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1 06 / 사도행전 강해 (46) / 헤롯의 죽음 - YouTube
◈헤롯의 죽음 행12:20~25
◑본문 해석
사도행전 12장은 예루살렘 교회가 받는 핍박을 다룹니다.
그 핍박의 중심에는 헤롯이라는 왕이 있습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
이 헤롯의 핍박으로 두 명의 사도가 피해를 당합니다.
한 명은 야고보 사도였죠. 야고보 사도가 열두 사도 가운데 처음으로 순교를 당합니다.
또 다른 한 명은 베드로 사도였죠.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간섭하심으로 살아나왔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탈옥한 지 어느새 1년이 지났습니다.
1년쯤 지났을 때,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납니다. 바로 헤롯 왕이 죽습니다.
그 헤롯의 죽음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먼저 헤롯이 죽게 된 배경이 있습니다.
12:19절 '헤롯이 그를 찾아도 보지 못하매 파수꾼들을 심문하고 죽이라 명하니라
헤롯이 유대를 떠나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머무니라'
헤롯이 유대에 있다가 가이사랴로 내려가 머뭅니다.
가이샤라는요. 헤롯 아그립바 1세의 할아버지인 헤롯 대왕이 만든 도시입니다.
원래 이 곳은 굉장히 낙후된 낡은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헤롯 대왕이 로마 황제의 마음을 사기 위해 이 도시를 재건했습니다.
도시 전체를 화려하게 로마 스타일로 리모델링을 했습니다. *헤롯대왕은 별명이 '건축왕'
완전히 새 도시로 만들고 나서, 로마 황제인 가이사에게 바쳤습니다.
그래서 도시 이름을, 가이사랴로 새로 지었던 것입니다.
로마 황제 가이사의 이름을 따서 가이사랴로 지어서 황제에게 바친 거죠.
한마디로 헤롯 대왕이 가이사랴를 지은 이유가 무엇이죠?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아부하기 위해서 지었던 도시입니다.
나중에 이 도시는, 유대 지역을 다스리는 로마 총독부가 들어서고,
로마 총독이 상주하는 본거지 도시가 됩니다.
이 가이사랴로 헤롯 왕이 내려갑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 당시 유대의 왕
그런데 이 가이사라에서 사건이 터집니다.
12:20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니
그들의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먹는 까닭에 한마음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설득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
두로와 시돈은 오늘날의 레바논 지역입니다.
이 두 도시는, 구약성경 때부터 나오는 유명한 무역도시, 항구도시입니다.
그래서 고대의 항구도시는 부유하기 마련입니다.
모든 자원과 재화가 항구로 들어오지 않습니까?
항구를 통해서 많은 물자들이 오갑니다. 그러니 당연히 부가 쌓이고요. 상업도 발전했죠.
옛적부터 모든 것이 풍요했던 도시입니다.
그런데 이 도시에 약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도시들은 곡창지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식량이 항상 부족했습니다. 식량이 자체로 보급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식량은 유대에서 무역으로 사먹어야 했습니다.
특별히 가까운 유대의 갈릴리 지역에서 수입해야 했습니다.
제가 성지탐사를 갔었는데요. 유대의 갈릴리 지역이요 곡창지대인데
굉장히 비옥한 땅입니다. 유대의 최대 곡창지 이스르엘 평야가 거기 근처에 있습니다.
여기서 나는 양식으로 이스라엘 전부를 먹이고도 수출할 수 있을 정도로 굉장히 비옥한 땅입니다.
두로와 시돈은 그 비옥한 땅에서 나오는 곡식을 수입해서 먹어야 했습니다.
여러분 이 증거가 성경에도 나옵니다.
왕상5장에 보면, 솔로몬 왕이 성전을 건축합니다.
그때 성전 건축에 필요한 백향목을 수입한 곳이 두로 였습니다.
솔로몬 왕이 두로왕 히람에게 부탁했습니다.
'성전을 건축하는데 필요한 레바논 백항목 나무를 좀 보내주십시오'
그러자 두로왕 히람이 좋다고 말하면서, 솔로몬에게 보상으로 요구한 게 있습니다.
바로 식량이었습니다.
