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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가지고

LNCK 2024. 7. 3.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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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5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 YouTube

성경을 가지고             요17:1~15      

본문은 바울의 2차선교여행 중 빌립보를 떠나
데살로니가 사역, 그리고 베뢰아 사역에 관한 내용입니다. 

앞서 빌립보 사역을 통해서는, 바울과 실라의 사역의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에 대해서' 확연하게 드러내 보여주셨어요. 

한 귀신들린 여종을 고치는 사건을 통해서, 
'사람의 절망적인 상태와 상황에서 건져내시는 구주 예수' 라는 관점에서
우리가 좀 살펴보았습니다. 

이어지는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사역을 통해서는 
"말씀"과 관련된 어떤 교훈을 우리에게 밝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 말씀을 전할 때,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되는가?

본문에 사도바울이 말씀을 전하는 모습이, 우리가 주목해서 볼만해요. 
그는 일단 다른 지역과 똑같은 방법으로 지금 말씀을 전하고 있어요. 

말씀을 전하는 방법이 같은 방법인데, 하나님이 뜻하셨던 방식대로 
말씀을 전한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17:1~2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자기의 관례대로'
이 말은, 바울과 실라는 데살로니가에 가자마자 회당에 들어갔다는 거예요. 

후에 또 베뢰아에 가서도, 바울은 회당에 가서 먼저 복음을 전합니다. 
앞서 1차전도여행 때 비디시아 안디옥에서도,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어요. 17:10
그 후에 루스드라에 갔을 때는, 회당에  들어갔는데, 왜냐면 거기엔 회당이 없었기 때문이죠.

바울은 어디를 가든지, 먼저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자기 관례' 였습니다. 17:2
왜 그는 이런 방법대로 계속 복음을 전했을까요? 

사실 유대인의 회당에 먼저 들어갔을 때, 바울은 여러 곳에서 반대와 핍박을 받았어요.
그러면 회당에 다시는 안 들어가면 되잖아요. 어쩌면 그게 쉬운 방법이잖아요.
그런데 바울은, 핍박을 받든지 말든지, 일단 새로운 도시에 가면, 회당부터 찾아갑니다. 

그 이유는, 그가 말했던 것처럼, 유대인에 대한 자신의 애끓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롬9:1~3절을 보면, 자신이 유대인들을 자기 마음에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에게 회당에 들어가서 먼저 전했습니다. 

롬9:1~3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그 유대인들을, 바울은 그렇게 애틋하게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지 복음을 전할 기회가 생겼을 때는, 먼저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수도 있어요. 

그러나 롬1:16절을 보면, 그는 단순히 자신의 개인적인 선호도 때문에 
유대인에게 먼저 복음을 전했던 것이 아니고, 

 

롬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자기의 애국심, 동족애,  그것에 앞서 
하나님의 방식이, 하나님의 뜻이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 였다는 말이에요. 
바울은 행1:8절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바울은 항상 주님이 가르쳐 주셨던 방식대로 복음을 전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방법이 정말 비효율적이고 위험해요. 
항상 회당에서 유대인에게 먼저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그 도시의 유대인들이 계속 자기를 괴롭히거든요. 

그러니까 1차선교여행 때도,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똑같은 일을 경험했잖아요. 
지금 2차선교여행 때도, 본문의 데살로니가, 베뢰아에서도
똑같은 일이 계속 반복되고 있거든요. 먼저 회당에 들어갔다가, 큰 반대를 받은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아, 이렇게 복음을 전해가지고는 안 되겠다. 
헬라인에게 먼저 그냥 전해야 되겠다' 이렇게 방법이나 전략을 바꾸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그런 효율성이나 위험도를 따지지 않았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게시해 주신 방식대로, 하나님이 뜻하심 대로,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 다음에는 헬라인에게로다 라고 말씀하셨던  롬1:16, 행1:8
그 하나님의 방식 그대로 순종하면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을 보게 돼요. 

▲그리고 또 하나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바울이 복음의 말씀을 전할 때, 
'바울은 언제나 말씀을 전하였고, 성경대로 전하였고, 예수를 전하였다'는 것입니다. 

