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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0 23 사도행전 강해 (45) /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 YouTube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행12:5~16
지난 시간 우리는 예루살렘 교회 핍박을 살펴봤습니다.
그 핍박의 중심에는 헤롯이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헤롯의 핍박으로 2명의 사도가 희생을 당했었죠.
한 사람은 야고보 사도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순교를 당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베드로 사도인데요. 베드로 사도는 감옥에 투옥이 되었습니다.
자 그런데 누가는 동시에 또 다른 장면을 보여줍니다.
베드로 사도가 투옥이 되었을 때, 예루살렘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요?
12:5절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누가는 지금 두 가지 장면을, 한 화면에 담고 있습니다.
하나의 장면은 옥에 갇힌 베드로의 모습이고, 또 하나의 장면은
그 시간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원 생중계로, 누가가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는 거죠.
-한쪽에서는 옥에 갇힌 베드로의 모습,
-또 한쪽에서는 감옥에 갇힌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의 모습,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두 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1) 하나는 '간절히' 라는 표현입니다.
여기 간절히라는 단어가요. 헬라어로 에크테네스 라는 단어인데요.
*에크테네스 : 문자적으로는 '손을 뻗다', 은유적으로 '간절히'
이 단어가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실 때, 같은 단어가 쓰였습니다.
눅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
여기서 '간절히'가, 본문의 '간절히'와 같은 헬라어입니다.
그만큼 교회가 베드로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2) 또 주목해야 할 표현이 있습니다. 5절에 두 개의 동사가 나옵니다.
'갇혔고' 와 '기도하더라' 는 동사입니다.
이 두 개의 동사의 시제가, 하나같이 미완료 시제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계속해서 목에 갇혀 있고요.
동시에 교회도 계속해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는, 한 번만 기도한게 아닙니다.
베드로가 갇혀 있는 동안에, 내내 교회는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를 위해서 어떤 기도를 했을까요?
예루살렘 교회가, 베드로를 위해서 내내 간절히 기도한 그 기도의 내용이 무엇일까요?
여러분 우리는 쉽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베드로가 풀려나기를 기도했을 것이다.'
'두말할 것 없이 베드로의 석방을 위해 기도했을 것이다.' 이렇게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하나님이 베드로를 기적적으로 구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결과가 그렇게 나오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베드로의 구출은 교회의 간절한 기도의 응답이다.
교회는 베드로의 석방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저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그런 기도를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자 그 증거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데요.
본문을 보시면,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 베드로를 구출해 주셨습니다.
12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
감옥에서 빠져나온 베드로는, 곧장 마리아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는 마가요한의 어머니입니다.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
이 마가 요한의 어머니의 집으로 풀려난 베드로가 찾아갑니다.
그의 집이, 당시에 교회로, 모임 장소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자 성도들은 그 시간에도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밖에서 이제 문을 두드립니다. 그때 로데라는 여자아이가 나옵니다.
그 소녀는 베드로의 음성을 알아차렸습니다.
베드로가 설교를 많이 했으니까, 그 음성을 기억했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의 음성을 들으니까, 얼마나 이 소녀가 기뻤겠습니까?
그래서 문을 열어주려고 가려다가, 돌이켜 베드로를 그대로 세워두고
안으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베드로가 지금 문 밖에 서 있습니다.'
이 소녀의 얘기를 들은 성도들의 일차적인 반응이 무엇이죠.
그 로데에게 성도들이 '네가 미쳤구나' 했어요. :15
그러니까 기도하는 성도들이, 전혀 믿지를 못하는 거죠.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기도하던 성도들이 믿음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그때 성도들이 베드로의 석방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다는 거죠.
그러니 당연히 기대도 안했다는 것입니다. 석방을 꿈에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밖에 선 베드로가, 이렇게 옥신각신 하는 사이에 여전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장면을 이렇게 재미있게 표현했습니다.
'굳게 닫힌 무거운 옥문은,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자동으로 열렸는데,
자기가 사랑하는 교회의 문은,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았다.'
그만큼 기도하는 그들은, 소녀의 말을 믿지를 못했습니다.
자 그러자 로데가 다시 확신을 가지고 말합니다. '진짜로 베드로가 맞습니다.'
