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01 08 / 사도행전 강해 (52) / 루스드라에서의 바울의 설교 - YouTube
◈루스드라에서 바울의 설교 행14:8~18
◐도입 / 1차전도여행 네 번째 선교지인 루스드라
바울의 일행은 이고니온에서 쫓겨났습니다. 쫓겨난 그들은 루스드라에 왔습니다.
루스드라는 이고니온에서 남서쪽으로 약 34KM 떨어진 지역입니다.
그런데 이 루스드라는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유대인의 회당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바울의 선교 방식을 보면, 패턴이 한 가지 있었죠.
언제나 바울은 유대인의 회당을 먼저 찾아갔습니다.
첫 번째 선교지인 구브로에서도, 바울은 제일 먼저 유대인 회당을 찾았습니다.
이어서 두 번째 선교지인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도, 바울은 유대인 회당에 가장 먼저 들어갔고,
세 번째 선교지인 이고니온에서도, 유대인 회당을 제일 먼저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네 번째 선교지인, 오늘 본문의 루스드라에서는 이 패턴이 깨집니다.
본문에 보면 유대인 회당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동네는 어떠한 지역이에요? 유대인이 전혀 없는 지역입니다.
전형적인 이방인 동네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10인 이하 소수는 있었을 지도 모르죠.
(유대인의 특성상, 그들은 모여서 산다는 것을 이해해야 됩니다. 오늘날까지도 그렇죠)
본문은, 바울이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행한 최초의 설교입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이방인 지역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의 설교를 듣는 청중들은 전부 다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처음으로 바울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설교를 한 것이죠.
그 의미 있는 설교가 오늘 루스드라에서의 바울의 설교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복음이 땅끝으로 점점 더 들어가고 있다는 얘기죠.
▲앉은뱅이가 일어난 기적
이 루스드라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합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기적이 일어납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앉은뱅이가 일어난 기적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적이 사도행전 3장에서 한 번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 앞에 앉아있는 앉은뱅이를 일으킨 기적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행3장에서 일어났던 기적과 오늘 본문의 기적을
비슷한 표현(워딩)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3장의 워딩이, 오늘 본문에 그대로 나옵니다.
3장에 보면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이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었다'며 똑같이 기록합니다.
이어서 3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주목했다'고 나옵니다.
본문 9절에서도 '바울은 앉은뱅이를 주목합니다.'
이어서 3장에 보면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향해 큰 소리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이 오늘 본문 10절에서도 똑같이 나옵니다.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그러니까 누가는, 의도적으로 두 사건을, 동일한 표현으로 지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3장에 나왔던 앉은뱅이는 유대인이었습니다. 배경도 예루살렘 지역이었죠.
그러나 본문의 나오는 앉은뱅이는 이방인이었습니다.
배경도 유대인 회당이 하나도 없는 전형적인 이방인 동네였습니다.
여러분, 무슨 얘기죠? 유대지역에서 유대인에게서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가
동일하게도 이방 지역에서 이방인에게도 똑같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점점 더 확장되고 있다는 얘기죠.
행1:8절의 약속대로, 복음이 이제는 땅 끝으로 점점 더 들어가고 있다는 가시적인 증거입니다.
이 이야기를, 누가는 의도적으로 두 사건을 통해 나란히 기록함으로써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그런데 오늘 이 앉은뱅이에 대한 기록에서, 우리가 주의할 표현이 있습니다.
14:9절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바울은 그에게서 구원받을 믿음이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어떻게 그걸 봤는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앉은뱅이가 구원받을 믿음을 갖게 되었을까요?
9절에 그 답이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9
그가 말씀을 귀담아 들었기 때문이죠.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10:17
여러분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 말씀이 누구를 가르쳐 주냐면, 예수님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을 가르쳐 주는 말씀을 들을 때, 그에게 믿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설교를 들으면서, 예수님이 자기를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믿음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스스로 만들어낸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요.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동일하게, 앞에 사도행전 3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누가는 행3장에서 일어나 걷게 된 앉은뱅의 믿음을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3:16
그가 예수님을 통해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의 앉은뱅이의 믿음도 어떻게 생긴 거죠?
