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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날 밤에 누워 자는 베드로

LNCK 2024. 6. 28.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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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0 16  / 사도행전 강해 (44) /  전날 밤에 누워 자는 베드로 - YouTube

죽기 전날 밤에 누워 자는 베드로    행12:1~7          

처형 당하기 '전날 밤에 누워 자는 베드로'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안디옥교회 이야기를 살펴봤습니다. 
안디옥교회 이야기가 뒤에 13장에서도 또 나옵니다. 

그러니까 11장도 안디옥교회 이야기고요. *예루살렘 교회에 부조 전달
13장도 안디옥교회 이야기입니다. *바나바와 사울 선교사 파송
그 사이에 오늘 본문 12장이 있습니다. 

그러면 12장의 이야기도 안디옥교회의 이야기가 나와야 맞습니다. 
그래야 흐름상 연결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12장은 갑자기 장소가 바뀝니다. 
안디옥에서 예루살렘 교회로 화면이 바뀝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뭔가 시급한 일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예루살렘 교회로 이야기의 무대를 옮깁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사건은 무엇인가요? 
야고보가 순교하고, 베드로가 투옥되는 사건이죠... 오늘의 본문입니다. 

◑행12:1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그 때에'
안디옥 교회가 세워진 그때를 말합니다. 그리고 안디옥 교회가 부흥한 그때입니다. 
그리고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도와줬던 그때를 말합니다. 

그때 느닷없이 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헤롯입니다. 

여러분 복음서에 보면 헤롯이 여러 번 나옵니다. 
여러 번 나오는데, 전부 다 동일한 인물이 아닙니다. 

1) 복음서에 제일 먼저 나오는 헤롯이 있습니다. 
이 헤롯은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아기들을 죽인 헤롯을 말합니다. 
'헤롯 대왕'으로 부르죠. 영어로는 Herod the great 입니다. 

헤롯 대왕은 역사책에는 '건축 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이사랴 신도시도, 또한 마사다 요새 위에 피신용 별장을 지은 적도 있고, 
예루살렘 성전도 재건한 인물입니다. 이 사람이 헤롯왕가의 시조입니다. 

2) 그리고 세례요한을 죽인 헤롯이 있습니다. 
헤롯 안티파스 입니다. 그는 헤롯 대왕의 아들이요, 갈릴리 분봉왕입니다.

이 헤롯은, 세례 요한만 죽인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심문하고 빌라도에게 넘기기도 했습니다. 

3) 본문 행12장에 또 다른 헤롯이 나오죠. 헤롯 아그립바 1세입니다. 
사도 야고보를 순교시키고, 나중에 벌레가 먹어서 죽은 자죠.
그는 헤롯 대왕의 손자이며, 헤롯 안티파스의 조카입니다. 

4) 행25~26장의 헤롯은, 헤롯 아그립바 2세입니다.
사도바울을 심문했던 '아그립바' 왕이죠.

그러니까 성경에는 4대에 걸친 헤롯 가문이 나오죠. 
이처럼 헤롯은 헤롯인데, 각자 다른 헤롯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을 핍박했던 자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과 교회를 핍박한 인물입니다. 

그러니까 헤롯 가문은, 예수님과 교회를 제대로 핍박했던 악한 집안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1절부터 헤롯 왕이 나옵니다. 
그러면 딱 벌써부터 불길한 예감이 들지 않습니까? 
'뭔가 교회에 피바람이 불겠구나...' 

:1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교회를 박해하는 주체가 누구죠? 헤롯이라는 왕, 정치인입니다. 

여러분 이 일은, 사도행전 안에서 굉장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지금까지 정치 지도자들이 교회의 핍박에 관여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사도행전 안에서, 교회를 핍박했던 주체는 누구였죠?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이나 사도개인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이 교회를 박해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우리가 잘 아는 사울이 있었죠. 
사울의 박해로 스데반은 순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사울의 박해를 시작으로,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뿔뿔이 흩어져야 했습니다. 
그런 박해자 사울이 놀랍게도 회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박해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울이 회심을 하자, 교회를 박해하는 또 다른 세력이 등장합니다. 
이번에는 정치 지도자, 왕이 나섭니다. 

