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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의 설교 1

LNCK 2024. 7. 8. 18:00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사도행전

 

2022 11 27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바울의 설교(1) (youtube.com) -정리-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의 설교 1           행13:13~23           

※바울의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설교를 한 구절씩 해석하고 있습니다.

 

◑도입 : 2번째 방문지,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가다

 

안디옥 교회가 이방 선교를 위해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처음 방문지가 구브로 섬이었죠.

두번째 방문지는 비시디아 안디옥입니다. 오늘 본문이죠.
그런데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가기 위해서는, (앗달리아 항구에 내려서)
버가를 경유해야 됩니다. 

※구브로 섬에서 비시디아 안디옥까지는 꽤 먼 거리입니다. 
중간에 들릴 곳도 많은데, 왜 바울 일행은 꽤 먼 거리에 위치한 비시디아 안디옥까지
곧장 갔을까요? 중간에 버가 라는 도시도, 경유만 했지, 거기서 머물며 전도하진 않습니다.

나중에 1차전도여행을 되돌아오는 길에, 버가를 방문해서 전도하게 됩니다. 
'말씀을 버가에서 전하고' 14:25 

바울 선교팀이, 비시디아 안디옥까지 직행한 이유는, 
구브로 섬의 총독 서기오 바울의 추천서를 지니고 갔기 때문으로 추정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이, 서기오 바울의 고향이었고, 
그래서 서기오 바울이, '우리 고향 사람들을 좀 전도해 주시오' 하고 부탁했던 것 같아요.

막상 1차전도여행을 시작했을 때, 제일 먼저 구브로 섬으로 간 이유도, 
그곳이 바나바의 고향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구브로 섬의 전도를 마치고도, 딱히 목적지가 정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때 서기오 바울이 부탁하니까, 그곳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갔던 거죠.    주1)

※비시디아 안디옥 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역사적인 배경  주2)

여러분, 비시디아 안디옥은 고산지대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해발 1080 미터, 참고로 서울에서 제일 높다는 북한산은 해발 900미터입니다. 
북한산보다 180미터나 더 높은 고원 지대에 도시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거죠.

구브로 섬에서 수행원으로 조인했던 마가가   13:5
버가에서 마가가 선교팀을 이탈해서 자기 집으로 돌아갔고,  13:13
이제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서부터 '바나바와 사울'이 아닌, '바울과 바나바'로 순서가 바뀐다고 했죠 13:43, 46)

비시디아 안디옥에 도착한 그들이, 제일 먼저 한 곳이 있습니다. 
안식일에 유대인 회당을 찾아가는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선교 패턴을 또다시 발견합니다. 
바울은 어디를 가든, 가장 먼저 유대인 회당을 찾습니다. 

첫 선교지인 구브로 섬에서도, 바울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이 유대인 회당이었죠.
바울은 어디를 가든, 가장 먼저 유대인의 회당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곳의 이방인에게로 향했습니다. 

여러분 궁금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바울은 이방인 선교를 위해 부름받지 않았습니까? 
9:15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런데 왜 유대인 회당을 먼저 찾습니까?          주3) '바울이 회당을 찾은 이유'
여러분 유대인 회당에는 당연히 유대인들이 있었겠죠.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구약에 약속한 메시아가 오기를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이해하기가 상대적으로 쉬웠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어디를 가든 유대인 회당을 먼저 찾아갔습니다. 
더군다나 이방인 지역(로마제국)마다, 유대인들이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을 디아스포라 유대인 이라고 부르는데요. 
그 흩어진 유대인들은, 그 지역에서 유대인 회당(시나고그)을 만들어 살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남자 열 명만 모이면 회당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웬만한 이방인 도시에 가도, 거기에 다 유대인 회당이 있었죠. 

◑오늘 중점적으로 살필 내용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행했던 바울의 설교 내용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울의 공식적인 첫 설교입니다. 
과연 그는 무슨 내용을 거기서 전했던 것일까요?