예수님이 믿음을 그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그를 일으켜 세웠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늘 잊으면 안 되는 게 있습니다.
언제나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입니다.
말씀을 듣는 우리 쪽에서, 선택하거나 결단해서 만들어낼 수 있는
그런 성질의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은 언제 일어나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일어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10:17
이것을 우리는 앉은뱅이가 일어난 기적을 통해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이 시간 말씀을 듣는 우리의 심령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또다시 일어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경배하려 하다
앉은뱅이가 일어난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 기적을 본 사람들의 반응이 무엇이죠?
바울과 바나바를 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나바는 제우스라는 신으로, 또 바울은 헤르메스라는 신으로 생각했습니다.
제우스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인데, 우주의 신이고 최고의 신이죠.
바나바를 제우스라고 생각한 것은, 아마도 바나바가 바울보다는 나이가 있어 보였고,
또 체격도 건장하고 위엄해 보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헤르메스라고 불렀습니다. 신화에 제우스의 대변자로 나옵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기 때문에, 대변자인 헤르메스 라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기적을 본 사람들은, 제우스가 바나바의 몸으로,
또 헤르메스가 바울의 몸으로 이 땅 가운데 왔다고 믿었습니다.
(여기가 이방 땅임이 분명한 증거로 드러나죠. 그리스-로마 사람들은 신이 이렇게
인간의 형상을 입고 나타난다고 믿었습니다. 그들 문화적으로요.)
이 소문이 삽시간에 루스드라에 퍼진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제우스 신을 실제로 섬기던 신전의 제사장도, 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게 된 제사장이, 그동안 자신이 정성껏 섬겼던 신이
'이 땅에 내려왔다'는 소식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겠죠.
그는 제물용 소와 화환을 가지고 신전에서 내려옵니다.
왜 소를 가져왔을까요? 소는, 신들 중에서 가장 힘이 센 제우스에게
실제로 그 당시에 바쳤던 제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소를 가지고 와서, 바나바와 바울 앞에 와서 그들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여러분 바울과 바나바가요. 자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하니까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그런데요. 이 당시의 배경을 알면, 이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당시로부터 50년 전에, 이 지역에 기록된 전설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전설이냐면,
예전에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그 지역에 사람의 모습으로 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역 사람들이, 아무도 그들을 영접해 주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밤이 늦어서야, 늙은 노부부가 그들을 영접을 했습니다.
나중에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늙은 노부부에게는 보상을 하고,
나머지는 홍수로 다 쓸어버렸다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아마 50년 전에 그 지역에 홍수가 있어서, 많은 피해가 있었는데,
그 일을 계기로 생긴 전설이었던 것 같습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이 그걸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지역처럼 싹쓸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신들이 혹시 사람의 형상으로 왔을 때, 제대로 대접해야 된다는 경각심이 있었습니다.
'신들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으면, 우리들도 똑같이 심판을 받는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던 사람들이 루스드라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갑자기,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을 행했습니다.
그걸 보고 사람들이 딱 생각이 난 거죠. '신이 사람의 형상으로 내려왔다.
50년 전에 내려왔던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사람의 몸으로 다시 왔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제대로 대접하기 위해,
바울과 바나바에게 소와 화환을 가지고 제사를 드리려 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바울이 설교하며 가르치다
그때 바나바와 바울이 제사를 드리려는, 무리들 가운데 뛰어들어가서 그들을 말립니다.
그런데 어떻게 뛰어들어갔다고 말하죠?
'옷을 찢으면서' 뛰어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왜 하필 옷을 찢었을까요? :14
유대인들은 신성 모독적인 사건을 보면, 옷을 찢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옷을 찢음으로써 이 일이 얼마나 참담한 일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동시에 신성 모독에 대한 강력한 혐오의 표시로, 자기 옷을 찢어서 보여줬던 것이었죠.
그만큼 바울과 바나바가 참담한 심정으로 다급하게 이들을 말립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15
우리는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아니라는 거죠.
