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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이레, 준비된 대로만 사는 법

LNCK 2024. 7. 19. 17:17

https://www.youtube.com/watch?v=6dWh3UqJ1-Q

https://cafe.daum.net/heavendeer/WTw3/41 -녹취록 스크랩 후 정리-

 

여호와 이레, 준비된 대로만 사는 법             창22:12~24

 

여호와 이레는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하면 여호와께서 준비하신 대로 살 수 있을까요?

이러한 주제를 가지고 함께 하나님 말씀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답을 미리 말씀드리면, 이삭을 죽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죽이면 안 되니까, 내 마음에서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이삭’을 죽이면

여호와께서 준비하는 것, 여호와 이레를 보게 되는데,

자기 마음에서 ‘이삭’을 안 죽이니까, 여호와 이레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주제

 

▲여러분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대로 사는 삶을 경험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연히 적절한 만남을 경험한다든지, 적절한 상황이 주어진다든지,

적절한 사건이 주어진다든지 하는 것은, 사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부부가 ‘그때 내가 대학로에 가서 연극을 보지 않았다면

당신을 만나서 결혼하지도 못했을 거야.’라고 합니다.

 

이런 식의 우연한 경험에 대한 고백은 없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여호와 이레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준비하신 대로 사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날 마지막으로 태어날 사람까지

아담 안에서 계획하신 바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내 삶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다 계획하시고

준비해 두셨습니다.

 

본문에서 언급된 여호와 이레의 내용대로 사는 삶이란

십자가를 통과하기 전에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통과함이란 곧 세상에 대한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올인하여 내 마음을 다 쓰고,

하나님만을 추구하느라 내 몸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을 전혀 의식조차 못하는 상태가 될 때,

(즉 내가 죽은 상태가 될 때) 그 삶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대로 이끌려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 경험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군에 입대했을 때 논산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민간인으로 살다가 군대에 들어가는 상황은 큰 변화였습니다.

훈련소의 모든 상황이 낯설고 힘듭니다.

 

그렇기에 하루의 훈련이 끝나고 나면 다 곯아떨어집니다.

그런데 조교들이 불침번을 서며 돌아보다가, 기겁을 할만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하루 종일 고된 훈련을 받았으면, 밤에 기절하듯이 곤하게 잠을 자야 합니다.

실제로 장병들이 다 그렇게 곯아떨어집니다.

 

그런데 저는 하나님 생각하고 기도하느라 앉아있었습니다.

불침번을 서던 하사가 저를 보고는 ‘너, 이 자식 미쳤어?’하고 깜짝 놀라 외쳤던 것이 기억납니다.

 

당시를 생각해 보면, 제 의식 속에서 입대하여 훈련을 받는 것은

삶의 주요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한 일이었고,

빨려 들어가듯이 하나님을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훈련을 받는 것조차도 곁다리로 여겼던 것입니다.

 

이것은 저에게만 국한되는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심각한 삶의 환경이 주어져도, 우리 마음은 다른 곳을 향할 수 있습니다.

 

제가 스데반 집사님을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은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도, 마음이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이 본래 창조적으로 준비하신 모든 일들이

비로소 ‘여호와 이레’의 내용대로 진행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창22:13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은 이삭을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급하게 하늘로부터 사자를 보내셔서 멈추게 하셨고,

이때 아브라함은 눈을 들어 살펴본즉, 숫양의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어서 14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준비되리라는 말은 의역이고, 원어의 뜻은 ‘보게 되리라’ 입니다.

여호와 이레는 ‘여호와-라아(보다)’의 합성어입니다.

14절b에, 여호와이레 라는 말을 본문이 스스로 풀어주는데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근데 이것은 의역이고요, 

원어대로 직역하면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된 것을) 보게 되리라     주1)

 

즉 ’여호와께서 준비해 놓으신 것을 여호와의 산에서 보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숫양을 이삭을 바치던 현장에서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다 준비해 놓고 계신데, 내 눈이 열리지 않으면, 그게 안 보입니다.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시는데, 나는 못 보고 있는 것입니다.

