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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제단과 성막의 뜰

LNCK 2024. 6. 25. 21:09

https://blog.naver.com/karamos/222140015524

 

번제단과 성막의 뜰       출27장 1~2, 9~10              2015년 설교스크랩

 

출27:1~2 ‘너는 조각목으로 길이가 다섯 규빗, 너비가 다섯 규빗의 제단을 만들되

네모 반듯하게 하며 높이는 삼 규빗으로 하고

그 네 모퉁이 위에 뿔을 만들되 그 뿔이 그것에 이어지게 하고 그 제단을 놋으로 싸고...’

 

27:9~10 ‘너는 성막의 뜰을 만들지니 남쪽을 향하여 뜰 남쪽에 너비가 백 규빗의

세마포 휘장을 쳐서 그 한 쪽을 당하게 할지니

그 기둥이 스물이며 그 받침 스물은 놋으로 하고 그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으로 할지며...’

 

서론

 

출27장은 <번제단>과 <성막 뜰>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성막 동편 문으로 입장하면

성막 뜰과 번제단, 물두멍이 보이고, 성소와 지성소가 보입니다.

 

지성소에는 언약궤가 있고, 성소에는 세 가지 기구가 들어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북쪽에 떡상, 남쪽에 순금등대, 그리고 정면으로 분향단이 있습니다.

 

오늘은 번제단과 성막 뜰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성막에 관한 계시를 주실 때,

계시한 그대로 지으라고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 숭배의 땅 애굽에서 구원을 받은 백성이기에

하나님이 정하신 방식대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도록 하시기 위함이었고,

둘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끊임없이 교육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도 실물교육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아주 심각하게 여기는 분이십니다.

죄는 결코 사소하지 않으며, 죄인 된 백성들이 하나님께 함부로 나아갈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이 죄 때문이고, 죄는 반드시 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값을 치르려면 반드시 죽어야 하는데,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희생제물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그 피를 보고 죄인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대속과 속죄의 원리를 끊임없이 교육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번제단을 살펴보기 전에 두 가지를 고려해야 하는데,

첫째는 왜 순서상 (성소의) 분향단에 대한 내용이 빠져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분향단에 대한 내용은 출30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분향단에 대한 내용과 왜 거기에 기록되어 있는지

출30장을 강해할 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둘째는 ‘성막’(Tabernacle)이라는 용어와 관련된 것인데,

“성막을 언급할 때 성소와 지성소만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성막 뜰을 포함해서 성막 울타리까지의 전체를 가리키는가?”하는 것입니다.

 

성막의 범위에 관한 것인데, 학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두 가지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엄밀한 의미의 성막’(Tabernacle Proper)입니다.

영어 단어 ‘Proper’는 원래 ‘적절한’, ‘적당한’이라는 의미의 형용사인데,

이 단어가 명사 뒤에 위치하면 ‘엄밀한’, ‘좁은 의미의’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Tabernacle Proper’는 보통 지성소와 성소를 포함한 장막(Tent)만을 가리킬 때 사용합니다.

그리고 둘째는 ‘성막’(Tabernacle)입니다. 이때의 성막은 ‘넓은 의미의 성막’으로,

성막 뜰을 포함한 성막 울타리까지의 전체를 가리킬 때 사용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를 드리고자 성막 뜰의 문을 통과하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번제단입니다. 그리고 손을 닦는 물두멍이 보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성막 문, 성막 뜰, 번제단 순서로 나오는 것이 적절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번제단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에

출27장에 번제단이 성막 뜰보다 먼저 다뤄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의 순서도 성경의 순서를 따르고자 합니다.

 

◑1. 번제단의 구조와 그 의미

 

번제단은 성막에 있는 모든 성물 가운데 가장 큰 기물입니다.

다른 모든 성물을 합한 것보다 큽니다. 그래서 번제단은 우선 그 크기만으로도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단의 명칭은 출30:28절에 ‘번제단’(Altar of the Burnt Offering)이라고 불렸고,

‘놋단’(Brazen Altar)이라고도 했습니다.