그러니 우리를 경배하지 말라고 말립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그들에게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 바울의 설교가 14:15절부터 나오는데요...
◐루스드라에서 행한 바울의 설교
이 바울의 설교는, 전형적인 이방인 지역에서,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행한 최초의 설교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이방인 지역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유대인 회당이 있었습니다.
이방인 지역이라 하더라도, 유대인들이 그 가운데 함께 섞여 있었던 지역이었죠.
그러나 루스드라에서는, 청중들이 전부 다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처음으로 바울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설교를 한 것이죠. (그래서 율법을 언급하지 않아요)
그 의미 있는 설교가 오늘 루스드라 에서의 바울의 설교입니다.
그런데 이 바울의 설교에서, 우리는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두 가지로 바울은 참된 신앙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첫 번째로, 참된 신앙은 헛된 일을 버리고, 창조주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설교를 시작합니다.
14:15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여러분 바울이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고, 또 지금도 복음을 전하는 목적이 무엇이라고 말하죠?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먼저 바울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경배하고 섬기는 우상숭배를 말합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제우스를 섬기고 헤르메스를 섬겼습니다.
그 외에도 이들은 다양한 신들을 만들어서, 신전에서 섬겼습니다.
그런데 그 신들의 특징이 무엇이죠?
그 신들은, 인간의 형상을 지닌, 눈에 보이는 모습의 신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행17장에서 아덴에서, 바울은 비슷한 환경을 만납니다)
그래서 바나바를 제우스로, 바울을 헤르메스로 섬기려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신은 반드시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체를 지닌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 죄로 타락한 인간의 종교성입니다.
인간의 타락한 종교심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신으로 섬기려는 본성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으면.. 불안해합니다.
아무리 신적인 존재라고 해도,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 예가 구약에도 나오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시내산 아래에서 금으로 송아지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이는 금송아지 형상을 두고,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때뿐만 아니죠.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그렇게 우상숭배 때문에 광야에서 심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또 똑같이 눈에 보이는 우상들을 섬겼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바알이고, 아세라 아닙니까!
여러분, 남유다 요시야 왕이, 종교개혁을 단행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눈에 보이는 신들'을 몰아내고,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을 다시 회복하는 개혁이었습니다.
대하34:3 '제12년에 유다와 예루살렘을 비로소 정결하게 하여 그 산당들과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과 부어 만든 우상들을 제거하여 버리매'
△한 소년이 하늘 높이 연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구름이 몰려와 연을 가려 버렸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손에 줄을 쥐고 뭘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연 날려요.” 하고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구름뿐이었습니다.
“얘야, 저 위에 연이 있다고 믿을 수 있니?”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제게도 안 보여요. 하지만 저 위에 있다는 건 알아요. 이따금씩 줄이 당겨지거든요.”
저 위에 누군가 계신다는 믿음, 이따금씩 당겨지는 줄을 따라가는 것이
신앙인의 삶이 아닐까요?
창28:16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모든 전자기기들을 끄고, 조용히 하나님께만 집중하며 5분만 묵상하면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계신 것을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기도를 계속하든지, 찬양을 하든지, 말씀을 묵상하든지... 계속 주님과 대화하는 거죠.
△눈에 보이지 않는 바닷속 방파제
세계적인 가장 좋은 항구나 해수욕장은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자연적으로 아주 아름다운 항구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세계적으로 제일 좋은 항구는 파도가 없어야 합니다.
큰 풍랑이 밀려오면 안 됩니다.
물론 방파제를 만들지만, 사람이 만든 방파제는 파도가 언제나 넘어설 수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최고의 휴양도시라든지 해수욕장은.. 자연적으로 조성되어져 있습니다.
태평양이나 대서양 바다에서 밀려오는 어마어마한 파도가
겉으로는 안 보이지만, 항구 가까이 바다 아래에 바위가 방파제처럼 벽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큰 파도가 거기 오면 탁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1차로 바다 아래 큰 바위 산맥이 파도를 막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 밑이라서 안 보이죠.
