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밤 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찬송하매 행16:16~40 2024.06.04.녹취, 정리
◑도입
오늘 본문은 2차선교여행을 떠난 바울이, 유럽의 마게도냐 지역으로 방향을 돌린 후에
그 지역의 첫 번째 성, 빌립보 성에서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성에 갔을 때, 첫 번째로 루디아를 만났고 16:13~14
이제 귀신 들린 점치는 여종을 만나는 장면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16:16
그래서 그 여종에게 자유를 줍니다.
그 귀신 들렸던 여종을, 사탄의 묶임으로부터 풀어서 자유케 합니다.
그런데 이 일로 인하여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일 때문에 사도 바울과 실라가 심하게 매질을 당하고
결국 옥에 갇히는 일이 일어났죠.
22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고후11:25절에 '내가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한 번 돌로 맞았을 때는, 1차선교여행 때 루스드라에서 맞았던 것이고,
세 번 태장으로 맞았다고 말하는데, 세 번이나 아주 심한 매질을 당했다는 거죠. 주1) '태장'
그런데 본문에서, 그 세 번의 태장 중에 한 번 맞았던 것입니다.
*본문의 '매'와 고후11:25의 '태장'은 같은 헬라어
사도바울은 귀신들렸던 점치는 여종을 고쳐줬던 이 일 때문에
거의 죽음에 가깝도록 매를 맞고 옥에 갇히는 일이 있었습니다.
정신없이 매를 맞고 아마 옥에 던져졌을 거예요. 절망스러웠겠죠.
억울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는가?' 이런 생각도 했을 것이고,
상처로 인해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밤에 사도 바울과 실라가, 그때 기도와 찬송이 터져나와요.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25
기도와 찬송 중에, 곧바로 옥터가 흔들리고, 옥문이 열리고,
그리고 매인 것이 다 풀어졌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탈옥을 위한 것이 아니었어요.
베드로는 옥에 갇혔을 때, 하나님께서 옥문을 여시고 탈옥하게 하셨어요.
그런데 바울은 탈옥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어요.
옥 문이 다 열린 상황에서, 그 일을 통해 주님은 바울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간수와 간수의 집이, 이 일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거기에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요.
그래서 우리는 이제 빌립보 교회의 초기 성도들이 누구였는지 대충 알게 됩니다.
옷감 장사 루디아, 그리고 귀신 들렸다가 고침을 받은 여인,
그리고 간수와 간수의 가족들... 이렇게 빌립보 교회가 형성되는 것을 봅니다.
▲바울이 빌립보 관리에게 이의를 제기한 이유
그리고 결국 그 다음 날, 빌립보 감옥에서 풀려나게 된 상황이었는데
그 도시의 관리들이 바울과 실라를 내보내주었는데, 바울이 이의를 제기합니다.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그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대' 37
'로마 사람인 우리를'
여기 '우리'라고 했으니, 바울 뿐만 아니라 실라도 로마 시민권을 가진 것으로 봅니다.
자기들을 매질하고 가둔 도시의 관리들을 향해서
'우리를 공적으로 이 일을 처리해라!' 이렇게 얘기해요.
그런데 바울이 왜 그렇게 했을까요?
억울해서 그거 풀려고? 그게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지금 뭐라고 고발했는가 하면
'이들은 유대인이고, 쉽게 말하면 잡범들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로마 시민인 우리가 받을 수 없는 풍속과 이상한 것들을 전한다.' :20~21
이렇게 복음을 훼손시켰단 말이죠.
그러니까 바울이 지금 뭘 얘기하는 거예요?
'우리는 로마 사람이다. 우리가 전한 복음이 이상한 것이 아니다' 라면서
복음을 변증하고, 또한 복음을 보호하기 위해서 바울이 그렇게 항의했던 거예요.
그리고 또 자기들은 빌립보를 떠나지만, (추방령을 받은 것 같음) :39
이제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서 교회가 형성된 이 빌립보 성도들을 위해서도
지금 이 복음과, 그 성도들을 위해서도
자기들이 매 맞고 투옥된 일에 대해 '그들이 잘못했다'는 것을 증거해야 했기 때문에
바울은 조용히 나가지 않고, 이 일을 공적으로 처리하고
이제 빌립보 성을 떠나게 되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이 본문을 우리가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에 새겨야 될 교훈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주님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건져주시는 분이시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정말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한 여자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녀는 어떤 사람인가 보니까 16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6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
그는 사단에게 매임받은 사람입니다. 사단에게 종노릇 하고 있는 사람이다.. 라는 것을 보게 돼요.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의 수익의 소망이 끊어져요. :19
그가 온전함을 받았거든요.
귀신이 나가고 그 사람이 온전하게 고침을 받고 자유를 얻었어요.
