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blog.naver.com/karamos/80046753289
◈애통하는 자의 복 눅6:21 1999.02.07.
눅6:21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1. 인간은 웁니다. 눈물, 통곡이 없는 사람은 비인간적입니다.
<별들의 고향>이라는 책을 쓰신 작가 최인호 씨의 <사랑아 나는 통곡한다> 라고 하는
또 다른 책이 있습니다. 그 책 서문에 나오는 이야기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나는 통곡하며 살고 싶다. 나는 대충 대충, 생활도 대충 대충,
만남도 대충 대충, 일도 대충 대충 ...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나는 모든 일에 통곡하는 그런 열정을 지니고 살고 싶다.
어찌 사랑뿐이겠는가... 나는 친구도 통곡하고 사귀고 싶다,
꽃 한 송이를 보아도 통곡하며 보고 싶다. 내 아들딸들의 통곡하는 아버지이고 싶다.
아내와도 늙어 죽을 때까지 통곡하며 살고 싶다. 하나님도 통곡하며 믿고 싶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인간과 사물에 대한 깊은 애정과 정열과 감격이 있는 생을
살아야 그것이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통곡이 없고 눈물이 없는 것, 눈물이 말라버린 사람, 그거 어찌 사람이겠습니까?
감동과 정열이 없기에 진실도 없는 겁니다. 물론 위로도 없는 것입니다.
비인간적이란 말이 무엇입니까? 눈물이 없고 감격과 감동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 사람 같지 못한 것이지요.
여러분 요새 보면 IQ는 높은데 EQ가 제로입니다. 감성지수가 너무 한심합니다.
어떤 것에 대한 진실한 반응도 없습니다.
‘울지도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울 힘도 없습니다. 울 마음도 없습니다.
북한에 어린이들이 거리에 꽃제비라는 이름으로 나도는 그 비참한 모습을 TV에서 본 사람,
저를 만날 때 여러 가지로 말씀하더만요. "저거 어떡하지요?" 하고
그 본 일을 생각하면서 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빤히 쳐다보고 "목사님 저거 사실인가요?" 그래요.
저는 물었습니다. "사실이라면 어쩔거요?"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왜 저들을 끌어안고 한번 울 수 있는 그런 마음이 없더냐고.
눈물이 말라 버린 지 오래됐어요.
그것은 그만큼 사람됨에서부터 멀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올시다.
▲여러분, 운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너무나도 귀한 말씀입니다. 애통하면서부터 인간이니까요.
그것은 바로 의식이 있다는 뜻이에요.
의식이 없는 자는 애통이 없어요.
의식을 잃어버린 남편(의식 불명 환자)을 위해서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돌보는 부인의 말입니다.
"그저 '여보! 여보!' 하고 부르고 싶고, 그렇게 얼굴을 비비고 손을 만지고 정성을 다하지만
아무 감각이 없어요."
어느 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남편의 얼굴을 비비며 "여보" 라고 할 때, 눈에서 눈물이 나는 걸 보았다고,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지는 걸 보았다고,
"저가 내 소리를 듣는가 봐요!" 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한 방울의 눈물이 떨어질 때, 그것으로 사랑이 교감되면서 그렇게 기뻐합니다.
이것이 눈물이란 말이예요. 내면적 세계에서 오는 의식을 말합니다.
여러분 의식이 없는 사람, 식물 인간은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이라고 부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살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에요.
◑오늘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애통하는 자' 마5:4
그것은 바로 자기 성찰이 시작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죄인된 내 모습, 내 존재된 나 자신을 생각합니다.
자기를 상실한 사람은 울 줄을 모릅니다.
나 자신을 찾을 때, 나 자신의 나 됨을 찾을 때, 거기서 눈물이 터져 나오는 것이에요.
또한 자기의 미래와 자기의 운명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때,
여러분 이대로 좋습니까? 이대로 가면 어디로 가는 겁니까?
내 앞에는 어떤 운명이 존재되고 있는 겁니까?
이대로 주님 앞에 담대하게 설 수 있는 겁니까?
비로소 내 운명에 대하여, 영원한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 때
거기에 눈물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영의 눈이 열리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봅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이야기는 수없이 들었지마는 오늘 와서 생각합니다.
‘나는 내가 심은 대로 거두고 있다. 아니 아직도 거두기 시작하는 것이다.’
내가 과거에 심은 대로 거둔다면 앞으로는 엄청난 일이 이루어질 거예요.
불행하다, 행복하다는 이야기도 할 필요가 없어요.
