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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석에서 물이 나리라

LNCK 2024. 7. 9.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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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석에서 물이 나리라        출17:1~7       2014.12.21.

 

※출애굽 여정에 마실 물이 없어서 백성들이 원망한 사건이 두 번 나오는데 (1번 아님)

한 번은 출애굽 여정 초기에, 이때는 모세가 반석을 한 번 쳤습니다. (본문 출17장)

두 번째는 출애굽 여정 말기에, 그때는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쳤을 때입니다. (민20장)

 

반석은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치는 것은 수난을 상징하는데,

두 번 치는 것은,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두 번 지는 것을 상징하게 되므로 책망을 받았습니다.

이 반석은 또한 그리스도의 종과, 교회를 의미합니다. '네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마16:18) 

 

서론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한 가지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구약과 신약의 내용은 결국 동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눅24장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만나셨습니다.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눅 24:27).

 

모세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오경을 기록하였고,

선지자들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들에게 모세와 모든 선지자가

자신에 관하여 쓴 것을 가르치셨다고 기록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세 오경을 읽을 때, “모세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가?”

초점을 두고 읽어야 바르게 읽고 이해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5:46~47절에도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실 때도 “너희가 모세를 믿었으면 나도 믿었을 텐데

너희가 모세를 믿지 않으니 곧 나를 믿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단지 구약과 신약의 차이가 있다면 구약의 모세와 선지자들은 예표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고,

신약의 사도들은 실체로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것입니다.

모세는 오실 예수를 증거한 것이고, 신약의 사도들은 오신 예수를 증거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세오경을 읽으면서 예수를 믿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책망을 하셨다면

오늘 실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신약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해서는 얼마나 많은 책망을 하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 광야를 떠나 르비딤에 도착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르비딤 사건을 통해서도 예수님을 증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반석이시고, 생수를 주시는 반석이시라는 진리를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출17장의 르비딤 사건을 통해

세 가지 분명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구원받은 성도의 삶 속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많은 시험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비딤에 도착하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고,

잘못된 길을 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밤에는 불기둥, 낮에는 구름기둥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 온 것입니다.

 

출17:1절에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그런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오게 된 르비딤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실 물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은 마실 물도 없는 메마른 지역으로 백성들을 인도하실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사막이나 광야에서 물을 얻지 못하면

하루도 살 수 없고, 모두의 생명이 물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어

떻게 하나님은 물도 없는 곳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는가?”라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님이 백성들을 시험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여러 구절에서 그 증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고 뇌성의 은은한 곳에서 네게 응답하며

므리바 물가에서 너를 시험하였도다” (시 81:7),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 (신 8:16),

 

“레위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

주께서 그를 맛사에서 시험하시고 므리바 물 가에서 그와 다투셨도다” (신 33:8),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신 8:2).

 

여러분, 대학교수가 한 학기 동안 학생들을 가르쳐 평가를 해야 할 때가 되면

시험을 치르게 합니다. 그러면 어떤 학생은 평소에 공부를 잘하는 것 같아 보였는데,

형편없는 점수가 나오기도 하고,

또 다른 학생은 평소에 그다지 열심히 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는데도

의외의 좋은 점수 받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시험이라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사람의 진짜 실력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중간・기말고사가 꼭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시험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험은 유혹을 의미하는 시험(Temptation)이나

분노케 하고 격동시키는 시험(Provocation)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신다는 것은 그저 시험(Test)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것이 무엇인지, 참된 믿음이 있는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지

확인하시기 위해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시험을 주시는 목적은 그 사람의 마음을 낮추시고,

마음이 낮아지면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사람은 마음이 높아지면 불안함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면 이제는 내려갈 일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낮아지면 올라갈 일밖에 남지 않았기에 평안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성도에게 시험을 주시는 목적은 마음을 낮추어

복을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천국까지 가는 신앙여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길을 걸어가는 것으로 예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쉬운 길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쉽고 편안하고 안전한 길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쓴물이 있었던 마라, 먹을 음식이 없었던 신 광야, 심지어는 아예 물이 없었던 르비딤,

그리고 원수 아말렉이 뒤에서 공격해 오는 매우 위험한 장소로 인도하셨습니다.

어렵고 힘든 지역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가 되었다고 해서 삶이 항상 평안하고 복되며 좋은 일,

웃을 일만 있으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비현실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대게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어려운 시험이 닥쳐오면

“하나님은 도대체 내게 왜 이러시나?”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닌가?”하고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그러나 르비딤 사건을 통해 우리 성도의 삶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많은 시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예방주사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어려움이 닥쳐오면 내 마음속에 들어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시험이라고 생각하시고 시험에 100점 맞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인생의 어려운 시험을 당할 때, 승리한 모세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

 

우리는 시험에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대응하지 말고 모세처럼 해야 합니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비딤의 시험에 보인 반응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다툼의 정신’(Quarrelsome Spirit)입니다.