13:14~15 '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바울 팀을 부르는 말)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장면인데요. 오늘날 우리와 같이 예배 시간에 성경을 먼저 읽습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었다'고 말합니다. 구약성경을 말하는 거죠.
그때는 두루마리로 각 권 별로 되어 있었으니까, '구약성경을 읽었다' 하고 말하지 않고,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었다'고 한 것입니다. 

참고로, 오늘날 우리의 예배 형식은, 그 최초 기원을 회당 예배로 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후로, 그들은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는데요, 
예루살렘 성전과 멀리 떨어져 있으니, 할 수 없이 말씀 위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던 거죠.

그래서 구약 율법서들 중에 한 두루마리를 꺼내서, 한 부분을 읽었을 것이고,
그 다음에 예언서들 중에 한 두루마리를 꺼내서, 또 한 부분을 읽었을 것입니다.

자 그렇게 읽고 나면, 회당에 전문적인 설교자가 따로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은 다음에는, 회당장이 말씀을 전할 사람을 그때마다 지정했습니다.

그런데 듣기로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한 랍비라고 하니,
그들은 기대를 가지고, 바울의 설교를 듣기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설교할 기회를 주었던 것이죠.

13:16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
문자 그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좋은 사람'이란 뜻이 아니고, 
이방인 가운데서 유대교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16절은 '유대교인과 이방인 유대교 교인들아' 이런 뜻이죠.
이제 바울의 설교가 본격적으로 13:17~41절까지 길게 나옵니다. 
(오늘은 중간까지만 잘라서 살펴보고, 다음 시간에 나머지를 살펴볼텐데요)

바울의 설교를 한 마디로 말하면,
여러분이 본문을 읽으셔도 알겠지만, 새로운 설교가 아닙니다. 
바울의 설교는 베드로와 스데반의 설교와 다르지 않습니다. 내용이 거의 비슷한데요. 

먼저 구약의 역사를 쭈욱 개관하면서,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아라는 거죠.
그리고 그 분이 죽으셨고, 다시 부활하셨다. 우리가 그 증인이다.. 라는 내용입니다.

바울 역시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바울은 구약의 아브라함 부터 시작해서, 다윗의 역사까지 다룹니다. 
그러니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구약의 파노라마를 다루는 거죠. 

그런데 바울이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설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설교 내용을 보면, 두 가지의 모습이 대조됩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의 실패, 이스라엘의 자격 없음.
-또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의 은혜가 대조됩니다. 

이게 본문의 바울의 설교의 핵심 포인트입니다. 
이제 우리가 설교를 한 절씩 한 번 따라가 볼게요. 

13:17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여러분 이 이 부분은,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요약입니다. 
이 부분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두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택했다' 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셨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택한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셨다고 말합니다. 
택함을 받았다는 말은, 이스라엘에게는 어떠한 자격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또 하나 '조상들을 택 했다'고 말합니다. 
여기 조상들의 대표는 아브라함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어떠한 자였죠? 이방 지역에서 우상을 섬기던 사람이었죠.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찾은 적도, 예배한 적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구원받을 만한 아무 조건이나 자격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런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찾지도 않았던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와 주시고 선택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특별히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으로 아브라함을 세우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인 거죠. 
자 이것이 아브라함의 이야기요, 창세기의 이야기입니다. 

이어지는 부분은 출애굽기의 이야기입니다.  :17b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인도해 내신 이야기입니다. 

인도해 내실 때 '큰 권능으로 인도해 내셨다'고 말합니다. :17b
여러분 출애굽 역사에서 '큰 권능'하면 떠오르는 사건이 무엇이죠?
열 가지의 재앙과 홍해의 기적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광야에서 물을 내어 주시고, 만나로 그들을 먹이셨습니다. 
여러분 이게 다 하나님의 큰 권능이죠. 

그런데 이렇게 택함을 받고, 큰 권능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보인 모습은 무엇입니까? 
그 모습이 18절부터 나오는데요. 보면 어이가 없습니다. 

13:18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

이 부분은, 민수기의 요약입니다. 
광야 40년 동안 그들이 한 일이 무엇이죠? 하나님을 참게 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즐겁게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참게 한 일입니다. 