사울이 회심을 해서, 이제는 교회가 한숨 좀 돌리나 싶었는데 
이제는 왕이 나서서 핍박을 가합니다. 
더 매서운 칼바람이 교회에 불어 닥치는 거죠. 

여러분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교회를 향한 세상의 박해는 그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런 세상의 박해를 통해 성장해 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펴봤던 사도행전의 스토리를 복기해 보십시오. 
박해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앞에서부터 한 번만 더 기억해 보십시오. 
오순절날 성령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복된 성령의 은혜가 교회 위에 임하고, 

3천명, 5천명씩 회개하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역사들이 일어났습니다. 
너무나 영광스러운 부흥의 은혜를 교회가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뒤이어 뭐가 일어나죠? 부흥만 오지 않고 바로 동시에 핍박이 찾아옵니다. 
산헤드린 공회에 잡혀가고 사도들이 핍박을 받습니다. 4~5장

주님의 교회들이 자랄 때마다, 그냥 자라는 게 아니라, 핍박이 따라옵니다. 
그 핍박을 이겨내면서 교회가 자랍니다. 

그러다가 7장에 오면, 스데반이 순교하게 됩니다. 
순교와 동시에 큰 박해가 일어나서, 많은 성도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떠나 뿔뿔이 흩어져야 했습니다. 
큰 박해, 메가톤 급의 더 큰 박해가 시작되었던 거죠. 

여러분 희한하게, 그 핍박이 교회를 힘들게도 했지만, 
오히려 복음이 사마리아로, 안디옥으로, 또 에티오피아 내시에게로 확장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핍박이 교회를 잠시 주눅들게 하는 것 같았지만, 
결과적으로 교회를 더 확장시키는 결과를 나왔습니다. 
오히려 핍박을 통해, 복음의 확장이 이루어집니다. 

이어서 9장에서는 악명높은 사울이 회심을 했습니다. 
10장에서는 첫 모태 이방인 고넬료가 주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11장에서는 안디옥에서 첫 이방인 교회가 세워집니다. 

여러분 너무나 놀라운 순간들 아닙니까? 
본격적으로 복음이 땅끝, 열방과 민족으로 확장되기 시작하는 그 복된 순간에, 
또 다시 핍박이 일어납니다. 행12장 본문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 부분을 해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도와 교회 위에 임하는 고난은 늘 일상적이라고 여겨야 한다.
고난이 없는 것은, 하나님이 고난을 감당하기 위한 휴지기로 주신 것이지, 
고난이 없는 것이 당연하고, 고난이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여러분 우리도 약간 사고의 조정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성도의 삶의 고난은 필연적이다' 하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고난이 없는 것은, 하나님이 앞으로의 고난을 감당할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키는 휴지기 라고 생각해야지 
'고난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이렇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것처럼, 교회는 고난을 이겨내면서 자라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교회가 부흥하면 부흥할수록, 
복음이 확장되면 확장될수록, 교회를 향한 핍박은 점점 더 커집니다. 

고난과 핍박이 없이 지금 교회가 자라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죠. 우리의 삶도
고난을 이겨내면서 한 사람의 신앙이 자라는 것입니다. 

고난과 핍박이 없이, 신앙이 자라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말씀대로 살아갈 때, 반드시 세상에 핍박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세상이 주는 핍박을 피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꾸 말씀을 타협하고, 말씀을 거스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자랄 기회를 자꾸 놓칩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할 수 있는데, 
내 힘으로 그때마다 사니까, 하나님의 일하심의 흔적들이 
내 삶 가운데 뚜렷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고난이 좀 있다 하더라도, 내가 말씀대로 살아 봐야 
그 말씀의 능력을 우리 삶 가운데 실제로 경험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정말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을 지켜주시는구나, 인도하시는구나!' 
그런 믿음의 고백이 나오는데, 
여러분 그런 고백들이 오늘날은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야 할 성도가 
오히려 세상이 아니라, 말씀을 거스르고, 세상과 타협합니다. 
세상이 두려워서 그런 거죠. 세상이 주는 불이익과 핍박이 두려운 거죠. 

