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 11 /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 YouTube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행13:42~52
앞서 우리는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서 되어진 바울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울의 공식적인 첫 번째 설교입니다.
그때 바울은 복음을 전했었죠. 복음이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두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죄에 대한 형벌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또 하나는 '의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 우리 대신 또한 우리의 대표로서
모든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에 순종하셨습니다.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 죄의 사함을 얻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의롭다 여김을 받습니다.
바울은 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복음을 들은 청중들의 반응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본문에, 바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에게, 2가지 상반된 반응이 나옵니다.
-하나는 복음을 믿고 따르는 반응이고,
-다른 하나는 복음을 대적하고 비방하는 반응입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마찬가지죠.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각각 반응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반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상반된 반응이, 바울의 설교를 들은 회중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1. 먼저 바울이 전한 말씀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나오는데요.
본문 43절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믿었다'고 말합니다.
믿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은 이 복음을 더 듣기를 원했습니다.
본문 42절에, 이 사람들이 바울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는데요.
다음 주 안식일에도, 이 복음을 또다시 들려달라는 부탁입니다.
'그들이(바울 팀이 회당을)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42
여러분 이런 부탁은, 오늘날 제게는 참 생소한 부탁입니다.
저는 사실 이런 부탁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제 설교를 듣고 나서, '또 한 번 더 들려달라'는 부탁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과거에 중국 처소교회 가면, 그런 부탁이 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설교를 하고 나서 앵콜 요청을 받습니다.
'다음 주 안식일에도 똑같은 복음을 또다시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심지어 이들은, 다음 주 안식일까지를 기다리지 못합니다.
설교를 마치고 나가는 바울을 뒤따라가서, 바울과 그 말씀을 나눕니다.
그리고 나서 일주일이 흘렀습니다. 다음 주 안식일이 되었는데
더 많은 사람들이 회당에 모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느냐?
'온 시민이 거의 다 모였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44
이 성경의 표현을 과장법이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만큼 구름떼 같은 사람들이 몰린 거죠. 그렇게 모인 이유가 무엇이죠?
바울이 전한 그 복음의 내용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아마 한 주간 동안에 소문이 났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SNS나 너튜브가 없으니까 입소문이 났었겠죠.
'지난 주 안식일에 바울이라는 사람의 설교를 들었는데 너무 좋았어요.
우리가 지금까지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설교였어요!' 그렇게 입소문이 났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바울의 설교를 듣고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계속적으로 그 들었던 말씀을, 또다시 듣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다른 사람들을, 회당으로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바울의 설교를 듣고 기뻐했던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첫째, 바울은 은혜의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이들은 유대교인들이었습니다.
유대교는, 율법의 행함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행위구원론인 거죠.
예를 들어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절기를 지켜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더군다나 이들 가운데는, 유대교로 입교한 '경건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혈통적으로 이방인인데, 유대교로 입교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할례를 받지는 않으면서, 유대교가 믿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할례라는 게, 어른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그런 '경건한 자들'에게도, 유대인들은 똑같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너희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우리와 같이 할례를 해야 한다.
절기를 지키고, 모세의 율법을 다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방인인 그들에게는, 이것이 짐으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전한 복음이 무엇이죠?
'예수를 믿기만 하면 누구라도 의롭게 된다'는 교리였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그분의 공로와 그분의 은혜로, 값없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너희들이 뭘 지켜서가 아니라, 뭘 행해서가 아니라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함과 대조되는, 은혜의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들 이방인들이, 이 은혜의 복음을 처음 들었을 때, 반응이 어떠했을까요?
그동안 율법에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었던 구원의 빛을, 말씀을 통해 보았을 것입니다.
이들은 바울의 설교를 들었을 때, 율법이 줄 수 없는, 복음이 주는
자유함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들은, 이방인으로서 유대교 하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지켜야 할 율법의 명령만 잔뜩 쌓였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을 지키지 못했을 때는, 늘 죄책감으로 마음의 기쁨을 빼앗겼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그렇잖아요. 죄를 지으면, 마음의 기쁨을 잃어버리죠. 죄책감이 쌓이고요.
