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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돛을 올리다

LNCK 2024. 6. 29. 11:04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사도행전

https://www.youtube.com/watch?v=LLyocpipUkE
복음의 돛을 올리다        행13:1~12         

▲도입
행13장은 사도행전의 제2부가 시작되는 장입니다. 
중심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옮겨갑니다. 

그러나 복음은 안디옥에 머무르지 않고, 안디옥을 중심으로 해서 이제 세계로 뻗어나갑니다. 
안디옥교회의 영향력은 안디옥에 갇혀있지 않습니다. 
저희 교회의 영향력이 포항 안에 머무르지 않기를 원합니다. 

우리 교회 입구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는 포스트를 붙여 놓았습니다.  행19:21
포항을 시작으로 저 유럽까지, 중국을 지나서 프랑스, 로마까지 가는 
이 큰 꿈을 우리 마음에 좀 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설교는, 안디옥에서 바나바와 사울이 선교사로 파송받는 대목입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역자였는데, 안디옥으로 보내집니다. 

바나바가 사역하는 가운데 안디옥에서 교회가 불같이 일어나니까, 사람들이 미어 터집니다. 
제대로 성경을 가르치고 양육할 지도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멀리 다소까지 가서, 찾아서 모시고 온 분이 사울이에요. 
여러분 바나바는 교회의 기둥이었고, 
사울 곧 바울은 교회에서 가장 탁월한 사역자였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을, 안디옥 교회는 선교사로 파송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우리는 상상하기 힘듭니다. 

여러분 한국에 존경받는 영락교회의 한경직 목사님을, 
교회가 한참 성장할 때에 선교사로 보냈다는 것과 마찬가지죠. 
여러분,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선교도 좋지만, 이 목사님은 너무 훌륭해서 우리 교회에 계셔야 됩니다. 
이 분 없는 우리 교회는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하는 두 분을 선교사로 보낸 거예요. 

안디옥 교회는, '우리 교회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세계를 향한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하나님 하시는 일에 쓰임받아야 하는 교회입니다' 하는 고백이 분명한 선교적 교회였습니다. 

◑선교적 관점으로 성경 읽기

13:4절에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를 타고 구브로 섬에 갑니다. 

여기서부터 이제 우리가 잘 아는 사도행전 후반부의 뼈대가 되는 바울의 1차전도여행, 
그 다음에 2차전도여행, 3차전도여행이 시작됩니다.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이라는 말이, 우리 귀에는 굉장히 익숙합니다. 
그리고 옛날부터 성경책 뒤에 지도가 나오는데, 거기에 '1차 2차 3차 선교여행' 지도가 있죠.
그래서 '이게 중요한가 보구나' 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2천년 역사 속에서,

이 사도행전을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서,

이렇게 구조화 해서 해석하고 불러온 것은 얼마 안 됐습니다. 
19세기 이전에는 없었어요. 

19세기에 영국을 중심으로 해외선교운동이 일어났는데  *본격적인 개신교 선교가 시작됨
그때부터 사도행전을 이런 방식으로 읽기 시작한 겁니다

성경은 같은 성경이고 그대로지만, 교회가 바뀌어 가면서 
교회의 실천에 의해서, 성경 읽기의 방향이 형성되어 가는 겁니다. 

성경 읽기가 교회의 실천을 이끌어가고, 
또 교회의 실천이 거꾸로 성경을 읽는 방식을 결정해 가는 겁니다. 

여러분 선교를 해야, 선교의 메시지를 제대로 읽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 정의와 인권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정의를 외치고 인권을 보호하는 교회가 될 때, 
그 메시지를 우리가 제대로 읽을 수 있는 겁니다. 

실천을 해야, 진리의 말씀이 우리 눈에 들어옵니다. 

▲성경에 본래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가 잘 몰랐어요. 관심을 갖지 않았어요. 
관심을 잘 갖지 않았던 그 성경의 진리가, 이제야 보이기 시작했다는 거죠. 

종교계획이 그랬고요. 19세기 선교운동이 그랬던 겁니다. 

