘 본문
1:12~12:7절까지 본론입니다.
'도대체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삶의 참된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내용이죠.
12:8~12:14(끝)절까지가 결론입니다.
서론이 시작하는 1:2절도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로 시작했는데
결론이 시작하는 12:8절도 전도자가 이야기합니다.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렇게 서론과 결론이 같은 말이죠.
'모든 것이 헛되다'는 말이 전도서의 시작과 끝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게 전도서의 주제죠!
하나님과 관계된 일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일은 헛되다, 의미 없다는 것입니다.
▲2주 전에 김희석 교수님 (총신대 구약학)이 저희 교회에 오셔서
순장님들을 대상으로 전도서에 대해서 개요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분은 <전도서>를 전공하신 분이시니까, 조금 더 명확하게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헛되다'라는 표현의 가장 지배적인 뜻은
'일시적이다. 짧다'인데, 그 배경이 뭐냐?
'항상 죽음'이라는 거죠.
여러분, 인생은 죽음 앞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헛되다' 라는 말 속에는,
'죽음 앞에 선 인생은, 짧고 일시적이고 금방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즉 '헛되다'는 말 속에는 무엇이 담겨져 있느냐?
'우리는 곧 죽는다'는 거죠.
그래서 1:2절에 나온 표현은 이것과 연관이 됩니다.
그런데 결론 12:8절에 '헛되다' 라는 말 다음에는 무엇이 이어지느냐?
'하나님이 심판하신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이 심판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우리는 서게 됩니다.
우리는 내 인생의 모든 것을 가져갑니다. 바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으로!
이게 전도서의 시작과 끝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이 땅을 사는 동안 우리는 무엇을 해야 되나?
하나님 앞에, 다시 만날 하나님 앞에 선물보따리를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선물 보따리뿐만 아니라, 이야기 보따리를 준비하는 시간이
바로 이 땅을 사는 삶이라는 겁니다.
◑1:3절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2절이 전체 주제라면,
3절부터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는데, 3절은 질문을 던집니다.
여기서 '유익 profit'이라는 말은, 원래 장사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예이트론'이라는 말인데, 무엇이 도대체 남는 거냐?
즉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가운데 도대체 무엇이 남는 것이냐?'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여기에 '수고'라는 표현은, '일 work'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수고 labor'라고 표현했어요.
'아말'이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노동의 어두운 부분'을 뜻합니다.
여러분 일한다, 노동하는 것에 정말 긍정적인 부분도 있지만, 어두운 부분이 있죠.
무엇이죠? 고됩니다. 또 노동, 수고 속에는 투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서 1장, 또는 전도서 전체에서
'헛되다'라는 것에 보이지 않는 배경 화면이 무엇이냐?
창3:17~19절에,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고 나서 특별히 하나님의 아담을 저주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얻을 것이다.
너는 어떻게 되느냐? 흙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사람이 타락하고 나서 예외 없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사람들의 노동 현장에는 무엇이 있느냐?
땅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거기는 가시와 엉겅퀴와의 투쟁이 있습니다.
그 속에 사람은 땀을 흘리고, 고된 수고를 감당하며 결국 어디를 향해 가느냐?
죽음을 향해 갑니다.
여러분 이것을 배경으로, 지금 전도서는 기록이 되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1:3절에서 이야기 하시죠.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정말 고되고 거기에는 치열한 투쟁이 있는 그 모든 수고를 통해서,
도대체 남는 것이 무엇인가?' (그래서 헛되다)
여기서 던지는 질문에, 결국 기대하는 답은 뭔가 하면
'아무런 유익은 없다'는 것입니다.
아마 지금 여러분들 중에도 이런 분들이 계실 것 같아요.
'내가 하는 수고를 통해, 역사에 영원한 흔적을 남길 것이다.
나는 내가 하는 수고, 우리 가정이 진보하기 위해서, 또 공동체가 진보하기 위해서,
우리 나라가 진보하기 위해서, 나는 영원한 족적을 남길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남길 수 있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솔로몬이 질문하고 있습니다.