‘심은 대로 거두어 갈 때, 내 앞은 이제 얼마나 더 비참해 져야 되나...’
여러분 심은 대로 거둔다고 하시는 그 하나님의 엄위한 경륜 앞에서
우리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게 될 때, 비로소 눈물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지요)
▲또 내 책임을 남에게 돌릴 때는 눈물이 없어요.
다른 사람의 불행도 나 때문이라고 생각할 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모든 비참함이 바로 나 자신이 원인이라고 생각할 때
거기에 진실한 눈물이 있는 것입니다.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는 사람은 증오뿐입니다.
▲성경에 보면 한 율법사가 있습니다.
모처럼 예수님께 나와서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까요?" 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 저 말씀을 하신 다음에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 그리하고 나를 쫓으라." 라고 할 때,
그는 영생을 포기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여러분, 이 사람의 마음속에 애통함이 없었습니다.
애통함이 없는 사람을 하나님도 위로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앞에까지 나왔다가 그대로 돌아가는 그 뒷모습을 한번 보세요.
이 사람에게 눈물이 없었단 말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주님 앞에 나아와 기도합니다.
바리새인은 도덕적으로는 확실히 세리하고는 비교할 수 없는 의인입니다.
그러나 그는 교만했고 눈물이 없었습니다.
세리는 저 멀리서 무릎을 꿇고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통곡(눈물)합니다. 그가 위로를 받았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은혜를 입고 돌아갔다고 예수님은 설명하고 계십니다.
자기 부정이 없을 때 통곡할 수 없고,
통곡이 없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정체를 바로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애통하는 마음 그건 축복입니다. 애통하는 그 마음 자체가 축복입니다.
이를 가능케 하시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심판 받은 자는 눈물이 없습니다.
▲여러분 마음껏 울 수 있다고 하는 게,
그건 하나님의 큰 축복이고, 용기요, 하나님이 주신 기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울지 못하는 자는,회개가 없습니다.
회개가 없는 자에게는 위로도 없습니다.
왜 통곡이 없느냐고요? 이미 심판을 받아서,
마음이 굳어져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이때는 두 세, 세 배로 힘써 회개해야 합니다)
너무 바빠서, 뛰면서 생각하고, 정신이 없었어요?
벌써 애통할 수 있는 마음을 잃었어요.
너무 타성화되고 무의식화되고, 무감각화 되어서 그게 체질이 되어 버렸어요.
이제 뭐 눈물 나올 겨를이 없지요. 어떤 때는 지나친 욕심에 이끌려서
끝없는 채울 수 없는 많은 욕심의 노예가 된 탓에,
남을 긍휼히 여기는 눈물도 없고,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눈물도 없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진실을 다시 한번 묻는 그런 눈물도 없는 그런 상태,
작은 일에 성공했다고 교만해서...
▲눈물을 흘리고 변화된 가장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일하는 가장이 있었어요.
그저 너무 생활이 어려워서 판자집에서 살고, 연탄을 갈아 넣으면서
참 고생하는... 그는 언덕 위에 집이 있었습니다.
그 가장은 소위 일류대학 법과대학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사법고시를 여러 번 보았지만, 계속 낙방을 하고
어찌 어찌 길이 열려서 초등학교 선생이 되었습니다.
이제 아들 딸 둘이 초등학교 1학년, 3학년인데 이걸 바로 키워 보겠다고
애들 공부를 잘하라고 강요하는데, 좌우간 95점만 맞아도 매를 때리는 겁니다.
꼭 100점 맞아와야 돼요. "그것도 모르냐?" 그리고 아이들을 혼을 냅니다.
아이들이 파랗게 질려서 떨면서 "공부 잘할께요 아버지, 꼭 100점 맞을께요 100점 맞을께요."
어느 날 아침에 또 매를 맞는 그 장면을 멀리서 지켜보면서
부인은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습니다.
가장이자 아빠는 혼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초등학교 다닐 때 100점만 맞았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1등만 했다.
네가 그게 뭐냐?”
이 부인이 참고 참고 있다가, 자기 남편에게 그만 대들었습니다.
"야, 너!" 그러고 나왔어요.
"그래, 학교에서 늘 100점 맞고 늘 1등 해서 고작 이 신세냐? 도대체 네가 한 게 뭐냐?"
평소에 남편 앞에서 설설 기던 아내가, 이렇게 세게 나오니까
그만 남편이 그리고 나서 땅을 치며 우는데요, 몇 시간을 계속 울더랍니다,
그러고 나서 그 교만한 인간이 깨졌어요. 그 다음부터는 아이들에게
혼을 내지 않고, 아주 자상한 아버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눈물을 흘리고, 그 가장이 달라진 것입니다.