17:2절에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가로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모세는 물을 제공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모세도 목이 마르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다툼의 정신을 가진 사람은 시험이 닥쳐올 때 주변의

누군가에게 항상 무엇을 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다툼의 정신이요, ‘요구의 정신’(Demanding Spirit)입니다.

 

자기에게 어려운 시험이 오면 이 사람에게 이것을 요구하고, 저 사람에게 저것을 요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물을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이런 처지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모세와 싸우려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르비딤이라는 이 지역에 별명을 붙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므리바’로 ‘다투다’, ‘싸우다’라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툼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둘째, ‘인내하지 못하는 정신’(Impatient Spirit)입니다.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셨고,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바꿔주셨고, 매일 만나를 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물이 없는 곳에서 어떻게 물을 주시는가?”하며

인내하고 기다려볼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인내심이 바닥입니다.

조금만 불편하고 힘들면 불평과 불만이 터져 나옵니다. 전혀 인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큰 역사를 보여주셨는데도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지도, 인내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저는 공군장교로 복무하면서 구대장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구대장은 사병들을 훈련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교관을 하다가 차출을 받아 3개월 동안 구대장을 하였는데,

훈련을 받는 사병들이 얼마나 불평, 불만이 많은지 모릅니다.

 

조금만 불편해도 불평을 하는 것입니다. 인내심이 없습니다.

이 훈련을 견뎌내기만 하면 다른 어려움도 쉽게 이겨낼 수 있을 텐데

인내하지 못하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인내하지 못하는 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셋째, ‘하나님을 시험하는 정신’(Provoking Spirit)입니다.

2절 후반에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여기서 모세가 말하는 ‘시험’은 ‘하나님을 도발한다’는 의미의 ‘시험’(Provocation)입니다.

하나님을 화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분노케 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7절 후반에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향해 막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비가시적인 영으로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 자는 곧 아버지 하나님을 본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그가 우리 중에 계신지 계시지 않는지 어떻게 아느냐?”며

하나님의 분노를 격동시키는 말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갈 길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광야생활을 했던 40년 동안 아침마다 만나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자기들도 가축을 길렀습니다. 상번제로 매일 제사를 드리는 등

그때 제물이 필요했죠. 출애굽 때 끌고 나온 것들입니다. 당연히 식용으로도 썼겠죠)

 

홍해도 가르시는 등 인류 역사상 다른 민족이 경험해 볼 수 없는 엄청난 기적들을

계속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큰 은혜를 받고도

으레 있는, 하나님 없이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신지 계시지 않는지 알지 못하겠다는 배은망덕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르비딤에 또 다른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그것이 ‘맛사’입니다. ‘시험’(Provocation)이라는 뜻입니다.

 

성도의 삶 가운데도 어려운 시험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보게 하시고, 수시로 쪽지시험도 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험에 대한 반응을 배워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없는, 실패한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모세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모세는 두 가지 반응을 보였습니다.

 

1) 불신앙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말을 책망하였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에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책망하였습니다.

 

“너희가 날마다 기적을 경험하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그런 불신앙적인 말을 할 수 있느냐?”며

책망한 것입니다.

 

대한민국 교육에 결여된 부분도 바로 이 부분입니다.

우리나라의 교육은 대부분 주입식, 암기식 교육입니다.

시험을 봐도 모르면 연필을 굴려야 하는 교육입니다.

그래서 아는 것은 알기 때문에 맞고, 모르는 것은 연필을 굴려서 맞추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주장이나 의견을 비판적으로 수용할 줄 모릅니다.

신문을 읽어도 외거나 주입하려 하고, 방송을 들어도 주입하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자의 생각일 뿐입니다. 내가 기자의 주장에 동조할지 말아야 할지

비판력을 가지고 선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육에는 이런 부분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미국이나 영국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신문을 펼쳐놓고 이 주장에 동의하는 부분은 무엇이고,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은 무엇인지 밑줄을 그어보고,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인지를 생각하여 비판력을 키울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대단히 어른스럽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연로한 부모님의 연금에 빨대를 꽂아서 먹고 사는 ‘빨대족’이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젊은이들의 비판적 사고가 훈련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교육이 이 부분을 간과했기 때문입니다.

자생력을 기르는 교육, 판단력을 기르는 교육을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들려오는 말들을

어떻게 비판적으로 수용을 할 것인지는 분별력을 가지고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본문 출17:2절에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못된 말을 해서 하나님의 분노를 격동시키느냐?”라는 책망입니다.

 

민12:3절에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온유함이 악한 말까지도 수용하는

우유부단함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에 대해

매우 단호한 모세의 입장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온유함은 허약하거나 우유부단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역시 매우 온유하셨지만 우유부단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도 온유한 마음을 가지셨지만 거역하는 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온유함와 허약함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딤후2:25절에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거역하는 자들을 온유함으로 징계하라고 말했습니다.

