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02 05 사도행전 강해 (56)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서다 - YouTube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서다 행15:30~41
◑도입 / 예루살렘 공의회 결과를 안디옥 교회에 전달하다
지난 시간 우리는 예루살렘 회의의 결과를 보았습니다. *행15장
회의가 은혜롭게 잘 끝났는데요. 그때 회의가 야고보 장로의 발언으로 끝이 났었죠.
야고보 장로 역시 '구원은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만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게 회의의 주된 결론이었죠.
예루살렘 교회는 이 결정된 회의의 내용을, 편지로 작성했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가 이 작성된 편지를 가지고, 안디옥 교회로 내려갑니다.
:30~31 '그들이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그런데 안디옥으로 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의 동행자가 생깁니다.
:32~33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된 두 사람이 이들과 함께 안디옥으로 내려갑니다.
그 두 사람이 본문 32절에 나오는데요. 유다와 실라 라는 선지자였습니다.
내려간 이들은 예루살렘 회의의 결과를, 안디옥의 이방인 신자들에게 전했습니다.
'우리가 가르친 대로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모세의 율법의 규정들을 지키지 않아도 되고,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칩니다.
다만 유대교 신자들이 너무 혐오하는, 네 가지만은 금지하는 최소한의 권고 규정을 둡니다.
여러분, 네 가지 규정을 기억나시나요? 이것 자체는 여러분이 기억하지 못하셔도 됩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고, 목매어 죽인 거 먹지 말고, 피채 먹지 말고, 음행을 멀리하라.
이 네 가지 규정만 지켜주면 된다.
이 결정을 들은 안디옥 교회의 이방인 신자들은, 위로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본문에 보시면 기뻐했다고 말합니다.
:31 '(편지를)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왜냐하면 흔들렸던, 불안했던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었으니까요.
◑2차선교여행의 출발
그런데요, 이방인 신자들이, 안디옥 교회에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1차선교를 했던 지역들이, 하나같이 다 이방인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쪽의 이방인 신자들도, 바리새파 교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즉 '다른 복음'을 들었을 것입니다. 갈1:7
그러니 바울이 선교한 지역들도 크게 혼란을 겪었겠죠.
'도대체 누구의 가르침이 맞는 건가? 바울의 가르침이 맞는 건가?
바리새파 교인들의 구원의 가르침이 맞는 건가?'
구원에 대한 확신이 그들 또한 흔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입장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이 편지의 내용을 가지고
그곳으로 다시 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을
그들에게도 하루빨리 전해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작된 게, 바로 2차선교 여행이었습니다.
그 출발이 36절에 기록되어 있는데요.
15:36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그래서 2차선교여행이 시작됩니다.
이 2차선교여행이 성경에 행15:36절부터 ~ 18:22절까지 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책에 표시를 해두면 좋을 것 같습니다.
18:22절에 '2차선교여행 끝'이라고 표시를 해 두면, 성경을 읽으실 때 훨씬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18:22절 '가이사랴에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오늘 본문 15:36절에 안디옥에서 출발한 그들이, 다시 안디옥으로 복귀하는 장면이죠.
그러니까 15:36~18:22절까지가 2차선교여행의 기록입니다.
(참고로, 18:23절은 3차전도여행의 시작입니다.
18:23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하니라')
제가 주석을 보니까, 2차선교여행의 시점이 AD 49년~ 52년까지로 보더라고요.
약 3년 동안 2차 선교 여행을 한 것이죠.
◑그런데 2차선교여행은, 1차선교여행과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습니다.
공통점은, 선교여행의 베이스 캠프가 같다는 점입니다.
1차선교여행의 베이스 캠프는 수리아 안디옥 교회였습니다.
2차선교여행의 베이스 캠프도 수리아 안디옥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차이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1. 첫 번째 차이점은 선교여행의 목적이 다릅니다.
1차선교여행의 목적은, 안 믿는 이방인들을 믿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한마디로 복음 전도에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2차선교여행은, 목적이 양육에 있었습니다.
1차선교여행 때 믿게 된 이방인 새신자들이 있었죠.
그들을 양육하는 데 방문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는 1차선교여행을 했던 그 교회들을
다시 방문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뒤로 넘어가면, 초반의 계획이 틀어집니다.