그 다음에는 인조 방파제가 또 있습니다.
거기서 또 한번 파도가 2차로 팍 죽어버립니다.
그렇게 막아낸 뒤에, 파도가 항구에 다다를 즈음에는 조용한 것입니다.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하시면 여러분에게 밀려오는 어마어마한 파도,
오늘날 인류를 파괴하는 어마어마한 세력들도.. 십자가 보혈 앞에 죽고 맙니다.
눈에 안 보이는 바위산맥이 물 밑에 버티고 있듯, 주님이 우리를 막아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주님과 함께 찬송하며 감사하며 살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의 루스드라 사람들을 보십시오.
이들도 역시나 눈에 보이는 것들을 신으로 섬기려 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뿐만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 주변을 한번 보십시오.
불교도 눈에 보이는 형상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여러분 불교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다른 모든 종교들이 섬기는 신은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체를 지닌 신입니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눈에 보이는 것을 경배하고 섬기는 것이 헛된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15
△그렇다면 왜 눈에 보이는 것을 숭배하는 게 헛된 일입니까?
눈에 보이는 신은, 우리를 진정으로 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미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만든 신상 가운데, 여러분 보신 적 있으시죠?
양쪽 팔이 많이 붙어 있거나, 얼굴에 눈이 많이 붙어 있는 신상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왜 이렇게 여러 개의 팔과, 여러 개의 눈을, 눈에 보이는 신상에 붙여 놓았을까요?
이 신상은,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을 도울 수 있는, 손과 팔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신상이 지닌 손과 눈은 고작 10개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그게 60억 인구를 모두 보고, 모두 도울 수 있을까요?
인간이 만든 신상에, 수 천 개의 팔과 손을 붙인다고 해서,
그 형체를 지닌 신상이, 60억 모두를 주관할 수 있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신상에, 이렇게 눈과 손을 붙인다 한들
그 형체를 지닌 신상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형체를 가진 신상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시간을 초월하지 못하기 때문에, 전지 Omniscience 하지도 못합니다.
그들은 공간을 초월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소부재 Omnipresence 하지도 못합니다.
어느 곳에서 동시에 있지 못합니다.
눈에 보이는 신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지 못하기 때문에, 전능 Omnipotent 하지도 못합니다.
그들은 시간과 공간에 메어 있는 우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 신들이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그런 신들을 섬기는 것을, 바울은 '헛된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꼭 눈에 보이는 신들의 형상만이 아닙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들도 신으로 섬기라고 합니다.
죄로 타락해서 죄로 눈먼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타락한 인간의 종교성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하나님처럼 신으로 섬기려는 죄악된 종교성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게, 여러분 눈에 보이는 돈입니다. 만질 수 있고요.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여기 재물은 헬라어로 '맘몬'인데, '맘몬'신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돈을 신처럼 섬긴다는 지적이죠.
여러분 우리는, 눈에 보이는 돈을, 신처럼 섬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헛된 일입니다.
여러분 돈도, 우리가 가장 필요할 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돈이 우리의 죽음을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돈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죽으면 돈도 가지고 가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수의를 보면 주머니가 없잖아요.
돈으로 죽을 병을 치료하지 못합니다.
돈이 인간관계를 지속시켜 주지도 못합니다.
오히려 돈 때문에 관계가 깨지는 경우도 많지 않습니까?
그래서 더 큰 어려움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돈도, 우리가 삼겨야 할 신이 되지를 못합니다.
이 땅에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영원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것이 사람이건, 돈이건, 형체로 만들어진 신이건,
눈에 보이는 이 땅의 모든 것들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헛되다'는 것은, 원어로 보면요.
'쓸모가 없는, 텅 비어있는, 열매가 없는, 무능력한' 이라는 뜻입니다.
뭐가요? 눈에 보이는 것들을 신으로 섬기는 우상숭배요.