 

아람 군대가 도단 성을 에워쌌는데, 엘리사 선지자는 눈이 열려서 *왕하6:17

도단 성을 지키는 천사들의 군대를 보았고, 사환은 그걸 보는 눈이 닫혀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내 마음에서 이삭을 바침, 죽임을 통해서

내 눈이 열려져서,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을 볼 수 있게 되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이, (내 눈에도) 보이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호와이레의 원어적 의미

 

♣뉴욕행 열차에서 체험한 ‘여호와이레’ (펀 글)

제가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저녁에는 뉴욕 33가에 와서 집회를 하게 되어 있었는데

그래서 필라델피아에서 뉴욕행 열차를 탔습니다.

 

저녁 5시쯤 기차를 타고서 뉴욕으로 오는데

뉴욕에 와서 지하철로 바꿔 타는 것을 내가 몰랐어요.

 

나는 가방을 열어서 책을 꺼내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뉴욕으로 갈 사람은, 뉴욕 근처에서 지하철로 갈아타야 됩니다.’ 방송이 나왔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확 내려요.

그래서 나도 벌떡 일어나는데 가방을 안 닫고 일어나서 다 쏟아졌습니다.

 

내 파자마로부터 시작해서 치약, 칫솔, 런닝셔츠까지

사람들의 발에 걸려서 끌려나가고.. 순간 당황스러웠습니다.

 

나는 그것 주워 담는다고 막 주워 담는데, 짐이 많으니까 가방이 잘 안 닫히잖아요.

무릎으로 눌러서 닫는데, 기차가 그냥 문을 닫고 떠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 정거장에 내리니까, 또 다른 사람들이 확 타는데

내가 어디가 어딘지 알아야지요. 큰 일 났습니다.

 

저녁 집회시간은 다가오고... 그래서 내가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지하철 놓치고 지금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뉴욕 맨해튼 33가에 저녁 7시에 설교를 해야 되는데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기도를 하니까

앞에 험상궂은 사람이 다가와서 내 등허리를 탁탁쳐요.

 

“당신 어디에서 왔느냐?”고 그래서 미국에는 갱이 많다고 하는데

이 사람도 갱이 아닌가 싶어서

내가 한국서 왔다고 하니까 아주 반기면서

 

“내가 한국 전쟁에 참석한 전쟁용사라고, 한국을 내가 참 좋아하고,

한국 전쟁에서 내가 살아서 돌아왔는데, 한국사람 만나니까 반갑다”고 하면서

 

어디 가냐고 그래서 “내가 맨해튼으로 가는데 지금 어디냐?”고 하니까

“아이구 여보시오. 당신은 지금 맨해튼하고 정 반대편으로 가고 가는데

당신 이쪽으로 가다가는 맨해튼 못 간다. 그런데 맨해튼에서 뭐 합니까?”

 

“난 목사인데, 오늘 저녁 7시에 설교를 해야 되는데 큰 일났다” 하니까

“큰 일났네, 큰 일났네.” 그러더니만

“그럼 날 따라 오라”고 그래요.

 

그래서 그가 갱인지 진짜 하나님이 보낸 사자인지 알 수가 없어요.

그러나 기도하니까 마음이 편안하기 때문에 그분을 따라가니까

기차에서 내려서 또 다른 지하철을 타고,

또 내려서 다른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지하철이 정지하니까 '여기 빨리 내리라'고 그래요.

 

그래서 내가 빨리 내리니까 손을 흔들고 그냥 가버려요.

그래서 지하철에 나와 보니까 맨해튼 33가 교회 입구에 딱 와 있어요.

그래서 내가 예배당에 들어가니까

막 “오늘 저녁에 OOO 목사가 설교하겠습니다” 하고 나를 소개를 해요.