아닙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 가운데 불이익이 있다 할지라도 
말씀을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고난과 핍박이 없이는 신앙이 자라는 게 아닙니다. 
그런 핍박과 고난을 이겨내면서, 한 사람의, 한 교회의 신앙이 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을 보셨습니까? 
성도의 인생도 마찬가지죠. 고난이라는 흔들리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만을 섬기는 참된 믿음의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제가 말씀을 드리지만, 예수를 믿는 순간, 고난은 하나의 패키지와 같습니다. 
고난이 없는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 구주가 고난을 받았는데, 그분을 따르는 우리가 고난을 피할 수 있다... 
고난이 사라진다...?' 여러분 그건 절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거죠. 
여러분 그건 철저한 인본주의적 생각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계속 반복해서 교회에 핍박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울의 회심으로 박해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교회는 새로운, 더 큰 박해를 받습니다. 

그 이전까지의 고난은 대부분 종교 지도자들과, 유대인들과, 
종교적인 영역에서 많이 일어났다면, 
이제(행12장)부터는 정치적인 권력이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헤롯(아그립바 1세)이라는 왕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공동서신이나 디모데전후서를 보면, 
AD 64년 로마시 대화재 사건을 계기로, 
그 이후부터는 '로마황제의 핍박'이 시작됩니다. 네로 황제 때부터죠.
이때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이 비슷한 시기에 순교하죠.

이렇게 성경은, 유대교 종교지도자 → 유대 왕 → 로마황제로   
기독교회에 대한 핍박의 범위와 강도가 점점 확장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생기는 거죠. '헤롯이 느닷없이 교회를 핍박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대체 뭐 때문에 잠잠하던 헤롯이 교회를 핍박하는가?' 

여기에는 정치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유대의 왕이 된 배경이 있습니다. 
이 헤롯 아그립바 1세는, 4살 때 로마로 유학을 갔습니다. 조기 유학을 간 것이죠. 

로마에서 30년을 살았는데요. 헤롯 대왕의 손자니까 금수저 아닙니까? 
로마에 가서도 금수저들과 어울렸습니다. 주로 로마의 황제 가족들과 친분을 쌓았습니다. 

그 가운데 친했던 사람이 누구냐면, 우리가 앞서 살펴봤던 글라우디오 황제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큰 흉년이 일어났을 때가 글라우디오 황제의 통치 때였습니다. 

이 글라우디오 황제의 절친이 헤롯 아그립바 1세였습니다. 
둘이 동갑내기 친구였던 거죠. 친구니까 한 자리를 주었겠죠. 
유대를 다스리는 자리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헤롯 아그립바가 1세가 유대를 다스리는 왕이 되었습니다. 
유대를 다스리려면 무엇보다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야 자신의 권력 기반이 유지되거든요.

그때 그의 눈에, 그리스도인들이 들어온 것입니다. 
이들은 유대인 지도층들의 미음을 받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이단이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고약한 이단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저주받은 그 죄인인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다는 것은, 유대교인의 입장에선 도저히 말도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지금 교회의 멤버가, 이방인으로까지 확대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심기를 심히 건드렸던 거죠. 

안 그래도 기독교에 대해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어떻게 유대인이 이방인과 교제를 하나? 
어떻게 한 교회 안에 함께 있을 수 있나? 
어떻게 안디옥의 이방인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에 들어올 수 있나?' 