 

‘번제단’이라고 할 때는 그 단의 목적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희생제물을 불로 태워 하나님께 드리는 단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놋단’이라는 것은 단을 만들 때 사용된 재료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한글개역성경에는 그런 구분이 정확하게 되어 있지 않지만

영어성경에는 이 놋단을 ‘Brazen Altar’라고도 하고 ‘Bronze Altar’라고도 합니다.

그러면 왜 이런 표현의 차이가 생긴 것일까요?

 

‘Brazen’이라는 것은 영어로 ‘Brass’와 같은 의미로, 일반적으로 ‘놋’이라고 번역되는데,

이것은 구리와 아연의 합금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살던 당시에는 구리와 아연을 합금하는 기술이 없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이것은 ‘청동’(Bronze)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Bronze’는 청동이고, 구리와 주석의 합금입니다.

 

B.C. 1500년부터 1200년까지를 ‘후기 청동기 시대’라고 하는데,

출애굽 연대가 B.C. 1446년경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 시대는 청동기 시대였음을 알 수 있고,

학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놋이 ‘Brazen’이 아니라 ‘Bronze’였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Bronze Altar’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타당한 이유라고 생각을 합니다만,

우리가 금속공학 전공자가 아닌 이상, 성경의 번역을 따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번제단 전체를 놋으로 만들었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번제단 골격은 싯딤나무(아카시아 나무)로 만들고 놋으로 외부를 입혔습니다.

 

그러면 왜 놋을 입혔을까요? 금은 불에 약하고, 놋이 화력을 견딜 수 있는 금속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를 ‘놋단’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번제단이 싯딤나무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의미하고

놋을 입혔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대신 심판을 받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놋은 항상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성물의 재료와 색은 그 의미에 일관성이 있는 것입니다.

번제단은, 인성을 가지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심판받으셨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번제단은 가로 5규빗, 세로 5규빗의 정사각형으로 만들어졌고, 높이는 3규빗입니다.

당시 이교도들의 제단이 원형이거나 삼각형이었는데 비해

번제단이 정사각형이었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 합니다.

 

성경에서 숫자 ‘5’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실 때도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이셨고,

모세의 책인 모세 5경도 5권입니다.

 

또 성막 지붕의 휘장을 5개씩 묶어서 두 개를 금고리로 연결하라고 하셨고,

성막 널판을 연결할 때도 5개의 금고리에 채를 끼워 연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숫자 ‘5’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정사각형은 동서남북 어디에나 미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가로 세로 5규빗으로 이뤄진 번제단이 정사각형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 민족뿐만 아니라

동서남북 이방나라에도 범세계적으로 미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 네 모퉁이에는 뿔을 만들었습니다.

원래 뿔은 놋망에 올려 놓은 제물을 줄로 고정시키기 위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시편 118편 27절에 “줄로 희생을 제단 뿔에 맬지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혹여나 누군가 희생제물에 손을 댈지 모르기 때문에

제물을 줄로 묶어 고정시켜 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레4:25절과 30절에 보면, 제단 뿔은 더 큰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사장은 그 속죄 희생의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그 피는 번제단 밑에 쏟고.”

 

제사장이 번제단 뿔에 피를 바를 때에는 손가락으로 찍어서 바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죄가 용서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뿔은,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는 자에게,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합니다.

 

▲그러면 뿔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사무엘하 22장 3절에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원수를 물리친 후에 고백했던 내용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구원의 뿔’이라고 노래하였습니다.

 

눅1:69절에도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침례요한의 부친 사가랴가 성령 충만을 입고 예언하기를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뿔’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른 이름은 구원의 뿔이십니다.

그러니까 뿔은 피를 발라 죄 사함을 받는 구원의 뿔인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과실로 죄를 범한 자는 제단 뿔을 붙들어 피해자의 복수를 피할 수도 있었습니다.

일종의 도피성과 같은 역할도 했던 것입니다.

 

▲레위기에 보면 사람들이 짓는 죄의 종류가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님의 법을 알고도 반역하고 배교하는 죄와

고의적으로 혹은 의도치 않은 죄에 대한 내용입니다.