그러자 성도들의 2차 반응이 무엇이죠?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15
여기서 그의 천사는, 수호천사를 말합니다.
'그의 천사'
이건 그 당시 유대교 안에 이제 널리 퍼진 '수호 천사' 신앙을 뜻합니다. 주1)
유대인들은요. 사람마다 수호천사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로마 가톨릭은 지금도 '수호천사'를 믿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교인들은, 수호천사가, 자기가 보호하는 사람과
(평소에 영으로) 동일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다가 특별히 자기가 보호하던 사람이 죽게 되면,
그 사람과 동일한 모습을 하고 있던 수호천사가 (환상으로) 나타난다고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천사'라는 이들의 말에는, 어떠한 의미가 전제되어 있습니까?
'베드로가 죽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천사가 나타난 것이다'
라는 의미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로데의 말이 맞다면요.
자 그러니까 이들은, 베드로가 살아나오기를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었으면 죽었지, 살아 나오는 걸 생각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자 그러니 이들의 기도는, 베드로의 석방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혹자는 이걸 가지고 이렇게 해석합니다.
'지금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의 석방을 기도했을 것이나
그러나 그들은 기도를 하면서도 믿지를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불신의 기도를 드렸던 것이다.
그들은 입으로는 베드로를 살려달라고 기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믿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 장면을 해석합니다.
그러니까 그 성도들을 '믿음 없는 사람들'로 디스해서 보는 거죠. disrespect
그러나 저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정황상, 그들은 베드로의 석방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만일 그들이 베드로의 석방을 위해 내내 간절히 기도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이 상황에서, 그들은 어떠한 반응을 보여야 합니까?
당연히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하지 않습니까?
물론 소녀의 말을, 한 번에 못 믿을 순 있습니다. 이것까지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소녀가 힘주어 다시 말했다면, 즉 확신있게 말했다면 :15
그럼 누구 한 사람은 최소한 반응이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 그러나 누구 하나도, 베드로의 석방을 믿지 못합니다. 오히려 뭐라고 말하죠?
'그의 천사라' 고 말합니다.
그만큼 그들은 베드로의 탈옥을 아예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아예 그 가능성을 생각 조차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의 정황상, 그들은 베드로의 석방을 위해 기도한게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이건요, 단순히 제 개인적인 사사로운 해석이 아닙니다.
제 개인적인 '뇌피셜'이 아닙니다. *자기 개인적 의견을 공식적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주석을 통해서 확인해 봤는데요.
권위있는 주석들이 저와 같은 의견이더라고요.
지금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의 석방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를 위해 무엇을 기도한 것인가요?
자 그 답을, 우리가 사도행전 안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오늘 처음으로 옥에 갇힌게 아니었습니다.
이미 앞서 베드로는, 두 번이나 옥에 갇힌 적이 있습니다. 이 번이 세 번째죠.
(다르다면 처음 두 번은 종교권력에 의해서이고, 이번 세 번째는 헤롯 왕에 의해서죠)
첫 번째 투옥은, 행4장에서 베드로가 옥에 갇힌 적이 있습니다. (두 번째 투옥은 행5:18)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낫게 해 주었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베드로와 요한이 옥에 갇힙니다.
그 사도들은 유대의 종교 권력자들에게 협박을 받습니다.
'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지도 말라고'
그렇게 협박을 받고 그들은 풀려납니다.
풀려난 베드로가 교회에 가서 보고를 했습니다.
자 그때 그 말을 들은 예루살렘 교인들이 기도한 내용이 있습니다.
4:29~31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29절을 보면, 이들의 기도가 이렇게 시작이 돼요.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보시고' 라고 기도합니다.
여러분, 이 기도는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의 위협을 없애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들의 박해를 피하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이 기도는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 그들의 위협을 아시죠? 하나님, 지금 그들의 위협함을 보고 계시죠?'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박해와 위협을 없애 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박해가 있지만, 그들이 기도하는 내용이 무엇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그대의 박해를 보고 계시죠?
그러나 하나님, 그 속에서도 우리가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원합니다.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들이 비록 우리를 죽인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옵소서'
이것이 그들이 기도했던 내용입니다.