▲2. 선교여행의 경로가 바뀝니다.
하나님께서 갑자기 경로를 바꾸십니다.
어디로 바꾸시느냐? 소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바꾸십니다.
1차선교여행을 했던 지역들은 갈라디아와 소아시아 지역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는 ... 갈라디아 지역인데,
그 넓게 보면, 터키 전체는 당시 '소아시아 Asia Minor' 라고 불렀습니다.
갈라디아, 또는 넓게는 소아시아 지역이, 1차선교여행의 주 무대였죠.
그런데 2차선교여행 때는, 처음에는 소아시아로 갔습니다.
(더베, 루스드라까지는 갑니다)
이유는, 1차때 방문한 지역과 새신자들을 돌아보기 위함이었습니다.
15:36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그런데 중간에 계획이 틀어집니다.
16:6~7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그래서 성령이 어디로 인도하시냐면, 바울 팀이 유럽으로 건너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두 번째 차이는, 코스가 다릅니다.
1차선교여행의 코스는 소아시아 지역인데, 또는 갈라디아 지방인데 (터키 중남부)
그런데 2차 선교의 코스는 유럽이었습니다. 오늘날의 그리스죠.
그래서 유럽으로 복음이 확장이 되는 거죠. 빌립보, 데살로니가, 아덴, 고린도 등지로.
그래서 오늘날 유럽이, 이때 복음화가 시작된 것이죠.
2차선교여행 때 복음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내용이 바로 이어지는 16장부터 나옵니다.
▲3. 세 번째 차이는 선교하러 가는 팀이 다릅니다.
1차선교여행 때는 바울과 바나바가 한 팀을 이루어서 선교를 나갔었죠.
2차선교여행 때는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섭니다.
바울은 실라와 같이 선교를 떠나고,
바나바는 마가요한과 함께 선교를 떠납니다.
이렇게 2차선교여행 때는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져서 떠납니다.
15:37~39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서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살펴볼 대목인데요.
그 중심에는 마가요한이 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바나바와 바울이 1차 선교여행을 떠났을 때,
구브로 섬에서 조인해서 수행원으로 따라갔던 인물이 마가요한이었습니다. 13:5
바울 선교팀은 구브로 섬에서, 소아시아로 건너갑니다.
앗달리아 항구에서 내려서 근처 버가로 갔습니다.
버가에서 마가요한은 선교팀에서 이탈해서 자기 집(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탈한 이유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몇 가지 추정이 있는데요.
우리가 전에 한번 살펴본 적이 있었죠.
그러니 바울과 바나바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힘이 빠졌겠습니까?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는, 마가요한 없이 1차선교여행을 계속 했습니다.
그런데 2차선교여행을 떠나는 이 시점에, 바나바의 제안이 무엇이죠?
2차선교를 가는데 마가요한을 또다시 데리고 가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안된다. 데리고 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마가요한을 데리고 가느냐/마느냐의 문제로, 이 사건의 발단이 시작된 거죠.
▲마가요한은 바나바의 조카입니다. 어느 주석에 보면 사촌이라고도 말하는데요.
조카인지 사촌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나바의 조카나 사촌이면, 바나바의 입장에서는
마가요한이 더 신경이 쓰였겠죠.
더군다나 '바나바'라는 별명의 뜻이 무엇이죠? '위로의 아들'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마가요한을 위로해 주고 싶었겠습니까? 안 그래도 조카나 사촌인데요.
바나바는 마가요한을 일으켜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요한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한 번 더 기회를 줘서, 마가요한이 좋은 사역자로 성장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마음이 달랐습니다. 바울은 단호하게 안 된다고 말합니다.
어쨌든 한 번 중간에 무단이탈을 하지 않았습니까?
데리고 가면 '또 그럴 수 있다'는 거죠.
더군다나 사람의 일도 아닌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이런 무책임한 마가를 데리고 간다는 게 옳지 않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이처럼 마가를 데리고 가느냐/ 안 가느냐 ...
이 문제를 가지고 바울과 바나바의 생각이 달랐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생각이 각자 다를 수는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의 생각은 얼마든지 서로가 각자 다를 수 있잖아요.