지금도, 우리 세계 기독교에서, 한국에서도 
아주 중요한 한 흐름이 생겨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것은 바로 '선교적 성경 읽기' 입니다. Missional Reading of the Scripture
최근 이것이 아주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선교의 이야기'라면, 
당연히 성경 어느 부분을 봐도, 선교가 그 주제가 되어 있다 라는 거죠. 
그래서 그 관점으로 성경을 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서울 삼일교회에서 <미셔널 신학연구소>라는 연구소를 개설했습니다. 
그리고 <선교적 성경해석학>이라는 책을 번역 출판했고요. Reading the Bible Missionally

'요한계시록도 선교적 성경이다' 그래서 최근에 <요한계시록 오늘을 위한 미래>라는 
책을 다시 출판했습니다. 

또 일상사역연구소 에서 '선교적 성경해석학, 튜터링 북클럽' 이런 걸 시작했어요. 

또 '요한복음을 선교적으로 읽자'는 <요한의 선교적 복음>이란 책, 
<사도행전 선교적 읽기>는 제가 쓴 책이죠. 

<야고보의 편지> 책은, 야고보서를 선교적으로 읽자는 주제로, 
아신대 교수님이 쓰신 것입니다. 

이렇게 갈라디아서도 나오고 있고요, 

'성경 각권을 선교적으로 읽자'라고 하는 게 
세계 교회와 선교에 아주 중요한 흐름을 형성해가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을 우리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올 2024년 한해, 사도행전 공동설교 하는 게 
이게 지금 우리 한국교회나 세계교회 전체에서도 
아주 중요한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연고지'를 찾아서 갔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의 선교여행은, 수리아의 안디옥이라는 데서 출발을 했죠. 
첫 행선지는 구브로입니다. 영어로는 사이프러스죠.
지중해 동쪽, 터키와 그리스 사이에 있습니다.

구브로 섬은 아주 커요. 우리 한반도보다 조금 작은 섬입니다. 
1차선교여행이 첫 행전지로 왜 구브로 섬으로 갔을까요? 

바나바가 이 구브로 출신이에요. 자기 고향에 가서 전도하는 겁니다. 
여러분 세계선교회의 큰 목표를 갖고 길을 나섰습니다. 

'땅 끝까지 가라'
'막상 어디로 가야 하지?'
'그럼 내 (바나바의) 고향부터 가자!'  

거기 가면 아는 사람도 있고요. 
여러분, 우리가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 가는 거는 쉽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더욱더 그랬습니다. 

'땅 끝까지 가라!' 그러셨지만, 어딘 줄 알고 갑니까? 
사실 우리 옆 나라도 가기 힘들어요. 말도 안 통하고요. 

그래서 세계적 비전을 품은 선교사라 하더라도 
처음에는 겨우 자기 고향을 찾아갔습니다. 

▲구브로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갔을까요? 
여러분 구브로에 가서 전도하면서, 총독 서기오 바울이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아마 구브로에 가서 총독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바나바의 집안이 그 섬에서 꽤 유력한 집안이었기 때문이다... 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구브로 다음에는, 바나바와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가요. 
지도를 보면, 비시디아 안디옥은 저 북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구브로 다음에 갈 만한 도시가 아닙니다. 거기로 가는 길 중간에 큰 도시들도 많았고요. 
일반적으로 바울의 2차, 3차전도여행의 경로를 쭈욱 보면, 
주위에 큰 도시, 뱃길이 있거나 큰 도로가 있는 인근 도시 중심으로 가서 전도했습니다. 

 

그런데 구브로에서, 비시디아 안디옥 저 윗 지방까지 간 거는,
대단히 이례적이고 특이한 행보입니다. 왜 하필 거기로 갔을까요? 

거기가 멀기도 하고, 또 타우우스 산맥을 넘어야 하는... 
산적들이 출몰하는 굉장히 멀고 험한 길입니다. 거기가 큰 도시도 아니에요. 산골짜기예요. 
왜 거기로 갔을까요? 다른 곳에 갈 곳도 많고, 가는 중간에도 큰 도시들이 많은데요...