자 그리고 그들은요. 말씀을 전할 때마다, 그 표적이 동반되기를 구했던 것입니다. :30
말씀이 더욱 확실히 증거되기 위한 '따르는 표적'이었던 거죠.
자, 그 기도의 응답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힘있게 전했습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31
그들의 기도의 주제는
'하나님의 말씀은 담대히 전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박해자들의 위협을 없애 달라는 기도를 한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위협이 없는 편안한 삶을 위해 기도한게 아니었습니다.
박해자들의 위협이 있지만, 자신들을 굽어 살피시는 주님의 능력으로
어떠한 상황에서든 주님의 증인으로 살 수 있게 해달라고.. 그들은 기도한 것입니다.
▲이 4장의 예루살렘 교인들이, 바로 오늘 본문의 교인들입니다.
그러니 4장과 비슷한 기도를 드렸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자 그리고 4장에서 감옥에 갇혔던 베드로가, 12장에서 똑같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4장에서 이 베드로를 위해 기도했던 교인들이,
본문 12장에서도 베드로를 위해 똑같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이들이 어떤 기도를 했겠습니까?
당연히 4장과 똑같은 기도를 하지 않았겠습니까?
이것이 훨씬 더 합리적인 해석입니다.
오늘 이들은 베드로를 무조건 살려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을 겁니다.
더군다나 지금은, 야고보 사도가 진짜로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들의 입장에서는 '베드로도 죽게 될 것이다'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당연히 베드로도 헤롯왕에 의해 죽게 될 것이다..' 하고 마음의 준비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요한복음에서, 이미 베드로의 죽음을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21:18~19
자 그러니, 여러 가지 정황상, 베드로의 석방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예루살렘 성도들은, 4장에서 드렸던 기도의 연장 선상에서
똑같은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4:29절의 기도를 또 다시 드렸을 것입니다.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4:29
'비록 베드로가 순교를 당할지라도,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옵소서.
베드로의 믿음이 변절되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옵소서.
베드로의 믿음을 끝까지 붙들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그들 앞에서, 헤롯당 앞에서
세상의 권력 앞에서 담대히 전하게 하옵소서' 이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베드로는, 그 전에 주님을 부인한 화려한 전력이 있으니까요.
그러니 베드로가, 끝까지 주님의 증인으로 사명을 감당하기를 기도했을 것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사셨듯이, 베드로도 그렇게 죽기를 기도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죽음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야고보 사도처럼,
베드로 역시 그 상황을, 그 죽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를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기도했던 기도의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그것도 간절히요.
베드로가 감옥에 갇혀 있던 내내요.
자 이것이 성도들이 '베드로가 살아 돌아왔다'는 소녀의 말을 믿지 못했던 이유입니다.
그들은 무조건 베드로의 석방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루살렘 교회의 기도에서 무엇을 적용할 수 있습니까?
먼저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게 있습니다.
여러분, 헤롯은 야고보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죽이지 못합니다.
역사를 주관하는 분이, 헤롯이 아닙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헤롯이 모든 권력을 가지고 다.스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도들의 목숨을 헤롯이 쥐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닙니다.
헤롯은 베드로를 죽이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베드로를 구출해 내십니다.
자신의 뜻과는 다르게,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오늘도 역사를 주관하고 다스리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하나님이 허락을 하셔야만, 여러분 그 일이 일어납니다.
오늘도 이 땅에 일어나는 모든 결재권은 하늘의 하나님께 있습니다.
오늘도 창조주 하나님이,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주권으로이 세상을 섭리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누구를 두려워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세상에 무엇을, 누구를 겁낼 필요가 있습니까?
오늘도 우리의 목숨과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굳게 믿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두려워하고, 우리가 믿고 의지할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뜻대로 일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이해되지 않는 질문이 생깁니다.
그 능치 못하신 하나님이, 야고보의 죽음은 허락하시고, 베드로는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베드로는 기적 같은 방법으로 살려 주시지만,
야고보는 그대로 죽음을 허락하십니다.
이 부분이요. 우리가 이해되지 않는 거죠.