그렇게 큰 권능으로 인도함을 받았다면, 하나님을 잘 믿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눈 앞에서 그런 기적을 보았다면, 그들이 하나님을 마땅히 두려워 해야 맞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광야 40년 동안,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기는 커녕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보인 모습은 한결같이 불신과 끊임없는 불평과 불신앙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교만하고 완악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배교하기를, 우상을 섬기기를 밥먹듯이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하나님은 '그들을 참으셨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게 광야 40년의 한 줄의 요약입니다. 
광야 40년의 역사는 다른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끊임없이 참고 인내하신 기간입니다.

 

△17절과 18절을 연결해서 보겠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역사를 쭉 말하는데 
대표적인 두 단어 '높여' 와 '참으시고'를, 바울은 말씀합니다.  

여러분, 이게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요약하는 두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높여 주셨으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 은혜를 알고 감사해야죠. 잘 순종 해야죠.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높여 주셨는데도, 
파격적인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데도, 
하나님이 그들을 참으셔야 했습니다.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하나님을 모욕했습니다. 원망했습니다. 
모세에게 반역했습니다. 
조금만 불편한 일이 있으면 '이러려고 우리를 애굽에서 불러냈나? 
차라리 이집트가 좋았다. 노예 생활이 좋았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죠. 
하나님이 존중해 주실수록, 광야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짓밟았습니다. 

그 다음에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해 주셨잖아요. 
출애굽 한 것도 은혜고, 가나안 땅을 차지한 것도 기적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높임을 받고도, 또 반역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참으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이루어가시기 위함 때문입니다.

13:19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기까지 약 사백오십 년간이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참으셨습니다. beared, suffered
'그들로 인해 고통받으셨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그들이 한 것은, 40년 동안 죄 지은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죄를 짓고 있을 그때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그 약속대로 하나님은, 그들을 광야에서 한 걸음씩 
가나안 땅으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시고, 
그들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기까지 450년이나 걸렸다고 말합니다. :19
여기 450년은, 애굽에 있었을 때의 400년과, 
광야생활 40년, 그리고 가난한 정복 10년을 합친 기간입니다.     주4) 430년은?

여러분, 이 450년은 꽤 긴 시간이죠. 
꽤 긴 시간이 흘렀지만, 약속에 신실 하신 하나님은 그 약속은 있지 않으시고 
이스라엘의 끊임없는 반역에도 불구하고, 끝내 약속의 땅으로 그들을 인도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13:20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20절은 사사기의 요약입니다. 

사사시대의 특징이 무엇이죠?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합니다.' 

약속에 실실하신 하나님은, 그들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약속의 땅, 가난한 땅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러면 하나님께 충성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한 짓이 무엇이죠? 
각자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습니다. 

심지어는 후반부에 가면, 세워진 사사들 마저도 점점 더 타락해 갔습니다. 
처음에는 사사가 타락하지 않았는데, 뒤로 가면 사사들마저도 타락합니다.
그러니 백성들이야 오죽했겠습니까.

13:21 '그 후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21절은 사무엘상 이야기죠. 여러분, 더 기가 막히 일이 일어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는 하다 하다 무슨 짓을 하냐면, 하나님께 왕을 구합니다. 

왕을 세워달라고 한 이유가 무엇이죠? 하나님의 왕되심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의 왕되심을 그들은 만족 못 합니다. 

기껏 그들을 데려다가 가나안 땅에 들여다 놨더니 
그리고 사사들을 통해서 그들을 위기 때마다 구원해 주셨는데 
여러분 이스라엘이 한다는 말이 무엇이죠? '하나님 말고 다른 왕을 주세요.' 
세상 나라들처럼 번듯한 왕을 달라고 구합니다. 