거기 비시디아 안디옥이, 구브로 섬의 총독 서기오 바울의 고향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비문들이 발견되거든요.     주1)

비시디아 안디옥은 갈라디아 지방에서 영향력이 있는 도시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이 서기오 바울 총독이, 
'내 고향에 가서 전도하시오. 내가 추천서를 써줄 테니...' 그래서 거기로 갔던 것 같아요. 

여러분 세계선교회의 큰 장을 열었지만, 사실은 처음에는
자기의 연고가 있는 곳, 아는 곳, 
비빌 언덕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그렇게 조심스럽게 다녔습니다. 
그런데 뒤로 갈수록 사정이 바뀌어 갑니다. 

2차전도여행 때 바울도,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이 있었어요.
('거기 가면 전도가 쉽게 되겠다' 이렇게 생각되는 곳이 있어서, 거기로 가려고 했죠.
그런데 계획이 틀어집니다)

◑점점 선교가 '무연고지'로 가게 됩니다

행16장에 가면 이런 대목 나옵니다. 
16:6~9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도 나름대로 가고 싶은 데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가볼 만한.. 좀 전도가 되겠다는 지역 중심으로.. 막 로드맵을 그리는데 
그게 잘 안 돼요. 그래서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바울은 환상을 봅니다.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나타나서' 여러분 이게 무슨 말이에요? 
여러분, 뉘앙스를 보세요. 아는 사람이었을까요/ 모르는 사람이었을까요? 
마게도냐 사람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에요. 

만약에 마게도냐, 그리스 이 큰 대륙에 
아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그 사람 얼굴이 보였을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바울도.. 아는 사람 중심으로 다니려고 했는데, 
성령은, '모르는 사람에게로 가라'고 인도하셨다는 거죠. 

우리가 선교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아는 선교사님, 내가 아는 농어촌교회 목사님, 
우리가 어디서 선교 요청이 올 때, 아는 사람을 통해서 옵니다. 

어떤 아는 선교사님, 어떤 아는 목회자가 전화가 오든지, 이메일이 와서 
'한 번 와 주세요. 도와주세요!' 그러면 그 분과 연결되기가 쉽죠.

그런데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와 달라?' 되게 황당한 상황입니다. 
바울이 마게도냐 인의 환상을 보기는 했지만, 그게 쉽게 가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거죠.

그렇지만 바울은, 그 환상을 보고서는, 
자기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대륙을, 그제서야 밟는 거예요. 

그 전에는 결코 마게도냐에 갈 생각을 못했습니다. 
이러면서 이 선교의 행로가 점점 나의 예상, 내 주도권을 벗어나는 거예요. 

급기야 20장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20:22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하는지 알지 못하노라' 

무슨 일을 당하는지 알지 못하고 가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본래 부름 받아 나섰을 때도 '내가 너에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가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예전에 교회에서 그런 찬송을 많이 불렀잖아요.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라.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라'

이런 분들에 의해서 오늘까지 복음이 전해지고 
한국에까지 교회가 세워진 줄 믿습니다. 

여러분 한국이 처음 복음 전해 받을 때만 하더라도 
세계에서 가장 외지고, 가장 안 알려져 있고, 가장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들이 왔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게 되었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기는 가는데, 
너무 추운 데는 빼고, 너무 위험한 데는 일단 제외하고, 
거기 가면 아이들 교육이 너무 힘들어서 안 되고, 거기는 음식이 안 맞고...'

여러분, 목회자로 헌신해놓고도, 지방에는, 농어촌 교회에는 안 갈라 그러고요... 
교회 안에서도, '어디든지 가오리라 무엇이든지 맡겨 주십시오' 그런 자세는 보기 힘들고, 
'나는 왜 이런 부서 맡기느냐? 나는 좀 폼 나는 부서 안 맡겨주냐?' 그렇게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약해질 수밖에 없죠. 