왜 야고보는 목베임을 당해서 순교자로 만드시고, 왜 베드로는 살리시는가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베드로는 교회가 위해서 간절히 기도를 했지만, 야고보는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교회가 야고보를 위해서 기도했다는 내용이 본문에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야고보를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아니죠. 당연히 야고보를 위해서도, 교회가 내내 간절히 기도를 했었겠죠.
베드로를 위해 기도한 것처럼, 간절히 야고보을 위해서도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야고보를 데려가셨지만, 베드로는 살려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답을 말하자면.. 우리는 모릅니다. 그게 답입니다.
조엘 비키의 말을 그대로 들려드리겠습니다. ↙
'야고보는 죽임을 당했지만 베드로가 더 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신비입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실제로 우리의 삶 가운데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가지고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기도에서는 응답이 안 되는게, 저 사람이 기도해서는 응답될 때가 있습니다.
그렇죠. 내가 간절히 기도했음에도 응답받지 못한 어떤 기도가
다른 사람이 구할 때는 응답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똑같이 기도하는데 사업이 회복되고요.
어떤 사람은 사업이 회복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병이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는데 그 병이 낫고요.
어떤 사람은 낫지 않습니다. 여러분 그런 경험들이 실제로 우리 가운데 있지 않습니까?
자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누군가의 기도는 덜 간절했고, 누군가의 기도는 더 간절했기 때문일까요?
누군가는 하나님 앞에 덜 의로웠고, 누군가는 더 의로워서 였겠습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답을 말하자면, 솔직히 우리는 모릅니다.
물론 우리는 알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마지막 날 심판이 끝나고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밝히 드러내실 때,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내가 간절히 기도했던 어떤 기도의 제목들이, 내 방식으로 응답되지 않았던 것이
나에게 도리어 큰 행복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그날이 반드시 올 겁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우리가 지금은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는 가운데 확실한게 있습니다.
모르는 가운데 확실한 세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1) 첫 번째,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를 똑같이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야고보와 베드로를 똑같이 사랑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둘을 똑같이 소중하게 여기셨고
둘 다 똑같이 보배같이 여기시고, 똑같이 사랑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너무나 아프고
또 해석되지 않는 삶의 질고들이 있습니다.
자 그때 누군가의 기도는 하나님이 응답은 하시면서
왜 내 기도는 응답을 하시지 않으시나? ... 낙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덜 사랑하시나보다' 그렇게 느낄 때가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느낄 때가 참 많이 있었는데요.
그러나 여러분, 성경의 비추어 보면,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면 그 절대적인 증거가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에서 아들 예수를 똑같이 내어주신 일입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을, 이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가시면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아무것도 아낄 것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이미 확증해 주셨습니다.
이웃 형제에게만 아니라 나를 위해서도,
아들 예수님을 아낌없이 똑같이 우리에게 내어 주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늘 우리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아들도 아끼지 않으실만큼, 우리를 위해서라면, 모든지 아깝지 않으신다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이미 다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일에, 그래서 실패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 사실을 딱 붙들고 어떤 고난과 불행이 올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나의 기도가 원하는 대로, 응답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손이 짧아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짧아서도 아니고,
우리를 덜 사랑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지금은 모르는 하나님의 뜻이 있을뿐입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를 통해, 우리를 향한 사랑을 이미 확증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오늘도 인도하고 계십니다.
2) 그렇기 때문에 두 번째 확실한 사실은,
우리가 모르는 그 모든 일들이, 결국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해하지 못 하고, 모르는 모든 일들이
그분의 소원 안에서 궁극적으로 선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확신한 바울은요. 로마서 8장 28절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것이, 우리가 모르는 모든 일들에 대한, 결국 최종적인 고백이 될 것입니다.
어떤 일도 이런 고백이 나오도록 하나님은 섭리해 가십니다.
그러니 그분을 신뢰하셔야 합니다.
3) 이어서 세 번째 확실한 사실은,
야고보의 죽음과 베드로의 구출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자 그 증거가 시편 37:23절에 있는데요.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하나님께서 사람마다 걸어야 할 걸음을 정하셨다'고 말합니다.
자 이것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 한마디로 사명이라 부르죠.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이 땅에 보내신 걸음과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 야고보는, 순교자로 이끄셨습니다.