 

예를 들어 아론의 두 아들이었던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이 내려주신 불이 아닌

다른 불로 분향하였습니다. 이는 모르고 저지른 과실이 아니었습니다.

아론이 분명히 다른 불로 분향하지 말라고 했는데, 두 아들은 진리를 배반하고 배교하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죄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이단자들이 용서받은 경우를 거의 볼 수 없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을 위한 속죄제는 없습니다. 나답과 아비후를 위한 속죄제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제단에서 나온 불로 심판을 받아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고의적으로나, 혹은 부지중에 지은 죄들은

속죄제, 속건제, 번제 등의 제사를 통해 용서받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죄를 짓고 싶지 않은데 몰라서 지었다든가 의도적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면

모두 용서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배교의 죄는 용서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받을 수 있는 죄를 지은 사람이

피해자의 복수를 피해 제단 뿔을 붙잡으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즉위하기 직전 솔로몬의 배 다른 형제였던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있었습니다.

그는 다윗 시대의 용장 요압과 손을 잡고 스스로 왕을 자처하였습니다.

 

그러니 솔로몬의 어머니인 밧세바가 노구가 된 다윗 왕을 찾아가

“내 아들 솔로몬을 왕으로 삼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 왕이 되었으니 이 일이 어찌된 것입니까?”라고 묻자

다윗이 정신을 차리고 솔로몬을 기름부어 왕으로 삼았습니다.

 

이제 아도니야와 요압장군이 반역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제단의 뿔을 붙잡았습니다.

당시에는 솔로몬이 그들을 죽이지 않았으나,

 

왕상2장에 보면 아도니야가 아버지 다윗의 동녀 수넴여인 아비삭을 아내로 삼고자 했을 때

솔로몬이 그를 처단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여인을 아내로 구한 것(왕권을 차지한다는 의미 있음)은

죽어 마땅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제단 뿔은 은혜의 상징입니다.

 

▲번제단에서 희생제물은 어떻게 드리는 것일까요?

먼저 죄 지은 사람이 죄를 용서받기 위해 제물을 가지고 성막 문을 열고 들어옵니다.

 

이 때 부유한 사람은 소를 가지고 오고, 중산층은 양이나 염소,

빈민들은 비둘기를 가지고 옵니다.

 

희생제물을 가지고 성막 문에 들어왔다는 것은

이것이 하나님께 드린 바 되었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그래서 성막 문 안으로 들어왔는데,

생각이 바뀌어서 제물을 도로 가지고 나가겠다고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분은 헌금을 드리고 나서 1년 후, 낸 헌금을 돌려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렸던 헌금을 돌려받으면 그 사람에게 절대 복이 되지 않습니다.

희생제물을 가지고 일단 성막 문에 들어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들락날락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 용서함을 받기 원하는 사람은, 자기 손으로 희생제물의 머리에 안수를 합니다.

그러면 자기 죄가 제물에게 전가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물을 죽입니다.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고 내장과 기름을 분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각을 뜨고 각 제사별로 하나님께 드립니다.

번제의 경우, 가죽은 제사장이 가지고 나머지를 통째로 태웁니다.

그리고 속죄제, 속건제는 기름과 내장만 태웁니다.

 

그 가운데는 제사장이 가슴부위와 뒷다리부위의 고기를 취해 요제와 거제를 드린 후

먹기도 합니다. 화목제의 경우, 경배한 사람이 사람들과 함께 나눠 먹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속죄제나 속건제의 경우, 경배한 사람의 몫은 없습니다.

모두 제사장 몫이 되는 것입니다.

 

희생제물을 태울 때, 어떤 경우는 다 태우기도 하고

다른 경우에는 기름이나 내장만 태우기도 합니다.

 

▲이렇게 제사마다 방법이 조금씩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제물을 태우기 위해서는 번제단의 그물을 사용해야 합니다.

(아래에는 불이 있음)

 

그물은 놋으로 만든 망 screen 의 형태입니다.

놋망의 네 모퉁이에는 놋망을 움직일 수 있도록

네 개의 놋고리를 만들었고, 여기에 채를 꿰어 번제단을 운반하는데도 사용하였습니다.