◑선교적 교회는 다양성, 이질성을 다 포용합니다

하나님의 이끄시는 길을 따라 나선 사람은, 필히 새로운 친구를 만나게 돼 있습니다. 

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바나바와 사울이 처음(바나바)과 끝(사울)에 나옵니다. 
이 두 사람은 우리가 아는 분들이고요, 
중간에 세 명은 우리가 다 몰라요. 그래서 설명이 필요합니다. 

▲1 니게르 라는 시므온
니게르는 니그로 라는 말이에요. 흑인입니다.
이 흑인이 교회에 들어와 있을 뿐 아니라, 중요한 리더가 되었습니다. 

*니게르 라는 시므온을, 어떤 학자들은 '구레네 시몬(눅23:6)'과 동일한 인물로 봅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유대인이죠. 니게르 시몬은 다른 인종입니다. 
우리 교회에, 한국에 있는 교회에, 
예를 들면, 필리핀 사람, 중국 사람, 러시아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이 들어와 있고, 

뿐만 아니라 그들이 교회의 리더가 되었다는 거예요. 
장로가 되고 목회자가 된 거예요. 대단히 개방적인 교회입니다. 앞서가는 교회였죠. 
그게 선교적 교회예요. 

여러분 그래서 밖으로 나가서 선교하기 전에 
여기 이 땅에 살면서 우리가 다양한 사람들을 포용할 줄 알아야 
선교를 할 수 있는 거예요. 그게 선교적 교회입니다. 

여러분 간혹 젊은 사람들이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선교에 헌신하겠습니다' 하고 결단하고 공표합니다.

그럼 그에게 물어봅니다. '너 작년에 전도 몇 명 했냐? 전도하려고 노력해 봤냐?' 
여러분, 자기 생활에서 전도할 생각은 전혀 안 하면서 
내가 은혜 받았다고... 러시아 가서, 브라질 가서 전도할 수 있겠습니까? 

내 삶의 현장에서, 먼저 전도하려고 애써야 되는 거예요. 
그런 사람이 나가서 선교도 할 수 있는 겁니다. 

선교지에 간다고, 갑자기 선교사가 되는 게 아니에요. 
멀리 가서 땅끝에 가서 다른 인종들하고 섞여 살 생각을 한다면, 
여기서부터 다른 사람들하고 사이좋게 지낼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게 안디옥 교회였고, 선교적 교회였어요. (흑인을 받아들였습니다)
이게 선교적 교회의 대단히 중요한 출발입니다. 

▲2 구레네 사람 루기오
로마에서 루기오는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본 절의 루기오는, 구레네 사람들과 함께 안디옥의 이방인들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전파한 사람들 (11:20) 중의 하나로 보는 설이 유력합니다.

▲3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
안디옥 교회는 인종적으로 다양할 뿐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으로도 그랬습니다. 

'헤롯의 젖동생'이란, 헤롯과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친구죠. 베스트 프랜드죠. 
아마도 최상층 귀족이었을 거예요. 놀라운 일입니다. 

더구나 헤롯은 극악무도한 사람이잖아요. 바로 앞에 12장에서 우리가 보았습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얼마나 잔인하고 포악한 사람이었는지... 
그가 얼마나 교만했고... 그는 교회의 원수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측근, 죽마고우인 마나엔이,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나는 그런 사람 우리 교회에 오는 거 반대일세!' 
극구 반대합니다. 배제합니다... 그런 분들이 있어요.

그래서 그런 분이 교회에 오면, 인사도 안 하고, 안 마주치죠. 
그 사람이 여기 앉으면, 나는 저기 가서 앉고, 
그 사람이 2부예배 나오면, 나는 1부예배 나가고...

그 사람과 밥같이 먹는 자리가 마련되면, 자기는 집에 돌아가 버리고... 
그 사람이 찬양대 하면, 자기는 찬양대에서 빠져버리고...
근데 그 사람이 장로가 되고 리더가 되었다? '나는 교회 떠날래'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비일비재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는, 이 모든 이질성, 다양성이 자연스레 녹아 있었기 때문에 
세계 선교를 준비하는 선교적 교회가 되었던 겁니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는 화해와 다양성의 모델이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도 그랬죠.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세리 출신도 있고요, 열심당 출신도 있습니다. 극과 극입니다. 
세리는 극우파라면, 열심당은 극좌파이죠. 