바울과 바나바, 둘 다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바나바의 마음도 생각을 하면 이해가 되고, 바울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생각이 달랐다는 게 아닙니다. 생각은 다를 수 있는데
이것을 가지고 둘 사이에 심한 다툼이 일어났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다툼이, 단순한 의견충돌이 아닙니다.
본문 39절에 보면 '심히 다투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다투었다'는 말이 헬라어로 '파락시스모스'라는 단어인데요.
이 단어에서 파생된 영어 단어가 '패럭시즘' 입니다. Paroxysm
풀이하면 격발, 발작, 경련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몸에 경련을 일으킬 정도로, 아주 크게 대판 싸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상상이 되십니까? 여러분 지금 이들이 누구예요?
이들은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였습니다.
여러분 바나바는 누구죠? 바나바는 성품이 좋기로 소문이 자자한 지도자였습니다.
바나바는 성품이 온유하고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원래 이름은 바나바가 아닙니다. 원래 이름은 요셉이었죠.
그런데 사도들이 별명을 붙여준 겁니다.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바나바'라는 별명을 붙여주었고요.
그때부터 요셉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모두가 교회 안에서 '바나바'라고 불렀습니다.
그만큼 성품이나 믿음이, 자타가 공인할 만큼 좋은 사람이었다는 거죠.
누구나 바나바 하면, 위로의 아들, 성품이 온화하고 참 따뜻한 사람,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사람, 인격적으로 참 성숙한 사람,
그래서 '아 나도 본받고 싶은 사람', 누구나 다 인정할 정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바울도, 믿음의 사람 아닙니까? 예수님을 만나서 놀랍게 변화된 사람입니다.
바울은 굳이 우리가 설명이 필요 없는 경건한 사람이죠.
그래서 초대교회 당시에, 교회를 이끌던 영적인 거장들이 바울과 바나바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지금 싸우는 겁니다. 그것도 몸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발작할 정도로 대판 싸웁니다.
감정이 통제가 안 돼서, 몸을 막 부들부들 떨면서 아주 크게 싸우고 있었다는 얘기죠.
그런데 여러분 이것까지는, 그래도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이들도 우리와 같은 연약한 사람이지... 그럴 수 있지...
한 번쯤은 그렇게 감정을 통제하지 못할 만큼 대판 싸울 수 있지...' 하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다툼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서로 심히 다투어 어떻게 됐다고 말하죠?
'다음 날 화해를 했더라' 이렇게 좋게 끝나지 않습니다.
어떻게 다툼이 끝나죠? 피차 갈라섰다고 말합니다.
피차 갈라섰다는 말은, 다시는 안 볼 사람처럼 싸우고 갈라섰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 부분이 우리를 대단히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여러분 사실 이게, 이렇게 갈라질만한 문제가 아닙니다. 어쩌면 사소한 문제입니다.
여러분 이게,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의 문제는 아니지 않습니까?
어떻게 보면 굉장히 사소한 문제입니다. 얼마든지 한쪽에서 양보할 수가 있습니다.
마가요한을, 바울이 데리고 갈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설상 마가요한이 또 무단 이탈을 해도, 선교가 망하는 건 아닙니다.
1차선교여행 때도, 마가요한 없이도, 잘 감당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힘이 빠졌겠지만, 그것 때문에 선교가 넘어지고 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바울의 입장에서는, 이번에도 속는 셈 치고, 또 한 번 데리고 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안 데리고 갈 수도 있지 않습니까?
꼭 지금 바나바가 마가요한을 데리고 가야만 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나중에 3차선교여행 때, 그때 데리고 가도 되잖아요?
그런데 이 둘이,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합니다.
누구 한 사람 끝까지 양보를 하지 않습니다. 누구 한 사람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지 않습니다.
굉장히 눈살이 찌푸려지는 장면이죠. 결국에는 서로가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여러분, 바울과 바나바의 사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바울에게 바나바는 어떠한 사람이죠?
지금의 바울을 있게 한 장본인, 은인이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회심을 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교회에서 누구도, 바울의 회심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때 바울을 보증 섰던 유일한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
바나바가 바울을 데리고 다니면서, 예루살렘 교회에 인사를 시켜주었고요.
그들과 교제할 수 있도록 설득해 주었던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 행9:26~27
바나바 때문에,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자기 존재를 알릴 수 있었던 거죠.
뿐만 아니라 지금 이곳이 (분쟁 장소) 안디옥교회 아닙니까?
