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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만난 경험의 교훈

LNCK 2024. 6. 25. 08:36

https://blog.naver.com/karamos/222138353708

 

하나님을 만난 경험의 교훈       출19:9~22        2015.01.18.

 

서론

 

제가 아는 한 여자 목사님이, 젊은 시절에 아직 자신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

‘하나님을 한 번 만나봐야겠다’는 목표를 가졌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가서 “하나님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예배에 나오세요”라고 대답을 해 주더랍니다.

 

그래서 2년 동안 열심히 예배에 참석했는데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답니다.

그래서 또 물었더니 “성경을 열심히 읽어보라”고 이야기를 해주더랍니다.

그래서 50독을 했는데, 그런데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답니다.

 

어느 날 집에 들어갔는데, 남편이 밥은 안 하고 어디를 돌아다니느냐고 성질을 내는 바람에

짐을 싸서 기도원으로 갔답니다.

그리고 기도원에서 기도를 하며 생각해 보니 자신이 참 죄가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회개하며 기도했더니 그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 은혜를 받고 목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크게 부흥시킨 목사가 되었습니다.

 

불신자가 예수님을 믿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을 만나봐야겠다고 뜻을 세웠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렇게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지만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더니 만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본문 출19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인데,

이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고,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며,

또 그 분을 만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습니다.

딤전6:16절에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하나님이 빛에 거하시기 때문에 그 분을 육안으로 보게 되면 시력을 잃게 될 뿐만 아니라

죽습니다(출 33:20).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는 장면을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직접 눈으로 본 것은 아닙니다.

 

출20:22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라

내가 하늘에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가 친히 보았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신4:33절에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었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음성을 직접 들은 백성입니다.

만일 우리교회 부흥성회에 하나님을 강사로 모셔서 그 음성을 듣게 된다면 얼마나 놀랍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만나주셨을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출20:20절에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강림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첫째로, 하나님을 살아계시고 말씀하시는 분으로 인지하여 우상을 만들거나

숭배하는 범죄를 방지하기 위해 만나주셨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모세를 중보자로 세워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친히 보여주심으로써

백성들이 모세의 증거하는 말을 믿게 하시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출19:9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네게 일함은

내가 너와 말하는 것을 백성으로 듣게 하며 또한 너를 영영히 믿게 하려함이니라

모세가 백성의 말로 여호와께 고하였으므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범죄치 아니하고. 말씀을 믿게 하려는 두 가지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이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하나님을 시내 산에서 직접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나, 아무렇게나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바른 태도를 가지고 정해진 길을 따라 나아올 때,

만나주시는 분이십니다.

 

제 멋대로 사는 인간이 자기 필요에 따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이틀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준비시켰고,

하나님은 그 준비가 끝난 제 삼일에야 그들을 만나주셨습니다.

 

▲영국의 여왕을 만날 때에 갖추어야 할 예절에 대해서 기록된 내용이

책 한 권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여왕과 인사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고,

앉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고, 밥을 먹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책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

아무런 매뉴얼(설명서)이 없을 리가 없습니다.

 

16세기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한 로마 카톨릭 사제와 대화를 나누며 이런 책망을 하였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지나치게 당신의 수준으로 생각하는 것 아니냐?”며 핀잔을 주었습니다.

 

오늘날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지나치게 함부로 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자기 친구, 또는 심지어 하급자처럼 대하는 사람도 있고,

원수로 생각하고 욕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시편 50편 21~22절에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목전에 차례로 베풀리라 하시는도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수준으로 생각하고 대하느냐?”,

“내가 네 죄를 네 목전에 차례로 베풀어주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은 출19장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난 경험을 중심으로

세 가지 교훈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인간은 하나님 앞에 먼저 나아갈 수 없는 죄임임을 알아야 한다

 

인간은 죄인입니다. 하나님이 만나주신 사람은 모두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나를 만나주지 않으십니까?”.

“왜 나를 몰라주십니까?”라고 말하며 접근하는 자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 “내가 죄인입니다”라는 자세로 나아간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두 가지를 지시하셨습니다.