 

그래서 내가 아무 사고 없는 것처럼 태연하게 가서 강단에서 설교했지요.

그것도 내 마음속에 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지하철 앞에 한국전에 참석한 용사가 타서

그렇게 선한 마음으로 나를 이끌어 줍니까?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셔서

우리를 위해서 모든 선한 일을 예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때 이후로부터 시작해서 저는 50년 동안 목회하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시마다 때마다 중요할 때는 예비를 해주셨어요.

 

이제는 어려운 일이 닥치면 저는 늘 마음속에

‘하나님 어디에 무엇을 예비해 놓으셨습니까?’

하나님이 예비한 것을 찾습니다.

 

꼭 하나님이 예비한 길을 열어 주세요.

 

그러므로 여러분, 어려운 일을 당하거든 당황하지 말고

이것을 이미 하나님 미리 아시고 길을 예비해 놓았다고 믿으십시오.

하나님이시여 예비한 길을 열어 주시옵소서. 예비한 길로 걷겠으니

나를 인도해 주시옵소서. 그 길을 제게 보여 주시옵소서!

그러면 하나님이 예비한 길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삶의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당황하지 말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의지하십시오.

 

당황하면 안 됩니다. 당황하지 말고

아무리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고 어려움이 다가와도

하나님이 피할 길을 예비해 놓았습니다.

 

하나님은 미쁘사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쯤에 피할 길을 내사 우리로 능히 감당케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 길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이삭을 바친 모리아 산은 앞으로 솔로몬 성전이 지어지게 될 장소가 됩니다.

성전의 핵심은 번제단입니다. 번제단은 십자가를 예표하기에 제일 중요합니다.

번제단은 어린 양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고백하는 장소입니다.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예표하고 있는 어린 양과 함께 번제단에서 죽어야 한다는 것이,

모리아 산의 사건이요, 성전이요, 십자가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전의 존재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성전의 존재 의미는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간 내가 어린 양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소중하게 느끼며 마음에 담고 있는 자기 자아를 죽여서

이삭이 없는 자기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이삭은 너무나 소중한 존재였기에, 자기 마음에서

하나님의 강력한 라이벌이 될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자기 마음 안에 있고, 하나님이 마음 밖에 계시는 상태를 죽여버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 마음 안으로 들어오시고, 이삭이 마음 바깥으로 던져지는 상태로 부활하게 됩니다.

이것은 십자가 사건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현장에서 여호와 이레라는 말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러한 본문을 보면 다소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여호와 이레는 ‘여호와의 산에서 여호와가 준비하신 것을 보게 되리라.’라는 뜻입니다.

 

이 말이 왜 굳이 이제야 등장하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삶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하시지 않은 것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죄악과 저주에 찌들어 있기에

본래 하나님께서 창조적이고 자발적으로 준비하신 것들을 볼 수 없습니다.

 

세상에 하나님께서 준비하시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을 개척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의 삶을 이루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죄와 타락만 없으면 준비된 곳이 에덴입니다.

우리가 여호와 이레의 삶을 산다는 것은, 준비된 에덴을 산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죄악에 찌든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에덴 바깥으로 나가서 살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에덴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십자가로 인도해 주시는 과정을 진행하십니다.

 

그 과정에서 준비하신 대로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준비된 본래의 에덴을 회복하여 여호와 이레의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 이레의 내용이 드러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 삶의 현장을 모리아 산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삭을 사랑하는 내가 죽을 때, 내 삶의 환경이 에덴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직장이 여호와가 준비하신 에덴이 되기를 원한다면

먼저 직장을 여호와의 산 모리아 산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모리아 산에서 벌어진 일은 바로 이삭을 죽이는 곳입니다.

이삭을 죽임으로써 지금 주어진 현장을 여호와의 산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삶의 현장을 여호와의 산(모리아 산)으로 바꾸면, 거기서 내가 죽으면,

하나님께서 창조적이고 자발적으로 준비해 놓으신 그 내용들이 현실로 보이고 나타납니다.