 

이 채 역시 싯딤나무로 만들어 놋을 입힌 것이었습니다.

 

이 그물은 번제단의 높이 중간지점까지 올라오게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즉 번제단의 중간지점인 1.5규빗(약 67.5cm)까지 올라오도록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물의 윗부분에는 제물을 놓고,

그물의 아랫부분에는 나무를 벌려 놓아 하나님이 내려주신 불로 불을 붙일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렇게 번제물이 타서 하나님께 향이 올라가게 되는 것이 이스라엘의 제사입니다.

 

▲제사장의 일은 아주 힘든 노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제물을 가지고 온 사람이 제물의 각을 뜨곤 했지만,

정기 제사는 제사장이 잡았습니다.

 

조석으로 짐승을 잡고, 제물을 놋망 위에 올리기 위해 135cm나 되는 높이로 고기를 들어야 하고,

또 중간 높이까지 잘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줄로 제단 뿔에 고기를 묶어 고정시켜야 합니다.

 

그러니 제사장의 일이 대단히 많은 것입니다.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가 올해로 30년째 사역을 해오고 있는데, 12년은 신학교 교수로,

18년은 목회자로 사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교수생활은 남이 보기에 어려워보여도 상당히 쉬운 반면

목사생활은 남들이 보기에 쉬워 보여도 대단히 힘들고 어렵습니다.

 

고기를 잡고 들고 놓고 뿔에 묶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제사장은 육체적으로도 대단히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번제단에 필요한 보조도구는 다섯 가지가 있었습니다.

제물을 태운 후 찌꺼기를 모아 담는 ‘통’(Pan)이 있고,

재를 퍼서 통에 담을 때 쓸 ‘부삽’(Shovel)이 있습니다.

 

그리고 피를 받아서 옮기는데 필요한 ‘대야’(Basin)가 있고,

고기를 옮길 때 필요한 ‘갈고리’(Hook)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막 내에서 불을 쓰는 곳이 두 군데가 있는데, 번제단과 성소의 분향단입니다.

그래서 번제단에 있는 불을 분향단으로 옮겨야 하는데,

여기에 필요한 기구가 ‘불똥그릇’(Firepan)입니다.

이 모든 보조기구들은 놋으로 제작되었습니다.

 

▲그러면 번제단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번제단에 사용되는 제물, 그물, 채, 제단 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희생제물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의 죄가 사함 받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번제단은 구약의 십자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만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반드시 심판하시되 죄 지은 사람의 죄는 용서하시고, 대속제물을 향해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번제단의 희생제사가 없이 아무도 하나님이 계신 성소와 지성소로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번제단은 십자가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내 죄를 대신 속해 주셨다는 믿음 없이는

어느 누구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그림처럼 보여줍니다.

 

천국은 착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어떤 사람도 천국에 들어갈 만큼 착한 사람은 없습니다.

 

훌륭한 사람이 가는 곳도 아닙니다.

천국은 죄를 많이 지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죄 사함 받고

성령 받은 사람이 갈 수 있는 곳입니다. 번제단을 통과한 사람은 지성소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2. 성막 뜰의 구조와 그 의미

 

성막 뜰은 모세 성막과 솔로몬 성전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다.

솔로몬 성전에는 두 종류의 뜰이 있습니다.

바깥 뜰(Outer Court)과 안 뜰(Inner Court)입니다.

 

바깥 뜰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할 수 있는 곳이었고,

제물을 사고 팔 수도 있는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안 뜰은 제사장이 희생제사를 드리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 성막에는 이런 구별이 없이 하나의 뜰로 구성되어 있었고,

백성들과 제사장들이 어우러져 함께 희생제사를 드렸습니다.

 

▲성막 뜰은 5규빗 높이의 성막 울타리로 둘러쳐져 있었습니다.

세마포장이라고 하는데, 마(Linen)와 같은 재질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성막 울타리는 북쪽과 남쪽에 기둥이 20개씩있고,

동쪽과 서쪽에 10개씩 도합 60개의 기둥에 흰색의 세마포장으로 둘러쳐져 있었습니다.