그런데 그때 여종의 주인들은, 그를 버리려고 해요.
그러니까 '이제 쓸모없는 인생이 되었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죠.
이 여자는 사단에게 매임을 받았다가,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이용되다가 버림받는...
그런 운명에 처해 있는,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이었고,
이 여자는 결국 하나님이 없는 인생의 영적인 상태, 하나님이 없는 인생,
이것은 우리 모두를 보여주는 인생입니다. 우리도 전에 이 여종처럼 가련하게 살았다는 거죠.
강약의 차이, 경중의 차이가 있을 지 모르지만,
우리도 전에, 마귀에게 매여 있었고,
또 사람들에게도 버림을 받는... 그런 가련한 인생이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그렇죠. 직장에서도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가차없이 팽 out 시키잖아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 없는 인생의 운명이고, 상태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이 여인을 그 절망적인 상태, 그 이용만 당하는 상태에서 건져내시면서
'나는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자를 건져내는 자다. 사단에게 종노릇 하고,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다가 결국은 버림받는 인생들을 건져내는 자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복음은,
어떤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을 만나도, 그를 건져내신다... 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용기는 절망에서 생긴다! (펀 글)
를 보여주었던 펄벅의 어머니
미국 여성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펄 벅 여사는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느 해 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입니다.
아버지가 먼 여행으로 집을 비운 사이
마을에는 유일하게 백인이었던 펄 벅의 어머니가
신을 분노하게 만들어 가뭄이 계속된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사람들의 불안은 점점 분노로 변했고,
어느 날 밤 사람들은 몽둥이, 곡괭이,
도끼, 쇠스랑 등 무기가 될 만한 농기구를 가지고
펄 벅 여사의 집으로 몰려왔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집안에 있는
찻잔을 모두 꺼내 차를 따르게 하고
케이크와 과일을 접시에 담게 했습니다.
그리고 대문과 집안의 모든 문을
활짝 열어 두고는 마치 오늘을 준비한 것처럼
어린 펄 벅에게 장난감을 가지고 놀게 하고
어머니는 태연하게 평소에 하듯이 바느질감을 들었습니다.
잠시 뒤 몽둥이를 든 사람들이
단숨에 집 앞으로 몰려왔습니다.
굳게 잠겨 있을 것이라고 여겼던 문이 열려 있자
어리둥절한 얼굴로 방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 때 펄 벅의 어머니는
"정말 잘 오셨어요. 어서 들어와서 차라도 한 잔 드세요."
하며 정중히 차를 권했습니다.
그들은 멈칫거리다가 못 이기는 척
방으로 들어와 차를 마시고 케이크를 먹었습니다.
그리고 구석에서 놀고 있는 아이와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냥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그토록 기다리던 비가 내렸습니다.
훗날 어머니는 어른이 된 펄 벅 여사에게
그날 밤의 두려움을 들려주며
만약 도망칠 곳이 없는 막다른 골목이 아니었다면
그런 용기가 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용기는 절망에서 생긴다' 고 말했는데,
그 말은 그 이후로,
펄 벅 여사가 절망적인 순간에
항상 떠올리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도,
주님은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고,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우리를 건져내 주십니다.
▲2. 본문을 통해 우리가 또 보게 되는 것은
<주님은 절망적인 상황을 사용하시더라> 는 겁니다.
이 일 때문에 22절부터 보시면요.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합니다.
상관들이 옷을 찢어버리고 매로 치라 하였어요.
아마 바울과 실라는 '우리는 로마 사람이다' 라고 외쳤을 거예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말도 제대로 듣지도 않고,
그냥 옷 벗겨서 바로 때리기 시작해가지고
그냥 재판도 없이 그냥 그렇게 된 거예요. 많이 쳤어요.
그러니까 아마 정신을 잃을 정도로 맞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옥에 던져버렸을 것입니다.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켜라' 말했어요...
이러한 상황이 되었을 때에 가끔씩 우리에게 일어나는 상황들 있잖아요.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베드로도 그렇고, 바울도 그렇고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때, 기적적인 일도 많이 일어나잖아요.
그리고 우리가 보는 것처럼 옥문이 막 열려요. 차꼬도 다 풀리고...
이런 일들도 일어나는데
이렇게 매맞고 옥에 갇히는 일을 애당초 막아줄 수는 없었을까요?
돌에 맞는 일을, 주님이 이런 상황들에서부터 나를 좀 피하게 해 줄 수는 없었을까요?
거기서 옥문을 열지 말고, 아예 옥문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하실 수도 있으신 분인데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실까요?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상황들이 다 이해가 되지 않고,
어떨 때는 마음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은 이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사용하시더라라는 거예요.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났을 때에,
하나님은 미리 이런 일이 오지 않게도 하실 수 있었을 텐데...