왕상5:10~11 '솔로몬의 모든 원대로 (두로 왕이) 백향목 재목과 잣나무 재목을 주매
솔로몬이 히람에게 그의 궁정의 음식물로 밀 이만 고르와 맑은 기름 이십 고르를 주고 해마다 그와 같이 주었더라'
두로와 시돈은 자체적으로 식량이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식량을 (가장 가까운) 유대 왕국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유대 왕국을 다스리는 왕이 누구이죠? 바로 헤롯 왕이었습니다.
헤롯 왕이 식량 공급권을 딱 쥐고 있는 거죠.
그런데 헤롯 왕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에게 단단히 지금 화가 나 있습니다. :20
왜 대단히 노여워했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성경에 이유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헤롯이 식량 공급을 끊어버렸습니다.
두루와 시돈에 공급되는 유대 지방의 곡식들을 하루아침에 끊었습니다.
수출을 막은 거죠.
그럼 두로와 시돈은, 다른 외국에서 식량을 수입해야 했었는데,
그러면 물류비용 등을 고려할 때, 가격이 아주 비샀겠죠.
▲그래서 급하게 헤롯 왕에게 사절단을 보냅니다. 화친을 청하는 거죠.
그 방법으로 헤롯 왕의 침소를 맡은 불라스도라는 사람을 찾아갑니다. :20
'왕의 침소를 맡은' 자이면, 이불을 갈아주는 사람인가? 대체 뭐하는 사람인가요?
우리에겐 굉장히 생소한 직책입니다.
제가 주석을 찾아보니까, 이 '침실 시종'은 왕의 개인적인 수석보좌관이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이 당시에 경호대장의 역할도 겸했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헤롯 왕의 최측근이었겠죠.
그래서 이 사람의 중재를 통해서, 헤롯과의 갈등을 풀려고 했습니다.
그래야 식량을 다시 수입할 수 있으니까요.
중재가 잘 되었고, 협상이 잘 끝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헤롯이 날을 택해서, 협상 결과를 백성들에게 발표하려 했습니다.
그 발표 현장을 21절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2:21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차려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들 앞에서 연설을 시작습니다.
그 연설을 들은 백성들의 반응이 22절에 나옵니다.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22
이 당시에 유대인 역사가였던 요세푸스는 <유대 고대사>라는 책에서
이 장면을 자사히 묘사했습니다.
「행사 둘째 날 이른 아침에 그(헤롯)는 정말 기이하게
통째로 은으로 직조된 의복을 입고 극장에 들어섰다. *야외극장
마침 의복의 은이 햇빛에 반사되어 영롱한 빛을 발했는데
그 반짝이는 모양이 어찌나 신기하고 찬란하던지
그를 바라보던 이들은 일순간 겁에 질렸다.
그때부터 이 아첨꾼들은 여기저기서 그가 신이라고 외치며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지금까지는 우리가 왕을 인간으로만 공경했으나
이제부터는 불멸의 신으로 우르러 보겠나이다."
그런데도 왕은 그들을 책망하거나, 그러한 불경한 아첨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리스-로마 문화에는 반신반인 半神半人 사상이 있어서,
사람을 신으로 높이는 것을 그렇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이 당시 요세푸스가 오늘 본문과 거의 유사하게 이 장면을 자세하게 지금 풀어내고 있는 거죠.
여기서 요세푸스는 이들의 반응을 '아첨'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의 찬사는 사실 영혼이 없는 찬사인 거죠.
진심이 1도 담겨 있지 않았습니다. 말 그대로 아첨이었습니다.
그 아첨꾼들 속에는, 두로에서 온 사신들도 한 몫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떻게든 헤롯 왕의 마음을 풀어야 하니까요.
그래야 다시 식량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그들은 자신들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아부한 것입니다.
아부도 보통 아부가 아니죠. 지상 최고의 아첨을 떨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아첨을 받는 헤롯의 반응이었습니다.
자기를 신처럼 떠받드는 칭송을 그냥 그대로 취했습니다.
인간이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자기의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헤롯을 치십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으로는 '주의 사자가 곧 헤롯을 쳤다'고 말합니다.
벌레에게 먹혀 죽게 하십니다.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23
그런데 이 장면을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수백마리의 벌레 떼들이 갑자기 헤롯에게 붙어서 헤롯을 뜯어먹었다는게 아닙니다.