 

첫째는 출19:10~11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케 하며 그들로 옷을 빨고 예비하여 제삼일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제삼일에 나 여호와가 온 백성의 목전에 시내 산에 강림할 것임이니”

하나님을 만나는 데 필요한 것은 우선 몸과 마음을 성결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12절에 “너는 백성을 위하여 사면으로 지경을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지경을 범하지 말지니 산을 범하는 자는 정녕 죽임을 당할 것이라”

 

시내 산의 정한 경계를 넘어오는 사람은 죽을 것이고 짐승도 죽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절대로 경계선을 넘어오지 못하도록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존재임을 가리킵니다.

인간은 본성이 부패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를 깨달으려면 ‘인간의 전적타락’이라는 첫 번째 진리에 동의해야 합니다.

인간이 왜 전적으로 타락하게 되었는지를 바로 아는 것이

올바른 진리를 깨닫는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죄성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죄인이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려 하면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직접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만나려고 해도

절차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아무나, 아무렇게나 만나주시겠습니까?

죄인이 죄를 회개치 아니하고 하나님을 만나고자하면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왜 죄인이냐?” “왜 교회만 가면 목사들은 사람을 놓고

죄인이라고 다그치느냐?”고 항변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얼굴에 오물을 묻히고 다니면서도 스스로 깨끗한 줄 아는 것과 똑같습니다.

얼굴에 밥풀, 이에 김 가루나 고춧가루가 잔뜩 끼어 있지만 돌아다니면서

“나는 깨끗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십계명만 봐도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십계명을 어긴 것이 죄입니다.

죄의 개념은 간단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죄인이 아니라고 하지만,

자기 스스로 죄의 기준을 정해놓고 죄인이 아니라고 하면 됩니까?

기준은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당한 기준을 주시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십계명에 기록된 대로 남을 속이거나 간음을 행한 적도 없는데

왜 나를 죄인이라고 하느냐?”고 할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점을 치러 다니지 않았습니까?

다른 신을 두지 않았습니까? 안식일을 지켰습니까?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십계명은 두 돌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째 돌비에 기록된 내용을 어긴 것이

둘째 돌비에 기록된 내용을 어기는 것보다 작은 죄이겠습니까?

 

당연히 첫째 돌비에 기록된 법을 어긴 것이 훨씬 큰 죄입니다.

그리고 둘째 돌비의 법을 어기지 않았다고 했는데,

성경은 남을 미워하는 것이 살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살인과 같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간음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 것이 간음한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백번 옳은 말씀입니다.

저도 죄인이고, 여러분도 죄인이고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다 죄인입니다.

 

하나님 만나기를 원하는 죄인들은

하나님을 찾아간다고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먼저 죄인들을 찾아오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시기 위해

시내 산으로 먼저 찾아오셨기 때문에 그 분을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방식대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2.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라는 말은

하나님이 피조물과 분리된 존재시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이 아니시고, 창조주이십니다.

 

그 분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I am that I am)이십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를 신격화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헤롯 대왕은 스스로를 신으로 생각했습니다. 행12장

자기의 연설을 들은 백성들이 “신의 소리다”라고 소리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자 천사가 그를 쳤고, 충에 먹혀 죽었습니다.

피조물은 신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피조물과 분리된 존재시라는 것이 바로 ‘거룩’의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하나님의 여러 속성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모든 속성의 근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도 거룩한 지혜이고, 하나님의 자비도 거룩한 자비이며,

하나님의 능력도 거룩한 능력인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시기 위해 시내 산에 강림하셨을 때,

일곱 가지 현상들이 나타났습니다.

 

출19:16~19절에 “제삼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 기슭에 섰더니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첫째는 우뢰, 둘째는 번개, 셋째는 빽빽한 구름, 넷째는 심히 큰 나팔소리,

다섯째는 자욱한 연기, 여섯째는 불, 마지막 일곱째는 진동하는 산이었습니다.

이 모든 현상들은 두려움을 상징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면 이것들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출3:12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명한 주석가 메튜 헨리 목사님은 이 일곱 가지 현상을 예배와 관련해서 설명했는데,

“설교자가 하나님이시고, 강단은 시내 산꼭대기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 강단이 낮은 곳에 위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높은 데 세우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높은 곳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설교를 하시는데, 불과 함께 오셨습니다. 불은 천군천사입니다.