'해 아래 사는 모든 수고를 통해서, 도대체 무엇을 우리가 얻을 수 있는가?' (헛되다)
여기 '해 아래'라는 표현은 보통 두 가지로 해석하는데
-과거의 전통적으로 해석으로는 '하나님을 배제한 세상'입니다.
하나님을 배제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해 아래에' 라고 표현을 했죠.
-요즘은 '해 아래서' 라는 말은, '해 아래서 펼쳐지는 모든 삶'을 뜻합니다.
저는 후자 쪽에 동의합니다.
'해 아래서 펼쳐지는 모든 수고를 살펴봐라.
그 수고들 중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그런 영원한 유익을, 과연 남길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을 3절은 던지게 됩니다.
그리고 4~11절까지 말씀을 통해,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합니다.
부정적인 답변이죠.
여러분, 무엇인가 영원히 남길 수 있는,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4~11절까지 말씀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4~8절까지는 먼저 자연 만물을 관찰하면서, 전도자가 깨닫게 된 통찰력을
우리에게 제시해 줍니다.
-9~11절까지는 인간사 입니다.
인간사를 깊이 살핀 후에 전도자가 던지는 도전이 9~11절까지 나와 있습니다.
◑1:4절,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영원한 흔적을 남길 수 있다. 영원한 유익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먼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여러분 영원히 있는 것은 무엇이죠? 땅입니다.
세대는 영원히 있지 않습니다. 한 세대는 가고, 또 한 세대는 옵니다.
'세대'라는 말은 사람들입니다.
한 세대가 30년을 뜻하냐, 40년을 뜻하냐?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사람의 생존 기간,
그 생존 기간에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세대'라는 표현을 쓰죠.
지금 여기 앉아 계신 분들은 모두 '한 세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같이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 한 세대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옵니다. 이것은 무엇이죠?
'어떤 세대라도 영원한 주인공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지나 갈 뿐입니다.
여러분 영원히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고 땅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이거는 뭐 무서운 말씀이죠.
누구도 영원한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5~7절까지는, 사람은 유한하지만 땅은 영원히 있습니다.
그 땅과 같이 영원히 있는 것들이 있죠.
예를 들면 해가 영원히 있습니다.
또 바람 시작도, 처음부터 끝까지.. 지금도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강물은 지금도 바다를 향해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 자연 만물 세 가지를 관찰하면서, 여러분 '우리들의 삶이, 우리들의 수고가
영원한 가치를 가질 수 있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도전하는 거죠.
◑1:5절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해는 하루도 빠짐없이 떠서 지는 이 고된 수고를 감당하지만,
끝내놓고 나면 어떻게 됩니까?
다시 돌아가서 처음부터 뜨고 지는 일을 끝없이 반복하죠. *그당시 과학 지식에 의하면 그렇죠.
◑1:6절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바람도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갑니다. 바람은 이 방향 저 방향 돌지만
결국은 그 출발점으로 돌아가서, 또 다시 끝없이 순환과 반복을 계속하고 있다는 거죠.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돌아가고' 입니다.
히브리어로 '슈브'인데,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는 의미로, '슈브 기도회'로 모인 적도 있었습니다)
바람은, 고된 수고 후에, 처음 불던 곳으로, 출발점으로 돌아갑니다.
◑1:7절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흘러갑니다. 그런데 두 가지를 지적합니다.
-바다로 흘러가는데 바다를 채우지 못합니다. 이것은 결국 무슨 뜻이냐?
최종적인 목적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고된 수고를 해서 강물은 흘러가지만, 바다가 채워지지 않는다는 거죠.
여러분 강물이 더 이상 흐를 필요가 없을만큼, 바다가 채워지는 적이 없다는 겁니다.
-또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여기 '흐른다'가 '슈브' 입니다. '돌아간다'죠.
강물이 그 출발점으로, 그 물이 나왔던 곳으로 다시금 돌아갑니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하면 대기와 수분이 순환되는 거죠.