이 일이, 유대교인들이 가졌던 반그리스도인 감정에 불을 지폈던 것입니다. 
이 일을 계기로, 예루살렘 교회가, 유대인들의 공공의 적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본문의 헤롯 아그립바 1세가 놓치지 않은 거죠. 
이 반 그리스도인 감정을, 헤롯이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을 죽이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살 수 있겠구나.. 
유대인들의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겠구나. 
그러면 내 지지층들이 결집을 하겠구나' 
이런 정치적인 판단으로, 헤롯은 사도 야고보를 죽이고, 사도 베드로마저 죽이려 합니다.

▲여기 야고보(12:2)는 세베대의 아들로서, 요한의 형제입니다.
이 야고보는, 베드로와 요한과 더불어서 예수님의 12제자 중에 핵심 제자였습니다. 
사도 중에서 첫 번째 순교자가 지금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 사도의 죽음을 바라보는 유대인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이 일을 너무나 기뻐했다고 말합니다. 12:3

헤롯 왕의 정치적인 판단이 대성공을 거둔 거죠. 
생각 이상으로 지지자들이 총결집을 했습니다. 

그래서 내친 김에 더 큰 거물을 잡아서 처형하려고 했습니다. 
그 거물이 누구냐면 바로 사도 베드로였습니다. 그런데 시점이 문제였습니다. 

베드로를 체포해서 수감시켰는데, 하필 무교절 기간이었습니다. 
여러분 무교절은, 유월절 이후에 일주일간 지키는 절기입니다. 
이 절기에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이 기간에는 재판을 하거나 처형이 금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잡았지만, 바로 처형을 하지 못하는 거죠. 일단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래서 무교절이 끝나면, 바로 처형하려고, 철통같이 감시를 했습니다. 

◑12:4절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인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
 
군인 4명씩 4조를 이루어서 베드로를 감시를 했습니다. 
한 번에 4명의 군인이 베드로를 감시한 것이죠. 
2명은 베드로와 함께 옥에 있고요. 나머지 2명은 문 밖에서 지키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4명이 한 조를 이루어서, 4조가 돌아가면서 쉴틈 없이 교대로 베드로를 감시했습니다. 
총 16명이 베드로 한 사람에게 붙은 거죠. 
그만큼 베드로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철통같이 감시를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마지막으로 눈여겨볼 장면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펴봤듯이 베드로가 감옥에 갇힙니다. 그런데 6절을 한번 보십시오. 
시간이 어느덧 흘러서, 처형 전날 밤이 되었습니다. 

전날 밤은 무교절이 끝나는 전날 밤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전날 밤은, 베드로가 사형을 당하기 전 전날 밤입니다. 

그러니까 이 밤은, 베드로에게 있어서는 어떠한 밤입니까? 이 땅에서의 마지막 밤입니다. 
더 이상 내일의 밤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이 밤이 지나면, 베드로는 야고보처럼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지금은 무교절 기간입니다. 
여러분 유월절, 무교절은 유대인들에게 최고의 절기입니다. 

유월절과 이어지는 무교절은, 이스라엘이
애굽의 노예로부터 해방된 날입니다. 
(*이 두 절기를 합쳐서 '유월절'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4)

이 날은, 우리나라의 815 광복절 이상의 의미가 유대인들에게 있습니다. 
이 절기에 그들은요. 민족적인 최고의 자긍심을 가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다. 우리는 홍해가 갈라지는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체험했던,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특별한 민족이다.' 

그런 잔치같은 분위기에서 '헤롯이 베드로를 죽인다?' 
그렇게는 못 하는 거죠.
그래서 유월절(유월절+무교절)이 끝나자마자, 베드로를 죽이려 계획했던 것입니다. :4

그걸 베드로가 모를 리가 없었겠죠. 헤롯이 야고보를 죽였듯이 자기도 죽일 것을 
베드로도 알았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 전날 밤에 베드로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인생의 마지막 밤이었을 이 밤에, 감옥에서 베드로는 뭐를 했을까요?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아마도 너무나 두렵지 않았겠습니까? 

▲박효진 장로님이라고 계십니다. 이분이 쓰신 책을 제가 오래전에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고치지 못할 사람은 없다>라는 책이었는데, 이분의 직업이 교도관입니다. 