△그러면서 바울은, 우리가 돌아가야 할 참된 신앙의 자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왜 헛되지 않은 일일까요?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형체를 지니지 않으시는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눈에 보이는 형체를 가지신 분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신 영이신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기 때문에, 그분은 온 우주 만물을 주관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 개개인과 개별적으로 동시에 함께해 주실 수 있습니다.
쉬운 예를 한번 들어볼게요. 제가 책에서 참고한 내용인데요.
이 예배당에 있는 불빛은, 지금 우리 모두를 비추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예배당을 나가는 순간부터, 이 전깃불과 우리는 무관해집니다.
이 전깃불은 예배당의 공간의 지배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깃불과는 달리 태양은, 우리가 서울을 떠나서 천안으로 가도
우리를 계속 좇아서 천안으로 옵니다.
그리고 그 태양은, 동시에 그 똑같은 시간에 전국 어디에나 다 비춥니다.
태양은 우리가 어디를 가든 우리 개개인과 동시에 동시간에 함께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라는 사실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본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 자녀가 어렸을 때, 차를 타면 늘 저에게 했던 질문이 있습니다.
'아빠, 왜 태양은 항상 나를 좇아오지?'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어요. '그거는 태양이 너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야.'
우리가 어디를 가도 태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태양은 전깃불과도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태양이 아무리 커도, 우리가 땅 속으로 들어가거나, 밤이 되면
태양은 우리와 단절됩니다.
태양 역시도 시간과 공간의 지배 속에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 태양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형체를 지니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영이신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체를 지니지 않으신 영이시기에,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우리 개개인과 개별적으로 함께해 주실 수 있습니다.
내가 지구 반대편에 아프리카를 가도, 그곳에서 나 홀로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내 곁에 계십니다.
내가 비행기를 타고서, 누구도 닿을 수 없는 하늘 위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하늘 위에서도 나와 함께하십니다.
내가 바다 끝자락에 거할지라도, 하나님은 거기서도 나를 붙잡아 주십니다.
시139:7~10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그럼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형체를 지니고 계신 분이시라면
이처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무소부재 하실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형체를 가지셨다면, 그분도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으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시기에,
우리 각 사람과 개별적으로, 어디서든, 언제든지 동행해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시기에, 형체를 지니지 않으시기에,
결코 소멸하지 않으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영원한 생명의 하나님이실 수 있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복도, 보이지 않는 복, 영생의 복, 구원의 복을 우선적으로 주십니다.
그런데 신자들은, 보이는 복을 우선적으로 구합니다.
그것은 보이는 하나님을 (우상으로) 섬기는 자세와 일맥상통합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만이, 우리가 영원히 믿고 섬겨야 할 신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4:18절에서 이렇게 설교합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그래서 바울은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지난 한 주간 동안 섬기고 의지하며 살아왔던 것들은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들은 아니었습니까? 바울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아무 열매 없는 텅 비어있는 쓸모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섬기고 예배할 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참된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2. 두 번째로, 참된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는 신앙입니다.
본문의 바울의 계속된 설교를 보십시오.
바울은 '헛된 일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라'고 말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15
그 하나님이 누구신지 우리에게 자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15b절에 하나님은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신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창조만 하신 게 아닙니다.
17절에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을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세상을 돌보고 다스리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하늘로부터, 비를 내려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드신 계절에, 변화를 주셔서 결실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나온 음식으로 우리를 먹이시고, 기쁘게 돌보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들어 놓으시고, 팔짱 끼고 이렇게 세상을 지켜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것들이 자연의 운행 방식으로 스스로 돌아가도록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마치 시계공처럼, 시계를 만들어 놓고, 저절로 돌아가도록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은, 만물을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은 누구도 관여할 수 없는, 우주의 운행에 관여를 하시고,
아무도 볼 수 없는 직은 생물까지도 돌보고 먹이시고 다스리고 계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을 보존하고, 다스리시고,
당신의 뜻대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창조, 보존, 통치 주1) 강추
△그래서 마10:29절에는 '참새 한 마리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 된다'
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삶에 이러한 저러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할지라도
우리가 걸어가는 걸음의 주권도 하나님께 있다고 말합니다.