▲작은 성공이 미래를 망칩니다. (위 가장은 학교에서 1등 한 것)
이거 깨지기 전에, 이걸 통곡하는 눈물이 나오기 전에는, 온전히 사람 되지 못합니다.
사람 구실을 못합니다. 어디 갔다 놔도 마찬가지요.
그 많은 세월 예수를 믿어도 마찬가지요. 소용없어요.
통곡하는 역사가 있고야 비로소 새 생명이 태어나는 것이요. 인간이 되는 것이에요.
▲영화 '미션'은 1750년 경
유럽 강대국 사이에서 처절하게 짓밟혔던 남미 원주민들의 수난을 그린 내용입니다.
1750년대, 용병이자 노예상인 멘도사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식민지의 경계선에 위치한
산 미겔 선교회 근처에서 원주민들을 잡아 팔며 생활합니다.
그러나 그럭저럭 평탄했던 그의 삶은 동생인 펠리페가
자신의 연인 카를로타와 사랑에 빠지면서 풍비박산 나고 맙니다.
동생과 연인의 배신에 이성을 잃은 멘도사는 결투 끝에 동생을 죽이고,
그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선교원 안에 틀어박혀 식음을 전폐합니다.
멘도사를 다시 세상 밖으로 끌어낸 것은 폭포 위 고지대의 원주민들과 함께
새 선교회를 세우고 있는 신부 가브리엘이었죠.
죄악을 스스로 선택한 것처럼, 참회의 방법도 직접 선택하라는 가브리엘의 말에,
노예상인 멘도사는 무거운 갑옷더미를 끌면서 폭포 위까지 기어 올라갑니다.
고지대의 원주민들은 천적인 멘도사의 출현에 동요하지만,
곧 그의 몸에 달린 갑옷더미를 끊어내 주고 따뜻하게 맞아줍니다.
이 일을 계기로 멘도사는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예수회 수도사로 거듭납니다.
곧 노예상인 멘도사의 그 무거운 마음의 죄짐을 모두 치유시켜 준 것은
은혜의 역사이었는데, 그것은 ‘눈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눈물을 흘림으로써, 그가 마음의 상처와 죄책감으로부터 치유받고,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눈물> 관련글 https://blog.naver.com/coldwater1cup/223168589220
▲또한 남을 원망하는 사람은 회개하지 못합니다. 눈물을 흘리지 못합니다.
원망하고 발악하는 사람 회개하지 못합니다.
참으로 애통함이 있고야 새롭게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슬퍼하는 자가 복이 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저가 위로를 받을 것이니라.'
여기에 애통한다는 말은 '펜세오' 라고 하는 헬라어인데
이 말은 보통 운다는 말이 아니랍니다.
이것은 아주 강한, 슬픔에 대한 아주 강한 표현이에요.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가슴을 찢는 그런 모습을 가리켜요.
예컨대 창세기 37장에 보면 야곱이라는 아버지가 있는데
그 아들 요셉이 죽었다고 생각을 해요.
특별히 짐승에게 물려가서 찢겨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가 통곡을 합니다.
"내 아들 야곱아" 통곡을 합니다. 그 통곡! 바로 그런 마음이 애통하는 마음입니다.
애통하게 될 때 겸손해집니다. 겸손하게 될 때 진실을 찾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적용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비엔나에 "임페리얼 뮤지엄" 이라고 하는 박물관이 있습니다.
여기에 소장된 그림 한 폭에 대해서 소개합니다. 이건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황제가 성당에 들어가려고 할 때, 주교가 문간에 나와서 딱 버티고 "못 들어갑니다."
하는 그 장면을 그린 그림입니다. 그것은 역사적인 것입니다.
주후 390년에 데살로니가에서 로마의 통제를 반대하는 그런 운동이 있었는데,
이것을 막기 위해서 1500명을 무참하게 학살해 버렸습니다.
그 뒤에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밀라노를 방문했다가
밀라노 성당에 주일날 예배를 드리러 들어가려고 할 때
"성 암브로스" 라고 하는 유명한 주교가 딱 나와서 문을 막고 "못 들어갑니다." 그래요.
"왜 못 들어가냐?"
"당신은 죄인입니다."
황제는 말합니다. "다윗 왕도 죄인인데."
그때에 암부로스 주교는 유명한 대답을 합니다
"다윗 왕을 모방하십니까? 그러면 다윗처럼 회개하셔야죠.