이분이 하는 말씀이, 감옥에 잡혀온 사람 중에 사형수들이 있지 않습니까? 
자기가 많은 사형수들의 최후를 지켜봤다고 합니다. 
무려 39명의 사형수가 이 땅을 떠나가는 장면을 옆에서 지켜보셨다고 합니다. 

사형수가 죽기 전에 기도해주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분이 
사형수들에게 그렇게 복음을 열심히 전한다고 하십니다. 

물론 복음을 잘 받아들이지는 않겠죠. 
어떤 사형수는 뱀의 눈처럼 자신을 째려본대요. 여러분 얼마나 무섭겠어요?

그중에 그분이 기억나는 사형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극렬하게 예수님을 안 믿겠다고 저항을 하셨대요. 
천국과 지옥 얘기만 하면, 아예 자기 귀를 틀어막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형 날짜가 잡혀서, 이 사형수가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사형장에 들어오는데요. 
장로님은 걸어오는 사형수를 보는데요. 
그의 눈을 보니까, 온몸이 공포에 사로잡힌 눈이었다고 합니다. 

입은 이미 돌아가 있었고,
눈은 반쯤 뒤집혀서 흰자밖에 안 보이고요. 
심지어 입가로 침이 질질 흘리면서 들어오더래요. 

그래서 사형 절차가 정상적으로 진행이 안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형수만 그런 게 아니랍니다. 사형장에 들어올 때는 모든 사형수가 
그렇게 잔인했던 사형수가, 모두가 벌벌 떨면서 들어온다고 합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짐승도, 도살장으로 끌고 가면, 
버티고 발악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아무리 잔인하고 강퍅한 사형수라도, 담대하게 들어오는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걸음을 제대로 걷지를 못하고, 걸어오더라도 최대한 천천히 온다고 합니다. 
죽기가 무서운 거죠. 조금만 더 숨쉬고 살아보겠다고... 

또 어떤 이는, 목이 터져라 '엄마!'를 부르며 들어온다고 합니다. 
그렇게 악을 쓰고 끌려와서 사형을 당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베드로가, 그런 사형수로 감옥에 잡혀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몇 시간이 지나면, 동이 트면, 사형장으로 끌려갑니다. 
그러면 당연히 두렵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전날 밤 베드로에 대한 성경의 묘사는, 하나의 문장으로 끝납니다. 
'베드로가 두 군인들 틈에서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잤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지금 잠이 올 수 있습니까? 
저는 이 본문을 읽는데요. 도저히 읽어도 이해가 되질 않더라고요. 

그런데 잠깐 잠든 게 아닙니다. 잠을 설치다가, 잠깐 꾸벅하고 졸았던 게 아닙니다. 
굉장히 깊이 잠들어 있습니다. 
천사가 나타나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깨울만큼, 그는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7

:7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천사가 나타나서 베드로를 구출해 주었습니다. 
천사가 나타났을 때, 초자연적인 빛이 강하게 임했다고 말씀합니다. 
'옥중에 광채가 빛났다'고 말합니다. 광채가 감옥을 채운 거죠. 

그러면 충분히 눈이 부실만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베드로는 깨어나지를 못합니다. 
지금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든 상태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깨웠습니다. 
여기 '치다'(파타쏘)는,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칼로 치다' 할 때와 같은 말입니다.
보통 '칼로 내리치다'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세게 친다'는 뜻이죠.
그제야 비로소 베드로가 일어납니다. 살살 흔들어 깨운 게 아니라는 거죠.

그런데 베드로는 일어나고 나서도 잠이 덜 깼는지, 
이게 생시인지 환상인지 분간을 하지 못합니다. 
그 정도로 깊이 잠이 들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언제요? 
이 땅에서의 마지막 전날 밤이에요. 몇 시간 있으면 사형장에 끌려가기 전날 밤이에요. 