여러분 기가 막힐 노릇 아닙니까? 마치 여러분의 자녀가 여러분에게 와서 
'아버지, 저에게 다른 아버지를 주세요.' 라는 말과 똑같은 말입니다. 
'저는 아버지가 제 마음에 들지 않아요. 다른 아버지는 돈도 잘 벌고 멋있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런 아버지가 아니에요. 저도 그런 아버지를 주세요.' 라는 말과 같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기가 막힐 짓입니까? 배은망덕한 자들이죠. 
그 짓을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하는 겁니다. 
왕이신 하나님을 앞에 두고, 다른 왕을 달라고 구합니다. 

이렇게 끝내 하나님을 거부하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바보같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을 세워 주십니다. 
사울 이라는 왕을 세워 주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울은 또 어떠한 자였죠? 하나님이 원하시는 왕이 아니라 
사람들이 요구했던 왕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보기에 딱 좋은 왕이었죠. 
키도 크고, 외모도 놓치고, 집안도 좋고... 

세상의 왕처럼 여기고 싶은 인물이 딱 사울이었습니다. 
백성들이 원했던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이 사월 왕을 마지 못해 허락해 주셨습니다. 

결국 사울은 불순종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폐하시고 새로운 왕을 세워 주시는데, 바로 다윗 왕이었습니다. 

13: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하나님께서 뜻 하신 왕이 드디어 세워집니다. 자 그러면 뭐가 좀 달라질까요?
다윗을 가리켜 하나님은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과거 개역은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했죠.

그런데 여러분 솔직히, 이 표현이 다윗에게 적합한 표현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다윗의 흑역사를 다 알지 않습니까? 

밧세바 사건부터 시작해서 살인까지, 다윗은 수많은 전과가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여러분 물론 다윗이 선한 왕이기는 했지만, 완벽한 왕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내 마음에 합한 자'라는 이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성경에서 차지하는 다윗의 위치는 
그가 왕으로서의 갖는 의미는, 인간 왕의 모범이 아닙니다. 

다윗 왕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예표하여, 미리 보여주는 왕이 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이 말은
결국 다윗 얘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다윗 다음에 일어난 예수님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에 완벽하게 합한 자 였습니다. 
완벽하게 합한 예수님의 모형으로, 다윗을 본 겁니다. 

그것처럼 22절에 '내 뜻을 다 이루리라'고 하신 말씀도 이것입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뜻이 다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모형으로 다윗을 본 것이죠. 

결국. 무슨 말이냐면, 다윗도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지는 못 했다는 것입니다. 
다윗 역시 하나님 앞에서, 연약한 인간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누가 오셔야 했는가? 
다윗에게 약속한, 그의 후손에서 예수님이 오셔야 했습니다. 
그 내용이 23절인데요. 

13:23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이렇게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 설교하면서
구약의 창세기를 시작으로,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구약의 전 역사를 쭉 훑었습니다. 
여러분, 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쭉 보시면 
솔직히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화가 나지 않습니까? 

'이런 괘씸한 놈들, 이런 완악한 놈들, 은혜를 배신한 정말 나쁜 놈들, 
어떻게 이렇게 강퍅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렇게 못될 수 있을까?' 

◑적용

그러나 여러분 아십니까? 이들 구약 이스라엘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고, 나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창세기의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 아닙니까? 
우리 역시 아브라함처럼, 이방 땅에서 우상을 섬겼던 자들입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알지도 못했고, 하나님을 찾지도 못했을 그 때,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찾아와 주시고, 선택해 주셨습니다. 
구원받을만한 아무 자격과 공로 없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출애굽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 아닙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애굽이라는 흑암의 권세에서, 죄와 사망의 나라에서 
큰 권능으로 건져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 역시, 우리 하나님께서 
나그네 된 이 땅에서, 큰 권능으로 함께 해주시고, 우리의 삶을 인도해 주십니다. 

때마다 필요한 것들을 허락하시면서,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택함을 받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우리가 
광야같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기 보다는, 불신하며 살아가지 않습니까? 
광야 40년의 이스라엘의 모습이,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셔야 할만한... 그런 삶을 우리는 날마다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어서 사사 시대의 모습, 이 모습도 나의 모습 아닙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나님을 믿고 있지 않습니까? 