헤롯의 몸에 바퀴벌레들이 올라가는 그런 장면을 상상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 '벌레'라는 단어가, 사실 번역이 좀 쉽지 않아요.
헬라어로는 '스콜렉스'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가 신구약 전체에서 딱 한 번 여기서만 나옵니다.
그래서 이 벌레가 어떤 벌레인지는 정확히 잘 모릅니다.
의사들마저도 다 진단이 다릅니다.
어떤 학자는 회충이라고 말합니다. 큰 회충이 장 속에 들어가서, 헤롯이 죽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또 어떤 학자는 세균이라고 말합니다. 급성 세균 감염으로 죽게 되었다는 진단도 있습니다.
기생충인지 세균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확실한 건 벌레가 밖에서 물어뜯어 먹은 게 아닙니다. 속에서 죽인 거죠.
이 장면도, 요세푸스의 도움을 받으면 훨씬 이해가 쉽습니다.
요세푸스가 쓴 <유대 고대사>라는 책에 보면,
그 당시 헤롯이 벌레에 죽어가는 장면이 자세히 소개되고 있습니다.
「연설하고 있던 헤롯 아그립바는 배가 심하게 아파옴을 느꼈다.
이것은 극심한 통증으로 변하였다.
아그립바는 재빨리 궁궐 안으로 옮겨졌고,
그는 5일 동안 극심한 통증으로 고생하다가 바로 죽었다.
그의 나이 54세였고, 왕좌에 오른 지 7년째였다.」
그런데 이 사건을 오늘 본문은 굉장히 심플하게 말합니다.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라고 말합니다.
여기 주의 사자는, 베드로를 감옥에서 구해낸 그 '주의 사자'를 말합니다.
그 주의 사자가, 이번에는 헤롯을 쳤습니다. 하나님이 헤롯을 심판한 것입니다.
이렇게 누가는, 헤롯의 죽음을 설명합니다.
◑헤롯의 죽음의 교훈
그런데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헤롯의 죽음으로 오늘 본문을 끝내지 않습니다.
두 개의 구절을 덧붙이고 있는데요. 24절과, 25절입니다.
12:24절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24절 먼저 설명하고, 25절은 아래에 설명)
여러분, 지금 누가는, 이 두 개의 그림을 대조하는 것입니다.
헤롯의 죽음과, 하나님의 말씀의 생명의 역사입니다.
여러분 헤롯은 누구죠? 헤롯은 이 당시에 무소불위의 권력이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신이라 칭송을 받을 만큼,
자기가 마음만 먹으면 어떤 사람도 죽일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예로 실제로 야고보 사도를 죽였고요.
그리고 베드로 사도도 죽이기 위해 감옥에 넣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사라지자, 이제는 무고한 파수꾼들을 죽입니다.
행12장에 보면, 베드로를 감시했던 경비병들이 헤롯에 의해 죽습니다.
그 당시 군사법에는 이런 법이 있었다고 합니다.
'경비병이 죄수를 놓쳤을 때, 그 죄수가 받을 형벌을 경비병이 대신 받아야 한다.'
놓친 죄수가 태형을 받아야 했다면, 경비병이 대신 태형을 받아야 했던 거죠.
그런데 베드로는 사형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감시했던 경비병들이 사형을 당해야 했습니다.
4명이서 4교대로 경비를 섰으니까, 아마 총 16명이 하루아침에 죽었습니다.
헤롯에 말 한 마디에 의해서요. 그만큼 막대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헤롯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헤롯의 권력이 얼마나 컸던지, 두로와 시돈에게도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헤롯의 통치 영역이 아닙니다.
이 두 지역은, 당시 수리아의 관할 지역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영향력이 컸던지, 두로와 시돈까지도 영향력을 미치며 살았습니다.
여러분 이 정도면, 정말 대단한 권력 아닙니까?
어떻게 보면, 당시 세상의 부와 권력의 총 집합이 헤롯입니다.
그런데 그 헤롯이 여러분 무엇에 의해 죽습니까? 벌레 때문에 죽습니다.
여러분 성경이요. 너무나 재미있지 않습니까? 왜 하필 벌레입니까?
여러분 이런 생각 드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심판을 하시려면, 좀 멋지게 하면 좋지 않았을까요?