그런데 오긴 와요.
그랬을 때 하나님은 분명히 이걸 사용하시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과 실라가 이런 상황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 감옥에 있었던 간수를 만난 일날 없었을 거예요.
그리고 그 가족 전체에게 복음 전할 일도 없었을 거예요.
32절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결국 이 상황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셨기 때문에
주의 말씀이, 간수와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되는데 사용되었다는 것이죠.
어쨌든 '안 일어났으면 좋겠고, 다른 방법도 있었을 텐데...' 라고 생각이 들지만
주님이 허락하신 이 상황이, 우리에게는 사용이 되더라 라는 것입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요셉을 그렇게 사랑하셨는데,
형제들에게 아예 팔리지 않도록 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데 그 일을 하나님 사용하셔서, 그를 이집트로 보내주세요.
그리고 종으로 팔리거든요. 그래서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또 보디발의 아내에게 누명을 쓰는 바람에 감옥에 들어가요.
그런데 그것 때문에 이집트의 정치범들하고 같이 있음으로써,
이집트 나라 상황을 훤히 다 알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결국 그것 때문에
거기서 꿈을 해석해주고, 바로 앞에까지 가게 되는...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죠.
우리에게 일어나는 상황들이 다 해석은 되지 않는데
어쨌든 하나님은 절망적인 상황을 사용하시더라 라는 것이죠.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가 40세쯤 되었을 때, 이집트 왕자입니다.
이제 정권을 누가 이어받을 것인가? 이제 거기에 몰두하고 있었겠죠. 주2)
모세에게 아마 많은 힘이 실렸을 거예요.
그런데 모세가 형제들을 돌아볼 마음이 생겨서 나가서
히브리인들이 이집트 사람들에게 고통받는 거 보고,
그거 해결해 주려고 하다가 살인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히브리 사람들도 '나를 통해서 너희들을 구원하려고 한다'는
하나님의 뜻을 알 줄 알았는데, 히브리 사람들도 모세를 밀어내버리고
결국 그 일 때문에 도망자가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이 절망적인 상황 때문에, 결국 모세는 이집트 왕자로 죽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종으로 살게 되는 것이죠.
40년 동안이나 양을 치는 그 절망적인 상황이
모세를 이 세상에서 가장 온유함이 승한 자로 만들었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끌 수 있는 훈련의 장이 되었던 거예요.
어쨌든 하나님은 이 절망적인 상황들을 사용하셔서
우리의 인생 가운데 역사를 그려가시더라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절망적인 상황이 올 때에, 우리는 내 머리로는 다 이해되지 않지만
그것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안심해야 한다, 나를 맡겨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또 하나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이 절망적인 상황 때문에, 간수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간수가 오늘 진짜 절망적인 상황이었어요.
그는 관리의 명령을 받고, 그 사람들을 가둬놓고
자기는 자고 있었는데 일어나 보니까 옥문도 열렸고, 전부 다 도망간 줄 알았어요.
너무너무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칼을 빼어 자결하려고 했어요.
간수가 죄수를 지키지 못하면, 자기가 심한 벌을 받고 죽게 되어 있었거든요.
그의 마음이 완전히 깨어진 거예요. 완전히 무너진 거예요.
정말 절망적인 상황이 왔습니다. 그런데 이 절망적인 상황이 무엇을 만들었습니까?
29절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여 뛰어들어가 무서워 떨면서'
간수가 수인들 앞에서 무서워 떨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무서워 떨면서, 바울과 신라 앞에 어떻게 해요? 엎드립니다.
려 그 매맞고 터져가지고 피투성인 그 사람들 앞에 '그가 엎드렸다' 이렇게 말해요.
그리고 외칩니다.
30절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도대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느냐는 말이에요.
그 절망적인 상황이 아니었다면, 간수는 결코 이들에게 엎드릴 일도,
구원에 대해서 물어볼 일도 없었을 거예요.
그런데 이 절망은, 우리 삶에 찾아오는 절망적인 상황은,
우리를 잠시 멈춰세웁니다. 건강에 갑자기 적신호가 오고요,
경제적인 문제가 터지고, 관계 문제가 터지고,
내 인생에 절망적인 상황이 불현듯 찾아왔을 때,
우리는 그제서야 비로소 달리던 우리의 인생을 잠시 멈춰요.
그제서야 비로소 하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비로소 지금까지 달려왔던 자기 자신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진정한 필요를 구하게 돼요. 간수가 뭘 원했겠어요?