이어서 사무엘상의 이야기가, 또 저와 여러분의 이야기 아닙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왕이신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거부하고, 
세상의 사람들처럼, 우리를 지켜줄 다른 왕을 구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너무나 참 나쁜 우리이죠. 아버지 하나님 마음에 대못을 받고 있는 거죠. 
구약의 이스라엘의 실패의 역사가, 사실 나의 신앙의 여정이고, 내 신앙의 역사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사도 바울이 고발하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어떠한 소망도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는, 하나님 앞에 구원을 받을 만한, 무엇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만한 자격과 조건이, 그 어느 것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종교의 관점으로 보면, 이런 자들은 
종교가 약속하는 은총이나 혜택을 누릴 수 없는 자들입니다. 

여러분, 모든 세상의 종교는 인간의 공로를 강조하죠. 
인간의 공로를 말하는 모든 종교에서 가르치기로는, 
이렇게 자격 없고, 이렇게 조건을 갖추지 못하고, 
이렇게 순종하지 못하고, 자기가 믿는 신을 끊임없이 배신하는 자는 
아무것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입니다. 
세상의 종교의 관점으로 보면,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세상의 종교가 가지지 못하는 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기독교가 말하는 복음이 있습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복음은 무엇인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자들을 위하여, 우리 하나님께서 일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구약의 이야기를 볼 때, 우리는 두 번 놀랍니다
-한 번은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어쩌면 사람이 이럴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놀라운 부분은, 인간의 부패함이 아닙니다. 

-어떻게 이러한 인간의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부패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다시 찾아오시고, 다시 말씀하시는 하나님! 

인간의 뿌리 깊은 악함보다, 더 짙은 사랑으로 
또 다시 인내해 주시고, 구원해 내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놀라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바울이 설교하는 구약의 역사에서, 우리는 이 부분을 실감나게 확인하게 됩니다. 
아무 자격이 없는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먼저 찾아와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고... 

그 인도를 받으면서도, 끊임없이 배신하고 배만하는 자들을 오래 참아주시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왕되심을 거부하는 자들을 포기하지 않으셔서, 
그들을 위해 약속하신 참된 왕, 영원한 왕을 반드시 보내주실 거라는 
약속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끝내 약속하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셔서 
그런 자격 없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런 우리를 위하여... 참으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구약의 복음입니다. 
이것을 위해, 구약의 모든 실패의 이야기가 인용되고 있습니다. 

구약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봐라, 이스라엘의 반복된 실패의 이야기를! 
하나님이 그렇게 은혜를 베푸셨건만, 그들이 한 짓을!

그들 스스로는 구원을 받을 만한 자격이 하나도 없다. 
그들 스스로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만한, 하나님께 사랑을 받을 만한 
어떤 예쁜 짓도 할 수가 없다. 구약의 모든 역사는 반복된 실패의 역사이다. 
그러니 너희들 스스로는 구원 받을 자격이 없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 성경이 가지는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지금 이 설교를 듣는 장소가 어디죠? 유대인 회당이죠. 
여기에 누가 있습니까? 유대인들이 앉아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행함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 자들입니다. 
성전의 제사나 절기를 지켜서, 또 할례를 받아서 
그런 율법의 계명대로 지켜 행함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역사를 통해서, 바울이 폭로하는 것입니다. 
'이 긴 구약의 역사를 보십시오.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반복된 실패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참으셔야 할만한 일밖에는 여러분의 조상들이 한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들 스스로는 하나님 앞에 구원받을 만한 조건과 공로를 
그 어느 것 하나 만들어 내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그들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구약의 역사를 통해 폭로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실패와 자격 없음을 보게 하는데, 구약 성경이 사용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실패를 통해 누구를 바라보게 하느냐? 
바로 예수 그리스도 라는 약속된 메시아!
그 구원자를 바라보라,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의 실패가, 하나님 안에서 허용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실패 또한 그렇게 허용되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그리스도 밖에는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말하는 소망의 근거는,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넘어지나, 그런 우리를 위하여 찾아오셔서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께 
소망의 근거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도 구원을 받았지만, 구원 얻은 자로서 완성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 매일매일의 생활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보다는 
실패하고, 넘어지고, 실수하고, 깨지는 일들이 더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하나님이 하시겠다고 한 일(구원)이 방해되지 않으며,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약속하신 바(구원)를 다 이루어 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 주간도, 우리의 인생을 맡길 수 있는 참된 믿음의 대상은, 
유일한 소망의 대상은.. 하나님 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오늘 본문을 다시 보십시오. 
바울이 구약의 이야기를 전하는데,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보시면, 전부 다 주어가 '하나님' 입니다. 