그런데 바울이 지금 안디옥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하게 된 것도, 바나바 때문이었습니다.
원래는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 혼자서만 사역을 했던 교회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부흥을 하자, 바나바가 바울을 데리고 온 거죠.
그때 바울은 자기 고향인 다소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나바가, 다소까지 먼 걸음을 찾아가서 *약220 Km
바울을 안디옥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11:25~26
그래서 지금 바울은, 안디옥에서 바나바와 같이 사역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바울에게 바나바는, 사역의 길을 열어준 사람입니다.
믿음의 선배요, 멘토요, 은인이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바나바에게는 한 번쯤 양보할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러나 바울이, 그 고마운 바나바에게 화해의 손을 내밀지 않습니다.
반대로 바나바에게 바울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바나바에게 바울은, 긴 세월을 동역했던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바울을 이끌어줬던 멘토가 바나바였습니다.
그러면 바나바가 믿음의 선배로서, 양보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둘 중에 어느 한 사람,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지 않습니다.
결국에는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의 갈라짐이, 우리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거죠.
먼저는 그 이유가 굉장히 사소한 문제일 수 있고요.
또 하나는 이들의 사이를 생각해 보면, 이렇게 쉽게 갈라질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우리가 받아들여야 합니까?
이들의 갈라짐을 우리가 어떻게 풀어야 하는 거죠?
여러분 우리가 이 본문을 해석할 때, 해서는 안 되는 해석이 하나 있습니다.
이 본문을 '누가 잘했고 잘못했느냐?'로 접근하는 해석입니다.
이 싸움을 보면서 자꾸 우리는 이런 질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누가 더 잘못했다고 하실까? 바울일까, 아니면 바나바일까?'
그러나 이 본문은 그렇게 해석하면 안 됩니다.
이 본문을 가지고, 누가 더 잘못했느냐로 풀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이 사건을 기록한 누가의 의도가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바울에 대해 뭐라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딱딱하고 속이 좁은 사람이다.
너무나 사람이 단호하고 피도 눈물도 없다. 사랑이 없다.' 이렇게 책망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반대로 바울의 손을 들어주는 학자들, 설교자들이 있습니다.
'바울이 옳은 판단을 했다'는 거죠. 그 증거로 40~41절의 말씀을 내밉니다.
40절에 보면, 안디옥 교회가 떠나는 바울에게 인사를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2차선교여행을 떠나는 바울에게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기도해주고 축복해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어지는 41절에 보면 '바울이 교회를 든든히 세웠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이 바나바에게는 없습니다.
바나바는, 그냥 마가요한을 데리고 안디옥을 떠났다는 기록만 달랑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들을 가지고, 누가는 바울의 손을 들어줬다고 말합니다.
2차선교여행을 떠날 때, 바울은 그래도 안디옥교회의 기도를 받고 떠났고,
바나바는, 임의로 떠났다는 거죠.
15:40~41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그런데 바나바는, 바울처럼 안디옥 교회의 보내심을 받았다는 기록이, 성경에 없습니다.
누가가 보기에는 바울이 맞다는 거죠. 선교학적인 입장에서도 바울이 맞다는 거죠.
그러나 여러분 그건 잘못된 주장이라고 저(설교자)는 생각합니다.
바나바를 위해서도 안디옥 교회가 기도해줬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바나바도요 다니면서 교회를 든든하게 세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가 이렇게 바울만 기록한 이유는,
바울에게 이방인 선교의 정통성을 부여한 것 뿐입니다.
(바울을 세워주려고, 바울 중심으로 기록했다?)
아시다시피 바울은 이방인 선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앞으로 전개되는 이방인 사역은, 바울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실제로 이 사건 이후부터는, 사도행전에 바나바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바울만 나옵니다. 이방인 선교의 주역이 바울이기 때문에,
모든 게 바울을 중심으로 기술이 되는 거죠.
그 바울의 정통성을, 여기서 누가가 확인시켜주는 것 뿐입니다.
그러니까 누가는, 이 본문을 가지고, 누구의 손을 들어주는 데 목적이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누가가 말하고자 하는,
이 분쟁 사건을 기록한 누가의 의도는 무엇이죠?