이 절망적인 상황 때문에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라고
삶의 진정한 것을 구하게 되었고,
하나님은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을 사용하시더라 라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전쟁의 섭리 (절대 일어나면 안 되는 게 전쟁이지만, 전쟁을 허락하시는 주님의 섭리)
2차대전 전쟁 가운데, 사람들이 각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세상의 위기가 닥칠 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게 되고,
또한 동시에 자신의 인생과 영혼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 사상가 C. S. 루이스는
‘전쟁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방종과 죄악가운데 죽어갈 수많은 젊은이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고,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는 계기가 된다.
이것이 전쟁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다’ 라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젊은이들이 평화로운 세상에서, 제 멋대로 편하게 방종하며 살다가.. 지옥에 가느니,
차라리 끔찍한 일을 겪더라도, 천국에 가는 것이 더 유익하지 않겠느냐?..’
뭐 그런 식의 논리입니다. 성경에도 나오잖아요?
‘온전한 몸으로 지옥 가느니, 차라리 불구자로 천국 가는 게 더 낫다고요’
△625 한국전쟁의 섭리
제(곽선희 목사)가 선교학을 전공 했거든요. 잘 연구해 보면, 놀라운 일이 있답니다.
선교 하는데 제일 어려운 게 뭐냐 하면, 민족 성입니다.
일본은 우리 나라보다 앞서 기독교를 받아들였습니다. 주2)
그런데 교회가 잘 안 됩니다. 교인이 인구 1프로도 안 됩니다. 교회가 부흥되지 않습니다.
왜 일본 교회와 부흥이 안 될까요? 많은 사람들이 연구합니다.
그래서 유명한 책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Stranger in the Land: A Study of the Church in Japan... 라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거기에 결론이 이렇게 나옵니다.
'일본 사람은 기독교를 미국 종교라고 생각해요.
종교를 민족적인 문제로 생각하는 거예요.
일본 사람은 '기독교는 서양종교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미국과 더불어 싸웠다.
그리고 패전했다.' 이런 패전 의식이 있어요.
그러니까 일본 사람은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기독교는 미국 종교이고, 우리는 신도 shintoism 이다.' 라고 생각하는 거죠.
이 민족주의 때문에 일본 선교가 안 됩니다.
그러면 우리 한국은 어떻게 해서 예수를 믿었을까요?
여러분 대단히 죄송합니다만은 625 전쟁 때문이에요.
꽝 하고 전쟁이 터지고 보니까, 어느 사이에서 기독교가 민족 종교가 돼버렸어요.
우리 중에 누구도 기독교를 서양 종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뭐 때문에? 육이오 때문이에요.
625 라는 큰 전쟁이 있었으나, 이로 말미암아 기독교가 우리 종교가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순교가 순국이고, 순국이 순교예요. 이제 기가 막힌 겁니다.
이래서 선교의 문이 활짝 열려서, 오늘의 한국 교회가 있는 겁니다.
(이런 포커스, 초점으로 우리가 역사와 기독교를 봐야 됩니다)
생각해 보면, 전쟁이라는 것은,
우리가 모르지만, 그것을 통해서 민족적으로 국가적으로
그리고 우리 개인적으로 주시는 은혜가 너무 많습니다. 너무 놀랍습니다.
죄송합니다만은, 고향에서 나온 친구들이 가끔 모이거든요. 모여서 얘기를 하면
'너나 나나 수령님 덕 많이 보았다.' (농담으로)
'그 양반이 아니면 우리가 서울로 왔겠냐? 거기서 소나 몰다가 말았을 텐데...'
여러분, 제가 여기서 목회하고 있습니다만은, 제가 그 고향을 버릴 수 있나요?
그러나 전쟁이 꽝 하고 터지니까, 북한에서 나올 수 밖에요.
그리고 오늘 여러분 앞에 서 있잖아요.
전쟁은 얼마나 큰 사건입니까?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그러나 잊지 마세요. 조용히 들으세요.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조용해야 하나님의 음성과 뜻이 들립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시46:10
▲3. 절망적인 상황에서 기도와 찬송은.. 상황을 변화시킨다
25절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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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태장
우리 말로 태장(笞杖)은, 회초리로 죄인의 볼기와 넓적다리를 때리는 형벌.
'클 태' 가 아니라 '볼기 칠 태', 그래서 주로 '몽둥이 rods'로 번역하는데,
어떤 성경은 '채찍'으로도 번역함.
로마에서는 납이 달린 매로 사람을 때렸는데,
로마법에는 로마 시민에게 이 형을 적용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주2)
모세의 양모 하셉슈트가, 당시 이집트 왕 어린 투투모세 3세의 섭정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왕비이며 정권실세(섭정)이었던 하셉슈트가, 자기가 키운 모세를 왕위에 앉힐
마음도 있었겠죠. 어린 투투모세 3세도, 종에게서 태어난 자식이었다고 하니까요.
무슨 영화에 나온 이야기가, 완전 픽션이 아니라, 사실에 기반을 둔 얘기라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