 

지금 내 삶의 현장 상태가 어떤지는 상관없습니다.

돈이 없습니다. 몸이 너무 아픕니다. 자녀들에게 문제가 많습니다.

배우자와 사이가 아주 좋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의 상태가 아주 많이 나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여호와 이레의 조건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내 몸이 놓인 자리에서 이삭을 바침으로써

주어진 상황을 여호와의 산 모리아 산으로 바꾸면 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을 때, 숫양의 뿔이 수풀에 걸린 것을 보았듯이,

우리의 삶을 모리아 산으로 바꾸면, 여호와가 준비하신 일들이 보이고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내 삶의 상황이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입니다.

배우자가 어떻다, 자녀가 어떻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상황이 어떻든지, 하나님이 창조적이고 자발적으로 보시기에 좋도록

내 삶을 위해 계획하시고 준비하신 것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여호와 이레는 아브라함의 삶에서, 새삼스럽게 단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쭉 진행되고 있습니다. 여호와 이레는 모든 사람의 삶에서 늘 준비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딴짓을 해서, 여호와 이레의 삶이 나타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이 나타나기만 하면 에덴은 이루어집니다.

첫 번째 여호와 이레는 에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위해 준비하신 현장에 이들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죄와 악이 있습니다.

죄와 악이란 빗나간 상태에서 말하고 행동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를 가장 빗나가게 하는 것은 어떤 현장에서든지

내 마음에서 가장 심각하고 가장 중대하게 여겨지는 이삭들입니다.

그 이삭들이 내 마음을 계속 빗나가게 만듭니다.

 

그 이삭들을 놓치거나 잃을 때 마음에서 너무 아까워서 견딜 수 없고 심지어 두렵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계속해서 나를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가게 하는 죄를 활성화 시킵니다.

 

죄가 활성화되면 하나님이 준비하신 에덴이 상실되었던 것처럼

여호와 이레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여호와 이레의 내용대로 살기 위해서는 내 마음에서 이삭을 죽여야 합니다.

이삭을 죽임으로써 그 현장을 여호와의 산, 모리아 산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삭을 죽이는 방법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가정에 있든 직장에 있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내 몸이 있는 현장을 모리아 산으로 바꿉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사장님의 칭찬, 승진, 월급 같은 것들입니다.

사장님의 칭찬이라는 이삭, 승진이라는 이삭, 월급이라는 이삭을

내 마음에서 신경 쓰는 동안에는, 직장에서 하나님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잊거나 잃어버리는 것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제가 훈련소에서도 잠을 안 자고 하나님을 생각하고 추구했던 것처럼,

직장에서도 하나님만을 추구하고 하나님께만 마음을 드리기 위해서는, 이삭을 죽여야 합니다.

 

사장님의 칭찬이라는 이삭, 승진이라는 이삭, 월급이라는 이삭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그러면 직장은 모리아 산이 됩니다. 그럴 때 뿔이 수풀에 걸린 숫양이 보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본문의 내용입니다.

 

하늘에는 나의 삶을 창조적이고 자발적으로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준비된 것들이 있습니다.

제가 경험한 바로는 정말로 하나님께 마음을 다 드리면 여호와 이레의 삶은 이루어집니다.

 

군대 훈련소에서도 하루 종일 군인기본훈련을 받느라

피곤해서 하나님 생각을 많이 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당시에, 하룻밤이라도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이 너무 무서워서

다른 훈련병들이 잠을 잘 때 일어나서 하나님을 찾고 추구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하나님을 찾고 잠깐 잠이 드는데

예닐곱 번을 카투사 비행대 마크를 보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카투사 부대에 배정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왜 날마다 미군 부대 배지가 보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관심도 없었고 그냥 꿈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몰빵한다’는 표현을 쓰는데 *올인

정말로 예수님의 십자가 붙잡고 하나님께 마음을 몰빵한다면

삶은 투 트랙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내 마음은 여호와 하나님만을 찾고,

내 삶의 환경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대로만 이루어져 나가게 됩니다.