누가의 의도는, '둘 다 다 잘못했다. 둘 다 미숙했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울과 바나바는, 사실은 그렇게 위대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누가가 이들의 싸움을 기록한 의도가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이어온 1차선교여행의 흐름을 보십시오.
1차선교여행은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첫 이방인 선교를 시작한 이들이 바울과 바나바였습니다.
이들의 수고를 통해서 수많은 소아시아 지역에 교회들이 세워졌습니다.
가는 곳마다 핍박이 있기는 했지만, 수많은 이방인들이 회심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로 오늘 본문 뒤에, 어떠한 사건이 일어나죠?
바리새파 교인들이 교회를 뒤흔드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리새파 교인들이, 갈라디아 등지에 다른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와 더불어서, 초대교회 전체가 둘로 갈라질 뻔했습니다.
그때 바른 신학으로 교회를 보호했던 사람이, 바울과 바나바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 때문에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렸고, 교리 논쟁이 깔끔하게 마무리되었습니다.
이들의 바른 신학과 바른 교리로, 교회는 굳건하게 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예루살렘 공의회) 바로 이어서, 오늘 본문에서 이들의 다툼을 다루고 있습니다.
1차선교여행이 은혜롭게 마무리된 그 이후에,
그리고 교회를 뒤흔들었던 교리적 논쟁이 은혜롭게 마무리된 이후에,
은혜롭지 않은 이들의 모습을 바로 이어서 보여줍니다.
도저히 지금까지는, 이들에게서 예전에 찾아볼 수 없었던 인격의 밑바닥을 다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보기에 불편할 정도로, 극사실주의-하이퍼리얼리즘으로
이들의 민낯을 날 것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무슨 얘기죠? 이들 때문에 지금까지의 선교가 된 게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이들이 뛰어나서 선교의 열매가 맺어진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똑같이 우리와 같이 연약한 자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미숙하고 때로는 연약하고, 아직도 다듬어지지 않은 불완전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탁월함 때문에, 하나님의 선교가 은혜롭게 마무리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어질 2차, 3차의 모든 선교 여행도,
이들의 능력이나 실력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에게 달려있다는 얘기입니다.
누가는, 지금 이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실제로 보십시오. 이들의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 방해받지 않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은, 이들의 연약함을 선으로 바꾸어 사용을 하십니다.
먼저는요. 한 개였던 선교팀이 두 개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갈라서는 바람에, 어쨌든 한 개였던 선교팀이, 두 개로 확장이 되었습니다.
덕분에 이방인 선교도 두 배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에 보면, 바나바와 마가는, 구브로 섬으로 배타고 들어갑니다. 15:39
그 시간에 바울과 실라는 육로로 가서,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닙니다.
그러니까 동시에 두 개의 팀으로 확장되어서, 선교가 더 빠르게 진행이 되는 거죠.
그런데 뭐 때문에요? 이들의 어이없는 다툼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들의 다툼을 선으로 바꾸어서 사용을 하신 거죠.
그리고 이들의 찢어짐 때문에, 바울의 선교가 탄력을 받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에게는 새로운 동역자가 생깁니다.
바로 실라 라는 인물인데요. 바울은 실라를 택하여 선교를 떠납니다.
실라는, 예루살렘에서 공의회를 마치고, 그 내용을 안디옥 교회로 편지를 보낼 때,
그 편지를 전달할 목적으로 실라와 유다를 택하여 안디옥으로 보냅니다. 15:22
바울과 바나바 편에 편지를 보내도 되는데, 편지 내용의 신빙성을 더할 목적이었는지,
예루살렘 사람인 실라와 유다를 안디옥으로 보냈는데, 그 때 실라가 처음 등장했죠.
그 실라가, 안디옥에 와서 편지를 전달한 후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고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15:33
그런데 실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기 공식적 미션은 마쳤으니까,
안디옥이나 그 근처에서 좀 구경도 하고, 쉬고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연결이 되어서, 2차선교여행의 동반자가 된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실라도 로마시민권자였습니다.
그래서 실라의 이름이 실루아노라고 나오기도 합니다. 살전1:1
실라는 히브리식 이름이고, 실루아노는 로마식 이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시죠? 바울은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과 실라 둘 다 로마시민권자들끼리 묶이게 된 것이죠.