그래서 강물이 흘러서 바다로 가고, 그 물은 다시금 수증기로 바뀌어서
원래 그 출발점으로 돌아가는 거죠.
여러분 지금 전도사가 이야기합니다. '해, 바람, 강물을 보십시오. 공통점은 무엇이냐?
그들은 한순간도 빠짐없이, 하루도 빠짐없이 고된 수고를 합니다.
그렇지만 그 고된 수고를 통해서, 영원한 의미가 있는 새로운 일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는 일은 단순히 순환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게 어떤 새로운 것, 그 반복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새로운 것들이
그 속에 보이지 않습니다.'
또 하나는 무엇이냐? 강물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최종적인 목적에 그들은 도달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자연 만물을 관찰했을 때, 바로 이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거죠.
여러분 영원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땅이 영원한데
그 땅은 지금 어떤 상태냐? 그들은 고된 수고를 반복합니다.
그러나 그 고된 수고를 통해, 새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반복 순환되고 있고, 최종적인 목적에 그들은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8절 말씀에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4~7절의 결론입니다.
◑1:8절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4~7절까지의 결론은 '모든 만물은 피곤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우리들의 삶이 이렇게 피곤합니까? 이유가 무엇이죠?
여러분 고되지만, 그것이 반복 순환되고 있고, 최종적인 목적을 채우지를 못하니까
우리들의 모든 수고는 '피곤한' 겁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지금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달을 보고, 바람을 보고, 바다로 흐르는 강물을 볼 때
우리들의 삶과 공통점이 무엇이죠?
우리들의 삶도 많은 경우,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처럼, 끊임없이 반복 순환되고 있습니다.
저도 제 자신의 삶을 돌아보더라도,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월요일에 하는 일, 화요일에 하는 일, 금요일과 토요일에 하는 일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또 하나 분명한 것은, 최종적인 목적, 영원히 남을 수 있는 가치에
우리는 도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일의 특징, 주의 일은 제외)
그러니까 만물은 피곤합니다.
고된 수고, 반복 순환... 그렇지만 최종적인 목적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8절 후반부 부터는 인간사에 초점을 맞춥니다.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않는다.' :8b
여러분 여기 귀와 눈은 무엇이겠습니까?
전도자가 지금 인생의 참된 의미를 찾아 탐구하고 있는데,
눈은 무엇이겠습니까? 눈앞에 펼쳐지는 많은 일들이죠.
눈앞에서 펼쳐지는 그 일들 중에, 여러분 눈을 만족케 해줄 수 있는게 없습니다.
귀는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이 제시하는 답변입니다.
세상이 가르치는 탁월한 가르침들... 아무리 탁월한 가르침을 들어도
우리 귀는 차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눈은, 아무리 보아도
그것이 감각적인 것이든, 아니면 인생의 지혜와 관계되는 것이든... 만족함이 없습니다.
귀는 우리가 정말 아무리 들어도, 아무리 탁월한 강의를 들어도
우리로 하여금 최종적인 만족에 도달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사를 뜻함, 복음 제외)
마치 바다를 채우지 못하는 강물처럼,
우리는 역사의 바다를 채울 수 있는, 그런 귀와 눈을 가질 수가 없다는 거죠.
그래서 사람은 만족이 없습니다.
지적으로도 결코 만족할 수 없고, 또 감각적으로도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1:9절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9절에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세 가지를 지적합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은, 과거의 사람들이 한 것을 반복하는 것이고,
미래 일은 무엇이냐? 과거와 현재의 반복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부정적으로 표현합니다. 9b절 '해 아래에는 새것이 없습니다.'
◑1:10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9절 후반부와 10절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입니까? 새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표현은, 지금 과학적인 발명품,
솔로몬이 살던 때는, 오늘날과 같은 컴퓨터, 휴대폰이 없었죠.