 

하나도 내가 사는 삶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까지 여호와 이레를 오해했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들은 뽀얗게 먼지가 쌓여 있는데도,

몸으로 맞이하는 이 세상 삶을 얼마나 열심히 살고자 했는지 모릅니다.

 

그야말로 있는 힘을 다하면서 잘살아 보겠다고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이유조차도, 내가 삶을 이끌어 가는 주체로서 잘살아 보겠다고 찾았던 것입니다.

 

내가 이삭을 바쳐본 적이 없습니다. 가는 곳마다 이삭을 붙잡고 살았습니다.

하나님 아까운 줄 모르고 하나님을 내팽개쳤습니다.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이삭들을 붙잡고 그것들을 아까워하며

그것들을 잘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까지 동원했습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이 이 세상 삶을 위해 준비하신

여호와 이레의 내용물들까지 다 버리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한편 본문 12절을 보면 고개가 갸웃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고 하셨습니다.

 

전지전능하시고 불꽃 같은 눈으로 만인을 통찰하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당신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야 아셨다’고 하십니다.

어떻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의아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속을 들여다보지 못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입으로 ‘하나님을 좋아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유일한 좋음이십니다.’

라고 고백하고 찬양하고 심취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내 마음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소중한 이삭들을 죽이지 않으면

하나님을 아까워한다는 말은 완전히 공치사가 됩니다.

말로만 하는 하나님 사랑은 의미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서 장작더미를 쌓고 이삭을 결박하여 죽이고자 했습니다.

마음에서는 이미 이삭을 죽였습니다. 그렇게 할 때 여호와의 산 모리아 산에서

뿔이 수풀에 걸린 숫양을 봅니다.

 

▲우리도 마음에서 이삭을 죽일 수 있어야 합니다.

가정에도 이삭이 있고, 직장에도 이삭이 있습니다.

심지어 부부관계에서 이삭은 자존심일 수 있습니다.

남편으로서의 자존심, 아내로서의 자존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반항하지 않고 거부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 마음에서 이삭을 죽일 때도,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남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죽이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서 죽이는 일이기에, 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죽이고 안 죽이는 것은 내가 하기에 달린 것입니다.

 

이삭이라고 여겨지는 대상은, 내 마음에서 가장 비중이 크다는 점에서, 원수일 수도 있습니다.

내 마음에서 죽이는 일이기에 원수를 백번 천번 죽여도 원수는 나에게 반항하지 않습니다.

 

지금 내 마음에서 비중이 크게 자리 잡고 있는 대상이 이삭입니다.

지금 주어진 삶에서 이삭을 죽이는 현장을 여호와의 산 모리아 산으로 바꾸시기를 바랍니다.

 

그 방법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이삭을 죽이면

그 자리가 여호와의 산 모리아 산이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삶의 현장에서 이삭을 죽일 때마다

여러분의 삶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창조적으로 준비하신 여호와 이레의 창고로부터

삶의 내용들이 나타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현장이든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이삭을 죽일 수 있어야 합니다.

 

가장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이 없어지면 너무 두려워하는 것보다,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릴까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더 큰 것이

여호와 경외입니다.

 

훈련병이 잠을 안 자고 하나님을 찾듯이 그렇게 하나님을 찾는다면

여러분의 삶은 잃어버렸던 에덴이 회복되고,

그 에덴 안에서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들로만 꽉 찬 삶이 진행되어 갈 것입니다.

 

......................................

 

 

 

♣내가 만나야 할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 (펀 글)

 

제 전영*목사 가 중학교 2학년 때,

저희 아버지께서 개척교회를 하시고 계셨는데

그 때 형이 고등학교 1학년, 동생이 초등학교 5학년이었습니다.