다윗 왕은 회개했습니다. 당신은 회개가 없기 때문에 못 들어갑니다."
그러고는 딱 막았습니다. 유명한 그림이요.
이 이야기는 참으로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주1)
회개하지 않는 죄인, 회개하지 않는 교만한 사람, 하나님의 집에 못 들어갑니다.
위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울어야 합니다.
동시에 남을 위해서도 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예수살렘 성이 훼파되었다는 말을 듣고, 옷을 찢고 눈물을 흘립니다.
예레미야는 그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며 너무 울어서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느끼면서 울었기에
흔히 ‘눈물의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에스겔은 훼파된 예루살렘 성을 멀리 바라보면서 울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9장에 보면 한평생 복음을 전할지라도
계속 그 마음에 무거운 근심이 있었습니다. 민족을 향한 눈물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내가 나를 위하여 울뿐만 아니라 멸망해 가는 세상을 향하여,
이웃을 향하여 울 수 있는 바로 애통하는 마음, 그러한 인격, 그가 복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후회하는 것과 회개하는 것은 다릅니다. 사울 왕은 잘못한 일에 대해서 많이 후회했습니다.
그러나 회개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다윗은 더 큰 죄인이지만은 그는 회개가 있었습니다.
침상이 젖도록 회개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위로를 받은 것이올시다.
전설에 이런 말이 있어요. 어느 날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좋은 그릇 하나씩을 주어서
상자를 주면서 세상에 나가서 가장 귀한 것 담아 가지고 오라.
천자들이 세상에 나가보니까 사람들이 금을 좋아해요.
그래서 금을 모아오니까, 그 금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지
하나님 앞에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쏟아 버리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보석. 그걸 또 담아 보았지만,
하늘나라에는 이런 거 얼마든지 많아, "아 이거 다 소용없다." 그래 다 버리고
가장 귀한 것이 무얼까 하고.. 빈 그릇을 가지고 헤멜 때,
어디선가 통곡하는 눈물 흘리는 소리가 들려요.
회개하고 감사하면서 통곡하는 눈물 흘리는 음성이 들려요.
가까이 가서 보니깐 그 눈물이 뚝뚝뚝 떨어집니다. 천사의 마음이 감동됐어요.
"바로 이 순간이다. 이 순간을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신다."
그 눈물을 담아 가지고 하나님께 올라갔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걸 알아야 합니다. 애통하지 않는 자를 위로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도 못하는 게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자를 절대로 구원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위로를 베풀고 싶지만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 위로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디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내가 진정으로 저를 위로하고 싶지만
그 사람이 통곡하는 마음이 없는 한, 나의 수고가 아무 소용없어요.
나의 헌신도 소용이 없어요.
오직 통곡하고 애통하는 자만이 사람으로부터도 위로를 받고,
하나님께로부터도 위로를 받습니다.
통곡함과 애통함을 통해서 영혼이 깨끗해집니다, 가슴이 열립니다, 생각이 맑아집니다,
비로소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라.'
......................................
주1) 암브로스 주교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테오도시우스 1세에게 사죄를 받은 일이다.
AD 390년, 테살로니카(테살로니키)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총독을 살해하고
황제 및 황후의 초상화를 흙탕물 속에 빠뜨려 모욕을 가한 사건이 일어나자,
분노한 테오도시우스 1세가 군대를 보내 주민 약 7천여 명을 학살했다.
암브로시우스는 즉시 서한을 보내 테살로니카 학살에 대해 공식적으로 참회할 것과
당분간 성당 출입을 금지할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황제가 이를 묵살하고 부활절에 측근들과 함께 성당으로 행차하자
암브로시우스(=암브로스)는 성당의 문 앞에 서서 황제가 성당에 들어오는 것을 저지했다.
그리고 성탄절에 다시 성당에 찾아온 테오도시우스 1세에게
마찬가지로 성당 문 앞에 서서 테살로니카 학살에 대한 사죄를 요구하였다.
결국 황제는 이에 굴복하고 그 일에 대해 사죄하였으며,
암브로시우스는 가벼운 보속 이후 성당 출입을 허가하였다.
이 보속의 내용이 뭐였던고 하니, 황제를 상징하는 장식물과 옷을 다 벗고
일반 평복을 입고 주교 앞에서 참회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다.
이는 다신교 시절의 로마에선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이는 암브로시우스의 강한 영향력을 보여준다.
(이것이 보편적인 교회의 권위가 황제의 권위보다 더 빛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무리다.)
암브로시우스는 이 당시 교황도 아닌 유력한 주교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