지금까지 이들은 매일 율법과 절기 준수에 목을 매면서
자신의 행위 때문에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을까 벌벌 떨었을 것입니다.
구원을 얻으려고 유대교로 입교는 했는데, 막상 구원의 확신을 누릴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율법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만 더해져 갔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바울이 전한 복음은, 모든 율법의 요구로부터 자유함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통해서, 율법의 행함을 통해서는 절대로 얻을 수 없는
구원의 기쁨과 자유함을 누렸을 것입니다.
늘 마음의 짐이었던 율법의 요구들로부터 해방되는 기쁨을 복음을 통해 누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복음을 한 번 듣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계속적으로 그들은 들었던 복음을, 또 듣고자 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들으면 들을수록, 그들은 구원의 기쁨을 누렸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들으면서 그들은, 자신의 구원을 계속해서 확인하고 확신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2) 이들이 복음을 기뻐했던 두 번째 이유는,
바울이 전한 복음은, 차별이 없는 복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믿었던 사람들 중에는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유대교에 입교는 했는데, 유대교 안에서 늘 차별을 받아야 했습니다. 왜일까요?
이들은 혈통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혈통적으로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었습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유대인들은, 혈통을 굉장히 중시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과도한, 도에 지나친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자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었습니다.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닌 거죠. 이 격차가 굉장히 컸습니다.
아무리 율법을 열심히 지켜도, 혈통의 간격은 혈통의 차이는 해소되지가 않았습니다.
이 혈통 때문에 늘 차별을 받아야 했습니다.
유대교로 입교는 했지만, 늘 변두리에 있어야 했던 거죠.
그런데 그들에게 바울이 전한 복음이 무엇이죠? 차별이 없는 복음이었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혈통의 차이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여러분 47절을 한번 보십시오.
바울은,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13:47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사49:6 인용)
하나님은 유대인만 아니라,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종(메시야)을 이방인의 빛으로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 말이 이방인들에게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안 그래도 이방인이라는 차별을 받았는데, 그 마음의 응어리가 한순간에 풀리는 거죠.
'하나님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구나,
이방인도 특별히 사랑하시는구나'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마음의 상처가 다 씻겨져 나가는 거죠.
그래서 48절에 '이방인들이 이 바울의 복음을 듣고 기뻐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들 이방인들은 복음을 기쁘게 믿었습니다.
▲2. 반면에 복음을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13:45절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여기 유대인들은, 모든 유대인들을 말하는 게 아니겠죠.
여기 유대인들은 유대인 회당에서 주로 설교를 담당했던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과, 그들의 추종자들을 말합니다.
이들이 말씀을 부정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1) 하나는 바울의 설교가 그들의 가르침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다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구약성경을 얼핏 보면, 그렇게 믿게 되어 있습니다.
한평생 이들은 유대인 회당에서 이걸 가르친 거죠.
그런데 갑자기 바울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뭐라고 말하죠?
모세의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할례도 필요 없다, 절기를 지켜서 구원을 받는 게 아니다.
모세의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 게 아니다...' 라고 하면서
자신들이 그동안 가르쳐 왔던 모든 가르침을, 바울이 한순간에 뒤집어 엎습니다.
'자신들이 가르쳤던 모든 가르침들이 틀렸다'고 바울이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불편한 거죠. 자신들이 틀렸다고 말하니까요.
그러니 이 바울의 가르침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적 신념은 아주 무섭지 않습니까. 오늘날까지 사람은 자기 목숨을 겁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런 모습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틀렸다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들과, 삶의 가치들이 틀렸다고.. 나의 죄를 고발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살아왔던 삶을 부정하고, 뒤집어 엎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그 말씀을 듣기에 좋습니까? 솔직히 불편하지 않습니까?
누군가는 그 말씀을 대적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의 유대인들이 그랬던 거죠.
2) 또 하나 이들이 말씀을 반박했던 두 번째 이유는,
45절에 보면, 이들은 바울을 시기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왜 바울을 시기했겠어요?