 

당시 한참 크는 그래서 교육비, 양육비가 많이 드는 아들 셋을 데리고

개척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결단이었겠습니까?

주변 사람들이 다 말렸어도,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기에, 부모님이 개척을 했습니다.

 

그런데 개척 후 3년 가까이 성도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3년 가까이를 거의 끼니를 굶었습니다.

끼니를 굶는 거야 그냥 참으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녀들이 학교를 가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자녀들이 매 번 수업료와 보충수업비, 교재비 등을 달라고 해도

부모님은 아무 것도 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우리 세 형제는 매 번 교무실에 불려 가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형이 고등학교 3학년 때, 어느 날 저녁에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이제 제가 더 이상 학교를 못 다니겠습니다!

이러다가 우리 3형제가 다 학교를 못 다닐 것 같으니

제가 지금 학교를 휴학하고 막노동판이라도 가서

돈을 벌어 동생들을 교육시키겠습니다.”

 

한편으로는 대견스러운 말 같지만

이 말을 들으면서 부모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래서 어머니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아들아! 조금만 참아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역사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형은 그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려면 벌써 역사하셨습니다.

제가 학교를 관두고 싶어서 관두는 것이 아니라

등록금을 계속해서 못 내서, 학교에서도 더 이상 나오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니 제가 당장 학교를 관두고 돈을 벌겠습니다!”

 

어머니가 계속해서 말리다 되지 않아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내일까지만 기다려 보자!

내일까지도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으신다면 네 마음대로 해라”

 

그리고 부모님이 밤새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새벽예배를 인도하는데,

우리 교회에 가끔 새벽예배만 드리던 성도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그 날 따라 어떤 응답을 받았는지

예배를 마치고 가시면서 강대상에 ‘목사님 자녀들 학비로 쓰십시오.’ 라고 적어서

작은 헌금을 드리고 갔습니다.

큰 액수는 아니었는데, 딱 형의 밀려 있는 등록금을 낼 수 있는 액수였습니다.

 

그 날 아침, 형에게 부모님은 그 봉투를 통째로 주면서 등록금으로 내라고 했습니다.

그제야 형이 놀라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후에 그 분이 형의 고등학교와 대학교 학비의 전액을 지원하는 일을 했습니다.

미리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오늘 우리가 만나야 할 하나님이 바로 이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입니다.

저 역시 처음 교회를 개척할 때 아무런 준비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확신을 가지고 먼저 제가 섬기던 교회의 담임목사님에게

‘언제까지 개척을 하겠습니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떤 건물로 가야 할지

아무 것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일단 하나님을 믿고 말했습니다.

 

담임목사님에게 말하면서도 사실 많이 조심스러웠습니다.

윗사람의 입장으로서는 기분이 나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담임목사님의 마음을 감동시켜 주셔서

오히려 이렇게 결단하는 것을 기뻐하시고 축복하게 해 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갈 곳을 열어주시고,

교회를 이 지역에 세우게 하셨습니다.

 

개척의 과정에서도 아무런 준비된 것이 없었지만

매 순간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여기까지 오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만난 하나님이 바로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었습니다.

물론 이제 개척을 한 후에 처음이기에 힘든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 또 이곳에 은혜를 베푸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미리 모든 것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불안해하고, 염려하고, 걱정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여러분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를 어떻게 여기까지 키웠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해 주셨고, 하나님이 준비해 주셨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여러분이 다시금 부르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의 모든 것을 준비하셨던 그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분 가운데서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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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성경을 원전에 가장 가깝게 번역하는 KJV 성경도

창22:14절의 ‘여호와이레’ 라는 말을 ‘오늘까지 여호와의 산에서 그것이 보이리라’ 로 번역했죠.

to this day, In the mount of the LORD it shall be seen. KJV


다른 영어성경들은 it shall be provided 로 번역했는데, 의역한 것입니다.

‘여호와이레’라는 말은, ‘여호와-보신다’의 미완료수동태인 거죠.