갑자기 천둥, 번개를 내려쳐서, 다른 사람한테는 괜찮은데 딱 헤롯에게만 번개가 쳐서
번개를 맞게 하시던지, 그래서 좀 스펙타클하게 죽이면 훨씬 더 그림이 살지 않습니까?
그래야 좀 뽀대도 나고요. 그럴 텐데... 하나님은 벌레로 죽게 하십니다.
하나님 눈에 보시기에는, 헤롯도 미물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아무리 높은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눈에는 벌레만도 못한 (벌레에 먹혀 죽는, 벌레에 지는) 인생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벌레 하나 막을 수도 없는 무력한 인생이라는 것이죠.
그런 인생에게는 소망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세 가지 부분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하나씩 언급했던 부분들인데요.
1) 첫 번째 가이사랴 라는 지역입니다.
오늘 헤롯이 죽은 지역이 가이사랴 라는 곳입니다.
여러분 가이사랴가 어떠한 곳이었죠?
본문의 주인공 헤롯 아그립바 1세의 할아버지인, 헤롯 대왕이 재건한 도시입니다.
왜 다시 지었었죠? 로마 황제에게 바치기 위해서입니다.
로마 황제라는 살아있는 권력에 줄을 대기 위해 지었던 도시가 가이사랴 입니다.
그래야 자신의 권력이 유지가 되니까요.
자신의 권력과 부가, 로마 황제에게 달려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어서 바쳤던 도시가 가이사랴 입니다.
2) 그런데 두 번째, 이 가이사랴 는 곳에 그의 손자, 본문의 헤롯 왕이 내려갑니다.
내려간 이유가, 오늘 성경에는 자세히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도, 요세푸스의 기록에서 우리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며, 이 당시 영국 원정에서 로마 황제인 글라우디오가 이기고
돌아와서 승리를 축하하는 축제를, 로마 제국 전역에서 열었다고 합니다.
그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헤롯 왕이 가이사랴로 내려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러분 헤롯 왕의 임면권이 로마 황제에게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잘 보여야 했겠죠.
얼굴 도장 찍으려고 가이사랴로 내려갔던 것입니다.
3) 마지막 세 번째 가이사랴로 내려간 헤롯 왕을 칭송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두루와 시돈에서 온 사절단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헤롯을 신이라고 칭송을 했습니다. 아첨을 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죠?
그래야 자신들이 (저렴하게) 먹고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식량이 헤롯 왕에게 달려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헤롯에게 아첨을 떨었습니다.
-첫 번째 가이사랴를 건축한 헤롯대왕,
-두 번째 가이샤라로 내려간 헤롯 아그립바 1세,
-세 번째 그런 헤롯을 칭송한 두로와 시돈의 사신들,
이 세 부류에 연결된 공통점이 보이십니까?
하나같이 세상의 권력에 줄을 대고 있다는 것입니다.
헤롯대왕은 로마 황제에게,
또 그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1세는 그 당시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에게,
두로와 시돈은 헤롯 (아그립바 1세) 왕에게
하나같이 그들은 세상의 권력에 줄을 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의 권력에 눈치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권력에 아첨을 떨었고, 그들은 세상의 권력을 두려워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하나님 없이 이 땅을 살아가는 공통적인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들이 먹고 살아가는 것들이, 세상으로부터 나온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같이 세상의 것들에 줄을 대고 있습니다.
세상의 눈치를 보았고요. 세상의 권력에, 세상의 소리에 무릎을 끌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세상의 권력을, 벌레에게 죽게 하십니다.
온 유대 땅을 다스리는 것 같았던 헤롯이, 벌레 하나 다스리지 못합니다.
아무리 커다란 권력을 가졌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보내신 벌레 하나를 막지 못해 죽습니다.
여러분 왜 하필 벌레일까요?
하나님 보시기에는 미물 같은 인생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다 할지라도,
우리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미물보다 더 못 하다는 거죠.
▲반면에 24절에 나오는 누가의 고백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헤롯이 교회를 박해하려 했는데, 헤롯이 죽이려는 교회는 죽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죽이려던 헤롯은 죽었지만, 헤롯이 죽이려는 교회는 오히려 부흥을 했습니다.
이 사실이 본문에 대조되고 있다는 거죠.
헤롯이라는 왕은 벌레 먹어 죽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죽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흥왕했습니다.