17:2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바울은 어디 가서 간증을 하거나, 신비한 체험을 얘기하거나, 사설을 늘어놓거나, 
자기의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던 것이 아니고, 
언제나 그 도시에 가면 성경말씀을 전했어요. 

성경으로 설교했고, 그리고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한다.. 라고 말하면서 
말씀 중심, 그리스도 중심으로 계속해서 복음을 전했고, 
성경의 뜻을 풀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주해, 강해설교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말씀을 전한다, 복음을 전한다, 설교를 한다' 그러면 
성경을 풀어 설명하는 것이어야 하고, 
예수를 얘기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바울이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셨던 방법대로 
오직 성경과 예수만 전하는데, 

그가 말씀을 전할 때에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믿음으로 말씀을 전했다.. 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가 '성경만, 오직 예수만' 이렇게 전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그렇게 했어요.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바울은, 미리 계획을 잡아놓고, 지금 말씀을 전하고 있지 못 해요. 

오늘날 우리 교회는 [12주간 풍성한 삶 양육 훈련]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몇 달 동안은 출애굽기] 설교합니다. 이렇게 미리 계획하지만, 

바울은 지금 자신의 계획대로 말씀을 선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유대인들의 핍박 때문에, 늘 이리 저리 쫓겨다니기 때문이죠. 

본문에서도 바울은 지금 급하게 데살로니가, 베뢰아를 지나가고 있는 것을 보게 돼요. 

데살로니가에도 오래 있지 못했습니다. 본문에 3주간 있었다고 나오는데, 17:2
학자들은 그 보다는 좀 더 오래 있었다고 보지만, 
그렇다 해도 오래 머문 것은 아니죠.

그래서 그 후에 고린도에서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써서 보낸 것입니다. 
양육을 다 못했기 때문에, 대신에 서신서를 써서 양육하는 겁니다.
 
베뢰아에서도 마찬가지죠. 
지금 지나왔던 모든 곳이 박해 때문에 계속해서 말씀을 던지고 지나가는 식입니다.
말씀을 전하고 나서 바울은 그냥 홀연히 떠나버려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죠.

마치 예수님이 제자들을 남겨놓고, 3년 반만에 홀연히 떠나버리신 것처럼, 
그냥 바울은, 도시를 돌면서 전도하고는, 조금 있다가 바로 떠나버려요. 

그런데 말씀 전하는 사람(바울)의 입장에서, 그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야, 이래서 뭐가 되겠나?' 
좀 더 전하고 싶고, 좀 더 가르치고 싶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떠나버려요. 
금방 몇 마디 복음 전하고, 떠나버린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가 떠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박해가 무서웠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 떠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말씀을 붙들고서 역사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이었어요. 

'나는 여기서 씨를 뿌리지만, 그 이후에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역사하실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고전3:5~9절을 보면,  바울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바울은 자기를 지금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 하면 
'나는 하나님의 사역자고, 아볼로도 하나님의 사역자다. 
그런데 나는 심는 자라는 거예요. 씨를 뿌리는 자라는 거예요. 
씨를 뿌리고 지나가는 사람이지, 물을 주면서 거기서 키우는 사람이 아니다' 라는 말입니다. 

'아볼로는 물을 주는 자이고, 자라게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이렇게 말하면서 바울은 자기를 개척자로 인식하고 있었어요. 
나는 개척하는 사람이지, 여기서 물을 주고 이들을 양육하는 사람이 아니다..
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죠. 

그러니까 내가 씨앗을 한 번 뿌리고 지나가도.. '일을 이렇게 해서, 이거 되겠나?' 
하고 좌절한 것이 아니라,

그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그 이후에 하나님께서 그 일을 열매 맺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계속해서 말씀을 전하면서, 일선에서 개척해 나가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14:21~23절까지 보면,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바로 안디옥으로 돌아가지 않고, 
버가에서 다시 유턴해서, 앞서 복음을 전했던 그들에게 다시 재방문해서
한마디씩 격려해주면서 돌아갔습니다. 