17절에, '이스라엘의 백성의 하나님이..' 주어가 하나님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셨고, 하나님이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들을 인도하여 내셨고, 
하나님이 그들의 소행을 참으셨고,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주셨고, 
하나님이 사울 왕을 폐하시고, 다윗 왕을 세우셨습니다. 

모든 역사의 주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마칩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 인생의 주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셔서 시작된 인생이요, 
하나님의 끝까지 책임지시는 인생이, 성도의 복된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새롭게 시작되는 한 주간도, 신자로서 가지는 이 명예와 이 부요와 
이 존귀와 영광을 마음껏 누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소망의 근거가 누구에게 있는지, 
우리의 인생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하시고 
하나님 안에서 다시 한 번 믿음으로 살기로 결단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하나님 안에서 영광을 누리며 살아가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침묵으로 동행하시는 하나님 (펀 글)

저는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 말씀을 전하고 살아왔는데

하나님께서 저한테 한 번도 직접 말씀해 주신 것을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옛날 구약시대는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은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호소했는데, 하나님이 제게 직접 말씀하신 적도 없고,

저한테 직접 현현 되신 적도 없고, 하나님은 그냥 말씀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제가 '우리 하나님은 꿀 먹은 벙어리이구나',

아니면 좋은 말로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은 숨어계신다. 침묵하신다, 말이 없으시다.’고 표현합니다.

 

여러분도 직접 하나님 음성 들어봤습니까? 직접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그런데 제가 어려운 일, 좋은 일 겪으면서 한 가지 신앙고백 할 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못 들었으나,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과 위로는 제가 감지했습니다.

하나님의 터치하심을 제가 느꼈습니다.

그것을 볼 때, 하나님은 말씀 없으신 침묵 가운데 저와 같이 계십니다.

 

위급한 상황에도 계시고, 찬송 부르는 상황에도 계시고, 하나님은 같이 계십니다.

그래서 같이 계시는 분의 침묵이 굉장히 두렵기도 했지만

너무나 고차원적이어서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침묵하시는 형태로 항상 저와 동고동락 하십니다...

집에 액자에도 그런 글이 있잖아요?

'우리의 모든 대화에 말없이 듣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그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 127: 2

시편 127편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어떤 방식으로 같이 계시느냐 하면... 우리가 잠자는 동안에도 복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라고 했으니, 잠자는 동안에 복과 은혜를 주신다고 유추합니다. 

 

하나님은 낮에 우리가 일할 때도 같이 계십니다. 호흡할 때도 같이 계십니다.

그런데 내가 자느라고 모든 것과 단절한 순간에도

하나님은 잠자는 저와 대화하고 저를 만지시는데

만지시는 방식이 뭐냐 하면, 복을 주는 방식으로 저와 함께 계십니다.

 

저는 그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차라리 말없으신 게 너무 고맙습니다.

칭찬도 안하시고, 비판도 안하시고, 그런데 저를 항상 만져주시고 같이 계시면서

잠자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저와, 복을 내려주시는 방식으로, 나와 함께 계십니다.

이걸 느끼는 순간, 그 시간이 저한테는 진실 된 안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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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서기오 바울의 이름이 구브로, 로마,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발굴된 비석들에 등장합니다. 
구브로 비문은 그가 총독임을 밝혔고, 
로마 비문은 그가 총독 후 로마 관직(Curator) 취임을 알리고, 
비시디아 안디옥 비문은 그의 고향과 그의 가족들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영향력 있는 지역 유지였음을 밝힙니다.