잠16:9절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우리가 제비를 뽑을 때도, 그 결과도 하나님께 있다고 말합니다.
잠16:33절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이처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우연이나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과 섭리 가운데, 진행되고 일어나고 결정됩니다.
그 하나님의 섭리 안에, 피조물인 우리 또한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한 광대한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계획까지도 세밀하게 관여하시고, 간섭하시고, 인도해 가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이 얼마나 큰지, 주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10:30절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여러분 머리털은, 누구도 셀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머리털까지 세실 만큼,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세밀히 아시고,
사랑으로 세심하게 돌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수많은 수식어를 붙입니다.
영원 불변하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영광의 하나님, 영이신 하나님!
그러나 만일 그런 하나님이,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이 동떨어져 존재하시는 분이라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은요. 우리를 돌보고,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이란, 이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까지 믿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만 믿는 것은 반쪽 신앙입니다.
그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셨고, 지금도 나의 형편과 마음을 아시고
나의 삶을 주관하고 계심을... 실제로 내 삶 가운데 믿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죠? 이런 하나님을 실제로 믿는 신앙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는 신앙입니다.
여러분 한 주간 우리가 살아야 할 세상이, 얼마나 불안하고 무섭습니까?
얼마나 연약한 우리에게 겁나는 세상입니까?
그런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까?
내게 안정성이 있는 게 아니라, 나를 창조하시고 나를 구원하시고
나의 삶을 주관하고 계시고, 나의 삶을 붙드시고 인도하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분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안심할 수 있고요. 그분께 기도할 수 있고요.
그분의 도우심으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참된 신앙의 모습입니다.
참된 신앙이란, 이런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는 믿음 안에서
거기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의 설교를 통해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두 가지로 살펴봤습니다.
참된 신앙이란, 헛된 일을 버리고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께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내 삶 가운데 믿으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런 참된 신앙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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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창조, 보존, 통치
하나님의 섭리 Providence of God 는 세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창조/보전(보존)/통치
첫째, 천지를 창조(creation)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과거에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히브리서 3장 4절에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집을 보고서 이 집이 우연히 생겼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군가 설계해서 잘 지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집보다도 훨씬 조직적이고 고도의 질서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 천지를 보고
‘이 천지는 우연히 생겼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 우리 눈앞에 드러나 있는 천지가
명명백백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계절이 바뀔 때마다 이 천지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놀랍고 경이롭습니까?
저는 가을단풍이 이렇게 아름다운지 몰랐습니다.
전에는 “왜 나뭇잎이 떨어져서 치우기 귀찮게 많이 쌓일까?”하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은행잎의 노란 색이 어찌 그리 예쁜지! 어느 화가가 저렇게 아름다운
단풍을 만들 수 있는가?”하고 생각합니다.
낙엽이 하나 떨어져도 노래가 저절로 나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능력이
천지에 명백히 드러나 알게 되는 것을 가리켜 ‘자연계시’라고 합니다.
둘째, 만물을 보존(preservation)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히브리서 1장 3절에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밀물, 썰물은 정해진 지경까지 유지하면 들고 납니다.
만약 바닷물이 100미터 정도 더 육지로 거슬러 오르면 안 되는 것입니까?
누가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100미터 더 밀고 오른 적도 있지 않습니까?
그걸 가리켜 우리가 쓰나미라고 합니다.
바닷물이 10미터만 더 밀려온다면 도시가 물바다가 돼 버릴 것입니다.
인천 앞바다 바닷물이 정상보다 더 들어오면 서울까지 물바다가 돼 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바다야, 너는 거기까지만, 정지.”하면 “네”하고 정지하는 것입니다.
별들이 왜 궤도를 그리고 있습니까?
그 별들중 하나가 지구와 부딪쳐 버리면 지구는 박살날 것인데
예수님이 “별들아, 너희는 궤도를 정해 그 궤도를 그리며 돌아가고 다른 데 가지 마라.”
하시니, 지금껏 돌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태양의 온도 10도가 갑자기 올라가면 우리는 다 죽습니다.