그러면서 누가는, 이 두 사실의 대조를 통해,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헤롯의 죽음과
-하나님 말씀의 흥왕의 역사
이 두 개의 대조를 통해 우리에게 또다시 도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지해야 할 참된 세상의 왕은 누구신가?
우리가 눈치를 봐야 할 참된 경배의 대상은 누구신가?
우리가 붙잡아야 할 참된 인생의 줄은 누구이신가?
우리가 두려워할 만왕의 왕은 누구이신가?
누가 우리의 인생의 공급자가 되시고,
누가 우리의 인생을 결정하시고 책임지시는 분이신가?
헤롯이라는 세상의 헛된 권력이 아니라,
오늘도 살아계셔서 세상을 통치하고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살아있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박영선 목사님의 책에서 봤던 부분이 있습니다.
박영선 목사님이 어떤 분과 이런 논쟁을 벌였다고 합니다.
'신자와 불신자 중에 누가 더 악한가?'
이런 토픽으로, 믿지 않는 분과 토론을 벌였다고 합니다.
박영선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불신자가 더 악합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사람이 반론을 제시했습니다.
'아닙니다. 신자가 더 악합니다.'
박목사님이 물으십니다.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니 어떻게 신자가 더 악합니까?
물론 신자가 당신이 기대하는 만큼 기대에 못 미칠 수는 있습니다.
신자에게 기대를 했는데, 기대만 못할 수는 있지만
절대평가를 하면, 아무래도 신자가 불신자보다 더 낫지 않습니까?'
그랬더니 그분 얘기가, 절대평가를 해도, 신자가 나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신자는 너무 약삭빠르고, 세상의 나쁜 짓은 교인이 다 먼저 하더라'는 것입니다.
땅 사 놓는 것, 증권 사 놓는 것... 다 교인이 먼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인들이 그렇게 된 이유를, 자기 나름대로 연구를 했다고 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해요.
교인들은 다른 불신자들에 비해서 모이는 횟수가 많다는 것입니다.
주일마다 모이고, 주중에도 구역예배로 모이는데,
거기서 온갖 세상 사는 (나쁜) 정보가 교환되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 저는요. 우리 교회는 아니라고 믿습니다.
여러분들은 구역 모임 때, 오직 말씀과 기도에 전무한다고 믿습니다.
여러분 이건 다른 교회의 이야기죠.
그러나 이분이 하는 말의 핵심을 우리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신자가 세상을 사는 이래, 너무나도 많은 것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줄을 대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불신자가 보기에는
신자들이, 교회라는 인맥을 통해서, 자기들끼리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고 한다는 것이죠.
▲적용
오늘날 우리는, 세상의 것들이 우리의 삶을 보장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같이 세상의 눈치를 보고 있습니다.
세상에 우리의 자녀들을 맡기고 있습니다.
세상에 줄을 대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이 나를 해코지하면 어쩌나, 세상이 나를 망하게 하면 어쩌나?'
그런 두려움에,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믿음을 딱 드러내야 할 때, 그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가 세상에 타협하며 살아가기 쉽습니다.
여기에는 신자나 불신자나 차이가 없습니다.
헤롯은 죽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도 막지를 못해서 흥왕했다고 말하는데도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말씀은 말씀이고, 세상에는 세상의 방식이 있다고 믿습니다.
세상이 만들어놓은 세상의 길과 방식을, 불신자와 똑같이 걸어갑니다.
거기에 얼마나 우리가 분주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에 아첨하며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세상 사람들의 공통적인 삶의 방식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그런 모습이 혹시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거기서 돌이키셔야 합니다. 이제는 깨우치고 돌이키셔야 합니다.
더 이상 세상의 헛된 것들에, 여러분들의 인생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에게 여러분들의 인생을 맡겨서는 안 됩니다.
거기에 여러분들이 분주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높은 세상의 권력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벌레를 보내시자
벌레같은 미물을 다스리지 못해서 죽는 게, 이 땅의 인생입니다.
하나님은 세상보다 강하십니다.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고, 어떤 누구를 우리가 의지하겠습니까?
어떤 권력을 두려워하고, 그 권력을 의지하겠습니까?
우리가 평생에 붙잡아야 할 참된 인생의 줄은, 헛된 세상의 권력이 아니라
오늘도 살아계셔서 세상을 통치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사40:8
◑그러면서 누가는 마지막으로 25절로써 종지부를 찍습니다.