그래서 사역도 얼마하지 못하고, 초기에 죽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 훈련을 다 받아 놓고,
왜 믿음의 사람 야고보를 곧장 순교의 길을 가게 만드시나?'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야고보의 길을, 그의 걸음을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야고보의 형제인 사도 요한을 보십시오.
여러분 사도 요한은, 100세 넘게 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쓰고, 요한 서신서들을 다 쓰고, 요한계시록까지 다 쓰고 죽었습니다.
늙어서 죽은 거죠. 계시록을 쓸 때가 90세 정도였다고 추정합니다.
자 그렇다면 사도요한이, (형 야고보 보다)
하나님께 더 축복을 받고 은혜 가운데 있어서 그런 겁니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사람의 걸음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게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래서 사람마다 걸어야 할 길이 각자 다 다릅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주어지는 환경이 다 다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그 길을 걸어가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 길을 걸어갈 때 23b절을 보십시오.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하나님이 정하신 그 길을 우리가 믿음으로 걸어갈 때
하나님이 그 길을 가장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길에 우리가 순종으로 걸어갈 때,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통하여서 가장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1998년에 최광 선교사가 중국 길림성에 가서, 탈북민들을 대상으로
'성경통독'을 통한, 북한 지도자 길러내기 사역을 했습니다.
1기 졸업생이 약 7명인데, 그 중에 2명인 박요한, 진칼빈 형제가 그만 순교했습니다.
7명의 형제가 성경통독 1년 과정을 마치고,
2기생 신입생들을 모집하기 위해, 연변으로 갔다가
그 중 2명이 북한 보위부에 발각되어, 순교한 것입니다.
같이 성경통독 과정을 이수하고, 같이 제자 과정을 마쳤는데,
왜 누구는 순교하고, 누구는 지금 한국에 나와서 '탈북자 목회'를 하고 있을까요?
하나님이 그 길을, 그에게는 그렇게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주2)
이 세 가지 사실을 우리가 확신한다면, 우리의 반응은 하나로 귀결됩니다.
우리는 주어진 모든 상황에서 그분께 순종하면 됩니다.
우리가 흔히들 얘기하죠. '신앙은 순종이다' 라고요.
그런데 그때의 순종은, 말씀에 대한 순종만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 뿐만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대한 순종도 포함됩니다.
여러분, 베드로를 보십시오 베드로는 자기가 순교할 때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살려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 역시 사도 야고보처럼 죽어야 하는 상황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참수형을 당하기 전날 밤, 최후의 순간에서도
평안히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비록 하나님이 자신의 죽음을 허락하실지라도,
그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 예수 마셔도 나를 위해 아낌없이내어 주실만큼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며,
나를 사랑하시는 그분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이시며,
이 길이 나에게 정해진 하나님의 걸음이라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기도했을 것입니다.
살려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이 주어진 상황을, 이 순교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구원의 확신, 영생의 확신으로.. 평안한 잠을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의 예루살렘 교인들도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이들은 지금, 베드로를 살려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베드로가 순교를 당할지라도
이 상황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기도했던 것입니다.
순교을 당할지라도 굴하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이름을 담대히 전하도록 기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당사자인 베드로도, 오늘 본문의 성도들도
주어지는 모든 상황을, 이렇게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그들은 간절히 내내 기도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믿음입니다.
참된 믿음은, 주어지는 상황을 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 힘으로 그것을 벗어나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이 주어지든, 그 상황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모든 상황은,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그 과정 속에서 나를 새롭게 빚으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입니다.
여러분 지금 어떠한 상황 가운데 여러분이 처해 계십니까?
그 상황이 때로는 이해되지 않아서 괴롭고 힘드십니까?
그 상황을 피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상황을 주신 것입니다.
그 상황 속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 우리를 새롭게 빚어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처럼, 또 본문의 교인들처럼,
주어진 모든 상황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오늘 본문의 교회처럼, 여러분의 기도가 사용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상황이 주어지든지, 그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기 위해
여러분들이 기도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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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수호천사'
마18:10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위 구절에 근거해서 성도 각자에게 배당된 수호천사가 있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주2) 탈북민 순교자 박요한, 진칼빈
https://www.youtube.com/watch?v=ruSYkAawcpY
https://www.youtube.com/watch?v=Zo-A-jcgBT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