농산물도 하나도 자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온도를 유지하며 춘하추동 적절한 온도를 우리에게 보내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미국 대통령이나 유엔이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이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능력의 말씀을 보내어 만물을 보존하고 계시기 때문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만유를 소유하시고 통치(government)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와 보존과 통치를 합하여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합니다.
본문 11절 후반으로 12절에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마귀가 존재합니다. 마귀의 졸개인 귀신들도 존재합니다.
귀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점쟁이에게 가보십시오. 무당에게 가보십시오.
귀신들은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괴롭힙니다. 죽이고 멸망시키려 합니다.
그러나 마귀는 주인이나 통치자가 아닌 도적에 불과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주인이시며 통치자이심을 믿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무엇을 주셔서 감사한 것보다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하나님은 위대하고 선한 성품을 가진 분이시며, 지금도 쉬지 않고 섭리하고 계신
하나님 자신에 대해 감사하며 송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먼저 감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귀의 낚시에 걸리면 안 됩니다. (펀 글)
하나님이 보이지 않듯이, 마귀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살 때의 일입니다.
제가 와이프랑 한국 마트에 장 보러 쇼핑을 갔다가,
제가 쇼핑하는 걸 무척 싫어하거든요.
그래서 마침 그 맞은 편에 호수가 하나 있어서, 제가 아들을 데리고 호수에 가서
아내의 장보기가 끝나기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호수에 가서 보니까, 어떤 미국의 초등학교 5~6학년 정도 되어 보이더라고요.
그 아이가 낚시를 하고 있더라고요.
호수에서 낚시를 하는데, 얘가 메기를 한 마리 잡았어요.
그래가지고 이 친구가 그 메기를 가지고 놀면서, 우리가 다가가니까 보여주는 거예요.
자기가 어떻게 하는지.
그런데 낚싯대 릴을 막 감으니까, 메기가 꼼짝없이 끌려 오더라고요.
호숫가에까지 오니까, 줄을 더 당기니까 물 위로 첨벙거리고 올라와요.
메기가 입을 쩍 벌리고, 그 턱에 갈고리가 딱 걸려가지고, 아주 불쌍한 표정으로 몸부림을 치는 거예요.
제가 쳐다보면서 '야 너무 안 됐다'
그런데요. 이 미국 소년이 그 메기를 다시 풀어주는 거예요.
낚시바늘을 빼지 않고, 그냥 낚싯줄만 풀어주는 거예요. 릴의 잠금 장치를 푼 거죠.
줄만 풀어주고 딱 놔두니까, 메기가 죽어라고,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며 막 도망가요.
한참을 도망가도록 그냥 내버려두는 거에요.
그런데 이 아이가 그러더니 다시 낚싯줄을 감기 시작하니까
메기가 꼼짝없이 또 다시 끌려오는 거예요.
아이는 (잔인하게도) 낚싯줄을 감았다가, 풀었다가를 반복하며, 그 메기를 갖고 놀아요.
그 조그만한 미국 소년이 말이죠.
그때 성령님이 제 마음속에 이런 깨달음을 주시는 거죠.
'이게 너희들의 모습이다. 죄의 결박에 묶여서 죄의 노예가 되어서
죄가 시키는 대로 살 수 밖에 없는 죄인들의 모습이다!'
제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요.
'정말 그렇구나. 우리가 죄의 노예가 된게 이런 거구나.
죄가 당기면 끌려가야 되고, 죄가 좀 풀어주는 것 같으면 괜찮은 것 같고..'
이 죄는 정말 무서운 주인이더군요.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 죄의 권세를 깨뜨리신 거에요.
그 죄의 사슬을 끊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이 죄에서 해방되게 하신 거죠.
그분이 십자가에서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귀의 낚시 바늘에 꿰이지 않도록, 매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진정 사랑하고, 버리지 못하는 우상이 있다면,
벌써 마귀의 낚시 바늘에 꿰인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기도하면서, 그 우상을 버리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십계명 2계명을 지키기도, 결코 쉽지 않은 것이고, 우리의 일평생 싸움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