신33:2절에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오시고, 세일 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 산에서 비취시고,

수많은 천사들과 함께 오셨으며 그 오른손에는 타오르는 불이 있었다(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이 천사 1만을 대동하고 시내 산에 강림하셨는데,

그것이 사람들의 눈에는 불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빽빽한 구름이 있고 온 산이 진동하며 연기가 났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피조물의 반응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려움과 경외심을 가지고 대해야 할 존재시라는 것입니다.

 

하박국 3장 6절에 “그가 서신즉 땅이 진동하며 그가 보신즉 열국이 전율하며

영원한 산이 무너지며 무궁한 작은 산이 엎드러지나니 그 행하심이 예로부터 그러하시도다”

 

하나님이 임하시면 산이 흔들리고 무너집니다. 삿5:5절에 “산들이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니

저 시내 산도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였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행2장에 오순절 성령의 강림 때에도 제자들이 있던 온 집이 다 진동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우리도 기도할 때에 성령 충만을 받고 진동을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동한다는 것은 피조물이 하나님을 두려움과 경외심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팔소리는 무엇일까요? 점점 커지는 나팔소리는 ‘왕이 강림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왕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라는 신호입니다.

그러므로 나팔소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무관심하지 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의를 산만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66권의 성경으로 말씀하셨는데도 성경에 무관심한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성경과 무슨 관계가 있나?”, “내가 왜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야 하나?”하며 무관심합니다.

그러나 이 나팔소리에 무관심하게 되면 훗날 다른 나팔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찬송가 168장의 가사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팔소리 천지진동할 때에 예수 영광중에 구름타시고

천사들을 세계 만국 모든 곳에 보내어 구원얻은 성도들을 모으리”

 

그 나팔소리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들려올 것입니다.

계9:6절에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저희를 피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날에는 “날 좀 죽여 달라”고 소리쳐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냥 살아서 지옥에 가야 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나팔소리와 같습니다. 주의를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무관심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인간이 무관심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뢰와 번개는 하나님의 말씀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이 들을 때 우렛소리와 같이 들립니다.

요12:28~29절에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우뢰가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저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하나님의 설교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사람들에게 천둥소리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번개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에 계시는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구약시대에도 두렵고 거룩하신 분이셨고, 신약시대에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동일합니다. 죄인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죄인 된 인간은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3. 죄인 된 인간은 중보자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갈3:19절에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모세는 중보자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죄가 무엇인지를 확실히 보여주는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죄인들이 어떻게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피로 제사를 드려야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함을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된 성막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명백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림자이고 예표이지, 실체가 아닙니다.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의 중보자이지, 그 이후에는 중보자가 될 수 없습니다.

 

히8:6절에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더 좋은 언약의 중보’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딤전2:5절에도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늘의 거룩하신 하나님과 우리 죄인 사이에 서서 화목케 하고 중보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존재는 아무리 훌륭해도

중보자가 될 수 없습니다.

 

석가모니, 공자, 마호메트가 아무리 훌륭해도 그들은 우리의 중보자가 될 수 없습니다.

저는 타종교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의 죗값을 갚아준 구원자입니까?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이 죄인이 된 우리를 위해 자신의 피를 흘려 구원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죄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믿기만 하면 그 피로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죄를 용서받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통해 언제라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를 막아놓았던 성소의 휘장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에 위로부터 아래로 갈라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언제라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무실은 9시에 문을 열고 5시에 문을 닫는 곳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면 언제라도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모두 자신의 죄를 회개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진실로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저도 만났고, 여러분도 다 하나님을 만난 줄로 믿습니다.

다른 이름으로 하나님을 만나려 하는 사람에게 기다리는 것은 오직 영원한 죽음이요,

지옥뿐입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경계를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신 만남의 길을 멸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요14: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론

 

히12:25~26절에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희가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시내 산에서 강림하실 때는 산만 진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는 하늘도 진동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팔소리로 강림하실 때는 하늘과 땅이 뜨거운 불에 다 풀어지고

체질이 녹아져서 이 땅과 이 하늘은 완전히 변화되어 새 하늘과 새 땅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생하는 몸을 입고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은 영생입니다. 영생은 결코 시시한 것이 아닙니다.

병을 낫게 해주는 정도의 것이 아닙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더 이상 진동하지 않는 나라라고 했습니다.

 

히12:28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인 됨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또 매일매일 하나님을 만나 그 분과 함께 동행하며 기쁘게 섬기다가

영원히 진동치 않는 나라에 들어가 영생을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항상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섬기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