여러분 이 장면이 이해가 되십니까? 어떻게 지금 잠이 올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베드로는 잠을 자고 있었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는 죽음이 하나도 두렵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베드로는 어떠한 자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다 베드로의 흑역사를 아시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 이면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시인하는 순간, 나도 예수님처럼 체포되고 심문을 받을 것이다. 
그러면 나도 예수님처럼 목숨을 잃을 수 있다. 십자가에 달릴 수도 있다' 생각했습니다. 
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베드로로 하여금 예수님을 부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공포가 그를 꽉 사로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베드로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눈앞에서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죽음도 두렵지 않았던 것입니다.           

죽음의 두려움이 아니라 부활의 확신이 
비록 죽지만 죽음 이후에 부활하여 장차 하늘에 계신 구주를 뵈올  
그 부활의 소망이 베드로를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곤히 잠을 잘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좀 전에 말씀드렸던 그 사형수 있지 않습니까? 
침을 질질 흘리면서 사형장에 들어온 사형수 있잖아요. 

장로님이 그 사형수를 보는데 100% 확신이 들더래요. 
'아 지옥으로 지금 끌려가고 있구나' 

그래서 반사적으로 그 사형수에게 뛰어갔다고 합니다. 
그러고서는 교도소장님에게 부탁을 했대요. 
'죽기 전에 예배 한 번만 딱 드리게 해달라고' 

그래서 그 사형수를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요한복음 1:12~13절 말씀을 펼쳐서 보여줬다고 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그런데 워낙 공포에 질려서요. 눈으로 초점을 맞추지 못하더래요. 
그래서 이제 그의 귀에다 대고, 큰 소리로 몇 번을 읽어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어떤 미동도 없더래요. 마치 껍데기만 남은 연체 동물처럼 
너무나 공포에 사로잡혀서,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서, 
정말 그냥 말 그대로 혼비백산한 상태였던 거죠. 

그래서 교도관들 가운데 교회를 다니는 분들을 다 불러서 
함께 기도를 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읽어주고요. 

그런데 그때 갑자기 그 사형수가 꿈틀꿈틀 거리더니 
손을 들어 위로 쫙 펼치면서 신앙을 고백했다고 합니다. 
'주여, 이 죄인을 받아주심을 감사합니다. 주여 이 죄인을 용서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때 그의 얼굴을 보는데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고 합니다. 

침을 흘리고 눈이 뒤집혀져서, 너무나 흉물스러웠던 그 얼굴이 온데 간데 없고 
너무나 예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리고서는 교도관들에게 감사하다고 일일이 인사를 하더래요. 
그리고서는 사형장으로 걸어가는데, 갑자기 찬송가를 불렀다고 합니다.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 말 들으사, 죄인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그 찬송을 개인적으로 가르친 적이 없는데, 그 찬송을 부르면서 사형장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두려움과 고통에 짓눌려서 지옥으로 끌려가던 사람이, 
밝고 해맑은 사람이 되어서 죽음을 탐대하게 맞이한 것입니다. 

'인애하신 구세주여' 그 찬송을 부르면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순간 철커덩 소리가 나면서 삶을 마쳤다고 합니다. 
죽음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았던 거죠. 

마치 오늘 베드로처럼요. 그래서 베드로는 곤히 잠을 잘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게 베드로의 잠입니다. 

▲여러분 저는 기독교의 매력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죽음 앞에서도 편히 잠을 잘 수 있는 은혜! 
이 놀라운 신비가 기독교의 신비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에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마저도, 
그 완악한 사형수들도 두려워하는 죽음마저도, 
편안하게 자는 듯이 맞이하는 신비... 이것이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기독교의 신비입니다. 

그런데 이 신비가 우리에게도 허락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예수를 진실로 믿는다면, 우리는 죽음을 앞두고도 잠을 잘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평안히 자는 듯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죽을 때뿐만이 아닙니다. 이 땅을 살아갈 때도 우리는 편히 잠을 잘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안식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시121:4절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러분 잠을 잔다는 건 무능력의 상태를 말합니다. 
잠을 잘 때 인간은 끝없이 무력해집니다. 