이 구절은, 새로운 과학의 발명품을 거부,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새것'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어떤 새로운 강물도 바다를 채우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의 행위와 업적 중에서, 인간에게 최종적인 유익과 만족을 줄 수 있는 새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만든 어떤 행위와 업적을 통해서
인간에게 최종적인 유익과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저는 대학을 다닐 때 물리학을 조금 공부했는데,
물리학 공부를 하면서 한 번씩 허무했던 순간은 무엇이냐?
여러분 아인슈타인 같은 분이 정말 상대성 원리 같은 탁월한 이론을 발견했는데,
결국 그 이론이 원자핵폭탄을 만드는데 사용되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그거는 참 충격이죠. 그래서 물리학과 학생들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물리학의 꽃은 무기다' 라고 표현을 해요.
물리학이 가장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는 영역은 어디냐? 전쟁을 위한 무기의 영역입니다.
여러분 지금 AI 라든가, 아니면 지금 SNS 라든가,
이런 대중매체들이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어떠신가요? 생활이 정말 편리해졌죠.
저도 이번에 집사람이 생일이라서, 애들이 졸라서 로봇청소기를 하나 사서 선물했어요.
그러니까 정말 삶이 편리해졌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미래가 낙관적인가요?
저도 가면 갈수록 이제 무서워집니다. 세상의 끝이, 과학의 끝이 어디로 갈 건가?
요즘 나오는 미래에 대한 영화를 보면, AI를 통해서 결국은 인간이 철저한 통제를 받고
(AI를 조정하는) 소수의 악한 사람들에게, 만약 이 세계가 종으로 놓이게 된다면
어떤 극단적인 불행이 이 땅 가운데 일어날 것인가요?
여러분, 본문은 이야기합니다.
아무리 새로운 발명품을 만들어 내어도,
인간에게 참된 자유와, 인간의 마음에 그 목적들을 근본적으로 채워줄 수 있는
새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1:10절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
한마디로 '기억됨이 없으리라'
영원히 기억될 수 있는 그런 족적을 남길 것이다 라는 것은 허상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도 기억하지를 않습니다. *세상적인 일을 말하는 겁니다. 주의 일 제외.
저도 그래서 '10년 전에 무슨 일이 생겼나?'
그냥 한번 생각이 들어서 '2011년에 10대 뉴스는 무엇이었나?' 한번 살펴 보니까
여러분이 이 스포츠에 그때 축구에 무슨 조작 사건이 있었더라고요.
제일 큰 뉴스는 10년 전에 김정일이 죽었습니다.
또 하나 10년 전에 박원순 씨가 서울시장이 됐더라고요. *2021년 설교
그러니까 제가 이렇게 한번 조금 전율이 느껴졌어요.
10년 전에, 그때 참 이렇게 사람들에게 영웅으로 떠올랐던 사람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족적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은 허상이라는 거죠.
지금까지 말씀을 정리를 하면, 전도자는 이야기했습니다.
'모든 것이 최고로 헛됩니다.' *헛되고 헛되다'의 원래 뜻
앞으로 우리는 살펴보게 될 겁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의 삶은, 일시적이고 찰나와 같습니다.
왜냐면 숨과, 호흡과, 수증기에 불과한 것이 인생입니다. *'헛되다'의 문자적 뜻
또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이해 안 되는 수수께끼 같은 일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부조리한 것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모든 것은 헛됩니다.
여러분,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수고를 한번 살펴보십시오.
영원히 남을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자연을 잘 한번 관찰해 보시죠.
영원한 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땅이 영원합니다.
그런데 그 영원한 만물도, 반복과 순환에 빠져 있고, 그들은 어떻습니까?
반복과 순환에 빠져 있을뿐만 아니라, 최종적인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고,
피곤에 매여져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들의 삶과 같지 않습니까?
또 전도자는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이 환호하는 그 새로운 뉴스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탁월한 가르침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눈앞에 펼쳐지는 놀라운 일들을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여러분들 마음에 참된 만족을 줄 수 있습니까?
그것 역시도 역사의 바다를 채울 수 없는, 한 순간의 강물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은, 과거의 반복입니다.
제가 최근에 어떤 글을 읽다 보니까 이런 표현이 있더라고요.