그러나 여러분, 바나바는 로마시민권자가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시민권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이
같이 여행을 가면, 시민권 차이 때문에, 여행의 보조를 맞추기가 힘든 경우가 생기죠.
예를 들면, 한 명은 미국 시민권자 교포이고, 한 명은 한국 사람입니다.
그러면 다른 나라에 갔을 때, 1개월 체류는 크게 차이가 안 나지만,
그 이상 체류할 때는, 미국인이 한국인보다 더 우대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국 선교사들이, 현지 교인들을 한국으로 데리고 올 때도 마찬가지죠.
선교사는 당연히 한국에 들어오지만, 현지인들은 한국 비자 받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쨌든 바울과 실라는, 둘 다 시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같이 이방인 선교를 하는 게 훨씬 수월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2차선교여행을 할 때는, 유럽과 소아시아에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잘 아는 신약의 교회들이 있지 않습니까?
에베소, 골로새, 빌립보, 고린도, 데살로니가 교회...
이런 교회들이 다 2차선교여행 때 세워진 교회들입니다.
1차선교여행은 (구브로를 제외하면) 갈라디아 한 곳이었잖아요.
그런데 2차선교여행 때는 1차 때보다 더 많은 교회가 세워진 거죠.
누구를 통해서요? 바울에게 얻어진 새로운 동역자 실라를 통해서요.
그리고 또한 2차선교여행 초기에, 루스드라에서 디모데가 조인하고요,
드로아에서 누가가 조인합니다.
그래서 2차선교여행은, 바울-실라-디모데-누가가 함께 합니다.
(누가는 빌립보에서 오래 체류하고, 적어도 바울-실라-디모데가 함께 움직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나바와 마가를 보십시오.
바나바 때문에 마가는 또 얼마나 많은 위로를 받았겠습니까?
그래서 마가는 바나바를 통해 좋은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마가는 나중에는 베드로의 좋은 동역자가 되었고요.
우리가 잘 아는 마가복음을 쓸 만큼, 그는 주님의 신실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바울하고도 친해 지죠. 딤후4:11
그러니까 오늘 이 찢어진 결과가, 다 유익하게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결과를 보면서, 그들의 다툼이나 우리의 다툼을 정당화해서는 안 되겠죠.
'결과가 이러니 다툼에 면제부를 줘도 된다'고, 오늘 본문을 끌고 들어오면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을, 나 자신의 모난 성품이나 허물로, 이 사람 저 사람과 부딪히는
나의 결점에 면죄부를 주는 말씀으로... 적용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 잘못한 건, 어디까지나 잘못한 것이죠.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잘못마저도 선하게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 깔아놓은 인생의 걸림돌 마저도
훗날 우리에게 디딤돌이 되도록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복된 말씀입니까!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섰는데, 하나님께서 '그러니까 너희는 안 돼!'
이렇게 자격미달로 그들을 버리시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불완전하고, 미숙하고, 한계가 있는 이들인데
하나님은 이들을 요긴하게 사용하셨습니다.
분명히 누가 봐도 미숙한 일이고, 참 보기에 부끄러운 일인데,
하나님은 실패와 연약함을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그것들을 통해 오히려 이들의 사역을 복되게 하시고,
당신의 일을 완벽히 이루어 내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한 번 실패하면 큰일 날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패해도, 하나님은 실패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두 사람을 실패함 없이 사용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의 허물이 드러나고, 약함이 드러나고, 실패할 때에도... 여러분 그게 끝이 아닙니다.
마귀는 늘 '이제 너는 끝장이야. 너의 가정은 끝이야. 너의 인생은 끝이야.
너의 자녀는 끝이야. 너의 꿈은 끝이야!'하고 우리를 낙심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허물과 실수를 범하고도 우리는 회복될 수 있는 존재임을
늘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을 이끄시는 하나님은 실패가 없으시고, 실수가 없으신
완전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의 선함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실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온갖 실패와 다양한 연약함까지도 마음껏 사용을 하셔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선으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바보 같음과, 미숙한 모습과, 잘못된 선택과, 심지어 우리의 죄마저도
선으로 바꾸어 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새롭게 시작되는 한 주간도, 그분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을 여러분의 믿음의 대상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무너진 자리에서, 실패한 자리에서,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의 도우심과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잘못을 통해서도 신실하게 일하셨던 하나님이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 회복을 시키시고, 우리를 통해 일하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여러분 갈라진 이들이, 나중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오늘 이렇게 발작이 일어날 정도로 심하게 다투고 갈라진
바울과 바나바의 관계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바울과 마가요한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두 사람의 훗날의 관계가 사대행전 안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른 서신서들을 보면, 이후에 이들의 관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바나바와 바울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둘의 관계가 고린도전서 9:6절에 나오는데요.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고전9:6
여러분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3차선교여행 때 에베소에서 쓴 편지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바울과 바나바가 크게 싸우고 나서, 훨씬 이후에 쓰여진 편지겠죠.