자기들보다 바울을 따르는 자들이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설교를 하자 온 시민들이 거의 다 모였습니다.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린 거죠. :44
그런데 자기들이 설교를 할 때는, 이렇게 모인 적이 없었습니다.
반응이 완전히 다른 거죠. 바울을 따르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시기가 생긴 거죠.
이런 이유로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비방하고 부정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인정해버리면, 그동안 자신들을 따랐던 사람들을
모두 바울에게 뺴앗겨버릴까봐 염려했기 때문이죠.
그러면 자신들이 회당에서 누렸던 모든 기득권들을 빼앗기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듣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대로 살아갈 때,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들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면 손해일 것 같고,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더 이상 누리지 못할 것 같은 위기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기쁨으로 받기보다는, 비방하고 반박하지 않습니까?
말씀이 뭔가 소망을 주고 위로를 주기보다는,
내가 살아왔던 삶의 방향을 꺾으려고 할 때,
여러분 우리는 그 말씀을 인정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가치관을 부정하고,
우리에게 손해를 요.구한다 할지라도,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복된 삶일 줄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기뻐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그런 믿음이 없었던 거죠.
그래서 자기의 삶을, 자기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합니다.
그리고 그런 말씀을 전하는 바울을 가만두지 않습니다.
메시지가 싫으니까, 메신저를 공격하는 거죠.
◑그들은 사람들을 선동해서 바울을 박해하고 쫓아냅니다.
13:45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13:50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이때 선동된 두 부류의 사람들이 나오는데요.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경건한 귀부인'은, 유대교로 입교한 이방인 여자들 가운데 상류층의 이방인 여인들이고,
'그 시내 유력자들'은, 비시디아 안디옥의 영향력 있는 지역관리였을 겁니다.
회당의 유대인들은, 이런 정치적인 세력을 포섭해서, 바울 일행을 박해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바울의 일행을 그 지역에서 쫓아내 버렸습니다.
쫓겨난 바울의 일행은 이고니온으로 가게 됩니다.
이렇게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전도 여행이 끝납니다. *동남쪽 180km
▲그런데 쫓겨난 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으로 가기 전에, 한 가지 특이한 행동을 합니다.
그 행동을 사도 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놓치지 않고
오늘 본문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13:51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을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버린 일입니다.
이 행동은, 예수님이 복음서에서 제자들에게 알려주신 행동입니다.
눅9:5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어떤 증거이죠?
'너희들의 구원에 더 이상 나의 책임은 없다'는 증거입니다.
심판의 증거인데요.
'우리는 복음을 너희에게 전했다. 그러나 너희들이 믿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그 책임이 너희에게 있고, 우리에게는 없다'는 얘기입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들은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고 나왔습니다.
(그들은 이 예수님의 말씀을, 사도들에게 전해서 들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교훈을 던집니다.
'우리의 사명은 복음을 전하는 것까지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 사람이 믿고 안 믿고는,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것까지 책임질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내가 복음을 잘 설득력 있게 전해서, 그 사람을 믿게 하는 것도 아니고,
내 언변이 부족해서 그 사람이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상대방이 믿지 않는 것은, 나의 책임이 아닙니다.
내가 복음을 전했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할 바를 다 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는 행위입니다.
여러분, 물론 내 주변의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않을 때
우리는 정말 안타까운 마음을 가집니다. 긍휼의 마음이 있죠.
그 대상이 정말 우리가 사랑하는 부모님이나 내 자녀라면, 내 남편이라면, 내 아내라면,
여러분 그 안타까움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 지혜와 내 노력으로,
그 사람을 믿음 가운데에 인도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의 할 일은, 단지 복음을 전하는 것까지입니다. 주1)
◑복음을 전하되, 결과에는 연련하지 않는다!
오늘 본문에 보면, 주목해야 할 표현이 하나 더 있습니다.
48절에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그런데 그들이 믿게 된 이유를,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뭐라고 설명하죠?
바울이 다른 사도들보다, 복음을 더 잘 전해서였습니까?
아니면 바울의 영성이 더 탁월해서였다고 말합니까? No
복음을 믿게 된 그들은,
영생을 주시기로 하나님께서 이미 작정한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창세전에 선택한 자입니다.