 

2) 둘째로 모세는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였습니다.

4절에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얼마 아니면 내게 돌질 하겠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행7:59절에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데반의 생명을 빼앗은 방법이 바로 돌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모세의 상황은 순교의 위기에 처한, 급박한 상황임을 알게 됩니다.

모세는 이제 곧 백성들이 제게 돌질을 하게 될 것이라고 엎드려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이 꼭 쉬운 것은 아닙니다. 칭찬만 듣기 좋아해서도 안 되고,

욕을 먹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진리 편에 서서 가다보면 때로는 욕을 먹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려운 시험을 당할 때에 모세처럼 악한 말에 동조하지 말고,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해서 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3. 이스라엘 백성들이 격동할 때도 하나님은 인내하시고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주셨다

 

르비딤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격동할 때에도 하나님은 인내하시고 풍성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자린고비나 구두쇠 같은 분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기도하고 또 기도해봤지만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다고 말하지 마세요.

 

“우리 아버지가 90세인데, 200세까지 살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돌아가셨으면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그렇게 기도하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에 들어주지 않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기도하고 들어주지 않으신다며 하나님을 구두쇠라고 원망하면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구하는 것에 대해 자비롭고 풍성한 은혜로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먹을 것을 주십니다.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망하게 된 사람이 살려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다시 일으켜 주십니다.

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출17:5~6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내가 거기서 호렙 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호렙산 반석 위에 서서 치라고 명하셨습니다.

모세는 장로들 앞에서 반석을 쳤습니다. 그런데 지팡이로 반석을 치면 지팡이가 부러지겠습니까?

바위가 깨지겠습니까? 치면 칠수록 지팡이만 더 부러질 따름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지팡이로 바위를 쳤더니 바위가 갈라졌습니다. 그리고 물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양이 나왔는지 출 본문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시78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시고 깊은 수원에서 나는 것 같이 저희에게 물을 흡족히 마시우셨으며

또 반석에서 시내를 내사 물이 강 같이 흐르게 하셨으나

저희는 계속하여 하나님께 범죄하여 황야에서 지존자를 배반하였도다” (시 78:15~17).

 

반석이 갈라지더니 물이 강처럼 나왔습니다.

200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흡족히 마시게 되었습니다.

시편 114편 8절에 “저가 반석을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지질학적으로 중동 광야에는 흙 밑에 암반층이 있고,

그 암반층 밑에는 지하수가 고여있다고 합니다. 간혹 그 암반층에 균열이 나면,

그 아래의 지하수가 분출되어, 샘나, 오아시스가 돼죠. 비가 없는 광야에 샘이 생기는 겁니다) 

 

차돌이 뚫려서 그 밑의 샘물이 솟아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를 구하면 열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지금도 르비딤이라고 불린 이집트의 현 위치를 가보면,

모세가 쳤던 바위가 있는데, 아직도 물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때 쳐서 지금까지 흐르고 있으니 얼마나 풍성한 은혜입니까?

 

하나님을 구두쇠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반석에서 나오는 생수를 마시고,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반석은 누구를 예표하는 것일까요?

고전10:4절에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반석이 지팡이로 때림을 당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수난을 당하셔야 하는 것을 예표합니다.

 

이사야 53:4~5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람이 자기 죄를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자기 스스로 죄에 대한 죗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지옥에 가야 합니다. 영원히 멸망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죄에 대한 대가는 지옥에 가는 것 이하로 형량이 경감되는 법이 없습니다.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자기가 지은 죄를 용서받지 못하면 지옥에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대신 수난을 당하시고 우리의 모든 죗값을 해결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예수님을 믿으면 죄를 용서해 주시겠다는데 왜 그것을 마다합니까?

 

▲예수님이 수난을 당하시고 맞으심으로, 반석에서 나오는 생수는 무엇을 예표하는 것일까요?

이 생수는 ‘말씀’과 ‘성령’을 의미합니다.

 

요7:37~39절에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한 번 십자가의 수난으로 영원한 속죄 제사를 완성하셨습니다.

더 이상 고난을 당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고난은 완성되었습니다.

 

두 번 수난을 당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민20:11절에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민수기에서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지팡이를 가지고 반석을 가리키라고 말씀하셨는데,

모세가 분을 참지 못하고 반석을 두 번이나 때렸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과 같은 행동이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한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이 가리키라고 말씀하신 데에는 그만한 예표적 의미가 있었기 때문인데

모세는 자기 의를 드러냈고, 백성들 위에 올라서서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한 나머지

반석을 지팡이로 두 번이나 내리쳤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네가 어찌하여 내 영광을 드러내지 않았느냐?