이 때 그는 '하나님, 제가 뿌린 이 씨앗이 열매 맺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이들 안에서 역사해 주십시오. 하나님이 하실 것을 믿습니다
라는 그 믿음으로 그렇게 하나님께 위탁했다는 거예요. 

행20:17~32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보내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20:31~32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바울은 말씀을 전하면서 급히 그 지역을 떠났지만,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어요. 
'나는 말씀의 씨를 뿌리고 지나가도, 누군가 하나님께 세우신 아볼로와 같은 
물 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요. 
나는 여기 그냥 지나가고, 나는 다시는 이 사람들을 보지 못한다 할지라도, 
주의 말씀이, 또한 하나님이 그들을 키우실 것이다' 라는 그런 믿음으로 
말씀을 뿌리는 거예요.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혹은 설교를 할 때,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지?' 
아니요. 그런 마음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던진 이 말이, 오늘 내 자녀의 삶 속에서 분명히 역사할 것이다. 
내가 던진 이 말이 저 사람의 생명에 분명히 역사하실 것이다' 라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복음을 던졌다(전했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의 이 데살로니가 사역을 통해서 
바울이 말씀을 전할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말씀을 전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에든, 설교를 할 때에든, 
시대가 바뀌었다 해도, 그래서 시대에 맞춰서 우리가 해야 되겠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방법인가?' 우리는 잘 생각해야 됩니다. 

복음을 전할 때에 우리가 정말 '이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방법인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이 맞는가?' 

설교를 할 때에도, 말씀을 전할 때에도 
'이거 (성경 주해, 강해)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방법이 맞는가?' 

 

이 방식이 비효율적이라고 느껴지고, 위험이 따른다 할지라도, 
그리고 고난이 따른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방법인가?'를 늘 생각해야 돼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즉 성경말씀을 전해야 돼요. 
그래야 성령이 역사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믿어야 됩니다. 우리의 믿음을 따라서 
'내가 믿는 믿음대로, 내가 뿌린 그 말, 나의 언어로 했던 그 말과 
나의 부족한 그 복음 선포가 
주로 말미암아, 은혜로 말미암아, 열매를 맺어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서 
복음을 전해야 됩니다. 이런 바울의 모습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2. 본문을 통해 <말씀을 받을 때>의 자세를, 교훈하시는데요. 

이제 데살로니가에서 80KM 떨어진 베레아라는 곳으로 피신갑니다. 
데살로니가는 대도시인 반면, 베뢰아는 시골이에요. 

17: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1) '더 너그러워서' 
이전 성경 버전은 '더 신사적이어서' 이렇게 번역했어요. 
'유게네스테로이' 라는 단어예요. 
이 말은, '귀족의, 품격 있는' 이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 자체가 귀족이었다.. 이런 말이 아니라, 
설교를 듣는 베뢰아 사람들의 모습이, 매우 품격이 있었고 고결했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베뢰아 교인들을 통해서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야 되는지를 보게 돼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 그러니까 우리가 설교를 듣든, 성경을 읽든, 누군가의 대화를 통해서 말씀을 받든지 간에 
우리는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야 된다.. 라는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이란,
'열린 마음, 또는 사모하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영어성경들은 with great eagerness, with all readiness of mind 등으로 번역했죠.

3)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11
또 냉철한 지성으로 받아야 되는 거예요. 

'정말 그런가 아니한가를, 근거가 되는 성경을 통해서 
냉철한 지성을 사용하면서, 이성을 사용하면서 말씀을 받았다' 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열정적인 마음과, 객관적인 성찰이 함께 역사했던 거예요. 
'간절한 마음' + '성경을 상고'

베뢰아 사람들은 말씀을 받을 때 수용성과, 그리고 분별력을 함께 사용하면서 
말씀을 받았다 라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말씀을 받을 때, 이렇게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받을 때 
간절한 마음으로 받지 않고, 
'오늘 무슨 말하는가 한번 들어보자, 오늘 나한테 주시는 말씀이 혹시 있을까?' 
'은혜 주시면 감사하고, 한번 나를 감동시켜 보든지...'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이서 
그런 사람들에게는 말씀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들려지지 않는 거죠.