 

길이는 남북이 각각 100규빗(45m)씩이고, 동서는 각각 50규빗(22.5m)씩입니다.

성막의 문은 울타리 동편으로 열린 매우 아름다운 문이고, 제1휘장의 재료와 같습니다.

청색, 자색, 홍색실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면 기둥 60개는 무엇으로 만들었을까요?

많은 성경주석가들이 이 기둥은 놋기둥이라고 해석하지만,

출38:29절에 의하면 하나님께 드린 놋의 중량이 70달란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놋 70달란트 가지고는 60개의 기둥을 만드는데,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출38:25절에 “조사를 받은 회중의 드린 은은 성소의 세겔대로 일백 달란트와

일천칠백칠십오 세겔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막건설에 은이 100달란트가 들었던 것에 비하면 놋은 적게 들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놋은 기둥의 받침을 만드는데 사용되었을 것이고,

기둥 자체는 싯딤나무로 만들어졌을 것임이 더욱 논리적인 해석입니다.

 

그러니까 받침만 놋으로 만든 것입니다.

기둥에는 성막 울타리 세마포장을 걸 수 있는 ‘은갈고리’(Hook)와 기둥과

기둥 사이를 연결하는 ‘은가름대’(Band)를 만들었고,

기둥과 세마포장을 든든하게 고정시키는 ‘말뚝’(Peg)은 놋으로 만들었습니다.

 

구약학자인 월터 카이저의 말에 따르면 성막 울타리에는 네 가지 목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불법한 자들의 접근을 막고,

둘째는 맹수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고,

셋째는 이방인들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별하고,

넷째는 단 한 개의 문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성막의 동쪽은 문이 있고, 기둥 10개 가운데 양쪽 끝 6개는 15규빗씩 세마포장으로 울타리를 쳤고,

가운데 4개 기둥에는 아름답고 화려한 성막의 문을 걸어놓았습니다.

 

결론

 

성막에 사용된 재료와 색은 모두 동일한 영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싯딤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은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놋은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받으신 심판,

흰색은 예수 그리스도의 죄 없으심,

자색은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

청색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홍색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 되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성막의 유일한 문은 요10:9절에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는 말씀에서 실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문을 통과해서 그 분이 나를 위해 몸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신

사실을 믿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열리게 된다는 복음의 진리를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복음은 예표이고 신약의 복음은 실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지

내용은 동일합니다. 번제단과 희생제물과 그 피는 복음의 내용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입니다.

 

성막의 뜰은 오직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성막의 뜰에서 드리는 제사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제사입니다.

이것은 온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한 제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위한 제사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온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다 사함을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자유주의 신학의 근간입니다.

 

저는 아무리 성경을 읽어봐도 아르미니우스주의 신학에서 말하는 일반속죄 내지 보편속죄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그런 교리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옥에 가는 이유가 “믿지 않아서”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빚을 다 갚았다면 믿음이 있고 없고가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믿음이라는 것이 사람의 공로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은 온 세상 모든 사람의 죗값을 다 갚아주신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는 비논리적인 주장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 전에 택하신 사람의 죗값을 갚아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칼빈이 주장한 제한적 속죄가 성경적인 교리입니다.

 

성막 뜰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들인데,

그러면 이방인들은 들어가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방인들 중에도 택함을 받은 사람은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방인들 중에도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희생제물의 피가 자기의 죗값을 사한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번제단이 동서남북을 향해 정사각형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미국, 중국, 인도, 한국사람 중에도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주면 그것이 믿어지는 사람들입니다.

왜 믿어질까요? 예수 그리스도가 모두 갚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죽어도 믿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게 어떻게 믿어지냐고 반문합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그 사람의 죗값을 갚은 적이 없기 때문에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번제단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 이방인 할 것 없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의

죗값을 갚고 그들을 구원하신다는 로마서의 대원리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심각하게 여기시는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믿고 은혜의 문으로 들어가 생명의 떡을 먹고,

향과 같은 기도를 드리며, 순금등대같은 빛을 비추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그런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