예수님이 아니었으면, 평생 서로 얼굴을 맞대고 볼 수 없는 사람들이었죠. 
만약에 둘이 한 자리에 있었다면, 둘 중에 하나는 죽어야 되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친구가 되고, 동료가 되는 거예요. 
선교는 거기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바울 일행이 구브로에 갔을 때 또 이런 사람을 만났습니다. 

13:7절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서기오 바울은 로마 최상층 총독입니다. 놀랍죠? 
여러분 당시 많은 사람들은, 로마 제국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난 주일 설교를 기억하십니까? 
행12장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죽음은, 사실은 유대 왕이 아니라,

(그를 예로 들어서) 로마 황제와 그 권력에 대한 심판을 예언, 경고한 것입니다. 

맞습니다. 성경에 그 메시지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가, 로마 총독 근처에 가서 얼쩡거린다? 
'야 사도바울, 너 그럴 줄 몰랐다. 변심했냐? 너는 타락했다. 너 매국노냐?' 
그럴 수 있잖아요. 

여러분,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고, 약한 사람들을 우선시하고 
더 관심을 갖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부자나 유력자라고 해서, 배제해서도 안 됩니다. 

초대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귀하게 여겼지만, 부자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을 
구원받아야 할 불쌍한 죄인으로 안아주고 포용했습니다. 

성경은 악한 권력에 대한 심판을 말하지만 
권력자들은 역시 그들도 구원받아야 할 한 인간입니다. 

최근에 전직 대통령 MB 이 우리 교회를 다녀가셨습니다. 
정치적 입장에 관계없이, 나라에 봉사한 분으로 우리 교회가 예의를 갖추어 맞이했습니다. 

다른 분들은 '포항제일교회가 대통령을 배출한 교회다'... 그래서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는데 
사실 우리 교회는 평소에 그런 말을 잘 안 하잖아요. 

모든 성도가 다 귀하고, 다 자랑스럽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에 다른 당 후보로 와서, 우리 교회에서 또 대통령이 배출된다면 
우리는 같은 기조로 축복하고 환영하고 위해서 기도할 것입니다. 

▲성경은 '총독 서기오 바울이 지혜에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13:7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이게 무슨 말일까요? 
당시 로마 기준으로 보면, 아마 스토아 철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는 뜻일 거예요. 
즉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거는 '지적인 개방성'을 말하는 겁니다. 
기독교에 '세상 학문은 필요 없어!' 그게 아니고요. 
인문학도 제대로 하면, 복음에 이르는 다리 bridge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지적인 세계와 담을 쌓는 게 아니에요. 인문학과 열린 대화를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 같은 사람이 귀한 겁니다. 

이분은 단순히 헬라 말을 잘 했을 뿐 아니라, 
당시 세계 지식인의 언어로, 복음을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었어요. 

특별히 여러분, 바울서신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스토아 철학의 용어를, 복음으로 잘 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하고, 새로운 친구가 되게 만듭니다.   중략
 
◑선교를 하는 중에, 새로운 자기 정체성을 발견합니다 

13: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
이제 드디어 사도행전에 '바울'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나오네요. 

과거에 우리는 '사울이 은혜를 받고 난 다음에 바울이 되었다' 이런 말을 많이 들었는데,
아니에요. 사울은 본래 바울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어요. 

9장에서 회심하고, 13장까지 오랫동안 '사울'이라는 이름을 써왔습니다. 
유대인이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베냐민 지파 사울이라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또한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이었기 때문에, 로마 시민으로 등록된 이름(바울)을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이방에 선교하기 위해서, 로마 이름을 쓰는 겁니다. 

한국 사람이 미국에서 태어났어요. 이름이 OOO인데 
제임스라는 영어 이름이 있습니다. 