12:25절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하는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여러분 25절을, 여러분이 읽으시면서 느끼셨죠? 전혀 문맥상 맞지 않는 내용입니다.
헤롯을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뜬금없이
'바나바와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돌아왔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여러분 읽으면 읽을수록, 본문의 흐름상 문맥이 맞지 않는 구절입니다.
본문 행12장은 24절로 끝나야 자연스러운 결말입니다.
헤롯의 죽음과 하나님 말씀의 흥왕의 역사!
그렇다면 여기에 25절을 덧붙인 누가의 의도가 무엇인가요?
그 답이 앞에 11:30절에 있습니다.
11:30절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리라'
그리고 본문 12:25절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하는 일을 마치고
마가라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그러니까 11:30절과 12:25절은, 사실 연속되어야 하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 사이에, 누가는, 헤롯의 이야기를 삽입하고 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예루살렘 교회를 도우러 갔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예루살렘 교회를 박해하는 헤롯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야고보의 죽음
그리고 나서 누가는, 11장에 나왔던 바나바와 사울이 예루살렘에 부조를 갖고 갔다가
예루살렘에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다시 이어나가면서 12장을 끝냅니다.
헤롯의 죽음으로 본문을 끝내는 게 아니라,
다시 11장의 이야기를 담담이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장 절 구분이 후대에 되었다 하더라도요)
여러분 무슨 얘기입니까? 헤롯이 아무리 교회를 박해한다 할지라도
심지어 사도들을 죽인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역사는 멈춰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나바와 사울이 예루살렘 교회의 부조를 가지고 갔다가 돌아온 사건을
헤롯이 죽은 사건 뒤에, 다시 누가가 연결해서 기록해 놓으면서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의 손에 의해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회를 박해하는 헤롯의 핍박이 있었지만
헤롯의 핍박이 하나님의 역사를 막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그것을, 25절에 바나바와 사울이 돌아온 사건을 통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치 너무나 통쾌하게도, 헤롯의 핍박을 싸그리 마치 조롱하듯이 무시하고 있는 거죠.
헤롯이 아무리 핍박을 해도, 하나님의 역사는 결코 방해받지 않는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인간의 박해 속에서도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분이시다...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은 살아계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늘도 세상보다 강하신 분이시며,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세상의 그 무엇도 하나님의 일을 막을 만큼 세거나
하나님에게 도전할 만큼 권한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변함없이 오늘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통치 아래,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있습니다.
그러니 세상의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를 막는 것은,
여러분 물줄기를 막는 댐이 아닙니다. 시냇물에 박혀있는 돌에 불과합니다.
그 돌이 시냇물을 막는 것이 아니라, 시냇물로 하여금 맑은 소리를 내게 할 뿐입니다.
시냇물을 시냇물답게 만들지,
시냇물이 흘러가는 길을 방해하거나 막거나 걸리적거리게 하지 않습니다.
신자는 그렇게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을 두려워할 필요가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의 것들은 오늘 헤롯의 죽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대고 있는 모든 줄들은 썩은 동아줄과 같습니다.
허망한 것이요, 썩어질 것이요, 끊어질 것이요, 사라질 것입니다.
거기에 여러분의 인생이 분주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붙잡아야 할 줄은 영원한 줄이신 하나님이십니다...
...................................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슥4:6
여기서 힘이나 능력은, 비슷한 말입니다.
같은 의미의 말을 두 번 반복해서 씀으로써
내용을 강조하는 강조법이죠.
굳이 차이를 따지자면, 앞의 ‘힘’은 능력 ability, 수완, 물질의 힘 등을 뜻하며
뒤의 ‘능력’은 그야말로 육체의 힘을 뜻합니다.
어쨌든 그게 군사력이든, 권력이든, 물질의 힘이든, 육체의 힘이든..
그것으로는 안 통한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몇 나라를 예를 들어 그 나라를 움직이는 힘이 무엇인가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자타가 공인하는 현 세계 최강의 국가 미국입니다.
미국을 움직이는 힘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분야에서 보는 눈에 따라 다양하게 힘을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정치를 하는 분들은 미국 워싱턴 정가의 권력자들을 꼽을 수 있을 겁니다.