그런데 이 편지에서, 바울이 바나바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여기 '일하지 않는 권리'는, 교인들로부터 생계비를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말합니다.
다른 사도들은 다 생계비를 교회로부터 지원받았는데, 바울과 바나바는 받지 않았다는 거죠.
받을 권리가 있지만, 자진해서 받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 권리를 말하면서, 바울이 누구를 소환하냐면, 바나바를 소환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다른 여러 사도들도 있는데, 굳이 바나바를 콕 찝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거죠.
'아 이들이 세월이 얼마 지나서는 화해를 한 거구나. 좋은 동역자가 다시 되었구나'
▲그렇다면 바울과 마가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들의 관계는 성경 곳곳에 나오는데요.
빌1:24절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여러분 바울은 '나의 동역자'라고 말하면서, 첫 번째로 마가를 언급했습니다.
골4:10절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바울이 로마감옥(가택연금)에 갇혔을 때, 누구와 같이 있죠?
바나바의 생질(조카) 마가와 지금 3차선교여행이 끝나고,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었는데,
그 로마의 가택연금에 같이 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택연금이라서, 조력자들이 가서 밥도 해주고, 도와주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딤후4:11절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디모데)가 올 때,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말년에 쓴 편지입니다. 죽기 직전에 쓴 편지입니다.
죽기 직전에 감옥에 갇힌 바울이 뭐라고 말하죠?
'디모데야, 네가 (감옥으로 방문해)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말합니다.
'마가는 나의 일에 유익하다'고까지 말합니다.
바울과 마가도, 주님 안에서 훗날 좋은 동역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오늘 설교를 준비하고 묵상하는 과정에서, 이런 하나님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참 감사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바울과 바나바는 화해를 했고요.
그렇게 바울을 불편하게 만들었던 마가는, 누구보다 유익한 신앙의 동역자로 성장을 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들을,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다듬으셨다는 얘기입니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모남과, 부족함과, 연약함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이들을, 시간이 지나면서, 각자의 공간 안에서
이들을 신실하게 빚으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흐르고 났을 때는, 주님 안에서 서로를 받아주고 품어주는
따뜻한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유익이 되는, 좋은 신앙의 동역자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여러분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한편으로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제 자신을 볼 때, 저는 늘 저의 연약함과 한계를 마주합니다.
신앙적으로도 아직도 참 연약하고, 인격적으로도 미숙한 저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한 교회의 목사로서, 그리고 한 가정의 남편과 아빠로서,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늘 저의 모난과 죄됨과 미숙함을 거듭거듭 보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서, 한편으로 소망을 발견합니다.
그 소망은, 하나님 때문에 주어지는 소망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빚으셨던 하나님, 그리고 마가를 유익한 신앙의 동력자로 빚으셨던 하나님이,
나도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 나를 빚어내시겠구나...
그래서 나도 누군가에게는 유익한 사람으로, 그리고 누군가를 품어주는 따뜻한 사람으로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신실하게 빚어내시겠구나...
그렇게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답게, 그렇게 다듬어주시겠구나...'
그래서 단순히 자연적으로 늙어가는 노인이 되어가는 게 아니라
영적으로 익어가는 노인, 경건한 어른으로,
'하나님이 나를 시간 속에서 이렇게 끝내 빚어주시겠구나...' 그런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여러분에게도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바울과 바나바, 마가와 같은
신앙의 연약함과 인격적인 미숙함이 그대로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오늘 바울, 바나바, 마가요한을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놓지(방치하지) 않으시고 끝내 빚으셨던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동일하게 각자의 자리에서, 이렇게 신실하게 빚어내실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신실한 빚으심이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