'셰익스피어도 그 시대에 휴대폰을 가졌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소위 '소통의 혁신'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셰익스피어 같은 인물도, 그 시대의 사람들도
우리 시대의 휴대폰에 비견할 수 있는 그런 소통의 혁명들을
그 당시 사람들도, 모양은 다르지만, 갖고 있었다는 거죠.
여러분, 어떤 새것도, 인간을 최종적으로 만족시킬 수는 없고,
우리는 잊혀지게 됩니다.
◑적용
저는 <전도서> 말씀을 제가 30살이었을 때,
제가 난지도에서 사역할 때, 이 말씀을 스스로 공부를 했어요. *빈민 선교
제가 난지도에서 쓰레기 분리수거하는 빈민 분들과 함께 사역을 하면서
제가 세 가지 말씀을 공부를 했습니다.
첫 번째는 야고보서, 두 번째가 전도서, 세 번째가 로마서였습니다.
근데 저는 이 전도서를 공부하면서, 가장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 당시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면서,
그래도 (제가) '이 역사에 영원한 족적을 한번 남길 수 있는
그런 사역자가 될 수 없을까?' 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막연한 기대를, 산산조각 낸 말씀이 바로 이 전도서 였습니다.
저는 비로소 '나는 영원한 족적을 남길 수 있는 하나님 같은 존재가 아니고,
영원하신 하나님이 짧은 한 순간을 (제게) 맡긴, 유한한 인생에 불과하다' 라는 것을
저는 냉정하게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저는 전도서 공부를 통해서 '너무 큰 기대를 갖지 않을 뿐더러
이제는 절망하지도 않을 수 있는,
주어진 오늘 하루하루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가?' 하는 것들을
제가 깊이 깨닫게 되면서
아마 제 삶을 한번 이렇게, 하나님과 같은 생각이 아니라,
바로 '유한한 피조물'이라는 저의 자리를 다시 되찾도록 도와준 것이
이 전도서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두 구절만 소개하고 마치겠는데
앞으로 여러분이 전도서를 계속 공부해 나가시면서,
이 두 구절은 꼭 마음에 기억하셔야 됩니다.
1) 첫 번째는 고린도후서 5장 17절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전도서에는 '새것이 없다'고 이야기했는데
반대로 여기에는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여러분 왜 새것이 없었습니까? 거기에는 죽음이 있습니다.
죽음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느냐? 죄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허무에 굴복하고 있는,
허무한 삶을 살고 있는 인생들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무엇을 하셨느냐? 죄를 죽여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
우리를 죽음으로 몰고 가고 있는, 죄를 죽여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죠.
그 예수님의 부활은 무엇을 나타내느냐?
하나님은 죽음을 죽여 버리셨습니다.
죄를 죽이시고 죽음을 죽여 버리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느냐?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일시적인 삶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영원한 삶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복음이죠.
그래서 나는 누구냐? 우리는 그 가치를 지금 다 알지 못하지만
바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목적에,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뭔가 하면 '새 것, 새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인생에게 꿈꾸셨던 최종적인 꿈이 이루어진 것이
바로 고전5:17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입니다.
2) 또 한 구절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전도서에는 '모든 것이 헛되다'고 했는데, 헛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위 구절이죠.
저는 전도서를 공부하면서 제가 받았던 최고의 축복은 무엇이냐?
여러분 영원한 것은, 내가 모은 재산도 아니고, 내가 이루었던 업적도 아닙니다.
여러분 내가 했던 어떤 위대한 업적도, 영원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 영원한 것은 무엇인가요?
영원하신 하나님과 관계된 것,
그 영원하신 하나님과 관계된 것만이 영원히 존재하고, 영원히 기억되고,
영원한 가치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 땅에 부, 사람들 앞에서 행했던 놀라운 일들이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영원하신 하나님과, 영원하신 하나님과 관련되어서
작은 소자에게 물 한 그릇 대접한 것까지도, 주님은 다 기억하고 계시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땅에서 흘렸던 모든 눈물들은
우리가 영원하신 하나님과 나눌 수 있는 영원한 이야기 거리가 될 수 있죠.