잠을 잘 때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잠을 자는 시간은 가장 무력하고 무능한 시간입니다. 

아무리 강한 사람도 잠을 자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구원하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은,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잠을 잘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거죠.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은, 주무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장 무력한 그 시간에도, 하나님은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위 4절을 읽을 때,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처럼 들립니다. 
하나님이 마치 제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들립니다. 
'괜찮아 정관아, 고민하지 말고 어여 자! 괜찮아, 나에게 맡기고자 마!'
마치 이런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처럼 들립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가 너무나 커 보일 때가 있습니다. 
내가 가진 힘으로는, 그 문제를 도저히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 문제로 인하여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누워는 있는데 잠이 안 오는 거죠. 

그런데 안 잔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잠을 자지 못하고, 밤잠을 설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자려는데 잠이 오질 않는 거죠. 근심과 걱정에 사로잡혀서 잠을 자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이 마치 시121:4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를 믿어! 네가 자는 그 시간에도, 나는 졸지도 않고 일하고 있어. 
나는 내일에 대한 계획이 있어. 나에게는 너의 내일에 대한 방법이 있어. 
내가 일할 터이니, 너는 나를 믿고 오늘 밤, 그리고 내일 밤에도 편하게 눈을 감으렴!' 

마치 그런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의 말씀으로 들립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나를 지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우리는 편히 잠을 잘 수가 있습니다. 
이게 이 땅에서 누리는 성도의 안식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이 주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맡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베드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잠을 잘 수가 있었습니다. 
동시에 베드로는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맡겼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 베드로가 자신을 구해 달라고 기도를 했거나, 
이 감옥에서 나를 빠져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한 흔적이 
문맥상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정말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사람이 죽어야 할 때가 있는데 베드로는 '지금이 하나님이 정하신 그때이다' 
자신이 죽어야 할 때라고 믿었습니다. 
그때라고 생각하고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었던 것입니다. 

마치 십자가에서 죽음을 앞둔 예수님의 기도와 같았던 거죠.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 예수님의 기도처럼, 베드로는 주님께 맡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가졌던 그 신뢰의 표현이.. 깊은 잠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베드로의 신뢰, 베드로의 맡김이, 베드로의 잠으로, 안식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갈 때, 이 잠의 은혜, 안식의 은혜가
우리에게도 허락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갈 때, 여러 가지 많은 염려들을 만납니다.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삶의 영역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은,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우리를 지키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신뢰하며, 그분께 맡기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를 짓누르는 수많은 두려움 속에서도 
잠의 은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우리는 잠의 은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놀라운 신비와 은혜가 새롭게 시작되는 한 주간에도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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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사계절의 사나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토머스 모어 경이 법정에 서게 됩니다.

평소 알고 지내던 리처드라는 젊은이가 증인으로 나와서

그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기 위해서 위증을 합니다.

 

그 리처드는, 거짓 증언의 대가로 웨일즈 지방의 검사장 자리를 얻게 됩니다.

결국 토머스 모어 경은 유죄판결을 받지만,

그는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리처드를 슬퍼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리처드, 온 세상을 다 얻어도 영혼을 잃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네.

그런데 자네는 영혼을 판 대가가 겨우 웨일즈라니...”

 

혹시 우리는 우리 영혼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있습니까?

세상에서, 우리 생명을 주고서라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있습니까?

그게 고작 세상의 재물이나 사람의 영광은 아닙니까?

영혼보다 내 한 몸 편한 게 더 중요합니까?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못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8:36

 

그러나 '사계절의 사나이' 토머스 모어는, 자신의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헨리 8세에 맞서서, 직언을 하고, 바른 방향을 제시했습니다만,

왕에게 맞섰다는 이유로, 처형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는 비롯 몇 년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오는 세대에 대대로 존경을 받는,

4계절에도 변치 않는 사나이가 되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