오늘날 참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는 태도가, 간절한 마음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베뢰아 교인들의 이 '간절한 마음'은, 우리에게 큰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용성'도 중요하지만, '분별'하면서 받아야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게 성경적으로 맞나?' 
그리고 그걸 묵상하면서 계속해서 '상고하면서'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분별하면서 받는 게 아니고, 비판하면서 받아요.
비판은, 수용성을 배제한 집중력이에요. 
'오늘 무슨 얘기 하나 한 번 보자!' 틀린 게 뭔지를 찾으려고.. 이게 비판입니다. 

반면에 분별은, 수용하기 위해서 집중해서 듣는 거예요. 

비판분별의 차이는, 둘 다 말씀을 집중해서 듣는데,
하나는 틀린 것을 집어내려고 집중하는 것이고, 하나는 수용하려고 집중하는 것입니다.

분별하면서 듣는 사람은
'아, 하나님의 말씀이 이거구나.. 본문은 이런 말씀을 하시는구나' 

그래서 '왜 나는 설교를 듣는데 은혜가 안 되노?' 
물론 전하는 자가 부족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받는 자들이 부족해서 그런 경우도 많습니다. 

적어도 설교시간에 본문을 읽잖아요.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설교가 한 마디도 자기 귀에 안 들어온다 해도, 
그 읽은 본문, 성경 말씀은 자기 귀를 울려야 됩니다. 
그 본문 말씀도, 자기 두 귀를 울리지 못한다면... 듣는 자가 잘못된 것입니다. 
듣는 자가 준비가 덜 된 것이죠.

정말 베뢰아 교인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설교를 들으면, 
최소한 본문 말씀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시는 그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4)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11
저는 이게 정말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들은 '날마다' 말씀을 받았대요. 

모든 믿는 사람들이 자신의 일상을 6일 동안 살다가 
하루는 모여서 다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예배하는 주일을 허락해 주셨어요. 

그런데 말씀은 '매일 매일'이에요. 만나는 하늘에서 매일 내리는 거예요. 
'오늘 주일에 들었던 말씀으로 한 주간을 살게 하시고' 이렇게 대표기도 하시는데,
그 들었던 말씀을 '일주일 내내, 매일매일 묵상하자'는 취지인 줄 압니다.

그와 아울러, 우리 각자가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겁니다.
월요일은, 월요일에 주시는 말씀이 있는 거예요. 
화요일은, 화요일에 주시는 말씀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육신의 양식은 밥을 매일 먹듯이,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도, 매일 드시기 바랍니다.
요즘은 핸드폰에도 성경 어플이 있으므로, 성경 읽기가 훨씬 편리해 졌습니다.
어디 차를 타고 이동할 때나, 커피를 마시며 쉬는 시간에도, 
언제든지 어플을 열고, 말씀을 읽고 묵상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물이 흘러들어왔는데, 흘려보내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고여있으면 썩습니다. 
또 물을 계속 공급받지 않으면 또 어떻게 되죠? 말라버려요. 

즉 흘려보내지 않으면 고여서 썩고, 공급받지 않으면 말라버린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수인데, 그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내게 흘러들어온 말씀을, 내가 흘려보내지 않으면 
내 안에서 썩어진단 말입니다

나는 그리고 흘려는 보냈는데, 
더 이상 공급받지 않으면.. 내가 말라져 버린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샘물, 또는 강물(시냇물)' 이렇게 말씀하는데, 

-흘러들어오면 흘려보내고 
-계속해서 공급을 받는 ...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나야 건강한 샘물, 강물이 됩니다.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벧후2:17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요7:38
'샘물이 되리라' 요4:14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말씀을 계속해서 공급받아야 되는 자인 줄로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하게 날마다 상고하면서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고, 

그런데 받기만 하고 가만히 가두어두면 썩는다는 것을 기억하시면서 
내가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전하고, 주의 뜻을 전하면서 
이 말씀을 흘려보내는 그러한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