△저는 제가 캐나다에 유학 가서 잊을 수 없는 충격이,
제가 한국에서 신학교 다닐 때 '공부 좀 한다면 저런 책은 들고 다녀야 돼!' 하는
저자들이 있었습니다. 유명한 외국 신학자들이죠.
그런 책을 들고 다녀야, '저 친구, 신학공부 좀 하네' 이렇게 이야기를 해줬어요.
근데 제가 신학교를 졸업한지 15년 정도 지나서 캐나다로 유학을 갔는데,
그 유학간 학교 도서관에 새로운 새 책들이 계속 들어오니까, 오래된 책들은 폐기처분하잖아요.
그 (신학교 도서관에서) 폐기 처분되는 그 책 무더기 속에
제가 과거에 들고 다니면서 폼 잡았던 책들이 거기 몇 권 있더라고요.
'야, 우리 시대에는 그래도 저 사람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은 위대한 신학자인 줄 알았는데..'
한 20~30년 지나고 나니까, 그의 저서도 폐기처분되는...
아무도 거들떠 보지도 않는... (왜냐면 새 저자, 새 책이 자꾸 나오니까요.
과거 책을 바탕으로 해서, 새롭게 더 잘 쓴 책들이 자꾸 나오니까요. 해 아래 새 것이 없는 거죠.)
여러분 이것이 바로 인생이죠.
여러분, 영원한 것은 우리가 모은 재산,
우리가 이루었던 업적들이 영원히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과 관계해서, 그분을 사랑하고 신뢰하면서 행했던 모든 일들만이
영원한 가치를 갖고 기억되는 겁니다.
이 땅에서 사는 삶은... 모든 것을 놓고 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헌신했던 모든 것을 가지고 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무엇을 해야 되나요?
영원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 보따리,
영원하신 하나님과 함께 나눌 이야기 보따리를 준비하는 시간이
바로 이 땅에서의 성도의 삶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혹시라도 마음이 높아지신 분이 있다면
여러분 우리는 다 놓고 갑니다. 여러분 너무 그렇게 폼 잡으실 필요 없어요.
여러분 혹시 사는게 너무 힘드신 분들이 있습니다. 조금만 더 버티시면 돼요.
조금만 더 버티시면, 우리가 고생하며 흘렸던 눈물,
그러나 끝까지 주님을 붙잡았던 그 모든 삶은,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빛날 이야기 거리가 되어서,
보석 같은 이야기 거리가 되어서, 우리들의 삶은 영원한 가치를 가시게 될 겁니다.
여러분, 저희들이 청년 때 가장 많이 반복했던 슬로건이 있습니다.
'한 번뿐인 인생 속히 지나가리라. 그리스도를 위한 일만이 영원하리라'
이건 교회 일만 하라는 게 아닙니다. 일터에서나 가정에서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신뢰함으로 행했던 모든 일들은, 영원한 가치를 가집니다.
영원히 헛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같이 '해 아래 새것이 없나니' 부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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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배고프다 (이건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여러 사람들이 방송매체에서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고 했습니다.
경쟁 사회에서 늘 배고프기 마련이지요.
먹어도 먹어도 허기지기에 먹을거리를 찾는 싸움에 뛰어듭니다.
자리, 재물, 사람, 능력에 정력을 쏟아 붓습니다.
아무리 이겨도, 쌓아도, 모아도 헛된 일임을..
머리로는 알지만, 몸은 그쪽으로만 가고 있습니다.
마음이 욕심과 욕망으로 꽉 차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온갖 탐욕을 경계하고 주의하라” 하십니다.
‘텅빈 충만’이란 말이 있듯이,
마음을 비워 주님으로 채우는 사람만이, 탐욕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만이 하나님의 넉넉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충만히 살 수 있습니다.
참된 신앙인은
‘아직도 배고프다’가 아니라
‘언제나 배부르다’로 날마다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주님 안에서, 그런 만족을 매일 누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