그 선택의 결과로 그들이 믿게 된 것입니다.
구원의 주권이요. 바울에게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전도자의 애씀과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주시기로 (창세 전에) 선택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그때마다 보내시고,
하나님이 그들을 친히 구원해 내십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 일에 우리 전도자는, 다만 복음을 전하는 자로 참여할 뿐입니다.
우리의 역할은, 전하는 것이지, 구원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 오늘 바울과 바나바의 모습을 보십시오.
이들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결과에 연련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결과를 만들어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그것을 정말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전도 팀은, 배척하는 이들에게 담담하게 반응합니다.
자기 발에 티끌을 떨어버리고 나옵니다.
여러분 이들의 모습 속에서는 어떤 낙심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어떤 좌절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52절은 '기쁨'이라는 단어로 끝나고 있습니다.
13: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그런데 위 구절에서 '제자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갈립니다.
-어떤 이들은, 여기 '제자들'이
바울의 설교를 듣고 구원을 받은 비시디아 안디옥의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학자들은, 여기 '제자들'을 바나바와 바울이라고 말합니다.
바나바와 바울이라고 해도 크게 무리가 되지 않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도 기쁨과 성령으로 충만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과 바나바가 기쁨이 충만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분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바울과 바나바는
기쁨으로 충만하기보다는, 낙심해야 맞습니다.
왜냐면 이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쫓겨났기 때문입니다.
물론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많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바울은 교회를 개척하거나 조직한 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역을 하던 가운데, 핍박을 받아, 도중에 사역지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성공한 사역이 아니라, 실패한 사역이죠.
물론 '절반의 성공'이라고는 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기뻐할 만한 일은 아니죠.
그럼에도 오늘 본문에는 낙심과 좌절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들은 발에 티끌을 떨어버리고 나올 정도로 담담한 반응을 보입니다. 뒤끝이 없습니다.
오히려 '기뻐했다'는 말로 끝나고 있습니다. :52
왜냐하면 이들은 구원의 성취가 자신들에게 달려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정말 알았고, 정말 믿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성취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자신들의 역할은 전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 일에 그들은 충성을 다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에 쓰임을 받았다는 것으로, 그들은 기쁨을 누렸던 것입니다.
물론 바울은, 주님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만한 헌신의 각오를 가지고 있었던 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뭔가를 성취하려고 하진 않았습니다.
내가 뭔가를 성취할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괄목할만한 결과와 성취가 주어진다 할지라도,
그것이 자기 노력의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고 바울은 믿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는 선교를 갈 때, 어떤 사명에 막 불에 타 가지고
'내가 교회를 몇 개를 세우고, 내가 뭔가 성취를 남겨야겠다..'
그런 마음으로 선교를 다닌 게 아닙니다.
바울은 놀라운 결과를 성취하러 온 게 아니라, 복음을 바르게 전하러 왔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울과 바나바가, 여러분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여러분 만일 바울과 바나바의 목적이 어떤 목적의 성취에 있었다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쫓겨날 때, 바울과 바나바는 결코 기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취에 목적이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예수님을 전하는 것 뿐이었고,
그 일에 그들은 충성을 다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에 쓰임을 받았다는 것으로... 기쁨을 누렸던 것입니다.
◑적용
여러분 이 원리는, 복음을 전하는 영역에서만 적용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도 적용되는 신앙의 원리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기쁨을 잃어버리고
때로는 염려하고, 때로는 낙심하고, 때로는 하나님을 불신하여 살아가게 되는 이유가 무엇이죠?
내가 해야 할 일과, 내가 성취해야 할 일을 섞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해야 할 일을 명령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뭔가를 성취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 적은 없으십니다.
여러분 성취는, 오직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늘 우리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성취는, 우리가 만들어내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에, 충성을 다할 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고전4:2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충성이지, 성취가 아닙니다.
결과가 아니라 충성입니다. 성취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구분하는 영적인 지혜가, 우리의 삶에서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열심히 취업을 준비하는 일이고요.