주2) '비시디아 안디옥' 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역사적인 배경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그의 장군 중 한 사람인 셀류쿠스가 왕조를 세우고 
그의 아버지 안티오쿠스를 기념하기 위해서 헬라 제국 내에 16개의 도시를 건설하고 
모두 안디옥이라 명명했다. 성경에는 안디옥이라는 지명으로 그 중 두 군데가 등장한다. 
수리아 안디옥과, 비시디아 안디옥

주3) '바울이 회당을 찾아가서 전도한 이유'

17:2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자기의 관례대로'
이 말은, 바울과 실라는 데살로니가에 가자마자 회당에 들어갔다는 거예요. 

후에 또 베뢰아에 가서도, 바울은 회당에 가서 먼저 복음을 전합니다. 
앞서 1차전도여행 때 비디시아 안디옥에서도,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어요. 17:10
그 후에 루스드라에 갔을 때는, 회당에  들어갔는데, 왜냐면 거기엔 회당이 없었기 때문이죠.

바울은 어디를 가든지, 먼저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자기 관례' 였습니다. 17:2
왜 그는 이런 방법대로 계속 복음을 전했을까요? 

사실 유대인의 회당에 먼저 들어갔을 때, 바울은 여러 곳에서 반대와 핍박을 받았어요.
그러면 회당에 다시는 안 들어가면 되잖아요. 어쩌면 그게 쉬운 방법이잖아요.
그런데 바울은, 핍박을 받든지 말든지, 일단 새로운 도시에 가면, 회당부터 찾아갑니다. 

그 이유는, 그가 말했던 것처럼, 유대인에 대한 자신의 애끓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롬9:1~3절을 보면, 자신이 유대인들을 자기 마음에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에게 회당에 들어가서 먼저 전했습니다. 롬9:1~3

그 유대인들을, 바울은 그렇게 애틋하게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지 복음을 전할 기회가 생겼을 때는, 먼저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롬1:16절을 보면, 그는 단순히 자신의 개인적인 선호도 때문에 
유대인에게 먼저 복음을 전했던 것이 아니고, 

 

롬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자기의 애국심, 동족애,  그것에 앞서 
하나님의 방식이, 하나님의 뜻이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 였다는 말이에요. 
바울은 행1:8절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바울은 항상 주님이 가르쳐 주셨던 방식대로 복음을 전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방법이 정말 비효율적이고 위험해요. 
항상 회당에서 유대인에게 먼저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그 도시의 유대인들이 계속 자기를 괴롭히거든요. 

그러니까 1차선교여행 때도,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똑같은 일을 경험했잖아요. 
지금 2차선교여행 때도, 본문의 데살로니가, 베뢰아에서도
똑같은 일이 계속 반복되고 있거든요. 먼저 회당에 들어갔다가, 큰 반대를 받은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아, 이렇게 복음을 전해가지고는 안 되겠다. 
헬라인에게 먼저 그냥 전해야 되겠다' 이렇게 방법이나 전략을 바꾸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그런 효율성이나 위험도를 따지지 않았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게시해 주신 방식대로, 하나님이 뜻하심 대로,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 다음에는 헬라인에게로다 라고 말씀하셨던  롬1:16, 행1:8
그 하나님의 방식 그대로 순종하면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을 보게 돼요. 



주4) 그럼 430년은 뭔가요?
창15:13, 행7:6은 400년이라는 기록의 일치입니다.
출12:41과 갈3:17은 430년이라는 기록의 일치입니다.

스데반은 이스라엘이 괴롭힘을 당한 실제적인 기간(사백 년)을 언급하는 반면(창15:13. 행7:6), 
바울은 야곱이 그 자손을 이끌고 애굽 변경에 위치한 고센땅에 거주하기 시작한 기간(창 47:6) 
즉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기간(430년)을 언급하는 것입니다(출12:40. 갈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