미국이나 해외에서 사업을 하려고 하니까, 한국 이름보다 
제임스라는 영어 이름을 쓰는 게 더 편한 거예요. 

또 재미있는 것은, 서기오 바울이라는 이름과, 사도 바울의 이름이 겹칩니다.
같은 이름입니다. '파울로스'
아마 바울은 서기오 바울에게 자신을 소개하면서, '저도 이름도 바울입니다' 이랬을 가능성이 많죠. 

그래서 사울은, 세계선교를 수행하는 중에 자기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사울에서 바울로요.
그 이전에는 사울이란 이름을 쭈욱 써 왔으나, 앞으로는 '바울'이란 이름을 계속 씁니다. 
잘 들으세요. 회심뿐 아니라, 선교가 사람의 정체성을 형성합니다. 

이름을 바꾸어 쓴다는 것은, 정체성의 무게를 옮긴다는 겁니다. 
회심했기 때문에 바뀐 게 아니고요. 바울은 본래 가지고 있던 이름이에요. 

사울을 바울로 만든 것은, 회심이 아니라 선교입니다. 
만약 사울이 선교사로 나가지 않았다면, 
그냥 안디옥에서 목회 잘 하는 '사울'로 남은 인생을 계속 그렇게 살았을 거예요.

그러나 선교가, 하나님 부르심에 응답하여 나서는 삶이 
사울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나의 새로운 정체성'을 만드는 거예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배는 항구에 있을 때 안전하지만, 그것이 배의 존재 이유는 아니다'
A ship in harbor is safe, but that is not what ships are built for! 

세상 모든 사람이 잘 살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사람이 잘 사는 게 뭐예요? 
그냥 안전하게 늘 항구에 세워놓는 것, 수십 년 항구에 정박시켜놓고 
거기서 그냥 비 맞고, 바람 맞고, 사람들의 구경거리 되고, 그러면서 썩어가는 것.. 
그래서 가끔씩 페인트 칠하고... 그게 배의 존재이유입니까?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잘 산다'라는 것은, 
자기 존재의 이유를 깨닫고, 자기 존재의 이유를 실현하는 거예요. 

인간이 잘 사는 게 무엇입니까? 나는 무엇을 위해 지어졌습니까? 
여러분, 어떻게 살기를 바랍니까? 
여러분의 자녀가 어떤 삶을 살기를 바라십니까? 

그저 밥 세 끼 안 굶고, 사람들에게 큰 욕 안 먹고, 무병장수 하고, 정규직 취직 하는 것,
그게 아니잖아요.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의 삶은.. 무사 안전을 바라는 삶이 아니라, 
소명을 이루는 삶이 되어야 되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 안정이 내 삶의 목적이 되면... 저는 그런 사람 많이 봤습니다. 
안정이 목적이면, 결국에는 그 안정도 흔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100 % 안전한 삶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 항구는 세상에 없습니다

▲어제 우리 훈련 과정 중에서 '소명과 잠재력' 과목을 종강했습니다. 
여덟 분이, 10주 이상 모여서 정말 수련회도 하고 열심히 훈련 받았습니다. 

소명과 잠재력 과정은 
하나님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을 발견하고 
자신의 사명선언문 (미션 스테이트먼트) 대로 살도록, 독려하는 과정입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갖는 중요한 목표 중에 하나는,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가 다 자신의 삶의 Mission Statement 를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명을 이루며, 사명을 따라 살게 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결단하게 하고 가르치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선교적 삶이에요. 
선교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미셔널 처치, 선교적 교회입니다. 

여러분 모든 성도들이 선교적인 삶을 살게 도와주는 것, 자극하는 것,
격려하는 것, 끌고 가는 것, 함께 가는 것... 그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입니다. 
사도행전이 그걸 보여주고 있어요. 


▲정리합니다. 하나님의 선교입니다. 성령이 선교사를 보내셨습니다. 
새로운 만나는 사람이 생기고, 새로운 도전에 맞딱뜨리고, 
이전에 알지 못했던 어려움이 생기지만 
극복할 힘을 주시고, 그리고 사울이 바울로 바뀌는 새로운 정체성이 생깁니다. 