경제에 몸담고 있는 분들은 월스트리트 혹은 포춘지가 선정한 세계 유수기업과 기업가들을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종교계에 몸담고 있는 분들은 그래도 미국인들의 밑바탕에 흐르고 있는 청교도 정신을
미국을 움직이는 힘으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미국을 움직이는 힘은 ‘법’이라고 합니다.
미국의 법률, 제도 등이 우리와는 달리 각 지역 특색을 반영한 관습(법)이나 생활문화를
근간으로 하고 있기에, 각 주의 법이 약간씩 다릅니다. 그리고 주 법 이외에 연방법이 있습니다.
이 법들에 의해 다양한 인종, 민족이 조화를 이루며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로마제국 이래로 내려온 서구사회의 전통이죠.
법이 공평하고, 강력해야.. 나라가 올바로 튼튼하게 세워진다는 역사의 교훈에서 얻어진
사람들의 공통된 가치관입니다.
(맞는 말인데, 100% 정답은 아닙니다.
100%정답은 ‘하나님의 말씀 위에 튼튼하게 세워진다’입니다.)
둘째, 약 15억 중국을 움직이는 힘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당(黨)’입니다.
모든 논리는 중국 공산당의 논리에 의해 통제됩니다.
셋째, 인도를 움직이는 힘은 무엇이겠습니까?
중국다음으로 세계에서 인구가 많은 나라, (앞으로 중국을 곧 앞지를 것이라고 전망하죠)
다양한 계층, 계급이 존재하며, 다양한 언어의 군상을 이루고 있는 이 나라를
움직이는 힘은, 다름 아닌 ‘종교’라고 합니다.
사회적 이슈에 대해, ‘힌두교’ 지도자들이 일단 입장을 정하고 나면
조용해진다고 합니다.
그럼,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힘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외국인들이 관찰한 한 결과에 의하면 한국을 움직이는 힘은 ‘관계’라고 합니다.
어떤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을 때, 아니면 법적으로 제한 사항이 있을 때라도
담당자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 가서 부탁을 하면 된다는 겁니다.
(*과거에 특히 그랬죠. 요즘에는 인터넷에 뜰까 봐 못 그런다고 합니다)
이 시간 크리스천인 교우님들에게 한번 여쭤 보겠습니다.
각 나라를 움직이는 실제적인 힘들이 있듯이
각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분명 있을 것인데,
그렇다면 크리스천인 나를 움직이는 힘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24
나를 움직이는 힘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고,
그런 크리스천들이 이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계각층에서
자기 소임을 다할 때...
우리 각자 개인도, 사회도, 나라도 튼튼하게 서 갈 줄 믿습니다.
♣옛날 궁궐에 용의 그림/조각이 있는 이유
여러분이 옛날 궁궐에 가 보십시오.
임금이 앉아 있는 자리에는 위에나 아래나 용의 그림이 있습니다.
왜 용을 그려놓았을까요? 귀신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내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터키나 유럽, 남미나 세계를 다 다녀보십시오.
용 정도가 아닙니다. 용이 있어도 머리가 열 개인 뱀입니다.
어떤 뱀은 수십 개의 뿔이 난 뱀들로 다 해놓았습니다. 흉측하게 해 놓았습니다.
왜요? 가장 큰, 머리 백 개 달린 귀신으로 자기를 지켜달라는 것입니다.
항상 권력이 불안한 것입니다. 귀신이 무서운 것입니다.
밖에 있는 군대는 군인이 지켜주지만,
귀신의 공격으로부터 지켜 줄 것은 가장 강한 귀신,
머리에 뿔 달린 귀신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귀신을 쫓아낼 때는 더 크고 강한 귀신으로 쫓아냅니다.
우상숭배 하는 곳에 가 보세요.
문 입구에 흉측하게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을 못 보셨습니까?
왜 그렇게 해 놓았을까요? 다른 귀신이 들어오지 말라는 겁니다.
나를 보고 무서워서 도망가라는 겁니다.
내가 더 힘이 있다는 겁니다.
여러 나라에 가보면 전부 흉측하게 해 놓은 것은 귀신은
다른 귀신이 겁나서 그 귀신만 지배받으려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다른 귀신 못 오게 하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탄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마귀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망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 뿐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