너는 그 벌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가리키기만 해도 물이 나오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결론

 

요4:14절에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를 믿고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의 영혼에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십니다.

그리고 성령이 내주하시면 성령은 우리 속에서 생수의 강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고

성령은 우리 속에 생수가 되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수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지지 않으면 만족할 수 없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보세요. 만족하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돈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니 그들도 만족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인간의 영혼 문제가 돈 가지고 해결이 되겠습니까?

 

잘 생기면 됩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지기 전까지 계속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인생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고,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방황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령이 내주하시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영혼에 진리의 말씀으로 은혜가 넘치고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며 살기 때문에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70~80년만 생각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을 생각하며 사는 인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족과 기쁨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28세 때 성령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시는 큰 은혜를 경험하고

곧바로 목회자로 헌신하여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 생수는 끊임없이 제 속에서 솟아나오는 생수가 되었고, 일평생을 살아오면서

이 말씀이 확실한 진리임을 계속해서 깨닫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대신

그 몸으로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며 수난을 당하셨고,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과연 나와 함께 하시는가?”라는 불신앙적인 말을 하지 마시고,

“하나님은 영원토록 나와 함께 하신다! 시험이 와도 점수를 잘 맞자!”하며

승리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기 때문에

바울은 롬8:32절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낮추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복을 주실 것입니다.

영생의 복과 하늘의 복과 땅의 복을 다 부어 주실 줄로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믿음으로 그를 믿노라 (펀 글)

 

마16:17~18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주님께서 바요나 시몬을 그렇게 믿어도 되나요?

주님께서는 무슨 근거로, 시몬을 반석으로 삼으시는가요?

 

주님께서는 무엇을 보고

바요나 시몬이, 교회의 반석이 될 만하다고 판단하셨을까요?

그가 예수님의 정체성(그리스도)을 잘 알고 고백했기 때문에?

 

성 프란시스에 의하면,

악마가 오히려 더 하늘과 세상일을 꿰뚫어 알고

복음서를 보면, 악마도 당신은 그리스도십니다하고

바요나 시몬과 똑같은 고백을 하는데..

 

주님의 정체성을 잘 알고 고백했다는 것만으로

그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을 수 있는가요?

 

실제로 바요나 시몬은 주님을 버리고 떠났던 위인이 아닌가요?

그럴 위인이라는 것을 모르시고, 그를 반석으로 삼으셨는가요?

 

제가 자주 하는 말 중의 하나가, ‘믿을 만한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기에 믿는다면

그 믿음은 반드시 배반을 받기 때문입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생각만큼 능력이 없음을 알게 될 것이고

정직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훌륭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만큼 훌륭하지 않을 뿐 아니라

형편없는 위인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람을 믿지 말아야 할까요?

믿을 만한 사람이 없다는 말은, 사람을 믿지 말라는 말일까요?

 

그러나 사람들과 더불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이 말은, 믿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라

우리가 사람을 믿을 때는, 나의 기대를 배반할 것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우선은 높은 기대에 부응하는 존재가 없다는

기대의 낮춤, 기대의 비움, 기대의 가난으로 믿는 것입니다.

 

"바랄 것을 바라야지!"

내 주제가 형편없을 뿐 아니라, 그 주제도 형편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내가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님을 아는 만큼

그도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님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 종합을 하면

그를 그렇게 훌륭한 사람으로 믿는 것은 아니고

반대로 그를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 믿는 것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 성인은 아니지만, 적어도 살인자는 아니라고 믿는 것입니다.

 

요지는, 주님처럼, 하나님 때문에, 그를 믿는 것입니다.

바요나 시몬은 믿을 사람이 못되지만

그를 뽑으신 하나님은 믿을 만한 분이시기에 믿는 것이고

 

바요나 시몬은 믿지 못하지만

그를 이끄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바요나 시몬은 믿지 못하지만

그를 도구 삼으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아들에 대해서 잘 모르고, 그래서 믿을 수 없지만, 그 아버지를 믿기에

아버지를 보고 믿겠다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주님은 시몬이 주님의 정체성을 알게 된 것은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라 하십니다.

 

살과 피를 가진 인간 시몬은

도저히 그것을 알 수 없는 것인데,

예수님의 정체성을 아는 것을 보니, 하나님께서 알려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요나 시몬을 반석으로 뽑으시고 그의 뒷배를 봐주시니

이제 그는 더 이상 바요나 시몬이 아닙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새 이름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도구로서 새 이름을 받았는데, 그 이름은 반석, 베드로입니다.

 

그의 믿음과 신앙고백은

이제 반석처럼 흔들리지 않을 것이고,

 

그의 존재와 위치는 반석처럼 굳건하고 오롯하게

하나님을 향하고 사람들을 받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그를 뽑으신 하나님께서, 해주신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