예수 믿었다고, 회심했다고... 여러분 자기 정체성이 그냥 생기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따라 살 때에, 새로운 자기 정체성이 생깁니다. 

설교자로서의 저의 소명은, 성경의 이야기를, 성경의 진리를 
여러분들에게 잘 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본입니다. 

여러분 진짜는요. 성경의 세계에 여러분을 초청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사도행전 설교를 들으면서 
'아 그랬구나, 옛날에 그랬군요...' 이게 이해가 되는 단계를 넘어서서, 

우리가 사도행전의 세계 안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우리가 성경의 세계 안에 들어가서 함께 걸어가는 것 같은... 
여러분 그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게 진짜예요. 

쉽게 말하면 우리가 손잡고 함께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도 배를 타고, 바울과 바나바가 출항했듯이 
그들을 이끌었던 그 격랑 속으로 우리도 함께 들어가는 겁니다. 
교회는 그 모험을 함께하는 공동체예요. 

여러분 성경을 읽고 말씀을 듣다 보면 
어느 순간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드라이브해서 끌고 간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그 역사의 물결이 나를 빨아들인다... 그럴 때가 있지 않습니까? 

제 인생에는 많았습니다. 내 계획으로 시작했는데, 
발을 들여다놓고 보니까 '야 이거 내 일이 아니구나. 하나님이 일하시는구나.. 
하나님이 훨씬 큰 계획을 갖고 내 삶을 이끌고 가시는구나' 

내 생각으로 구브로로 가려고 배를 탔는데요. 
배를 타는 순간, 하나님의 큰 교획 안에 발을 들여 놓는 거예요. 

모든 위대한 여정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내가 준비되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몰고 가시는 거예요. 

'나는 모르는 길, 나는 생각도 못했던 길인데 
지나 놓고 보니 그것이 가장 좋은 길이었다, 그것이 가장 의미 있는 삶이었다' 라고 
고백하게 되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설교자로서의 제 사명이, 성경의 세계로 회중을 초청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목회자로서의 제 사명이, 그 격랑을 성도들과 함께 헤쳐나가는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한국의 철학자 중에 김영민이라고 하는 아주 독특한 철학자가 있습니다. 
그 분은 이런 말을 하셨어요. 
'날지 못하는 것은 운명일지 모르지만, 날아오르려 하지 않는 것은 타락이다!'

우리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내가 날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런 꿈조차 꾸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비루한 삶입니다. 
그게 타락이라고 하는 거예요. 

꿈이 말라붙어버린 세대,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성령을 주셔서 
남종과 여종에 예언하게 하시고 노인들이 꿈꾸게 하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2:17

그게 성령 충만이고요. 그것이 말씀을 우리를 이끌어 하시는 삶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 따라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말씀 안에 있는 세계로, 우리가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면서 말씀 안에서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고 가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인가, 희망의 바다를 담대하게 항해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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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바울 일행이 구브로에서 왜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직행해서 갔을까요? 
학자들은 비시디아 안디옥이 구브로 총독 서기오 바울의 고향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서기오 바울이 구브로, 로마,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발굴된 비석들에 등장했습니다. 
구브로 비문은 그가 총독임을 밝혔고, 
로마 비문은 그가 총독 후 로마 관직(Curator) 취임을 알리고, 
비시디아 안디옥 비문은 그의 고향과 그의 가족들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영향력 있는 지역 유지였음을 밝힙니다.

베델신학교 성서고고학 교수였던 칼 라스무센(Carl Rasmussen) 박사는 
서기오 바울 때문에 바울일행이 비시디아 안디옥을 방문했음이 분명하다고 주장합니다. 
성서고고학자인 팬트(Fant), 레디쉬(Reddish) 두 교수는 
바울 때문에 믿게 된 총독 서기오 바울이 선교팀에게 자기 고향을 방문해달라고 
요청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여러 신학자들은 서기오 바울이 고향 가족들에게 보내는 
친서를 선교팀이 전달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