그 성취는 합격인데, 그러나 그 성취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물론 합격을 위해서 기도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합격의 결과는 하나님이 주시는 일인 거죠.
그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은 합격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요구되는 마땅히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나씩 해 나가는 것입니다.
당장 자기 앞에 있는 일들을, 신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요.
성취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기에, 그 과정에서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주일을 빠지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충성을 다하는 겁니다.
하나님보다. 취업을 우선순위에 두지 않는 겁니다.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은, 충성이지 성취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은,
성취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하나님의 뜻에 그때마다 순종하지 못할 것을 염려해야 합니다.
▲오늘의 설교도, 설교자인 제게 도전을 주는 말씀입니다.
늘 제가 넘어지는 부분이 사실 이 부분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저 역시 복음을 전하는 자로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낙심하라는 이유는, 사실 결과에 대한 부분 때문이기도 합니다.
물론 저도 알죠. 결과는 제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제 설교를 듣고 누군가는 구원을 받고, 구원을 받지 못하는 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누군가는 오늘도 은혜를 받고, 누군가는 은혜를 받지 못하는 그 일은
제가 만들어내는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성취는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하나님이 제게 요구하는 것은, 성취가 아니라, 충성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설교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대신에 설교를 준비하는 데는, 제가 바르게 전하고 성실히 전하려고 합니다.
아무도 은혜를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설교 준비는 성실하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사실은 결과를 볼 때 낙심할 때가 맞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말씀을 통해, 다시금 저 자신을 다잡았습니다.
우리 순장님들도.. 참 수고 많으신데요.
결과 때문에 낙심하고 좌절할 때가 있으실 것입니다.
주어진 환경에서 참 열심히 사역을 한다고 했는데,
결과 때문에 기쁨을 잃어버릴 때가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사람일 뿐이고요.
자라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에 씨를 뿌리고, 말씀에 물을 줄 때,
기쁨으로 자라는 이도 있었는가 하면,
반대로 시기하고 배척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그럤죠.
결과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일의 성취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충성일 뿐입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고전4:2
그래서 베드로전서 5장 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염려를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고전3:7~8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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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복음전파는 하되 결과는 주님께 맡긴다
1980년, 남편 론과 자녀들과 함께 하와이 호놀룰루로
3개월 간의 전도 여행을 다녀왔던 적이 있다.
밤낮으로 노숙자, 중독자, 매춘부, 남창, 범죄자들과 함께 생활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그들을 사랑으로 섬기고 상담하고 도와주었다.
하지만, 우리는 금방 그들에게 실망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훔치고, 거짓말하고,
모욕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한 달 보름이 지날 때쯤 나의 마음이
굳어지기 시작했고, 3개월이 지난 후에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나는 주님께 불평을 늘어놓았다. "우리를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주세요!
이 사람들은 당신에 대해 관심이 없어요. 저들을 보세요.
우리는 계속 그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이제껏 계속 전했지만
그들의 마음은 굳어있어요.
그들은 당신, 우리에게 다 무관심해요!
보세요, 우리가 이곳에서 사역을 하는 동안 아무도 구원받지 못했어요!"
나는 자기연민과 의롭지 못한 분노에 뿌리를 둔 불평을 계속 주님꼐 늘어놓았다.
주님은 확고하지만, 사랑스러운 음성으로 나에게 말씀하셨다.
"난 너를 이곳의 사람을 구원시키라고 한 적이 없다!"
난 울부짖었다. "뭐라고요? 그러신 적이 없다고요? 그럼 왜 우리가 여기 있죠?
우리는 당신을 위해 집과 직장, 모든 것을 다 포기했어요."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난 복음을 전파하라고 너를 불렀지,
그들에게 구원을 주라고 부른 적은 없다. 구원은 나의 소관이다."
이 말씀은 나를 자유케 하고 짐을 가볍게 했다.
우리는 뭔가를 이룰 필요는 없다.
우리는 단순히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당신이 단순하게 한 번만 진리의 씨앗을 심으면 그것은 계속 자랄 것이다.
-패트리샤 킹의 "빛은 어둠 속에 있다" pp. 155-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